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로 향해 달려가던 청년이 골목 어귀에서 주춤거렸다. 골목 어귀에 그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버티고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청년을 향해 다가오는 것으로 봐서 지나치는 행인이 아니었다. 진퇴양난의 청년이 나이프를 들고 남자에게 향한다. 가로등 불빛아래 모습을 들어 낸 남자는 다름 아닌 강민우였다. 가죽점퍼와 가죽장갑과 낀 강민우는 표정 변화 없이 청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온다. 나이프를 움켜쥔 청년이 소리친다.
“넌 누구야!? 죽기 싫으면 꺼져!”
“........”
협박하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없이 다가서는 남자. 청년은 알지 못할 위압감을 느낀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멀리서 추격해오는 경찰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청년이 강민우를 향해 나이프를 휘두른다. 강민우는 흠칫 하며 뒤로 물러선다. 의기 당당해진 청년이 다시 나이프를 휘두르며 소리친다.
“다치기 전에 꺼지라니까!”
“........”
청년이 돌진하면서 강민우의 가슴을 향해 나이프를 찌른다. 강민우는 몸을 뒤로 젖혀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든 청년의 손을 밑으로 당기고 윈 손으로는 팔꿈치를 힘껏 들어 올리니 자연스레 상대의 팔이 꺾였다. 강민우가 팔이 꺾인 청년을 밀어 던졌다. 우당탕하고 쓰레기통을 들이받고 넘어진 청년의 입가에 피가 흐른다. 입가에 흐른 피를 손으로 무지른 청년은 독이 올라 혼잣말을 흘리며 거침없이 강민우에게 나이프를 휘두른다.
“이런 씨발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
청년의 나이프가 강민우의 허리와 어깨를 향해 마구 휘둘러진다. 그러나 정작 쓰러진 것은 청년이었다. 몇 차례 청년의 나이프를 피하던 강민우가 청년의 턱과 목덜미를 타격하였다. 청년은 고꾸라지듯이 걸음을 옮기다가 땅바닥에 널브러진다. 강민우는 쓰러진 청년의 멱살을 낚아챈다.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권총을 뽑아들더니 안전장치를 푼다. 청년의 입속으로 총구를 디밀어 넣는다. 시커먼 총구를 입속에 물은 청년은 기가 꺾이며 겁을 한다.
“너, 어느 조직에 있어?”
“커 컥~! 난. 조직 같은 거 몰라.”
“남경식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아.......아 니.”
“남기춘이라고도 하지.”
“아아, 아니........우우.......”
강민우는 남경식에 관한 이름들을 하나씩 청년에게 묻는다. 총구를 입에 문 청년은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우우~!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강민우는 범죄자들을 색출하다 보면 남경식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골목 안으로부터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고 조병문 경감을 비롯한 형사들이 뛰어 나온다.
골목을 뛰어나온 조 경감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춘다. 누구인가 쓰러트린 범인을 일으켜 세워 다그치고 있었다. 강력반 형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강민우가 범인의 멱살을 풀고 일어선다. 청년은 재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침을 뱉는다. 조반장이 강민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거 민우 아냐?”
“아! 병문이구나!”
“안기부에서도 강력범죄 다루나?”
“흠.......! 다른 업무로 잠복 중이다가.”
“하여튼 오래간만이고, 고맙네,”
조병문 경감은 어린 시절부터 강민우의 절친한 친구였다. 대학은 다르지만 같이 청와대 경호요원으로 근무도 했었다. 강민우는 중앙정보부로 옮기고 조병문은 경찰에 남아서 강력반 형사가 된 것이다. 그들은 악수를 하며 서로의 등을 두들긴다. 형사들이 강민우에게서 인계받은 범인에게 수갑을 채운다. 범인은 연쇄적으로 여자 혼자 사는 여자 집으로 들어가 강제 추행을 하던 자이고, 조 반장과 강력반 형사들이 오랫동안 추적을 하고 있었다.
강력반 형사들은 범인을 데리고 시경으로 들어가고 조 반장과 강민우는 해장국 집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그들은 해장국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나온 얘기를 나눈다. 조 경감은 강민우의 안기부 생활이 궁금한지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하는 경찰생활을 하소연한다. 그리고 강민우에게 다시 묻는다.
“그런데 범인을 알고 뒤쫓은 거야?”
“아니, 부근에 잠복근무하다가. 우연히.”
