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얼마를 잤는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는지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다.
누나가 피곤한지 내 옆에서 작게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귀여워 보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밖에 되지 않았다.
일찍 잔 것도 아닌데.. 새벽에 잠을 설치면서 깨서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어젯밤 누나가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이제 곧 나도 고3 이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은 ‘목탁소리 없는 절’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가족들이 수험생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살아야 했고, 부모들도 같이 수험생이 되어서 뒷바라지를 했었다.
‘3당4락’이니 ‘4당5락’이니 하는 이야기가 공부하는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들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수포,영포는 대포(수학포기,영어포기는 대학포기)다’고 부르짖는 선생들의 진학율 경쟁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바로 얼마 후면 나에 앞에 지옥과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실감 나지 않지만.. 현실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가 내게 여자를 멀리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나가 경희랑 헤어지라고 한 말에는 자신도 내게서 멀어지겠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처럼 내겐 느껴졌다.
자기나 경희 때문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내 느낌에는 경희와 누나, 두 사람 모두와 떨어져서는 난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새삼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난 자고 있는 누나의 옆에 다시 누웠다.
그리고, 물끄러미 누나를 쳐다 봤다.
누나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니.. 난 그 순간 누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난 누나의 맨 살의 감촉을 느끼며 애기 마냥 누나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다시 잠이 들었다.
겨울방학 동안에 우리 집과 내 주변에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났다.
있는 듯 마는 듯 늘 집에 잠만 자러 오던 골방누나가 몇 달째 집에 들어 오지 않더니, 어느 날 이상한 사람들이랑 와서는 자기의 짐을 빼서는 잘 있으라고 하곤 사라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누나는 ‘여호와의 증인’에 빠지면서 그렇게 이상해 졌다고 했다.
그리고, 공장도 자주 빠지다가 결국 공장도 그만두고 그 이상한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매형과 이혼 후에 매형의 친척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몰라도, 조카의 양육권이 모두 매형의 친척에게 넘어 갔다고 했다.
얼마 동안 누나는 상심을 해서는 많이 아파서 며칠을 출근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급하게 오셔서 병구완 하고, 누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이야기를 들을라 치면 어른들 일이라고 들을 필요 없다고 말하시곤 나를 몰아내셔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경희는 퇴원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친척집으로 갔다.
친척집을 가기 전날, 누나가 경희를 불러서는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누나는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희가 친척집을 가고 난 뒤 누나는 생각보다 얘가 귀엽다며 많이 누그러진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명희는 여전히 그 집에 남아있었다.
부모님의 일은 점점 잘 되어가시는 것 같았다.
잘 되어 가실수록 집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많이 줄어 들었다.
물론 집에 오실 시간도 없으셨다.
누나가 심하게 아플 때 어쩔 수 없이 한번 오셔서는 이틀인가를 계시다가 다시 OO시로 돌아가셨다.
1월 중순경부터 누나는 야간근무를 시작하면서 주간에 내도록 잠만 자고, 오후 느즈막히 일어나서는 출근을 했다.
한 달을 야간근무조로 편성이 되었다고 했다.
누나가 야간 근무 시작한다고 하던 그 전날 밤 나는 미친 듯이 누나와 정사를 나누었다.
방학 동안에 누나와 마지막으로 같이 밤을 보낸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휴일 날은 같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는 허망했다.
그리고, 기르던 개중에서 내가 가장 귀여워하던 녀석이 죽었다.
멍청하게도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저녁 대신 먹고는 밤새 괴로워하다가 죽은 거였다.
아침에 개밥을 주려고 그 녀석의 집 앞에 갔다가 혀를 빼고 죽어있던 그 녀석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겨울방학 막바지 즈음… 내 단짝 친구 한 녀석이 뺑소니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우울한 겨울 방학이 끝날 즈음..
경희가 친척집에서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 왔다.
한달 정도 못 본 사이에 젖 살이 많이 빠지고, 이젠 완연하게 여성스러움이 몸에 드러났다.
돌아 오자마자 오랜만에 우리는 OO대를 놀러 갔다.
같이 놀러 갔던 날은 오랜만에 날씨가 풀려서 그리 춥지가 않았다.
“마셔..”
난 커피를 뽑아서는 경희에게 내밀었다.
경희는 그때 한참 유행하던 마술 털장갑을 낀 채 커피잔을 받았다.
