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제와의 약속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3부
“안녕하세요. 김윤경이에요.”
“네, 윤경 씨…… 반가워요. 최민수입니다.”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지인의 소개로 여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여자 이름이 윤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만큼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여인이지만, 단 하나 분명히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녀가 술을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었다.
“식사하고 나서 술 한 잔 하실래요?”
“술이요?”
소개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것도 여자 쪽에서 먼저 술자리를 권유해오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다지 꺼릴 일도 아니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속에서 눈앞의 여자보다 훨씬 더 어리고 순수한 다른 여자 한 명이 떠올렸다.
‘미희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도 지금쯤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무 살의 여대생이란 그 이름만으로도 한창 들뜨고 설렐 시기가 아닌가. 나는 이따금씩 미희가 그 때의 약속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까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미희 생각에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미희는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로 내게 연락이 부쩍 줄었다. 비록 예상했던 수순이긴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씁쓸했다. 그러게 왜 그런 약속을 해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었는지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좋아요…… 그러죠.”
그 날은 유독 공허함이 차올랐다. 다른 여자를 만나는 와중에 자꾸만 미희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라서 마지못해 나오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가끔 오는 곳이에요.”
“혼자 오시는 건가요?”
“네.”
그녀는 나를 조용한 칵테일 바로 안내했다. 코스를 알아서 이끌어가는 배려에는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꽤 멋들어진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잔을 기울였다.
“보기와는 달리 술이 꽤 독하네요.”
“조금 약한 걸로 드릴까요?”
“괜찮아요.”
남자로서 자존심을 세우긴 했지만 그녀는 주당이었다. 내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음 쯤에도 그녀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흐트러진 꼴을 보였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민수 씨는 꽤 이른 나이에 교편을 잡으셨군요.”
“예, 운 좋게 임용을 한 번 만에 통과할 수 있었죠.”
“그럼 또래들에 비해서 준비해두신 게 많겠네요. 저는 이 나이 되도록 모아둔 것도 거의 없어서 항상 걱정이에요. 차는 있으신가요?”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주로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에게도 비껴갈 수는 없는 이야기였지만, 첫 만남에서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서 대충 대꾸해주며 술잔만 홀짝였고 취기는 갈수록 올랐다.
“어머, 요새 어린애들은 참…… 호호.”
그러다 문득 윤경 씨의 웃음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날의 기억을 내가 여태껏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도 오로지 그 장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경 씨가 가리키는 곳에 내 시선이 따라 머물렀고, 나는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미희……?’
그 자리에서 나는 미희를 보았다. 교복차림이 아닌 모습의 여대생 미희, 이제는 스무 살의 미모가 물씬 피어오른 내 제자 윤미희가 그곳에 있었다. 얼굴도 모를 한 남자와 다정하게 몸을 꼭 붙인 채로, 유리잔을 홀짝이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나는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윤경 씨가 왜 미희를 보고 웃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미희를 끌어안고 술을 마시던 그 남자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미희에게 키스했다. 미희의 얼굴 곳곳에 남자의 질척한 입술세례가 찍혔다.
“아직 어린애들 같은데 참 맹랑하네요. 우리 때만 해도 저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
만약 내가 그 순간 정말로 미희의 담임선생이고 싶었다면, 하다못해 가까이 다가가서 핀잔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광경 앞에서 내 마음속 무언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이게 당연한 거야.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원망하지 않겠다고 내 입으로 약속까지 해놓고, 새삼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왜 배신감을 느낀단 말인가? 차라리 그 꼴사나운 애정행각을 선생으로서 따끔하게 꾸짖을 수는 있어도, 내가 이런 처참한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지럽게 빙글빙글 흔들리는 머릿속을 애써 추스르며 난 윤경 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옮기죠.”
“어디로요?”
“더 조용한 데로 가서 한 잔 더해요.”
“어머…… 벌써 얼굴이 좀 빨간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도망치듯 바를 걸어 나오면서, 나는 끝까지 미희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
“웨엑!”
“괜찮아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변기에다 대고 한바탕 실컷 토했다. 그 당시 나는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나를 구태여 원룸까지 차로 태워준 윤경 씨에게 고맙고 또 창피했지만, 뭐라 한마디 인사조차 제대로 건넬 수가 없었다.
윤경 씨는 나를 방에 넣어주고 나서도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따라 들어와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마셨던 것들을 그렇게 모조리 게워내고 나자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고, 차츰 내가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윤경 씨…… 초면에 이런 꼴이나 보이고……”
“독특하긴 하네요. 첫 만남에서 토하는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부끄럽군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
이어졌던 술자리에서 나는 주량을 한껏 초과해버렸다. 윤경 씨는 나보다 더 많이 마셨음에도 오히려 겉보기에 멀쩡해보였다. 남자로서 그녀를 술로 이겨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었지만, 그와 별개로 내 밑바닥이 마구 파헤쳐진 기분이었다.
“이, 이제 괜찮아요. 그만 가보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고…… 또 미안했어요.”
“…….”
윤경 씨가 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이런 추태를 보인 남자를 그녀가 보고 싶어 할리도 없는데다 나 또한 그녀와의 만남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거라도 좀 드세요. 숙취 음료에요.”
“아, 아니…… 윤경 씨.”
