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대로
2부
여우인지 곰인지 (3)
-*-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아니, 오랜만이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내가 설마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악몽을 꾸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꿈 속에서 나온 여자는 계속 내게 ‘ 거짓 ’ 이라는 단어만 몇 시간인지 모를 오랜 시간동안 계속 중얼거렸다.
“ 아, 아. 진짜…. ”
이런 개같은 꿈은 처음 꿔보는 것 같은데, 어쩐지 그 여자의 얼굴이 계속 변해서 더 소름이 끼쳤다.
김지은에서 윤소영, 윤소영에서 희주 선배, 희주 선배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앳된 여자로.
꿈 속에서 내가 아무리 달아나도 쫓아와 눈 앞에 나타나면서, 이내 내 손을 붙잡으며 ‘ 거짓 ’ 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내게 끝없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여인들의 기괴한 비명소리에 결국 기함해버리고 말았다.
“ 오싹하네, 정말. 이게 뭐야. 내가 아는 사람 총 출동이야? ”
온 몸에 흐르고 있는 식은땀보다 불쾌한 것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느끼고 있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옆에서 곤히 자고있는 김지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한 캔 꺼내 오프너를 이용해 따서 벌컥거리며 마셨다.
목을 축이자, 갈증이 조금 해소되면서 몸을 덥히던 짜증은 사라졌지만…
어쩐지, 계속 신경쓰인다.
“ 며칠 지나면 무슨 꿈을 꿨는지도 기억도 안 날텐데, 왜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거야? ”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내심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하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불타종처럼 전지전능한 물건도, 사실 이럴 때에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악몽의 영향인지,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도 어쩐지 조금 신경쓰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 다른 말도 좀 하지. 그거 한 마디밖에 못 하나? ”
그래서 더 소름끼치고, 오싹하게 느껴지는 개꿈이였다.
‘ 그래, 개꿈이겠지. ’
아니, 개꿈이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애초에 개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 부터가, 내가 그 재수없는 꿈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 기분 나빠지네, 이거. ’
어쨌건, 얼른 다시 맥주를 비워내고 침대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금세 잠이 깨버리고 나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자가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지루한 표정으로 희주 선배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여고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외를 인수인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어디서 이런 애를…
솔직히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인간들한테 죽도록 당하고 살았었기 때문에 이런 여자애를 보는 눈이 고울 수가 없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갖다 붙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꿈 속에서 봤던 그 한번도 본 적 없던 앳된 여자와도 인상이 비슷하게 생겼다.
‘ 그 꿈 진짜 재수 없는데. ’
여고생치고 꽤나 짙은 화장 때문에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름 눈썰미는 있다고 자부하는 내 눈에는 화장으로 아무리 가려도 이 강보라라는 당돌한 여자애의 맨얼굴이 어느 정도 보였다.
강보라는 나를 살짝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히히거리면서 희주 선배에게 다시 쫑알거렸다.
“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언니 후배에요? ”
“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야. 얘도 이 사람이 아니라, 이제 선생님이라고 불러. ”
“ 오빠 소리를 더 좋아할거요? 안 그래요, 오빠? ”
“ 나는 별로…. ”
그것도 그렇지만, 언제 봤다고 오빠람.
나는 커피를 쪼르륵 마시면서, 대충 그녀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하며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희주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 그런데, 선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가르치는건 잘 못해요. 해본 적도 없구요. 이제 입시 한창 하고있는 애꿎은 고등학생 인생 내가 망칠지도 몰라요. ”
애초에, 나는 그 지난한 리쿠르트를 정당하게 치른 것도 아니다.
교통사고 이후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난잡하고 제멋대로라서 내 기억에 확신을 가지지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다른 학생들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공부한 것으로 정당하게 시험을 치러서 들어간 것은 결코 아니였다.
이 부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불타종 특례입학 전형이랄까?
