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운에게 전화를 걸고 나온 강민우는 다시 민한구가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다. 손목이 묶인 여자는 침대위에 발가벗겨져 있었고 한민구는 벌어진 여자의 허벅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민한구의 허벅지 사이에는 흉물스런 남성이 발기되어 끄덕인다. 여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며 한민구가 설득을 한다.
“우리 서로 좋게 하자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싫어요. 차라리 죽여. 이 악마야.”
“네발로 일본에 보내달라고 와서 무슨 말이야.”
“너희 년 놈들에게 속은 거야. 그러지 말고 제발 살려 주세요. 네?”
“이년이!? 어쩔 수 없군.”
“시, 싫어.......!”
여자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리고 한민구가 다가앉는다. 민한구는 음흉스런 웃음을 흘리며 적나라하게 내려다보이는 여자의 음부로 쓰다듬는다. 여자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을 하지만,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 버둥거리기만 한다. 여자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보지의 진홍빛 살갗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남자를 거부하는 여자의 몸은 생리적 현상인가. 이미 촉촉한 진액으로 젖어있다. 민한구는 흉물스럽게 발기된 자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반항하는 여자의 보지 속으로 흉물을 밀어 넣는다. 여자는 보지 속으로 치밀고 들어오는 이질감을 느끼고 외마디를 지른다.
“하 앗! 시, 싫어. 개만도 못한 놈아.”
“허 으.......!”
남자의 둔부가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눈동자를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 여자의 나신이 버둥거린다. 남자의 양손에 들려진 여자의 다리가 허공에서 너울거린다. 침대가 삐걱거리고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반항하는 여자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든 흉물이 보지속의 숨겨진 살갗을 헤집는다. 거칠게 보지 속이 짓이겨질수록 여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달아오르는 쾌감을 견디지 못해 신음을 흘린다.
“하 아~! 아, 안 돼.”
손목이 묶여진 여자의 팔이 밧줄을 잡고 매달린다. 남자의 둔부가 들어 올려질 때마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여자의 허리가 허공으로 마주 치받는다. 보지 속으로 깊이 박혀 들어갔던 흉물이 빠져 나오면 여자는 안타까운 듯이 둔부를 들어 올린다. 민한구의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여자의 나신은 파도처럼 흔들린다. 발악을 하며 저항하던 여자의 다리가 한민구의 허벅지에 감고 허우적거린다.
“아! 난 몰라. 하 앙! 시, 싫어.”
“하하~! 이제 너도 좋은 모양이지.”
“시, 싫어. 하 윽~! 으 으......”
“.........!?”
헐떡거리던 민한구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음흉스런 웃음이 흐른다. 잠시 동작을 멈춘 민한구가 여자의 손목에 묶인 줄을 풀러준다. 남자를 거부하던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허리를 붙들고 매달린다. 그리고 여자는 둔부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엑스터시의 쾌감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표정. 자신을 지키려는 정신이 육체적인 본능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강제로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여자가 끓어오르는 엑스터시를 더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민한구가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을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는 강민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락을 받은 한상운이 도착할 시간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본 강민우가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등을 돌리고 있는 민한구는 모르지만, 마주하고 있는 여자는 불청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놀라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시선을 향해 민한구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서있는 강민우를 보고 민한구가 기겁을 한다.
“헉! 누, 누구야!?”
“싫다고 하잖아! 그만 해.”
한마디 내뱉은 강민우는 무표정하게 탁자 앞의 의자를 침대 가까이 끌어당겨 앉았다. 절정을 향해 치달으며 여자의 몸 속을 유린하는 민한구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놀란 표정을 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허리를 붙들고 매달리며 허우적거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안간힘을 쓴다. 숨을 몰아쉬는 민한구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흠.......! 누, 누구냐고?”
“그만 하라니까.”
“기, 기다려.......”
“..........”
당황하면서도 마지막욕구를 채우려는 민한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더듬었다. 민한구는 폭력배 수하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안면이 없는 불청객이 이곳까지 들어 올리는 없다. 그가 외국으로 밀입국시킬 여자를 즐기고 있는 것을 수하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수하들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할 불청객이라면 사업상 중요하거나 급한 용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업상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민한구는 불쾌하였다.
그런데 의자에 걸터앉은 남자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품속에서 검은 권총자루를 꺼내 탁자위에 내려놓는다. 당황한 민한구가 여자의 나신위에서 다급하게 떨어져 앉았다. 그의 하복부에는 분비물로 범벅이 된 흉물이 불끈 솟아 있었다. 놀라고 있는 여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발가벗겨진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도 뿌연 분비물이 흥건하였다. 침대 시트를 잡아당겨 벌거벗은 몸을 가린 여자는 겁에 질려 웅크리고 앉는다. 갑작스런 상황에 민한구는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다, 당신, 누구야!?”
