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엠마가 꾸민 음모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빨면서 한바탕 키스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손이 강대리의 몸을 더듬고 있다. 내 손은 비록 옷 위에서지만 강대리의 가슴은 물론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 남성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강대리의 키스가 한풀 꺾인 듯하여 나는 입을 떼고 강대리에게 물었다.
"선미야. 파리의 야경 보러 밖에 나가지 않을래?"
"뭐야아. 하필 지금 그 얘기를 해?"
"선미가 아까 셀린이랑 하던 말이 생각나서 해 본 소리야."
"뭐야? 해 본 소리라고? 진짜 어이없네.
그럼 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여기로 올꺼야?
아니면 거기서 그냥 엄마한테 갈꺼야?"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외국 여자 이름 잘 못 불렀다고 그 정도로 버러럭이야?"
나는 강대리의 반응에 당황했다. 파리의 야경을 보러 나가자고 하면 강대리는 엄청 좋아하면서 떠라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강대리는 안간다고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서 꼬투리 잡고 덤벼든다. 내가 말을 잘 못 꺼낸 것 같아서 나는 후회했다. 그렇다고 파리를 떠나기 전날 밤인데 엠마를 만나지 않는다면 누가 이해를 할 것인가? 강대리가 강경모드로 나오더라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단호한 입장을 전달해야 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 같은데. 가봐야겠지?"
"아예 거기서 살지. 비싼 돈 들여서 호텔 방은 뭐하러 얻었대?"
"나 혼자 왔었으면 호텔 방 안얻지.
전에 내가 썼던 내 방도 아직 그대로 있던데."
"그럼 지금도 엄만지 엠만지는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고?
열녀 나셨네.
오빠가 다시 파리로 올꺼라고 기다리라고 한거야?
이쪽 애들은 개방적이라던데. 엄마는 완전 구제불능으로 쑥맥이인가?"
"엄마 아니고 엠마라고."
"알았으니가 제발 그 버럭질좀 하지 말라고."
"나는 그 때 완전히 귀국했는데 내가 왜 나를 기다리라고 했겠어?"
"이번에 내가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붙잡혀서 한국으로 못 갈 뻔했잖아."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나가자."
"싫어. 안나가. 가고 싶으면 오빠 혼자 가."
"셀린한테는 몇 번이나 파리 야경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놓고 내가 가자니까 왜 안 나간다고 하는데?"
"오빠는 나랑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잖아.
진짜로 가고 싶었다면 나가자는 그 말을 침대에 눕기 전에 했어야지."
"나는 옛날에 다 봤거든요."
"나도 다음에 다시 와서 그 때 보면 돼."
"다시? 언제?"
"그건 내 맘이지."
강대리는 과감하게 파리의 야경을 보러 밖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 대신에 강대리는 내가 잠옷으로 입고 있는 트리이닝 복을 벗겨버렸다. 예상하기는 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내가 팬티 바람이 되자 약간은 거부반응이 일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이 같은 상황에서는 텐트를 쳐야 할 때인데, 지금은 전혀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강대리가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추운데."
"걱정마. 내가 따뜻하게 해줄꺼니까."
나는 이불을 덮어달라는 것을 돌려서 말했으나, 사실은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추운 것은 아니었다. 강대리는 내가 반응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더니, 재빨리 자기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채로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붙이고 내 위로 몸을 비스듬히 굽혔다. 내 얼굴 위에 강대리의 얼굴이 와서 일부러 요염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를 내려다보는 우수가 가득 찬 눈은 무엇 때문에 어쩌면 슬픔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까?
"오빠는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흥분이 안돼?"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가슴이 좀 작아서 그러나?"
"이 정도면 작은 가슴이 아니거든?"
"오빠 눈에는 셀린이 예뻐보여?
"그냥 예쁘다 안예쁘다가 있니? 관점에 따라 다르지."
"걔, 가슴이랑 엉덩이랑도 크고, 피부도 하얗잖아?
"글쎄. 하얀 피부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지만, 나한테는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
"오빠, 그 엠마는 몸이 어때?"
"셀린하고 비슷해. 키는 좀 작고."
"오빠는 셀린 보면, 걔랑 하고 싶은 생각 안들어?"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안했거든. 그런데 너 왜 자꾸 이런 걸 꼬치꼬치 묻는데?"
"오빠가 우리나라 남자인데, 우리나라 여자보다 이쪽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오빠가 셀린한테 하는 것 보면 진짜 매너 있게 잘 하거든.
거기다 말주변 있겠다, 표정이나 마스크가 섹시한 편이라서 걔도 넘어갈 것 같은데.
어제 걔랑 둘이만 있을 때 같이 걔한테는 대쉬 안해봤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얘기지, 그게 어디 민족적인 얘기냐?
이 여자가 좋고, 저 여자가 싫은 것은 말이 되지만,
이 나라 여자가 좋고, 저 나라 여자가 싫은 것이 어디 있어?
그런데 너 혹시 셀린한테 컴플렉스 느끼니?"
"오빠가 나를 침대에 두고 다른 여자한테 간다는 것이 나한테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내가 너만 보면 그냥 무조건 덤벼들어야 하니?"
"걔네들이랑 있다가도 내가 생각나서 나한테 와야 할텐데 ..."
"왔잖아. 내가 언제 안온 적이 있어?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럼 .. 지금 여기에 셀린이랑 나랑 같이 있다면, 오빠는 누구랑 하고 싶어? 셀린 아니면 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아무하고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하아. .. 맞네. 엠마 때문이지?"
"엠마하고도 아무 때나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둘이 같이 있다고 꼭 그 생각만 하니?"
"나는 오빠랑 같이 있으면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나거든."
"그런 애가 회사에서는 어떻게 일을 한대?"
"뭐야? 그래서 내가 일 못한 것이 있어?