나는 경희 옆에 앉아서 친척집에서의 일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경희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여전히 말은 내가 다 해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주위를 한번씩 둘러 보고는 사라졌다.
나는 계속 추운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서 OO대학 정문을 나와 길 건너에 있던 우동집으로 갔다.
방학 중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난 경희랑 우동을 시켜서는 먹고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지를 결정했다.
“나.. 영화 보고 싶어”
“영화?... 무슨 영화?”
“더티댄싱”
“그거 미성년자 관람불가 아냐?”
내 기억으로는 더티댄싱이 첨 개봉한 것은 늦가을 정도로 기억이 된다.
몇 개월이 지난 영화가 개봉관에서는 개봉하지 않았다.
나와 경희는 OO대학 근처 소극장에서 다른 영화랑 동시 개봉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곳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극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자랑 영화를 봤다.
경희는 영화 보는 내내 ‘패트릭 스웨이지’ 에 빠져서는 헤어나올 줄 몰랐다.
“오빠..너무 멋있지 않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려니 하고 의연한 척 했지만, 영화에서 페트릭 스웨이지는 내가 봐도 너무 멋있는 놈이었다.
영화에서 이상 야릇한 분위기의 장면이 나오면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동시개봉 영화는 프랑스 경찰 코믹물인 ‘마이뉴파트너’ 였다. (내심 에로물을 기대했지만…)
그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고, 그냥 킥킥거리고 웃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던 영화였다.
그런데 경희는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까지 흘려대면서 혼자 웃는 통에 주변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을뻔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경희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면서 웃다가, 페트릭 스웨이지 이야기만 나오면 황홀해 하고…
“너무 재밌었어 오빠.. 그리고 페트릭 스웨이지 너무 멋있어..응~ 나도 그런 멋진 남자 만나면 좋겠다.”
그녀는 옆에 있던 나의 질투 촉진을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쪽을 향해 몸을 누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잠시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우리는 집으로 돌아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마을 버스를 갈아 타는 곳까지 도착했다.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정류장 한 모퉁이에서 귀에 익은 하지만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 좋네”
내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기도 전에 나의 뇌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내 등에서는 식은 땀이 좍 흘렀다.
명희였다.
“언니..”
경희가 언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명희의 시선이 나와 경희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날렸다.
“넌 오자마자 어딜 이렇게 싸돌아 다니는 거야?”
“응..오빠랑 영화 보고 왔어.”
경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명희가 날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오빠 좋아하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언니!”
명희가 날카롭게 툭 쏘아대자, 경희가 언니의 손을 잡고는 왜 그러냐면서 명희에게 짜증을 냈다.
명희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분위기로 어정쩡하게 나는 경희랑 거리를 두고 서서는 내심 침착 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곧 마을 버스가 왔다.
내가 타고, 경희가 타고는 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명희는 내 앞 좌석에 앉아서는 경희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경희가 명희의 옆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버스는 덜컹거리면서 동네를 향해 갔고, 경희는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지 힐끗힐끗 뒤돌아 보면서 입을 벙긋벙긋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그녀를 향해 웃어 주었다.
명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 내려서도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경희를 재촉해서 저만큼 앞서서 자기 집으로 올라 갔다.
나는 텅 빈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유난히 조용한 집에 들어서자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는 며칠 후 개학 하면 가져갈 책이랑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 놓았다.
그리고, 헤드폰을 꺼내서는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었다.
쿠션에 누워 머리 속을 뒤 흔드는 잉베이의 폭주하는 기타소리와 그의 가늘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 방문이 갑자기 열릴 때까지 나는 집에 누가 들어 온지도 몰랐다.
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명희가 서 있었다.
“??”
명희는 날 보고는 예의 그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었구나?”
“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명희는 그냥 내 방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방안에 앉아서 깔아 놓은 이불 속으로 다리를 쭉 펴고는 기지개를 켜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나는 헤드폰을 목에 걸고 그녀를 쳐다 봤다.
내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냥 방안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 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놓여진 내 LP판 진열장을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나 보네.. 이런 걸 모을 여력도 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혹시라도??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이 내가 자기 동생이랑 관계를 가진 것을 우리 어머니에게 협박을 해서 돈이라도 뜯어 내려는 것인가 하고..
그녀는 LP진열장을 한 번 훑어 보고는 내게 말을 던졌다.