“민 사장 잡으러 온 사람.”
강민우가 탁자위에 내려놓은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음기를 권총에 끼웠다. 장승처럼 버티고 앉은 강민우가 총구를 민한구에게 겨냥해보이더니 안전장치를 푼다. ‘철커덕!’ 하는 소리에 민한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민한구이다. 갈증을 느끼는 민한구는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하하~! 천하의 민한구가 그런 장난에 흔들릴 줄 알아? 너, 웬 놈이야?”
“과연 그럴까!?”
말을 뱉어내는 동시에 강민우는 민한구에게 겨냥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피 익~!’하는 금속성과 함께 총구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아울러 외마디를 지른 민한구의 벌거벗은 몸이 펄쩍 튀어 오른다.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민한구의 다리를 관통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민한구의 다리에서 흐른 피가 침대 모포를 적신다.
민한구는 설마 권총을 발사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그에게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악마같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놈! 워, 원하는 게 뭐야?”
“그렇게 진작 말할 거지. 광주사태 당시 중정의 끄나풀이었지?”
“중정.......!? 정부의 일이라 어쩔 수없이........”
“최태웅과 남경식을 도와 줬고, 그때 광주교도소에서 탈출한 흑사회 조직원들 어디로 보냈지.”
“나, 난 게네들 몰라! 최, 최 과장 요구만 들어 줬을 뿐이야.”
“...........”
무자비하게 예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민한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석고상처럼 민한구를 바라보던 강민우의 얼굴에 조소가 흐른다. 겁에 질린 민한구는 스스로 그들을 알고 있다는 자백을 한 것이다. 멀리서부터 울리는 비상사이렌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강민우가 다시 방아쇠 뭉치를 당기고 민한구에게 겨냥을 한다.
“난 방아쇠 당기는 걸 참지 못해. 최태웅과 남경식은 어디 있어?”
“모, 몰라! 그 후에 한번 만나고 소식이 끊겼으니까. 남경식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흑사회 조직원들을 홍콩으로 보냈나?”
“나, 난 홍콩으로 안 보냈어. 서울까지 태워다 주라고 해서, 화물차 짐칸에 숨겨 보내 줬을 뿐이야.”
“그 당시 흑사회 조직원들 신상에 대해 말해봐?”
“모, 몰라! 정말 몰라! 최태웅의 지시대로만 했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잘 생각해봐. 한발 더 쏴야, 기억이 나나?”
“그, 그러지 마! 다만 그놈들끼리 대화하는 말로는 뭐라고 하더라.......!? 곽........맞아! 곽춘호, 그리고 다른 놈 별명이 제비라는 거. 그, 그것밖에 몰라. 정말야.”
“말로는 안 되겠군!”
“저, 정말야! 그놈들과 직접 거래한 것도 아니고, 잠간 본 놈들인데 어떻게 알아.”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총구의 방아쇠가 금방이라도 당겨질 것 같아 민한구는 부들부들 떤다. 강민우는 민한구가 더 이상 최태웅이나 남경식, 그리고 흑사회에 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구둣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민한구는 자신의 하수인들이 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모양이다. 파랗게 질려있는 민한구는 기대감으로 입구를 바라본다. 그러나 정작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사람은 한상운과 안기부 요원들이었다. 권총을 들고 뛰어 들어온 한상운이 강민우에게 손바닥을 내민다.
“수고했어! 미리 정보를 말해주지 그랬어!”
“........!”
강민우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한상운이 내민 손바닥을 마주치고 방에서 나왔다. 우르르 몰려온 무장한 경찰들이 방마다 열어젖히며 신속하게 움직인다.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는 건물을 빠져 나온다. 건물 앞에는 번쩍거리는 비상등이 돌아가는 지프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 있다. 건물을 올려다보던 강민우는 몰려있는 인파를 헤치고 나간다.
그때 건물입구로 뛰어나온 한상운이 강민우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상운의 목소리와 강민우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 묻힌다.
저녁식사를 마친 강민우는 이진아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누운 이진아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키들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진씨 할머니가 주방에서 과일을 깎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탁자위에 과일 쟁반을 내려놓았다.
“요즘 과일은 별로 달지가 않네.”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 모양이지요.”
포크를 집어든 강민우가 사과 한쪽을 찍어들었다. 이진아가 발딱 일어나 손으로 과일을 집어 들었다. 앞치마에 손을 닦은 진씨 할머니가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했다. 진씨 할머니는 이북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강민우와 이진아는 며칠 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갔기에 유심히 주시하는 것이다. 애잔한 사연들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이진아와 그녀를 지켜보는 강민우의 모습이 나왔다. 아나운서의 질문이 이어지고 이진아의 사진과 자막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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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진아
출생지; 모름
성별. 나이; 여. 18세
현재 거주지; 경기도 하남. 외사촌 오빠 강민우와 거주.