강민우는 우연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스크랩했던 자료들을 보고 범인의 규칙적인 행적과 범행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그가 범죄자들을 색출하는 것은 국내에 잠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남경식 조직 일당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국내에 머물고 있다면 반듯이 폭력배나 범죄 조직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추측에서였다. 조 경감이 넌지시 물었다.
“아직 독신이냐?”
“그렇지 뭐. 너는?”
“작년에 결혼했어. 그런데 아내 볼 면복이 없어. 집에도 잘 못 들어가고.”
“범인 잡으러 다니는 경찰 생활 힘들겠지. 언젠가, 지방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좌천당했던 거야. 광주사태 일어나던 해의 안국동 사건 알아?”
“알지. 야권인사 3명이나 사망한 사건인데.”
“그 사건 때문이었어. 내가 맡았던 사건인데, 며칠 가지 않아서 수사 종결하라는 상부지시와 함께 나는 지방으로 발령 받았어. 억울해서 아직도 그 사건에 미련을 두고 있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이제는 힘들잖아."
“아니, 그 사건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어.”
“음모가.........!?”
“음, 언젠가는 내손으로 꼭 밝히고 말거야.”
조병문 경감의 표정에는 강인한 의지가 드러나 보였다. 처리해야할 업무들이 많다고 하며 조 경감이 먼저 일어섰다. 해장국집을 나온 강민우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대로변에 세워놓은 지프차에 오른다.
강민우가 개인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이 있다. 안기부 전산실장 최재인과 그의 내연녀 남규리이다. 그는 몇 번인가 최재인과 남규리를 미행했지만, 도무지 그들의 밀회장소를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그들 앞에 신분을 들어 낼 수는 없기에 더욱 힘든 일이다. 강민우는 지프차의 시동을 걸고 액셀 페달을 밟는다.
시내를 벗어나서 안개가 깔린 왕릉의 입구였다. 지프차를 몰고 가던 강민우는 접근금지구역 표지가 걸린 두 갈래 길에서 멈추어 선다. 양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죽은 경종 임금이 안장된 왕릉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 가 지키는 역사적인 문화유산과 정부의 안보를 지키는 안기부 건물이 공존한다. 어쩌면 역사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과 새로운 정치문화의 극과 극을 번복하거나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모두 미래에 되돌아 봐야할 시간의 지표이다.
강민우는 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인공 연못으로 걸어가 크게 숨을 들이킨다. 고향에서 느끼던 맑은 공기가 코 속으로 스며든다. 격투자세를 취하고 힘껏 주먹을 앞으로 내뻗는다. 청량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 갈 것만 같다. 연못가에 세워진 돌 위에 중심을 잡은 강민우는 빠르게 돌려차기를 한다. 잔잔한 연못의 수면위에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그가 할일은 어디에서 멈추어 질지도 모르지만 행보는 정해져 있다.
강민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오직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청산이다. 그는 마치 발레리나처럼 땅에 발끝을 세우고 허공으로 발을 힘껏 뻗는다. 소나무 끝을 향해 높게 뻗은 발로 하늘을 떠받는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걷어 들인다. 그리고 되돌아 나와 지프차에 오른다. 지프차를 몰고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 안기부 내의 주차장 안에 세운다.
서늘한 느낌을 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숫자 표지만 걸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표정 변화 없이 기계적인 걸음을 옮기다가 달력 앞에 선다. 달력에는 영화배우 오수비가 선정적인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 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나!" 하고 혼잣말을 흘린 강민우가 달력을 뜯어낸다. 그리고 책상과 의자 여섯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사무실을 둘러본다.
지난주에 NTIS의 조직을 재개편하고 강민우의 팀에게 주어진 사무실이다. 강민우는 양쪽으로 놓인 여섯 개의 책상 사이를 지나 마주보이는 책상의 의자에 가서 앉는다. 책상마다 위에는 서류철과 잡지나 신문 그리고 메모지들만 올려져 있고 요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팀으로 업무를 부여 받거나, 특별한 호출 외에는 각자 임무를 수행중이기 때문이다.
강민우는 책상위에 다리를 얹어놓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출입구 문이 덜컹 열리고 스포츠머리를 문경환이 들어온다. 문경환은 신입으로 안기부에 들어온 요원이다. 강원도 출신으로 유도로 단련한 육군수사기관 출신이다. 강민우를 발견한 문경환이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고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한다. 그를 바라보며 강민우가 웃음을 흘린다.
"이 친구 , 오늘도 일찍 왔구먼. 아홉시까지 와도 된다고 했잖아. 시간이 아직 멀었구먼."
