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도희가 원래 활달한 성격이었는데 새침을 떤다는 민경의 핀잔하는 말을 떠올렸다. 젊은 나이인 그녀가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병든 남편을 간병하는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평소 말이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기에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녀가 도리어 불쑥 물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세요?”
“음......!? 만족하다기보다는......! 미래를 모르니까.........”
“회장님이 쓰러지기 전에 능력 있는 분이라면서 다만, 속마음과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 그러셨으면 다행이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지요.”
문득 진우는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원한을 품고 신화 그룹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회장님 집안의 여자분들 은 나이가 젊으시군요.”
“왜요!? 그게 이상해요?”
“아뇨! 이상하다기 보다는. 사모님들이 모두 나이 차이가 많기에.......”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권 이사님 사모님 이름이 권 지아지요?”
“네.”
“회장님 성씨를 따랐다면서요?”
진우는 권 지아가 권 회장이 입양해서 키운 딸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도희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다시 물었다.
“지아 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사님과 결혼했을 가요?”
“........”
“권 회장님이 허락한 결혼인가요? 그리고 지아씨도......”
“그건,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거 같아요.”
도희가 의미 있는 눈빛으로 진우를 살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인지 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토록 많은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있던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그를 향해 눈빛을 반짝였다.
“당돌하지만.......! 미스터 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나한테요?”
“내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그럼, 저를 믿는다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는 입장이고, 그냥 미스터 서를 믿고 싶어요.”
“음........!? 제가 도움 된다면 말하세요.”
진우는 사실 난처했다. 그의 꿈이라면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악몽의 실타래 끝에 연결된 신화와 그들 가족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당분간 권 회장에게 신임이 필요한데, 권 회장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그녀의 요구가 그의 목적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그가 필요로 하는 정보일 수도 있었다. 또한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만큼 그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성북동에 좀 다녀와 주실 수 있어요? 필요한 게 있어요.”
“성북동을.......!?”
도희의 말에 진우는 긴장했다. 성북동은 그도 잘 알고 있는 권 종호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며 정당하게 취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는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요구를 받아 드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난처한 그의 표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꼭 그것만은 권 씨 집안에 넘겨주고 싶지 않고, 진우 씨라면 가능하다고 믿어요.”
"저는 권 회장님과 권 이사님의 부하 직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일을 부탁하십니까? 저를 어떻게 믿고......?"
"오랫동안 어떤 사람에게 인가, 부탁하고 싶었어요. 제가 어쩌면 도박인지 몰라도, 그냥 느낌으로 진우씨를 믿고 싶어요.
“뭔지 몰라도, 권 이사에게 정당하게 요구 할 수 없는 건지........?”
“제 아버지가 요양원 들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작성해 준 것이 있어요. 부평에 있는 만여 평되는 땅인데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뺏기고 마지막 까지 갖고 있던 재산예요.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 아버지가 그 땅의 소유를 넘긴다고 작성해준 각서예요. 저하고 아버지가 공동소유로 되어있어서 다행이지만, 수시로 저를 협박하고 있어요. 그 각서를 가져다 주셨으면 해요.”
“그게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도희가 눈빛을 반짝이더니 손가방을 뒤져서 각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봉투 안에 들어있는 메모지와 열쇠고리를 꺼내서 진우에게 보여주었다. 메모지에는 여러 개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이건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저에게 주신 거예요. 권 이사 서재에 커다란 액자가 있다고 해요. 액자 뒤에 있는 권 이사의 개인금고를 열수 있는 열쇠와 비밀번호라고 했어요. 아마도 아버지는 이런 사태가 벌어 질 것을 예상했는지 저에게 남기려던 재산이었어요.”
“............!?”
진우를 빤히 바라보는 도희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녀는 메모지와 열쇠를 다시 넣은 봉투를 들고 그가 받아 주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를 내려다보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다가 권 이사의 신임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악몽의 시달림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그의 마음이었다. 망설이는 그를 보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마, 권이사가 갖고 있는 아버지의 손가방 안에는 그들의 비자금 관련 서류들이 같이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비자금........!?”
진우가 혼잣말처럼 되받아 흘리는 말에 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될 수 있는 유혹이었다. 그녀는 그가 꼭 요구를 들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가 필요할 것 같은 비자금 서류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진우는 복도 모서리까지 서성거리며 그녀의 요구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도희가 천천히 일어나서 그의 등 뒤에 다가섰다. 뒤로 돌아선 그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그의 마음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눈빛!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
“..........!?”