광주 찾는 사람; 부모
특기사항; 6살에 어머니에 의해 광주 천주교성당 고아원에 맡겨짐.
연락처; 03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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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는 진씨 할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깊은 한 숨을 내쉬며 할머니가 푸념처럼 혼잣말을 했다.
“이북에 있는 가족을 찾을 수는 없나?”
“그런 시간이 오겠지요.”
진씨 할머니의 습기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는 강민우가 위로의 말을 했다. 이진아의 다음 순서의 이산가족이 나와서 육이오 동란에 있었던 아들을 찾았다.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진아가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풀썩 누웠다. 이진아는 어린 시절에 안개 속의 그림자처럼 흐릿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 올려본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이다. 깊은 잠이 들었던 강민우는 무선 호출기의 신호음을 듣고 눈을 떴다. 근무하는 안기부로부터 오는 비상 호출이다. 급히 사무실과 연락하니 비상상황이 발생하여 소집명령이 떨어진 것이라 한다. 새벽의 어두운 안개 속으로 지프차를 몰고 안기부로 향했다. 요원들이 모두 긴장한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소속의 차장이 간단한 긴급 상황을 설명한다. 오전 3시를 지나 대한항공 007편 747점보여객기가 사할린부근 상공에서 소련전투기의 공대공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하였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KAL 007기는 앵커리지 공항에서 승무원을 교체한 후 다시 운항 길에 올라 캄차카 반도를 거쳐 강릉·서울로 이어지는 항로를 운항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운항 중에 항로를 이탈,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가 격추되었다고 한다.
어둠이 걷히고 언론 매체와 이를 접한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탑승했던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국민들의 애도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소련전투기는 영공으로 들어온 KAL기를 미국첩보기로 오인하였다고 발표했다.
사건 발생 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소련 전투기가 첩보기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공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블랙박스 미회수 등 소련 영공 침입과정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사건 조사는 종결되었다.
레이건 미대통령이 소련 여객기의 미국 운항금지 등 보복조치를 발표했고, 미-소관계가 극히 악화되고 세계 각국도 소련의 만행을 규탄, 소련기의 운항을 규제하는데 동조했다. 유엔안보리에서는 한국 등 서방측이 제출한 대소규탄결의안이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부결됐으나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민간항공기구 특별이사회는 압도적 다수로 규탄 안을 채택했다.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한차례 소나기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다. 강민우는 여주군 북내면의 산기슭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그동안 최태웅과 남경식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으나 오리무중이다. 광주 태성 호텔에서 남경식과 최태웅이 한 말을 기억해보면 최태웅이 흑사회 조직원들을 홍콩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민한구는 그들을 서울로 잠입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강민우는 정기춘이나 민한구에게 남경식이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이 혼란스럽다. 그들의 흔적을 쫓을수록 강민우는 안개 속을 걸어가는 심정이다. 강민우는 송나희에게서 받은 남경식의 신상정보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적시며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산등성이 밑으로 몇 채 안 되는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당도했으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의 기와집 앞에서 강민우는 집안을 드려다 보지만 역시 인기척이 없다. 기웃거리던 그는 기와집 모퉁이를 돌아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을 중앙의 넓은 공간에 우물이 보인다. 강민우는 우물가의 물을 푸고 있는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덥지요.”
“네, 이제 그만 더울 때도 됐는데요.”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돌아요. 이 동네 처음이신가 봐요?”
“네.......!”
아주머니가 물 한바가지를 퍼서 강민우에게 건넨다. 갈증을 느끼기에 강민우는 물 한바가지를 거의 비우고 아주머니에게 바가지를 건넨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다가 아주머니에게 넌지시 묻는다.
“아주머니! 혹시, 남경식이라는 분 아십니까?”
“글쎄요.......! 남씨들이 살았었는데, 저기 노인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아주머니가 손가락질 하는 마을 뒤편으로 정자나무가 보인다. 정자나무 밑에는 노인 두 분이 더위를 피해 앉아 있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강민우는 정자나무를 향해 간다. 그는 정자나무 밑에 보이는 평상으로 가서 앉는다. 노인들은 앞으로 있을 동네 혼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매미 소리가 나는 정자나무 밑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노인들은 동갑인 듯 서로 상대를 최가, 김가라고 부른다. 노인들의 대화가 잠시 중단된 사이에 강민우가 넌지시 묻는다.
“사람 좀 찾으려고 왔는데요. 혹시 남경식이라고 아십니까?”
“그 못된 놈하고 어떤 사이시오?”
강민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마주 앉았던 김 노인도 강민우의 아래위를 살핀다. 노인들의 표정으로 강민우는 남경식이 고향에서도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은 것을 느낀다. 강민우가 노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업관계로 만날 일이 있어서요.”