하지만 그녀는 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엉겁결에 나는 그녀를 방으로 들였고 그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선뜻 들어섰다. 그녀가 손에 쥐어준 초록색 유리병을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나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윤경 씨.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음…… 왜 물어보시는 거죠?”
“제가 윤경 씨라면 아마 저 같은 사람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것 같아요.”
윤경 씨는 그저 픽하고 한번 웃고 말았다.
“글쎄요. 맘에 든다면 어쩌시려고요?”
“오늘은 혼자 있기 싫어서요. 같이 있어줄래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정말 싸구려처럼 느껴지는 질 낮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
윤경 씨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입술을 덮쳤다. 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에 대신 있는 것만 같았다. 뱃속에서 공허함으로 뭉친 덩어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내 팔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아……!”
뒤엉킨 몸이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옷가지들이 방바닥에 차례차례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윤경 씨의 나직한 신음이 방 안에 울렸다.
*
절정에 오르는 순간, 나는 무심코 윤경 씨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절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내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미안해요.”
“…….”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떠났다. 우리는 그 후로 만나지 않았다.
*
“저 왔어요, 선생님!”
“처…… 아니, 미희야. 밥은 먹었어?”
미희는 이른 아침부터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섬세하게 화장이 되어있는 그 새하얀 얼굴을 마주하자, 어제 차 안에서 내 물건을 입으로 빨아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헤헤, 아니요. 선생님한테 요리해주려고 이것저것 사 왔어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미희……. 이미 처제와 형부로서의 선을 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희에게서는 별다른 고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미희가 나를 형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선생님! 밥 먹고 시내 나가서 오붓하게 데이트할까요? 네?”
“데이트……?”
그 어감이 못내 심상치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벽에 걸린 결혼사진 속의 아내가 왠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에요. 이건 추억의 요리거든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요.”
부엌에서 한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미희는 예쁜 접시에 음식을 담아 식탁에 올렸다. 샛노란 계란이 씌워진 그 알록달록한 요리를 보자마자 나도 덩달아 옛날 생각이 났다.
‘오므라이스……’
실없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날의 기억을 미희는 고스란히 밟아가고 싶었던 모양인지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영화를 보러 가자며 나를 보챘다.
“선생님, 어서요. 이러다 늦겠어요. 시간은 금이란 말예요.”
“아, 알았어.”
촐랑촐랑 재촉하는 미희에게 이끌려 걷다보니 어느새 영화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상영관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꾸만 미희가 내게 몸을 기대오는 것이 느껴져 나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 미희야……”
“네?”
왼팔에 가슴이 닿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텐데도 미희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속눈썹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미희가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죄지은 것처럼 다시 시선을 돌렸다.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왜요? 불편하세요?”
“그게…… 조금.”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해드릴게요.”
미희는 아예 팔걸이를 위로 올려버리더니 마치 한 의자에 둘이 앉을 것처럼 더욱 몸을 포개왔다. 괜한 말을 꺼냈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옆에서 어쩐지 미희가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것이 느껴졌다. 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걸까……?
“히히, 선생님. 선물 받으세요.”
“뭔데……?”
나는 애써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미희가 옆에서 무엇 때문에 꿈틀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미희는 내 팔을 잡아끌더니 손바닥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보들보들한 촉감이 느껴져 무심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미, 미희…… 너……”
“맘에 들어요?”
란제리 브래지어 하나가 덩그러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멍청하게 얼이 빠져있는 내 얼굴에다 대고 미희는 살며시 속삭였다.
“그거, 방금 벗은 거예요. 기념으로 드릴게요.”
“…….”
조금 전까지 살갗에 닿아있었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듯, 그 속옷에서는 은은한 온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자극적이었던 건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그 온기가 아니라 오히려 뇌를 헤집어놓는 나의 상상이었다.
‘노브라……?’
얇은 스웨터 너머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려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기대오는 몸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연약하게 뭉클 으깨지는 그 살덩이의 감촉에 나는 숨이 가빠져왔다.
“이따가 팬티도 드릴까요?”
“자, 장난치지 마, 처…… 아니, 미, 미희야……”
한손에 미희의 속옷을 쥔 채로,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
“호호호, 호호호호호.”
“왜 웃어……?”
“우리 선생님 너무 귀여워서요.”
데이트는 저녁 무렵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미희는 그 날과 비슷한 코스로 나를 계속해서 이끌었다. 딱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때에는 커피를 마셨던 것이 지금은 술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미희를 따라 들어선 칵테일 바에서, 나는 문득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던 미희의 모습을…….
“미희야.”
“네?”
나는 미희에게 묻고 싶었다. 분명 그 시절 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을 텐데도, 지금에 와서 내게 이런 변질된 형태의 미련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리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미희를 원망하듯 추궁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른으로서 남은 한 조각 자존심이, 그 꼴만은 안 되겠다며 나를 간신히 자제시키고 있었다.
“호호…… 선생님과 둘이서 술을 마시다니. 생각해보면 처음이지 않나요?”
“그렇구나…….”
화려한 빛깔로 반짝이는 칵테일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나는 문득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윤경 씨의 존재를 떠올려냈다. 하지만 진정으로 떠올렸던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 날 그녀와 있었던 기억이었다. 행여나 오늘도 취하게 될까봐 나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선생님. 우리 이거 마시고 오붓한 곳으로 갈까요?”
“오, 오붓한 곳……?”