하지만 희주 선배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알듯말듯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얘 공부 엄청 잘 하니까, 가르칠 것도 없어. 조금 자제력이 부족해서, 틈만 나면 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찾아와서 공부하는지 안 하는지만 지켜보면 돼.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오는 거야. 그렇다고 페이가 낮은 것도 아니잖아. ”
“ 와, 언니 진짜. 그 동안 나를 학생이 아니라 꿀단지 취급한거에요? ”
“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야. 아무튼, 선생님 얘기할 때는 조금 가만히 있어봐. 그 정도로 하는게 없으니까 죄책감이 들어서 못 가르치겠어. ”
나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생각했다.
돈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급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자기만족이고, 내가 번 돈으로 김지은과 윤소영에게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다.
맛난 것을 먹여도, 좋은 옷을 입혀보고도 싶고. 좋은 곳도 가보고, 아무튼 그렇다.
‘ …. ’
집에서 부쳐오는 용돈은 온통 가계부에 보태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가계부 보태는 금액은 김지은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를 것 없는 금액이다.
괜히 내 욕심에 엄한 애 인생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 쪽에서 먼저 나를 거절할 수 있도록 나는 강보라라는 여고생에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태까지 열심히 공부했던거 아깝다고 생각하면 나한테 뭔가 배울 생각은 기대하지 말아요. 배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
“ 그런데 오빠, 한강 고등학교 나왔다면서요? 나 몰라요? ”
“ 학생도 절 모르는데, 제가 학생을 어떻게 알겠어요? ”
강보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집요하게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 그럼 오빠, 다른 동네 살아요? ”
“ 여의도 살아요. ”
“ 으흐흐, 존댓말 안써도 되는데. 아무튼, 내가 이런 점잖은 남자 좋아해서 합격. 언니, 나는 오케이에요. ”
그러면 자기보다 어리다고 마구잡이로 반말하는게 정상인가?
그건 그 사람의 인격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넉살이 좋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건 내 생각이고…
점잖은 남자는 뭐고, 초면에 이건 실례가 아닌가.
아무튼,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나는 프라푸치노를 바닥까지 비운 후에, 언짢은 목소리로 강보라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 내키지가 않네요. 저는 오케이 아닙니다. ”
“ 어, 왜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
“ 엄한 사람 인생 망칠 생각 없어요. ”
“ …. 너, 과외 구한다며? ”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희주 선배는 애써 화를 가라앉히는 듯한 표정으로 뺨을 느슨하게 풀며 미소지었다.
“ …. ”
“ 그러지 말고, 한번 해 봐. 보라 얘, 엄청 착한 애야. 말은 잘 듣지 않지만, 귀엽잖아. 배운 것도 바로바로 이해하고, 외우면 잊어버리지를 않아. 엄청 똑똑해. ”
“ 아닌데, 나 엄청 말 잘 들어요. ”
일단 귀엽다는 것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착한데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은 마이너스고,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으니 그런 이해력은 내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공짜 돈을 받는건 좋지만, 고3은 어쩐지 조금 부담스러운데….
“ 오빠, 한강고 나왔다면서요. 고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재밌는 얘기 해주면 안 돼요? ”
“ 그런거 없어요. ”
“ 하나도 없어요? ”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려버린 나는, 강보라의 궁금증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해 주었다.
“ 네, 하나도 없어요. 친구도 한 명도 없었어요. ”
“ 뭐야, 장난치지 마요.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
“ 왕따였는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
어쨌건 한 때의 지위를 이용해서 분위기도 성공적으로 다운시켰고, 이 정도면 제정신이 아닌 이상 이런 인간을 과외 선생이랍시고 데려다 쓰지는 않을것이다.
그렇지만, 희주 선배는 어쩐지 여유있어 보이는 듯한 표정이였다.
