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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 단편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18 862회 0건


** 바람이 남긴 흔적을 올려야 하지만, 연중은 절대 아니고, 쉬는 중입니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 글을 손에 잡을 맛이 안생겨요.

그래서 바람피는 심정으로, 옛날에 끄적거린 것을 약간 손질을 해서 올려봅니다.
너무 지루한 글 같죠? 반응이 어떤가 궁금하니까, 채찍질좀 해주세요. ... - Ja"dore -



=*=*=*=*=*=*=*=*=*=*=*=*=*=*=*=



1. 천성희 & 윤승연



[1]
3월 말. 그러니까 아직은 학기 초이다. 삭막하던 바깥 세상은 봄이 되어 황홀해진다. 이 해는 석달 전 지난 1월에 시작했지만, 지금에야 이 해가 제대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 해에는 앞으로 또 무슨 일들이 생길까? 철없는 새내기들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로 술렁거리던 학교도 점차 차분해진다.

그런데 정준호는 이런 바깥 세상의 분위기와는 담을 쌓고있다. 그는 곧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제는 2학년이 되고 나서 첫 과제이고, 또 이 과목의 중간고사 점수가 걸려있다. 그는 이 과제에 보름 정도를 투자해서, 자료를 조사하여 정리하고, 또 PT파일도 만들었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날도 있다.

정준호는 조규태, 천성희와 같은 조이다. 그런데 천성희는 조규태와 사귄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준호는 아직 잘 모른다.

프레젠테이션 하루 전날 세 사람은 시나리오에 따라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반복을 하자 천성희가 힘들다며 앙탈을 부린다. 준호는 천성희를 구슬러야 했다.



"하아앙. .. 너무 힘들다. 온 몸에 뼈 마디가 다 쑤시고 안아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어. 오늘은 밤샘을 해서라도 끝내자."
"천상희. 힘내. 오늘 하루만 잘 버티면 서방님 레벨이 달라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처럼 가냘픈 여자를 이렇게 혹사 시키냐?"
"뭐라고? 너 진짜 웃긴다."

"야아. 지금 그 말은 뭐지?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니?"
"왜 버러럭인데? 나는 그런 말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럼 네 눈에 내가 여자로 보이기는 해?"
"성희야. 억지 고만 부리고, .. 내일 PT 끝나면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내가 쏠께."

"야! 정준호!"
"어?"


짝.


"요게. 은근슬쩍 말을 피해?"

"여자인 것은 맞는데, 전혀 가냘프지 않다고. 이제 됐냐?"
"어라?"



천성희의 손이 또 올라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준호가 재빨리 도망친다. 천성희의 손이 허공을 휘젓고 내려온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조규태가 한마디 한다.




"야. 천성희. 오늘만 해도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그러다가 준호 등판이 남아나겠니?"

"너 지금 준호 편드냐? 그럼 규태 네가 도와주면 되겠네."

"내가? 뭘 어떻게 돕는데?"
"예를 들면 .. 대신 맞아주든가."

"얘가 뭐라는거야?"
"싫으면 그 입 닫으셔."



준호는 천성희를 여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한다. 천성희도 준호를 엄청 따르는 편이다. 천성희의 손이 준호의 등짝을 갈기면, 소리만 크고, 아프지는 않다. 천성희가 이렇게 때리려고 마음 먹고 덤비면, 준호는 차라리 그냥 맞아주는 때가 많다.

어떨 때에는 천성희가 준호에게 백허그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천성희는 그의 등에 가슴을 밀어붙인다. 완전 고의이다. 가슴의 크기는 별로인 것 같지만, 등에 와서 눌리면서 뭉클할 때에는 제법 짜릿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럴때면 준호는 입장이 난처해진다.



"소문으로는 사귄다는 남자가 따로 있다던데 말이야. .."




[2]
준호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나서 얼마 후에 교통 사고로 양쪽 무릎과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학교를 한 해 쉬어야 했다. 조규태는 재수를 해서, 준호랑 같은 나이이다. 그러니까 천성희는 준호나 규태보다는 한 살 어리다. 천성희는 준호나 규태를 친구처럼 대한다. 이들 세 사람은 작년 1학년 초에 만났고, 한 해 동안 같이 공부하면서 엄청 친해졌다.

작년에 처음에 만날 때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맥주 한두 잔이 들어가면 조규태가 천성희에게 나이를 트집 잡아서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천성희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저게 나이도 어리면서."
"웃겨. 촌스럽게 대학에서 무슨 나이타령? 학번으로 가야지."



이러는 천성희를 준호나 규태는 애교로 봐주었다. 그런데 맥주를 마시다보면 가끔 천성희가 조규태에게 오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조규태의 입은 귀에 걸리고, 그런 날은 천성희가 마신 술값도 조규태가 같이 낸다.



