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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2:52 778회 0건
가시돋은 꽃, 장미

<프롤로그>

"신부 입장!"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약간 구석진 곳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서 고운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약간은 왁자지껄 했던
좌중의 목소리는 잦아들며 온통 한곳으로 시선이 머문다. 한껏 기대에 부푼 모습이거나 호
기심을 그득 담은 표정들이다. 결혼식의 꽃은 누가 뭐래도 신부이다. 청초함을 그득 담았을
지, 아니면 순백의 드레스와 걸맞게 순수함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 같을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긴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곧 앙증맞은 리본과 나비넥타이를 귀엽게 멘 화동이 걸어
나와서는 귀엽게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곧 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노랑의 나비넥타이를
멘 남자아이가 소매를 들어 올려 눈가를 닦아내자 곧 하얀 드레스를 입은 꼬마숙녀가 자신
보다 한 뼘이나 커다란 남자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를 한다. 아마도 처음으로 많은
사람 앞에 선 남자화동아이가 무척이나 긴장을 한 것일테다. 반면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오빠를 위로하는 꼬마숙녀는 앙다문 입술사이로 결연함마저 옅보이는 듯하다.

"잘한다! 우리 아들!"

근척에서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중학시절 줄곧 친하게 지냈던 친구놈이 주먹을
쥐고 자신의 아들을 응원하고 있다. 그 옆은 둘째인지, 셋째인지 모를 아이를 벤 아내가 함
께 서 있다. 친구의 결혼식이라고 자신의 아이들까지 동원해서 축하를 하러 온 그들을 보니
배알이 꼴리는 듯 했다. 연신 싱글벙글 입이 찢어져라 웃음꽃을 피워 낸 신랑은 화동이 울
거나 말거나 곧 이어져 나올 신부의 모습을 한껏 기대하는 모습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웨딩
마치의 선율은 듣는이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하고 보는이로 하여금 부럽거나 아름다운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그러나 내겐 그다지 기분 좋은 선율은 아니었다. 파혼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다. 일방적인 이별통보 앞에 무기력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벌
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럼에도 다른 사랑의 시작은 커녕 이렇게 남의 결혼식
만을 축하하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미란아... 잘 살고 있니?"

간간이 전해져오는 소식, 일부러 찾아본 그녀의 일상에 난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행복함이 깃든 사진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억울하기
도 하고 내 자신이 처연해지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생각할수록 내 얼굴은 무척이나 처량하
게 변해져 있을 것은 확실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중학교 때 나를 잘 따르던 동창녀석이 무
슨 일 있냐며 걱정스레 묻는다. 애써 웃는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레를 치자 다시
예식이 거행중인 장면을 눈에 담으려 고개를 돌린다.

아까 울던 남자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돌보던 꼬마숙녀가 서서히 발걸음을 떼어내기 시작
한다. 자신들의 얼굴보다 더 커다란 바구니에서 꽃잎들을 머리 뒤로 던지며 한 걸음 한 걸
음 나아가자 모두가 고대하던 신부의 모습이 드러난다. 새하얀 드레스와 힘껏 올려붙인 업
스타일의 머리모양, 그리고 시선에 들어온 신부의 옆모습과 하얗게 파인 등. 척추골을 따라
아찔하게 엉덩이 선으로 떨어지는 곡선에 무난한 줄만 알았던 웨딩드레스는 그 어떤 섹시한
옷보다 더 야한느낌을 준다.

"이야... 진구 저 자식 완전 땡잡았네!"

그때, 앞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친구들 무리로 다가오는 또 한 명의 동창은 동그라진 두 눈
을 어쩌지 못한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러자 그녀석의 아내로 보이는 키 작은 여자의
눈빛에선 질투가 느껴진다. 비단 그 녀석뿐만이 아닌 듯하다. 숨죽이듯 조용했던 예식장이
우왕좌왕 감탄과 탄성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신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증거이자
그 증거를 거둬들이는 증인들의 모습이다. 옆모습과 뒷모습에서 느낀 그녀의 미모는 보통이
아니었다. 드레스 아래로 높은 힐을 숨기고 있겠지만 170cm은 되어 보일만큼 늘씬한 키와
코르셋이 잔뜩 조이고 있을 허리역시 두 손으로 쥐면 손가락이 맞닿을 만큼 가녀려 보인다.
게다가 그 야리야리함과 어울리지 않게 모아진 가슴골은 보는이로 하여금 민망할 정도로 심
하게 깊숙이 계곡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성격을 볼 순 없었지만 언뜻 본 신부의 모습은 내가 본 여느 신부의 모습과는
격이 달랐다. 동창녀석의 말 그대로 진구는 땡잡은 정도가 아닌 광땡 이상의 것을 비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얼굴, 몸매, 키, 피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네!"

친구와 동창녀석들의 입에서는 신부를 찬양하는 말들을 한웅큼씩 쏟아낸다. 주례에게 인사
를 하고 진구의 팔짱을 끼운 채 돌아선 그녀의 모습을 보니 현기증이 일 만큼 완벽한 외모
에 숨이 멎는 느낌이다. 아름다움, 지성미, 귀여움, 섹시미, 백치미 여자라는 동물에게 미인
이라는 칭호를 매길 때 주로 평가되는 5가지 느낌이 모두 함축되어있는 오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 갑자기 관심도 없던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최대한 태연한 척 고개를 돌려
신부측 화단을 바라보자 "백장미"라는 이름 세 글자가 반듯하게 박혀있다. 투명하고 흰 피부
와 너무나 잘어울리는 이름 백장미... 내가 장미를 처음 본 날이 바로 그녀와 진구의 결혼식
이었다.

