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오 덕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홍 기삼은 보스가 염려하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원래 물건을 인도해주고 대금을 받아 수수료를 챙기고 나머지를 싱가포르 은행에 입금시켜주면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물건은 넘겨주지 않고 현금을 빼앗아 일거양득을 하려던 속셈이었다.
밀수품은 취득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전달해줄 물품 대금도 받지 못한 것이다. 물건을 돌려 줄수도 없고 싱가포르 조직에게 추궁을 당할 것은 물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당장 어찌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오 덕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락가락했다.
“이거 쓸 만한 놈들은 없고 똘마니들만 남았으니.........”
“형님! 그렇지 않아요. 돌쇠도 있고 형만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그 놈들이 그렇게 도망갈 줄 몰랐던 탓입니다. 애들보다는 제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니미럴~! 어떡하지!? 물건을......! 처분하기도 쉽지 않고, 대금을 전해줘야 하는데.”
“형님! 이제 와서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어떻게든지 물건을 처분해야지요.”
“그게 시간도 걸리고 쉬운 일이 아니잖아!”
“내가 애들 풀어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마시고. 술이나 한잔하고 스트레스 푸시지요.”
“넌 모르는 소리야. 요즘 단속도 심하고........”
“프린스에 새 가시내들 왔다는데, 가시지요?”
“쩝......! 에이!”
주먹으로 탁자를 두들긴 오 덕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도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홍 기삼이 입구로 향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뒤따랐다. 사무실 앞에서 뒤를 돌아본 그가 홍 기삼에게 말했다.
“돌쇠하고 형만이도 오라고 그래.”
“네! 형님.”
홍 기삼은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보스의 지시대로 돌쇠와 형만이에게 프린스로 오라고 했다. 홍기삼은 자신의 승용차 뒷문을 열고 홍기삼이 오를 때까지 깍듯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대로변의 룸살롱 앞에 승용차를 세웠다.
그들이 들어간 프린스는 꽤 홀이 넓은 룸살롱이었다. 마담을 비롯해서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스커트와 원피스를 걸친 아가씨들이 줄을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마담이 그들을 구석진 넓은 홀로 안내했다.
“오 사장님! 이제 저희 집에 단골 되시겠네요. 호호호.......”
“장 마담! 우리 형님이 이 구역을 나와바리로 인수할 테니 잘 모시라고.”
“네. 여부가 있겠어요. 오늘 새로 들어온 애들 들여 보낼 테니 잘 부탁드려요.”
“시원치 않은 애들은 뺀지야. 알아서 하라고!”
“마음에 드는 애 고르세요. 우리 집 애들은 모두 대학생들이니까요.”
“그래 그거 좋지! 하하하.......”
오 덕재를 대신해서 홍 기삼이 으스대며 마담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하얗게 눈을 흘긴 마담이 돌아섰다. 그리고 입구로 체격이 크고 험상궂은 사내 두 명이 굽실거리며 들어왔다. 홍 기삼의 연락을 받은 돌쇠와 형만이었다. 오 덕재는 자신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고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손짓해서 불렀다.
“어서들 와서 앉아. 체대까지 나왔다는 놈들이 왜 그래........”
“죄송합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그들이 몸을 사리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술과 안주가 탁자위에 놓이고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들은 제각기 앞을 다투어 오 덕재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일어섰다. 홍 기삼이 돌쇠와 형만에게 손짓을 했다.
“기다려. 형님 술잔은 가시내들이 와서 권해야지. 순서를 모르는구먼.”
“네. 형님~!”
“괜찮아! 애들 오기 전에 한잔 하자고.”
“그러실까요......!”
오 덕재의 말에 홍기삼이 일어나서 그라스를 일렬로 놓고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작은 잔들을 위에 올려 위스키를 채웠다. 작은 잔을 건드리자 차례대로 쓰러지며 백주 잔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박수와 함께 그들은 그라스를 들어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홍 기삼이 오 독재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형님! 오늘 죄송합니다.”
“괜찮아. 지난 간일인데,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술이나 들어.”
“너희들 뭐해. 형님께 사과드리지 못하고.”
“형님! 죄송합니다~!”
돌쇠와 형만이 벌떡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오 덕재에게 꾸벅 허리를 굽혔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앉은 오 덕재가 손을 내저으며 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도에 곽 상무와 달구는 알겠는데 또 한 놈은 누구야?”
“저도 모르겠던데요.”
“그 놈, 보통이 아니던데. 그 놈만 아니어도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던데.........”
“글쎄요! 대도 애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저도 처음 보는 놈인데, 조심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때 홀의 출입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호스티스를 기다리던 그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여자가 아니고 입구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버티고 서있었다. 검은 야전전투복 차림의 청년, 그는 서 진우였다. 그들은 어의가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그들이 말하고 있던 대도의 조직원이었다. 홍 기삼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이제 한잔 마셨는데 술맛 떨어지네.”
“핫! 잘 왔다. 안주삼아 찢어 발겨줄게.”
“이 자슥이, 미쳤나!”
돌쇠와 형만이 잇따라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보스에게 두들겨 맞은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그들은 느닷없이 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너무 몰랐던 행동이었다. 진우는 몸을 돌려 달려드는 형만의 주먹을 피하고는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낮추어 빙글 돌면서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돌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켁~!”
“헉~!”
