지훈은 나를 데리고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다.
우리는 초시간적인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흐린 색채와 어두운 우울에 넘친,
벌써 겨울의 이른 입김을 느끼게 하는 11월 초의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나는 고단해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훈을 엿볼 의도는 없었으나 그걸 하고 말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려는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얼굴을 보았다.
지훈의 애정이 넘친 그 시선은
매우 강렬한 감정을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쩌면 준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고
지금이야 말로 가장 적당한 기회일거라고.
미사리에 도착하자 지훈이 나를 깨웠고
우리는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허브티를 마셨다.
지훈은 완전히 자기를 누르고 나에게 모든 배려를 하며
도시에서의 생활에 관해 정겨운 대화를 주고받고는 정당하게 보이는 이유를 끌어내어
내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지훈 다운 리더쉽이었고
사람들이 먼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었다.
나는 비난을 각오했지만 조금은 공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조심스러운 표현을 써서 성의 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지훈이 알 수 없는 짐승을 바라볼 때와도 같은
냉담하고도 인내성 있는 우수를 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주의 깊게 긴장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의 이야기는 결코 쉽게 시작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일단 시작되고 나서는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끝맺었고 잠깐 흐르는 침묵을 폭풍전야와도 같은 심정으로 견뎠다.
지훈은 동정에 찬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짧게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그 소리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연희야, 내가 장담하는데 그 사람은 쑈하고 있는 거야.
이 저주의 소리를 다른 어떤 사람이 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따귀를 올려붙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지훈이었다.
지훈의 태도는 완전히 냉정했고
나에게 준 타격에 대해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내가 뭔가 잘못 이야기 한 부분이 있지 않나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미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를 구하는 무가치하고 소용없는 짓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지훈의 말은 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너는 그 사람의 어떤 면을 사랑하니?
지훈이 의혹에 찬 얼굴로 말했다.
-사랑의 가치를 어떻게 이유로 풀이해낼 수 있겠니?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우수를.. 그러니까 상처를 사랑하는 것 같아.
절반의 기능 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나와 꼭 닮은 다른 절반을 만난 기분.
나는 지훈의 영혼에 황량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을 느끼며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연희야, 가짜 우수도 이 세상에는 있어.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는
우수는 다만 표면에 떠 있고 꾸민 의도와 감상주의를 나타낼 뿐이야.
나는 지훈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침착하고 싶었지만 허둥대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의 폭탄선언을 듣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내가 신뢰해 마지않는 친구로부터.
게다가 나는 지훈의 반응에서 하등의 저항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지훈의 모든 행동들이 몹시도 고독하고, 어둡고, 위대하고, 태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주눅들어 있는 나 자신에 분격해서 약간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너는 나에게 실망했을테지. 하지만 너를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는 않아.
나는 네 말을 동정이나 격려나 충고 중에서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랬더니 지훈은 마치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듯이
다시 조용하고 피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실 무척 실망스러워. 충고는 이제부터 할건데 명쾌하고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가치 없는 일이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나는 나의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너무나 지나친 결론에
내면적인 한계나 법칙을 넘어선 어떤 붕괴를 일으키며 추락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지훈이 작별인사를 했지만
그 반감에 넘친 표정은 마치 공공연한 전쟁선포와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불시에 입은 총상에 신음하듯 깊게 한숨을 쉬고 말 없이 내려버렸다.
나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실을 서성거렸다.
경계하는 것에 대한 이 불가사의한 친근함은 무엇일까.
나는 의혹의 유인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주마등처럼 맴을 도는 지훈의 여러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냉동고에서 보드카를 꺼내 글라스에 반쯤 따라 꿀꺽 삼켰다.
그렇게 두 번을 하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번지는 알콜의 기운이 온 몸을 지져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나의 의식은 곤혹 가운데 가물거리다가 곧 꺼져버렸다.
일요일 아침 나는 일찍 눈을 떴으나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운 채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준호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생각의 유령에 다시 사로잡혔다.
그리고 불안정성의 고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갑자기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나를 지배하려 했다.
준호는 월요일에나 올 것이고 시간은 더디 흐를 것 같았다.