진우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봉투 대신에 도희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만약 실패하면 권 이사에게 들킬 것이고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 요구에 대한 승낙의 표현이며 비밀을 지키는 약속이었다. 순간 그는 그녀의 표정이 벅찬 기쁨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분노의 열정을 느꼈다. 그 열정 안에는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
진우는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는 도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믿고 있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도희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소망을 달성했다는 희열로 가득했다. 그의 바로 코앞에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진우가 천천히 도희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녀가 반짝이던 눈동자를 사르르 감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생각보다 따뜻하다고 느꼈다. 아니 열정을 느끼게 하는 여인의 향기였다. 여인의 체취로 충동에 휘말린 그는 그녀를 가슴 속 깊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입술을 헤집고 들어가는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도희의 요구를 받아들인 진우는 며칠간을 권 이사의 동태를 살폈다. 권 이사의 저택에는 그의 아내 지아와 경비원, 그리고 가정부가 있었다. 그는 양부에게 무술을 익혔지만 과연 도희의 요구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도희는 수시로 그의 눈치를 살폈고 민경은 더욱 그에게 집착하여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진우는 도희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어 자신에게 집착하는 민경을 더욱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민경은 그를 따라다니며 유혹하는 눈빛으로 스킨십을 시도했다. 민경은 다른 남자와 달리 떠올리는 그에 대한 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그의 여자로 존재하고 싶어 집착하지만, 그는 단순히 성욕의 대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권 이사의 지시로 안양에 다녀온 진우는 차고 옆의 공터에서 역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테라스를 향한 베란다에서 그를 바라보던 민경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비틀며 빤히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그의 등에 들어나는 근육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진우씨~! 요즘 안보이던데, 어디 돌아다니는 거야?”
“...........!”
“종호 오빠가 회사로 출근하래........,!?”
“............!”
“또 입 닫고 말 안하네. 내가 귀찮은 거야! 나 갖고 싶지 않아?”
“.............!”
민경의 말에 무관심한 표정을 지은 진우는 베란다 창문을 힐끔 쳐다보면서 역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 벨이 울린 것이다. 도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베란다 창문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틈에 민경이 그에게 매달려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권 이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확인했다.
“네. 이사님.”
“지금 뭐하나?”
“집에 있습니다.”
“아! 그럼, 나, 공항에 가야하니 지금 내 집으로 와! 내 차는 김 기사가 수리 받고 있어.”
“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진우는 벗어 놓은 셔츠와 점퍼를 걸쳤다. 민경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그는 승용차가 있는 차고로 걸어갔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민경이 눈을 흘기며 종알거렸다.
“어디가!? 너도 마찬가지로, 남자는 모두 도독 놈이야.........”
“..........!”
승용차 운전석에 오르는 진우는 민경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권 이사가 집을 비운다는 사실에 긴장을 했다. 권 이사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도희의 약속을 실행할 생각만 떠올렸다. 승용차에 시동을 걸은 그는 다시 베란다 창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승용차 엔진소리를 들었는지 그를 주시하는 도희의 눈빛이 드러나 보였다.
진우가 성북동 권 이사 저택에 도착하니 도베르만이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그는 철문 사이로 집안을 살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권 이사의 아내 지아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항상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모습이 아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문이 열리고 권 이사가 경비원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진우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승용차 뒷문을 열고 서있었다. 그가 뒷좌석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승용차를 몰고 대로로 나올 때까지 권 이사는 어디론가 목청을 높여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그가 진우에게 물었다.
“요즘 형님은 어떠신가?”
“항상 같은 상태이십니다.”
“형수는......!?”
“집안에만 계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안양 일은 잘 처리 헸나?”
“네! 전달했습니다.”
진우는 권 이사의 지시로 신화 계열인 대도 개발의 영업부장 최 달구와 같이 안양에 다녀온 것이었다. 대도 개발은 폭력 조직원으로 구성된 우수사업체였다. 그리고 최 부장은 권 이사가 후원하는 폭력단체의 행동대장으로 괴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포악하고 잔인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권유로 신화에 입사하고 최 달구와 다툰 경험이 있었다.
최 부장이 군기를 잡는다면서 진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며 휘두르는 최 부장의 주먹을 되받아쳤다. 서열을 중시하는 폭력세계를 그가 몰랐던 것이었다. 도리어 그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최 부장이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고 격투가 벌어졌다. 누구도 그들을 말리려하지 않았다. 결국은 현장에 나타난 권 이사의 만류로 그들의 싸움이 중단되었었다.
“나, 싱가포르 갔다가 모레 아침에 도착할 예정이다. 내 차가 그때까지 수리 안 되면 공항으로 나와!”
“네!”
귄 이사의 지시에 짤막하게 대답하는 진우는 이틀 안에 도희가 요구하는 물건을 가져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권 이사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그가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보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성북동으로 갔다. 귄 이사의 저택이 바라보이는 골목 어귀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동정을 살폈다.
진우는 이미 권 이사의 저택 구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 들어가느냐가 문제였다. 경비원과 가정부, 그리고 권 회장처럼 권 이사의 집에도 사나운 도베르만이 두 마리씩이나 있었다. 저택 뒤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한동안 올려다보던 그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진우는 가정부가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서성이던 진우는 긴장을 풀기위해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방을 나왔다. 층계를 내려가던 그는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다.
층계입구의 어둠속에 하얀 가운을 걸친 도희의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그녀가 유령처럼 서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한 계단씩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권 이사가 출장을 갔다는데, 걱정이 돼서........”