“그놈 아주 나쁜 놈여! 젊은이도 그놈한테 사기라도 당한겨?”
“아! 네.......”
“경식이 그놈! 마을 사람 속이고, 혼자된 형수까지 겁탈하고........”
“네.......!?”
“죽었어야 할 놈이지.......”
최 노인들의 말을 들은 강민우는 어의가 없어 노인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최 노인이 뻐금거리며 담배를 빨아 연기를 뿜는다. 그리고 공연히 화를 내며 피우던 담배를 발로 북북 문질러 끈다. 쓴웃음을 짓고 있던 김 노인이 최 노인의 말을 거든다.
“나쁜 놈이고말고! 그래서 경식이 형수는 목 메달아 자살하고, 경식이 애비는 남부끄러워서 이 동네에서 못살고 이사 갔지.”
“그놈 중앙정보분가 뭔가 다닌다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더니.......못된 놈! 어떻게 제 형 마누라를 겁탈하나! 애초에 동네사람이 잘못한 거야. 그놈이 무서워서 인후보증을 서 줬으니.......”
“허 이! 최가, 그런 말 말어! 누가 들음 어쩌려고?”
“난 그 일에 관여치 않았으니 괜찮아. 그때 그놈이 정말 죽었어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경식이 자신의 형수를 겁탈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강민우는 노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후보증은 무엇이고, 노인들은 왜 남경식이 죽기를 바라는지 강민우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최 노인이 주위를 살피더니 강민우에게 다가앉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한다.
“그놈이 어느 날 고향에 돌아왔더라고. 그런데 마을 사람한테 자기가 죽은 것처럼 인후보증을 서달라고 했어. 중앙정보부에서 작전상 다른 사람이름이 필요하다나. 마을사람들은 중앙정보부에 다니고 있는 그놈을 두려워했기에 그놈 말을 들어 줬지.”
“그때가 언제 인가요!? 혹시 광주사태가 일어나던 해가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그 다음 해 봄이었어.”
“맞아, 봄 장 담그는 시기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
최 노인이 말을 가로채는 김 노인을 윽박지른다. 그때 우물가에 있던 아주머니가 물통을 머리에 이고 지나친다. 최 노인이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아주머니가 노인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아주머니의 팔랑거리는 치맛자락이 사라지고, 최 노인이 다시 강민우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경식이 놈은 한 달 만에 돌아와서 안기부 요원이 되었다고 거만을 떨었어. 그런데 집에서 번둥거리더니 과부로 사는 형수를 겁탈한 거야! 저희 형수가 목매달아 자살하니까 도망간 거지. 결국 경식이 애비도 남부끄러워서 동네를 떠났지.”
“그 후에 남경식을 본 사람은 없을까요?”
“글쎄.......! 봤다는 사람이 없으니. 나중에 형사가 경식이를 찾으러왔는데, 살인 용의자로 수배중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경찰이 마을 꼭대기에 살던 집의 월북한 아들 이름을 대면서 경식이와 어떤 관계냐고 묻더군. 소문에는 경식이, 그놈! 안기부에서도 쫓겨났다더군.”
“꼭대기집 아들 이름이 뭔데요?”
“경식이와 종씨인데 남기춘이라고 하지.”
“.........!”
강민우는 남경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정기춘이나 민한구의 남경식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을 사망 처리한 남경식이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월북한 남기춘과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의문이 짙어진다.
정자나무의 매미소리가 한층 더 시끄러워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강민우는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긴다. 담배를 다시 피워 문 최 노인은 마을을 벗어나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평상 근처를 날아다니는 잠자리 때와 어우러진 정자나무 밑의 풍경이 한가로워 보인다.
더위가 물러가고 갈색으로 변한 산과들의 나무에서는 하나둘씩 낙엽을 떨어트리기 시작한다. 경기도 하남 창우리 한강줄기를 내려다보는 야산 기슭의 공터에 각각 네 명의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들은 야외용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한다. 교복 차림의 그들 중에는 사복을 걸친 학생들도 보인다. 여학생들 중에는 이진아의 모습도 보인다. 다른 학생들은 흥겹게 어울리지만 그녀만 홀로 앉아 턱을 고이고 바라본다.
이진아는 오늘 일찍 수업을 마쳤다. 학과를 맡은 선생님이 아파서 결근했기에 세 시간이나 일찍 수업을 마친 것이다. 그녀의 짝꿍인 은숙이가 그녀에게 남학생들과 미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은숙과 같이 만난 여학생들은 학교에서도 악명이 높은 ‘가이아’라는 서클의 회원들이었다. 동료 여학생들을 괴롭히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회원들의 모임이었다.