"얘는 자기가 돈 없는 날만 오빠래."
"그럼 공짜로 오빠하려고 했냐? 심뽀도 참."



이러면서도 천성희는 남자들이 자기를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천성희는 몸집도 약간 통통하고, 얼굴도 거의 수수한 편이다.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여대생의 표준형 정도이다. 공부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니다.

작년에 조규태가 천성희에게 그녀의 몸매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매일 한두 시간 정도 헬쓰장에서 런닝머신을 뛴다면, 뭔가를 기대해볼 수는 있을 텐데."
"관심 없거든. 그럴 정신이 있으면 공부나 더 하지."



천성희는 그런 일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게다가 합기도가 2단이라는 말로 남자애들의 기를 죽인다. 그런데 이 말은 뻥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규태나 다른 친구들이 준호가 천성희와 썸을 탈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조규태와 천성희에게서 의심스러운 정황 몇가지가 발견되었다. 짖궂은 애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끝까지 오리발이었다.

천성희가 준호의 등짝을 갈길 때에 조규태는 옆에서 보고만 있다가 두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 하면서 농담을 한다.



"너 그러다가 준호랑 정든다."
"글쎄? 그런 말 하는 네가 더 의심스럽거든."

"내가 뭘 어쨌는데?"
"느끼하게 자꾸 훔쳐보잖아. ..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참나. 훔쳐볼 데가 뭐라도 있어야 훔쳐보지."
"야!"



천성희는 때리려는 손짓을 하지만, 조규태는 벌써 도망쳤다. 조규태는 천성희에게 맞는 것을 싫어하고, 또 어쩌다 도망치지 못하고 맞게 되면 짜증도 잘 부리는 편이다. 준호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쟤네 둘이 사귀는 것 맞아?"



그렇지만 사실 확인을 위해서 당사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작년 연말에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프레젠테이션은 무사히 끝났다. 파일도 거의 준호가 만들었다. 발표하루 때에는 처음에는 조규태와 천성희가 햇다. 나머지 잘반은 준호가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했다. 점수는 훨씬 나중에 나왔는데, A이다. 준호는 그날 저녁에 약속대로 스테이크를 샀다. 다른 애들은 또 재수없다고 투덜거렸다.




[3]
지난 해에 준호는 화학과에 가기로 하고 대한 대학 자연계열로 입학했다. 그 때 화학과에는 공부벌레들이 있었다. 얘네들은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도서관으로 간다. 남자애들 보다는 여자애들 중에 이런 독종들이 많다.

준호가 이런 여자애들을 보면, 여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도저히 여자라고 봐줄 수 없다. 그 중에 천성희라는 애가 있는데, 얘는 완전 독종 원조이다.

이 공부벌레들이 화학과에 들어온 이유는 화학을 전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나중에 PEET(약학 전문대학원 입학 자격 시험) 또는 MEDT(의학 전문 대학원 입학 자격 시험)에 응시하려는 애들이다. 가장 골치아픈 과목은 유기화학이고, 이 과목 때문에 화학과에 온 것이다.

그렇지만 천성희나 조규태처럼 새내기들이 이렇게 공부하려면 웬만큼 독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바로 각종 모임이고, 이런 모임은 반드시 술자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슨 모임이 그렇게도 많은지. 환영회, 과 모임, 동아리 모임, 송별회, 동창 모임 등등 ..

그런데 화학과에서는 여자애들 네 명, 그리고 남자애들 두 명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공부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을 준호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얘네들 일곱명은 똘똘 뭉쳐서 7인방을 만들게 되고, 이들은 동아리가 아닌 동아리인 셈이다. 다른 애들은 이런 얘네들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저것들은 허구헌날 붙어서 살아."
"지독한 공부벌레들. 왕재수 덩어리야."
"말을 말자. 존재 자체가 민폐야."
"아오. .. 완전 밥맛이라니까."



[4]
얘네들과 준호, 그러니까 이들 7인방은 모임이라는 것들과는 담쌓고 공부만 한다. 이들 7인방 중에서도 조규태, 천성희 그리고 정준호는 3인방이다. 이들 말고 또 4인방이 따로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독한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라면서 욕을 먹는다. 준호는 자기가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맞지만, 이기주의자는 절대로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누구도 그의 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준호도 수업이 일찍 마치는 날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는 한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자주 가지도 못하고, 또 가더라도 다른 애들처럼 오랜 시간을 공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준호가 저녁마다 과외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고등 학생들에게 과외 수업을 해서 돈을 제법 짭짤하게 벌고 있다.