"팀장님이 먼저 오셨네요."
"부지런하다고 월급 더 안줘."
"......."
강민우는 의자를 당겨 바로 앉으며 책상위에 쌓인 서류들을 뒤적인다. 서류 내용을 한 번씩 훑어보고 아직 수행중인 작전 서류들을 한 곳으로 모은다. 그리고 개인적인 정보들을 별도로 수첩에 메모한다. 끝 쪽의 책상 앞에 앉았던 문경환이 강민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질문을 한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강민우는 문경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수첩을 정리하며 묻는다. 문경환이 강민우의 책상 앞으로 다가온다. 강민우는 정리하던 수첩을 덮고 책상에 턱을 고이며 문경환을 바라본다.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묻고 있으면서.......! 말해 봐."
"저기 빈 책상들, 주인이 있는 겁니까?"
"물론 있지."
"그럼 모두 휴가라도 갔습니까?"
"아하~!"
강민우는 그제야 자신이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다. 신입직원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해주어야할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일주일이 자나도록 책상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문경환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책상 주인들 중에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징계를 받은 직원들도 있었다.
"그건 말이야......."
“.........!”
강민우는 말을 길게 끌며 문경환의 표정을 살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빨리 대답을 듣고 싶은 눈빛이다. 지금은 몰라도 된다고 명령조로 말하면 해결되겠지만, 일주일간을 마주하였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같이 할 신입직원과 상하관계를 고정시키기는 싫었다.
"신입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기에 자네가 이해를......."
“..........!?”
그때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강민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문경환은 강민우의 대답에 집중해서 그런지 약간 놀라는 표정이다. 대답을 망설이던 강민우는 다행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벨이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던 강민우는 다행으로 생각할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책상에는 두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다.
강민우가 평소에 교환원을 통하거나 외부와 통화를 할 때는 검은 색 전화기를 사용한다. 먼지와 담배연기에 찌든 것처럼 회색전화기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상위직급과 직통 연결된 것이다. 강민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회색 전화의 수화기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다시 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의자를 돌려 문경환에게서 등을 진다.
“나, 권 차장이야.”
“네!”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권익수 차장은 해외안보 담당 책임자로서 강민우의 팀의 책임자는 아니었다. 강민우가 맡은 팀은 정보국 소속의 팀이었다. 정보국 소속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NTIS의 특수 업무를 담당하는 행동요원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강민우를 제압하려는 듯 자신을 밝힌 권 차장의 강압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고정간첩 색출 사건을 수행중이지?”
“네, 그렇습니다만.”
“청량리 변사체 사건과 관련되어 있지?”
“네.......!”
“변사체, 그냥 마무리해.”
“그렇지만.......”
“내말 안 들려? 그냥 마무리 하라고!”
“네, 알았습니다.”
지시대로 안하면 마치 당장이라도 총살이라도 할 것처럼 권 차장이 으름장을 놓는다. 언짢은 기분으로 강민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문경환은 강민우의 통화 내용이 궁금했다. 통화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으나 오히려 청각을 곤두세워 들으려 했다. 이맛살을 찌푸린 강민우는 바로 검은색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교환원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하듯이 말한다.
“청량리 경찰서장 연결해줘. 지금 바로!”
“.........!”
강민우의 굳은 표정을 보는 민경환은 말을 붙이기도 두려웠다. 민경환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강민우의 이렇게 굳은 표정을 본적이 없다. 평상시 말씨는 많지 않지만, 너그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이끌던 강민우였다. 문경환은 팀장인 강민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경찰 특공대 출신으로 중정을 거치는 동안 ‘스니퍼 강’ 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다시 전화벨 수리가 울린다. 이번에 울린 것은 검은색 전화였다. 잠시 부드러웠던 강민우의 눈매가 전화벨 소리에 날카롭게 변한다. 강민우는 재빨리 손을 뻗쳐 검은색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빠르게 말한다.
“석관동 정보실입니다.”
“정보실이라니요.......!?”
“석관동 안가도 모르시오? 설명할 시간 없고, 40대 남자변사체 수사 중이지요?”
“네........!”
“그 사건, 신원미상으로 종결해요!”
“네?”
“무슨 말인지 몰라요? 신원미상으로 종결하라고.”
“아.......! 그러나 어떻게!?”
“뭘 어떻게! 우리 쪽 요원도 다친 상태이니,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종결하라고요.”
“그렇지만, 어떤 방법으로........?”
