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덤불 속
흐린 날이었다. 햇살은 간혹 희미하게 비추었고 차가운 바람이 길가
의 나무를 세차게 흔들곤 했다. 숲속으로 들어가기엔 차가운 날씨였다.
"내 방에 가자." 마사오가 다에꼬에게 말했다. 다에꼬는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런데 후미에는 동반 자살의 이유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 마사오의
집으로 가는 길에 다에꼬가 물었다.
"그것보다 네가 들은 얘기를 듣고 싶어."
"가마다는 올해에 고등학교 시험ㅇ르 칠 예정이었잖아."
4학년 때 전문학교를 들어갈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는 입학 할 수 있
었다. 수재였던 가마다가 충분히 할 만했다.
"그럴 거야."
"그런데 공부가 잘 안 됐는지 성적이 자꾸 떨어지더니 작년 실력고사
에서도 등수가 내려갔대. 그래서 괴로와했던가 봐. 그렇지 않겠어?"
4,5학년은 전원이, 3학년은 희망자에 한해서만 실력고사를 치고 있
었는데 문제는 똑같았고 그 때문에 3학년 응시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20등까지의 석차가 발표되었을 때 그 속에 가마다의 이름이 빠져 있었
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글쎄, 모르지."
"그래서 신경이 상당히 쇠약해진 모양이야. 그러면서 자살을 생각했
고. 마쯩가 친한 친구에게 가끔 그 비슷한 소릴 했었대."
"음 - ."
"마쯔요는 그런 가마다를 동정했던 거고 가마다도 혼자 죽을 용기는
없고 해서 마쯔요를 동행한 거야. 우리 학교에선 선생님들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아."
"원인은 시험 공부의 부담감과 또 그에 대한 여자의 동정이었던 말야?"
"그렇지 않을까? 가마다를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였을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어?"
"못 들었어. 후미에가 그런 말을 해?"
"아니, 그런 건 아냐." 마사오는 후미에가 한 말을 다에꼬에게 전해
주었다.
"어머 -!" 전혀 뜻밖의 말에 멈춰 선 채 마사오를 올려다보는 다에꼬
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런 소문은 금시초문이야."
"아니, 이건 후미에의 추측일지도 몰라. 네가 말한 대로겠지."
마사오의 집에 이르자, 다에꼬는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상냥하게 인
사를 하더니 무슨 말인가를 한참 주고 받았다. 두 여자의 이야기가 도
대체 끝날 기미가 없어서 기다리다 지친 마사오는 혼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들어올 낌새는 좀처럼 보이
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다에꼬는 그때까지도 마사오의 어머니와
마주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새삼스레 다에꼬
를 방으로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그냥 눌러앉아 았기만 한
다면 다에꼬와 단 둘이 있을 기회는 영 없어지고 말 것이다.
"얘기 끝나면 들어와."
겨우 그렇게 말하고 마사오는 책상 앞에 앉았다. 틀림없이 다에꼬도
빨리 들어오고 싶을 것이었다. 단지 어머니가 붙잡는 통에 어쩔 수 없
이 말 상대를 해주는 것뿐. 그걸 알고 있었으므로 화가 나지는 않았
다. 그저 혼자 앉아서 동반 자살한 연인들의 사연을 추측해 보았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둘 다 사실일까?" 그들의 죽음을 미화
시켜려는 경향은 마사오의 학급에서도 있었고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이유가 어쨌든지 죽음을 택한다는 것을 마사오
는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취직하는 사람이 진학하는 사람보다 많
았다. 진학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도 선택받은 축복이었다. 더구
나 4학년 때 실패한다 해도 5학년 졸업 때에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
었다. 말하자면 그 시험 때문에 4학년 학생이 자살까지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후미에가 들려 준 이유도 마찬가지였
다. 고작 여학생 하나 때문에 젊디젊은 남학생이 죽는다는 건 잇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결국 연약한 도련님이었던 것만큼은 틀림없군."