“메탈 판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걸 보니... 메탈 무지 좋아하는 모양이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 하지 않고 방안을 돌아 다니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턴테이블에 걸려있던 판이 끝나면서 바늘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헤드폰을 내려 놓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내 책상을 둘러 보다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다는 듯 엘빈 토플러의 책을 들고는 내게 흔들면서 비웃듯이 말했다.
“이런 책을 다 보고..호홋.. 재밌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책이며, 이런저런 책들을 한 권씩 꺼내서는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고는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내 책장에서 ‘독일인의 사랑’ 이란 작은 책을 꺼내 들고 내 앞에 앉아서는 한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내 죽은 친구의 유품이었다.
친구녀석이 내게 생일 선물로 준 그 책은, 한참 경희와 누나와의 관계에 빠져 있을 때 몇 번인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방 여기저기를 건드리는 그녀의 모습을 그냥 바라 봤다.
그녀는 책을 몇 페이진가 읽다가 고개를 들더니 내게 말했다.
“음악 좀 틀어봐. 좋은 걸 루..”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몸은 LP장 앞에서 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판을 집어 들고는 턴테이블에 걸고는 헤드폰을 뺐다.
“어쭈 마일즈 데이비스네? 그래도 분위기는 잡을 줄 아는데?”
그녀는 첫 음악이 나오자 마자 책을 읽다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녀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를 알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있는 여자인지는 몰랐다.
조금은 놀라웠지만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가 궁금했다.
“무슨 일로 온 거죠?”
힘들게 내가 말을 꺼냈다.
“그냥 놀러 온 거야.. 어떻게 사나 싶어서 볼려구..”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 말에 대꾸를 하고는 읽던 책을 들고는 내게 말했다.
“너 이거 다 읽은 거야?”
“에?.. 예.. 예전에..”
“그럼 나한테 빌려 주라. 읽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네.”
“아.. 그건 안 되는데..”
다른 책이라면 몰라도.. 그 책은 누구에게도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책을 보면서 감동 했던 그 느낌도 그렇지만, 친구 녀석이 남긴 유품인데.. 그걸 그 여자에게 빌려주긴 더더욱 싫었다.
명희의 눈이 가자미 눈을 하고는 나를 보았다.
“남자가 쫀쫀하게 책 하나 빌려 달라는데 그것도 싫다고 하고..”
“그게 아니라.. 그 책은 좀 이유가 있어서요.”
“왜? 애인한테 선물 받은 거야?.. 아.. 너 애인이 경희지? 그럼 이 책..경희가 선물해 준 거겠네?”
혼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 지껄여 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말을 했다.
“아뇨..사실 그건 제 친구가 남기고 간 유품입니다.”
“유품?”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가 준 유일한 선물이라서..”
순간 그 녀석의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왠지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듯 아려왔다.
말을 잠시 하지 않고 그 책을 보던 명희는 책 표지 안에 적혀진 친구의 생일 축하 글씨를 보고는 책을 덮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책을 책상 위에 살짝 던져놓는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온 거예요?”
내가 아무래도 불안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렇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니?”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 말은 내가 믿어도 당신 말은 못 믿을꺼야..’
속에서 반항적인 생각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또 이상야릇한 미소를 보내면서 내게 물었다.
“왜? 내가 온 게 불안하니?”
“아..아뇨.. 불안하진 않은데.. 그냥 이상해서..”
그 말에 그냥 코웃음을 치고는 피곤한 듯 기지개를 쫙 폈다.
“야.. 여기서 나 자고 가도 돼?”
“??”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왜 여기서 ?”
그녀는 뒤로 몸을 쭉 펴고 누우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 경희 년이랑 한바탕 했거든.. 그 년 우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내가 나와버렸는데.. 마침 너네 집이 여기라 … 그냥 와 본거야.”
“왜..?”
그녀가 누워서 눈을 감은 채 나오는 음악에 몸을 살랑거리며 말했다.
“왜 싸웠냐고?.. 그럴 일이 있어.”
참.. 뻔뻔스런 여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내 방에서 나가란 이야기는 내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혼자서 흥얼거리면서 음악을 듣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 담배 가진 거 있니? ..아.. 담배 안 피운다고 했지? 너 돈 있으면 내려가서 담배 하나 사오면 안될까? 난 지금 빈털터리 거든..”
