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약사 며누리?
[1]
나는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지혜가 내게 묻는다.
"오빠, 어디 가?"
"집에 좀 갔다 오려고."
"어제 집에 갔다며, 또 가?"
"네가 필요한 책이 우리 집에 있거든요."
"와앙. 감동이다. 오빠가 공부하던 책을 나한테 물려준다고?"
"아직 좋아하기에는 일러."
"이러언. 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기다려. 금방 가서 책만 들고 바로 올게."
"그럼 ..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될 것은 없지만, 왜 따라오려고? 못 믿어서 그래?"
"아무래도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
"나중에 올 때 보면 되지? 책을 갖고 오나, 아니면 빈 손으로 오나 .."
"됐거든요. 옷 갈아입고 내려올테니까, 아래층 입구에서 20분 후에 만나. 알았지?"
지혜는 재빨리 텔을 나갔다. 아이린이 지혜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쟤도 참. .."
"그러게요. 오늘따라 왜 저렇게 억지를 쓰는지 모르겠어."
"억지가 아니라, 지혜가 태현씨 집에 한 번 가보고 싶은가봐요."
"우리 집에? 우리가 금송아지라도 숨겨두었나? 하하."
"그러게요. 하하."
"경식이는 안 갈래? 누나는요? 우리 이참에 다 같이 가죠?"
"형. 나는 누나처럼 사차원이 아니거든요."
"나도 안 갈래요."
경식이도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이린이 내게 물었다.
"저 .. 태현씨 .. 물어볼 말이 있는데 .."
"뭔데 그래요?"
"아까 나 여기 들어올 때 .."
"어?"
"둘이 무슨 일 없었죠?"
"누나도 참. 내가 지혜랑 무슨 일을 낼까봐?"
"그렇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엄마라 그런지, 걱정이 되는걸요? 지혜가 태현씨 어머님께 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은 또 태현씨 집에도 따라간다고 하고 .."
"나는 지혜랑 사고칠 마음이 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들어?"
"미안해요. 태현씨 말이야 이해를 하는데, 저게 태현씨한테 엄청 들이댈 것 같아서 그래요."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킬테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마. 또 내가 만일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누나한테 숨기지 않고, 바로 말 할거야."
"알았어요. 고마워요."
"지금 내 걱정은 그게 아니라, 쟤가 누나랑 하겠다는 PEET 공부를 하려고 할 지가 문제야."
"그래요. 나도 태현씨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그것도 걱정이 되기는 해요."
"그래서 말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걔가 공부할 책들을 전부 보여주려고."
"그 책이 집에 다 있어요? 태현씨도 전에 그 공부 한 적이 있어요? "
"나는 그 공부 안 했어요. 그래도 배우던 책은 똑같아요. 유기화학은 따로 사야 해. 나한테 그 책은 없어."
"공부를 하겠다고만 하면 책 사는 것이 일인가요?"
"시간 됐으니까, 나는 내려갈게요."
"다녀오세요."
나는 아이린을 안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내 전화기가 진동한다. 지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내려와?"
"지금 나가는 중이야."
나는 텔을 나와서 계단으로 달려서 지혜에게로 내려갔다.
"어이구우. 우리 오빠. 지혜가 기다린다고 그렇게 달려 오는거니?"
"어."
"이러니까 예뻐 죽겠다니까. 하하."
지혜가 내 엉덩이를 툭툭 치더니 꽉 움켜쥔다. 쪼끄만게 못하는 짓이 없다. 그것도 시뻘건 대낮에 밖에서.
나는 지혜의 손을 잡고 내 차로 갔다. 차에 타자마자 지혜가 내게 묻는다.
"오빠 집 멀어?"
"차로 20분이면 돼."
[2]
내가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지혜가 심호흡을 한다.
"뭐 해?"
"오빠. 나 지금 엄청 떨려."
"왜? 우리 엄마는 어제 봤잖아? 우리 엄마가 무섭니?"
"하아. .. 그게 아니고. 이건 뭐. .. 꼭 시댁에 가는 느낌?"
나는 워낙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고, 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먼저 나온다.
"하하하. 뭐라고? 너 오늘 왜 이렇게 웃기는데? 그럼 시댁에 가본 적은 있으셔?"
