兄死娶嫂
4부
솨아아-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날이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따스함이 완연한 계절.
봄을 시기하는 꽃샘추위가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캠퍼스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봄기운은-
오고 가는 학생들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후~ 춥네 조금..
아직 저녁 되려면 멀었는데 일교차가 조금 있나봐...
소녀는 쌀쌀한 느낌에 옷 매무새를 여민다.
에메랄드 색의 상쾌한 가디건을 걸쳤으며
그 안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빅토리아 블루의 얇은 원피스를 입었다.
무릎에서 한뼘 정도 올라오는 예쁜 원피스.
하얀 살결을 이따금 간지럽히는 봄바람에
소녀의 짧은 스커트가 가볍게 펄럭인다.
적당한 키에 슬림한 체형.
소녀는 마치-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이미지였다.
칠흙처럼 검고, 윤기가 흘러내리는 긴 생머리.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촤아아-
서늘한 바람의 선율에 몸을 맡기며.. 흩날린다.
3월 초순.
아직 개강한지 2주일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 맘때면 각 과마다 개강총회를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
선배와 후배가 얼굴을 알아가고 화합한다는 취지로~
매년 펼쳐지는 봄철 체육대회와 신구 대면식 행사.
이제 갓 입학해서 학교 행사와 일정을 모르는 새내기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과에서 벌이는 여러 행사에 열심히 참여했다.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과 자율에 맡기는 분위기지만
소녀가 속해있는 과는 조금 강제적으로 참여를 독려하는 눈치다.
그래도 그것에 딱히 불만을 가지는 학우들은 드물었다.
지금은 오후 여섯시를 조금 넘긴 시각.
개강 첫주부터 바로 체육대회가 있을 것이라고 선배들이 공지를 띄웠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제대로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려면 어떠랴.
어느새 정보를 잘 캐치하는 부류는 어디에서든 따로 있는 법.
착실하고 말 잘듣는 후배들이 교내 작은 운동장 공터에 모여있다.
캠퍼스가 커다란 산을 깎아 산중턱에 세워져 있다 보니
이렇게 일부의 건물과 시설들은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으니, 날도 금방 추워진다.
......
그렇게 얇은 옷차림도 아닌데, 쌀쌀하네.
이제 슬슬 끝날 때 안되었나..?
소녀는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선배와 동기들이 하는 피구 경기를 지켜본다.
오늘 하는 종목은 세가지 뿐이었다.
피구, 여자 발야구 그리고 단체 줄넘기.
줄넘기는 체육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례행사로
그때 만큼은 과대표 이하 거의 모든 인원이 참가해서 뛴다.
피구 종목도 남자 따로, 여자 따로 그리고 남녀가 섞여서도 뛰는데..
소녀는 사실 아까전까지-
여자 피구와 발야구를 열심히 뛰었다.
운동신경이 좋고 날렵한 아이라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역시 뭐든지 열심이라며~
언니 오빠들의 이쁨을 톡톡히 받았다.
그런데 왼쪽 손목에 공이 부딪치며 찰과상이 생겨버렸다.
본인은 거듭해서 괜찮다며 우겼지만 안될 말이다.
몸이 다쳐서는 어떤 행사도 참여할 의미가 없다며..
몇몇 선배 언니들이 다독여주는 바람에 아쉽지만 옷을 갈아 입는다.
그 와중에
다정하게 챙겨주는 언니들의 보살핌에 작은 감동도 느낀다.
후훗-
가져온 체육복을 가방에 고이 집어넣고
원래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침 작은 운동장 옆에 여자 기숙사가 있어서
소녀처럼 땀으로 몸이 젖은 여학생들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는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은 환경인지~!
줄넘기도 뛰고 싶었는데, 선배들은 그것도 말렸다.
옷도 갈아 입었으니 얌전히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다.
별수 있나.. 걱정되서 가만히 있으라는 건데..
소녀는 부상을 입은 일부 학우들과 함께 운동장 관중석을 정리했다.
한쪽에서는 꺄악~~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모두들 모여 줄넘기를 진행중이다.
이제 곧 체육대회가 끝날 시간이구나.
힐끗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서둘러 자리를 치운다.
"뭘 일일이 청소까지 하고 있냐~
가자! 끝났당~"
"수고했어~ㅎㅎ 다 끝난 거야?"
"어~~ 이제 옷 갈아입고 밥 먹으러 간대~"
"어디로?"
"학교 정문 앞에 고깃집~~
다같이 그리루 몰려간대~ 호호호"
"고기 먹으러 간다구??"
"ㅋㅋ 그렇다는데?
몰라~ 가서 회장 오빠한테 물어봐"
소탈한 성격의 친구 은서가 다가와 정리를 거든다.
청소를 더 하려는 혜지의 팔을 억지로 붙잡고, 대충 하라며 잔소리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한적한 운동장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 ...
다들 떠나고 텅 비어있는.. 저 멀리 스탠드 석에
혼자 묵묵히 청소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저 사람은 뭐지~?
특이하네...
스탠드 상단부는 하늘색 천막으로 덮여 있다.
그 아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비리비리한 체격의 남자가 하얀 마스크를 쓰고 청소중이었다.