그러면서 자기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이상한 여자다.. 정말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나였다.
“올 때 시원한 콜라도 하나 사다 줘~”
마당을 내려가는 나의 뒤통수에 그녀의 말이 박혔다.
담배가게의 나이 든 할아버지가 내가 머뭇거리면서 담배를 달라고 하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봤다.
그리고, 슈퍼에서 군것질할 때 먹던 과자 한 봉지랑 콜라를 사서는 집으로 돌아 왔다.
여전히 그녀는 내 방 한가운데 누워서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자 담배를 찾아서는 성냥으로 불을 댕겼다.
내 방에 담배 냄새가 음악을 따라 흔들렸다.
담배 연기를 일부러 내 쪽으로 뿜기도 하면서 그녀는 날 농락하고 있었다.
순간 ‘그냥 덮쳐서..’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전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난 방 구석에서 그녀의 몸이 닿지 않게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너 경희랑 많이 친하지?”
그녀가 또 경희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번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갔었니?”
“예.. 한번이요.”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병인지 알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뇨? 무슨.. 안 좋은 병인가요?”
내가 궁금증을 보이며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실실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말 해줄까 말까?”
내가 궁금하다고 달려 들면 분명히 계속 날 가지고 놀 것 같았다.
그냥 궁금한걸 참기로 했다.
경희도 내게 별거 아니라고 했고.. 게다가 지금 건강한데.. 뭐 그까짓 것..몰라도 된다!
내가 가만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날 한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경희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은 일 초가 일 분처럼.. 일 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느덧 밤이 늦어가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누워 있었고, 나는 LP판이 끝나면 뒤집어 올려 놓기를 반복 할 뿐..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고 졸린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내 방 한가운데 누워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명희를 보았다.
‘정말 여기서 잠을 자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내버려 두고는 안방으로 와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리고, 경희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얼핏 잠이 들어갈 무렵이었다.
경희의 얼굴이 포근히 나를 감싸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촉촉하게 나의 몸을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사실 같은 느낌에 몽롱했다.
잠에 취해서 눈은 뜨지 못한 채 그 몽롱하면서도 짜릿한 느낌에 황홀감을 느꼈다.
경희가 나의 몸을 미친 듯이 더듬어댔다.
그리고, 내 몸의 구석구석을 더듬어가던 손길이 마침내 나의 솟아난 기둥에 닿았다.
부드러운 전율 같은 느낌이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경희가 나의 성기에 입을 대고는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서서히 나의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그만..그만..”
나는 소리를 치며 그녀를 막았지만, 그녀는 나의 성기를 먹어 치우고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고.. 순간 몸이 허둥대면서 얼핏 들었던 잠이 깨고 말았다.
잠은 깼지만 여전히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내 몸이 둥둥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몸에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깼어?”
“??”
어디선가 소근거리는 명희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다.
소리가 들리는 내 발 쪽을 향해 졸리는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녀가 내 아래에서 나의 성기를 잡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하는 졸리움에 눈이 반쯤 감긴 채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 나의 성기로 입을 가져 갔다.
그녀의 혀가 나의 기둥 끝을 휘감으며 자극을 해 왔다.
아찔한 느낌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잠이 달아나면서 나는 몸을 후다닥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내 그곳을 물고는 놓아 주지 않았다.
“아.. 아파요”
네가 고통을 호소하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가 그제서야 내 기둥을 입에서 빼주었다.
그리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내 몸 위로 다시 올라 와서는 내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는 내 런닝셔츠를 위로 들추며 벗기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거부하면서 손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내 손에 그녀의 알몸이 닿았다.
난 그제서야 그녀가 옷을 다 벗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만.. 왜 자꾸..”
그녀는 내가 밀어내자 내 다리에 자신의 가슴을 비벼대면서 말했다.
“넌 이런 게 안 좋아? 난 좋던데..”
달빛이 교교하게 창문 사이로 비쳐 들어 왔다.
어느새 내 한쪽 허벅지에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비비면서 다가온 그녀가 서서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손톱으로 살짝 긁으면서 말했다
“내 몸을 원하지 않아?”
하지만.. 나의 몸은 전혀 반응이 없다.
그리고 예전 나를 바보로 만든 멍청한 아랫도리가 이번에는 반응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 허벅지에 자신의 다리 사이를 절묘하게 문지르면서 내 가슴을 손톱으로 긁으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정말 난감해 졌다.
