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쇠씨 좀 바꿔주세요."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전화한 듯한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네, 제가 김무쇱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 치곤 너무 차분하다 싶어 흠짓 몸이 사려진다.
"혹시 나사랑씨랑 골프 친적 있습니까?"
"아뇨, 그런적 없는데요."
"저 나사랑씨 남편 됩니다만 어제 댁이랑 골프쳤다 그러더군요."
"글쎄요, 전 어제 라운딩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최무송이란 사람과는 어떤 사입니까?"
"무송이는 제 친굽니다."
"야, 이새끼야 너 왜 남의 마누라를 친구한테 넘기구 그래?" 참았던 감정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며 전화기를 통해 마구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일이다.
나사랑이가 골프치고 싶다고 졸라대는 통에 마침 무송이가 부킹됐다는 얘길 듣고 같이 라운딩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한 적이 있었을 뿐인데 웬 나팔이 이렇게 꽥꽥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나한테 신경질내구 지랄이야?" 나도 맞받아치며 상대방에게 성질을 냈다.
"야, 이놈의 새끼들아, 내 마누라가 니들 장난감이야 왜 돌리구 지랄들이야?"
"난 니네 마누라랑 골프는커녕 손가락 한번 건든적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 그럼 내 마누라를 왜 니놈 친구한테 넘겼어?"
"니가 쫀쫀하게 골프피를 안챙겨주나보지. 이놈 저놈에게 라운딩하자구 졸라대는데 난 니네 마누라 별루라서 골프 칠 생각도 없었단 말야. 친구놈이 약속 잡혔다길래 니놈 주머니 털 것 없이 공짜루 치라구 소개시켜준 죄밖에 없는데 지랄을 떨구 난리는 왜 치냐?"
"너, 말 함부로 하지마. 나 사업하는 놈인데 마누라 골프칠 돈은 아끼지 않는 놈이란 말야."
"그럼 니 마누라가 딴 맘 있어서 끈적거렸나본데 그건 니 탓이지 왜 전화질 하구 지랄이야?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끊어." 머리끝까지 성질이 부글부글 올라왔서 전화기를 내동댕이 치듯 내려놨다.
무송이 놈이 몸이 쭉 빠지고 얼굴이 곱상한게 여자가 꽤나 따르겠다 싶었었다.
한쪽에선 라운딩할 남자 찾아달라고 때쓰고 한쪽에선 부킹됐다고 짝지좀 챙겨달라길래 니들끼리 잘 놀아라 싶어서 소개시켜 준 죄 밖에 없다.
아침일찍 무송이 놈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어제 그 여자 끝내준다며 또 만나기로 했다고 침을 튀기며 한참 너스레를 떨었었다.
남자와 여자가 골프치며 만나는 것 까지 자랑으로 떠들 일인가 싶기까지 했었다.
라운딩 끝내고 기분 좋게 식사까지 했다는 얘길 들었을 뿐이다.
원하는 사람끼리 만나게 해 준게 뭔 잘못이라고 아침부터 성질 팍 오르게 양쪽에서 전화질인지 모르겠다 싶어 기분을 조금 잡치고 말았다.
"무송아,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니?" 나사랑씨 남편으로부터 불쾌한 전화를 받은 후 최무송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야, 그 여자 끝내주더라니까.
골프는 초짠데 매너 끝내주더라."
"그게 아니구 짜사, 그 여자 남편한테 항의 전화가 왔었단 말야. 어제 무슨일 있었지?"
"아니? 라운딩 끝나고 밥만 같이 먹곤 각자 헤어졌는데."
"새꺄, 그런데 남편이란 놈이 쌩 난리를 치냐? 빨리 불어봐."
"무쇠야, 그 여자가 뭔일 있었으면 남편한테 쉽게 불었겠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뭔일 있었으면 입을 봉했겠지.
나랑 라운딩한걸 술술 불었다면 아무일 없었던 걸루 짐작하면 될꺼야."