“ 만약 보라가 너한테 배우겠다고 고집부리면, 할거야? ”
“ 꿀이라면서요? 나중에 자기도 아니다 싶으면 자르겠죠. 안 그래요, 보라 양? ”
“ 네, 그러면 이제 오빠는 내 꿀벌이네요. ”
내가 잘못 들은게 틀림없겠지, 하는 생각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보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강보라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왜요? 계약서도 써야해요? ”
“ 돈 아까울텐데. ”
“ 네, 뭐. 그래도 서울대잖아요? 설마 아무 것도 안하겠어요? 나도 거기 갈거니까, 나중에 오빠가 길 안내라도 해줘요. 그 때는 선배라고 불러야 하나? ”
어쩐지 자신감 넘치는 표정, 그리고 나를 갖고 노는 듯한 말투.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데, 누구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 잃어버린 시절의 윤소영이 이랬을까. ’
그렇지만, 조금 건방지기는 하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 …. ”
하지만 할 말을 잃는 것에는 익숙한 인간이라서, 금세 다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물론, 말수가 적은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 아무 얘기라도 해봐요. 희주 언니한테 오빠 대학생활 물어볼까요? ”
“ 그런게 왜 궁금합니까? ”
“ 어라, 선생님한테 제자가 물어보는게 잘못된거에요? ”
강보라는 키득거리면서 나를 말끄러미 쳐다 보았다.
내게 아무 얘기나 하라고 말했으니, 한번 재밌는 이야기나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럴까요?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나…. ”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소싯적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 놓았다.
내 책상에 들어있던 처음 보는 여러가지 쓰레기나, 무관심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것, 매 시간마다 사라지는 사물함의 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물론, 진짜 교과서가 누구의 손에 들어 있었는지도 알려 주었다.
“ 이 정도면 어때요? ”
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강보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들으면서 가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얘기를 끝내고 씩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배시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우리, 괜찮은 시작인 것 같네요. 꿀벌 오빠. ”
안타깝게도 내가 작정하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여고생에게 던졌던 오답들은, 강보라에게는 하나같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2부
여우인지 곰인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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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아니, 오랜만이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내가 설마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악몽을 꾸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꿈 속에서 나온 여자는 계속 내게 ‘ 거짓 ’ 이라는 단어만 몇 시간인지 모를 오랜 시간동안 계속 중얼거렸다.
“ 아, 아. 진짜…. ”
이런 개같은 꿈은 처음 꿔보는 것 같은데, 어쩐지 그 여자의 얼굴이 계속 변해서 더 소름이 끼쳤다.
김지은에서 윤소영, 윤소영에서 희주 선배, 희주 선배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앳된 여자로.
꿈 속에서 내가 아무리 달아나도 쫓아와 눈 앞에 나타나면서, 이내 내 손을 붙잡으며 ‘ 거짓 ’ 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내게 끝없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여인들의 기괴한 비명소리에 결국 기함해버리고 말았다.
“ 오싹하네, 정말. 이게 뭐야. 내가 아는 사람 총 출동이야? ”
온 몸에 흐르고 있는 식은땀보다 불쾌한 것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느끼고 있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옆에서 곤히 자고있는 김지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한 캔 꺼내 오프너를 이용해 따서 벌컥거리며 마셨다.
목을 축이자, 갈증이 조금 해소되면서 몸을 덥히던 짜증은 사라졌지만…
어쩐지, 계속 신경쓰인다.
“ 며칠 지나면 무슨 꿈을 꿨는지도 기억도 안 날텐데, 왜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거야? ”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내심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하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불타종처럼 전지전능한 물건도, 사실 이럴 때에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악몽의 영향인지,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도 어쩐지 조금 신경쓰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 다른 말도 좀 하지. 그거 한 마디밖에 못 하나? ”
그래서 더 소름끼치고, 오싹하게 느껴지는 개꿈이였다.