나는 다음 주 수업주제인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은 빨리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기계적 인내심을 가지고 필요한 사이드 지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가며 메모했다.
오후가 되었다.
나는 차라리 시내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밖으로 나가 얼마 동안인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웃음소리와 도시의 소음을 들었다.
제 몸을 태운 낙엽들이 거리의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밟히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저녁이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준호를 만날 일이 점점 더 난감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때에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반가움은 금새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가 떨면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희씨....
-걱정했었어요.
준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집이에요?
-아니요. 오피스텔에 왔어요.
-괜찮은 거에요?
-....
준호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픔이 내 의식을 뒤덮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나는 시내에서 과속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에 가득 찼고 불길했고 우울해졌고 또 동시에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동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에 멈췄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였다.
나는 벨도 누르지 않고 직접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은 켜 있지 않았고 방 안은 깜깜했다.
침대 끝에 앉아있는 준호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젖은 검은빛의 촘촘한 그물에 걸려
자신과 모든 숙명에 대해서 울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나는 준호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준호의 손을 감싸 쥐고 올려다보았다.
준호는 정말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나에게 말해줄 수 있어요?
준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좀 하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재촉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며 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나를 바라보는 준호 얼굴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빛에 따르는 그림자와도 같은 무엇이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굶주린 고아와도 같은 준호의 모습은 이상하게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켰다.
나는 심한 갈증처럼 사랑이 하고 싶었다.
-지금 날 안아줄래요?
준호는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히더니 급하게 끌어안고 격렬하게 거의 무섭게 키스했다.
거대한 어떤 열망이 준호와 나를 휩쓸었다.
우리는 서로의 알몸을 안아 애무하고, 거기에 입술을 대고, 수 많은 감촉에 위로받으면서
육체에 담긴 정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미숙함에 대해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신경마다 꿈틀거렸고, 세포마다 경련했고, 감정마다 불붙으며 폭발했다.
밤의 장막이 우리 두 사람의 우수를 가릴 때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구제하며 육체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다.
우리는 초시간적인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흐린 색채와 어두운 우울에 넘친,
벌써 겨울의 이른 입김을 느끼게 하는 11월 초의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나는 고단해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훈을 엿볼 의도는 없었으나 그걸 하고 말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려는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얼굴을 보았다.
지훈의 애정이 넘친 그 시선은
매우 강렬한 감정을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쩌면 준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고
지금이야 말로 가장 적당한 기회일거라고.
미사리에 도착하자 지훈이 나를 깨웠고
우리는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허브티를 마셨다.
지훈은 완전히 자기를 누르고 나에게 모든 배려를 하며
도시에서의 생활에 관해 정겨운 대화를 주고받고는 정당하게 보이는 이유를 끌어내어
내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지훈 다운 리더쉽이었고
사람들이 먼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었다.
나는 비난을 각오했지만 조금은 공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조심스러운 표현을 써서 성의 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지훈이 알 수 없는 짐승을 바라볼 때와도 같은
냉담하고도 인내성 있는 우수를 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주의 깊게 긴장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의 이야기는 결코 쉽게 시작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일단 시작되고 나서는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끝맺었고 잠깐 흐르는 침묵을 폭풍전야와도 같은 심정으로 견뎠다.
지훈은 동정에 찬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짧게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그 소리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연희야, 내가 장담하는데 그 사람은 쑈하고 있는 거야.
이 저주의 소리를 다른 어떤 사람이 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따귀를 올려붙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지훈이었다.
지훈의 태도는 완전히 냉정했고
나에게 준 타격에 대해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내가 뭔가 잘못 이야기 한 부분이 있지 않나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미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를 구하는 무가치하고 소용없는 짓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지훈의 말은 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너는 그 사람의 어떤 면을 사랑하니?
지훈이 의혹에 찬 얼굴로 말했다.
-사랑의 가치를 어떻게 이유로 풀이해낼 수 있겠니?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우수를.. 그러니까 상처를 사랑하는 것 같아.
절반의 기능 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나와 꼭 닮은 다른 절반을 만난 기분.