“경찰 생활 얼마나 하셨는데, 방법까지 가르쳐 줘요? 그냥 속 편하게 간첩으로 해요. 우리도 그렇게 처리할 테니.”
“..........”
강민우는 상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경찰서장도 더는 고집 부릴 수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쉰 강민우는 다시 의자를 돌려 등을 보인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간첩과 접선 용의자이고, 강민우 팀의 요원이 살해한 폭력배 조직의 일원이다. 어쩌면 조직폭력배로 가장하여 침투해 있는 요원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환경이다.
한동안 대책을 구상하던 강민우는 정리하려던 수첩을 펴 들었다. 그리고 남경식 일당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일어선다. 문경환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사무실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폭력배 조직원으로 침투해 있는 요원이 걱정되어 변사체가 발견된 청량리로 가볼 생각이다. 그는 문경환에게 다가가서 작성하고 있는 일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대충해.”
“그래도 작성해서 제출해야 되잖아요.”
“대충하고, 점심 식사 어떻게 할 거지?”
“팀장님은요?”
“나가서 먹자.”
“넵.”
점심시간이 되어 석관동을 빠져 나온 지프차는 청량리를 향해 질주한다. 번화가에 나온 강민우가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려선다. 그리고 말없이 앞서서 걸어간다. 강민우를 따라 차에서 내려 문경환도 강민우의 뒤를 따라간다. 오래된 옛날 가옥같은 중국음식점 앞에서 강민우가 멈추어 선다. 그리고 중국집 상호가 새겨진 손때 뭍은 붉은 천을 들고 들어간다. 음식점 내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한구석의 탁자 앞의 의자에 앉는 강민우를 마주하고 문경환도 앉는다.
“자장면 좋아하나?”
“네.”
문경환의 대답도 나오기 전에 강민우가 주방을 향해 ‘할머니!’하고 부른다. 앞머리가 유난히 하얀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애구! 강 서방 왔어!’라고 한다. 강민우는 싱긋이 웃으며 자장면을 달라고 한다. 강민우는 딸을 주겠다고 하던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기다릴 사이도 없이 자장면이 탁자위에 오른다. 문경환은 말없이 자장면을 먹기 시작하는 강민우를 흘깃 바라본다. 그리고 배가 고팠기에 허겁지겁 자장면을 먹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마치 자장면 빨리 먹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젓가락을 놓은 강민우는 신입요원에게 음식을 얻어먹는 것이 불명예라도 되는 것처럼 자장면 값을 치루고 음식점을 나온다. 문경환은 빨리 식사를 하는 것이 안기부 요원들의 습성이려니 생각한다. 강민우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전투에 나가는 군인처럼 지프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건다.
지프차가 다시 거리를 질주해 나간다. 조수석에 앉은 문경환은 우뚝 솟은 건물들과 도로를 지나치는 차량들을 둘러본다. 문경환은 강민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문경환의 시선이 간판들을 일일이 살피고 신축 건물의 인부들을 놓치지 않고 주시한다. 강민우가 문경환의 행동을 곁눈질한다.
“뭘 그렇게 살펴? 여차하면 창밖으로 나가겠네.”
“처음 보는 광경이 많아서요.”
“서울 지리는 익혀 두는 게 편하지.”
“그런데 팀장님! 빈 책상의 주인을 말씀하다가 말았잖아요?”
“아.......! 예를 하나 들지. 아까 통화하는 소리 들었지?”
“네.”
“청량리 변사체는 조폭이고, 우리 팀 요원이 조폭으로 침투해 있지. 그런 요원들이 대부분 책상의 주인들이라는 말이야. 이해하겠어?”
“아~!”
“왜, 변사체를 신원미상으로 처리하는지 알아?”
“간첩과 관련된 용의자이기도 하지만, 우리 요원의 신변을 보호하고 간첩은 실종되어도 찾아 나설 가족이 없기 때문 아닌가요?”
“앞으로는 묻지 말고, 자신의 판단을 믿어.”
“명심하겠습니다.”
도로를 질주해온 지프차가 어느덧 청량리 역 주변에 도착했다. 지프차가 이차선 도로에서 갓길로 접어들면서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상인, 그리고 건물 앞에 큼지막한 쓰레기통과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어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갓길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는 골목이었다. 지프차를 운전하고 있는 강민우는 몇 번이고 브레이크를 밟곤 하면서 주위를 살핀다.
“운전할 줄 아나!?”
“네.”
“아니 그냥 걸어가지.”
“..........!?”