20여 분이 지나서야 방문 밖에서 다에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에 있어?"
"응. 들어와."
그제야 단 둘이 있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둘은 포옹한 채 입맞
춤을 했다. 긴 시간이었다.
"후미에와는 이렇게 하지 않았어?"
"물론.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 아인 다에꼬와 내 사이를 알
잖아."
"그래도 위험해."
"괜찮아."
집 안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마사오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는 없었다. 키스 이상은 큰 모험이었다. 옷
위로 다에꼬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으로 마사오는 만족해야 했다.
"저번에..., 왜 떼어 버렸어?" 다에꼬가 나지막히 물어왔다.
"내가 잔인한 거 같아서."
"그렇지 않아. 다음엔...."
입맞춤만으로도 임신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소녀들도 있다. 그에
비하면 다에꼬의 성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성숙한 편이었다. 관심이
잇으니까 배운 게 당연하다고 다에꼬는 생각하는 듯했다. 마사오는 다
에꼬의 그런 조숙한 모습에서 다시 연상을 느꼈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
편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해."
"아무도 없을 때 또 부르러 올께."
마사오가 아무 말하지 않았는데로 다에꼬의 손이 마사오의 다리께
로 내려와 바지 위에서 마사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성숙한 여자의 손놀림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애무가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 -." 힘주어 쥔 채 다에꼬가
말했다.
"빨리 하나가 되고 싶어."
뺨은 뜨거웠고 호흡은 거칠었다. 자연히 마사오에게도 열기가 전해
졌다. 마사오의 손이 다에꼬에게로 뻗어갔다. "위험해. 엄마가 집에
계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사오의 손은 더욱 빨라졌고 다에꼬의
열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에꼬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가마다
라는 학생도 동반 자살한 자기 여자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다
에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두 사람도 이렇게 했을까?"
"아니, 그들은 깨끗했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다에꼬 자신은 지금 이렇게 하고 있고 또 언제
라도 마사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사오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에꼬의 손이 바지 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마사오."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두 사람은 경직되었다. 곧
바로 문이 열릴 것이다. 이제까지 어머니는 마사오의 대답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서로 손을 떼고 얼른 물러섰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
사오는 다에꼬가 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걸 보고 얼른 바지를 추키며
대답했다.
"왜요?"
달뜨고 당황한 목소리임을 자신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방문이
열렸다. 다에꼬는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었고 마사오는 어머니를 바
라보았다. 둘은 우뚝 선 채였다. 어정쩡한 몸짓에 얼굴까지 빨개졌을
것이다. 들어오지 않은 채 문 밖에 선 어머니의 눈빛에도 당혹스러움
이 역력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아, 알았어요."
문이 황급히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고 생각
하셨을 거야. 그래서 급히 문을 닫았어." 마사오는 다에꼬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에꼬가 마사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바지는 잘 입었어?"
"음, 염려하지 마. 엄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셨어." 다에꼬에
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아냐. 우리 엄만 좀 둔감하셔. 대답을 안 했으면 문을 열지 않았을
지도 몰라."
마사오는 옷을 잘 추스리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 이제 어머니가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다에꼬는 반듯이 앉
아 있었다.
"아주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난 갈래."
"아직 괜찮아. 30분은 걸리실 거야."
마사오는 다에꼬를 껴안으며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진정이
안 되었는지 다에꼬는 좀체로 마사오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조금
후 기분이 풀려서야 마사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마사오는 어
머니가 끼어들기 바로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애를 썼다.
"아주머니가 보시지 않았을까?"
"못 보셨을 거야. 손을 앞으로 하고 잇었거든."
그래도 다에꼬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는지 마사오의 손길에도 굳
어져 있었다.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돌아오시면 현관문 소리가 날 거고,
곧장 이리로 들어오시지도 않는다구."
"그렇지만 얼굴 대할 게 두려워. 아주머니를 배반할 것만 같아."