“어떻게 알았어요?”
“비서실에 있는 친구와 자주 연락해요.”
“아! 그렇군요.”
“오늘,......! 해 주실 건가요?”
“네.......!”
긴장하는 도희의 눈빛이 역력했다. 그는 슬그머니 그녀를 껴안았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의 스킨십을 받아드렸던 그녀이지만 주위를 살피며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발자국 물러서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등을 토닥거렸다. 포근한 열기의 체취가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그가 가슴에 갇힌 그녀의 입술위에 입술을 포갰다. 벽에 등을 지고 있는 그녀는 꼼짝도 않고 그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도희가 슬며시 진우를 밀어냈다. 멀리서부터 들리던 승용차 엔진소리가 집 앞에서 머무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민경의 승용차이기에 그들은 떨어져 섰다. 머뭇거리던 도희가 가운 앞자락을 여미더니 몸을 돌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우는 민경을 마주하기 싫어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던 진우는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창문 커트 사이로 어둠이 짙어 있고 침대 탁자에 놓인 시계 바늘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점퍼와 바지, 그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그는 미리 생각했던 도구들을 넣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방을 나왔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층계를 내려온 그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현관 옆에 있는 개집에서 도베르만이 나와 그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도베르만의 목덜미를 쓰다듬은 그는 정원을 거쳐 철문으로 다가섰다. 조심스럽게 열어도 쇠가 잇닿는 소리가 났다. 숨을 죽이고 나온 그는 대로를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인척이 드문 시간인데도 승용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성북동에 도착한 진우는 권 이사의 저택 뒤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물체가 펄쩍 뛰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긴장했다. 어둠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던 들 고양이가 담장을 타고 사라졌다. 낮에 눈여겨보았던 아름드리나무를 올려다봤다. 별빛이 흐르는 하늘에 굵은 나뭇가지들이 골목까지 뻗쳐있었다. 그는 담장위에 사뿐히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타고 안쪽으로 움직였다.
나무 위에 오른 진우의 눈앞에 이층저택의 옥상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다시 나뭇가지를 타고 옥상위에 사뿐히 내릴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택 뒤의 개집에 있던 도베르만이 나와 으르렁거렸다. 서성거리던 도베르만이 다시 개집으로 들어가고 적막이 깃들었다. 그는 옥상 난간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진우의 바로 눈앞에 창살에 가려진 서재 창문이 있었다. 그는 창살을 떼어내기 전에 창문을 확인했다. 아뿔싸~! 그는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창문은 굳게 잠겨있고 창문 안에 또 다른 이중 창살이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있기에 곰곰이 생각하는 그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서재 창문 밑의 일층에는 주방이었다. 주방 창문 위에는 빗물막이 좁은 턱이 들어나 있었다.
서재 창문 창살을 잡고 매달린 그는 간신히 좁은 턱에 발끝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보일러 배관을 한손으로 잡고 창문을 열어봤다. 또한 잠겨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플래시를 꺼내서 창문 틈을 비춰봤다. 창문과 창문 사이를 연결한 잠근 장치가 보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분무기를 꺼내 창문 틈을 겨냥하고 버튼을 눌렀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오일이 창문 틈으로 뿜어져 나갔다. 소음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잠금장치가 오일에 젖은 것을 확인한 그는 가느다란 톱을 꺼내 들었다. 강력한 특제 톱날이어서 잠근 장치가 소리 없이 잘려져 나갔다. 주위를 살피며 깊은숨을 내쉰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밀어봤다. 천천히 열린 창문 안으로 어둠속의 주방이 들어났다.
진우는 흐릿한 비상등이 켜잔 주방 안을 살폈다. 창문 안으로 들어간 그는 사뿐히 싱크대 위에 올라섰다. 싱크대 위에서 내려서던 그는 당황했다. 주방 입구로 하얀 잠옷가운을 걸친 여인이 들어선 것이었다. 그를 보고 기겁하는 여인의 표정! 순간 그는 여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여인과 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종호의 아내 지아였다. 소스라쳐 놀란 그녀는 눈동자를 크게 치떴다. 그녀는 어둠속에 검은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가 다름 아니라 최 회장의 비서로 있는 서 진우라는 것을 알고 의아스러웠다. 그가 어찌해서 깊은 밤중에 괴한처럼 집안으로 침입한 것인지. 그녀는 이따금 집에 호출된 그가 남편의 지시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침몰하던 여객선에서 처음 만나던 그를 떠올렸다,
그 당시 지아는 남편과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지옥 같았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 그녀는 고아원에서 권 회장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던 권 종호의 아내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불가항력이었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지아는 난폭해지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들었고, 차라리 권 회장의 딸로 생활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남편이 아니고 악마였다. 여객선에서 남편의 시달림에 지친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진우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깊은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왠지 멈추어 있던 심장이 살아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날도 지아는 거칠게 옷을 벗기려는 남편을 피해 달아났고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런데 여객선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진우가 바다로 뛰어 내리려는 그녀를 붙잡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동질감 같은 분위기를 느꼈었다. 만류하는 진우의 눈빛에 죽음을 포기했던 순간과 여객선 침몰의 공포에서 구출된 순간을 겪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삶에 대한 의욕이 솟구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당시 그에 대한 감정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 자신이 여자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했던 남자였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기억 속에 살아있던 남자 같았다. 뜨거운 열정이 뿜어 나오는 그의 가슴과 입술! 그윽한 눈빛 속에 담겨진 카리스마! 균형 잡힌 체격!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출해준 젊은 남자의 혈기!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진우는 지아의 놀랐던 눈동자가 풀리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조용한 적막 속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실로 나오는 발자국 소리! 그는 얼핏 냉장고 뒤로 몸을 숨겼다. 꼼짝하지 않고 있던 그녀가 몸을 돌려 주방 앞으로 다가섰다. 거실로 나온 사람은 나이가 삼십대로 보이는 가정부 조 숙희였다.
