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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6 800회 0건
결혼당시 지아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 종호는 삼촌! 삼촌! 하며 따르던 그녀도 응당히 받아 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 발표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라리 죽겠다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었다. 결혼 후 그녀는 거의 식물인간처럼 집안에서 맴돌았다. 결혼전에는 살갑게 대하던 그녀는 점점 그를 원수보듯이했다.

결혼생활을 하게되면 지아가 변할 것이라고 종호는 참고 견디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차갑게 변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차츰 그녀와 결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고아출신으로 가족 친척은 물론 가까운 이웃도 없었다.

권 종호는 누군가 비자금 명세를 이용해서 협박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는 시끄러울지 몰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뇌물을 먹은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자신의 약점을 들어내지 않으려고 방패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나 신화그룹을 공격하려는 상대를 제압하려면 오히려 그들의 욕망을 이용하는 방법뿐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치하는 놈이나 공직에 있는 놈들은 다 같아! 간땡이가 커져서 갈수록 더 처먹으려 든다니까. 그런 놈들이 무슨 국민을 위한다고 그래! 돈만 주면 귀머거리, 장님이 되면서..........”
“...........!?”

권 종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전을 하고 있는 김 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승용차 유리창 밖을 둘러봤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고 기록된 전화번호들을 확인했다. 그는 경찰청 한 총경이라고 적힌 전화번호 다이얼을 눌렀다. 그는 한동안 웃기도 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통화를 했다. 그리고 김 기사에게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김 기사! 어디가는거지?”
“집에 가시는 거 아닌가요......?”

“차 돌려! 회사로.”
“네......? 네!”

김 기사는 사거리에서 급히 핸들을 꺾어 오던 길을 되돌아 가속페달을 밟았다. 권 종호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빠르게 다이얼을 눌렀다. 그는 대도의 곽 상무와 서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로 급히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본사 사옥에 도착한 그가 자신의 방이 있는 7층 복도를 걸어가는데 곽 상무와 진우가 앞서서 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그들이 권 이사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권 이사를 따라 대표이사실로 들어갔다. 권 이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따라 들러온 여비서가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여비서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한 그가 곽 상무와 진우를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귓속말을 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번에는 실수 없이 해야 돼.”
“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곽 상무가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 이사가 뒤늦게 대답하는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뜸을 드리던 권 이사가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저번에 가져오지 못한 물건 말이야. 내가 경찰 내부정보를 통해 알아보니 그 놈들이 아직 처분 못하고 갖고 있어. 요즘 경찰에서 범죄소탕 작전 중이라서.........”
“.........!?”

“경찰 고위직급만 알고 있는 작전을 계획 중인데. 경찰에서 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우리가 빼내야 돼.”
“..........!”

“놈들은 처분할 곳을 찾아 혈안이 돼 있고, 물건이 있는 장소를 지키는 애들은 많지 않다니까. 애들 데리고 가서 단숨에 처리해야 돼. 알겠어?”
“네.....!”
“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물류센터 건립을 방해하려고 나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협박하는 모양이야. 아무리 협박을 당해도 황금에 안 넘어가는 놈들은 없어. 그래서 더욱 그 물건이 필요해.”
“.........!”

“자! 이 주소에 해산물 보관창고가 있는데, 여기 적힌 10번 냉장창고야. 오늘 밤에 놈들이 모임이 있다는 정보야. 그러니 오늘 밤 안으로 처리 해!”
“.........!”

권 종호가 메모지 한 장을 꺼내 곽 상무 앞의 탁자에 밀어 놓았다. 진우는 곽 상무가 펼쳐 드는 메모지를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그가 곽 상무를 돕는 공직자들에게 우편물을 보낸 것이었다. 그는 권 이사가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내면으로는 비자금 명세를 이용하여 권 이사에게 타격을 입히면서 한편으로 그의 신임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회사 건물을 나온 곽 상무와 진우는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었다. 그들은 같은 지시를 받았지만 제 나름대로 각기 생각에 잠겼다. 곽 상무는 지난번일로 실추한 자존심을 회복할 생각이었고 진우는 어떻게 하면 손쉽게 권 이사의 지시를 마무리할지 궁리를 했다. 커피를 마신 곽 상무가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돌아섰다.

“미스터 서! 그럼 11시 정각에 대도 사무실에서 만나.”
“잠간만........!”