역습을 받은 형만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대자로 엎어져 정신을 잃었다. 걷어차인 돌쇠는 맞은편의 벽을 들이 받으며 뒹굴었다. 진우가 돌쇠의 목을 팔로 감아 비틀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돌쇠는 목이 꺾여 쓰러졌다. 전광석화 같은 그의 행동에 홍 기삼은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홍 기삼이 팔을 걷어붙였다.
“어라! 이게 제법인데, 오늘 제삿날인줄 알아라.”
“기삼아! 관둬. 네 상대가 아니야.”
오 덕재가 홍 기삼을 만류했다. 그는 보스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때 호스티스들이 입구로 들어서려다가 기겁을 했다. 진우는 전혀 움직임이 없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오 덕재가 호스티스들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들은 부르면 와라. 안면있는 손님인데, 와서 앉으시지.”
“...........”
흔들림 없이 서있던 진우가 옆에 놓인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 덕재 맞은편 탁지 앞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라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따라서 단숨에 마셨다. 홍 기삼은 나이도 많지 않은 청년에게서 풍겨나는 카리스마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 덕재는 억지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대단하네. 목적이 뭐요?”
“난, 정보팀이 필요하오.”
“정보팀.......!? 우리더러 당신 수하 조직이 되 달라고 사정하는 건 아닐테고......?”
“아니, 사정이 아니라, 계약이요. 그리고 당신 조직 말고 당신 한 사람만.”
“무슨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계약을 받아 드릴 거 같은가? 하하.......! ”
“아니 반드시 받아 드릴 거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 되고.”
“정말 코미디를 하는지. 아니면 이 세계를 모르는 모양이구만.”
오 덕재는 상대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직에서 보스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홍 기삼도 어의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진우는 무표정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밀수품은 무용지물이요. 그 물건의 임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처분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싱가포르 마피아가 당신을 찾아 올 텐데, 그걸 고생해서 처분하면 백억, 아니면 천억을 받을까?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
오 덕재가 고심하는 것도 그가 말하는 것과 같았다. 말을 중단한 진우가 다시 그라스에 위스키를 따라서 마셨다. 마치 그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의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는 깊게 눌러쓴 모자챙을 조금 올렸다. 모자 그늘 밑으로 드러난 그의 깊은 눈빛은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그 물건을 인수하고 대금을 마피아에게 지불하지. 그리고 당신에게 20억을 주겠소. 대신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하오. 해남은 여전히 당신 조직이니, 어떤 사업을 해도 상관하지 않을 테고.”
“이십억.......!?”
“..........!?”
진우의 말에 시선을 마주친 오 덕재와 홍기삼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 덕재는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지만, 나이도 어린 그를 주인으로 모셔야하기에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오 덕재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대적하기 불가능했고, 이십억이라는 큰돈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 물건을 인수해가고 연락을 어떻게 하지요?”
“그건 내가 연락을 하리다. 인수하는 방법도 말해 줄 테고. 나를 주인으로 받아 드리겠소?”
“.......음......! 그렇게 합시다.”
“.........!?”
자리에서 일어난 오 덕재가 진우 앞으로 걸어왔다. 모든 상황을 볼 때 어쩔 수 없었던 그는 진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던 홍 기삼도 벌떡 일어나 오 덕재 옆에 무릎을 꿇고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진우가 그들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오덕재가 해야 할 임무를 주었다. 그 임무는 오 덕재를 수하로 만드는 계약이었다.
제법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원수 그늘 밑 의자에 앉은 진우는 셔츠를 걷어 올리고 얼굴에 손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민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요즘 영화에 캐스팅되어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한동안 그녀의 접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가오는 민경을 의식한 진우는 관리인 황 씨를 향해 걸어갔다. 테라스 기둥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황 씨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진우가 예상한대로 다가오던 민경이 걸음을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 잠시 서있던 그녀가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우의 시선이 무심코 황 씨가 들고 있는 손목시계를 향했다. 그리고 예리한 눈빛을 하고 황 씨에게 말했다.
“황씨! 그거 한번 볼 수 있습니까?”
“왜~!? 이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인데........”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건 스위스 명품으로 지금은 생산도 안 되고, 우리나라에 몇 개 안되는 걸로 알아. 요즘말로 뭐라고 하던가? 아~!리미트 상품이라고 하더군.”
“한번 봅시다!”
머뭇거리던 황 씨가 진우에게 시계를 건넸다. 시계를 유심히 관찰하는 그는 긴장이 됐다. 시계 중앙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뒷면에 ‘신화 창립기념일’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분명히 그가 갖고 있는 시계와 동일한 제품이었다. 황 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화 창립 2주년 기념으로 회장님이 주문해서 임원들에게 선물했던 것이지. 그런데 다이아 박힌 시계는 회장님, 대표이사님, 진 이사, 돌아가신 사모님만 갖고 있었고,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회장님이 나에게도 주셨지.”
“아........! 그러시군요.”
“아마, 권 이사님은 잃어버려서 돌아가신 사모님 것을 갖고 있는 거 같던데.........”
“음.......!?”
진우는 손목시계에 새겨진 단서만 갖고 신화에 들어온 것이었다. 손목시계의 명확한 출처로 그의 궁금증은 더욱 깊었다. 시계의 주인이 권 이사라고 한다면 무슨 연유로 그가 악몽의 어둠속에 나타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들고 있는 진우는 불길에 휩싸인 환상을 떠올렸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황 씨가 그가 들고 있는 시계를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회장님의 오른 팔이었지. 권 이사의 덕분이었지만, 이래봬도 대도 애들 거느린 행동 대장이었다고~! 하하하.......!”