머리에는 NY(뉴욕 양키즈) 로고가 있는 모직 캡을 쓰고 있다.
‘헤에~~...’
혜지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재밌게 말하면- 조금 수상한 사람으로도 보였다.
저기에 검은 선글라스만 끼면...
영락없는 미국식 코믹 카툰의 도둑 캐릭터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패션은 어떤가?
회색 트레이닝..
이라 표현하면 왠지 세련되어 보여서 아니고~
허름한 옛날 츄리닝 바지에 촌티나는 박스티를 걸쳤다.
그나마 신고 있는 신발마저 못봐줄 정도라면 정말 안습인데,
유일하게 하얀 운동화는 깔끔한 아디다스를 신고 있다.
뭐지 진짜~?
푸흡... 재밌는 사람 같은데.
궁금함이 밀려오자..
어서 내려가자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아랑곳 없이
혜지는 물끄러미~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런~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하나도 안보여..
우리과 사람은 맞겠지.
선배일까?
그런데 재밌게만 보던 혜지의 눈동자가 커진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파란색 종량제 봉투를
돌돌돌~ 말아서 들고 있었다.
게다가 낡은 알루미늄 집게를 들고 담배꽁초를 줍는다.
하아..
특이하고 재밌는 사람이구나~
라고만 생각해던 혜지는 그 짧은 순간-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감동을 느꼈다.
쫌.. 멋지다..
소녀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남 몰래 헌신하는 선행상 표창감이 따로 없었다.
혹시..? 휘익 고개를 돌려본다.
다른 이들은 어쩌고 있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 각자 차에 나눠타고 어서 내려갈 생각뿐인데..
아니 시간도 늦었고 지금으로썬 그게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이 구역은 내가 완벽하게 청소한다’는 신념이라도 가진 것 같았다.
혹시 환경 미화원은 아닐까?
과 체육대회 하는데
동네에서 쓰는 종량제 봉투까지 들고 오는 것부터~
누가 있던 없던~
조용하게 청소를 여유로이 즐기는 저 모습.
다들 형식적으로 귀찮아하는 마무리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점에서,
그 짧은 장면의 임팩트는-
소녀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문득 저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야~ 너 뭐해? 얼른 가자니까”
“그래 혜지야.
성호 오빠 차 타고 갈거니까~ 얼른와. 가방 챙겨놨어”
“아... 나 잠깐만..
뭘 가져갈게 있어서..”
“뭘 가져오니? 니꺼 가방 내가 들고 있는데?”
“..... 어? 그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이 보채니 자리를 뜬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사람 우리과 소속은 맞는 걸까?
궁금함에 따라가면서 은서에게 묻는다.
[은] “그런 사람이 있어? 나는 못봤는데~”
[혜] “왜 못 봐?
관중석 맨 위에 딱 한 사람 있었는데”
[은] “뭔 소리야~ 아무도 없던데 혼자 헛것을 보고 그래?”
[정] “하하~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납량특집 분위기 되잖아~
혜지야,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데?”
과 회장을 맡고 있는 성호의 차에 올라탄 세 여학생.
뭘 먹을까 이런 저런 얘길하던 차 안에서
갑자기 혜지가 용기내어 두 친구에게 물어본다.
털털한 성격의 은서는 뭔 생뚱맞은 소리하냐는 반응인데~
차분한 모습의 정인은 호기심을 가져주었다.
“그러니까.. 아~~ 뭐였지?
검은 박스티 입었고.. 회색으로 된 모자 눌러 쓰고..”
“엇? 혹시~ 그거..
아니, 그 사람~
회색 츄리닝 바지 입지 않았어?”
“어?! 맞아!”
“ㅎㅎ 그 사람.. 우리과 선배야”
“알아??”
정인이 웃으며 알고 있다는 눈치다.
그러자 조용히 여동생들의 대화를 듣던 성호도 끼어든다.
[성호] “민규 아닌가?”
[정인] “그 선배 이름이.. 민규예요?”
[혜지] “선배님, 그 분 아세요 누군지?”
“알지... 박민규라고 있어. 조용조용한 친군데..
평소에 눈에 잘 안띄고 다니는 애라서~”
“그래요??
인상착의만 얘기했는데 바로 아시네..”
“하하~ 어린 애들이 인상착의라고 표현하니까
무슨 범죄자 같잖어 ㅋㅋ
그놈 맨날 그 옷만 셋트로 입고 다녔어 옛날에.
지금도 뭐~ 옷 잘입는건 아닌데...
전에는 과방에서 그 팻~숀으로 죽치고 살았지”
“그래요..
이름이 박 민 규 라고요..?”
“응. 이제 3학년 됐나? 나도 모르겠다”
“에이~ 오빠는 4학년 선배가~
후배 학년도 모르시면 어뜨케해요? ㅎㅎ”
“ㅋ~ 모를 수도 있지~ 우리 과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글구 민규는 쫌..
뒷담화처럼 하는 말 같아서 미안한데~
약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 애야”
“아웃사이더?”