진우가 곽 상무를 불러 세웠다. 언짢은 표정으로 곽 상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곽 상무는 대도의 보스로서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진우와 동등한 위치에서 지시를 받은 것만 같아서 불만중이었다.

사실 진우는 권 이사가 반드시 밀수품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대비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사전에 자신의 계획을 오 덕재에게 알리고 모종의 지시를 해놓았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는 곽 상무에게 준우가 다가갔다.

“지금 미리 현장에 가봐야 될 것 같은데........!?”
“그.........!?”

짜증을 내려던 곽 상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어느 날 돌연히 신화에 들어온 서 진우라는 인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권 이사가 무척 신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매사가 그를 앞장서는 판단을 내렸고 행동 또한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민첩했다. 물론 그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했지만 진우의 지적인 판단과 비밀스러운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진우의 의견을 당연히 받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럴까! 그래야 되겠지......”
“그럼 같이 가시지.”

진우가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주춤거리던 곽 상무가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각자 자가용을 이용해 영등포로 향했다. 진우는 이미 곽 상무가 권 이사로부터 받은 메모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영등포 해산물 창고가 보이는 인근 골목에 승용차를 주차시켰다. 골목을 나온 그는 대로에서 줄지어 있는 창고들을 자세히 살폈다.

“저게 10호 창고.......!”

진우를 뒤따라 온 곽 상무가 중얼거렸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던 진우가 몸을 돌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힐끔 쳐다본 곽 상무도 골목 어귀로 들어갔다. 진우가 자신의 승용차 운전석 문을 열면서 곽 상무를 돌아봤다.

“그럼, 11시 정각에 이 장소에서 만나지요. 직원들은 10명 이내면 충분할 것입니다. 너무 많으면 오히려 이동하기가 불편하니까요.”
“그, 그러지.......!”

어느새 곽 상무는 진우의 지시를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는 기분은 좋지 않지만 자신보다 앞선 진우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승용차를 몰고 대로로 나온 진우는 백미러를 들여다봤다. 곽 상무의 코란도가 차량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는 승용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한쪽에는 차량들이 줄을 지어 주차되어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그는 대형 트럭 사이에 승용차를 주차시켰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주위를 살폈다. 맞은편 건물에 작은 커피숍 간판을 쳐다본 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나섰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니 마담으로 보이는 중년여인과 나이든 남자들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잡담을 하며 웃음을 흘리던 마담이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네! 전화 좀 사용해도 될 까요?”
“그러세요.”

마담이 계산대 위의 전화기로 안내했다.,수화기를 집어든 진우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다이얼을 눌렀다. 오 덕재의 휴대폰 번호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귀잖다는 말투의 오 덕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시오?”

“오 실장! 나 요.”
“아! 사장님!”

진우가 정한 호칭이며 접선 방법이었다. 심드렁했던 오 덕재의 목소리가 정중하게 바뀌었다. 진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저녁 11시에 물건 인수하러 갈테니 준비하시오.”
“아! 네. 애들과 열쇠는 어떻게 하지요?”

“내가 말한 대로 현장에 최소인원만 남기고, 미리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세요. 현장인원에게도 알리지 말고 열쇠는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정보 알려주는데, 경찰에서 범죄소탕 작전이 있소. 일 끝나면 잠시 피해있으시오.”
“네. 알았습니다. 애들더러 짱 박혀 있으라고 하지요.”

통화를 끝내고 구석진 자리의 탁자 앞에 가서 앉은 그는 다가오는 마담에게 냉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시간을 보내는 실업자처럼 앉아 있었다. 마담이 커피를 가져다 놓았다. 그는 냉커피의 얼음이 거의 다 녹아내릴 쯤에 잔을 집어 들었다. 단숨에 커피를 마신 그는 불쑥 일어나 계산대에 돈을 놓고 커피숍을 나왔다.

승용차에 오른 진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도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만 이어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취소 버튼을 누르려던 그는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뒤늦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접니다! 오늘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왜요......!?”

“나중에 말할게요.”
“저녁 식사는요?”

“알아서 먹을게요. 회장님은? 고열이라고 하더니.......”
“약 먹고 괜찮은 거 같아요.”

“다행이네. 기다리지 말고 자요. 그냥.”

