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꼬여버린 내 인생
엠마가 우리에게 와서 내 뺨에 키스한다. 그런데 엠마를 보는 레나테라는 여자의 시선이 곱지는 않은 것 같다. 엠마와 레나테가 거의 나란히 서있는데, 레나테는 엠마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 눈에는 당연히 엠마가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레나테가 내 옆에서 머뭇거리는 눈치인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울까요?"
"그것은 내가 할 말인데요. 혹시 당신들을 위하여 택시를 부를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매우 고맙죠."
"베를린을 언제 떠나실 계획입니까?"
"아직 무슨 일이 또 남아있나요?"
"약속을 문서화 하면 사인을 하셔야 하기 때문인데요.
다시 한번 여기를 방문하시든가, 아니면 저희가 문서를 들고 호텔로 가든가 .."
"내가 내일 와서 사인하겠습니다."
레나테는 수위에게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말하고,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악수를 했다. 그녀는 약간 서툰 영어가 오히려 귀여움을 풍긴다. 그런데 레나테의 우락부락한 인상이나 덩치가 귀엽다는 말과는 도대체 매칭이 안된다. 아마도 얘네들은 만 18세가 넘으면 여자로서의 매력은 꽝일 것 같다. 만일 정말이라면 불쌍한 이 나라의 남자들은 일, 휴가 아니면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는 방법 말고는 인생에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정말 딱한 일이다.
택시가 왔다. 엠마와 강대리는 택시의 뒷좌석으로 탔고, 나는 레나테와 악수를 하고, 앞자리로 탔다. 우리는 내가 아까 검색해둔 한국인 식당으로 갔다. 그 식당도 쿠담에 있다.
오후 5시이면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다. 넓은 식당도 거의 비어있다. 두 테이블만 손님들이 앉아있다.
강대리가 먹고 싶어하는 것은 김치찌개이다. 그런데 김치찌개가 이 식당의 메뉴에는 없다. 나는 주문을 받는 직원에게 사정을 했고, 그는 요리사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가능하다면서 주문을 받는다.
우리는 김치찌개, 불고기를 그리고 갈비찜을 주문해서 먹었다. 한국을 떠난지 며칠만에 한국 음식 냄새나 맛을 보니까 마음까지 편해지는 것 같다. 강대리는 이제야 속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엠마는 맵다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하지만, 한국 음식을 너무 오래만에 먹는다면서 좋아했다. 둘 다 얼마나 열심히 먹는지 얼굴이 버얼겋다. 둘 다 어린 애처럼 귀엽다.
식사하면서 우리는 내일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베를린에 들렀거든. 내일 아침 비행기로 런던으로 갈꺼야."
"나는 오빠랑 같이 서두르지 말고 베를린과 포츠담을 둘러보고 싶어."
"그럼 내일은 먼저 영국으로 가는 엠마를 배웅하고, 강대리와 베를린을 둘러보면 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엠마가 내일 영국에 갈 것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엠마가 나에게 비행기 티켓을 꺼내서 보여주었는데 아직 비행기 예약도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엠마가 가진 티켓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오픈으로 되어있었다. 그래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쿠담의 밤거리로 나왔다. 차들이 제법 많이 다니는데, 시내버스들 중에는 2층버스가 있었다. 엠마는 베를린에 왔으니까 저 2층버스를 타보자고 제안했다. 엠마는 베를린을 제법 알고 있었다. 엠마는 시내버스 기사와 뭐라고 독일말로 이야기를 하더니, 우리에게 타라고 했다. 우리는 버스에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엠마는 우리에게 내리자고 했다. 그 곳은 브라이트샤이트 플라츠였는데, 이 곳은 말로만 듣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기념교회"가 있는 곳이다. 이 교회는 지금 황량한 폐허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육각기둥 모양으로 새로 신축된 교회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엠마는 우리를 이 교회의 안내판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파괴되기 전 원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베를린 공습으로 피괴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런데 엠마는 거기에 덧붙여서 설명해주었다.