“엉~ 은둔형 외톨이~ 같은.. 느낌이라 할까 ㅎㅎ
애는 착해~”
“더 얘기 좀 해보세요. 궁금해요”
“혜지 너~ 쿡쿡..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아, 아니야! 관심 있긴~
그냥 하도 특이하니까 궁금함이 생기잖아...”
“하하하하~!
그런가... 호기심이 생긴다라..”
“응, 아니.. 네!
다른 특징은.. 없는 분이예요?”
“특징이라든가~ 그런게 없는 놈이야.
워낙 조용하게 다니니까..
지난 학기에 복학하고 잘 적응 못하는 것 같던데..
이번 학기에 또 등록했을 줄은 몰랐구먼”
혜지와 성호 둘이서 문답을 주고 받는데
조용하던 정인이 끼어들었다.
“오빠는 그래도 관심을 갖고 있나 봐요. 그 선배한테”
“나야 뭐~ 회장이니까 알 수 밖에 없지..
조용조용한 애들도~ 결국은 어디선가 얘기가 다 들려오거든”
“흠~ 하긴 그래요..”
“왜? 가서 너희들이 한번 말 걸어봐봐”
“에에? 저희가 왜요..?”
“은서 너 말고~ 짜식아~ㅎㅎ
혜지! 니가 관심 있어하니까 직접 인사해보든지”
“예엣.. 저;;
저도 그렇게 궁금한 거는 아니예요...”
“호호- 얘 솔직하지 못하네.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봤어, 여태?”
“맞아~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너는~~
거의 남자들 얘기 하지도 않자나!”
“... 내가 언제? 너희들 말 지어내지마~”
[성] “호오~ 혜지~
이제보니 그런거야~~??”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는데
혜지는 세 사람이 동시에 짖궂게 캐묻자,
금새 얼굴이 수줍게 벌개져 버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수상해 보인다.
-
가장 친한 절친 조은서와 이정인도 이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무난한 인상이 풋풋한 스무살 아이들..
그런데 어여쁜 이 두 여학생은 혜지를 일컬어-
꽃중의 꽃은 서혜지라고 인정하고 있었으니..
혜지는 올해 신입생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이다.
늘씬한 몸매에 하얗고 고운 피부.
키는 평균이지만 비율이 워낙 좋아서 팔 다리가 길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2월달 OT에서 혜지의 실물을 본 선배들은
서로 내가 먼저 찜했다고 이미 갖은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물론
순수하게 호기심을 갖고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흑심을 품고, 그 얼굴과 몸매에 입맛을 다시는 이들 또한 있었다.
성격은 호기심이 많고 무척 여성스럽다.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며
깨끗한 인상이 사랑스럽고.. 웃는 얼굴이 이쁘다.
대체로 주위 사람들에게 싹싹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갓 스무살이 된 나이면 먼저 이성에 관심이 충만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호기심은 혜지에게는 예외인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 우등생이었던 만큼~
대학에 와서도 공부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보인다.
오죽하면 첫 번째로 삼은 목표가
1학기 성적에서 과 1등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자신감도 충만했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대학생활에 적응도 하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점을 받아야지.. 신경을 많이 쓰는데
하물며 이 아이에게-
남자친구란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갑내기 1학년 아이들은 그냥 친구일 뿐이었고
외모가 멋진 남자 선배들을 보아도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남자를 보는 기준은 있다.
남자든 여자든 공통적인 것인데-
그 사람의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이었다.
군인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엄격하게 가정교육을 받은 결과일까.
외모란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니...
결코 사람을 완전하게 겪어보기 전까지는 섣불리 판단 말아라.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서 인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였고
그 덕분인지.. 아직 어린 나이에도,
사람을 여간해서는 외모로 속단하지 않는 그릇을 갖추었다.
학교에 입학해서 여기저기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그러면서도 성적 관리도 관심을 가지려는,
누가 보아도 우수한 학생의 귀감이 될만한 아이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가...
생각지도 못하게 민규의 순간적인 모습만을 우연히 보고~
본인 스스로가 놀랄 만큼
강한 호기심을 가지는 지금의 기현상은..
본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
그 다음주 수요일.
혜지가 조용히 교양 강의를 듣고 있다.
이 수업은 1,2학년이 들을 수준이 아닌..
고학년을 위한 무려 3학점짜리 교양 수업인데 배짱도 좋다.
사실 야심차게 등록했지만
혜지는 그렇잖아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휴~ 끝났다... 살았어.
으응?
친구 은서가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혜지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싱긋~ 웃으며 반긴다.
자꾸 급히 할 얘기가 있다며
거대한 홀 한 가운데 있는 동그란 원형의 대리석 의자로 앉혔다.
“어서 이리좀 와. 정보를 캐왔다구~!”
“뭘 말이야??”
“얘는~ 전에 그 수상한 사람 말이얏”
“수상한 사람.. 이라니?”
“아~~ 답답~하네~ 서혜지!
뉴욕 양키즈!! 몰라??”
“... 아!!..”
잊고 있었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잊혀질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혹시 모르지..
이렇게 누군가 와서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계속 찾아다녔을지도 몰라..
가볍게 웃는다.
얘는 참 오지랖도 넓은 애야..
속으로 친구를 생각하며 웃었다.
물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고, 정말 친구를 이뻐하는 마음에서다.