지프차에서 내린 강민우는 좌측으로 나뭇가지처럼 뚫린 골목으로 향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불편한 좁은 골목이어서 지프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다. 강민우는 이제까지 들어왔던 길을 떠올리며 각 골목의 구조를 생각한다. 골목이 우측으로 비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까지 들어온 골목과는 반대 방향이다.-------
“넌 누구야!? 죽기 싫으면 꺼져!”
“........”
협박하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없이 다가서는 남자. 청년은 알지 못할 위압감을 느낀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멀리서 추격해오는 경찰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청년이 강민우를 향해 나이프를 휘두른다. 강민우는 흠칫 하며 뒤로 물러선다. 의기 당당해진 청년이 다시 나이프를 휘두르며 소리친다.
“다치기 전에 꺼지라니까!”
“........”
청년이 돌진하면서 강민우의 가슴을 향해 나이프를 찌른다. 강민우는 몸을 뒤로 젖혀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든 청년의 손을 밑으로 당기고 윈 손으로는 팔꿈치를 힘껏 들어 올리니 자연스레 상대의 팔이 꺾였다. 강민우가 팔이 꺾인 청년을 밀어 던졌다. 우당탕하고 쓰레기통을 들이받고 넘어진 청년의 입가에 피가 흐른다. 입가에 흐른 피를 손으로 무지른 청년은 독이 올라 혼잣말을 흘리며 거침없이 강민우에게 나이프를 휘두른다.
“이런 씨발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
청년의 나이프가 강민우의 허리와 어깨를 향해 마구 휘둘러진다. 그러나 정작 쓰러진 것은 청년이었다. 몇 차례 청년의 나이프를 피하던 강민우가 청년의 턱과 목덜미를 타격하였다. 청년은 고꾸라지듯이 걸음을 옮기다가 땅바닥에 널브러진다. 강민우는 쓰러진 청년의 멱살을 낚아챈다.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권총을 뽑아들더니 안전장치를 푼다. 청년의 입속으로 총구를 디밀어 넣는다. 시커먼 총구를 입속에 물은 청년은 기가 꺾이며 겁을 한다.
“너, 어느 조직에 있어?”
“커 컥~! 난. 조직 같은 거 몰라.”
“남경식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아.......아 니.”
“남기춘이라고도 하지.”
“아아, 아니........우우.......”
강민우는 남경식에 관한 이름들을 하나씩 청년에게 묻는다. 총구를 입에 문 청년은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우우~!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강민우는 범죄자들을 색출하다 보면 남경식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골목 안으로부터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고 조병문 경감을 비롯한 형사들이 뛰어 나온다.
골목을 뛰어나온 조 경감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춘다. 누구인가 쓰러트린 범인을 일으켜 세워 다그치고 있었다. 강력반 형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강민우가 범인의 멱살을 풀고 일어선다. 청년은 재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침을 뱉는다. 조반장이 강민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거 민우 아냐?”
“아! 병문이구나!”
“안기부에서도 강력범죄 다루나?”
“흠.......! 다른 업무로 잠복 중이다가.”
“하여튼 오래간만이고, 고맙네,”
조병문 경감은 어린 시절부터 강민우의 절친한 친구였다. 대학은 다르지만 같이 청와대 경호요원으로 근무도 했었다. 강민우는 중앙정보부로 옮기고 조병문은 경찰에 남아서 강력반 형사가 된 것이다. 그들은 악수를 하며 서로의 등을 두들긴다. 형사들이 강민우에게서 인계받은 범인에게 수갑을 채운다. 범인은 연쇄적으로 여자 혼자 사는 여자 집으로 들어가 강제 추행을 하던 자이고, 조 반장과 강력반 형사들이 오랫동안 추적을 하고 있었다.
강력반 형사들은 범인을 데리고 시경으로 들어가고 조 반장과 강민우는 해장국 집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그들은 해장국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나온 얘기를 나눈다. 조 경감은 강민우의 안기부 생활이 궁금한지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하는 경찰생활을 하소연한다. 그리고 강민우에게 다시 묻는다.
“그런데 범인을 알고 뒤쫓은 거야?”
“아니, 부근에 잠복근무하다가. 우연히.”
강민우는 우연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스크랩했던 자료들을 보고 범인의 규칙적인 행적과 범행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그가 범죄자들을 색출하는 것은 국내에 잠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남경식 조직 일당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국내에 머물고 있다면 반듯이 폭력배나 범죄 조직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추측에서였다. 조 경감이 넌지시 물었다.
“아직 독신이냐?”
“그렇지 뭐. 너는?”