“.........!?”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인천 부두에서 부산에서 올라온 놈들하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시계에 대한 내력을 알게 된 진우는 황 씨의 자랑삼아 흘리는 넋두리가 들리지 않았다. 항상 고통스럽게 하는 악몽을 떠올렸다. 피투성이로 죽어가던 가족들, 불길에 휩싸인 거실,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집어 들던 자신, 그리고 검은 복장의 그림자였다. 그 날을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만든 장본인 중에 한 사람이 시계의 주인이었다.
진우는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찾는 악몽 속에 검은 복장의 그림자는 권 이사를 포함한 권 회장이나 도희의 아버지 진 이사, 그리고 황 씨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대도 폭력조직원이 가담했는지도 모른다. 황 씨는 지나간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고 있었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황 씨에게 물었다.
“혹시 송 민욱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송 민욱!? 그 사람을 왜!?”
“아~! 누가 그 사람에 대해서 물어 보기에.........”
“나도 잘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네. 신화기업 초창기에 인천에서 제일가는 갑부였지. 그 당시 프로모터 사업과 부동산으로 재력이 있었던 기업인데, 대한인가.....!? 맞아! 대한기업 사장이었지. 그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데, 회장님과도 친했던 것으로.........”
말끝을 흐린 황 석기가 진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우는 양부모에게 말로만 들었던 생부에 대하여 무척 궁금했었다. 그런데 황 씨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을 중단한 것이었다. 그는 힐끗힐끗 쳐다보는 황 씨의 표정으로 봐서 아무래도 생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 씨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다시 넌지시 물었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던 당시도 대도개발이 존재했습니까?”
“그때는 아니었지. 올림픽 이후에 업체와 조직을 만들었으니까. 원래는 인천의 건달 조직이었어. 대도 개발이 설립되면서 권 이사가 모두 끌어들여 직원으로 채용했지. 난 서울 본사에 있다가 나중에 인천에 내려가서 합류했지만, 그 놈들도 권 이사 덕분에 호강하고........”
그 당시 권 이사와 같이 행동했던 사람들 중에 황 씨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모든 비밀의 열쇠는 권 이사가 쥐고 있는 것이고, 어쨌든 그 당시 나이를 봐도 신화의 권 회장이 지휘를 했거나 가담한 것은 분명했다.
권 회장의 병상이 있는 방의 커튼사이로 여인의 긴 머리채가 드러나 보였다. 도희의 뒷모습이었다. 진우는 도희가 권 회장의 재혼녀로서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권 씨 일가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판단되었다. 문득 그는 그녀가 알고 있을 정보가 궁금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정기 검진을 받는 날만큼은 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도희와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하는 시간이었다. 병원에 가는 승용차 안에서 그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시선을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여인으로서 본능적인 감정과 현실 사이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흠칫하며 그를 힐끗 쳐다보는 도희의 눈빛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차창 문을 쳐다봤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였다. 건널목 앞에서 차를 세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흘렸다. 학생들이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면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도 이마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호호호........!”
“하하........!”
오래간만에 도희의 웃는 모습을 보고 진우는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그녀와 나란히 휠체어에 태운 권 회장을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진료실을 나와서 그는 다시 도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그녀가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온 그는 병원 뒤편으로 갔다. 그는 화단 앞의 벤치에 그녀를 데리고 가서 나란히 앉았다. 산책을 하는 환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핀을 꽂는 그녀를 보고 그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어떤 때는 귀잖아요. 결혼 전에는 커트 머리도 했는데, 미장원 가기도 귀찮아서........”
말을 해놓고 도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는 결혼이라는 단어 자체에 왠지 부끄러웠다. 남편이 있는 여자로서 육체관계를 가진 진우를 바라보기가 민망해서였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감정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는 권 씨 일가에 대해서 그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을 떠올렸다.
“시댁 식구들에 대해 잘 아시나요?”
“글쎄요.......!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잘 몰랐어요.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얘기 정도밖에.......”
“신화 그룹이 언제 대기업으로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올림픽 이후에 그룹이 된 걸로 알아요.”
“무슨 사업으로 컸지요!?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나요? 아니면 경영을 잘 해서!”
“진우씨도 잘 알 텐데요. 물려받은 유산도 없는 걸로 저는 알고 있고,..... 거의 비정상적인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권 씨 일가가 몰락할 이유가 뻔한 거 같아요.”
“요즘 신흥 그룹이 많이 생기기는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올림픽 이후에 프로모터 사업으로 기반을 닦았다고 하던데요.”
“아........! 혹시 송 민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모르는 이름인데요. 뭐하는 분이신데요?”
“저도 잘 몰라요. 누가 알아봐달라기에.”
진우는 생부가 저명한 프로모터 사업을 하는 기업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생부가 하던 사업과 신화 그룹사업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생부가 돌아가신 연유가 기업 간의 경쟁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종합해서 판단하건데 권 이사가 포함된 사람들에 의해 생부가 죽음을 당했다는 확고한 판단이 섰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도희가 일어섰다. 권 회장이 검진을 마칠 시간이었다. 진우는 그녀를 따라 권 회장 담당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갔다. 간호사가 검진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진우는 의사실로 들어가서 권 회장을 휠체어에 태웠다. 담당 의사가 도희에게 환자가 주의할 사항에 대해서 설병했다.