‘가이아’ 서클 회원들은 다른 학생들을 집단폭력을 하는 것을 예사로 여길뿐더러 남학생들과의 혼잡한 성관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기를 임신해서 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서클 여학생도 있었다.-------
“우리 서로 좋게 하자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싫어요. 차라리 죽여. 이 악마야.”
“네발로 일본에 보내달라고 와서 무슨 말이야.”
“너희 년 놈들에게 속은 거야. 그러지 말고 제발 살려 주세요. 네?”
“이년이!? 어쩔 수 없군.”
“시, 싫어.......!”
여자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리고 한민구가 다가앉는다. 민한구는 음흉스런 웃음을 흘리며 적나라하게 내려다보이는 여자의 음부로 쓰다듬는다. 여자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을 하지만,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 버둥거리기만 한다. 여자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보지의 진홍빛 살갗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남자를 거부하는 여자의 몸은 생리적 현상인가. 이미 촉촉한 진액으로 젖어있다. 민한구는 흉물스럽게 발기된 자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반항하는 여자의 보지 속으로 흉물을 밀어 넣는다. 여자는 보지 속으로 치밀고 들어오는 이질감을 느끼고 외마디를 지른다.
“하 앗! 시, 싫어. 개만도 못한 놈아.”
“허 으.......!”
남자의 둔부가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눈동자를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 여자의 나신이 버둥거린다. 남자의 양손에 들려진 여자의 다리가 허공에서 너울거린다. 침대가 삐걱거리고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반항하는 여자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든 흉물이 보지속의 숨겨진 살갗을 헤집는다. 거칠게 보지 속이 짓이겨질수록 여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달아오르는 쾌감을 견디지 못해 신음을 흘린다.
“하 아~! 아, 안 돼.”
손목이 묶여진 여자의 팔이 밧줄을 잡고 매달린다. 남자의 둔부가 들어 올려질 때마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여자의 허리가 허공으로 마주 치받는다. 보지 속으로 깊이 박혀 들어갔던 흉물이 빠져 나오면 여자는 안타까운 듯이 둔부를 들어 올린다. 민한구의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여자의 나신은 파도처럼 흔들린다. 발악을 하며 저항하던 여자의 다리가 한민구의 허벅지에 감고 허우적거린다.
“아! 난 몰라. 하 앙! 시, 싫어.”
“하하~! 이제 너도 좋은 모양이지.”
“시, 싫어. 하 윽~! 으 으......”
“.........!?”
헐떡거리던 민한구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음흉스런 웃음이 흐른다. 잠시 동작을 멈춘 민한구가 여자의 손목에 묶인 줄을 풀러준다. 남자를 거부하던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허리를 붙들고 매달린다. 그리고 여자는 둔부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엑스터시의 쾌감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표정. 자신을 지키려는 정신이 육체적인 본능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강제로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여자가 끓어오르는 엑스터시를 더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민한구가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을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는 강민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락을 받은 한상운이 도착할 시간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본 강민우가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등을 돌리고 있는 민한구는 모르지만, 마주하고 있는 여자는 불청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놀라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시선을 향해 민한구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서있는 강민우를 보고 민한구가 기겁을 한다.
“헉! 누, 누구야!?”
“싫다고 하잖아! 그만 해.”
한마디 내뱉은 강민우는 무표정하게 탁자 앞의 의자를 침대 가까이 끌어당겨 앉았다. 절정을 향해 치달으며 여자의 몸 속을 유린하는 민한구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놀란 표정을 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허리를 붙들고 매달리며 허우적거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안간힘을 쓴다. 숨을 몰아쉬는 민한구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흠.......! 누, 누구냐고?”
“그만 하라니까.”
“기, 기다려.......”
“..........”
당황하면서도 마지막욕구를 채우려는 민한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더듬었다. 민한구는 폭력배 수하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안면이 없는 불청객이 이곳까지 들어 올리는 없다. 그가 외국으로 밀입국시킬 여자를 즐기고 있는 것을 수하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수하들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할 불청객이라면 사업상 중요하거나 급한 용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업상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민한구는 불쾌하였다.
그런데 의자에 걸터앉은 남자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품속에서 검은 권총자루를 꺼내 탁자위에 내려놓는다. 당황한 민한구가 여자의 나신위에서 다급하게 떨어져 앉았다. 그의 하복부에는 분비물로 범벅이 된 흉물이 불끈 솟아 있었다. 놀라고 있는 여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발가벗겨진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도 뿌연 분비물이 흥건하였다. 침대 시트를 잡아당겨 벌거벗은 몸을 가린 여자는 겁에 질려 웅크리고 앉는다. 갑작스런 상황에 민한구는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다, 당신, 누구야!?”
“민 사장 잡으러 온 사람.”