우리 기획팀에서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건 선미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선미를 눈여겨 봤더니 결국 이렇게 돼버렸네."
"그래서 지금 후회해?
나는 어디까지나 회사에서만 오빠를 접수한다고 했거든."
"그 말은 사생활은 인정해주겠다 이거 아닌가?
그런데 파리에 따라와서 하는 것 보면 하루 24 시간을 옆에 두려고 안달이니?"
"우리 회사의 내규가 그렇잖아.
해외로 출장 나가면 24시간을 전부 근무 시간으로 인정하거든."
"나는 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
"엄마한테 가는 것은 내가 확실히 눈감아 주거든요."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나한테 버럭질 하지 말랬지?"
"그러니까 왜 이름 읍. .. 으읍. .. "
강대리의 얼굴이 내려와서 그녀의 입이 내 입을 덮는다. 나는 강대리에게 냉정하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번번이 무너진다. 우리의 입술과 혀가 서로 감기고 뒤엉켰다. 우리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옷들이 벗겨졌고, 강대리는 온몸으로 내 몸을 뜨겁게 했다. 이 순간 만큼은 우리는 갈급한 심정으로 서로를 원한다. 그리고 강대리의 신음과 몸부림은 갈수록 거칠어져 가고, 나도 강대리의 마리오네트처럼 정상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녀는 마치 열에 들뜬 것처럼 나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집착하는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내 몸 위에서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늘어진 버드나무처럼 흔들렸고, 내 몸 아래에서는 거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녀는 흔들리면서 또 출렁거리면서 나를 어딘가로 몰아붙인다.
그녀의 허리가 비틀릴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가 솟구칠 때마다 나도 거칠게 그녀의 동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의 뜨거운 신음과 거친 숨결은 방안으로 퍼져나가고,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쾌락이 젖어든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를 부추기며 저 멀리 보이는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달린다.
우리의 몸부림이 거칠어지면서 우리는 갈증을 느낀다. 어떻게 해도 이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러면 우리의 신음과 몸부림은 더 거칠어진다. 서로를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의 육체는 말라서 갈라지고 또 타 들어가는 느낌이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서로를 원하는 몸부림 때문에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그렇지만 모든 시작에는 어떻게든 끝이 있듯이, 우리의 갈증에도 끝이 있다. 우리의 육체가 폭발하듯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발산한다. 마치 비가 와서 가뭄을 적셔주듯이, 이제야 우리가 원하던 것을 가진 것 같다. 그래도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만 강대리의 동굴 속에는 육체를 풍요하게 해주는 여인의 샘물로 범벅을 이룬다. 이제는 갈증이 아니라 홍수이다. 이제 정상에서 우리는 휴식하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서로의 몸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키스한다.
나는 강대리를 깊이 안았다.
"하아.. 오빠. .. 울고 싶어."
"왜?"
"파리에 와서 오빠랑 이렇게 행복하게 했다는 것이 꿈만 같아."
"매일 하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오빠가 매일 미운 짓만 하니까."
"갖다 붙이지 마."
강대리는 벗은 몸으로 침대를 나갔다. 나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종이컵에 따랐다. 우리는 물을 마시고, 나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내가 나오자 강대리가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옷을 입고 침대를 정리하는데 셀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전화이다.
"하이 셀린."
"하이 상수. 선미는 지금 뭐해?"
"왜 그래?"
"파리를 떠나기 전에 야경을 보여주려고."
"지금 샤워중인데."
"그럼 한 시간 후에 호텔 앞에서 기다릴께."
"야경 보고 나면 뭐할래?"
"선미랑 나이트클럽에 갈까 하는데."
"음. .."
"왜?"
강대리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닦아내면서 내가 통화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지만 통호가 불어인 것을 알고 나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는 나이가 있어서 못가겠네."
"나도 젊은 애들이 가는 데는 안가. 두플렉스(Duplex)가 어떨까 하는데."
"혹시 그 클럽이 샤를 드골 에뚜알(Charles de Gaulle Étoile)역 가까운 곳에 있는 거니?"
"맞아. 너도 아는구나? 거기라면 너도 가도 좋을텐데."
"선미랑 얘기해볼께. 그런데 거기는 음악 이 별로라던데?"
"하우스 음악은 영 아니거든.
그런데 오늘은 DJ 가 외부에서 온다고 하니까 괜찮을꺼야."
나는 셀린과의 통화를 끝냈다. 강대리가 내게 묻는다.
"그 새를 못 참고 엄마랑 전화질이야?"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전화는 셀린이 했어."
"셀린이? 뭐래?"
"선미랑 같이 야경 보러 갔다가 나이트클럽에 가고 싶대.
한 시간 후에 이리로 데리러 온대."
"나이트? 그럼 여기도 부킹 하나?"
"하여간에 생각하는 것 하고는..
웨이터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알아서 자급자족 해야 해."
"오빠도 가?"
"셀린은 선미랑 가고 싶어하는데, 내가 끼면 나는 파트너를 거기서 조달해야 하거든."
"엄만제 엠만지 같이 가면 안돼?"
"엠마는 그런데에는 얼씬도 안해."
"오빠 안가면 나도 안가. 무서워."
"셀린 있는데, 뭐가 무서워?"
"셀린은 거기서 분명 남자를 꼬실텐데?"
"셀린이 선미한테 딱 맞는 남자 하나 맞춤형으로 골라줄꺼거든요."
"오빠!"
"어?"
"오빠는 내가 나이트에 가서 파리 남자랑 한데 엉켜서 춤이나 추는 것을 정말 그렇게도 원해?"
"그걸 왜 내가 원하지? 원하려면 선미가 원해야 하는 일 아닌가?"
"좋아. 알았어. 그럼 나 오늘 나이트까지 간다."
"두플렉스라는 곳으로 갈꺼라는데, 거기는 옷을 약간 잘 입어야 해."