"이런 싱건놈, 니 놈이 저녁먹이는 바람에 바람이 들었는지 딴 짓거리한게 분명하군.
알았어 임마. 담부턴 니놈한테 여자 소개시켜주긴 텄다. 끊어!"
"사랑아, 너 최무송이랑 어제 뭔일 있었니?" 무송이란놈이 아무일도 없었다고 얘기하니 그렇게 믿는게 마음이 편한 것 같아 나사랑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응, 그사람 골프 잘치던데. 담에 또 라운딩 하기로 했어."
"야, 니 신랑이 전화질해서 나한테 엄청 화를 내던데 넌 그렇게 태평해도 되는거야?"
"그 인간이 또 전화했어?
어휴, 인간말종. 골프가 좋다며 등 떠다밀다 시피 하면서 라운딩하고 오면 맨날 그렇게 쌩난리를 친다니까.
난 하도 많이 당해봐서 그런일엔 무감각해졌어. 아무일도 아냐."
"니 신랑이 악바리를 쓰는데 라운딩한 무송이나 나는 뭔 꼴이냐? 제발 골프좀 끊어라."
"싫어, 얼마나 멋진 운동인데 그래?"
"너 때문에 심장떨어질 사람 많이 생기니까 걱정되서 그렇지."
"어휴, 걱정마. 맨날 그래. 자기 뒤가 쿠리니까 남도 그런지 알고 지랄하는거지 뭐."
"걱정도 안된다 말이지? 담부터 니 부킹은 나한테 말도 하지마."
나사랑이를 만난 것은 일년전 강원도의 어느 골프장에서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였지만 다부진 체격 때문인지 초짜냄새가 나면서도 자신감이 얼굴에 배어나오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망울이 맑은 것이 시원한 여장부 감이다 싶기도 했다. 라운딩하면서 우연히 몇번 마주쳤는데 인상이 깊게 남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가끔씩 안부 전화를 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쇼핑 때문에 시내에 나왔다며 어김없이 커피 마시자고 전화하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거리를 잠시 멈추고 사랑이를 만나곤 했다.
바람이 차게 부는 겨울날, 롱코드를 걸치고 우아하게 화장한 모습으로 사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만났지만 이대로 시간이 정지했음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자판기에서 커피 두잔을 뽑아 호호 불며 뜨거운 향기를 마셨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다 지쳐 하나둘씩 가지를 벗어나면서 늦가을을 걷는 발자국 위에 소복히 쌓일 때도 그녀는 왔었다. 말없이 자판기 커피만 한잔씩 훌훌 마시곤 헤어졌다.
빗물이 장대비되어 폭우가 오는가 싶은 날은 챙이 긴 검은 우산을 들고 왔었다. 그날을 너무 많이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사무실 앞 커피熾?들러 진한 향기를 맡으며 함께 있었다.
쇼파에 깊게 파뭍혀 울먹이듯 한 표정의 비장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말없이 사랑이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굳은 결심을 한 듯 한참을 멍하니 앞만 노려보다 다시 우산을 받쳐들고 빗속을 걸어나갔다.
봄이라 말하기 조금 이른 늦겨울날.
사무실 앞에 와 있다며 차 한잔 하자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옷깃을 여미며 밖을 나왔다.
작은 동산에는 힘겹게 겨울을 나는 생명들이 나뒹굴 듯 쌓여진 낙엽들 사이로 연한 새 꽃잎을 삐죽 내민 개나리를 보았다.
봄은 추운 겨울을 밀어내고라도 반드시 오고 만다는 작은 공감대에 서로 말없이 웃고 있었다.
단 한번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적이 없다.
힘들어 기대어 오는 머리결을 어깨로 바쳐주며 매만져 준 적도 없다.
숨을 학닥이며 깐치발로 뜨거운 입김을 내 얼굴에 뿜어 낼 때도 나는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의 몸짓을 비켜나갔다.