"없으니까, 처음이니까 이렇게 떨리지."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 여기는 네 시댁이 아니고, 김태현네 집이야."
나는 지혜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런데 지혜는 얼굴이 버얼겋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내가 벨을 누른 후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을 열자 엄마는 벌써 문 앞에까지 나오셨다.
"아오오. .. 우리 예쁜 지혜 왔구나?"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지혜가 우리 엄마에게 하는 인사는 어제처럼 완전 배꼽인사이다.
"그래. 어서 들어와."
"아버님께서는 안 계셔요?"
"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나가셨지. 이리 와."
지혜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소파로 간다. 나는 지혜를 보면서 걱정이 생긴다. 쟤가 지금 우리 엄마를 정말 시어머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뭐 마실래? 추우니까 녹차 어때?"
"에이. 어머님께서는 그냥 계세요. 제가 할게요."
엄마는 주방으로 가서 녹차를 준비하신다. 지혜도 따라간다.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지혜가 공부하는 데 필요할 것 같은 책들을 모두 꺼내서 소파로 가져왔다. 또 수업 시간에 받은 인쇄물들도 모조리 들고 나왔다.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인다. 나는 지혜를 불렀다.
"우선 이 것부터 차에 갖다 실어야 해. 나 혼자는 안되니까, 너도 같이 하자."
"오빠도 참. 연약한 여인한테 이런 일을 하라고 시키냐? 안 그래요, 어머님?"
"지혜 말이 맞다. 한꺼번에 다 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두세 번에 나누어서 천천히 해."
"됐어.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지."
나는 두 번에 걸쳐서 모두 차에 실었다. 지혜는 어느새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시간이 있으니까, 약사가 되는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네가 약사가 되겠다고?"
"쉽지는 않겠지만, 한번 도전은 꼭 해보려고요."
"내가 어제 말한 약국집 딸 있지? 그 집 딸도 약사 한다고 하던데."
"어머님, 그럼 약사 며누리를 원하세요?"
"원한다기 보다는, 그게 좋지 않겠느냐 이 말이지."
"제가 약사가 되려고 하니까, 어머님, 이제 그 집 일은 잊어버리세요. 오빠는 조금도 생각에 없나봐요."
"그럼 그럴까? 우리 지혜가 약사가 되면 진짜 좋겠다."
엄마와 지혜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갑자기 머리카락이 일어서는 기분이다. 지혜가 지금 우리 엄마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것이 너무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나는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갈래?"
"벌써 가게? 어머님 심심하실텐데 .."
"그럼 아예 여기서 살든가."
"지금 말고. 나중에. 하하."
"뭐야?"
낮도깨비 지혜가 또 거침없이 말을 뱉기 시작한다. 이것은 완전 비상이고, 빨간불이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지혜가 갑자기 나를 부른다.
"오빠. 잠깐만."
"왜?"
"여기까지 왔는데, 오빠 방 구경은 해야지. 어머님. 그래도 괜찮죠?"
"괜찮고말고. 거기 뭐 구경할 것도 별로 없어. 그냥 가서 봐."
그런데 지혜는 안방 문을 열어버린다.
"아. 여기가 아니네요. 죄송해요 어머님."
"아니야. 보고 싶은 것 다 봐도 괜찮아."
"감사합니다. 그럼 집 구경 좀 할게요."
우리 엄마는 이제 나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지혜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다니면서 이 방, 저 방, 욕실, 주방을 전부 다 구경시킨다. 또 두 사람은 베란다로 나가더니 아예 들어올 줄을 모른다. 아마도 지혜는 엄마가 키우시는 화분까지 일일이 구경하는 모양이다.
"진짜 신기해요. 어쩜 이렇게 예쁘게 키우셨어요?"
"나야 물 주고, 흙 갈아주고 영양액체 조금씩 주는거지. 그럼 크는 것은 얘들이 알아서 커."
"겨울에는요?"
"이 정도 추위는 괜찮은데, 더 추워지면 거실로 들여야지."
"예에 .."
지혜는 지금 내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다. 엄마가 지혜에게 완전히 푹 빠지신 것 같다. 드디어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온다. 지혜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나보고 자기 쪽으로 오라는 말이다.
"왜?"