“사모님! 안 주무셨어요!?”
“........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아무것도 아녜요. 내가 물 마시느라고...........”
주방으로 다가서는 가정부 숙희의 앞을 지아가 막아섰다. 숙희가 지아의 어깨너머로 주방 안을 살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지아가 몸을 돌렸다. 그녀들의 동태를 엿보고 있던 진우가 냉장고 뒤편 어둠에서 나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어둠속에 반짝였다.
지아는 진우가 몰래 숨어든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이고 그가 사람을 헤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알았던 남자와 다르다고 느꼈었다. 은연중에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그의 분위기에 이끌렸던 그녀는 그가 음모와 비리로 가득한 신화에 있을 사람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권 씨 집안에서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없었기에 그를 방관하고 싶었다.
“...........!?”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지아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의 침입을 알릴 그녀가 오히려 동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감정을 교환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발돋움하여 이층오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둠 속의 서재 안은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손전등을 켜든 진우는 주위를 살펴봤다. 생각보다 넓은 서재 한쪽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었다. 한쪽면의 책꽂이 옆에 큰 책상과 소파가 있고, 책상 뒤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에는 그리스 신화 벽화처럼 채색되어 보이는 그림이 있었다. 진우는 책상 뒤로 다가가서 벽에 걸린 액자를 드러냈다.
도희의 말대로 철제 금고가 존재했다. 진우는 그녀에게서 받았던 열쇠와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적힌 숫자를 보면서 번호키를 눌렀다. 열쇠를 꽂아 넣고 손잡이를 돌렸으나 금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번호키를 다시 누르고 금고문을 잡아 당겼다. 꽤 넓은 금고 안에는 몇 가지 서류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서류들을 들척이던 진우는 낡은 손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손가방 안에 노트와 함께 들어있는 각봉투를 펼쳐 봤다. 도희의 아버지 진 이사의 필적이 적힌 각서였다. 노트 안에는 날자 순으로 인명과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들이 비자금을 거래했던 일자, 정치인들과 관료의 명단, 그리고 금액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가방을 챙겨 넣은 진우는 금고와 액자를 원상태로 되돌려놓고 빠른 동작으로 서재를 나왔다. 그는 침입했던 경로를 거슬러 주방을 거쳐 창문 밖으로 나왔다. 이층 창문 살을 붙잡고 옥상으로 올라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편에 있는 도베르만이 있는 개집을 유의 깊게 살핀 그는 뻗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이동하여 저택 뒤편 골목 안에 내려섰다.
지난밤을 꼬박 잠을 설친 도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이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침실을 나와 남편의 병상이 있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남편 권 회장의 패드를 갈아 채웠다. 하루에 한 번씩 들리는 간병인이 교육을 받느라고 부득이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했었다.
이따금 정원 밖을 주시하는 그녀는 진우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에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수거한 패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민경은 바쁜 스케줄로 일찍 집을 나가고 관리인 황 씨가 정원수를 옮겨 심고 있었다. 패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이층에서 내려오는 진우와 마주쳤다.
걸음을 멈춘 그들은 각각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지나쳤다. 가정부가 주방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있는 침실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가정부가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사모님~!”
“네.”
“저 외출 좀 해도 될 가요!?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저녁식사 전에 들어올게요.”
도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현관을 나온 진우는 망설이다가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관리인 황 씨에게 다가갔다. 그의 이름은 황 석기.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나이가 들었지만 한때 대도 폭력조직의 일원으로서 권 회장의 심복이었다. 황 씨는 묘목을 옮겨 심으려고 땅을 파고 있었다. 진우가 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묘목을 가리켰다.
“이 나무, 이름이.......?”
“블루베리! 변비에 좋고 대장암 예방이 된다는 나무인데........”
“옮겨 심어도 죽지 않아요?”
“이건 요즘 옮겨 심어야 되는 거요.”
“아~! 그렇군요.”
“젊은 시절에 내가 이래봬도 정원 관리사로 일했는데.......”