진저리쳐진다며 신랑을 험담할 때도 나는 맞장구치지 않고 조용히 그 넋두리를 송두리채 안아주었을 뿐이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힘겨울 때 불현 듯 나를 찾아와 자신의 독백을 말 없이 풀어놓고 뒷 모습만 아련히 남긴채 사라져갈 뿐이다.
이 사람을 위해 내가 준비할 것은 그냥 따뜻한 이웃이기만 하면 된다.
한때는 오빠같이. 한 때는 친구같이. 한때는 동생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내 안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된다.
퇴근무렵 나사랑으로부터 전화가 걸여왔다.
"나야, 시간있어?"
"없어. 너 무서워서 이젠 시간없어."
"사무실 앞으로 갈테니까 퇴근하면 나랑 잠시만 얘기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만원버스와 그 틈바구니를 삐집고 다니는 자가용과 또 그 사이를 횡횡하는 택시로 발 딛을 틈도 없이 혼잡해 지고 말았다.
상가의 네온사인이 열기를 뿜어내며 휘황찬란한 자태로 눈에 가득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빛들을 무시한 채 어두운 얼굴로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오빠, 나 죽고 싶어." 가슴에 안기며 흐느끼고 있었다.
"추운데 찻집에라도 들어가자." 그 녀를 끌어당기듯 가까운 찻집으로 데려갔다.
"그 인간 말야. 이혼하기로 했어."
"뭐? 어제 그일 때문에 이혼까지 한단말야?"
"아니, 몇 달째 그 인간 뒤를 캤거든."
"뒤를 왜 캐?"
"골프만 치고 오면 발광을 하잖아.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서 뒤를 캐라 했거든."
"그래서?"
"오늘 연락왔는데..."
"무슨?"
"그 인간은 골프만 끝나면 같이 라운딩한 여자랑 십구번홀을 돈데."
사랑이는 백여장이 넘는 사진을 내게 넘겨줬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모텔 앞에 뒷꽁무니가 찍힌 사진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진마다 여자가 달랐다.
"이 인간이 나두 자기랑 똑 같은줄 알고 쌩 난리를 친거라니까." 하며 울분을 토했다.
"네, 제가 김무쇱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 치곤 너무 차분하다 싶어 흠짓 몸이 사려진다.
"혹시 나사랑씨랑 골프 친적 있습니까?"
"아뇨, 그런적 없는데요."
"저 나사랑씨 남편 됩니다만 어제 댁이랑 골프쳤다 그러더군요."
"글쎄요, 전 어제 라운딩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최무송이란 사람과는 어떤 사입니까?"
"무송이는 제 친굽니다."
"야, 이새끼야 너 왜 남의 마누라를 친구한테 넘기구 그래?" 참았던 감정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며 전화기를 통해 마구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일이다.
나사랑이가 골프치고 싶다고 졸라대는 통에 마침 무송이가 부킹됐다는 얘길 듣고 같이 라운딩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한 적이 있었을 뿐인데 웬 나팔이 이렇게 꽥꽥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나한테 신경질내구 지랄이야?" 나도 맞받아치며 상대방에게 성질을 냈다.
"야, 이놈의 새끼들아, 내 마누라가 니들 장난감이야 왜 돌리구 지랄들이야?"
"난 니네 마누라랑 골프는커녕 손가락 한번 건든적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 그럼 내 마누라를 왜 니놈 친구한테 넘겼어?"
"니가 쫀쫀하게 골프피를 안챙겨주나보지. 이놈 저놈에게 라운딩하자구 졸라대는데 난 니네 마누라 별루라서 골프 칠 생각도 없었단 말야. 친구놈이 약속 잡혔다길래 니놈 주머니 털 것 없이 공짜루 치라구 소개시켜준 죄밖에 없는데 지랄을 떨구 난리는 왜 치냐?"
"너, 말 함부로 하지마. 나 사업하는 놈인데 마누라 골프칠 돈은 아끼지 않는 놈이란 말야."
"그럼 니 마누라가 딴 맘 있어서 끈적거렸나본데 그건 니 탓이지 왜 전화질 하구 지랄이야?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끊어." 머리끝까지 성질이 부글부글 올라왔서 전화기를 내동댕이 치듯 내려놨다.