[5]
이제 중간고사가 다가온다. 시험 한 달 전이면 7인방이나 다른 개인주의자인 공부벌레들은 긴장한다. 그렇지만 모임은 아직도 계속된다.

한 쪽에서는 시험 때문에 긴장하고, 전운이 감돈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젊음과 낭만 때문에 술을 마시며 밤을 불태운다. 누구는 공부해서 허리가 아프고, 또 다른 누구는 클럽을 거쳐간 원나잇 때문에 온몸이 쑤시고 뼈 마디마디가 아프단다.

조규태와 천성희는 과목마다 시험 족보를 구해오고, 문제마다 답안지 만들기에 바쁘다.


그러니까 4월 초였다. 중간고사 한 달 정도 전이다. 준호는 천성희, 조규태와 함께 도서관 옆에 있는 휴게실에 있었다. 이들 트리오는 천성희가 구해온 시험 족보라는 것을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준호에게 그의 친구들은 질문을 했고, 그는 아는 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특히 분자의 구조식을 보고 분자의 모형을 판단하는 것에서는 준호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천성희는 이쪽으로는 도무지 답이 안나온다면서 준호에게 물어본다.



"메테인이 이성질체가 없으니까, 정사면체 피라미드 구조야.
그럼 H-C-H 결합각은 당연히 109.5도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그러냐고."

"그건 화학이 아니고 기하학인데. 모형을 만들어보면 그렇게 나오거든."
"그래? 그런데 이 간단한 얘기를 왜 나만 모르지?"

"천성희. 너는 자꾸 까먹잖아. 이번에는 제발 단단히 외워둬."
"뭐야? 너 방금 날더러 돌대가리라고 했지?"

"얘가 왜 이래? 너 지금 너무 민감하거든요."
"생리할 때가 다 돼가서 그런다. 왜? 불만 있어? 하하."



천성희가 거침없이 뱉어대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조규태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짓을 한다. 준호는 이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이 때 조규태가 끼어든다. 그는 항상 이렇게 끼어들기를 해서 화를 자초하기도 한다.



"진짜 말 거칠게 막 하네. 너 방금 한 그 말 19금 아니니?"
"작년에는 19살이었지만, 지금은 스무살이거든요."

"확실한거니? 만으로?"
"그래. 만으로."

"뻥치시네."
"뻥? 그럼 민증 까?"

"됐다고 해. 작년에 봤거든."

"너네 둘이는 진짜 이상한 커플이야. 사귄다면서 나이도 제대로 모르냐?"
"그것 봐라. 그러니까 우리가 제대로 사귄다는 말이 이상한 말 아니니?"





[6]
나중에 준호는 휴게실에서 열람실로 돌아와서 자기 자리로 갔는데, 그의 책에서 초록색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족보 때문에 급하거든. 전화 부탁해.
010-XXXX-XXXX, 화학과 2학년 윤승연"



단순하면서도 깜찍한 아이모티콘 그림과 또박또박 쓴 글씨체를 보면서 그는 이 여자의 성격이 제법 암팡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윤승연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는 남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한 마음에서 당장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때는 벌써 준호의 과외 수업 시간이 임박했으므로, 그는 급히 나가야 했다. 윤승연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또 시험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기 때문에,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 날도 준호가 과외 수업을 끝내고 나니까 자정이 넘었다. 그는 컵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후에 녹초가 되어 뻗어서 잠을 잤다. 윤승연의 메모지는 아직 책갈피에 꽂혀서 가방 속에 들어있었고,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7]
준호가 이렇게 잊어버리는 것은 그 날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치매는 아니다. 그에게는 하루 하루는 거의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고, 오후에 수업이나 실험이 끝나면 도서관에 간다. 저녁에 집에 오면 과외 수업을 하고, 끝나면 야식으로 컵라면이나 김밥을 먹고 잔다. 가끔은 그가 자기 학생들과 치킨이나 피자를 먹기도 한다.

준호의 엄마는 가끔 그의 오피스텔에 온다. 그의 엄마가 이러는 준호를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진짜 딱하고 불쌍해서 못보겠다."
"걱정 끼처드려서 죄송한데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내가 선택한 것인데요."

"이제 대학생이니까 쉬기도 하고, 여자친구도 만들고, 놀고 그래야지."
"엄마도 참. 공부해도 뭐라고 하시네."

"공부 때문이 아니거든.
밤마다 과외 한다고 유별을 떨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야."

"이제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해요."




[8]
다음 날 점심 시간이었다. 준호는 천성희와 다른 친구들과 같이 교내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다들 시험 준비한다고 공부에 찌들어있는 모습이다. 준호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면서 걷느라고 앞 쪽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앞서 가던 한 여학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어서 자칫하면 준호가 그녀와 부딪힐 뻔 했다. 준호는 투덜거린다.