통화를 끝낸 진우는 좌석을 뒤로 젖혔다. 오디오 채널을 돌려 파두음악이 흘러나오는 방송을 선택한 그는 핸들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등받이에 누웠다. 그는 현장 근처 가까운 곳에서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아이들 목소리, 장사꾼들의 외침에 생각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뒤척이다가 깜박 잠이든 그가 눈을 떴을 때 적막이 깃든 밤이었다.

승용차 오디오 위의 시계가 10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승용차를 몰아 대로로 나갔다. 그리고 해산물 창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는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주변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도로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 청소부와 순찰중인 정복경찰 두 명이 눈에 띠었다. 불이 켜진 포장마차에 손님들의 그림자가 드러나 보였다.

진우는 약속시간 20분전에 곽 상무와 약속한 장소로 갔다. 이미 도착해 있는 곽 상무의 코난 도와 왜건 한 대가 검은 괴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에서 곽 상무가 내려 진우의 승용차로 다가왔다. 뒤이어 10명 안팎의 대도 조직원들이 차에서 내렸다. 진우의 운전석 앞에 걸음을 멈춘 곽 상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늦었군!”
“아직.......!”

차 안의 시계를 확인하며 운전석에서 내려서는 진우가 짧게 대답했다. 돌아선 곽 상무가 조직원들에게 임무를 지시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진우도 들으라는 듯이 흘깃 곁눈질하며 명령했다. 곽 상무가 어깨에 힘을 주고 앞장서서 골목 어귀를 돌아서갔다. 골목 입구로 보이는 대로로 순찰중인 정복경찰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가 곽 상무를 불러 세웠다.

“어디로 가시려고?”
“어디긴 뭐 어디야! 창고로 가야지.”

“아니! 입구로 가면 시간 낭비요.”
“그럼......!?”

“이쪽으로!”

진우는 발길을 돌려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춤거리던 곽 상무가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조직원들도 자동으로 곽 상무를 따라 이동했다. 곽 상무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진우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가 담을 훌쩍 뛰어 넘어갔다. 그때서야 곽 상무는 막다른 골목 담장 너머가 창고 뒤라는 것을 알았다.

모두들 진우를 따라 담장을 뛰어 넘었다. 그는 뒤로 들어가서 창고를 지키는 그들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다. 창고를 지키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고 다섯 명 정도였다. 그의 지시를 받은 오 덕재가 미리 배치한 인원이었다. 창고 앞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는 사내들은 이따금 입구를 돌며 주시했다.

창고 뒤편으로 숨어들어간 곽 상무일행이 소리 없이 튀어나갔다. 창고를 지키던 사내들이 허겁지겁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급습을 받으리라고 집작하지 못했던 그들은 단숨에 조직원들에게 제압을 당했다.

대도 조직원들은 그들의 팔을 뒤로 돌려 묶고 꿇어 앉혔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 테이프로 붙여 만약의 소란스러움을 방지했다. 곽 상무가 그들 중 한명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박은 테이프를 우악스럽게 잡아떼었다.

“개 같은 놈들! 너희들 때문에 내가 망신당했잖아! 열쇠 내 놔!”
“우리, 우리는 몰라.......!”

“이 새끼가 어디서.......”
“헉.......!”

곽 상무가 사내의 무릎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신음을 흘린 사내가 앞으로 쓰러졌다. 대도 조직원들의 시선이 곽 상무를 향해 있었다. 쓰러진 사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말없이 보고 있던 진우가 10호 창고로 다가가고 있었다. 진우가 오 덕재에게 지시했기에 그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절단기로 10호 창고 문을 걸어 잠근 자물쇠를 손쉽게 잘라냈다.

“........!?”

모두들 진우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봤다. 곽 상무는 요즘 자신의 판단이 진우를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곽 상무는 조직원들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들을 창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창고 안에는 굳게 잠긴 해산물 보관 냉동 창고가 있었다. 진우는 묵묵히 냉동 창고 잠금장치도 절단기로 잘라냈다.

그들이 찾는 물건은 해산물 포장과 다르게 트렁크에 들어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진우가 트렁크를 열어보니 일정한 규격 없이 포장된 뭉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포장지를 뜯으니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진우는 창고를 나가고 곽 상무가 트렁크를 들고 나왔다.