무송이 놈이 몸이 쭉 빠지고 얼굴이 곱상한게 여자가 꽤나 따르겠다 싶었었다.
한쪽에선 라운딩할 남자 찾아달라고 때쓰고 한쪽에선 부킹됐다고 짝지좀 챙겨달라길래 니들끼리 잘 놀아라 싶어서 소개시켜 준 죄 밖에 없다.
아침일찍 무송이 놈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어제 그 여자 끝내준다며 또 만나기로 했다고 침을 튀기며 한참 너스레를 떨었었다.
남자와 여자가 골프치며 만나는 것 까지 자랑으로 떠들 일인가 싶기까지 했었다.
라운딩 끝내고 기분 좋게 식사까지 했다는 얘길 들었을 뿐이다.
원하는 사람끼리 만나게 해 준게 뭔 잘못이라고 아침부터 성질 팍 오르게 양쪽에서 전화질인지 모르겠다 싶어 기분을 조금 잡치고 말았다.
"무송아,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니?" 나사랑씨 남편으로부터 불쾌한 전화를 받은 후 최무송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야, 그 여자 끝내주더라니까.
골프는 초짠데 매너 끝내주더라."
"그게 아니구 짜사, 그 여자 남편한테 항의 전화가 왔었단 말야. 어제 무슨일 있었지?"
"아니? 라운딩 끝나고 밥만 같이 먹곤 각자 헤어졌는데."
"새꺄, 그런데 남편이란 놈이 쌩 난리를 치냐? 빨리 불어봐."
"무쇠야, 그 여자가 뭔일 있었으면 남편한테 쉽게 불었겠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뭔일 있었으면 입을 봉했겠지.
나랑 라운딩한걸 술술 불었다면 아무일 없었던 걸루 짐작하면 될꺼야."
"이런 싱건놈, 니 놈이 저녁먹이는 바람에 바람이 들었는지 딴 짓거리한게 분명하군.
알았어 임마. 담부턴 니놈한테 여자 소개시켜주긴 텄다. 끊어!"
"사랑아, 너 최무송이랑 어제 뭔일 있었니?" 무송이란놈이 아무일도 없었다고 얘기하니 그렇게 믿는게 마음이 편한 것 같아 나사랑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응, 그사람 골프 잘치던데. 담에 또 라운딩 하기로 했어."
"야, 니 신랑이 전화질해서 나한테 엄청 화를 내던데 넌 그렇게 태평해도 되는거야?"
"그 인간이 또 전화했어?
어휴, 인간말종. 골프가 좋다며 등 떠다밀다 시피 하면서 라운딩하고 오면 맨날 그렇게 쌩난리를 친다니까.
난 하도 많이 당해봐서 그런일엔 무감각해졌어. 아무일도 아냐."
"니 신랑이 악바리를 쓰는데 라운딩한 무송이나 나는 뭔 꼴이냐? 제발 골프좀 끊어라."
"싫어, 얼마나 멋진 운동인데 그래?"
"너 때문에 심장떨어질 사람 많이 생기니까 걱정되서 그렇지."
"어휴, 걱정마. 맨날 그래. 자기 뒤가 쿠리니까 남도 그런지 알고 지랄하는거지 뭐."
"걱정도 안된다 말이지? 담부터 니 부킹은 나한테 말도 하지마."
나사랑이를 만난 것은 일년전 강원도의 어느 골프장에서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였지만 다부진 체격 때문인지 초짜냄새가 나면서도 자신감이 얼굴에 배어나오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망울이 맑은 것이 시원한 여장부 감이다 싶기도 했다. 라운딩하면서 우연히 몇번 마주쳤는데 인상이 깊게 남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가끔씩 안부 전화를 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쇼핑 때문에 시내에 나왔다며 어김없이 커피 마시자고 전화하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거리를 잠시 멈추고 사랑이를 만나곤 했다.