그 당시 영국의 해리스 원수는 1943년 11월 18일부터 1944년 3월 24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제 3제국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습한다.
11월 22일 약 750대의 폭격기가 베를린을 폭격한다. 이 폭격으로 베를린의 서쪽이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대규모의 화염 폭풍이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발생하여, 많은 건물들이 불탔다. 특히 오래된 건축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바로 이 황제 카이저 빌헬름 1세 기념교회가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건물이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겨우 중앙 입구의 현관부분과 종탑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베를린을 재건하면서 이 교회의 복구를 의논했다. 그런데 베를린은 부숴진 교회를 복구하지 않고 그냥 두기로 하고, 새로 신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숴진 교회 건물은 오늘날에도 전쟁이라는 비극이 남긴 아픔과 비참함을 후세에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데 엠마는 드레스덴에 있는 "프라우엔 키르헤"의 복원공사와는 너무 대조적이라고 했다. 이 교회는 과거 동독 영역 안에 있었는데, 동독도 파괴된 이 교회 건물을 전쟁의 뼈아픈 교훈이라면서 복원을 하자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통독 이후에는 복원 공사를 했다. 파괴 이전의 건물에서 사용되었던 벽돌 하나하나까지 폐허에서 모두 찾아내서 그 때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시켰다고 한다.
엠마는 나에게 이 교회 건물을 보여주면서 인류가 다시는 전쟁이라는 비극에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오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서, 나도 자기네들에게 합류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엠마의 가정에는 이렇게 찬성과 반대가 나란히 공존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가진 다양성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엠마는 나와 결혼하여 나를 파리에서 거주하게 한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해서 자기 아빠를 후원하는 모습도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고, 알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런데 강대리는 호기심 말고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녀는 피곤하다면서 호텔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겠다고 했다. 우리는 호텔까지 걸어서 갔다. 강대리는 엠마와 작별하고 나서,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러나 나는 엠마를 혼자 두고 강대리를 따라서 올라갈 수 없었으므로, 로비에 앉아서 기다렸다. 엠마는 혼자 프론트로 갔다.
그녀는 나에게 도아와서 4층에 있는 방을 받았다고 했다. 엠마는 나에게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있으라고 하고, 자기 방에 짐을 올려다 두고 내려왔다. 우리는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우리는 쿠담 거리의 인파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월요일 밤 10시이지만 사람들은 아직 집으로 들어가기 싫은 것 같다. 엠마도 그들 중에 하나이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까페 레스토랑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생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빈 자리가 없어서 우리는 스탠드바로 안내되었다. 약 30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는 둥그런 바가 텅 비어있어서 우리는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소시지와 생맥주를 주문했다.
나는 엠마에게 물었다.
"엠마. 베를린에는 왜 왔어?"
"상수는 엠마가 있는 파리에 왔었지?
상수가 있는 베를린에 엠마가 오는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해?"
"내일 런던으로 가겠다는 말은 정말이니?"
"오늘 그 일은 단지 내일을 위한 계획일 뿐이야.
내일도 그 다음 날을 위한 계획으로 남을지는 내일 보자."
"내가 서울에 있으면 서울에도 올래?"
"내가 서울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이미 수없이 했어.
상수가 파리에 오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지 않니?"
소시지와 맥주가 왔다.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찬 맥주가 목을 넘어가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엠마의 아빠 문제를 물어보려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를 모르겠다. 그런데 엠마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내가 결혼 한다는 말을 불쑥 꺼내서 화났지?"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이미 다 풀렸어.
내가 엠마에게 화나는 마음을 오래 동안 품고 살 수는 없잖니?
습관인가봐."
"우리가 떨어져 사는 것이 몇 년인데, 상수의 그 습관은 아직도 남아있네."
"계속 반복되니까."
"지금도야?"
"지금도 나는 엠마를 생각하면 화가 나.
그렇지만 어쩌겠어? 화를 풀어야지.