마사오가 다에꼬의 어머니에게 꺼림칙해 하듯 다에꼬도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여자는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
각하는 마사오에게 그건 좀 의외였다. 마사오는 다에꼬의 기분에 따르
기로 했다. 둘은 매무새를 고치고 거실로 나왔다. 화제는 동반 자살한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 여자, 예쁘게 생겼었어?"
"응, 귀여운 얼굴이었어. 그렇지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어. 어린애 같았거든."
"성적은?"
"보통이었나 봐."
"다른 애들은 그 일에 대해 뭐라고들 해?"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뭐. 이해할 수 있다나."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다에꼬는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마사오는 길모퉁이까지 다에꼬
를 바래다 주고 돌아왔다. 다에꼬도 없으니까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
잔 않을까 두려웠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좀 이상하다고 생
각하는 정도고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애." 불안은 좀 남았지만 애써
그렇게 해석하며 마사오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이튼날 점심 시간이었다. 마사오는 학급일로 교무실에 들어간 길에
선생님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 슬쩍 물어 보았다.
"가마다는 실력이 떨어진 걸 비관한 건가요?"
"음, 그런 이유도 있지. 그러나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애. 가
마다의 아버지는 고입 시험을 반대하셨어. 경제 전문학교에 들어가길
바라셨거든. 그래서 항상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야. 가마다는 고교에
입학해서 대학엘 들어갈 생각이었어. 가마다의 아버지는 지금 그게 후
회가 돼서 매우 슬퍼하고 계셔. 문제가 있으면 누군가와 차분히 의논
하면 좋았을 것을, 너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 버렸어."
"그러면 왜 상관도 없는 여학생을 동반했읍니까?"
"여학생도 가정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의견이 일치하게 된게
아닐까?"
"여학생이 가마다를 동정했던 게 아닌가요?"
"동정만이 아니지. 둘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아무래도 여자의 오빠
가 불량배가 아니었을까 싶어."
"오빠가 불량배인 게 그 여학생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 점이 소녀들의 미묘한 심리야. 그 문제로 모두들 떠들썩한가?"
"말들이 많아요."
"흉내내는 녀석이 나오면 큰일인데."
방과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같은 반 녀석 하나가 마사오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보통 동반 자살이 아닌 거 같애. 한 쪽이 강요한 거 같애."
"한 쪽 누구?"
"물론 남자가 강제로 끌어들인 거야. 가마다라는 놈, 폐결핵이었던
건 아닐까? 고입 시험 준비에 너무 무리를 해서, 정말 휴학까지 할
정도로 중환자였다는 거야. 각혈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
"아냐, 동반 자살을 제의한 건 아무래도 여자 쪽이라는 말이 우세해.
여자가 누군가에게 강제로 순결을 빼앗겼을 수도 있잖아?"
새로운 화제거리였다. 모두들 어디선가 나름대로 정보를 주워가지
고 왔다. 그렇지만 그 정보들은 모두 근거가 없었다. 누군가의 무책임
한 추측이 발단이 되어서 여기저기로 퍼진 게 틀림없었다. 마사오는
죽은 사람의 명예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후미에에게 들은 이
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 사건이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
될 수도 있을까?" 놀랐다. 아꾸다가와 류노스께의 [덤불 속]이라는
착품이 머리에 떠올랐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동반 자살은 모든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
지만 모두의 관심에서 점차 흐려져 갔다. 그러다 시험이 닥치자 더 이
상은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잊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시들해져
버린 문제였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겐 자기의 학교의 학생과 이웃 여
학교의 학생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자극적이었겠지만, 사실 그 두 사
람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렇게 깊은 충격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사오 자신의 관심 역시 일시적인 흥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스스
로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자살은 무의미해. 동반 자살은 더욱 그렇
고, 수상하기까지 해. 다에꼬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반 자살 따
위는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마사오는 동반 자살한 두 사람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부
정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흐린 날이었다. 햇살은 간혹 희미하게 비추었고 차가운 바람이 길가
의 나무를 세차게 흔들곤 했다. 숲속으로 들어가기엔 차가운 날씨였다.