"나 혼자 나이트 보내고 오빠는 엠마한테 갈꺼지?"
"이상한 것 물어보지 말고, 내가 셀린한테 전화해준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
"이건 또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래?
두말하면 완전 소름끼치거든요."
나는 셀린에게 전화를 해서 선미가 야경과 나이트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강대리는 자기 방으로 건너가버린다.
내가 내 방을 나서서 강대리의 방을 열었으나, 그녀는 화장대에 앉아서 나를 쳐다 보지도 않는다.
"셀린이 여섯시 정각에 데리러 온대.
파리에서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은 우리 서로 노타치 하고, 잘 놀고, 내일 보자."
"돌겠네. 저런 오빠를 믿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
"나는 선미한테 같이 오자고 한 적이 없거든요.
이따가 셀린이 알아서 하겠지만, 거기는 12시 넘어야 화끈해진다는 것을 알아둬."
나는 호텔을 나서서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면서 엠마에게 전화를 했다. 엠마는 오후 내내 기다렸다면서 거의 우는 소리를 낸다.
"왜 이제야 전화하는데?"
"이제 끝났으니까. 지금 너에게 가면 되지?"
"오지마. 내가 데리러 갈께."
"벌써 지하철 역이거든요. 그냥 집에서 기다려."
"지하철은 환승해야 하니까 오래 걸리거든요. 그냥 택시로 와."
"지하철을 환승하는 곳까지 타고 가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갈께."
“자기 보고 싶어서 나는 지금 엄청 바쁘고 급한데.“
“나 숨 안넘어가.”
내가 지하철에서 내려서 택시로 갈아타기 전에 엠마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엠마가 나에게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엠마가 차를 갖고 나타났다.
"낮에 브리옹씨 한테 점심 먹으러 갔었거든.
상수가 내일 파리를 떠난다고 했더니, 우리 둘 자기네 한테 와서 저녁 먹으래.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바빠서 상수한테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같이 갈 생각 있어?
그렇지만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가기 싫으면 말해요."
"아니야. 좋아요. 그 식당으로 가자.
그런데 지금 그 식당도 한참 바쁜 시간 아닐까?"
나는 엠마의 차에 탔다. 우리는 브리옹씨의 식당 "파리의 밀로(Paris Milan)"로 출발했다. 중간쯤 갔는데 엠마의 전화기로 전화가 들어오고, 엠마는 그 전화를 받는다.
"하아. .. 아빠? .. 엄마도? .. 우리 지금 피에르 & 마리 퀴리 대학을 지나는 중이야. 10분 정도가 더 필요해. 이따 봐. 사랑해요."
"아빠 전화니?"
"글쎄. 심심하신가?"
"엄마 아빠 모두 건강하시니?"
"이제 노인이니까 그렇지는 않아.
한평생 그의 손을 거쳐간 술, 담배, 여자가 그를 건강하게 그냥 두겠어?"
"뭐. .. 그래도 딸이 의사니까."
"하하하. 부인과 의사가 영감님을 어쩌라고?
그를 위해서라면 나보다는 차라리 수의사가 낫지 않을까? 하하하."
"너무 그러지 마. 그 분들 이제 겨우 60인데 뭐가 노인이라고 그래?"
"하긴. 아직은 은퇴한 것도 아니니까."
엠마는 차를 도로변에 주차하고, 트렁크로 가서 커다란 종이팩을 꺼낸다. 나는 엠마의 짐을 받아 들었다. 엠마는 또 작은 종이팩도 손에 들고 우리는 식당으로 갔다.
"이게 다 뭐야?"
"영감님께 전해드리려고."
우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브리옹씨가 우리를 위해 마련했다는 자리로 직원이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테이블에는 브리옹씨와 엠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브리옹씨가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얼음처럼 굳은 채로 서있다. 이런 나를 보고 엠마가 당황한다.
"상수. 엄마와 아빠가, 너를 오늘 보지 못하면 또 언제 보겠느냐고, 하루 종일 졸랐거든."
엠마가 나를 자리에 앉게 하고, 유리컵에 냉수를 따라서 권했다.
"내가 아내와 함께 갑자기 나타나서 너희들의 토요일 저녁을 방해했군. 정말 미안하네."
"상수. 너는 여전히 멋있구나. 저녁 먹고 나서 우리는 바로 집으로 갈꺼야. 미안해.
나는 미리 상수한테 얘기를 하자고 했거든.
엠마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어.
상수가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다."
"아닙니다. 오래만인 데다가 너무 갑자기 뵈어서 제가 당황했습니다.
두 분은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파리에 휴가를 보내러 온 것은 아니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회사 일로 왔습니다."
"엠마가 이번에 자네를 만나서 놀랐나봐.
지금 런던에서 의사들 회의가 있는데도, 거기도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저러고 있어."
엠마는 자기 엄마와 아빠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돌린다. 엄마에게는 향수를, 그리고 아빠에게는 애프테쉐이브 선물로 준비했다. 엠마가 엄마나 아빠를 만날 때 선물을 전하는 것은 전에도 자주 있던 풍경이다.
그런데 엠마가 브리옹씨에게도 선물을 하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보인다. 그 선물의 포장을 열자 약간 작은 액자에 든 그림이 나왔다. 루오 (Rouault, Georges)의 그림 "저녁 노을"의 축소판이다. 위쪽에는 녹색의 하늘에 태양과 노을이 있고, 중간 부분에는 마을의 집 몇 채,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도로에는 그리스도와 좌우에 서있는 2명의 사람들이다. 그림 분위기가 기독교적인 내용 같다.
"벼룩 시장에서 이 그림을 봤는데, 사본 같죠?
그런데 색깔이나 구도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샀어요.
식당 벽에 걸어두시면 내가 올 때마다 보고 싶어요."