황 씨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우를 흘낏 쳐다봤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말을 무심히 듣고 있는 진우의 시선이 도희의 침실 방문을 향하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외출복 차림의 가정부가 걸어 나왔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세요?”
“음......!? 만족하다기보다는......! 미래를 모르니까.........”
“회장님이 쓰러지기 전에 능력 있는 분이라면서 다만, 속마음과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 그러셨으면 다행이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지요.”
문득 진우는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원한을 품고 신화 그룹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회장님 집안의 여자분들 은 나이가 젊으시군요.”
“왜요!? 그게 이상해요?”
“아뇨! 이상하다기 보다는. 사모님들이 모두 나이 차이가 많기에.......”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권 이사님 사모님 이름이 권 지아지요?”
“네.”
“회장님 성씨를 따랐다면서요?”
진우는 권 지아가 권 회장이 입양해서 키운 딸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도희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다시 물었다.
“지아 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사님과 결혼했을 가요?”
“........”
“권 회장님이 허락한 결혼인가요? 그리고 지아씨도......”
“그건,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거 같아요.”
도희가 의미 있는 눈빛으로 진우를 살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인지 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토록 많은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있던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그를 향해 눈빛을 반짝였다.
“당돌하지만.......! 미스터 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나한테요?”
“내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그럼, 저를 믿는다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는 입장이고, 그냥 미스터 서를 믿고 싶어요.”
“음........!? 제가 도움 된다면 말하세요.”
진우는 사실 난처했다. 그의 꿈이라면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악몽의 실타래 끝에 연결된 신화와 그들 가족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당분간 권 회장에게 신임이 필요한데, 권 회장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그녀의 요구가 그의 목적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그가 필요로 하는 정보일 수도 있었다. 또한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만큼 그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성북동에 좀 다녀와 주실 수 있어요? 필요한 게 있어요.”
“성북동을.......!?”
도희의 말에 진우는 긴장했다. 성북동은 그도 잘 알고 있는 권 종호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며 정당하게 취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는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요구를 받아 드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난처한 그의 표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꼭 그것만은 권 씨 집안에 넘겨주고 싶지 않고, 진우 씨라면 가능하다고 믿어요.”
"저는 권 회장님과 권 이사님의 부하 직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일을 부탁하십니까? 저를 어떻게 믿고......?"
"오랫동안 어떤 사람에게 인가, 부탁하고 싶었어요. 제가 어쩌면 도박인지 몰라도, 그냥 느낌으로 진우씨를 믿고 싶어요.
“뭔지 몰라도, 권 이사에게 정당하게 요구 할 수 없는 건지........?”
“제 아버지가 요양원 들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작성해 준 것이 있어요. 부평에 있는 만여 평되는 땅인데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뺏기고 마지막 까지 갖고 있던 재산예요.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 아버지가 그 땅의 소유를 넘긴다고 작성해준 각서예요. 저하고 아버지가 공동소유로 되어있어서 다행이지만, 수시로 저를 협박하고 있어요. 그 각서를 가져다 주셨으면 해요.”
“그게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도희가 눈빛을 반짝이더니 손가방을 뒤져서 각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봉투 안에 들어있는 메모지와 열쇠고리를 꺼내서 진우에게 보여주었다. 메모지에는 여러 개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이건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저에게 주신 거예요. 권 이사 서재에 커다란 액자가 있다고 해요. 액자 뒤에 있는 권 이사의 개인금고를 열수 있는 열쇠와 비밀번호라고 했어요. 아마도 아버지는 이런 사태가 벌어 질 것을 예상했는지 저에게 남기려던 재산이었어요.”
“............!?”
진우를 빤히 바라보는 도희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녀는 메모지와 열쇠를 다시 넣은 봉투를 들고 그가 받아 주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를 내려다보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다가 권 이사의 신임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악몽의 시달림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그의 마음이었다. 망설이는 그를 보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마, 권이사가 갖고 있는 아버지의 손가방 안에는 그들의 비자금 관련 서류들이 같이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비자금........!?”
진우가 혼잣말처럼 되받아 흘리는 말에 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될 수 있는 유혹이었다. 그녀는 그가 꼭 요구를 들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가 필요할 것 같은 비자금 서류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진우는 복도 모서리까지 서성거리며 그녀의 요구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도희가 천천히 일어나서 그의 등 뒤에 다가섰다. 뒤로 돌아선 그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그의 마음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눈빛!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
“..........!?”