“호호, 모른 척 하시긴. 이제는 고등학생이랑 데이트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선생님이랑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걸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얘기일까? 천지분간을 못하는 처제의 철없는 소리라 치부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그 적나라한 유혹에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말과 행동이 그저 장난이기를 바랐다.
“왜 말이 없으세요?”
“…….”
딱딱하게 굳어있는 나를 미희가 손끝으로 건드려왔다. 허벅지에 그 손길이 닿자 반사적으로 어제 일이 떠올라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 뒤로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대답 없는 그 입이 밉네요.”
턱을 끌어당기는 손이 느껴졌고, 다음 순간 입술이 농락당했다. 어제 느꼈던 그 보드라운 입술의 맛이 혀끝으로 전해져왔다.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났고,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바보처럼 또 그렇게 녹아내렸다.
그 때 하얗게 물들어가는 뇌리를 비집고……, 불협화음처럼 하나의 장면이 끼어들었다. 미희에게 그 추접스런 입술을 찍어대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버린 것이다. 난 정말로 그 남자를 질투했을까?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어겨버린 미희를 마음속으로 원망했을까?
“미안해.”
“뭐가요?”
입술을 떼어낸 미희가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때의 남자와 지금의 내가 똑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하니 자괴감이 엄습했다. 자괴감 하나뿐이었다면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질투, 후회, 회의…… 그리고 죄책감까지. 온갖 감정이 한데 섞여서 나를 괴롭혔다.
‘차라리 그 때 네 마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목구멍까지 그 말이 불쑥 차올랐다. 하지만 입에서는 기어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 정말 내키지가 않아. 이건 정말 선을 넘는 것 같아. 아내가 알기라도 하면……”
“…….”
그러자 가까이서 나를 올려다보던 미희가 한숨을 쉬고는 내게서 멀어졌다. 쌀쌀맞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희를 보며 나는 아차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대로 바를 나가버리는 미희의 뒤를 쫓아 나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처제! 잠깐만……”
나도 모르게 처제 소리가 또 나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미희는 계단 아래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미희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늘 뭐해?”
미희는 내게 관심도 두지 않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덩그러니 옆에 서서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올래? 나 술 한잔 사줘.”
짧은 통화였지만 내 신경을 곤두세우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휴대폰을 백에 넣은 미희가 나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갈게요.”
“어, 어디 가?”
“바람을 맞았으니 다른 데서 허전함을 채울 수밖에요. 이제는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처제!”
또각또각 굽 소리만 남기고 미희는 그렇게 가버렸다.
*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외투를 벗을 생각도 못하고 하염없이 소파에 앉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기분 나쁜 상상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미희의 모습이 그려졌다.
‘오빠라니, 대체 어떤 자식을…… 아, 아니야, 하긴 누굴 만나든 처제 마음이지. 신경 쓰지 말자. 그래야만 해…….’
거실에 걸린 아내와의 결혼사진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내가 올바르게 처신해야만 할 때였다. 처제의 의문스런 변덕에 휘둘려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열두 시가 넘었는데……’
자정이 넘도록 미희에게서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 없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미희에게 짤막한 문자 하나를 보냈다.
‘처제, 집에 들어갔어?’
보낸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메시지의 읽음 표시가 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장 한 줄 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처제?”
“왜요?”
“어, 어디야? 아직 밖은 아니지……?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형부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화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보자. 아직도 밖에 있으면 내가 데리러갈게.”
그 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진득하게 뭉친 낯 뜨거운 숨결의 덩어리가 내 귀를 생생하게 자극했다.
“하아…… 아아……”
“처, 처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아흑…… 아아악……”
처음에는 그저 희미한 숨소리에 불과했던 것이, 순식간에 격정적인 신음으로 변해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손을 덜덜 떨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처제! 미희야!”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악몽 같은 상상에 맞서다 나는 결국 지쳐버렸지만 뇌는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두웠던 집안에 슬그머니 햇빛이 내리깔릴 때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움찔 놀라 고개를 드니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미희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나서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어디서 뭐하다 왔어?”
조곤조곤 얘기를 꺼내려고 노력했지만 입에서 나온 말투는 그렇지 못했다. 추궁하는 그 태도를 미희는 코웃음 치며 받아넘겼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윤미희!”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니 그제야 미희는 조금 움찔했지만 여전히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는 억지로 돌려세웠다.
“대답 안 할 거야?”
“남자 만나서 하룻밤 자고 왔어요. 그게 뭐 어때서요?”
“뭐……?”
“제 나이에 남자 만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형부가 제 아빠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시는 것 같네요. 그리고 제 일에 더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나는 네 선생……”
하지만 끝까지 씹어뱉지도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선생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사사건건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 것은 미희가 아니라 나였다.
“…….”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 얼굴에 미희의 눈동자가 머물렀다.
“태도를 확실히 해주세요. 제 형부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저를 소유하고 싶은 건지…….”
“무, 무슨 말을…… 난 그런 생각해본 적……”
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까. 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선처럼 들릴까봐 두려운 걸까.
“간밤에 있었던 일이 그렇게 궁금하세요? 좋아요.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뾰족한 가시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마디마디 뚜렷하게 내 귀로 파고들었다.