"오빠 방만 남았어. 어머님 말씀은 오빠한테 직접 보여달라고 하라시는데 .."
"뭐 검사할 일 있어?"
"하아. .. 쓸데없이 고집 부려서 괜히 시간만 끌지 말고 .."
나는 내 방으로 갔다. 안 그러면 엄마에게서 또 한마디 들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방 문을 열자 지혜가 방 안으로 쏘옥 들어간다. 옷장과 설합장을 열어보고, 또 내 의자에 앉아서 책상 설합도 일일이 열어본다. 지혜가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침대를 보더니, 벌렁 누워버린다. 지혜가 나를 부르더니 내게 묻는다.
"이 방에서 오빠가 몇 년을 살았어?"
"중학교 졸업할 때 까지 살고, 과고 다닐 때는 기숙사.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지금 사는 오피스텔. 군대, 그리고 또 오피스텔. 이제 됐니?"
"사는 곳이 저렇게 복잡하면, 정서불안이 온다는데 .."
"내 정서는 지극히 안정된 상태거든요. 이제 그만 가자."
"이 방에 한수정 언니도 와봤어?"
"당연하지."
"이상하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왜 약국집 딸을 말씀하시지? 혹시 한수정 언니 어머님께 꼬투리 잡힌 것 있어?"
"그럴 일 전혀 없거든. 그냥 동네 사람들이 엄마한테 말을 하니까, 엄마는 나한테 그 말을 전하는 거지."
"그러시는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내 방을 나왔다. 우리가 현관으로 가는데, 엄마도 주방에서 현관으로 나오신다.
"우리 지혜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왔는데, 놀지도 못하고 그냥 가네?"
"다음에 또 오면 되지요."
"우리 지혜가 지금 몇 살이지? 19 인가?"
"예. 만으로는 아직 18 입니다."
"그럼 태현이랑은 5년 차이인가?"
"예."
"우리 지혜처럼 이렇게 예쁜 딸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딸이 없으시니까, 다음에 며느리가 들어와서 딸 노릇까지 하면 되겠네요."
"그러면야 좋지만, 요새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랑 그렇게 하려고 하겠어?"
"어머님. 젊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 우리 지혜는 안그럴 것 같기는 하다. 하하."
"당연하죠. 저야 항상 어르신들 편이니까요. 하하."
"그래. 그럼 잘 가고 또 와. 알았지? 꼭 와야 한다?"
"예. 앞으로는 오빠를 졸라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지혜를 먼저 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말 끝마다 우리 지혜, 우리 지혜. 왜 그러세요?"
" 지혜가 저렇게 애교를 부리는 것이 네 눈에는 안 예쁘니?"
"예쁘죠. 왜 안 예뻐요?"
"나도 예뻐서 그런다. 왜?"
"됐어요. 안녕히 계세요."
"걱정말고, 잘 난 너는 바쁘면 안 와도 괜찮으니까, 지혜나 자주 놀러 보내라. 알았지?"
나는 지혜와 함께 내려와서 차에 탔다.
"아하. .. 이제 보니까, 어머님께서는 약사 며느리를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그렇다는 얘기지."
아까 들어가기 전에는 기가 막혀서 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답답해서 한숨이 나온다.
[3]
우리는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지혜는 차에서 내리더니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두 번을 오르내리면서 책들을 모두 내 텔로 옮겨와서 책상 위에 쌓아두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남아있는 커피를 따라서 소파로 들고 왔다. 그런데 아이린과 지혜가 쏘옥 들어온다. 두 사람도 같이 소파로 와서 앉는다. 지혜가 아이린에게 열심히 설명을 한다.
"글쎄. 그렇다니까. 아무래도 나는 약사를 꼭 해야 할까봐."
"왜? 그럼 너 혹시 그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겠다는 거니?"
"한수정 언니는 약사가 아니라서 안되잖아? 그럼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뭐야? 태현씨랑 한수정씨 사이를 네가 갈라놓기라도 하겠다고?"
"그게 아니라. 어머님께서 원하시는 며느리가 약사며느리라니까."
"야! 서지혜! 너 지금 제 정신이야? 너 왜 두 사람 사이로 껴들어가는데? 지금 거기가 네가 낄 자리야?"