혜지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은서와 마주 앉았다.
그래~
나 별로 관심은 없지만~ 너 성의를 봐서 들어줄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다.
헤에...
수업만 조용히 듣고 사라지는 잠수형 타입이라고 하더니..
얘는 어디서 이렇게 자세하게 알아 왔는지?
은서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근조근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여자친구는 현재 없으며 1학년 때 한 두명 있었다는 정도.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을 매우 꺼리며 소심한 성격.
착하기는 하나 부끄럼을 엄청 타고 체력이 부실...
학업 성적은 4학기 통틀어 평균 1.7학점 정도.
잠깐, 뭐라고?
일쩜칠..?!?
소녀는 귀를 잠시 의심한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 모 선수의 전성기 방어율도 아니고..?
조그맣게 입을 헤~~ 벌리고 넋이 나간 얼굴이다.
끄음..
사람이 기초 인성이 제일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성적이.. 어느 정도 기본은 되어야지..
좋게 보았던 이미지가 잠시 스르르~ 흔들리는 기분이다.
에이!
그래~ 뭐 아무렴 어때?
혜지는 친구의 작은 등을 가볍게 탁탁 두드린다.
“애썼어! 쫘~식~
알아오느라고~ 수고 많았당..”
“어떠냐. 유익한 정보지? 후후”
“풋~ 뭐가 유익해~
내가 언제 이런거 알아봐 달랬어?”
“헐~ 요것이...
내가 기껏 여기저기 언니들한테 물어서 알아온 고급 정본데~?”
“..... 얼마나 많이 들쑤시고 다닌 거야..?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묻는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ㅅ=)...
아.. 고리타분해...
알따 짜식아~
내가 쓸데없는 고생만 했구나~ 엉엉 ㅠㅠ”
“ㅎㅎ 아니야. 수고했어~
가자~ 밥 먹으러”
“어디로..?”
“오늘 수업도 다 끝났으니까~ 밖에 나가서 맛있는거 사줄게”
“우왓!~~ 정말이지? 호호호”
킥.
본인도 아직 스무살 밖에 안된 어린 애기라고 생각하지만
붙임성 좋고 귀여운 친구는 더 애기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쁜 두 여학생은 손을 꼭 붙잡고 정류장으로 내려갔다.
드넓은 아스팔트 언덕 좌우로 멋진 가로수길이 잘 가꾸어져 있다.
산들거리는 봄 바람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부낀다...
은은한 멜로디를 중얼거리며 언덕을 내려오는 두 사람.
앗?
혜지와 은서는 때마침 교양학부 건물에서 나오는 일행과 마주친다.
몇명의 눈에 익숙한 여자 동기들과..
최근 신입생에게 인기 만점인 훈남 오빠의 무리였다.
[혜] “안녕하세요~?..”
“어~ 얘 누구였더라..?”
[친구들] “혜지요!~~ 혜지 몰라요 오빠? ㅋ"
“혜지라는 애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아냐? 하하”
“호호~ 아직 모르시는구나~
얘 우리 1학년 과대표라구요~”
“어, 그래?
남자가 보통 과대 하는거 아니었나?”
“칫~ 아니거든요~ 전통적으로 그래온 모양이긴 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서혜지라고 합니다..”
“아- 그래... 만나서 반갑다 혜지야..”
“어, 오빠.. 우리랑 있을 땐 안그러다가
혜지를 보니까 갑자기 왜 얼굴 빨개지죠?”
“..... 뭐... 내가 어디가 빨개져?
이 녀석들이 혼날라구~~”
“호호호”
동준은 혜지를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속으로 적잖게 놀란다.
얼굴은 마냥 순하게 생겼는데...
이런 가냘퍼 보이는 애가 반장이라니?
과대표를 입학하자마자 맡았다는 것은...
입학 당시의 성적이 꽤 우수해야함을 의미하며,
또한 지도 교수님을 비롯-
여러 교수님들에게 좋은 평판을 두루 얻어야 하는..
문자 그대로 ‘검증된 모범생’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웬만큼의 리더쉽도 조금이나마 갖춰야한다.
동준은 얌전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엄친딸이라는 혜지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보였다.
흠~
생긴건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부잣집 딸처럼 생겼는디...
근데 이쁘긴 이쁘다.. 참..
은서를 비롯~ 혜지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어느새 동준의 곁으로부터 혜지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선배 앞에서 살갑게 붙는 행동에 혜지도 쑥스러웠지만..
친구들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냥 웃는다.
“엇~? 저기 내 친구들인데”
“어디요?”
“쩌~어~기~~ 멍청하게 생긴 두놈 있지?
잔디밭에 나뒹구는 자갈 두 개~~”
“아~~ 또 그런다.. 꺄하하하~
진짜 너무해~ 오빠~ 아하하핫 숨넘어가”
여학생들에게는 잘 안그러는데
남자 후배나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사정없이 놀려대는
동준의 악취미를 알고 후배들이 깔깔 웃는다.
본의 아니게 "잔디밭 돌덩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
팔자 좋네 저거....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동준을 향해
영섭과 민규는 부러움과 약간의 짜증이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민규쒸~ 어디가?