"그래.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야.
그런데 이 그림은 나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해서 여기에 걸어달라는 부탁이구나."
음식과 와인이 나왔다. 요리는 닭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소고기까지 야채와 함께 꼬치에 끼워서 구운 케밥치치와 비슷해 보인다. 이것도 나와 엠마가 과거에 같이 먹었던 음식이다. 그런데 고기가 건조하지도 않고, 냄새도 독특하다. 소스는 따로 나오고, 물론 은박지에 싸서 구운 감자와 야채 샐러드도 곁들여 나왔다. 오늘은 고기나 소스가 엄청 고급스럽게 부드럽다.
브리옹씨가 우리 모두를 이 식사에 초대했다고 한다. 우리는 음식을 칭찬하면서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브리옹씨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전에 이 두 사람이 여기 앉아서 키스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 같았거든요.
그 장면은 이번에도 변한 것이 없어요. 여전히 보기에도 아주 사랑스러운 커플입니다."
"브리옹씨. 나나 남편도 같은 생각이어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이번 성탄절 휴가를 서울에서 보낼까 생각 중이거든요.
엠마만 설득하면 되는데, 엠마의 고집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요."
"제가 엠마를 만날 때마다 설득해보겠습니다.
두 분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엠마의 부모님인 비노쉬 부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내가 출국하기 한달 쯤 전이었으니까, 지금 6년만에 만나는 것 같다. 아버지 끌레망 비노쉬 박사와 어머니 오렐리 비노쉬 박사와는 사이좋은 조용한 부부이다. 엠마의 어머니는 고등학교의 철학 교수이다. 엠마의 아버지는 프랑스 방위산업 연구소의 고위직에서 일한다.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 때에는 이 부부의 집에서 하루나 이틀을 같이 보냈었다.
그런데 엠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성탄절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면 나를 볼 텐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보느냐고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엠마의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상수의 석사학위 논문을 읽었는데, 중성자탄의 폭발 조건을 10가지나 변화를 시켰던데 .."
"예. 이미 지난 얘기입니다. 그 때 설정한 그 조건들은 일반적인 조건이 아니고, 극한적인 조건들입니다."
"우리 연구소에서 지금 그 조건에 관심이 있어.
그 때 그것을 계속해서 박사 학위까지 하지는 않았더군.
중단한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
"폭탄 터뜨리는 일로 박사학위를 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서 ..."
"엠마 말로는 둘이 곧 결혼해서 파리에서 가정을 꾸릴 계획이라고 하던데.."
"예?"
"아빠, 그거 내가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
"엠마. 상수한테까지 비밀이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 그 때 가서 다시 진지하게 얘기해보자."
"무슨 얘기를 ..?"
나는 엠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엠마는 고개를 브리옹씨 쪽으로 돌려서 내 눈길을 피한다. 지금 이 상황은 엠마가 무슨 의도를 갖고 꾸민 연극인가?
"이번에 이스라엘 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이 중성자탄을 전투에서 사용했거든.
이번 실전 배치에서 나온 데이터가 우리가 예상하던 결과와 달라서 고민이야."
"예에? 정말입니까? 전쟁에서 어떻게 핵무기를 사용하죠?"
"중성자탄은 원자폭탄이 아니거든.
따라서 국제 원자력 회의는 이스라엘이나 프랑스에 대하여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핵무기인데 .."
"우리 프랑스는 그 점을 노리고 이 작업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어.
상수가 엠마와 결혼을 하고, 파리로 와서 살 계획이니까.
우리와 함께 이 작업을 계속 한다면 환상적일 것 같은데. .."
"아빠. 그것은 아빠의 환타지일 뿐이야.
상수는 지금 그 중성자탄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사랑하는 내 딸 엠마. 정말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구나.
우리 프랑스 방위산업 연구소에서는 중성자탄 한가지에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
"여보. 하나 밖에 없는 사위가 당신네 연구소에서 전쟁 무기나 개발하라고 하는 소리인가요?
나도 그것이 좋은 계획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차라리 교외에 있는 내 포도원을 상수에게 주고 농사를 짓게 하면 모를까."
"내가 한 얘기는 나와 상수 사이에 오고 가는 남자들만의 비지니스야.
여자들이 개입할 얘기는 아니거든.
이 훌륭한 식사를 맛있게 하려면 그 얘기는 여기서 중단합시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을 사과 할께요.
상수는 성탄절 휴가 때 따로 나와 만나서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 대화에서 나는 이방인임을 느꼈다. 나는 또다시 엠마를 쳐다보았다. 엠마는 자기 엄마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면서 엄마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다. 저 것 역시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다.
이렇게 엠마가 계속해서 내 눈길을 피하는 것은 엠마가 나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지금 엠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데, 엠마는 내가 엠마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화장실에 갈 생각으로 식사를 중단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방향으로 몇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엠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수. 기다려요."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을 때 엠마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엠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꾸민 거지?"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화내지 말아주세요. 부탁해요.
오늘 너무 시간이 없어서 그랬어요.
지금은 엄마 아빠가 기다리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응? 부탁해.
엄마 아빠가 자기 화난 것 아니냐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엠마가 모두 질 수 있어?"
"그건 이따가 식사 후에 우리 둘이 이야기 하면 안될까?
어차피 식사는 거의 끝나가니까 이 자리도 곧 파장이야.
자기야. 제발 같이 자리로 돌아가자. 응?
내가 이렇게 빌며 부탁할게."
엠마는 두 손으로 싹싹 빌며 애원하는 목소리이다. 그 때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전화기에서 소리가 난다.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문자 메시지이다. 그런데 발신인이 셀린이다.
"선미가 야경도 싫고, 나이트에는 절대 안가겠대.