나 혼자 화를 내고, 혼자 화를 풀고 ,,"
"하아. .. 상수. .. 그런 말 하면 나 울지도 몰라."
"미안해. 이제 네가 말해봐.
내가 엠마와 결혼해서 파리에서 산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말할께. 그런데 내 말 듣고 오해하면 안돼."
"무슨 뜻이지?"
"우리가 결혼하면 서울에서 살 수는 없잖아?"
"왜 안되죠?"
"말했잖아. 내가 하는 일이 서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왜 내가 엠마와 결혼을 해야 하지?"
"나는 결혼을 반대하는 여성운동가가 아니고, 나는 동성결혼도 반대해.
이만하면 대답이 됐나?"
"결혼이란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니?"
"서울이라는 도시는 베를린이나 비인, 로마가 아니야.
네가 나를 파리에 남겨두고 서울로 가버렸는데도 내가 너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니?"
"서울이 파리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말이니?"
"멀기도 하겠지만, 파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내가 살면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
서울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려면, 그 도시의 한 부속품이 돼야 하잖아?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할꺼야?"
"그것은 시작하고 살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교집합이 너무 없어서 불가능해.
얼마 전부터 엄마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반납하래."
"그 큰 집에서 언제까지 너 혼자 산다는 것이 말이 되니?"
"아냐. 나는 그럴 수 없어.
저 집에는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저 집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
"엠마 ..."
"한 때는 파리 대학에 한국학과에 다닐 생각도 했었어.
그런데 나한테 지금 그것이 가능하기나 하니?"
"엠마. 셀린 오빠를 만나보도록 해."
"알았어. 상수가 만나라고 하면 만날께.
그렇지만 우리 결혼은 꼭 성사시켜야 해.
내가 아니더라도 아빠는 너를 파리로 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야.
그들의 계획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모양이야."
"나는 프랑스의 전략무기 개발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지금 평화운동이나 전쟁 반대에 대한 움직임들 때문에 아빠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
그가 하려는 일은 이미 과거 역사의 사건일 뿐이야.
누구도 아빠의 계획을 도우려고 하지 않아.
얼마 전부터 아빠가 나를 만나면 상수의 이름을 거론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나는 아빠를 안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 일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상수. 이 문제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돼.
아빠는 지금 자기가 은퇴하고 나오기 전에 매듭지으려고 생각 중이야.
그 노인의 고집은 내 고집이랑은 비교가 안돼. 하하."
"너희는 고집 패밀리야."
"그럼 상수 너는, 나랑 남이 돼서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거니?"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해?"
"우리는 이제 남이 될 수 없어.
그런데 이렇게 서로 떨어져 살다가는 그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이것이 두려워. 이 일은 막아야 해.
상수도 횡설수설 하지 말고, 내 말대로 생각을 정리하자.
회사일 정리하고 다시 파리로 와."
"고민된다."
"고민되는 이유는 결심이 서지 않기 때문이야.
나에게는 고민이 끝났어. 결심이 섰거든.
나 .. 자신 있고, 결심했어.
이제 나는 밀어부칠꺼야."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를 구속시키지 마."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렇지만 파리라는 도시는 너에게 차원이 다른 자유를 줄꺼야.
내가 서울에서 산다고 생각해봐. 너무 끔찍하지 않니?"
"내가 사는 도시가 너를 끔찍하게 한다고?"
"내가 끔찍하다고 느낀다니까."
"참나 .."
"베를린 사람들은 부숴진 기념교회를 그대로 갖고 살아.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면서 잊지 말자고 말하는 거지.
그렇지만 나는 상수와 헤어지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단 말이야."
"알았으니까 셀린 오빠를 만나고 나서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또 그 소리네. 만날꺼라고 말 했거든.
그러니까 너도 파리에 와서 살겠다고 말해."
"협상하자고?"
"그럼 나보고 그냥 물러서라고? 그게 말이 돼?
그런 얘기를 하려고 내가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날아온 줄 알고있니?"