"내 방에 가자." 마사오가 다에꼬에게 말했다. 다에꼬는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런데 후미에는 동반 자살의 이유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 마사오의
집으로 가는 길에 다에꼬가 물었다.
"그것보다 네가 들은 얘기를 듣고 싶어."
"가마다는 올해에 고등학교 시험ㅇ르 칠 예정이었잖아."
4학년 때 전문학교를 들어갈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는 입학 할 수 있
었다. 수재였던 가마다가 충분히 할 만했다.
"그럴 거야."
"그런데 공부가 잘 안 됐는지 성적이 자꾸 떨어지더니 작년 실력고사
에서도 등수가 내려갔대. 그래서 괴로와했던가 봐. 그렇지 않겠어?"
4,5학년은 전원이, 3학년은 희망자에 한해서만 실력고사를 치고 있
었는데 문제는 똑같았고 그 때문에 3학년 응시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20등까지의 석차가 발표되었을 때 그 속에 가마다의 이름이 빠져 있었
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글쎄, 모르지."
"그래서 신경이 상당히 쇠약해진 모양이야. 그러면서 자살을 생각했
고. 마쯩가 친한 친구에게 가끔 그 비슷한 소릴 했었대."
"음 - ."
"마쯔요는 그런 가마다를 동정했던 거고 가마다도 혼자 죽을 용기는
없고 해서 마쯔요를 동행한 거야. 우리 학교에선 선생님들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아."
"원인은 시험 공부의 부담감과 또 그에 대한 여자의 동정이었던 말야?"
"그렇지 않을까? 가마다를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였을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어?"
"못 들었어. 후미에가 그런 말을 해?"
"아니, 그런 건 아냐." 마사오는 후미에가 한 말을 다에꼬에게 전해
주었다.
"어머 -!" 전혀 뜻밖의 말에 멈춰 선 채 마사오를 올려다보는 다에꼬
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런 소문은 금시초문이야."
"아니, 이건 후미에의 추측일지도 몰라. 네가 말한 대로겠지."
마사오의 집에 이르자, 다에꼬는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상냥하게 인
사를 하더니 무슨 말인가를 한참 주고 받았다. 두 여자의 이야기가 도
대체 끝날 기미가 없어서 기다리다 지친 마사오는 혼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들어올 낌새는 좀처럼 보이
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다에꼬는 그때까지도 마사오의 어머니와
마주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새삼스레 다에꼬
를 방으로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그냥 눌러앉아 았기만 한
다면 다에꼬와 단 둘이 있을 기회는 영 없어지고 말 것이다.
"얘기 끝나면 들어와."
겨우 그렇게 말하고 마사오는 책상 앞에 앉았다. 틀림없이 다에꼬도
빨리 들어오고 싶을 것이었다. 단지 어머니가 붙잡는 통에 어쩔 수 없
이 말 상대를 해주는 것뿐. 그걸 알고 있었으므로 화가 나지는 않았
다. 그저 혼자 앉아서 동반 자살한 연인들의 사연을 추측해 보았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둘 다 사실일까?" 그들의 죽음을 미화
시켜려는 경향은 마사오의 학급에서도 있었고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이유가 어쨌든지 죽음을 택한다는 것을 마사오
는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취직하는 사람이 진학하는 사람보다 많
았다. 진학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도 선택받은 축복이었다. 더구
나 4학년 때 실패한다 해도 5학년 졸업 때에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
었다. 말하자면 그 시험 때문에 4학년 학생이 자살까지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후미에가 들려 준 이유도 마찬가지였
다. 고작 여학생 하나 때문에 젊디젊은 남학생이 죽는다는 건 잇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결국 연약한 도련님이었던 것만큼은 틀림없군."