진우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봉투 대신에 도희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만약 실패하면 권 이사에게 들킬 것이고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 요구에 대한 승낙의 표현이며 비밀을 지키는 약속이었다. 순간 그는 그녀의 표정이 벅찬 기쁨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분노의 열정을 느꼈다. 그 열정 안에는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
진우는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는 도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믿고 있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도희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소망을 달성했다는 희열로 가득했다. 그의 바로 코앞에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진우가 천천히 도희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녀가 반짝이던 눈동자를 사르르 감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생각보다 따뜻하다고 느꼈다. 아니 열정을 느끼게 하는 여인의 향기였다. 여인의 체취로 충동에 휘말린 그는 그녀를 가슴 속 깊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입술을 헤집고 들어가는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도희의 요구를 받아들인 진우는 며칠간을 권 이사의 동태를 살폈다. 권 이사의 저택에는 그의 아내 지아와 경비원, 그리고 가정부가 있었다. 그는 양부에게 무술을 익혔지만 과연 도희의 요구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도희는 수시로 그의 눈치를 살폈고 민경은 더욱 그에게 집착하여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진우는 도희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어 자신에게 집착하는 민경을 더욱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민경은 그를 따라다니며 유혹하는 눈빛으로 스킨십을 시도했다. 민경은 다른 남자와 달리 떠올리는 그에 대한 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그의 여자로 존재하고 싶어 집착하지만, 그는 단순히 성욕의 대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권 이사의 지시로 안양에 다녀온 진우는 차고 옆의 공터에서 역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테라스를 향한 베란다에서 그를 바라보던 민경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비틀며 빤히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그의 등에 들어나는 근육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진우씨~! 요즘 안보이던데, 어디 돌아다니는 거야?”
“...........!”
“종호 오빠가 회사로 출근하래........,!?”
“............!”
“또 입 닫고 말 안하네. 내가 귀찮은 거야! 나 갖고 싶지 않아?”
“.............!”
민경의 말에 무관심한 표정을 지은 진우는 베란다 창문을 힐끔 쳐다보면서 역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 벨이 울린 것이다. 도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베란다 창문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틈에 민경이 그에게 매달려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권 이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확인했다.
“네. 이사님.”
“지금 뭐하나?”
“집에 있습니다.”
“아! 그럼, 나, 공항에 가야하니 지금 내 집으로 와! 내 차는 김 기사가 수리 받고 있어.”
“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진우는 벗어 놓은 셔츠와 점퍼를 걸쳤다. 민경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그는 승용차가 있는 차고로 걸어갔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민경이 눈을 흘기며 종알거렸다.
“어디가!? 너도 마찬가지로, 남자는 모두 도독 놈이야.........”
“..........!”
승용차 운전석에 오르는 진우는 민경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권 이사가 집을 비운다는 사실에 긴장을 했다. 권 이사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도희의 약속을 실행할 생각만 떠올렸다. 승용차에 시동을 걸은 그는 다시 베란다 창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승용차 엔진소리를 들었는지 그를 주시하는 도희의 눈빛이 드러나 보였다.
진우가 성북동 권 이사 저택에 도착하니 도베르만이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그는 철문 사이로 집안을 살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권 이사의 아내 지아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항상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모습이 아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문이 열리고 권 이사가 경비원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진우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승용차 뒷문을 열고 서있었다. 그가 뒷좌석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승용차를 몰고 대로로 나올 때까지 권 이사는 어디론가 목청을 높여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그가 진우에게 물었다.
“요즘 형님은 어떠신가?”
“항상 같은 상태이십니다.”
“형수는......!?”
“집안에만 계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안양 일은 잘 처리 헸나?”
“네! 전달했습니다.”
진우는 권 이사의 지시로 신화 계열인 대도 개발의 영업부장 최 달구와 같이 안양에 다녀온 것이었다. 대도 개발은 폭력 조직원으로 구성된 우수사업체였다. 그리고 최 부장은 권 이사가 후원하는 폭력단체의 행동대장으로 괴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포악하고 잔인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권유로 신화에 입사하고 최 달구와 다툰 경험이 있었다.
최 부장이 군기를 잡는다면서 진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며 휘두르는 최 부장의 주먹을 되받아쳤다. 서열을 중시하는 폭력세계를 그가 몰랐던 것이었다. 도리어 그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최 부장이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고 격투가 벌어졌다. 누구도 그들을 말리려하지 않았다. 결국은 현장에 나타난 권 이사의 만류로 그들의 싸움이 중단되었었다.
“나, 싱가포르 갔다가 모레 아침에 도착할 예정이다. 내 차가 그때까지 수리 안 되면 공항으로 나와!”
“네!”
귄 이사의 지시에 짤막하게 대답하는 진우는 이틀 안에 도희가 요구하는 물건을 가져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권 이사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그가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보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성북동으로 갔다. 귄 이사의 저택이 바라보이는 골목 어귀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동정을 살폈다.
진우는 이미 권 이사의 저택 구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 들어가느냐가 문제였다. 경비원과 가정부, 그리고 권 회장처럼 권 이사의 집에도 사나운 도베르만이 두 마리씩이나 있었다. 저택 뒤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한동안 올려다보던 그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진우는 가정부가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서성이던 진우는 긴장을 풀기위해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방을 나왔다. 층계를 내려가던 그는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다.
층계입구의 어둠속에 하얀 가운을 걸친 도희의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그녀가 유령처럼 서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한 계단씩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권 이사가 출장을 갔다는데, 걱정이 돼서........”
“어떻게 알았어요?”
“비서실에 있는 친구와 자주 연락해요.”