순간 머리 속이 복잡하게 돌아 갔다.
그녀가 내게서 뭘 원하는지.. 왜 이러는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 없이 내 머리 속은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혼자서 생각하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이번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어둠 속에서 그녀의 요사스런 웃음이 번져왔다.
그리고, 그녀가 머뭇거리는 나를 천천히 밀어 눕혔다.
조금 있으면 그녀는 내 몸 위에서 환락의 춤을 추리라.
잠시 후면 나의 몸은 그녀가 일으키는 쾌락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리라.
깊은 심연 같은 그녀의 몸을 벗어나면 허무한 섹스의 기억만을 가지게 되리라.
그리고..
내 시야에 그녀의 유혹의 몸짓이 느껴지는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다음 편에 계속>
얼마를 잤는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는지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다.
누나가 피곤한지 내 옆에서 작게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귀여워 보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밖에 되지 않았다.
일찍 잔 것도 아닌데.. 새벽에 잠을 설치면서 깨서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어젯밤 누나가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이제 곧 나도 고3 이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은 ‘목탁소리 없는 절’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가족들이 수험생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살아야 했고, 부모들도 같이 수험생이 되어서 뒷바라지를 했었다.
‘3당4락’이니 ‘4당5락’이니 하는 이야기가 공부하는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들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수포,영포는 대포(수학포기,영어포기는 대학포기)다’고 부르짖는 선생들의 진학율 경쟁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바로 얼마 후면 나에 앞에 지옥과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실감 나지 않지만.. 현실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가 내게 여자를 멀리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나가 경희랑 헤어지라고 한 말에는 자신도 내게서 멀어지겠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처럼 내겐 느껴졌다.
자기나 경희 때문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내 느낌에는 경희와 누나, 두 사람 모두와 떨어져서는 난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새삼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난 자고 있는 누나의 옆에 다시 누웠다.
그리고, 물끄러미 누나를 쳐다 봤다.
누나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니.. 난 그 순간 누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난 누나의 맨 살의 감촉을 느끼며 애기 마냥 누나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다시 잠이 들었다.
겨울방학 동안에 우리 집과 내 주변에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났다.
있는 듯 마는 듯 늘 집에 잠만 자러 오던 골방누나가 몇 달째 집에 들어 오지 않더니, 어느 날 이상한 사람들이랑 와서는 자기의 짐을 빼서는 잘 있으라고 하곤 사라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누나는 ‘여호와의 증인’에 빠지면서 그렇게 이상해 졌다고 했다.
그리고, 공장도 자주 빠지다가 결국 공장도 그만두고 그 이상한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매형과 이혼 후에 매형의 친척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몰라도, 조카의 양육권이 모두 매형의 친척에게 넘어 갔다고 했다.
얼마 동안 누나는 상심을 해서는 많이 아파서 며칠을 출근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급하게 오셔서 병구완 하고, 누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이야기를 들을라 치면 어른들 일이라고 들을 필요 없다고 말하시곤 나를 몰아내셔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경희는 퇴원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친척집으로 갔다.
친척집을 가기 전날, 누나가 경희를 불러서는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누나는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희가 친척집을 가고 난 뒤 누나는 생각보다 얘가 귀엽다며 많이 누그러진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명희는 여전히 그 집에 남아있었다.
부모님의 일은 점점 잘 되어가시는 것 같았다.
잘 되어 가실수록 집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많이 줄어 들었다.
물론 집에 오실 시간도 없으셨다.
누나가 심하게 아플 때 어쩔 수 없이 한번 오셔서는 이틀인가를 계시다가 다시 OO시로 돌아가셨다.
1월 중순경부터 누나는 야간근무를 시작하면서 주간에 내도록 잠만 자고, 오후 느즈막히 일어나서는 출근을 했다.
한 달을 야간근무조로 편성이 되었다고 했다.
누나가 야간 근무 시작한다고 하던 그 전날 밤 나는 미친 듯이 누나와 정사를 나누었다.
방학 동안에 누나와 마지막으로 같이 밤을 보낸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휴일 날은 같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는 허망했다.
그리고, 기르던 개중에서 내가 가장 귀여워하던 녀석이 죽었다.
멍청하게도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저녁 대신 먹고는 밤새 괴로워하다가 죽은 거였다.