20여 분이 지나서야 방문 밖에서 다에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에 있어?"
"응. 들어와."
그제야 단 둘이 있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둘은 포옹한 채 입맞
춤을 했다. 긴 시간이었다.
"후미에와는 이렇게 하지 않았어?"
"물론.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 아인 다에꼬와 내 사이를 알
잖아."
"그래도 위험해."
"괜찮아."
집 안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마사오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는 없었다. 키스 이상은 큰 모험이었다. 옷
위로 다에꼬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으로 마사오는 만족해야 했다.
"저번에..., 왜 떼어 버렸어?" 다에꼬가 나지막히 물어왔다.
"내가 잔인한 거 같아서."
"그렇지 않아. 다음엔...."
입맞춤만으로도 임신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소녀들도 있다. 그에
비하면 다에꼬의 성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성숙한 편이었다. 관심이
잇으니까 배운 게 당연하다고 다에꼬는 생각하는 듯했다. 마사오는 다
에꼬의 그런 조숙한 모습에서 다시 연상을 느꼈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
편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해."
"아무도 없을 때 또 부르러 올께."
마사오가 아무 말하지 않았는데로 다에꼬의 손이 마사오의 다리께
로 내려와 바지 위에서 마사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성숙한 여자의 손놀림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애무가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 -." 힘주어 쥔 채 다에꼬가
말했다.
"빨리 하나가 되고 싶어."
뺨은 뜨거웠고 호흡은 거칠었다. 자연히 마사오에게도 열기가 전해
졌다. 마사오의 손이 다에꼬에게로 뻗어갔다. "위험해. 엄마가 집에
계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사오의 손은 더욱 빨라졌고 다에꼬의
열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에꼬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가마다
라는 학생도 동반 자살한 자기 여자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다
에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두 사람도 이렇게 했을까?"
"아니, 그들은 깨끗했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다에꼬 자신은 지금 이렇게 하고 있고 또 언제
라도 마사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사오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에꼬의 손이 바지 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마사오."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두 사람은 경직되었다. 곧
바로 문이 열릴 것이다. 이제까지 어머니는 마사오의 대답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서로 손을 떼고 얼른 물러섰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
사오는 다에꼬가 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걸 보고 얼른 바지를 추키며
대답했다.
"왜요?"
달뜨고 당황한 목소리임을 자신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방문이
열렸다. 다에꼬는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었고 마사오는 어머니를 바
라보았다. 둘은 우뚝 선 채였다. 어정쩡한 몸짓에 얼굴까지 빨개졌을
것이다. 들어오지 않은 채 문 밖에 선 어머니의 눈빛에도 당혹스러움
이 역력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아, 알았어요."
문이 황급히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고 생각
하셨을 거야. 그래서 급히 문을 닫았어." 마사오는 다에꼬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에꼬가 마사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바지는 잘 입었어?"
"음, 염려하지 마. 엄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셨어." 다에꼬에
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아냐. 우리 엄만 좀 둔감하셔. 대답을 안 했으면 문을 열지 않았을
지도 몰라."
마사오는 옷을 잘 추스리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 이제 어머니가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다에꼬는 반듯이 앉
아 있었다.
"아주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난 갈래."
"아직 괜찮아. 30분은 걸리실 거야."
마사오는 다에꼬를 껴안으며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진정이
안 되었는지 다에꼬는 좀체로 마사오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조금
후 기분이 풀려서야 마사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마사오는 어
머니가 끼어들기 바로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애를 썼다.
"아주머니가 보시지 않았을까?"
"못 보셨을 거야. 손을 앞으로 하고 잇었거든."
그래도 다에꼬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는지 마사오의 손길에도 굳
어져 있었다.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돌아오시면 현관문 소리가 날 거고,
곧장 이리로 들어오시지도 않는다구."
"그렇지만 얼굴 대할 게 두려워. 아주머니를 배반할 것만 같아."