나 책사러 서점 갈건데 같이 갈래?”
“쳇. 서점 갈일 없어. 나 과사 갈거야 지금”
“..... 과사?
학과사무실을 왜 가는데..?”
“근로장학생 신청하러..”
어? 지금 뭐라고..
동준과 민규를 번갈아 살피던 혜지와 은서.
은서는 ‘민규’라는 이름을 듣고 혜지 쪽을 쳐다본다.
혜지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구나! 찾았어...
하는 얼굴로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후줄그레한 복장에 흐리멍텅한 얼굴...
찾고 있던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선배의 친구인 걸 보니 나이도 일치하고.
확신을 가진 혜지.
갑자기 삭- 친구 은서쪽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은서도 조용히 웃어주었다.
그때까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혜지는 빠른 걸음으로 민규에게 다가갔다.
-
“혜지씨이~~ 나 배고파잉~”
“......
어뜨카라궁~ 나보고..”
“밥 사줘잉~ 히히히~
나 지갑 기숙사에 두고 왔어..”
“아휴, 또야? 호호-
너 지난주 내내 나한테 빌붙었던 거 알어, 조은서?”
“알아 알아. 까먹지 않으니까 걱정말어~
오늘은 왕돈까스, 어때?? 히잉~ 저렴한 걸로~~”
“풋- 그렇게 하자.
근데 나, 조금 이따가..”
“응?”
“오후 수업 끝나면 저기...”
“...? 저기 뭐?”
“그... 음~~
바, 박민규 선배님 만날지도 모르겠어..”
“?!?!?”
은서의 뜨악한 표정이 압권이다.
입과 커다란 눈을 쩌-억 벌리고 얼어붙은 얼굴..
망가진 몰골의 친구를 보고 혜지도 떨떠름하게 웃는다.
“뭐.. 따로 만나, 둘이서??”
“왜? ㅎㅎ
이미 제법 친해졌는데.. 만나면 안돼?”
“아니 아니 아니~!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바보야. 이상하게 생각하지마.
둘이 같이 스터디하러~ 도서관 가는 거야”
“정말? 공부하러 가?”
“그렇다니까. 내가 가자고 했어..
곧 중간고사 다가오는데~ 시험문제좀 미리 찍어달라구”
“........ 가만,
내가 알기로는 공부를 배워야할 쪽은 그 사람인데..”
“-_- 선배한테 그 사람이라니..”
“아, 미안!
너무 당황해서 말이 막 나오네..
그.. 그 선배님 공부 진짜~ 못한다고 그랬잖아..
알아서 잘하는 니가.. 뭘 배울게 있냐는 말이지..”
“후훗- 너무 그러지마.
요즘 열심히 이 악물고 공부한대”
“그 사람이 그러디...?”
“그래. 지난번에 그런 얘기도 했었어.
공부 못했던 거는 사실이지만,
지난 학기에는~ 예전에 못했던 과목들 많이 재수강하면서..
거의 B 뿔 이상은 맞았다고 했거든”
“정말?? 사실..일까?”
“글쎄? 나한테 물어봐 봤자~
정 못 미더우면.. 니가 나랑 같이 가서..
민규 오빠한테 직접 물어보든지? 후후”
“우왕~!~~
너 지금? ..오빠..라고 했지??”
“.... 어?
내가.. 오빠랬어?”
“꺄하하~~
미쳤네 이 좌식~ 나 분명히 들었다 지금!”
얼굴이 빨개지는 혜지를 또 놀리는 장난꾸러기.
그럴만 했다.
기본적인 성격이 순수하고 착실한 혜지는
부끄러움도 많았고, 지킬 것은 딱딱 지키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호칭이 보수적이라
어느 누구에게도 “언니, 오빠”라는 호칭을 쉽게 쓰지 않았다.
동기 아닌 모든 윗 학번들은 죄다 선배로 호칭 통일.
그런데...
오빠?
오빠...??
오빠라니~!!!
이건..
내가 알던 친구 서혜지가 아니잖아...
단 두글자를 가지고 은서는 호들갑이며 난리다.
무심결에 말이 헛나온 혜지를 데리고 실컷 놀린다.
“흐....
고만 좀 하자.. 아이구~
그래,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어, 됐냐?”
“호~오~?
벌써부터 요 앙큼한 것이~
까져가지구~ 으힝~”
“절루가 빵꾸똥꾸야..--
나 전화해야돼”
“누구! 선배한테?”
“어... 내가 건다 그랬어..”
간신히 까불대는 은서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제법 귀엽게 발그래해진 얼굴로 두근 두근.
민규에게 전화하기 앞서 긴장되는 혜지...
어, 정말 나 왜 이렇게 혼자 떨고 있지?
휴......
그냥 약속한 대로 전화할 타이밍일 뿐인데..
“오빠.. 어디세요?”
“엇! 깜짝이야.
혜지구나..? 놀랐어..”
“... 히힛”
“나 지금 오늘 섭 다 끝나서~~
아는 사람 만나러 급하게 강남쪽 가고 있거든..
너는 어디니?”
“... 네..?”
이럴 수가!
오늘 오후에 분명 둘이서 도서관 가기로 했는데..