“남자를 만났어요. 예전부터 저를 계속 쫓아다녔던 대학 선배였죠. 만나서 술을 마셨고, 기분이 안 좋아서 금세 취해버렸어요.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저를 그 남자가 어딘가로 이끌고 가더군요. 형부도 대충 짐작이 가시죠? 솔직히 말하면 뿌리칠 수도 있었겠지만 전 그러지 않았어요. 저는 저를 솔직하게 욕망해주는 사람이 좋거든요.”
“…….”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남자는 짐승처럼 달려들었어요. 제 옷을 하나하나 벗겼고, 순식간에 절 알몸으로 만들었죠. 저는 침대 위로 던져졌어요. 내 위에 올라탄 남자는 사정없이 구석구석 날 만지고 더듬었어요. 기분 좋은 손길은 아니었지만 저항하지도 않았죠. 가슴을 주무르고, 배를 더듬고, 그리고는 더 아래로 내려와서……”
뒤로 갈수록 미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그만큼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귓전에 입을 가져다댄 미희는 나를 애태우듯 뒷말을 이었다.
“형부도 남자니까 아시죠? 그 남자가 내 안으로 파고들어왔을 때…… 내 몸을 깔아뭉갠 채로 신음하며 몸을 떨더군요. 나를 갖고 싶어 하던 남자가 마침내 나를 가졌을 때 보여주는 반응은 참 재미있어요. 그 황홀해하던 모습이란…… 호호호.”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를 분노가 대신하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미희를 바닥에 넘어뜨린 후였다. 내 몸 아래 깔린 미희의 옷을 나는 짐승처럼 하나하나 벗겨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희의 몸을 유린한 그 남자에 대한 상상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모든 행동과 손길 하나하나를 나의 행위로 덮어버리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았다. 미희의 순수한 마음을 거절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어제 내가 태도를 확실히 했더라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을 텐데…….
한번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했다는 게 너무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선생님……. 저를 갖고 싶다고 말해요.”
“갖고 싶어.”
그동안 이성의 틈에서 고뇌해왔던 게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그 대답은 쉽게 흘러나왔다. 미희의 만족스런 웃음을 보면서도 부끄럽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내와의 결혼사진이 의식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 자식이 널 이렇게 만졌어?”
미희의 스웨터를 처참하게 찢어발기고 그 사이로 젖가슴을 끄집어냈다. 속옷 하나 없는 물컹한 맨가슴이 출렁이며 튀어나왔다. 나를 위해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건데, 그 꼴을 누군지도 모를 사내새끼가 봤다는 생각을 하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만졌냐고? 어서 말해!”
“하아…… 더 뜨겁게, 더 세게……”
이미 가슴이 으깨져라 힘껏 쥐어짜고 있었는데도 미희는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 속에선 질투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난 미희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는 유두를 짓이길 듯이 거칠게 빨아 당겼다.
“아아악……!”
뾰족한 신음성이 미희 입에서 새어나왔지만 만족이 되질 않았다. 그대로 젖무덤을 희롱하다가 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배꼽에 잠시 머물렀던 혀끝이 그대로 내려와 깊숙한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악…… 선생님……!”
그 선생님 소리가 얼마나 나를 사정없이 발가벗기는지 미희는 알까. 정신없이 팬티를 끌어내리고 허벅지 안쪽에 코를 파묻으니 너무나도 자극적인 암컷의 향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암캐 같은 년……”
“좋아요. 선생님 그런 모습…… 너무 좋아.”
이것은 미희를 향한 나의 체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겁도 없이 나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찢어버릴 것처럼 활짝 열어젖혔다.
“선생님…… 옛날 얘기를 해드릴까요?”
“뭐라고?”
미희는 열에 달뜬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서서히 손을 내려 자신의 음부를 더듬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음순 위쪽에 자리 잡은 오돌토돌한 돌기를 마구 문질렀다. 그렇게 클리토리스를 스스로 애무하면서 미희는 내게 속삭였다.
“전 가끔 이렇게 선생님 생각을 하면서 자위를 했어요. 분필을 쥐고 있던 선생님의 손이 이렇게…… 내 가슴을 꽉 쥐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몰래 흥분하곤 했었죠.”
“…….”
미희의 다른 한 손이 그녀 자신의 젖가슴 한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다음엔 선생님과 내가…… 하나로 이어지는 상상을 했어요. 선생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떤 기분일까? 선생님도 나만큼 흥분할까? 나를 마치 부숴버릴 것처럼 끌어안아주면 난 그대로 녹아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여기가 이렇게…… 축축하게 젖어들곤 했죠. 보이시나요? 벌써 이만큼 젖은 거……”
미희는 음부를 문질렀던 손가락을 들어, 끈끈하게 묻어있는 애액의 흔적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에 반응하듯이 내 물건 끄트머리에서도 무언가가 찔끔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밤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얼마나 홀로 외로웠는지 아세요?”
“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골이 띵하게 울렸다. 미희의 손길이 넋 나간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묻었던 애액 줄기가 고스란히 뺨에 옮겨졌다.
“그, 그럼…… 거짓말이었단 뜻이야?”
“순진하시긴.”
앙큼하게 웃음 짓는 미희……. 그녀가 내 머리꼭대기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와서 말 바꾸진 않으실 거죠? 선생님…… 호호.”
“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말은 더 필요 없었다. 나는 결국 그렇게 그녀에게 함락되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응원에 감사합니다.. ^^
그러고 보니 새해 인사를 잊었네요
조금 늦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3부
“안녕하세요. 김윤경이에요.”