마사오가 다에꼬의 어머니에게 꺼림칙해 하듯 다에꼬도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여자는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
각하는 마사오에게 그건 좀 의외였다. 마사오는 다에꼬의 기분에 따르
기로 했다. 둘은 매무새를 고치고 거실로 나왔다. 화제는 동반 자살한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 여자, 예쁘게 생겼었어?"
"응, 귀여운 얼굴이었어. 그렇지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어. 어린애 같았거든."
"성적은?"
"보통이었나 봐."
"다른 애들은 그 일에 대해 뭐라고들 해?"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뭐. 이해할 수 있다나."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다에꼬는 마사오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마사오는 길모퉁이까지 다에꼬
를 바래다 주고 돌아왔다. 다에꼬도 없으니까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
잔 않을까 두려웠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좀 이상하다고 생
각하는 정도고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애." 불안은 좀 남았지만 애써
그렇게 해석하며 마사오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이튼날 점심 시간이었다. 마사오는 학급일로 교무실에 들어간 길에
선생님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 슬쩍 물어 보았다.
"가마다는 실력이 떨어진 걸 비관한 건가요?"
"음, 그런 이유도 있지. 그러나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애. 가
마다의 아버지는 고입 시험을 반대하셨어. 경제 전문학교에 들어가길
바라셨거든. 그래서 항상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야. 가마다는 고교에
입학해서 대학엘 들어갈 생각이었어. 가마다의 아버지는 지금 그게 후
회가 돼서 매우 슬퍼하고 계셔. 문제가 있으면 누군가와 차분히 의논
하면 좋았을 것을, 너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 버렸어."
"그러면 왜 상관도 없는 여학생을 동반했읍니까?"
"여학생도 가정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의견이 일치하게 된게
아닐까?"
"여학생이 가마다를 동정했던 게 아닌가요?"
"동정만이 아니지. 둘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아무래도 여자의 오빠
가 불량배가 아니었을까 싶어."
"오빠가 불량배인 게 그 여학생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 점이 소녀들의 미묘한 심리야. 그 문제로 모두들 떠들썩한가?"
"말들이 많아요."
"흉내내는 녀석이 나오면 큰일인데."
방과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같은 반 녀석 하나가 마사오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보통 동반 자살이 아닌 거 같애. 한 쪽이 강요한 거 같애."
"한 쪽 누구?"
"물론 남자가 강제로 끌어들인 거야. 가마다라는 놈, 폐결핵이었던
건 아닐까? 고입 시험 준비에 너무 무리를 해서, 정말 휴학까지 할
정도로 중환자였다는 거야. 각혈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
"아냐, 동반 자살을 제의한 건 아무래도 여자 쪽이라는 말이 우세해.
여자가 누군가에게 강제로 순결을 빼앗겼을 수도 있잖아?"
새로운 화제거리였다. 모두들 어디선가 나름대로 정보를 주워가지
고 왔다. 그렇지만 그 정보들은 모두 근거가 없었다. 누군가의 무책임
한 추측이 발단이 되어서 여기저기로 퍼진 게 틀림없었다. 마사오는
죽은 사람의 명예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후미에에게 들은 이
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 사건이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
될 수도 있을까?" 놀랐다. 아꾸다가와 류노스께의 [덤불 속]이라는
착품이 머리에 떠올랐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동반 자살은 모든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
지만 모두의 관심에서 점차 흐려져 갔다. 그러다 시험이 닥치자 더 이
상은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잊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시들해져
버린 문제였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겐 자기의 학교의 학생과 이웃 여
학교의 학생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자극적이었겠지만, 사실 그 두 사
람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렇게 깊은 충격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사오 자신의 관심 역시 일시적인 흥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스스
로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자살은 무의미해. 동반 자살은 더욱 그렇
고, 수상하기까지 해. 다에꼬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반 자살 따
위는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마사오는 동반 자살한 두 사람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부
정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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