“회장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입원을 한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모님께서 고생되시겠어요.”
“아~! 네.”
“회장님이 감기 증세가 있어서 평소 조제해드리던 약에 아스피린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첨가했습니다. 심장마비 예방에는 좋지만, 지금 회장님께서 혈압조절이 안되어 절대로 과다 복용시키지 마시고 이상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런데, 꼭 복용을 시켜드려야 하나요?”
“혈관 질환에 도움 되니 염려하지 마시고, 다만 뇌와 간이 손상되는 레이증후군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심장에 쇼크를 받을 수도 있기에 주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복용방법만 지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의식만 회복하면 건강 회복도 빠르실 것 같은데........”
담당 의사의 위로를 뒤로하고 진우는 권 회장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병원을 나왔다. 권 회장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권 회장의 하녀 같은 생활을 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도희를 제외하고 권 회장의 건강을 염려할 식구들이 별로 없었다. 진우는 식구들 중에 가장 형의 건강에 신경을 써야할 동생 권 종호이사를 떠올렸다. 그러나 권 회장이 의식이 없다는 빌미로 신화 그룹의 실권을 휘두르는 권 이사는 이따금 형식적으로 들리거나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권 종호는 서재 안을 배회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물품수입 관계로 싱가포르에 다녀온 후에 서류를 챙길 것이 있어 금고를 열었던 그는 망연자실했다.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손가방이 통째로 없어진 것이었다. 가방 안에는 진 이사로부터 받은 물류센타부지 문서에 관한 각서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 이사가 관리했던 비자금 관리 장부까지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집안에 있는 금고가 누군가에 의해 열렸기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그는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쿵쾅거리며 층계를 뛰어내린 그는 씨근덕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식구들이 보이지 않아 그는 고함을 질렀다.
“이 봐! 다들 어디 간 거야!”
“.........”
“다들 귀먹었어?”
“네. 이사님.”
가정부 조 숙희가 쪼르르 주방에서 나왔다.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권 이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권 이사의 모습에 겁에 질려 몸을 사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이 그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미스터 최! 어디 갔어? 다들 오라고 그래.”
“저기, 사모님도요........!?”
“그래! 이 집안에서 내 밥 먹고 사는 년, 놈들은 다 오라고해. 당장~!”
“네, 네!”
종호는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가정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화를 참지 못해 갈증을 느낀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 마신 그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갔던 기정부가 거실로 들어와 겁먹은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지아의 침실로 향하는 복도로 뛰어갔다.
티셔츠 차림의 중년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경비와 저택 관리를 하고 있는 최 광섭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최 광섭은 권이사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들어온 그는 권 이사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섰다. 싸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는 긴장하는 표정으로 몸을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너, 뭐하는 놈이야!”
“네.....!? 무슨 일로......”
최 광섭의 말이 끝나기 전에 권 이사가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둘렀다. 영문도 모르고 뺨을 얻어맞은 그가 휘청거렸다. 거실로 나오던 가정부 숙희가 권 이사가 최 광섭을 후려치는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그러나 숙희를 뒤따라 나오던 지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평소 남편의 거친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 이사가 눈에 불을 켜고 최 광섭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뭐하기에 집안에 있는 물건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네~?!”
“누가 서재에 들어간 거야?”
“네.....!?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요.”
“서재 금고에 누가 손을 댔냐는 말이야?”
“.........!?”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최 광섭이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졌다. 권 이사의 시선이 가정부를 향했다. 가정부 조 숙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지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권 이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조 숙희에게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네, 년이 서재에 들어갔었어? 누가 서재에 들어간 거야!”
“저.......! 저는 모르고요. 서재에 들어가는 사람, 못 봤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금고가 열렸어.”
“저, 저는 정말 몰라요.”
얼굴에 손자국이 벌겋게 드러난 조 숙희가 뒷걸음 쳤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정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 것을 바라본 권 이사가 무표정하게 서있는 지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시선도 마주하지 않는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블라우스 앞섶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넌, 밥 처먹고 집안에서 하는 일이 뭐야!”
“..........”
“집안에 물건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자빠져 자고만 있었어!?”
“.............!?”
지아는 전혀 피할 생각도 하지도 않고 흔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시선도 마주하지 않으려했다. 집안 식구들 앞에서 수모 당하는 것이 습관인 그녀에게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반응이 없는 아내의 태도에 종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내를 왈칵 밀쳐버린 그는 씨근덕거렸다.
“모두 쓸모없는 인간들~!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사라져.”
“.........”
“내가 참을성이 많지 않다는 걸 알지!”
“..........”
“쓸모없는 것들만 모인 집구석!”
“..........”
“김 기사 밖에 있지!? 차 대기시키라고 그래!”
눈치를 살피던 최 광섭이 부리나케 현관 밖으로 나갔다. 권 이사와 지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가정부 조 숙희가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에 휘말린 사람처럼 담담하게 서 있었다. 아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권 이사는 분노를 참지 못해 진열장을 주먹으로 치고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로 향했다. 그때서야 지아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로 몸을 돌렸다.