혜지는 핸드폰을 든 채로~ 벙쪄버린다.
약속을.. 까맣게 잊으셨나..?
당혹스러워서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
그...래요? 약속 있었구나..”
“응~ 하하~
무슨 일 있어 혜지야?”
“아뇨. 큰 일이 있는 건 아니어요.. 힛
쪼금 공부하다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아, 이걸로 풀면 되겠다.
오빠~ 제가 이따가 따로 찾아보도록 할게요.
간단한 거니까.. 히..”
“...? 그럴래? 무슨 과목인데..
금욜날 얘기한 식음료관리론 아니야?”
“아~ 그거 아니예요. 다른 거 있어요..
쉬운거니까 괜찮아요~”
“에.. 뭐길래. 톡으로 문제 보내봐”
“아뇨.. 괜찮다니까요. 지금 무거운 거 들어서..
... 으응~! 바로 갈게~
오빠, 저 친구가 불러서 끊어야겠어요.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내가 도와줘야 되는데, 오히려 미안하지..
혜지야, 저, 저기.. 그럼 이따가 저녁에 괜찮으면
내가 전화 한번 해도 될까..?”
“으응~ 네.. 그럼 연락 주시겠어요..”
이상하게 자꾸 전화를 서둘러 끊으려 하는 것 같다.
뭐지..?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민규.
목소리 톤도 그렇고 좀 이상한데...
직접 전화해놓고 자꾸 괜찮다니?
음~~
앗! ... 신호 바뀌었는데.. 놓쳤다..
교차로에서 뒷차가 빵빵- 울리는 걸 듣고
미안하다며 깜빡이를 슬쩍 켜준다.
민규도 형수님을 만나러 가느라 마음이 급한지라
전화까지 해준 혜지에 대한 건 잠시 잊고-
다시 약속장소로 차를 바삐 향한다.
-
그 일이 있은 후 이틀 뒤 수요일.
3교시 강의를 마치고 공강 시간을 이용해
관광대학 건물을 향해 터벅 터벅 걸어간다.
민규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겁다.
이유는 단순했다.
꿈에도 잊지 못할..
큰 증오를 내 가슴에 새겨주었던 그녀-
정하연을 "본의 아니게"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시발.. 오늘 가면 있으려나..
그 재수 없는 년이랑 마주하기 싫은데..
민규는 혼자서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계단을 올라간다.
월요일 저녁에 혜지와 가볍게 통화를 했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괜히 미안했다고...
그 특유의 어리숙한 모습으로 쩔쩔매며 사과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잘못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민규는 금요일날 혜지와 약속하기를-
월요일 오후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뭐라도 먹으러 같이 바깥으로 나가기로 되어 있던 것이다.
문제는 여자 입장에선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민규 녀석이~
그날 하연을 본 후, 강한 충격을 받고 걸어 나오다가
혜지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저도 모르게
“응~ 응~ 그래, 그러자”
라고 약속 아닌 동의를 해버린 것이다.
제대로 멘붕인 상황에서 흘려 들은 것이라,
설마 나 자신도 모르게.. 얼떨결에 약속해버린 것을..
멍청하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알고 있었다면~
이 소심한 성격에 여자를 바람 맞혀 놓고 뻔뻔하게 돌아다니지 못했을 것...
여하튼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썩을, 개떡같은 년...
제발... 제발 오늘 자리에.. 없어라~~
아아~ 제발 도와주세요 하나님..
외진 통로 계단에서 뭘하고 올라가지도 않나 했더니~
눈을 감고 서서 잠시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후~~ 좀 진정이 되나?
가보자! 까짓거..
이거 무슨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분위기네.
달칵~
오버스럽게 과사무실 문을 열어제낀다.
......?
깊게 숨호흡을 하고 들어왔건만, 사람이 아무도 없다.
휑~한 기운이 그득한 사무실.
허전함만이 그를 쓸쓸이 맞이해주었다.
이 시간에.. 다들 어디 가고 없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일단 구석 의자에 걸터 앉는다.
수미 누나가 얼른 와야할텐데...
발을 가볍게 구르며, 가방을 열고 가져온 종이를 꺼낸다.
근로장학생 신청 서류를 작성해온 것이다.
조교인 수미 누나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 3일, 강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시간표를 자유롭게 짤 수 있고
화-목-금 (혹은 토요일 격주 근무, 본인 자율) 로테이션 보다는
월-수-금 (윗 내용과 동일)의 순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민규도 흔쾌히 "월수금" 짜투리 시간을 쓰겠다고 동의하였고.
어차피 수미 누나가 메인이니까~
"월화수목금" 내내- 옆에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정하연 그 시볼년을~
불편하게 주중에 안 마주쳐도 되고 말이다...
껄끄럽지만 재수 좋으면 2주일에 단 하루.
토요일에만 억지로 같이 있으면 되는 거다.
그래!
그러면 된다~
주먹을 불끈...쥐며-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는 법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었다.
“끼이이-”
“아, 누나 어디갔다 이제 오셨..”
“어?”
“.......
어... 너였냐..
어디.. 갔다왔어..?”
하연이다.
양치를 했는지 칫솔을 들고 있다.