다음날 출근한 권 이사는 곽 상무와 진우가 본사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직원들의 눈을 피해 그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들였다. 곽 상무가 들고 들어온 트렁크를 그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며칠간 어두웠던 권 이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이아몬드와 현금을 받은 공직자들의 표정을 상상하는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수고들 했어. 마무리는 잘했겠지!?”
“네. 그놈들은 어디에 하소연도 못할 테고, 주위에 눈치 채는 사람도 없이 순식간에 헤 치웠습니다. 그놈들이 뒤에서 습격당하리라고 생각 못했던 모양입니다. 놈들이 열쇠를 내놓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미스터 서가 미리 준비했기에.........”

말을 하던 곽 상무는 아차, 싶었다. 결국은 진우의 노력으로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는 결론을 말해버린 셈이었다. 권 이사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기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곽 상무의 자랑스러운 말투를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말이야! 현금과 함께 선물상자를 만들어야. 내가 지시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줘야겠는데......!”
“..........!?”
“..........!”

또 다른 지시를 받을지 몰랐던 곽 상무가 진우를 흘깃 쳐다봤다. 진우는 물건을 찾아오라는 그의 지시를 받으면서 이미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다. 권 이사가 물건을 이용할 목적을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권 이사가 트렁크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자들이 받지 않으려고 할 거야! 꼭 받게끔 해야 하는데...... 만약 그 자들이 거절하면 도리어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될 테고. 어쩌지?”
“.........!”

“할 수 있겠어? 반드시 그 자들이 받아야 내 계획을 성공시키는데......”
“..........!”

곽 상무는 차라리 물건을 빼앗아 오라는 지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받지 않으려한다면 음식처럼 강제로 먹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난처해진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진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자네가........!? 반듯이 해야 하는데.”

“네!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진우를 믿어보지.”

진우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상대가 물건을 받고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은 그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진우의 목적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비자금명세가 언론에 유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직자들이 신화그룹의 물류센터 건립허가에 도움을 줄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권 이사의 방에서 나온 곽 상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권 이사의 지시를 진우가 한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나온 진우는 오 덕재에게 전화를 걸어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리고 오후 늦게 진우는 권 이사의 호출을 받았다. 본사가 아닌 대도 개발의 창고였다. 그 자리에는 김 기사와 권 이사만 있었다. 창고 앞의 트럭에는 고위공직자들에게 보낼 상자들이 이미 포장되어 쌓여 있었다. 권 이사가 상자들을 보낼 대상자 명단을 진우에게 건네주며 틀림없이 전달하라고 당부했다.

진우는 트럭을 몰고 을지로의 백화점 앞으로 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는 오 덕재와 홍 기삼을 트럭에 태웠다. 오 덕재가 대여한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지시했던 물건이었다. 그는 권 이사에게서 받은 명단의 대상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이사의 심부름이라면서 선물을 건네줄 장소와 시간들을 약속하고 메모를 했다.

진우의 전화를 받고 거절하는 대상자가 반수 이상이었다. 그의 우편물을 받았던지, 신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오 덕재에게 해야 할 임무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시간 약속 일정과 가까운 장소의 대상자부터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거부하지 않고 선물을 받는 대상자는 어렵지 않았다. 미리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그들의 승용차 트렁크에 옮겨 실어 주거나 자택에 배달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선물을 거절하는 대상자들이었다. 그는 대상자가 있는 건물의 주차장에서 그들의 자가용을 주시했다. 승용차를 기다리거나 운전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는 운전기사가 거부할 것을 알면서도 일단 운전기사에게 용건을 전달했다. 그의 판단대로 운전기사들은 대부분 단호히 거절했다.

진우의 신호를 받은 오 덕재와 홍 기삼이 운전기사를 제압하여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소지한 승용차 열쇠로 트렁크를 열어 선물상자를 옮겨 실었다. 어느 경우에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에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진우는 이틀 동안 오 덕재와 홍 기삼을 데리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는 휴대폰으로 일일이 지시를 하고 보고를 받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진우는 권 이사에게 지시받은 일을 마무리했다고 보고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선물상자를 택배로 다시 보내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권 이사는 회사로 반송되어오는 상자를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일찍 물류센터 건립을 추진했더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미 그의 수중에서 사라졌지만 대지 양도각서에 서명하지 않은 도희가 원망스러웠다.