권 회장의 정기검진을 마치고 돌아온 진우는 자신의 방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원을 향한 한쪽 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안락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그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관리인 황 석기가 정원을 지나치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권 씨 식구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악몽 속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권 회장과 권 이사에 대한 과거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심증으로는 분명한 사실들이지만 손목시계 하나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들이 생부를 살해했다는 확증이 필요했다. 그는 앞으로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신임을 더욱 굳히는 동시에 그들의 약점을 이용할 계획을 떠올렸다.--------------------------
밀수품은 취득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전달해줄 물품 대금도 받지 못한 것이다. 물건을 돌려 줄수도 없고 싱가포르 조직에게 추궁을 당할 것은 물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당장 어찌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오 덕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락가락했다.
“이거 쓸 만한 놈들은 없고 똘마니들만 남았으니.........”
“형님! 그렇지 않아요. 돌쇠도 있고 형만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그 놈들이 그렇게 도망갈 줄 몰랐던 탓입니다. 애들보다는 제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니미럴~! 어떡하지!? 물건을......! 처분하기도 쉽지 않고, 대금을 전해줘야 하는데.”
“형님! 이제 와서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어떻게든지 물건을 처분해야지요.”
“그게 시간도 걸리고 쉬운 일이 아니잖아!”
“내가 애들 풀어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마시고. 술이나 한잔하고 스트레스 푸시지요.”
“넌 모르는 소리야. 요즘 단속도 심하고........”
“프린스에 새 가시내들 왔다는데, 가시지요?”
“쩝......! 에이!”
주먹으로 탁자를 두들긴 오 덕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도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홍 기삼이 입구로 향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뒤따랐다. 사무실 앞에서 뒤를 돌아본 그가 홍 기삼에게 말했다.
“돌쇠하고 형만이도 오라고 그래.”
“네! 형님.”
홍 기삼은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보스의 지시대로 돌쇠와 형만이에게 프린스로 오라고 했다. 홍기삼은 자신의 승용차 뒷문을 열고 홍기삼이 오를 때까지 깍듯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대로변의 룸살롱 앞에 승용차를 세웠다.
그들이 들어간 프린스는 꽤 홀이 넓은 룸살롱이었다. 마담을 비롯해서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스커트와 원피스를 걸친 아가씨들이 줄을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마담이 그들을 구석진 넓은 홀로 안내했다.
“오 사장님! 이제 저희 집에 단골 되시겠네요. 호호호.......”
“장 마담! 우리 형님이 이 구역을 나와바리로 인수할 테니 잘 모시라고.”
“네. 여부가 있겠어요. 오늘 새로 들어온 애들 들여 보낼 테니 잘 부탁드려요.”
“시원치 않은 애들은 뺀지야. 알아서 하라고!”
“마음에 드는 애 고르세요. 우리 집 애들은 모두 대학생들이니까요.”
“그래 그거 좋지! 하하하.......”
오 덕재를 대신해서 홍 기삼이 으스대며 마담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하얗게 눈을 흘긴 마담이 돌아섰다. 그리고 입구로 체격이 크고 험상궂은 사내 두 명이 굽실거리며 들어왔다. 홍 기삼의 연락을 받은 돌쇠와 형만이었다. 오 덕재는 자신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고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손짓해서 불렀다.
“어서들 와서 앉아. 체대까지 나왔다는 놈들이 왜 그래........”
“죄송합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그들이 몸을 사리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술과 안주가 탁자위에 놓이고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들은 제각기 앞을 다투어 오 덕재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일어섰다. 홍 기삼이 돌쇠와 형만에게 손짓을 했다.
“기다려. 형님 술잔은 가시내들이 와서 권해야지. 순서를 모르는구먼.”
“네. 형님~!”
“괜찮아! 애들 오기 전에 한잔 하자고.”
“그러실까요......!”
오 덕재의 말에 홍기삼이 일어나서 그라스를 일렬로 놓고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작은 잔들을 위에 올려 위스키를 채웠다. 작은 잔을 건드리자 차례대로 쓰러지며 백주 잔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박수와 함께 그들은 그라스를 들어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홍 기삼이 오 독재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형님! 오늘 죄송합니다.”
“괜찮아. 지난 간일인데,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술이나 들어.”
“너희들 뭐해. 형님께 사과드리지 못하고.”
“형님! 죄송합니다~!”
돌쇠와 형만이 벌떡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오 덕재에게 꾸벅 허리를 굽혔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앉은 오 덕재가 손을 내저으며 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도에 곽 상무와 달구는 알겠는데 또 한 놈은 누구야?”
“저도 모르겠던데요.”
“그 놈, 보통이 아니던데. 그 놈만 아니어도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던데.........”
“글쎄요! 대도 애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저도 처음 보는 놈인데, 조심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때 홀의 출입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호스티스를 기다리던 그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여자가 아니고 입구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버티고 서있었다. 검은 야전전투복 차림의 청년, 그는 서 진우였다. 그들은 어의가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그들이 말하고 있던 대도의 조직원이었다. 홍 기삼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이제 한잔 마셨는데 술맛 떨어지네.”
“핫! 잘 왔다. 안주삼아 찢어 발겨줄게.”
“이 자슥이, 미쳤나!”
돌쇠와 형만이 잇따라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보스에게 두들겨 맞은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그들은 느닷없이 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너무 몰랐던 행동이었다. 진우는 몸을 돌려 달려드는 형만의 주먹을 피하고는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낮추어 빙글 돌면서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돌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켁~!”
“헉~!”
역습을 받은 형만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대자로 엎어져 정신을 잃었다. 걷어차인 돌쇠는 맞은편의 벽을 들이 받으며 뒹굴었다. 진우가 돌쇠의 목을 팔로 감아 비틀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돌쇠는 목이 꺾여 쓰러졌다. 전광석화 같은 그의 행동에 홍 기삼은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홍 기삼이 팔을 걷어붙였다.