저녁만 먹고, 바로 호텔로 가겠다고 하는데, 어떡해?"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빨면서 한바탕 키스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손이 강대리의 몸을 더듬고 있다. 내 손은 비록 옷 위에서지만 강대리의 가슴은 물론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 남성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강대리의 키스가 한풀 꺾인 듯하여 나는 입을 떼고 강대리에게 물었다.
"선미야. 파리의 야경 보러 밖에 나가지 않을래?"
"뭐야아. 하필 지금 그 얘기를 해?"
"선미가 아까 셀린이랑 하던 말이 생각나서 해 본 소리야."
"뭐야? 해 본 소리라고? 진짜 어이없네.
그럼 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여기로 올꺼야?
아니면 거기서 그냥 엄마한테 갈꺼야?"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외국 여자 이름 잘 못 불렀다고 그 정도로 버러럭이야?"
나는 강대리의 반응에 당황했다. 파리의 야경을 보러 나가자고 하면 강대리는 엄청 좋아하면서 떠라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강대리는 안간다고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서 꼬투리 잡고 덤벼든다. 내가 말을 잘 못 꺼낸 것 같아서 나는 후회했다. 그렇다고 파리를 떠나기 전날 밤인데 엠마를 만나지 않는다면 누가 이해를 할 것인가? 강대리가 강경모드로 나오더라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단호한 입장을 전달해야 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 같은데. 가봐야겠지?"
"아예 거기서 살지. 비싼 돈 들여서 호텔 방은 뭐하러 얻었대?"
"나 혼자 왔었으면 호텔 방 안얻지.
전에 내가 썼던 내 방도 아직 그대로 있던데."
"그럼 지금도 엄만지 엠만지는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고?
열녀 나셨네.
오빠가 다시 파리로 올꺼라고 기다리라고 한거야?
이쪽 애들은 개방적이라던데. 엄마는 완전 구제불능으로 쑥맥이인가?"
"엄마 아니고 엠마라고."
"알았으니가 제발 그 버럭질좀 하지 말라고."
"나는 그 때 완전히 귀국했는데 내가 왜 나를 기다리라고 했겠어?"
"이번에 내가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붙잡혀서 한국으로 못 갈 뻔했잖아."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나가자."
"싫어. 안나가. 가고 싶으면 오빠 혼자 가."
"셀린한테는 몇 번이나 파리 야경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놓고 내가 가자니까 왜 안 나간다고 하는데?"
"오빠는 나랑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잖아.
진짜로 가고 싶었다면 나가자는 그 말을 침대에 눕기 전에 했어야지."
"나는 옛날에 다 봤거든요."
"나도 다음에 다시 와서 그 때 보면 돼."
"다시? 언제?"
"그건 내 맘이지."
강대리는 과감하게 파리의 야경을 보러 밖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 대신에 강대리는 내가 잠옷으로 입고 있는 트리이닝 복을 벗겨버렸다. 예상하기는 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내가 팬티 바람이 되자 약간은 거부반응이 일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이 같은 상황에서는 텐트를 쳐야 할 때인데, 지금은 전혀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강대리가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추운데."
"걱정마. 내가 따뜻하게 해줄꺼니까."
나는 이불을 덮어달라는 것을 돌려서 말했으나, 사실은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추운 것은 아니었다. 강대리는 내가 반응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더니, 재빨리 자기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채로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붙이고 내 위로 몸을 비스듬히 굽혔다. 내 얼굴 위에 강대리의 얼굴이 와서 일부러 요염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를 내려다보는 우수가 가득 찬 눈은 무엇 때문에 어쩌면 슬픔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까?
"오빠는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흥분이 안돼?"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가슴이 좀 작아서 그러나?"
"이 정도면 작은 가슴이 아니거든?"
"오빠 눈에는 셀린이 예뻐보여?
"그냥 예쁘다 안예쁘다가 있니? 관점에 따라 다르지."
"걔, 가슴이랑 엉덩이랑도 크고, 피부도 하얗잖아?
"글쎄. 하얀 피부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지만, 나한테는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
"오빠, 그 엠마는 몸이 어때?"
"셀린하고 비슷해. 키는 좀 작고."
"오빠는 셀린 보면, 걔랑 하고 싶은 생각 안들어?"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안했거든. 그런데 너 왜 자꾸 이런 걸 꼬치꼬치 묻는데?"
"오빠가 우리나라 남자인데, 우리나라 여자보다 이쪽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오빠가 셀린한테 하는 것 보면 진짜 매너 있게 잘 하거든.
거기다 말주변 있겠다, 표정이나 마스크가 섹시한 편이라서 걔도 넘어갈 것 같은데.
어제 걔랑 둘이만 있을 때 같이 걔한테는 대쉬 안해봤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얘기지, 그게 어디 민족적인 얘기냐?
이 여자가 좋고, 저 여자가 싫은 것은 말이 되지만,
이 나라 여자가 좋고, 저 나라 여자가 싫은 것이 어디 있어?
그런데 너 혹시 셀린한테 컴플렉스 느끼니?"
"오빠가 나를 침대에 두고 다른 여자한테 간다는 것이 나한테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내가 너만 보면 그냥 무조건 덤벼들어야 하니?"
"걔네들이랑 있다가도 내가 생각나서 나한테 와야 할텐데 ..."
"왔잖아. 내가 언제 안온 적이 있어?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럼 .. 지금 여기에 셀린이랑 나랑 같이 있다면, 오빠는 누구랑 하고 싶어? 셀린 아니면 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아무하고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하아. .. 맞네. 엠마 때문이지?"
"엠마하고도 아무 때나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둘이 같이 있다고 꼭 그 생각만 하니?"
"나는 오빠랑 같이 있으면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나거든."
"그런 애가 회사에서는 어떻게 일을 한대?"
"뭐야? 그래서 내가 일 못한 것이 있어?