"뭐야아. .. 갑자기. .."




그는 일단 걸음을 멈춘 후에 그녀를 피하면서 옆으로 돌아서 계속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준호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혹시 정준호?"
"예?"



준호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준호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엄청 자주 본 얼굴이다. 서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휴학하고 이번에 2학년으로 복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이 가던 그의 친구들도 걸음을 멈추고 서서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천성희는 그냥 무시하고 계속 가자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는 준호의 팔을 잡아 당긴다. 윤승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준호에게 물었다.



"점심 먹고 바로 수업이니?"
"예."

"그럼 지금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인데요?"

"하아. 나 윤승연이야. 기억 나니?"
"아. 그 메모. .. 그니까 .. 그게. .. 어제 .."

"왜 이렇게 버벅대? 너 이렇게 애교 부리니? 하하하."
"애교가 아니라 .."




[9]
준호의 눈길은 순식간에 그녀를 스캔한다. 하얀 야구모자. 뽀얀 얼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초록색 봄 점퍼. 그 안에 입은 빨간 목티. 하얀 운동화. 볼록 솟은 가슴. 만일 뽕이 아니라면 제법 크다. 천성희의 가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갸름한 얼굴에 있는 짙은 눈매와 오똑 솟은 콧날은 쌀쌀맞고 차가운 분위기이다.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성격은 엄청 까칠할 것 같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완전 냉동녀였을 것이다.

그런데 준호는 윤승연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원래 독종인 여자들이 공부하다가 뭔가 비장한 결심을 할 때에 짓는 표정이다. 순간적으로 준호는 그냥 빠져나가서 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규태야. 너네들 먼저 가. 금방 따라 갈게. 내 밥도 같이 부탁해."

"살아서 다시 만나자."
"준호, 너 진짜 걱정된다."

"뭐가?"



그의 친구들은 걱정하는 말을 남기고 앞서 가버렸다. 준호는 그들이 무엇을 걱정한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천성희는 여전히 준호의 팔짱을 낀 채로 그의 곁에 남아있다. 천성희는 몸을 약간 돌려서 자기 가슴을 준호의 팔에 대고 지긋이 누른다. 윤승연이 그러는 천성희를 쳐다본다.





[10]
준호는 그를 보고있는 윤승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어제 왜 전화 안했어? 내가 너한테 그렇게 우습게 보였니?"

"이름만 보고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
모르는 사람을 내가 왜, 우습게 본다는 거야?"

"하아. .. 그럼 어제 전화하라니까 왜 안했는데? 급하다고 했잖아?"
"어제는 엄청 바빴어."

"엊저녁에 도서관에서 일찍 나가는 것을 내가 다 봤거든. 미팅에 간거였어?"




[11]
윤승연은 준호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 같다. 그런데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고, 제법 귀엽다.



"너 혹시 내가 여자라서 씹었니?"

"아니. .. 그게 아니라 ..
윤승연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는 남자인 줄 알았거든. 여자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너는 남자한테는 전화 안하고, 여자한테만 하니?
그럼 내가 그 메모에 여자라고까지 적을걸 그랬나?"

"나 변태 아니거든. 전화를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왜 이렇게 몰아세우지?"
"변명을 하시겠다? 해봐. 들어나 보자."

"어제는 알바 시간이 너무 급했고, 밤에 알바 끝났을 때는 너무 늦어서 뻗어서 잤다. 이제 됐냐?"
"어. 그래? .. 알바를 들고 나오니까 할 말이 없네."



이제야 카랑카랑하던 윤승연의 목소리가 제법 가라앉아서 조용해진다. 이제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아서 준호도 안심을 했다.





[12]
세 사람은 식당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까칠하던 윤승연이 조용하면서 부드러워진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는데?"
"다섯시. 실험이 있거든."

"그럼 실험 끝나면 오늘도 알바 가니?"
"아니. 오늘은 안가.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날이야."

"그럼 5시 반쯤 해서 앵발리드(Invalide)에서 볼까?"
"그러자. 그런데, 나 술은 잘 못하는데."

"괜찮아.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술은 나도 500 한잔이면 딱이야."
"이거 부담 가는데."

"얘가 또 엄청 소심이네. 정 그렇게 부담 가면, 저녁을 네가 사든가."
"그런 부담 말고."



준호에게는 윤승연과 저녁먹으러 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윤승연이 너무 귀엽고 예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말을 하지는 못했다. 천성희도 겉으로는 안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이제 거의 심문에 가까운 그녀의 질문이 끝난 것 같다.


* * * * *


4회까지 써 둔 글인데 .. 반응 좋으면 언젠가 또 올릴게요.

- Ja"d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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