강민우가 탁자위에 내려놓은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음기를 권총에 끼웠다. 장승처럼 버티고 앉은 강민우가 총구를 민한구에게 겨냥해보이더니 안전장치를 푼다. ‘철커덕!’ 하는 소리에 민한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민한구이다. 갈증을 느끼는 민한구는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하하~! 천하의 민한구가 그런 장난에 흔들릴 줄 알아? 너, 웬 놈이야?”
“과연 그럴까!?”
말을 뱉어내는 동시에 강민우는 민한구에게 겨냥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피 익~!’하는 금속성과 함께 총구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아울러 외마디를 지른 민한구의 벌거벗은 몸이 펄쩍 튀어 오른다.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민한구의 다리를 관통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민한구의 다리에서 흐른 피가 침대 모포를 적신다.
민한구는 설마 권총을 발사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그에게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악마같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놈! 워, 원하는 게 뭐야?”
“그렇게 진작 말할 거지. 광주사태 당시 중정의 끄나풀이었지?”
“중정.......!? 정부의 일이라 어쩔 수없이........”
“최태웅과 남경식을 도와 줬고, 그때 광주교도소에서 탈출한 흑사회 조직원들 어디로 보냈지.”
“나, 난 게네들 몰라! 최, 최 과장 요구만 들어 줬을 뿐이야.”
“...........”
무자비하게 예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민한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석고상처럼 민한구를 바라보던 강민우의 얼굴에 조소가 흐른다. 겁에 질린 민한구는 스스로 그들을 알고 있다는 자백을 한 것이다. 멀리서부터 울리는 비상사이렌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강민우가 다시 방아쇠 뭉치를 당기고 민한구에게 겨냥을 한다.
“난 방아쇠 당기는 걸 참지 못해. 최태웅과 남경식은 어디 있어?”
“모, 몰라! 그 후에 한번 만나고 소식이 끊겼으니까. 남경식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흑사회 조직원들을 홍콩으로 보냈나?”
“나, 난 홍콩으로 안 보냈어. 서울까지 태워다 주라고 해서, 화물차 짐칸에 숨겨 보내 줬을 뿐이야.”
“그 당시 흑사회 조직원들 신상에 대해 말해봐?”
“모, 몰라! 정말 몰라! 최태웅의 지시대로만 했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잘 생각해봐. 한발 더 쏴야, 기억이 나나?”
“그, 그러지 마! 다만 그놈들끼리 대화하는 말로는 뭐라고 하더라.......!? 곽........맞아! 곽춘호, 그리고 다른 놈 별명이 제비라는 거. 그, 그것밖에 몰라. 정말야.”
“말로는 안 되겠군!”
“저, 정말야! 그놈들과 직접 거래한 것도 아니고, 잠간 본 놈들인데 어떻게 알아.”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총구의 방아쇠가 금방이라도 당겨질 것 같아 민한구는 부들부들 떤다. 강민우는 민한구가 더 이상 최태웅이나 남경식, 그리고 흑사회에 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구둣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민한구는 자신의 하수인들이 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모양이다. 파랗게 질려있는 민한구는 기대감으로 입구를 바라본다. 그러나 정작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사람은 한상운과 안기부 요원들이었다. 권총을 들고 뛰어 들어온 한상운이 강민우에게 손바닥을 내민다.
“수고했어! 미리 정보를 말해주지 그랬어!”
“........!”
강민우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한상운이 내민 손바닥을 마주치고 방에서 나왔다. 우르르 몰려온 무장한 경찰들이 방마다 열어젖히며 신속하게 움직인다.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는 건물을 빠져 나온다. 건물 앞에는 번쩍거리는 비상등이 돌아가는 지프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 있다. 건물을 올려다보던 강민우는 몰려있는 인파를 헤치고 나간다.
그때 건물입구로 뛰어나온 한상운이 강민우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상운의 목소리와 강민우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 묻힌다.
저녁식사를 마친 강민우는 이진아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누운 이진아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키들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진씨 할머니가 주방에서 과일을 깎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탁자위에 과일 쟁반을 내려놓았다.
“요즘 과일은 별로 달지가 않네.”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 모양이지요.”
포크를 집어든 강민우가 사과 한쪽을 찍어들었다. 이진아가 발딱 일어나 손으로 과일을 집어 들었다. 앞치마에 손을 닦은 진씨 할머니가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했다. 진씨 할머니는 이북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강민우와 이진아는 며칠 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갔기에 유심히 주시하는 것이다. 애잔한 사연들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이진아와 그녀를 지켜보는 강민우의 모습이 나왔다. 아나운서의 질문이 이어지고 이진아의 사진과 자막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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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진아
출생지; 모름
성별. 나이; 여. 18세
현재 거주지; 경기도 하남. 외사촌 오빠 강민우와 거주.