“네, 윤경 씨…… 반가워요. 최민수입니다.”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지인의 소개로 여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여자 이름이 윤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만큼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여인이지만, 단 하나 분명히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녀가 술을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었다.
“식사하고 나서 술 한 잔 하실래요?”
“술이요?”
소개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것도 여자 쪽에서 먼저 술자리를 권유해오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다지 꺼릴 일도 아니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속에서 눈앞의 여자보다 훨씬 더 어리고 순수한 다른 여자 한 명이 떠올렸다.
‘미희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도 지금쯤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무 살의 여대생이란 그 이름만으로도 한창 들뜨고 설렐 시기가 아닌가. 나는 이따금씩 미희가 그 때의 약속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까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미희 생각에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미희는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로 내게 연락이 부쩍 줄었다. 비록 예상했던 수순이긴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씁쓸했다. 그러게 왜 그런 약속을 해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었는지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좋아요…… 그러죠.”
그 날은 유독 공허함이 차올랐다. 다른 여자를 만나는 와중에 자꾸만 미희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라서 마지못해 나오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가끔 오는 곳이에요.”
“혼자 오시는 건가요?”
“네.”
그녀는 나를 조용한 칵테일 바로 안내했다. 코스를 알아서 이끌어가는 배려에는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꽤 멋들어진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잔을 기울였다.
“보기와는 달리 술이 꽤 독하네요.”
“조금 약한 걸로 드릴까요?”
“괜찮아요.”
남자로서 자존심을 세우긴 했지만 그녀는 주당이었다. 내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음 쯤에도 그녀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흐트러진 꼴을 보였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민수 씨는 꽤 이른 나이에 교편을 잡으셨군요.”
“예, 운 좋게 임용을 한 번 만에 통과할 수 있었죠.”
“그럼 또래들에 비해서 준비해두신 게 많겠네요. 저는 이 나이 되도록 모아둔 것도 거의 없어서 항상 걱정이에요. 차는 있으신가요?”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주로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에게도 비껴갈 수는 없는 이야기였지만, 첫 만남에서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서 대충 대꾸해주며 술잔만 홀짝였고 취기는 갈수록 올랐다.
“어머, 요새 어린애들은 참…… 호호.”
그러다 문득 윤경 씨의 웃음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날의 기억을 내가 여태껏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도 오로지 그 장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경 씨가 가리키는 곳에 내 시선이 따라 머물렀고, 나는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미희……?’
그 자리에서 나는 미희를 보았다. 교복차림이 아닌 모습의 여대생 미희, 이제는 스무 살의 미모가 물씬 피어오른 내 제자 윤미희가 그곳에 있었다. 얼굴도 모를 한 남자와 다정하게 몸을 꼭 붙인 채로, 유리잔을 홀짝이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나는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윤경 씨가 왜 미희를 보고 웃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미희를 끌어안고 술을 마시던 그 남자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미희에게 키스했다. 미희의 얼굴 곳곳에 남자의 질척한 입술세례가 찍혔다.
“아직 어린애들 같은데 참 맹랑하네요. 우리 때만 해도 저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
만약 내가 그 순간 정말로 미희의 담임선생이고 싶었다면, 하다못해 가까이 다가가서 핀잔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광경 앞에서 내 마음속 무언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이게 당연한 거야.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원망하지 않겠다고 내 입으로 약속까지 해놓고, 새삼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왜 배신감을 느낀단 말인가? 차라리 그 꼴사나운 애정행각을 선생으로서 따끔하게 꾸짖을 수는 있어도, 내가 이런 처참한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지럽게 빙글빙글 흔들리는 머릿속을 애써 추스르며 난 윤경 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옮기죠.”
“어디로요?”
“더 조용한 데로 가서 한 잔 더해요.”
“어머…… 벌써 얼굴이 좀 빨간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도망치듯 바를 걸어 나오면서, 나는 끝까지 미희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
“웨엑!”
“괜찮아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변기에다 대고 한바탕 실컷 토했다. 그 당시 나는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나를 구태여 원룸까지 차로 태워준 윤경 씨에게 고맙고 또 창피했지만, 뭐라 한마디 인사조차 제대로 건넬 수가 없었다.
윤경 씨는 나를 방에 넣어주고 나서도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따라 들어와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마셨던 것들을 그렇게 모조리 게워내고 나자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고, 차츰 내가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윤경 씨…… 초면에 이런 꼴이나 보이고……”
“독특하긴 하네요. 첫 만남에서 토하는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부끄럽군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
이어졌던 술자리에서 나는 주량을 한껏 초과해버렸다. 윤경 씨는 나보다 더 많이 마셨음에도 오히려 겉보기에 멀쩡해보였다. 남자로서 그녀를 술로 이겨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었지만, 그와 별개로 내 밑바닥이 마구 파헤쳐진 기분이었다.
“이, 이제 괜찮아요. 그만 가보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고…… 또 미안했어요.”
“…….”
윤경 씨가 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이런 추태를 보인 남자를 그녀가 보고 싶어 할리도 없는데다 나 또한 그녀와의 만남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거라도 좀 드세요. 숙취 음료에요.”
“아, 아니…… 윤경 씨.”