“어라! 이게 제법인데, 오늘 제삿날인줄 알아라.”
“기삼아! 관둬. 네 상대가 아니야.”
오 덕재가 홍 기삼을 만류했다. 그는 보스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때 호스티스들이 입구로 들어서려다가 기겁을 했다. 진우는 전혀 움직임이 없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오 덕재가 호스티스들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들은 부르면 와라. 안면있는 손님인데, 와서 앉으시지.”
“...........”
흔들림 없이 서있던 진우가 옆에 놓인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 덕재 맞은편 탁지 앞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라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따라서 단숨에 마셨다. 홍 기삼은 나이도 많지 않은 청년에게서 풍겨나는 카리스마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 덕재는 억지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대단하네. 목적이 뭐요?”
“난, 정보팀이 필요하오.”
“정보팀.......!? 우리더러 당신 수하 조직이 되 달라고 사정하는 건 아닐테고......?”
“아니, 사정이 아니라, 계약이요. 그리고 당신 조직 말고 당신 한 사람만.”
“무슨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계약을 받아 드릴 거 같은가? 하하.......! ”
“아니 반드시 받아 드릴 거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 되고.”
“정말 코미디를 하는지. 아니면 이 세계를 모르는 모양이구만.”
오 덕재는 상대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직에서 보스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홍 기삼도 어의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진우는 무표정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밀수품은 무용지물이요. 그 물건의 임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처분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싱가포르 마피아가 당신을 찾아 올 텐데, 그걸 고생해서 처분하면 백억, 아니면 천억을 받을까?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
오 덕재가 고심하는 것도 그가 말하는 것과 같았다. 말을 중단한 진우가 다시 그라스에 위스키를 따라서 마셨다. 마치 그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의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는 깊게 눌러쓴 모자챙을 조금 올렸다. 모자 그늘 밑으로 드러난 그의 깊은 눈빛은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그 물건을 인수하고 대금을 마피아에게 지불하지. 그리고 당신에게 20억을 주겠소. 대신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하오. 해남은 여전히 당신 조직이니, 어떤 사업을 해도 상관하지 않을 테고.”
“이십억.......!?”
“..........!?”
진우의 말에 시선을 마주친 오 덕재와 홍기삼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 덕재는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지만, 나이도 어린 그를 주인으로 모셔야하기에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오 덕재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대적하기 불가능했고, 이십억이라는 큰돈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 물건을 인수해가고 연락을 어떻게 하지요?”
“그건 내가 연락을 하리다. 인수하는 방법도 말해 줄 테고. 나를 주인으로 받아 드리겠소?”
“.......음......! 그렇게 합시다.”
“.........!?”
자리에서 일어난 오 덕재가 진우 앞으로 걸어왔다. 모든 상황을 볼 때 어쩔 수 없었던 그는 진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던 홍 기삼도 벌떡 일어나 오 덕재 옆에 무릎을 꿇고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진우가 그들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오덕재가 해야 할 임무를 주었다. 그 임무는 오 덕재를 수하로 만드는 계약이었다.
제법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원수 그늘 밑 의자에 앉은 진우는 셔츠를 걷어 올리고 얼굴에 손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민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요즘 영화에 캐스팅되어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한동안 그녀의 접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가오는 민경을 의식한 진우는 관리인 황 씨를 향해 걸어갔다. 테라스 기둥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황 씨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진우가 예상한대로 다가오던 민경이 걸음을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 잠시 서있던 그녀가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우의 시선이 무심코 황 씨가 들고 있는 손목시계를 향했다. 그리고 예리한 눈빛을 하고 황 씨에게 말했다.
“황씨! 그거 한번 볼 수 있습니까?”
“왜~!? 이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인데........”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건 스위스 명품으로 지금은 생산도 안 되고, 우리나라에 몇 개 안되는 걸로 알아. 요즘말로 뭐라고 하던가? 아~!리미트 상품이라고 하더군.”
“한번 봅시다!”
머뭇거리던 황 씨가 진우에게 시계를 건넸다. 시계를 유심히 관찰하는 그는 긴장이 됐다. 시계 중앙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뒷면에 ‘신화 창립기념일’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분명히 그가 갖고 있는 시계와 동일한 제품이었다. 황 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화 창립 2주년 기념으로 회장님이 주문해서 임원들에게 선물했던 것이지. 그런데 다이아 박힌 시계는 회장님, 대표이사님, 진 이사, 돌아가신 사모님만 갖고 있었고,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회장님이 나에게도 주셨지.”
“아........! 그러시군요.”
“아마, 권 이사님은 잃어버려서 돌아가신 사모님 것을 갖고 있는 거 같던데.........”
“음.......!?”
진우는 손목시계에 새겨진 단서만 갖고 신화에 들어온 것이었다. 손목시계의 명확한 출처로 그의 궁금증은 더욱 깊었다. 시계의 주인이 권 이사라고 한다면 무슨 연유로 그가 악몽의 어둠속에 나타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들고 있는 진우는 불길에 휩싸인 환상을 떠올렸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황 씨가 그가 들고 있는 시계를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회장님의 오른 팔이었지. 권 이사의 덕분이었지만, 이래봬도 대도 애들 거느린 행동 대장이었다고~! 하하하.......!”