우리 기획팀에서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건 선미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선미를 눈여겨 봤더니 결국 이렇게 돼버렸네."
"그래서 지금 후회해?
나는 어디까지나 회사에서만 오빠를 접수한다고 했거든."
"그 말은 사생활은 인정해주겠다 이거 아닌가?
그런데 파리에 따라와서 하는 것 보면 하루 24 시간을 옆에 두려고 안달이니?"
"우리 회사의 내규가 그렇잖아.
해외로 출장 나가면 24시간을 전부 근무 시간으로 인정하거든."
"나는 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
"엄마한테 가는 것은 내가 확실히 눈감아 주거든요."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나한테 버럭질 하지 말랬지?"
"그러니까 왜 이름 읍. .. 으읍. .. "
강대리의 얼굴이 내려와서 그녀의 입이 내 입을 덮는다. 나는 강대리에게 냉정하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번번이 무너진다. 우리의 입술과 혀가 서로 감기고 뒤엉켰다. 우리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옷들이 벗겨졌고, 강대리는 온몸으로 내 몸을 뜨겁게 했다. 이 순간 만큼은 우리는 갈급한 심정으로 서로를 원한다. 그리고 강대리의 신음과 몸부림은 갈수록 거칠어져 가고, 나도 강대리의 마리오네트처럼 정상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녀는 마치 열에 들뜬 것처럼 나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집착하는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내 몸 위에서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늘어진 버드나무처럼 흔들렸고, 내 몸 아래에서는 거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녀는 흔들리면서 또 출렁거리면서 나를 어딘가로 몰아붙인다.
그녀의 허리가 비틀릴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가 솟구칠 때마다 나도 거칠게 그녀의 동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의 뜨거운 신음과 거친 숨결은 방안으로 퍼져나가고,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쾌락이 젖어든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를 부추기며 저 멀리 보이는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달린다.
우리의 몸부림이 거칠어지면서 우리는 갈증을 느낀다. 어떻게 해도 이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러면 우리의 신음과 몸부림은 더 거칠어진다. 서로를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의 육체는 말라서 갈라지고 또 타 들어가는 느낌이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서로를 원하는 몸부림 때문에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그렇지만 모든 시작에는 어떻게든 끝이 있듯이, 우리의 갈증에도 끝이 있다. 우리의 육체가 폭발하듯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발산한다. 마치 비가 와서 가뭄을 적셔주듯이, 이제야 우리가 원하던 것을 가진 것 같다. 그래도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만 강대리의 동굴 속에는 육체를 풍요하게 해주는 여인의 샘물로 범벅을 이룬다. 이제는 갈증이 아니라 홍수이다. 이제 정상에서 우리는 휴식하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서로의 몸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키스한다.
나는 강대리를 깊이 안았다.
"하아.. 오빠. .. 울고 싶어."
"왜?"
"파리에 와서 오빠랑 이렇게 행복하게 했다는 것이 꿈만 같아."
"매일 하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오빠가 매일 미운 짓만 하니까."
"갖다 붙이지 마."
강대리는 벗은 몸으로 침대를 나갔다. 나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종이컵에 따랐다. 우리는 물을 마시고, 나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내가 나오자 강대리가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옷을 입고 침대를 정리하는데 셀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전화이다.
"하이 셀린."
"하이 상수. 선미는 지금 뭐해?"
"왜 그래?"
"파리를 떠나기 전에 야경을 보여주려고."
"지금 샤워중인데."
"그럼 한 시간 후에 호텔 앞에서 기다릴께."
"야경 보고 나면 뭐할래?"
"선미랑 나이트클럽에 갈까 하는데."
"음. .."
"왜?"
강대리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닦아내면서 내가 통화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지만 통호가 불어인 것을 알고 나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는 나이가 있어서 못가겠네."
"나도 젊은 애들이 가는 데는 안가. 두플렉스(Duplex)가 어떨까 하는데."
"혹시 그 클럽이 샤를 드골 에뚜알(Charles de Gaulle Étoile)역 가까운 곳에 있는 거니?"
"맞아. 너도 아는구나? 거기라면 너도 가도 좋을텐데."
"선미랑 얘기해볼께. 그런데 거기는 음악 이 별로라던데?"
"하우스 음악은 영 아니거든.
그런데 오늘은 DJ 가 외부에서 온다고 하니까 괜찮을꺼야."
나는 셀린과의 통화를 끝냈다. 강대리가 내게 묻는다.
"그 새를 못 참고 엄마랑 전화질이야?"
"엄마 아니고 엠마라니까. 전화는 셀린이 했어."
"셀린이? 뭐래?"
"선미랑 같이 야경 보러 갔다가 나이트클럽에 가고 싶대.
한 시간 후에 이리로 데리러 온대."
"나이트? 그럼 여기도 부킹 하나?"
"하여간에 생각하는 것 하고는..
웨이터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알아서 자급자족 해야 해."
"오빠도 가?"
"셀린은 선미랑 가고 싶어하는데, 내가 끼면 나는 파트너를 거기서 조달해야 하거든."
"엄만제 엠만지 같이 가면 안돼?"
"엠마는 그런데에는 얼씬도 안해."
"오빠 안가면 나도 안가. 무서워."
"셀린 있는데, 뭐가 무서워?"
"셀린은 거기서 분명 남자를 꼬실텐데?"
"셀린이 선미한테 딱 맞는 남자 하나 맞춤형으로 골라줄꺼거든요."
"오빠!"
"어?"
"오빠는 내가 나이트에 가서 파리 남자랑 한데 엉켜서 춤이나 추는 것을 정말 그렇게도 원해?"
"그걸 왜 내가 원하지? 원하려면 선미가 원해야 하는 일 아닌가?"
"좋아. 알았어. 그럼 나 오늘 나이트까지 간다."