“작년에 결혼했어. 그런데 아내 볼 면복이 없어. 집에도 잘 못 들어가고.”
“범인 잡으러 다니는 경찰 생활 힘들겠지. 언젠가, 지방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좌천당했던 거야. 광주사태 일어나던 해의 안국동 사건 알아?”
“알지. 야권인사 3명이나 사망한 사건인데.”
“그 사건 때문이었어. 내가 맡았던 사건인데, 며칠 가지 않아서 수사 종결하라는 상부지시와 함께 나는 지방으로 발령 받았어. 억울해서 아직도 그 사건에 미련을 두고 있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이제는 힘들잖아."
“아니, 그 사건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어.”
“음모가.........!?”
“음, 언젠가는 내손으로 꼭 밝히고 말거야.”
조병문 경감의 표정에는 강인한 의지가 드러나 보였다. 처리해야할 업무들이 많다고 하며 조 경감이 먼저 일어섰다. 해장국집을 나온 강민우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대로변에 세워놓은 지프차에 오른다.
강민우가 개인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이 있다. 안기부 전산실장 최재인과 그의 내연녀 남규리이다. 그는 몇 번인가 최재인과 남규리를 미행했지만, 도무지 그들의 밀회장소를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그들 앞에 신분을 들어 낼 수는 없기에 더욱 힘든 일이다. 강민우는 지프차의 시동을 걸고 액셀 페달을 밟는다.
시내를 벗어나서 안개가 깔린 왕릉의 입구였다. 지프차를 몰고 가던 강민우는 접근금지구역 표지가 걸린 두 갈래 길에서 멈추어 선다. 양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죽은 경종 임금이 안장된 왕릉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 가 지키는 역사적인 문화유산과 정부의 안보를 지키는 안기부 건물이 공존한다. 어쩌면 역사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과 새로운 정치문화의 극과 극을 번복하거나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모두 미래에 되돌아 봐야할 시간의 지표이다.
강민우는 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인공 연못으로 걸어가 크게 숨을 들이킨다. 고향에서 느끼던 맑은 공기가 코 속으로 스며든다. 격투자세를 취하고 힘껏 주먹을 앞으로 내뻗는다. 청량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 갈 것만 같다. 연못가에 세워진 돌 위에 중심을 잡은 강민우는 빠르게 돌려차기를 한다. 잔잔한 연못의 수면위에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그가 할일은 어디에서 멈추어 질지도 모르지만 행보는 정해져 있다.
강민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오직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청산이다. 그는 마치 발레리나처럼 땅에 발끝을 세우고 허공으로 발을 힘껏 뻗는다. 소나무 끝을 향해 높게 뻗은 발로 하늘을 떠받는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걷어 들인다. 그리고 되돌아 나와 지프차에 오른다. 지프차를 몰고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 안기부 내의 주차장 안에 세운다.
서늘한 느낌을 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숫자 표지만 걸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표정 변화 없이 기계적인 걸음을 옮기다가 달력 앞에 선다. 달력에는 영화배우 오수비가 선정적인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 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나!" 하고 혼잣말을 흘린 강민우가 달력을 뜯어낸다. 그리고 책상과 의자 여섯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사무실을 둘러본다.
지난주에 NTIS의 조직을 재개편하고 강민우의 팀에게 주어진 사무실이다. 강민우는 양쪽으로 놓인 여섯 개의 책상 사이를 지나 마주보이는 책상의 의자에 가서 앉는다. 책상마다 위에는 서류철과 잡지나 신문 그리고 메모지들만 올려져 있고 요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팀으로 업무를 부여 받거나, 특별한 호출 외에는 각자 임무를 수행중이기 때문이다.
강민우는 책상위에 다리를 얹어놓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출입구 문이 덜컹 열리고 스포츠머리를 문경환이 들어온다. 문경환은 신입으로 안기부에 들어온 요원이다. 강원도 출신으로 유도로 단련한 육군수사기관 출신이다. 강민우를 발견한 문경환이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고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한다. 그를 바라보며 강민우가 웃음을 흘린다.
"이 친구 , 오늘도 일찍 왔구먼. 아홉시까지 와도 된다고 했잖아. 시간이 아직 멀었구먼."
"팀장님이 먼저 오셨네요."
"부지런하다고 월급 더 안줘."
"......."