‘ 그래, 개꿈이겠지. ’
아니, 개꿈이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애초에 개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 부터가, 내가 그 재수없는 꿈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 기분 나빠지네, 이거. ’
어쨌건, 얼른 다시 맥주를 비워내고 침대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금세 잠이 깨버리고 나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자가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지루한 표정으로 희주 선배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여고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외를 인수인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어디서 이런 애를…
솔직히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인간들한테 죽도록 당하고 살았었기 때문에 이런 여자애를 보는 눈이 고울 수가 없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갖다 붙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꿈 속에서 봤던 그 한번도 본 적 없던 앳된 여자와도 인상이 비슷하게 생겼다.
‘ 그 꿈 진짜 재수 없는데. ’
여고생치고 꽤나 짙은 화장 때문에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름 눈썰미는 있다고 자부하는 내 눈에는 화장으로 아무리 가려도 이 강보라라는 당돌한 여자애의 맨얼굴이 어느 정도 보였다.
강보라는 나를 살짝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히히거리면서 희주 선배에게 다시 쫑알거렸다.
“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언니 후배에요? ”
“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야. 얘도 이 사람이 아니라, 이제 선생님이라고 불러. ”
“ 오빠 소리를 더 좋아할거요? 안 그래요, 오빠? ”
“ 나는 별로…. ”
그것도 그렇지만, 언제 봤다고 오빠람.
나는 커피를 쪼르륵 마시면서, 대충 그녀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하며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희주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 그런데, 선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가르치는건 잘 못해요. 해본 적도 없구요. 이제 입시 한창 하고있는 애꿎은 고등학생 인생 내가 망칠지도 몰라요. ”
애초에, 나는 그 지난한 리쿠르트를 정당하게 치른 것도 아니다.
교통사고 이후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난잡하고 제멋대로라서 내 기억에 확신을 가지지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다른 학생들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공부한 것으로 정당하게 시험을 치러서 들어간 것은 결코 아니였다.
이 부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불타종 특례입학 전형이랄까?
하지만 희주 선배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알듯말듯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얘 공부 엄청 잘 하니까, 가르칠 것도 없어. 조금 자제력이 부족해서, 틈만 나면 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찾아와서 공부하는지 안 하는지만 지켜보면 돼.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오는 거야. 그렇다고 페이가 낮은 것도 아니잖아. ”
“ 와, 언니 진짜. 그 동안 나를 학생이 아니라 꿀단지 취급한거에요? ”
“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야. 아무튼, 선생님 얘기할 때는 조금 가만히 있어봐. 그 정도로 하는게 없으니까 죄책감이 들어서 못 가르치겠어. ”
나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생각했다.
돈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급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자기만족이고, 내가 번 돈으로 김지은과 윤소영에게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다.
맛난 것을 먹여도, 좋은 옷을 입혀보고도 싶고. 좋은 곳도 가보고, 아무튼 그렇다.
‘ …. ’
집에서 부쳐오는 용돈은 온통 가계부에 보태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가계부 보태는 금액은 김지은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를 것 없는 금액이다.
괜히 내 욕심에 엄한 애 인생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 쪽에서 먼저 나를 거절할 수 있도록 나는 강보라라는 여고생에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태까지 열심히 공부했던거 아깝다고 생각하면 나한테 뭔가 배울 생각은 기대하지 말아요. 배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
“ 그런데 오빠, 한강 고등학교 나왔다면서요? 나 몰라요? ”
“ 학생도 절 모르는데, 제가 학생을 어떻게 알겠어요? ”
강보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집요하게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 그럼 오빠, 다른 동네 살아요? ”
“ 여의도 살아요. ”
“ 으흐흐, 존댓말 안써도 되는데. 아무튼, 내가 이런 점잖은 남자 좋아해서 합격. 언니, 나는 오케이에요. ”
그러면 자기보다 어리다고 마구잡이로 반말하는게 정상인가?
그건 그 사람의 인격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넉살이 좋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건 내 생각이고…
점잖은 남자는 뭐고, 초면에 이건 실례가 아닌가.