"두플렉스라는 곳으로 갈꺼라는데, 거기는 옷을 약간 잘 입어야 해."
"나 혼자 나이트 보내고 오빠는 엠마한테 갈꺼지?"
"이상한 것 물어보지 말고, 내가 셀린한테 전화해준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
"이건 또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래?
두말하면 완전 소름끼치거든요."
나는 셀린에게 전화를 해서 선미가 야경과 나이트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강대리는 자기 방으로 건너가버린다.
내가 내 방을 나서서 강대리의 방을 열었으나, 그녀는 화장대에 앉아서 나를 쳐다 보지도 않는다.
"셀린이 여섯시 정각에 데리러 온대.
파리에서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은 우리 서로 노타치 하고, 잘 놀고, 내일 보자."
"돌겠네. 저런 오빠를 믿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
"나는 선미한테 같이 오자고 한 적이 없거든요.
이따가 셀린이 알아서 하겠지만, 거기는 12시 넘어야 화끈해진다는 것을 알아둬."
나는 호텔을 나서서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면서 엠마에게 전화를 했다. 엠마는 오후 내내 기다렸다면서 거의 우는 소리를 낸다.
"왜 이제야 전화하는데?"
"이제 끝났으니까. 지금 너에게 가면 되지?"
"오지마. 내가 데리러 갈께."
"벌써 지하철 역이거든요. 그냥 집에서 기다려."
"지하철은 환승해야 하니까 오래 걸리거든요. 그냥 택시로 와."
"지하철을 환승하는 곳까지 타고 가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갈께."
“자기 보고 싶어서 나는 지금 엄청 바쁘고 급한데.“
“나 숨 안넘어가.”
내가 지하철에서 내려서 택시로 갈아타기 전에 엠마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엠마가 나에게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엠마가 차를 갖고 나타났다.
"낮에 브리옹씨 한테 점심 먹으러 갔었거든.
상수가 내일 파리를 떠난다고 했더니, 우리 둘 자기네 한테 와서 저녁 먹으래.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바빠서 상수한테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같이 갈 생각 있어?
그렇지만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가기 싫으면 말해요."
"아니야. 좋아요. 그 식당으로 가자.
그런데 지금 그 식당도 한참 바쁜 시간 아닐까?"
나는 엠마의 차에 탔다. 우리는 브리옹씨의 식당 "파리의 밀로(Paris Milan)"로 출발했다. 중간쯤 갔는데 엠마의 전화기로 전화가 들어오고, 엠마는 그 전화를 받는다.
"하아. .. 아빠? .. 엄마도? .. 우리 지금 피에르 & 마리 퀴리 대학을 지나는 중이야. 10분 정도가 더 필요해. 이따 봐. 사랑해요."
"아빠 전화니?"
"글쎄. 심심하신가?"
"엄마 아빠 모두 건강하시니?"
"이제 노인이니까 그렇지는 않아.
한평생 그의 손을 거쳐간 술, 담배, 여자가 그를 건강하게 그냥 두겠어?"
"뭐. .. 그래도 딸이 의사니까."
"하하하. 부인과 의사가 영감님을 어쩌라고?
그를 위해서라면 나보다는 차라리 수의사가 낫지 않을까? 하하하."
"너무 그러지 마. 그 분들 이제 겨우 60인데 뭐가 노인이라고 그래?"
"하긴. 아직은 은퇴한 것도 아니니까."
엠마는 차를 도로변에 주차하고, 트렁크로 가서 커다란 종이팩을 꺼낸다. 나는 엠마의 짐을 받아 들었다. 엠마는 또 작은 종이팩도 손에 들고 우리는 식당으로 갔다.
"이게 다 뭐야?"
"영감님께 전해드리려고."
우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브리옹씨가 우리를 위해 마련했다는 자리로 직원이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테이블에는 브리옹씨와 엠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브리옹씨가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얼음처럼 굳은 채로 서있다. 이런 나를 보고 엠마가 당황한다.
"상수. 엄마와 아빠가, 너를 오늘 보지 못하면 또 언제 보겠느냐고, 하루 종일 졸랐거든."
엠마가 나를 자리에 앉게 하고, 유리컵에 냉수를 따라서 권했다.
"내가 아내와 함께 갑자기 나타나서 너희들의 토요일 저녁을 방해했군. 정말 미안하네."
"상수. 너는 여전히 멋있구나. 저녁 먹고 나서 우리는 바로 집으로 갈꺼야. 미안해.
나는 미리 상수한테 얘기를 하자고 했거든.
엠마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어.
상수가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다."
"아닙니다. 오래만인 데다가 너무 갑자기 뵈어서 제가 당황했습니다.
두 분은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파리에 휴가를 보내러 온 것은 아니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회사 일로 왔습니다."
"엠마가 이번에 자네를 만나서 놀랐나봐.
지금 런던에서 의사들 회의가 있는데도, 거기도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저러고 있어."
엠마는 자기 엄마와 아빠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돌린다. 엄마에게는 향수를, 그리고 아빠에게는 애프테쉐이브 선물로 준비했다. 엠마가 엄마나 아빠를 만날 때 선물을 전하는 것은 전에도 자주 있던 풍경이다.
그런데 엠마가 브리옹씨에게도 선물을 하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보인다. 그 선물의 포장을 열자 약간 작은 액자에 든 그림이 나왔다. 루오 (Rouault, Georges)의 그림 "저녁 노을"의 축소판이다. 위쪽에는 녹색의 하늘에 태양과 노을이 있고, 중간 부분에는 마을의 집 몇 채,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도로에는 그리스도와 좌우에 서있는 2명의 사람들이다. 그림 분위기가 기독교적인 내용 같다.
"벼룩 시장에서 이 그림을 봤는데, 사본 같죠?
그런데 색깔이나 구도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샀어요.
식당 벽에 걸어두시면 내가 올 때마다 보고 싶어요."