강민우는 의자를 당겨 바로 앉으며 책상위에 쌓인 서류들을 뒤적인다. 서류 내용을 한 번씩 훑어보고 아직 수행중인 작전 서류들을 한 곳으로 모은다. 그리고 개인적인 정보들을 별도로 수첩에 메모한다. 끝 쪽의 책상 앞에 앉았던 문경환이 강민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질문을 한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강민우는 문경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수첩을 정리하며 묻는다. 문경환이 강민우의 책상 앞으로 다가온다. 강민우는 정리하던 수첩을 덮고 책상에 턱을 고이며 문경환을 바라본다.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묻고 있으면서.......! 말해 봐."
"저기 빈 책상들, 주인이 있는 겁니까?"
"물론 있지."
"그럼 모두 휴가라도 갔습니까?"
"아하~!"
강민우는 그제야 자신이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다. 신입직원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해주어야할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일주일이 자나도록 책상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문경환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책상 주인들 중에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징계를 받은 직원들도 있었다.
"그건 말이야......."
“.........!”
강민우는 말을 길게 끌며 문경환의 표정을 살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빨리 대답을 듣고 싶은 눈빛이다. 지금은 몰라도 된다고 명령조로 말하면 해결되겠지만, 일주일간을 마주하였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같이 할 신입직원과 상하관계를 고정시키기는 싫었다.
"신입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기에 자네가 이해를......."
“..........!?”
그때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강민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문경환은 강민우의 대답에 집중해서 그런지 약간 놀라는 표정이다. 대답을 망설이던 강민우는 다행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벨이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던 강민우는 다행으로 생각할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책상에는 두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다.
강민우가 평소에 교환원을 통하거나 외부와 통화를 할 때는 검은 색 전화기를 사용한다. 먼지와 담배연기에 찌든 것처럼 회색전화기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상위직급과 직통 연결된 것이다. 강민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회색 전화의 수화기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다시 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의자를 돌려 문경환에게서 등을 진다.
“나, 권 차장이야.”
“네!”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권익수 차장은 해외안보 담당 책임자로서 강민우의 팀의 책임자는 아니었다. 강민우가 맡은 팀은 정보국 소속의 팀이었다. 정보국 소속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NTIS의 특수 업무를 담당하는 행동요원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강민우를 제압하려는 듯 자신을 밝힌 권 차장의 강압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고정간첩 색출 사건을 수행중이지?”
“네, 그렇습니다만.”
“청량리 변사체 사건과 관련되어 있지?”
“네.......!”
“변사체, 그냥 마무리해.”
“그렇지만.......”
“내말 안 들려? 그냥 마무리 하라고!”
“네, 알았습니다.”
지시대로 안하면 마치 당장이라도 총살이라도 할 것처럼 권 차장이 으름장을 놓는다. 언짢은 기분으로 강민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문경환은 강민우의 통화 내용이 궁금했다. 통화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으나 오히려 청각을 곤두세워 들으려 했다. 이맛살을 찌푸린 강민우는 바로 검은색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교환원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하듯이 말한다.
“청량리 경찰서장 연결해줘. 지금 바로!”
“.........!”
강민우의 굳은 표정을 보는 민경환은 말을 붙이기도 두려웠다. 민경환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강민우의 이렇게 굳은 표정을 본적이 없다. 평상시 말씨는 많지 않지만, 너그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이끌던 강민우였다. 문경환은 팀장인 강민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경찰 특공대 출신으로 중정을 거치는 동안 ‘스니퍼 강’ 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다시 전화벨 수리가 울린다. 이번에 울린 것은 검은색 전화였다. 잠시 부드러웠던 강민우의 눈매가 전화벨 소리에 날카롭게 변한다. 강민우는 재빨리 손을 뻗쳐 검은색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빠르게 말한다.
“석관동 정보실입니다.”
“정보실이라니요.......!?”
“석관동 안가도 모르시오? 설명할 시간 없고, 40대 남자변사체 수사 중이지요?”
“네........!”
“그 사건, 신원미상으로 종결해요!”
“네?”
“무슨 말인지 몰라요? 신원미상으로 종결하라고.”
“아.......! 그러나 어떻게!?”
“뭘 어떻게! 우리 쪽 요원도 다친 상태이니,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종결하라고요.”
“그렇지만, 어떤 방법으로........?”
“경찰 생활 얼마나 하셨는데, 방법까지 가르쳐 줘요? 그냥 속 편하게 간첩으로 해요. 우리도 그렇게 처리할 테니.”
“..........”