......
그녀를 보자마자 민규는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젠장할~~
누나는 어디 가고 이년이 불쑥 나타나...
어색한 마음에 뭐라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던진다.
“......”
“아하하하.. 왜 말이 없어..
수미 누나는, 어디 가신 거야..?”
“..... 응..
식사하러..
우리들 보통 4교시 때 교대로 밥 먹으러 가잖아..”
어..
시발 뭔 소리지??
점심 시간도 아니고 4교시 중간에 식사?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아직 정신이 조금 흐리멍텅한 민규.
꿀꺽-
침을 삼키며 어렵게 고개를 들어 하연을 본다.
“그런 말은 아직 나.. 못 들었는데?”
“몰라?~ 풋..
수미 언니가 사전에 그런 얘기 안해주든~ 너한테?”
“어어~... 전혀 못 들었지 당연히..
나는 오늘도 신청자 자격으로 이거 빼온건데..”
“뭔데 그게?
이리 줘봐~”
아놔 이 것이...
긴장해서 조금씩 말을 더듬는 민규와 달리
태연하고 편안한 표정의 하연은, 아무 거리낌 없이
민규 손에 있던 레포트 파일을 낚아챘다.
활짝-
파란 비닐파일 안의 서류를 천천히 훑어본다.
“.... 아아.. 너 오늘 처음이었지.
거기 잠깐 앉아 있어. 일단 볼테니까”
“어...”
째깍- 째깍-
텅빈 사무실의 적막한 공기.
쓸데없이 드넓은 공간에서 단 둘인 자리.
고요함이 깃드는 가운데-
예전에 차인 여자 앞에서..
각 잡고 무릎위에 손을 얹은 자세.
그렇게 민규는 어색한 포즈로 소파에 앉아 있고
하연은 사무용 쿠션 의자에 편히 앉아
약간 섹시한 포즈로 다리를 꼬고- 조용히 서류를 보고 있다.
이거.. 왠지 굴욕적인데..
기분이 묘하네.
이년이 괜히 나보다 직장 상사같은 느낌이잖아.
내가 뭐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쫄아 있지?
........
머릿속으로는 악감정을 가지고 소심하게
중얼 중얼-
뭐라고 하연을 욕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조용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째깍 째깍...
유난히 크게 울리는 벽걸이 시계의 초침이 야속할 따름이다.
아... 밥먹으러 가신분 제발 빨리..
“너~ 자소서는?”
“뭐?”
“자기 소개서”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자소서도 써와야 되냐?”
“.....
아니야, 그건 건너 뛰자”
“어.. 뭐든 또 필요하면 얘기하고”
“흐음~ 됐어. 이 정도면 잘 써왔네”
“.... 그럼 다 된 거야.. 양식대로?”
“어~ 통과야.
넌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는 거고”
“에... 오늘?
오늘이.. 아~... 수요일이었구나!
아니, 그래도, 이거 제출하고 나면 금요일부터 일하는 거 아니야?”
“풋~ 누가 그런 말 하는데?
신청서 내는 그 즉시 시작하는 거야 원래~”
“..... 정말이야?
나는 그런 말 수미 누나한테 못 들었는데..”
“멍청하긴.. 쯧
넌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구나~”
.......
뭐 이 자식아?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부르르...
주먹이 가볍게 떨린다.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하연의 도도하고 안하무인의 모습-
예전에 그녀와 교제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또 안 좋은 기억이 피어 오른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은...
173cm의 크고 늘씬한 키-
처음 보는 사람도 주눅들 만큼 모델같은 포스.
그리고 속된 말로..
싸가지 없게 생긴 얼굴이 아주 강한 인상이었다.
그 당시 하연을 처음 보고
못되게 생겼지만 예뻤던, 그 차가운 얼굴에 강한 흥분을 느꼈던 민규였는데..
나중에 사이가 악화된 후로는
그 얼음을 드리운 매력마저 얼마나 나쁘게 변질되었는지 모른다.
하연과 교제할 당시
소심하고 기가 약한 민규는 여러가지로 그녀에게 기싸움에서 밀렸다.
또한 여러모로 연애에 있어 서툴고 많이 미숙했던 민규...
그렇다보니-
첫 단추를 꿰멨던 때부터 헤어지던 그 시점까지의 모든 과정은
현재 이 소심한 남자의 머릿속에는,
필요 이상으로 옛 연인에 대하여..
나쁜 기억들로만 머릿속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적인 예로 하연의 얼굴에 대한 생각이다.
민규가 바라보는 시각과 주변 사람들이 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다.
하연의 때때로 다양하게 짓는 표정과 드러나는 미소는..
지금 민규의 기억속에 잊혀지고 색이 바랜지 오래이며
오직 머릿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나쁜 이미지가 유일했다.
사실 마스크 자체가 차갑게 생기긴 했으나
좀 냉랭한 얼굴일 뿐이지 기본적으로 앳된 고양이 상이며
연예인으로 치면, 크리스탈이나 선우선과 비슷한 느낌이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똑 닮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전반적인 느낌이...