“아! 그렇군요.”
“오늘,......! 해 주실 건가요?”
“네.......!”
긴장하는 도희의 눈빛이 역력했다. 그는 슬그머니 그녀를 껴안았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의 스킨십을 받아드렸던 그녀이지만 주위를 살피며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발자국 물러서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등을 토닥거렸다. 포근한 열기의 체취가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그가 가슴에 갇힌 그녀의 입술위에 입술을 포갰다. 벽에 등을 지고 있는 그녀는 꼼짝도 않고 그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도희가 슬며시 진우를 밀어냈다. 멀리서부터 들리던 승용차 엔진소리가 집 앞에서 머무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민경의 승용차이기에 그들은 떨어져 섰다. 머뭇거리던 도희가 가운 앞자락을 여미더니 몸을 돌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우는 민경을 마주하기 싫어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던 진우는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창문 커트 사이로 어둠이 짙어 있고 침대 탁자에 놓인 시계 바늘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점퍼와 바지, 그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그는 미리 생각했던 도구들을 넣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방을 나왔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층계를 내려온 그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현관 옆에 있는 개집에서 도베르만이 나와 그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도베르만의 목덜미를 쓰다듬은 그는 정원을 거쳐 철문으로 다가섰다. 조심스럽게 열어도 쇠가 잇닿는 소리가 났다. 숨을 죽이고 나온 그는 대로를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인척이 드문 시간인데도 승용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성북동에 도착한 진우는 권 이사의 저택 뒤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은 물체가 펄쩍 뛰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긴장했다. 어둠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던 들 고양이가 담장을 타고 사라졌다. 낮에 눈여겨보았던 아름드리나무를 올려다봤다. 별빛이 흐르는 하늘에 굵은 나뭇가지들이 골목까지 뻗쳐있었다. 그는 담장위에 사뿐히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타고 안쪽으로 움직였다.
나무 위에 오른 진우의 눈앞에 이층저택의 옥상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다시 나뭇가지를 타고 옥상위에 사뿐히 내릴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택 뒤의 개집에 있던 도베르만이 나와 으르렁거렸다. 서성거리던 도베르만이 다시 개집으로 들어가고 적막이 깃들었다. 그는 옥상 난간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진우의 바로 눈앞에 창살에 가려진 서재 창문이 있었다. 그는 창살을 떼어내기 전에 창문을 확인했다. 아뿔싸~! 그는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창문은 굳게 잠겨있고 창문 안에 또 다른 이중 창살이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있기에 곰곰이 생각하는 그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서재 창문 밑의 일층에는 주방이었다. 주방 창문 위에는 빗물막이 좁은 턱이 들어나 있었다.
서재 창문 창살을 잡고 매달린 그는 간신히 좁은 턱에 발끝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보일러 배관을 한손으로 잡고 창문을 열어봤다. 또한 잠겨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플래시를 꺼내서 창문 틈을 비춰봤다. 창문과 창문 사이를 연결한 잠근 장치가 보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분무기를 꺼내 창문 틈을 겨냥하고 버튼을 눌렀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오일이 창문 틈으로 뿜어져 나갔다. 소음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잠금장치가 오일에 젖은 것을 확인한 그는 가느다란 톱을 꺼내 들었다. 강력한 특제 톱날이어서 잠근 장치가 소리 없이 잘려져 나갔다. 주위를 살피며 깊은숨을 내쉰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밀어봤다. 천천히 열린 창문 안으로 어둠속의 주방이 들어났다.
진우는 흐릿한 비상등이 켜잔 주방 안을 살폈다. 창문 안으로 들어간 그는 사뿐히 싱크대 위에 올라섰다. 싱크대 위에서 내려서던 그는 당황했다. 주방 입구로 하얀 잠옷가운을 걸친 여인이 들어선 것이었다. 그를 보고 기겁하는 여인의 표정! 순간 그는 여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여인과 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종호의 아내 지아였다. 소스라쳐 놀란 그녀는 눈동자를 크게 치떴다. 그녀는 어둠속에 검은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가 다름 아니라 최 회장의 비서로 있는 서 진우라는 것을 알고 의아스러웠다. 그가 어찌해서 깊은 밤중에 괴한처럼 집안으로 침입한 것인지. 그녀는 이따금 집에 호출된 그가 남편의 지시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침몰하던 여객선에서 처음 만나던 그를 떠올렸다,
그 당시 지아는 남편과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지옥 같았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 그녀는 고아원에서 권 회장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던 권 종호의 아내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불가항력이었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지아는 난폭해지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들었고, 차라리 권 회장의 딸로 생활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남편이 아니고 악마였다. 여객선에서 남편의 시달림에 지친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진우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깊은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왠지 멈추어 있던 심장이 살아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날도 지아는 거칠게 옷을 벗기려는 남편을 피해 달아났고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런데 여객선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진우가 바다로 뛰어 내리려는 그녀를 붙잡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동질감 같은 분위기를 느꼈었다. 만류하는 진우의 눈빛에 죽음을 포기했던 순간과 여객선 침몰의 공포에서 구출된 순간을 겪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삶에 대한 의욕이 솟구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당시 그에 대한 감정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 자신이 여자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했던 남자였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기억 속에 살아있던 남자 같았다. 뜨거운 열정이 뿜어 나오는 그의 가슴과 입술! 그윽한 눈빛 속에 담겨진 카리스마! 균형 잡힌 체격!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출해준 젊은 남자의 혈기!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진우는 지아의 놀랐던 눈동자가 풀리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조용한 적막 속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실로 나오는 발자국 소리! 그는 얼핏 냉장고 뒤로 몸을 숨겼다. 꼼짝하지 않고 있던 그녀가 몸을 돌려 주방 앞으로 다가섰다. 거실로 나온 사람은 나이가 삼십대로 보이는 가정부 조 숙희였다.