아마도 엠마의 고집이 시작되는 것 같다. 아직까지 내가 엠마의 고집을 이겨본 것은 단 한번 뿐이다. 내가 엠마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무시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었던 사건.
내가 파리에서 살게 된다면 나도 끔찍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엠마의 말을 생각해보면 모순은 없다. 모순이 발견되지 않으면 보편 타당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반대하기에는 명분이 서지 않아서 매우 곤란해진다.
그런데 나는 엠마가 말한 결혼 사건의 전모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엠마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엠마의 엄마와 아빠는 파리의 동쪽에 있는 뱅센(Vincennes)이라는 작은 도시에 전원 주택을 마련해서 그리로 이사해버렸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파리와는 달리, 뱅센은 조용하고, 우아하며,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나도 그들의 집에서 엠마와 같이 주말을 보낸 적이 몇 번 있다. 마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고 나니까 파리에 있는 집에서는 엠마가 혼자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이 너무 커서, 엠마가 그 집을 관리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엠마의 엄마는 그녀의 집이 폐허가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가사도우미들을 시켜서 그 집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 집 때문에 이래 저래 들어가는 비용이 정말 엄청나다고 했다.
엠마의 부모님은 엠마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엠마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엠마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엠마는 고집을 부렸다.
그 후에 나도 그 집에서 3년 정도를 엠마와 같이 살았다. 그 때에는 엠마의 엄마로부터 일체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엠마를 큰 집에서 살기가 적적하지 않으냐면서 위로하고 또 대견스러워했다. 이렇게 엠마가 나와 같이 사는 동안에는 이사라는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떠나고나니까 이 문제가 또 등장했고, 그 때마다 엠마는 내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요새도 엠마의 엄마는 엠마를 내쫒겠다고 계속 위협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해서 엠마가 다급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엠마는 그 집에서 나와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엠마는 자기 엄마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카드를 꺼낸 말이지,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서 엄마를 진정시킬 때에는.
그런데 이 무렵에 내가 다시 파리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려있던 엠마에게 나는 갑자기 나타난 구원군이 된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직접 만나서 내가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나는 엠마의 부모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일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고, 수입은 빤한데 지출이 너무 큰 것이다. 또 엠마가 방이 여섯개나 되는 그 큰 집에서 혼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엠마의 엄마가 볼 때, 이제는 엠마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고, 또 번듯한 직장에 다니므로, 엠마가 경제적인 자립 능력은 가졌다. 그녀는 차라리 엠마를 위하여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서 엠마를 이사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딸 엠마는 이 계획에 결사항전을 한다.
"엄마가 그러는데, 자기는 나를 이해할 수도 없고, 정상으로 보이지도 않는대."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아니야. 차라리 방 세개를 세를 놓는 한이 있어도, 저 집에서 이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꺼야."
그런데 이 판국에 엠마의 아빠가 갑자기 고집을 부린다는 말은 완전 의외이고, 정말 심각하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반대쪽인 파리에서 내 인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꼬여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엠마의 침대에서 두 시간 가까이 있다가 샤워하고 내 방으로 올라가려고 엠마에게 키스했다. 엠마는 내게 말했다.
"이 호텔 숙박비에 아침식사 포함이던데?"
"그렇기는 한데, 11시까지야. 그 시간에 어떻게 일어나니?"
"그 시간이면 충분해. 내일은 내려가서 같이 아침 먹자."
"그러려면 맥주 마시지 말고 일찍 잤어야지."
"그랬더라면 더 오래 걸렸을껄. .. 하하."
내 방으로 올라왔는데 강대리가 내 침대에 없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서 강대리의 방문을 열었다. 강대리는 자기 방,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다. 나는 강대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강대리가 팔을 들어서 내 목을 감는다.
"오빠, 이제 온거야?"
"또 깼니?"
"결국은 나한테 오네."
나는 옷을 벗고 강대리의 옆자리로 누웠다. 나는 강대리를 안고 등을 다독였고, 강대리와 나는 다시 입술을 몇 번 빨다가 같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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