광주 찾는 사람; 부모
특기사항; 6살에 어머니에 의해 광주 천주교성당 고아원에 맡겨짐.
연락처; 03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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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는 진씨 할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깊은 한 숨을 내쉬며 할머니가 푸념처럼 혼잣말을 했다.
“이북에 있는 가족을 찾을 수는 없나?”
“그런 시간이 오겠지요.”
진씨 할머니의 습기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는 강민우가 위로의 말을 했다. 이진아의 다음 순서의 이산가족이 나와서 육이오 동란에 있었던 아들을 찾았다.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진아가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풀썩 누웠다. 이진아는 어린 시절에 안개 속의 그림자처럼 흐릿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 올려본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이다. 깊은 잠이 들었던 강민우는 무선 호출기의 신호음을 듣고 눈을 떴다. 근무하는 안기부로부터 오는 비상 호출이다. 급히 사무실과 연락하니 비상상황이 발생하여 소집명령이 떨어진 것이라 한다. 새벽의 어두운 안개 속으로 지프차를 몰고 안기부로 향했다. 요원들이 모두 긴장한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소속의 차장이 간단한 긴급 상황을 설명한다. 오전 3시를 지나 대한항공 007편 747점보여객기가 사할린부근 상공에서 소련전투기의 공대공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하였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KAL 007기는 앵커리지 공항에서 승무원을 교체한 후 다시 운항 길에 올라 캄차카 반도를 거쳐 강릉·서울로 이어지는 항로를 운항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운항 중에 항로를 이탈,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가 격추되었다고 한다.
어둠이 걷히고 언론 매체와 이를 접한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탑승했던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국민들의 애도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소련전투기는 영공으로 들어온 KAL기를 미국첩보기로 오인하였다고 발표했다.
사건 발생 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소련 전투기가 첩보기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공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블랙박스 미회수 등 소련 영공 침입과정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사건 조사는 종결되었다.
레이건 미대통령이 소련 여객기의 미국 운항금지 등 보복조치를 발표했고, 미-소관계가 극히 악화되고 세계 각국도 소련의 만행을 규탄, 소련기의 운항을 규제하는데 동조했다. 유엔안보리에서는 한국 등 서방측이 제출한 대소규탄결의안이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부결됐으나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민간항공기구 특별이사회는 압도적 다수로 규탄 안을 채택했다.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한차례 소나기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다. 강민우는 여주군 북내면의 산기슭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그동안 최태웅과 남경식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으나 오리무중이다. 광주 태성 호텔에서 남경식과 최태웅이 한 말을 기억해보면 최태웅이 흑사회 조직원들을 홍콩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민한구는 그들을 서울로 잠입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강민우는 정기춘이나 민한구에게 남경식이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이 혼란스럽다. 그들의 흔적을 쫓을수록 강민우는 안개 속을 걸어가는 심정이다. 강민우는 송나희에게서 받은 남경식의 신상정보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적시며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산등성이 밑으로 몇 채 안 되는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당도했으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의 기와집 앞에서 강민우는 집안을 드려다 보지만 역시 인기척이 없다. 기웃거리던 그는 기와집 모퉁이를 돌아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을 중앙의 넓은 공간에 우물이 보인다. 강민우는 우물가의 물을 푸고 있는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덥지요.”
“네, 이제 그만 더울 때도 됐는데요.”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돌아요. 이 동네 처음이신가 봐요?”
“네.......!”
아주머니가 물 한바가지를 퍼서 강민우에게 건넨다. 갈증을 느끼기에 강민우는 물 한바가지를 거의 비우고 아주머니에게 바가지를 건넨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다가 아주머니에게 넌지시 묻는다.
“아주머니! 혹시, 남경식이라는 분 아십니까?”
“글쎄요.......! 남씨들이 살았었는데, 저기 노인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아주머니가 손가락질 하는 마을 뒤편으로 정자나무가 보인다. 정자나무 밑에는 노인 두 분이 더위를 피해 앉아 있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강민우는 정자나무를 향해 간다. 그는 정자나무 밑에 보이는 평상으로 가서 앉는다. 노인들은 앞으로 있을 동네 혼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매미 소리가 나는 정자나무 밑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노인들은 동갑인 듯 서로 상대를 최가, 김가라고 부른다. 노인들의 대화가 잠시 중단된 사이에 강민우가 넌지시 묻는다.
“사람 좀 찾으려고 왔는데요. 혹시 남경식이라고 아십니까?”
“그 못된 놈하고 어떤 사이시오?”
강민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마주 앉았던 김 노인도 강민우의 아래위를 살핀다. 노인들의 표정으로 강민우는 남경식이 고향에서도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은 것을 느낀다. 강민우가 노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업관계로 만날 일이 있어서요.”
“그놈 아주 나쁜 놈여! 젊은이도 그놈한테 사기라도 당한겨?”