“사모님! 안 주무셨어요!?”
“........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아무것도 아녜요. 내가 물 마시느라고...........”
주방으로 다가서는 가정부 숙희의 앞을 지아가 막아섰다. 숙희가 지아의 어깨너머로 주방 안을 살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지아가 몸을 돌렸다. 그녀들의 동태를 엿보고 있던 진우가 냉장고 뒤편 어둠에서 나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어둠속에 반짝였다.
지아는 진우가 몰래 숨어든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이고 그가 사람을 헤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알았던 남자와 다르다고 느꼈었다. 은연중에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그의 분위기에 이끌렸던 그녀는 그가 음모와 비리로 가득한 신화에 있을 사람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권 씨 집안에서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없었기에 그를 방관하고 싶었다.
“...........!?”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지아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의 침입을 알릴 그녀가 오히려 동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감정을 교환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발돋움하여 이층오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둠 속의 서재 안은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손전등을 켜든 진우는 주위를 살펴봤다. 생각보다 넓은 서재 한쪽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었다. 한쪽면의 책꽂이 옆에 큰 책상과 소파가 있고, 책상 뒤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에는 그리스 신화 벽화처럼 채색되어 보이는 그림이 있었다. 진우는 책상 뒤로 다가가서 벽에 걸린 액자를 드러냈다.
도희의 말대로 철제 금고가 존재했다. 진우는 그녀에게서 받았던 열쇠와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적힌 숫자를 보면서 번호키를 눌렀다. 열쇠를 꽂아 넣고 손잡이를 돌렸으나 금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번호키를 다시 누르고 금고문을 잡아 당겼다. 꽤 넓은 금고 안에는 몇 가지 서류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서류들을 들척이던 진우는 낡은 손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손가방 안에 노트와 함께 들어있는 각봉투를 펼쳐 봤다. 도희의 아버지 진 이사의 필적이 적힌 각서였다. 노트 안에는 날자 순으로 인명과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들이 비자금을 거래했던 일자, 정치인들과 관료의 명단, 그리고 금액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가방을 챙겨 넣은 진우는 금고와 액자를 원상태로 되돌려놓고 빠른 동작으로 서재를 나왔다. 그는 침입했던 경로를 거슬러 주방을 거쳐 창문 밖으로 나왔다. 이층 창문 살을 붙잡고 옥상으로 올라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편에 있는 도베르만이 있는 개집을 유의 깊게 살핀 그는 뻗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이동하여 저택 뒤편 골목 안에 내려섰다.
지난밤을 꼬박 잠을 설친 도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이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침실을 나와 남편의 병상이 있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남편 권 회장의 패드를 갈아 채웠다. 하루에 한 번씩 들리는 간병인이 교육을 받느라고 부득이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했었다.
이따금 정원 밖을 주시하는 그녀는 진우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에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수거한 패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민경은 바쁜 스케줄로 일찍 집을 나가고 관리인 황 씨가 정원수를 옮겨 심고 있었다. 패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이층에서 내려오는 진우와 마주쳤다.
걸음을 멈춘 그들은 각각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지나쳤다. 가정부가 주방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있는 침실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가정부가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사모님~!”
“네.”
“저 외출 좀 해도 될 가요!?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저녁식사 전에 들어올게요.”
도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현관을 나온 진우는 망설이다가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관리인 황 씨에게 다가갔다. 그의 이름은 황 석기.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나이가 들었지만 한때 대도 폭력조직의 일원으로서 권 회장의 심복이었다. 황 씨는 묘목을 옮겨 심으려고 땅을 파고 있었다. 진우가 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묘목을 가리켰다.
“이 나무, 이름이.......?”
“블루베리! 변비에 좋고 대장암 예방이 된다는 나무인데........”
“옮겨 심어도 죽지 않아요?”
“이건 요즘 옮겨 심어야 되는 거요.”
“아~! 그렇군요.”
“젊은 시절에 내가 이래봬도 정원 관리사로 일했는데.......”
황 씨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우를 흘낏 쳐다봤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말을 무심히 듣고 있는 진우의 시선이 도희의 침실 방문을 향하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외출복 차림의 가정부가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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