아무튼,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나는 프라푸치노를 바닥까지 비운 후에, 언짢은 목소리로 강보라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 내키지가 않네요. 저는 오케이 아닙니다. ”
“ 어, 왜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
“ 엄한 사람 인생 망칠 생각 없어요. ”
“ …. 너, 과외 구한다며? ”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희주 선배는 애써 화를 가라앉히는 듯한 표정으로 뺨을 느슨하게 풀며 미소지었다.
“ …. ”
“ 그러지 말고, 한번 해 봐. 보라 얘, 엄청 착한 애야. 말은 잘 듣지 않지만, 귀엽잖아. 배운 것도 바로바로 이해하고, 외우면 잊어버리지를 않아. 엄청 똑똑해. ”
“ 아닌데, 나 엄청 말 잘 들어요. ”
일단 귀엽다는 것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착한데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은 마이너스고,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으니 그런 이해력은 내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공짜 돈을 받는건 좋지만, 고3은 어쩐지 조금 부담스러운데….
“ 오빠, 한강고 나왔다면서요. 고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재밌는 얘기 해주면 안 돼요? ”
“ 그런거 없어요. ”
“ 하나도 없어요? ”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려버린 나는, 강보라의 궁금증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해 주었다.
“ 네, 하나도 없어요. 친구도 한 명도 없었어요. ”
“ 뭐야, 장난치지 마요.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
“ 왕따였는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
어쨌건 한 때의 지위를 이용해서 분위기도 성공적으로 다운시켰고, 이 정도면 제정신이 아닌 이상 이런 인간을 과외 선생이랍시고 데려다 쓰지는 않을것이다.
그렇지만, 희주 선배는 어쩐지 여유있어 보이는 듯한 표정이였다.
“ 만약 보라가 너한테 배우겠다고 고집부리면, 할거야? ”
“ 꿀이라면서요? 나중에 자기도 아니다 싶으면 자르겠죠. 안 그래요, 보라 양? ”
“ 네, 그러면 이제 오빠는 내 꿀벌이네요. ”
내가 잘못 들은게 틀림없겠지, 하는 생각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보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강보라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왜요? 계약서도 써야해요? ”
“ 돈 아까울텐데. ”
“ 네, 뭐. 그래도 서울대잖아요? 설마 아무 것도 안하겠어요? 나도 거기 갈거니까, 나중에 오빠가 길 안내라도 해줘요. 그 때는 선배라고 불러야 하나? ”
어쩐지 자신감 넘치는 표정, 그리고 나를 갖고 노는 듯한 말투.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데, 누구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 잃어버린 시절의 윤소영이 이랬을까. ’
그렇지만, 조금 건방지기는 하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 …. ”
하지만 할 말을 잃는 것에는 익숙한 인간이라서, 금세 다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물론, 말수가 적은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 아무 얘기라도 해봐요. 희주 언니한테 오빠 대학생활 물어볼까요? ”
“ 그런게 왜 궁금합니까? ”
“ 어라, 선생님한테 제자가 물어보는게 잘못된거에요? ”
강보라는 키득거리면서 나를 말끄러미 쳐다 보았다.
내게 아무 얘기나 하라고 말했으니, 한번 재밌는 이야기나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럴까요?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나…. ”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소싯적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 놓았다.
내 책상에 들어있던 처음 보는 여러가지 쓰레기나, 무관심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것, 매 시간마다 사라지는 사물함의 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물론, 진짜 교과서가 누구의 손에 들어 있었는지도 알려 주었다.
“ 이 정도면 어때요? ”
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강보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들으면서 가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얘기를 끝내고 씩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배시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우리, 괜찮은 시작인 것 같네요. 꿀벌 오빠. ”
안타깝게도 내가 작정하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여고생에게 던졌던 오답들은, 강보라에게는 하나같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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