하지만 그녀는 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엉겁결에 나는 그녀를 방으로 들였고 그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선뜻 들어섰다. 그녀가 손에 쥐어준 초록색 유리병을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나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윤경 씨.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음…… 왜 물어보시는 거죠?”
“제가 윤경 씨라면 아마 저 같은 사람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것 같아요.”
윤경 씨는 그저 픽하고 한번 웃고 말았다.
“글쎄요. 맘에 든다면 어쩌시려고요?”
“오늘은 혼자 있기 싫어서요. 같이 있어줄래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정말 싸구려처럼 느껴지는 질 낮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
윤경 씨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입술을 덮쳤다. 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에 대신 있는 것만 같았다. 뱃속에서 공허함으로 뭉친 덩어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내 팔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아……!”
뒤엉킨 몸이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옷가지들이 방바닥에 차례차례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윤경 씨의 나직한 신음이 방 안에 울렸다.
*
절정에 오르는 순간, 나는 무심코 윤경 씨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절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내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미안해요.”
“…….”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떠났다. 우리는 그 후로 만나지 않았다.
*
“저 왔어요, 선생님!”
“처…… 아니, 미희야. 밥은 먹었어?”
미희는 이른 아침부터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섬세하게 화장이 되어있는 그 새하얀 얼굴을 마주하자, 어제 차 안에서 내 물건을 입으로 빨아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헤헤, 아니요. 선생님한테 요리해주려고 이것저것 사 왔어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미희……. 이미 처제와 형부로서의 선을 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희에게서는 별다른 고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미희가 나를 형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선생님! 밥 먹고 시내 나가서 오붓하게 데이트할까요? 네?”
“데이트……?”
그 어감이 못내 심상치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벽에 걸린 결혼사진 속의 아내가 왠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에요. 이건 추억의 요리거든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요.”
부엌에서 한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미희는 예쁜 접시에 음식을 담아 식탁에 올렸다. 샛노란 계란이 씌워진 그 알록달록한 요리를 보자마자 나도 덩달아 옛날 생각이 났다.
‘오므라이스……’
실없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날의 기억을 미희는 고스란히 밟아가고 싶었던 모양인지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영화를 보러 가자며 나를 보챘다.
“선생님, 어서요. 이러다 늦겠어요. 시간은 금이란 말예요.”
“아, 알았어.”
촐랑촐랑 재촉하는 미희에게 이끌려 걷다보니 어느새 영화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상영관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꾸만 미희가 내게 몸을 기대오는 것이 느껴져 나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 미희야……”
“네?”
왼팔에 가슴이 닿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텐데도 미희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속눈썹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미희가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죄지은 것처럼 다시 시선을 돌렸다.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왜요? 불편하세요?”
“그게…… 조금.”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해드릴게요.”
미희는 아예 팔걸이를 위로 올려버리더니 마치 한 의자에 둘이 앉을 것처럼 더욱 몸을 포개왔다. 괜한 말을 꺼냈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옆에서 어쩐지 미희가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것이 느껴졌다. 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걸까……?
“히히, 선생님. 선물 받으세요.”
“뭔데……?”
나는 애써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미희가 옆에서 무엇 때문에 꿈틀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미희는 내 팔을 잡아끌더니 손바닥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보들보들한 촉감이 느껴져 무심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미, 미희…… 너……”
“맘에 들어요?”
란제리 브래지어 하나가 덩그러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멍청하게 얼이 빠져있는 내 얼굴에다 대고 미희는 살며시 속삭였다.
“그거, 방금 벗은 거예요. 기념으로 드릴게요.”
“…….”
조금 전까지 살갗에 닿아있었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듯, 그 속옷에서는 은은한 온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자극적이었던 건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그 온기가 아니라 오히려 뇌를 헤집어놓는 나의 상상이었다.
‘노브라……?’
얇은 스웨터 너머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려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기대오는 몸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연약하게 뭉클 으깨지는 그 살덩이의 감촉에 나는 숨이 가빠져왔다.
“이따가 팬티도 드릴까요?”
“자, 장난치지 마, 처…… 아니, 미, 미희야……”
한손에 미희의 속옷을 쥔 채로,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
“호호호, 호호호호호.”
“왜 웃어……?”
“우리 선생님 너무 귀여워서요.”
데이트는 저녁 무렵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미희는 그 날과 비슷한 코스로 나를 계속해서 이끌었다. 딱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때에는 커피를 마셨던 것이 지금은 술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미희를 따라 들어선 칵테일 바에서, 나는 문득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던 미희의 모습을…….
“미희야.”
“네?”
나는 미희에게 묻고 싶었다. 분명 그 시절 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을 텐데도, 지금에 와서 내게 이런 변질된 형태의 미련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리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미희를 원망하듯 추궁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른으로서 남은 한 조각 자존심이, 그 꼴만은 안 되겠다며 나를 간신히 자제시키고 있었다.
“호호…… 선생님과 둘이서 술을 마시다니. 생각해보면 처음이지 않나요?”
“그렇구나…….”
화려한 빛깔로 반짝이는 칵테일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나는 문득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윤경 씨의 존재를 떠올려냈다. 하지만 진정으로 떠올렸던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 날 그녀와 있었던 기억이었다. 행여나 오늘도 취하게 될까봐 나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선생님. 우리 이거 마시고 오붓한 곳으로 갈까요?”
“오, 오붓한 곳……?”