나는 지훈의 영혼에 황량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을 느끼며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연희야, 가짜 우수도 이 세상에는 있어.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는
우수는 다만 표면에 떠 있고 꾸민 의도와 감상주의를 나타낼 뿐이야.
나는 지훈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침착하고 싶었지만 허둥대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의 폭탄선언을 듣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내가 신뢰해 마지않는 친구로부터.
게다가 나는 지훈의 반응에서 하등의 저항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지훈의 모든 행동들이 몹시도 고독하고, 어둡고, 위대하고, 태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주눅들어 있는 나 자신에 분격해서 약간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너는 나에게 실망했을테지. 하지만 너를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는 않아.
나는 네 말을 동정이나 격려나 충고 중에서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랬더니 지훈은 마치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듯이
다시 조용하고 피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실 무척 실망스러워. 충고는 이제부터 할건데 명쾌하고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가치 없는 일이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간단해. 하루 빨리 그 사람과 헤어져라.
나는 나의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너무나 지나친 결론에
내면적인 한계나 법칙을 넘어선 어떤 붕괴를 일으키며 추락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지훈이 작별인사를 했지만
그 반감에 넘친 표정은 마치 공공연한 전쟁선포와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불시에 입은 총상에 신음하듯 깊게 한숨을 쉬고 말 없이 내려버렸다.
나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실을 서성거렸다.
경계하는 것에 대한 이 불가사의한 친근함은 무엇일까.
나는 의혹의 유인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주마등처럼 맴을 도는 지훈의 여러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냉동고에서 보드카를 꺼내 글라스에 반쯤 따라 꿀꺽 삼켰다.
그렇게 두 번을 하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번지는 알콜의 기운이 온 몸을 지져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나의 의식은 곤혹 가운데 가물거리다가 곧 꺼져버렸다.
일요일 아침 나는 일찍 눈을 떴으나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운 채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준호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생각의 유령에 다시 사로잡혔다.
그리고 불안정성의 고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갑자기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나를 지배하려 했다.
준호는 월요일에나 올 것이고 시간은 더디 흐를 것 같았다.
나는 다음 주 수업주제인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은 빨리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기계적 인내심을 가지고 필요한 사이드 지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가며 메모했다.
오후가 되었다.
나는 차라리 시내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밖으로 나가 얼마 동안인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웃음소리와 도시의 소음을 들었다.
제 몸을 태운 낙엽들이 거리의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밟히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저녁이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준호를 만날 일이 점점 더 난감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때에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반가움은 금새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가 떨면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희씨....
-걱정했었어요.
준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집이에요?
-아니요. 오피스텔에 왔어요.
-괜찮은 거에요?
-....
준호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픔이 내 의식을 뒤덮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나는 시내에서 과속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에 가득 찼고 불길했고 우울해졌고 또 동시에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동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에 멈췄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였다.
나는 벨도 누르지 않고 직접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은 켜 있지 않았고 방 안은 깜깜했다.
침대 끝에 앉아있는 준호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젖은 검은빛의 촘촘한 그물에 걸려
자신과 모든 숙명에 대해서 울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나는 준호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준호의 손을 감싸 쥐고 올려다보았다.
준호는 정말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나에게 말해줄 수 있어요?
준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좀 하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재촉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며 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나를 바라보는 준호 얼굴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빛에 따르는 그림자와도 같은 무엇이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굶주린 고아와도 같은 준호의 모습은 이상하게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켰다.
나는 심한 갈증처럼 사랑이 하고 싶었다.
-지금 날 안아줄래요?
준호는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히더니 급하게 끌어안고 격렬하게 거의 무섭게 키스했다.
거대한 어떤 열망이 준호와 나를 휩쓸었다.
우리는 서로의 알몸을 안아 애무하고, 거기에 입술을 대고, 수 많은 감촉에 위로받으면서
육체에 담긴 정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미숙함에 대해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신경마다 꿈틀거렸고, 세포마다 경련했고, 감정마다 불붙으며 폭발했다.
밤의 장막이 우리 두 사람의 우수를 가릴 때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구제하며 육체 안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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