강민우는 상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경찰서장도 더는 고집 부릴 수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쉰 강민우는 다시 의자를 돌려 등을 보인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간첩과 접선 용의자이고, 강민우 팀의 요원이 살해한 폭력배 조직의 일원이다. 어쩌면 조직폭력배로 가장하여 침투해 있는 요원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환경이다.
한동안 대책을 구상하던 강민우는 정리하려던 수첩을 펴 들었다. 그리고 남경식 일당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일어선다. 문경환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사무실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폭력배 조직원으로 침투해 있는 요원이 걱정되어 변사체가 발견된 청량리로 가볼 생각이다. 그는 문경환에게 다가가서 작성하고 있는 일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대충해.”
“그래도 작성해서 제출해야 되잖아요.”
“대충하고, 점심 식사 어떻게 할 거지?”
“팀장님은요?”
“나가서 먹자.”
“넵.”
점심시간이 되어 석관동을 빠져 나온 지프차는 청량리를 향해 질주한다. 번화가에 나온 강민우가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려선다. 그리고 말없이 앞서서 걸어간다. 강민우를 따라 차에서 내려 문경환도 강민우의 뒤를 따라간다. 오래된 옛날 가옥같은 중국음식점 앞에서 강민우가 멈추어 선다. 그리고 중국집 상호가 새겨진 손때 뭍은 붉은 천을 들고 들어간다. 음식점 내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한구석의 탁자 앞의 의자에 앉는 강민우를 마주하고 문경환도 앉는다.
“자장면 좋아하나?”
“네.”
문경환의 대답도 나오기 전에 강민우가 주방을 향해 ‘할머니!’하고 부른다. 앞머리가 유난히 하얀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애구! 강 서방 왔어!’라고 한다. 강민우는 싱긋이 웃으며 자장면을 달라고 한다. 강민우는 딸을 주겠다고 하던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기다릴 사이도 없이 자장면이 탁자위에 오른다. 문경환은 말없이 자장면을 먹기 시작하는 강민우를 흘깃 바라본다. 그리고 배가 고팠기에 허겁지겁 자장면을 먹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마치 자장면 빨리 먹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젓가락을 놓은 강민우는 신입요원에게 음식을 얻어먹는 것이 불명예라도 되는 것처럼 자장면 값을 치루고 음식점을 나온다. 문경환은 빨리 식사를 하는 것이 안기부 요원들의 습성이려니 생각한다. 강민우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전투에 나가는 군인처럼 지프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건다.
지프차가 다시 거리를 질주해 나간다. 조수석에 앉은 문경환은 우뚝 솟은 건물들과 도로를 지나치는 차량들을 둘러본다. 문경환은 강민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문경환의 시선이 간판들을 일일이 살피고 신축 건물의 인부들을 놓치지 않고 주시한다. 강민우가 문경환의 행동을 곁눈질한다.
“뭘 그렇게 살펴? 여차하면 창밖으로 나가겠네.”
“처음 보는 광경이 많아서요.”
“서울 지리는 익혀 두는 게 편하지.”
“그런데 팀장님! 빈 책상의 주인을 말씀하다가 말았잖아요?”
“아.......! 예를 하나 들지. 아까 통화하는 소리 들었지?”
“네.”
“청량리 변사체는 조폭이고, 우리 팀 요원이 조폭으로 침투해 있지. 그런 요원들이 대부분 책상의 주인들이라는 말이야. 이해하겠어?”
“아~!”
“왜, 변사체를 신원미상으로 처리하는지 알아?”
“간첩과 관련된 용의자이기도 하지만, 우리 요원의 신변을 보호하고 간첩은 실종되어도 찾아 나설 가족이 없기 때문 아닌가요?”
“앞으로는 묻지 말고, 자신의 판단을 믿어.”
“명심하겠습니다.”
도로를 질주해온 지프차가 어느덧 청량리 역 주변에 도착했다. 지프차가 이차선 도로에서 갓길로 접어들면서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상인, 그리고 건물 앞에 큼지막한 쓰레기통과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어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갓길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는 골목이었다. 지프차를 운전하고 있는 강민우는 몇 번이고 브레이크를 밟곤 하면서 주위를 살핀다.
“운전할 줄 아나!?”
“네.”
“아니 그냥 걸어가지.”
“..........!?”
지프차에서 내린 강민우는 좌측으로 나뭇가지처럼 뚫린 골목으로 향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불편한 좁은 골목이어서 지프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다. 강민우는 이제까지 들어왔던 길을 떠올리며 각 골목의 구조를 생각한다. 골목이 우측으로 비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까지 들어온 골목과는 반대 방향이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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