“호호, 모른 척 하시긴. 이제는 고등학생이랑 데이트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선생님이랑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걸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얘기일까? 천지분간을 못하는 처제의 철없는 소리라 치부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그 적나라한 유혹에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말과 행동이 그저 장난이기를 바랐다.
“왜 말이 없으세요?”
“…….”
딱딱하게 굳어있는 나를 미희가 손끝으로 건드려왔다. 허벅지에 그 손길이 닿자 반사적으로 어제 일이 떠올라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 뒤로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대답 없는 그 입이 밉네요.”
턱을 끌어당기는 손이 느껴졌고, 다음 순간 입술이 농락당했다. 어제 느꼈던 그 보드라운 입술의 맛이 혀끝으로 전해져왔다.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났고,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바보처럼 또 그렇게 녹아내렸다.
그 때 하얗게 물들어가는 뇌리를 비집고……, 불협화음처럼 하나의 장면이 끼어들었다. 미희에게 그 추접스런 입술을 찍어대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버린 것이다. 난 정말로 그 남자를 질투했을까?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어겨버린 미희를 마음속으로 원망했을까?
“미안해.”
“뭐가요?”
입술을 떼어낸 미희가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때의 남자와 지금의 내가 똑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하니 자괴감이 엄습했다. 자괴감 하나뿐이었다면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질투, 후회, 회의…… 그리고 죄책감까지. 온갖 감정이 한데 섞여서 나를 괴롭혔다.
‘차라리 그 때 네 마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목구멍까지 그 말이 불쑥 차올랐다. 하지만 입에서는 기어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 정말 내키지가 않아. 이건 정말 선을 넘는 것 같아. 아내가 알기라도 하면……”
“…….”
그러자 가까이서 나를 올려다보던 미희가 한숨을 쉬고는 내게서 멀어졌다. 쌀쌀맞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희를 보며 나는 아차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대로 바를 나가버리는 미희의 뒤를 쫓아 나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처제! 잠깐만……”
나도 모르게 처제 소리가 또 나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미희는 계단 아래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미희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늘 뭐해?”
미희는 내게 관심도 두지 않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덩그러니 옆에 서서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올래? 나 술 한잔 사줘.”
짧은 통화였지만 내 신경을 곤두세우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휴대폰을 백에 넣은 미희가 나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갈게요.”
“어, 어디 가?”
“바람을 맞았으니 다른 데서 허전함을 채울 수밖에요. 이제는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처제!”
또각또각 굽 소리만 남기고 미희는 그렇게 가버렸다.
*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외투를 벗을 생각도 못하고 하염없이 소파에 앉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기분 나쁜 상상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미희의 모습이 그려졌다.
‘오빠라니, 대체 어떤 자식을…… 아, 아니야, 하긴 누굴 만나든 처제 마음이지. 신경 쓰지 말자. 그래야만 해…….’
거실에 걸린 아내와의 결혼사진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내가 올바르게 처신해야만 할 때였다. 처제의 의문스런 변덕에 휘둘려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열두 시가 넘었는데……’
자정이 넘도록 미희에게서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 없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미희에게 짤막한 문자 하나를 보냈다.
‘처제, 집에 들어갔어?’
보낸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메시지의 읽음 표시가 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장 한 줄 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처제?”
“왜요?”
“어, 어디야? 아직 밖은 아니지……?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형부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화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보자. 아직도 밖에 있으면 내가 데리러갈게.”
그 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진득하게 뭉친 낯 뜨거운 숨결의 덩어리가 내 귀를 생생하게 자극했다.
“하아…… 아아……”
“처, 처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아흑…… 아아악……”
처음에는 그저 희미한 숨소리에 불과했던 것이, 순식간에 격정적인 신음으로 변해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손을 덜덜 떨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처제! 미희야!”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악몽 같은 상상에 맞서다 나는 결국 지쳐버렸지만 뇌는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두웠던 집안에 슬그머니 햇빛이 내리깔릴 때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움찔 놀라 고개를 드니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미희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나서도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어디서 뭐하다 왔어?”
조곤조곤 얘기를 꺼내려고 노력했지만 입에서 나온 말투는 그렇지 못했다. 추궁하는 그 태도를 미희는 코웃음 치며 받아넘겼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윤미희!”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니 그제야 미희는 조금 움찔했지만 여전히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는 억지로 돌려세웠다.
“대답 안 할 거야?”
“남자 만나서 하룻밤 자고 왔어요. 그게 뭐 어때서요?”
“뭐……?”
“제 나이에 남자 만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형부가 제 아빠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시는 것 같네요. 그리고 제 일에 더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나는 네 선생……”
하지만 끝까지 씹어뱉지도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선생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사사건건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 것은 미희가 아니라 나였다.
“…….”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 얼굴에 미희의 눈동자가 머물렀다.
“태도를 확실히 해주세요. 제 형부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저를 소유하고 싶은 건지…….”
“무, 무슨 말을…… 난 그런 생각해본 적……”
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까. 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선처럼 들릴까봐 두려운 걸까.
“간밤에 있었던 일이 그렇게 궁금하세요? 좋아요.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뾰족한 가시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마디마디 뚜렷하게 내 귀로 파고들었다.