바람이 차게 부는 겨울날, 롱코드를 걸치고 우아하게 화장한 모습으로 사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만났지만 이대로 시간이 정지했음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자판기에서 커피 두잔을 뽑아 호호 불며 뜨거운 향기를 마셨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다 지쳐 하나둘씩 가지를 벗어나면서 늦가을을 걷는 발자국 위에 소복히 쌓일 때도 그녀는 왔었다. 말없이 자판기 커피만 한잔씩 훌훌 마시곤 헤어졌다.
빗물이 장대비되어 폭우가 오는가 싶은 날은 챙이 긴 검은 우산을 들고 왔었다. 그날을 너무 많이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사무실 앞 커피熾?들러 진한 향기를 맡으며 함께 있었다.
쇼파에 깊게 파뭍혀 울먹이듯 한 표정의 비장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말없이 사랑이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굳은 결심을 한 듯 한참을 멍하니 앞만 노려보다 다시 우산을 받쳐들고 빗속을 걸어나갔다.
봄이라 말하기 조금 이른 늦겨울날.
사무실 앞에 와 있다며 차 한잔 하자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옷깃을 여미며 밖을 나왔다.
작은 동산에는 힘겹게 겨울을 나는 생명들이 나뒹굴 듯 쌓여진 낙엽들 사이로 연한 새 꽃잎을 삐죽 내민 개나리를 보았다.
봄은 추운 겨울을 밀어내고라도 반드시 오고 만다는 작은 공감대에 서로 말없이 웃고 있었다.
단 한번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적이 없다.
힘들어 기대어 오는 머리결을 어깨로 바쳐주며 매만져 준 적도 없다.
숨을 학닥이며 깐치발로 뜨거운 입김을 내 얼굴에 뿜어 낼 때도 나는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의 몸짓을 비켜나갔다.
진저리쳐진다며 신랑을 험담할 때도 나는 맞장구치지 않고 조용히 그 넋두리를 송두리채 안아주었을 뿐이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힘겨울 때 불현 듯 나를 찾아와 자신의 독백을 말 없이 풀어놓고 뒷 모습만 아련히 남긴채 사라져갈 뿐이다.
이 사람을 위해 내가 준비할 것은 그냥 따뜻한 이웃이기만 하면 된다.
한때는 오빠같이. 한 때는 친구같이. 한때는 동생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내 안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된다.
퇴근무렵 나사랑으로부터 전화가 걸여왔다.
"나야, 시간있어?"
"없어. 너 무서워서 이젠 시간없어."
"사무실 앞으로 갈테니까 퇴근하면 나랑 잠시만 얘기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만원버스와 그 틈바구니를 삐집고 다니는 자가용과 또 그 사이를 횡횡하는 택시로 발 딛을 틈도 없이 혼잡해 지고 말았다.
상가의 네온사인이 열기를 뿜어내며 휘황찬란한 자태로 눈에 가득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빛들을 무시한 채 어두운 얼굴로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오빠, 나 죽고 싶어." 가슴에 안기며 흐느끼고 있었다.
"추운데 찻집에라도 들어가자." 그 녀를 끌어당기듯 가까운 찻집으로 데려갔다.
"그 인간 말야. 이혼하기로 했어."
"뭐? 어제 그일 때문에 이혼까지 한단말야?"
"아니, 몇 달째 그 인간 뒤를 캤거든."
"뒤를 왜 캐?"
"골프만 치고 오면 발광을 하잖아.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서 뒤를 캐라 했거든."
"그래서?"
"오늘 연락왔는데..."
"무슨?"
"그 인간은 골프만 끝나면 같이 라운딩한 여자랑 십구번홀을 돈데."
사랑이는 백여장이 넘는 사진을 내게 넘겨줬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모텔 앞에 뒷꽁무니가 찍힌 사진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진마다 여자가 달랐다.
"이 인간이 나두 자기랑 똑 같은줄 알고 쌩 난리를 친거라니까." 하며 울분을 토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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