더위가 한 꺼풀 꺾인 저녁나절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희는 진우가 회사일로 바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의 승용차로 남편의 정기검진을 다녀왔다. 관리인 황 석기의 도움을 받았지만 힘겨운 하루였다. 자신의 침실 창문 밖을 바라보고 서있는 그녀는 왠지 공허감에 젖어 으스스한 냉기를 느꼈다.

집안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적막에 쌓여있어 그녀는 고독한 섬에 갇힌 기분이었다. 고독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생명이 발생하는 곳과의 공간,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형성되는 것과의 분리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꿈이 클수록 고독해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단순했다.

도희의 가슴속에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열망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보지 못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달랐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관심을 보일수록 권 이사가 아버지를 해코자 할 것 같아서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현실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건강했던 시간으로 되돌려놓고 싶은 열망이었다.

마치 하녀처럼 생활을 하고 있지만 도희는 과거의 생활을 회상하는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녀에게 진우는 큰 의지가 되었다. 그런 뜻에서 그에게 물류센터 허가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안에 숨겨졌던 본능의 불씨를 타오르게 만든 그의 여자가 되어가는 감정이었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면 그녀는 더욱 그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도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예민해졌다. 밤늦게 민경이 집으로 들어왔으나 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스산하게 하는 빗방울이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침 식사시간이 되었어도 그녀는 입안이 깔깔하고 식욕이 없어서 뒤척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귀가했는지 진우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도희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식탁에는 민경과 관리인 황씨, 그리고 가정부도 함께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지만 민경이 혼자 재잘거렸다. 도희는 진우 옆에 앉은 민경을 곁눈질했다. 그녀가 그의 팔을 툭졌다.

“어제 먹은 킹크랩 맛있었지?”
“........!?”

“난, 그 집이 비린내도 나지 않고 괜찮던데, 진우씨는 어땠어?”
“..........”

묵묵히 식사를 하는 진우가 대답 없이 도희를 힐끔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녀는 그가 어제 저녁에 민경과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질투심인가, 왠지 불쾌하지만 그녀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요즘 집에 머무는 시간이 없는 그가 혹시 물류센터 허가관계로 바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민경이 물을 채운 컵을 진우 앞에 내려놓았다.

“난, 오늘 나갔다 와야 되거든. 이따 봐.”
“............!”

민경이 진우의 어깨를 톡치고 주방을 나갔다. 묵묵히 식사를 하던 진우가 도희를 살폈다. 담담한 그녀의 표정이었으나 왠지 어색해 보였다. 짧은 순간에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다. 진우는 그녀의 눈빛 속에 깃든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물류센터 허가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식사를 마친 진우는 거실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가정부와 최 씨가 있어서 도희와 대화할 조건이 도지 않았다. 성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며칠간 권 이사의 지시를 수행하느라고 신경을 쓰며 돌아다녔더니 피곤함을 느꼈다. 침대에 벌렁 누운 그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얼마동안 잠이 들었었는지 진우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등의 전류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안에는 그가 뒤척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그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분명히 이층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였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멈추었다.

진우는 누군가 서재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진우는 슬며시 일어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열고 보니 도희가 복도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도희 표정이 장난을 하다가 들킨 소녀처럼 무척 어색해 보였다.

“궁금해서........”
“아........!”

도희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진우는 그녀가 물류센터 허가 문제가 궁금해서 결국 올라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문을 나온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물류센터 허가 문제는 일단 안심해도 돼.”

“정말.......!? 어떻게?”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진우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쁨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빛! 그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지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아 당겼다. 그의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그녀의 고른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위에 입술을 포겠다. 그녀는 익숙해진 그의 입술을 받아 드렸다.

“..........!”
“..........!”

스산한 빗방울 소리에 잠을 설쳤던 도희는 진우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혀와 혀가 엉키어 서로 가슴에 담았던 감정을 열기로 승화시켰다. 그는 그녀를 벅을 등지게 하고 농익은 둔부를 움켜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된 그들은 오직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층계를 오르려다가 급히 몸을 숨겼다. 그들은 그들만의 열기에 휩싸였기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층 복도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관리인 황 석기였다. 빗물받이가 막힌 것 같아서 옥상으로 올라가려던 그는 권 회장의 아내와 진우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에 경악했다.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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