“남자를 만났어요. 예전부터 저를 계속 쫓아다녔던 대학 선배였죠. 만나서 술을 마셨고, 기분이 안 좋아서 금세 취해버렸어요.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저를 그 남자가 어딘가로 이끌고 가더군요. 형부도 대충 짐작이 가시죠? 솔직히 말하면 뿌리칠 수도 있었겠지만 전 그러지 않았어요. 저는 저를 솔직하게 욕망해주는 사람이 좋거든요.”
“…….”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남자는 짐승처럼 달려들었어요. 제 옷을 하나하나 벗겼고, 순식간에 절 알몸으로 만들었죠. 저는 침대 위로 던져졌어요. 내 위에 올라탄 남자는 사정없이 구석구석 날 만지고 더듬었어요. 기분 좋은 손길은 아니었지만 저항하지도 않았죠. 가슴을 주무르고, 배를 더듬고, 그리고는 더 아래로 내려와서……”
뒤로 갈수록 미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그만큼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귓전에 입을 가져다댄 미희는 나를 애태우듯 뒷말을 이었다.
“형부도 남자니까 아시죠? 그 남자가 내 안으로 파고들어왔을 때…… 내 몸을 깔아뭉갠 채로 신음하며 몸을 떨더군요. 나를 갖고 싶어 하던 남자가 마침내 나를 가졌을 때 보여주는 반응은 참 재미있어요. 그 황홀해하던 모습이란…… 호호호.”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를 분노가 대신하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미희를 바닥에 넘어뜨린 후였다. 내 몸 아래 깔린 미희의 옷을 나는 짐승처럼 하나하나 벗겨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희의 몸을 유린한 그 남자에 대한 상상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모든 행동과 손길 하나하나를 나의 행위로 덮어버리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았다. 미희의 순수한 마음을 거절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어제 내가 태도를 확실히 했더라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을 텐데…….
한번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했다는 게 너무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선생님……. 저를 갖고 싶다고 말해요.”
“갖고 싶어.”
그동안 이성의 틈에서 고뇌해왔던 게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그 대답은 쉽게 흘러나왔다. 미희의 만족스런 웃음을 보면서도 부끄럽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내와의 결혼사진이 의식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 자식이 널 이렇게 만졌어?”
미희의 스웨터를 처참하게 찢어발기고 그 사이로 젖가슴을 끄집어냈다. 속옷 하나 없는 물컹한 맨가슴이 출렁이며 튀어나왔다. 나를 위해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건데, 그 꼴을 누군지도 모를 사내새끼가 봤다는 생각을 하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만졌냐고? 어서 말해!”
“하아…… 더 뜨겁게, 더 세게……”
이미 가슴이 으깨져라 힘껏 쥐어짜고 있었는데도 미희는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 속에선 질투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난 미희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는 유두를 짓이길 듯이 거칠게 빨아 당겼다.
“아아악……!”
뾰족한 신음성이 미희 입에서 새어나왔지만 만족이 되질 않았다. 그대로 젖무덤을 희롱하다가 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배꼽에 잠시 머물렀던 혀끝이 그대로 내려와 깊숙한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악…… 선생님……!”
그 선생님 소리가 얼마나 나를 사정없이 발가벗기는지 미희는 알까. 정신없이 팬티를 끌어내리고 허벅지 안쪽에 코를 파묻으니 너무나도 자극적인 암컷의 향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암캐 같은 년……”
“좋아요. 선생님 그런 모습…… 너무 좋아.”
이것은 미희를 향한 나의 체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겁도 없이 나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찢어버릴 것처럼 활짝 열어젖혔다.
“선생님…… 옛날 얘기를 해드릴까요?”
“뭐라고?”
미희는 열에 달뜬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서서히 손을 내려 자신의 음부를 더듬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음순 위쪽에 자리 잡은 오돌토돌한 돌기를 마구 문질렀다. 그렇게 클리토리스를 스스로 애무하면서 미희는 내게 속삭였다.
“전 가끔 이렇게 선생님 생각을 하면서 자위를 했어요. 분필을 쥐고 있던 선생님의 손이 이렇게…… 내 가슴을 꽉 쥐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몰래 흥분하곤 했었죠.”
“…….”
미희의 다른 한 손이 그녀 자신의 젖가슴 한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다음엔 선생님과 내가…… 하나로 이어지는 상상을 했어요. 선생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떤 기분일까? 선생님도 나만큼 흥분할까? 나를 마치 부숴버릴 것처럼 끌어안아주면 난 그대로 녹아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여기가 이렇게…… 축축하게 젖어들곤 했죠. 보이시나요? 벌써 이만큼 젖은 거……”
미희는 음부를 문질렀던 손가락을 들어, 끈끈하게 묻어있는 애액의 흔적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에 반응하듯이 내 물건 끄트머리에서도 무언가가 찔끔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밤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얼마나 홀로 외로웠는지 아세요?”
“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골이 띵하게 울렸다. 미희의 손길이 넋 나간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묻었던 애액 줄기가 고스란히 뺨에 옮겨졌다.
“그, 그럼…… 거짓말이었단 뜻이야?”
“순진하시긴.”
앙큼하게 웃음 짓는 미희……. 그녀가 내 머리꼭대기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와서 말 바꾸진 않으실 거죠? 선생님…… 호호.”
“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말은 더 필요 없었다. 나는 결국 그렇게 그녀에게 함락되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응원에 감사합니다.. ^^
그러고 보니 새해 인사를 잊었네요
조금 늦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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