“.........!?”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인천 부두에서 부산에서 올라온 놈들하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시계에 대한 내력을 알게 된 진우는 황 씨의 자랑삼아 흘리는 넋두리가 들리지 않았다. 항상 고통스럽게 하는 악몽을 떠올렸다. 피투성이로 죽어가던 가족들, 불길에 휩싸인 거실,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집어 들던 자신, 그리고 검은 복장의 그림자였다. 그 날을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만든 장본인 중에 한 사람이 시계의 주인이었다.
진우는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찾는 악몽 속에 검은 복장의 그림자는 권 이사를 포함한 권 회장이나 도희의 아버지 진 이사, 그리고 황 씨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대도 폭력조직원이 가담했는지도 모른다. 황 씨는 지나간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고 있었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황 씨에게 물었다.
“혹시 송 민욱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송 민욱!? 그 사람을 왜!?”
“아~! 누가 그 사람에 대해서 물어 보기에.........”
“나도 잘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네. 신화기업 초창기에 인천에서 제일가는 갑부였지. 그 당시 프로모터 사업과 부동산으로 재력이 있었던 기업인데, 대한인가.....!? 맞아! 대한기업 사장이었지. 그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데, 회장님과도 친했던 것으로.........”
말끝을 흐린 황 석기가 진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우는 양부모에게 말로만 들었던 생부에 대하여 무척 궁금했었다. 그런데 황 씨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을 중단한 것이었다. 그는 힐끗힐끗 쳐다보는 황 씨의 표정으로 봐서 아무래도 생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 씨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다시 넌지시 물었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던 당시도 대도개발이 존재했습니까?”
“그때는 아니었지. 올림픽 이후에 업체와 조직을 만들었으니까. 원래는 인천의 건달 조직이었어. 대도 개발이 설립되면서 권 이사가 모두 끌어들여 직원으로 채용했지. 난 서울 본사에 있다가 나중에 인천에 내려가서 합류했지만, 그 놈들도 권 이사 덕분에 호강하고........”
그 당시 권 이사와 같이 행동했던 사람들 중에 황 씨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모든 비밀의 열쇠는 권 이사가 쥐고 있는 것이고, 어쨌든 그 당시 나이를 봐도 신화의 권 회장이 지휘를 했거나 가담한 것은 분명했다.
권 회장의 병상이 있는 방의 커튼사이로 여인의 긴 머리채가 드러나 보였다. 도희의 뒷모습이었다. 진우는 도희가 권 회장의 재혼녀로서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권 씨 일가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판단되었다. 문득 그는 그녀가 알고 있을 정보가 궁금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정기 검진을 받는 날만큼은 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도희와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하는 시간이었다. 병원에 가는 승용차 안에서 그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시선을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여인으로서 본능적인 감정과 현실 사이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흠칫하며 그를 힐끗 쳐다보는 도희의 눈빛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차창 문을 쳐다봤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였다. 건널목 앞에서 차를 세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흘렸다. 학생들이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면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도 이마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호호호........!”
“하하........!”
오래간만에 도희의 웃는 모습을 보고 진우는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그녀와 나란히 휠체어에 태운 권 회장을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진료실을 나와서 그는 다시 도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그녀가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온 그는 병원 뒤편으로 갔다. 그는 화단 앞의 벤치에 그녀를 데리고 가서 나란히 앉았다. 산책을 하는 환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핀을 꽂는 그녀를 보고 그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어떤 때는 귀잖아요. 결혼 전에는 커트 머리도 했는데, 미장원 가기도 귀찮아서........”
말을 해놓고 도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는 결혼이라는 단어 자체에 왠지 부끄러웠다. 남편이 있는 여자로서 육체관계를 가진 진우를 바라보기가 민망해서였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감정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는 권 씨 일가에 대해서 그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을 떠올렸다.
“시댁 식구들에 대해 잘 아시나요?”
“글쎄요.......!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잘 몰랐어요.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얘기 정도밖에.......”
“신화 그룹이 언제 대기업으로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올림픽 이후에 그룹이 된 걸로 알아요.”
“무슨 사업으로 컸지요!?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나요? 아니면 경영을 잘 해서!”
“진우씨도 잘 알 텐데요. 물려받은 유산도 없는 걸로 저는 알고 있고,..... 거의 비정상적인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권 씨 일가가 몰락할 이유가 뻔한 거 같아요.”
“요즘 신흥 그룹이 많이 생기기는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올림픽 이후에 프로모터 사업으로 기반을 닦았다고 하던데요.”
“아........! 혹시 송 민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모르는 이름인데요. 뭐하는 분이신데요?”
“저도 잘 몰라요. 누가 알아봐달라기에.”
진우는 생부가 저명한 프로모터 사업을 하는 기업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생부가 하던 사업과 신화 그룹사업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생부가 돌아가신 연유가 기업 간의 경쟁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종합해서 판단하건데 권 이사가 포함된 사람들에 의해 생부가 죽음을 당했다는 확고한 판단이 섰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도희가 일어섰다. 권 회장이 검진을 마칠 시간이었다. 진우는 그녀를 따라 권 회장 담당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갔다. 간호사가 검진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진우는 의사실로 들어가서 권 회장을 휠체어에 태웠다. 담당 의사가 도희에게 환자가 주의할 사항에 대해서 설병했다.
“회장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입원을 한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모님께서 고생되시겠어요.”
“아~! 네.”