"그래.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야.
그런데 이 그림은 나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해서 여기에 걸어달라는 부탁이구나."
음식과 와인이 나왔다. 요리는 닭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소고기까지 야채와 함께 꼬치에 끼워서 구운 케밥치치와 비슷해 보인다. 이것도 나와 엠마가 과거에 같이 먹었던 음식이다. 그런데 고기가 건조하지도 않고, 냄새도 독특하다. 소스는 따로 나오고, 물론 은박지에 싸서 구운 감자와 야채 샐러드도 곁들여 나왔다. 오늘은 고기나 소스가 엄청 고급스럽게 부드럽다.
브리옹씨가 우리 모두를 이 식사에 초대했다고 한다. 우리는 음식을 칭찬하면서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브리옹씨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전에 이 두 사람이 여기 앉아서 키스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 같았거든요.
그 장면은 이번에도 변한 것이 없어요. 여전히 보기에도 아주 사랑스러운 커플입니다."
"브리옹씨. 나나 남편도 같은 생각이어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이번 성탄절 휴가를 서울에서 보낼까 생각 중이거든요.
엠마만 설득하면 되는데, 엠마의 고집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요."
"제가 엠마를 만날 때마다 설득해보겠습니다.
두 분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엠마의 부모님인 비노쉬 부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내가 출국하기 한달 쯤 전이었으니까, 지금 6년만에 만나는 것 같다. 아버지 끌레망 비노쉬 박사와 어머니 오렐리 비노쉬 박사와는 사이좋은 조용한 부부이다. 엠마의 어머니는 고등학교의 철학 교수이다. 엠마의 아버지는 프랑스 방위산업 연구소의 고위직에서 일한다.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 때에는 이 부부의 집에서 하루나 이틀을 같이 보냈었다.
그런데 엠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성탄절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면 나를 볼 텐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보느냐고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엠마의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상수의 석사학위 논문을 읽었는데, 중성자탄의 폭발 조건을 10가지나 변화를 시켰던데 .."
"예. 이미 지난 얘기입니다. 그 때 설정한 그 조건들은 일반적인 조건이 아니고, 극한적인 조건들입니다."
"우리 연구소에서 지금 그 조건에 관심이 있어.
그 때 그것을 계속해서 박사 학위까지 하지는 않았더군.
중단한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
"폭탄 터뜨리는 일로 박사학위를 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서 ..."
"엠마 말로는 둘이 곧 결혼해서 파리에서 가정을 꾸릴 계획이라고 하던데.."
"예?"
"아빠, 그거 내가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
"엠마. 상수한테까지 비밀이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 그 때 가서 다시 진지하게 얘기해보자."
"무슨 얘기를 ..?"
나는 엠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엠마는 고개를 브리옹씨 쪽으로 돌려서 내 눈길을 피한다. 지금 이 상황은 엠마가 무슨 의도를 갖고 꾸민 연극인가?
"이번에 이스라엘 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이 중성자탄을 전투에서 사용했거든.
이번 실전 배치에서 나온 데이터가 우리가 예상하던 결과와 달라서 고민이야."
"예에? 정말입니까? 전쟁에서 어떻게 핵무기를 사용하죠?"
"중성자탄은 원자폭탄이 아니거든.
따라서 국제 원자력 회의는 이스라엘이나 프랑스에 대하여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핵무기인데 .."
"우리 프랑스는 그 점을 노리고 이 작업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어.
상수가 엠마와 결혼을 하고, 파리로 와서 살 계획이니까.
우리와 함께 이 작업을 계속 한다면 환상적일 것 같은데. .."
"아빠. 그것은 아빠의 환타지일 뿐이야.
상수는 지금 그 중성자탄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사랑하는 내 딸 엠마. 정말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구나.
우리 프랑스 방위산업 연구소에서는 중성자탄 한가지에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
"여보. 하나 밖에 없는 사위가 당신네 연구소에서 전쟁 무기나 개발하라고 하는 소리인가요?
나도 그것이 좋은 계획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차라리 교외에 있는 내 포도원을 상수에게 주고 농사를 짓게 하면 모를까."
"내가 한 얘기는 나와 상수 사이에 오고 가는 남자들만의 비지니스야.
여자들이 개입할 얘기는 아니거든.
이 훌륭한 식사를 맛있게 하려면 그 얘기는 여기서 중단합시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을 사과 할께요.
상수는 성탄절 휴가 때 따로 나와 만나서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 대화에서 나는 이방인임을 느꼈다. 나는 또다시 엠마를 쳐다보았다. 엠마는 자기 엄마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면서 엄마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다. 저 것 역시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다.
이렇게 엠마가 계속해서 내 눈길을 피하는 것은 엠마가 나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지금 엠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데, 엠마는 내가 엠마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화장실에 갈 생각으로 식사를 중단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방향으로 몇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엠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수. 기다려요."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을 때 엠마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엠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꾸민 거지?"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화내지 말아주세요. 부탁해요.
오늘 너무 시간이 없어서 그랬어요.
지금은 엄마 아빠가 기다리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응? 부탁해.
엄마 아빠가 자기 화난 것 아니냐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엠마가 모두 질 수 있어?"
"그건 이따가 식사 후에 우리 둘이 이야기 하면 안될까?
어차피 식사는 거의 끝나가니까 이 자리도 곧 파장이야.
자기야. 제발 같이 자리로 돌아가자. 응?
내가 이렇게 빌며 부탁할게."
엠마는 두 손으로 싹싹 빌며 애원하는 목소리이다. 그 때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전화기에서 소리가 난다.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문자 메시지이다. 그런데 발신인이 셀린이다.
"선미가 야경도 싫고, 나이트에는 절대 안가겠대.
저녁만 먹고, 바로 호텔로 가겠다고 하는데,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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