"당근 내 정신이지. 내가 이상해? 내가 정신병자처럼 보여?"
"아이고. 의사가 되든지, 약사가 되든지 나는 모른다."
"엄마는 이제 빠져도 돼. 나랑 오빠랑 알아서 할거니까 .."
"아니. 얘가 정말?"
아이린은 버럭질을 하더니, 커피를 내린다면서 주방으로 간다. 지혜도 옷을 갈아입는다고 올라가버린다. 나도 옷방으로 가서 옷을 트리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소파로 오자, 아이린도 커피잔을 들고 와서 같이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 울상이다.
"태현씨도 들었죠?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누나. 지혜가 지금 뭘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대학에 다니면서 지혜 생각이 여러 번 바뀐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끔찍한 소리를 쟤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내는데요? 태현씨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린애가 하는 소리에 그럼 어쩌라고?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고 두고 보기나 하세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두고 본대요?"
"지혜가 하는 말에 나는 신경 하나도 안 써. 공부나 열심히 잘 하고, 건강하면 되지. 다른 일은 지금 생각해봤자 아무 쓸데 없다니까?"
"모르겠어요. 나한테서 나온 자식이지만, 어째 저럴 수가 있을까?"
"누나는 고딩때 학교 남자 선생님 마음에 둔 적이 한 번도 없어?"
"있기야 있죠. 그래도 나는 저렇게 밀어붙이지는 않았어요. 더구나 쟤가 지금은 고3도 끝나가잖아요. 이제 정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닌가요?"
"아니야. 늦게 오기도 하고, 빨리 오기도 해. 대학에서라고 저런 여자애들이 없는 줄 알아요?"
"하긴. .. 우리 때 보면 있기는 있던데."
"거보세요.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자꾸 변하거든요. 그렇게 변하는 것이 사람 사는 것 아닌가? 지혜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
"지혜가 생각을 하면 막연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야. 쟤는 끝맺음까지 확실하게 하잖아요. 나를 그냥 막연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해서 결국에는 어떻게까지 해버리겠다고 하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지혜가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하고, 좋은데 .."
"그럼 이대로 그냥 두고 보기만 해요?"
"그래요. 제발 그러세요."
"알았어요."
"나 피곤하니까 눈 좀 붙이고 나올게요."
"그럼 나도 집에 갔다가 나중에 와서 점심 차릴게요."
"나중에라도 지혜랑 둘이 싸우지나 말아요."
"알았어요."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고, 아이린은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키스하고 밖으로 나갔다.
[4]
한참 자고 있는데 거실에서 도란도란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깼다. 아이린과 지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 너 사귄다는 그 머시마는 어쩔래?"
"사귀기는 누가 사귄다고? 하도 귀찮게 굴어서 몇 번 만나준 것이 전부야."
"너 어제도 걔랑 영화 보러 간 것 아니었어?"
"사귀는 남자랑 영화를 보면, 저녁도 같이 안 먹고, 햄버거로 대충 때우고 들어와? 엄마는 그랬나 몰라도 나는 안 그래."
"얼마나 됐는데?"
"저 뒤에 209동 사는 애 있잖아. 중학교때부터 계속 치근덕거렸다니까. 내가 어떤가 하고 간을 좀 본 것은 이번 고3 되면서부터고."
"진도는 어디까지 뺐어?"
"진도는 무슨 얼어 죽을 진도야? 얼마 전에 손 잡으려고 하길래 손등을 콱 꼬집었더니 얼씬도 안 했어."
"괜찮으면 걔랑 잘 해보지 그러니?"
"내가 금마 속을 모를 것 같아? 어떻게 해서 나랑 잠자리나 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 그 주제에 사랑이 어떻고 해도 다 뻥이잖아."
"사랑한대?"
"그렇다니까. 완전 사탕발림 맞거든요. 그게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하면서 그러면 내가 말을 안 해요."
"너 진짜 걱정된다."
"내가 보기에는 .. 엄마야말로 진짜 걱정된다."
"알았으니까, 가서 오빠나 깨워. 점심 먹자."
"알았어."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해보니까 걱정되는 것은 지혜나 아이린이 아니라, 바로 내가 걱정이다. 지혜가 나를 깨운다면서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쓰고 자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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