“아! 네.......”
“경식이 그놈! 마을 사람 속이고, 혼자된 형수까지 겁탈하고........”
“네.......!?”
“죽었어야 할 놈이지.......”
최 노인들의 말을 들은 강민우는 어의가 없어 노인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최 노인이 뻐금거리며 담배를 빨아 연기를 뿜는다. 그리고 공연히 화를 내며 피우던 담배를 발로 북북 문질러 끈다. 쓴웃음을 짓고 있던 김 노인이 최 노인의 말을 거든다.
“나쁜 놈이고말고! 그래서 경식이 형수는 목 메달아 자살하고, 경식이 애비는 남부끄러워서 이 동네에서 못살고 이사 갔지.”
“그놈 중앙정보분가 뭔가 다닌다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더니.......못된 놈! 어떻게 제 형 마누라를 겁탈하나! 애초에 동네사람이 잘못한 거야. 그놈이 무서워서 인후보증을 서 줬으니.......”
“허 이! 최가, 그런 말 말어! 누가 들음 어쩌려고?”
“난 그 일에 관여치 않았으니 괜찮아. 그때 그놈이 정말 죽었어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경식이 자신의 형수를 겁탈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강민우는 노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후보증은 무엇이고, 노인들은 왜 남경식이 죽기를 바라는지 강민우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최 노인이 주위를 살피더니 강민우에게 다가앉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한다.
“그놈이 어느 날 고향에 돌아왔더라고. 그런데 마을 사람한테 자기가 죽은 것처럼 인후보증을 서달라고 했어. 중앙정보부에서 작전상 다른 사람이름이 필요하다나. 마을사람들은 중앙정보부에 다니고 있는 그놈을 두려워했기에 그놈 말을 들어 줬지.”
“그때가 언제 인가요!? 혹시 광주사태가 일어나던 해가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그 다음 해 봄이었어.”
“맞아, 봄 장 담그는 시기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
최 노인이 말을 가로채는 김 노인을 윽박지른다. 그때 우물가에 있던 아주머니가 물통을 머리에 이고 지나친다. 최 노인이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아주머니가 노인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아주머니의 팔랑거리는 치맛자락이 사라지고, 최 노인이 다시 강민우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경식이 놈은 한 달 만에 돌아와서 안기부 요원이 되었다고 거만을 떨었어. 그런데 집에서 번둥거리더니 과부로 사는 형수를 겁탈한 거야! 저희 형수가 목매달아 자살하니까 도망간 거지. 결국 경식이 애비도 남부끄러워서 동네를 떠났지.”
“그 후에 남경식을 본 사람은 없을까요?”
“글쎄.......! 봤다는 사람이 없으니. 나중에 형사가 경식이를 찾으러왔는데, 살인 용의자로 수배중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경찰이 마을 꼭대기에 살던 집의 월북한 아들 이름을 대면서 경식이와 어떤 관계냐고 묻더군. 소문에는 경식이, 그놈! 안기부에서도 쫓겨났다더군.”
“꼭대기집 아들 이름이 뭔데요?”
“경식이와 종씨인데 남기춘이라고 하지.”
“.........!”
강민우는 남경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정기춘이나 민한구의 남경식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을 사망 처리한 남경식이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월북한 남기춘과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의문이 짙어진다.
정자나무의 매미소리가 한층 더 시끄러워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강민우는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긴다. 담배를 다시 피워 문 최 노인은 마을을 벗어나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평상 근처를 날아다니는 잠자리 때와 어우러진 정자나무 밑의 풍경이 한가로워 보인다.
더위가 물러가고 갈색으로 변한 산과들의 나무에서는 하나둘씩 낙엽을 떨어트리기 시작한다. 경기도 하남 창우리 한강줄기를 내려다보는 야산 기슭의 공터에 각각 네 명의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들은 야외용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한다. 교복 차림의 그들 중에는 사복을 걸친 학생들도 보인다. 여학생들 중에는 이진아의 모습도 보인다. 다른 학생들은 흥겹게 어울리지만 그녀만 홀로 앉아 턱을 고이고 바라본다.
이진아는 오늘 일찍 수업을 마쳤다. 학과를 맡은 선생님이 아파서 결근했기에 세 시간이나 일찍 수업을 마친 것이다. 그녀의 짝꿍인 은숙이가 그녀에게 남학생들과 미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은숙과 같이 만난 여학생들은 학교에서도 악명이 높은 ‘가이아’라는 서클의 회원들이었다. 동료 여학생들을 괴롭히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회원들의 모임이었다.
‘가이아’ 서클 회원들은 다른 학생들을 집단폭력을 하는 것을 예사로 여길뿐더러 남학생들과의 혼잡한 성관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기를 임신해서 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서클 여학생도 있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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