예식의 마지막은 어디나 그렇듯 친구들과의 사진촬영으로 마무리 된다. 진구와 장미의 결혼
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구도 친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장미보다는 훨씬 많은 사
람들이 그의 뒤에 운집했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온 놈들부터 여전히 장미라는 꽃다운 여자
에게 정신이 팔린 녀석들까지 다양한 눈빛과 표정으로 줄을 맞춰서고 있었다. 반면 장미는
부모도 없었을 뿐더러 친구라고 온 사람들이 고작 4명이 전부이다. 하객의 수와 그들의 모
습만으로 하나의 사람을 평가하듯 나 역시 그녀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썩 좋지 않음으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것이 창피하여 결혼하객 아르바이트까지 생겨난 마당에 오
죽 없으면 거의 혈혈단신의 몸으로 생애 한 번 뿐인 결혼식장에 섰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자~ 신랑 친구분들... 이쪽! 신부님쪽으로 좀 설게요~"

사진기사가 최적의 구도를 맞추기 위해 손짓과 커다란 목소리로 신랑신부의 친구들을 조율
한다. 너나 없이 장미의 곁으로 갈 줄로만 알았던 생각은 상당히 비껴갔고 되레 딴 곳까지
쳐다보며 못들은 척 하는 이가 대다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상 아래로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이글대는 눈빛으로 지키고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어차
피 남의 여자 분냄새를 맡아봐야 뭐하나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에
결국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내가 먼저 장미의 바로 뒤에 자릴 잡았다. 밀렸다고 투덜대
듯 읊조렸지만 어쩌면 내 스스로 그녀의 분냄새를 맡고 싶어 홀려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내가 그렇게 장미라는 꽃을 막아서자 그제서야 하나둘씩 나
의 옆과 뒤쪽으로 한 무더기의 무리들이 자릴 잡는다.

"어? 왔어?"

주위를 둘러보던 진구녀석이 나를 보며 인사한다. 동창들을 불러 모인자리에 청첩장을 직접
준 그이지만 눈빛은 왠지 반기지 않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내가 진구였다면 나라는 존재가
썩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진구와 나는 친구라기
보다는 잘나가는 놈과 소위 말하는 꼬봉의 관계였다. 여전히 작은 체구가 눈에 띄는 진구와
눈인사를 끝내고 나니 자연스레 그의 얇다란 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장미의 뒷모습이 보인
다. 꼭 생긴 건 멸치대가리처럼 생겨가지고 새카만게 어떻게 이렇게 예쁜 신부를 얻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나는 대답 대신 진구의 어깨와 뒷목이 만나는 지점을 굳게 잡으며 우
직하게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어깨였다.

"장미야~ 뒤에... 친구!"

진구가 말하자 장미가 상체를 돌리며 나를 바라본다. 신부화장이라 짙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말 그대로 숨이 막힐 정도의 미모를 가진 그녀이다. 오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동근 코
가 이미지 전체를 관장하고 있는 것 같다. 커다란 눈엔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쌍커풀이 만
들어져 있고 눈썹은 가지런하며 유독 하얀 치아가 싱그럽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답답해 보일정도로 옥죄인 가슴을 부케로 살짝 가리며 고개를 수그리자 향긋한 향수 폭탄이
터져버린 것처럼 장미향이 물씬 풍겨온다. 장미향처럼 느껴진다. 아니 정말 백장미의 향기
였다. 약간은 고음에 비음이 섞인 매력적인 목소리가 귀에 와 꽂혀버린다. 목소리마저 낭랑
하니 맑은 음성이다. 심하지 않은 코맹맹이 소리는 귀엽기까지하다. 무엇보다 눈으로 보기
에도 매끈하기까지 한 고운피부가 압권이다. 파리가 앉는다면 그댈 미끄러져 버릴 만큼 광
택이 넘쳐난다.

"진구야, 너 제수씨한테 잘해야겠다~"

솔직히 부러웠다. 너무나 부럽고 샘이 났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못난 검정콩처럼 생긴 진구녀석에게 연예인 저리 갈 정도의 미
모의 아내가 생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했다. 뚜렷한 직장도 없고 그나마 사글
세 방을 얻은 것도 장미가 벌어둔 돈으로 어렵게 마련한 것이라고 들었을 뿐이지만 진구라
는 남자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는 평균이하의 남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학창시절 공부
도 못했고 운동도 못했다. 싸움도 못했을 뿐더러 예술적 감각역시 전혀 없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장미라는 예쁜 여자는 분명 사치였다. 최소한 내 눈에 보기엔 사치를 넘어 사기수준
이었다. 허구헌날,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을 나라는 놈에게 괴롭힘 당하며 살던 오진
구. 생애 처음으로 패배감이라는 걸 느껴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가 잘해야죠~"

나의 비아냥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여전히 선한 얼굴로 방긋 웃던 장미가 다시 뒤돌아보더
니 말한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며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외모가 뛰어난 게
1순위가 될 순 없겠지만 만약 내가 진구였다면 장미를 매일 업고 다녀도 부족할 것이라 생
각했을 것이다. 그저 그녀의 말이 입에 발린 말이라고 나름대로 단정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은 따로인듯 심장이 통통 튀는 것이 마음씨마저 착한 여자라고 그녀를
담아낸다.
너무나 컸다. 장미라는 꽃의 향기가...
마음을 일그러뜨릴 듯 강렬하면서도 아득한 향기가 서른 중반의 한 남자에겐 간과할 수 없
는 치명적인 향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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