깔끔하게 생긴 페이스가 오히려 서구적이라 좋다는 넘들도 있었고
그 느낌에 강한 자극을 느껴,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자도 여럿이었으니.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얼굴 몸매만 보고 반해서 이쁘다고.
성격은 개차반에다 집에서 애지중지 키워서 개념을 상실한 년인데.
.........
그렇게 짧고도 긴 시간동안
홀로 무아지경에 빠져 예전의 싫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머리를 무릎 위로 숙이고
골똘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10 여분 정도 지났을까.
민규와 멀리 떨어져 녹차를 마시던 하연-
그녀도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딸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얼 들고 다가온다.
“뭘 그렇게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거야?”
“...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생각할게 좀 있어서”
“치잇~ 너는 하여튼..
자! 이거 마셔”
“뭔데.. 녹차야?”
“어~ 미안한데, 지금은 그거 밖에 없다..
커피는 다 떨어져서 사다놔야돼”
“아... 고마워”
헐~
날씨가 좀 풀려서 은근히 더운 날씬데 뜨거운 녹차를 주다니.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성의를 봐서 일단 마신다~
하는 생각으로 카키색 머그잔을 들었다.
어?
차가운 냉녹차였네..
후릅-
설록차라고 분명히 쓰여있는 티백이었다.
무심결에 이건 당연히 뜨거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적당히 시원한 온도의 녹차가 아주 상쾌한 맛이 난다.
게다가, 설탕을..?
자체적으로 설탕이 첨가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하연이 녹차를 타다 주면서
티스푼으로 설탕을 조금 저어 가져다준 모양이다.
“맛이 어때, 괜찮지?”
“어... 이거 뭐냐~?
맛있는데..”
“하하- 입에 맞아?
여기 설탕 더 있으니까 와서 타든가~
그리고 케익도 사다 놨으니까 배고프면 먹어.
너 점심 안 먹고 왔지?”
“케.. 케익이라니?
왠 거야 그게.....”
“누가 사왔대. 며칠전에 생일인 분이 있으셔서~
맛있어 되게 달달하고.
참~ 블루베리 케익이야”
“블, 블루베리??”
“ㅋㅋㅋ-”
맞아... 얘는 다 기억하겠지..
하연은 쓰고 떫은 것을 싫어하는 민규의 식성을 알고 있었다.
녹차에 설탕이라니..
참신한데 요거?
달달하고 기분 좋은 목넘김에, 홀짝 홀짝 마셔버린다.
실제로 아스코르빈 산이나 자당(설탕)을 녹차에 첨가하거나
두가지 모두 섞어서 먹으면, 건강에 3배로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건강에 매우 좋은 카테킨(catechin)의 체내 흡수율을 월등하게 높여주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이야 몰라도 그만이고~
......
블루베리가 들어있는 케익???
어린 아이처럼 단 것을 무지하게 밝히는 민규다.
부드럽고 달콤한 바닐라 향이나 딸기, 포도향에 미치는데-
이 또한 하연은, 그의 아기 입맛을 알고 있다는 말투로
어서 와서 먹으라~ 챙겨주는 것이다.
먹을 것 하나로
이렇게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다니..
.........
아, 난 정말 글러먹은 놈인가?
시원한 녹차 슈가의 아련한 산뜻함과 더불어
약간은 언밸런스하지만..
입 안을 행복에 듬뿍 잠기게 해줄 케익의 존재.
모든 걸 잊고, 어서 달려가서 먹고 싶었다.
그렇게 하연의 은근한 배려를 느끼자..
갑작스럽게 그 짧은 순간-
자신이 아까...
이 사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품고 있던..
맹목적인 적개심이 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
원래 말하는 투가 저 따위 저 모냥인 것을..
원래 분위기만 저런 뇬이었잖아.
말 툭툭 끊는 느낌으로 무심하게 던지고~
내가 너무 옹졸하게 옛 감정만 가지고 생각했구나..
고 잠깐 사이에 민규는 흡족한 나머지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이 몹시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우적 우적-
입이 원래 그다지 길지 않은데도
좋아하는 먹을 것 앞에서는 참질 못한다.
하연은 슬그머니-
민규의 먹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웃었다.
더 먹으라고~
아예 포크와 플라스틱 나이프를 스윽- 밀어주기까지.
“쩝쩝 냠냠~
너는... 안 먹어?”
“바보~~
밥 먹고 왔잖아. 나 배불러”
“아니.. 간식이라도 먹어야지?”
“깔깔~ 됐어~
너나 많이 배불리 드셔. 나 단 음식 안먹자나~”
“..... 아 맞다..
그랬었지..
아무튼 고맙다, 우물 우물~”
“훗..
여전하구나 너는..”
“...뭐가 또..”
“아냐, 나쁜 의미는 아니었어.
어떨 때보면 착하고
또 어린 아이같아서 천진난만하다구”
“쳇.. 이제 알았냐.
욕하고 싶은데 이거~
은근하게 에둘러 말하는 거지?”
“야~ 좀 믿어~
그런거 아니거든?
잘 먹는 모습은 누구나 보기 좋아.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일 줄도 알라구”
“그러냐..
헤헷, 그래~ 알았어..”
=
언제나 즐거운 댓글과 추천으로 함께 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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