“회장님이 감기 증세가 있어서 평소 조제해드리던 약에 아스피린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첨가했습니다. 심장마비 예방에는 좋지만, 지금 회장님께서 혈압조절이 안되어 절대로 과다 복용시키지 마시고 이상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런데, 꼭 복용을 시켜드려야 하나요?”
“혈관 질환에 도움 되니 염려하지 마시고, 다만 뇌와 간이 손상되는 레이증후군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심장에 쇼크를 받을 수도 있기에 주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복용방법만 지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의식만 회복하면 건강 회복도 빠르실 것 같은데........”
담당 의사의 위로를 뒤로하고 진우는 권 회장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병원을 나왔다. 권 회장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권 회장의 하녀 같은 생활을 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도희를 제외하고 권 회장의 건강을 염려할 식구들이 별로 없었다. 진우는 식구들 중에 가장 형의 건강에 신경을 써야할 동생 권 종호이사를 떠올렸다. 그러나 권 회장이 의식이 없다는 빌미로 신화 그룹의 실권을 휘두르는 권 이사는 이따금 형식적으로 들리거나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권 종호는 서재 안을 배회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물품수입 관계로 싱가포르에 다녀온 후에 서류를 챙길 것이 있어 금고를 열었던 그는 망연자실했다.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손가방이 통째로 없어진 것이었다. 가방 안에는 진 이사로부터 받은 물류센타부지 문서에 관한 각서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 이사가 관리했던 비자금 관리 장부까지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집안에 있는 금고가 누군가에 의해 열렸기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그는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쿵쾅거리며 층계를 뛰어내린 그는 씨근덕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식구들이 보이지 않아 그는 고함을 질렀다.
“이 봐! 다들 어디 간 거야!”
“.........”
“다들 귀먹었어?”
“네. 이사님.”
가정부 조 숙희가 쪼르르 주방에서 나왔다.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권 이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권 이사의 모습에 겁에 질려 몸을 사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이 그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미스터 최! 어디 갔어? 다들 오라고 그래.”
“저기, 사모님도요........!?”
“그래! 이 집안에서 내 밥 먹고 사는 년, 놈들은 다 오라고해. 당장~!”
“네, 네!”
종호는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가정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화를 참지 못해 갈증을 느낀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 마신 그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갔던 기정부가 거실로 들어와 겁먹은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지아의 침실로 향하는 복도로 뛰어갔다.
티셔츠 차림의 중년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경비와 저택 관리를 하고 있는 최 광섭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최 광섭은 권이사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들어온 그는 권 이사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섰다. 싸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는 긴장하는 표정으로 몸을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너, 뭐하는 놈이야!”
“네.....!? 무슨 일로......”
최 광섭의 말이 끝나기 전에 권 이사가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둘렀다. 영문도 모르고 뺨을 얻어맞은 그가 휘청거렸다. 거실로 나오던 가정부 숙희가 권 이사가 최 광섭을 후려치는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그러나 숙희를 뒤따라 나오던 지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평소 남편의 거친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 이사가 눈에 불을 켜고 최 광섭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뭐하기에 집안에 있는 물건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네~?!”
“누가 서재에 들어간 거야?”
“네.....!?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요.”
“서재 금고에 누가 손을 댔냐는 말이야?”
“.........!?”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최 광섭이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졌다. 권 이사의 시선이 가정부를 향했다. 가정부 조 숙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지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권 이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조 숙희에게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네, 년이 서재에 들어갔었어? 누가 서재에 들어간 거야!”
“저.......! 저는 모르고요. 서재에 들어가는 사람, 못 봤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금고가 열렸어.”
“저, 저는 정말 몰라요.”
얼굴에 손자국이 벌겋게 드러난 조 숙희가 뒷걸음 쳤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정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 것을 바라본 권 이사가 무표정하게 서있는 지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시선도 마주하지 않는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블라우스 앞섶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넌, 밥 처먹고 집안에서 하는 일이 뭐야!”
“..........”
“집안에 물건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자빠져 자고만 있었어!?”
“.............!?”
지아는 전혀 피할 생각도 하지도 않고 흔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시선도 마주하지 않으려했다. 집안 식구들 앞에서 수모 당하는 것이 습관인 그녀에게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반응이 없는 아내의 태도에 종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내를 왈칵 밀쳐버린 그는 씨근덕거렸다.
“모두 쓸모없는 인간들~!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사라져.”
“.........”
“내가 참을성이 많지 않다는 걸 알지!”
“..........”
“쓸모없는 것들만 모인 집구석!”
“..........”
“김 기사 밖에 있지!? 차 대기시키라고 그래!”
눈치를 살피던 최 광섭이 부리나케 현관 밖으로 나갔다. 권 이사와 지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가정부 조 숙희가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에 휘말린 사람처럼 담담하게 서 있었다. 아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권 이사는 분노를 참지 못해 진열장을 주먹으로 치고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로 향했다. 그때서야 지아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로 몸을 돌렸다.
권 회장의 정기검진을 마치고 돌아온 진우는 자신의 방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원을 향한 한쪽 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안락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그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관리인 황 석기가 정원을 지나치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권 씨 식구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악몽 속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권 회장과 권 이사에 대한 과거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심증으로는 분명한 사실들이지만 손목시계 하나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들이 생부를 살해했다는 확증이 필요했다. 그는 앞으로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신임을 더욱 굳히는 동시에 그들의 약점을 이용할 계획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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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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