아침에 개밥을 주려고 그 녀석의 집 앞에 갔다가 혀를 빼고 죽어있던 그 녀석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겨울방학 막바지 즈음… 내 단짝 친구 한 녀석이 뺑소니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우울한 겨울 방학이 끝날 즈음..
경희가 친척집에서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 왔다.
한달 정도 못 본 사이에 젖 살이 많이 빠지고, 이젠 완연하게 여성스러움이 몸에 드러났다.
돌아 오자마자 오랜만에 우리는 OO대를 놀러 갔다.
같이 놀러 갔던 날은 오랜만에 날씨가 풀려서 그리 춥지가 않았다.
“마셔..”
난 커피를 뽑아서는 경희에게 내밀었다.
경희는 그때 한참 유행하던 마술 털장갑을 낀 채 커피잔을 받았다.
나는 경희 옆에 앉아서 친척집에서의 일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경희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여전히 말은 내가 다 해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주위를 한번씩 둘러 보고는 사라졌다.
나는 계속 추운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서 OO대학 정문을 나와 길 건너에 있던 우동집으로 갔다.
방학 중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난 경희랑 우동을 시켜서는 먹고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지를 결정했다.
“나.. 영화 보고 싶어”
“영화?... 무슨 영화?”
“더티댄싱”
“그거 미성년자 관람불가 아냐?”
내 기억으로는 더티댄싱이 첨 개봉한 것은 늦가을 정도로 기억이 된다.
몇 개월이 지난 영화가 개봉관에서는 개봉하지 않았다.
나와 경희는 OO대학 근처 소극장에서 다른 영화랑 동시 개봉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곳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극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자랑 영화를 봤다.
경희는 영화 보는 내내 ‘패트릭 스웨이지’ 에 빠져서는 헤어나올 줄 몰랐다.
“오빠..너무 멋있지 않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려니 하고 의연한 척 했지만, 영화에서 페트릭 스웨이지는 내가 봐도 너무 멋있는 놈이었다.
영화에서 이상 야릇한 분위기의 장면이 나오면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동시개봉 영화는 프랑스 경찰 코믹물인 ‘마이뉴파트너’ 였다. (내심 에로물을 기대했지만…)
그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고, 그냥 킥킥거리고 웃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던 영화였다.
그런데 경희는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까지 흘려대면서 혼자 웃는 통에 주변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을뻔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경희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면서 웃다가, 페트릭 스웨이지 이야기만 나오면 황홀해 하고…
“너무 재밌었어 오빠.. 그리고 페트릭 스웨이지 너무 멋있어..응~ 나도 그런 멋진 남자 만나면 좋겠다.”
그녀는 옆에 있던 나의 질투 촉진을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쪽을 향해 몸을 누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잠시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우리는 집으로 돌아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마을 버스를 갈아 타는 곳까지 도착했다.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정류장 한 모퉁이에서 귀에 익은 하지만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 좋네”
내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기도 전에 나의 뇌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내 등에서는 식은 땀이 좍 흘렀다.
명희였다.
“언니..”
경희가 언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명희의 시선이 나와 경희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날렸다.
“넌 오자마자 어딜 이렇게 싸돌아 다니는 거야?”
“응..오빠랑 영화 보고 왔어.”
경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명희가 날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오빠 좋아하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언니!”
명희가 날카롭게 툭 쏘아대자, 경희가 언니의 손을 잡고는 왜 그러냐면서 명희에게 짜증을 냈다.
명희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분위기로 어정쩡하게 나는 경희랑 거리를 두고 서서는 내심 침착 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곧 마을 버스가 왔다.
내가 타고, 경희가 타고는 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명희는 내 앞 좌석에 앉아서는 경희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경희가 명희의 옆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버스는 덜컹거리면서 동네를 향해 갔고, 경희는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지 힐끗힐끗 뒤돌아 보면서 입을 벙긋벙긋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그녀를 향해 웃어 주었다.
명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 내려서도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경희를 재촉해서 저만큼 앞서서 자기 집으로 올라 갔다.
나는 텅 빈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유난히 조용한 집에 들어서자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는 며칠 후 개학 하면 가져갈 책이랑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 놓았다.
그리고, 헤드폰을 꺼내서는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었다.
쿠션에 누워 머리 속을 뒤 흔드는 잉베이의 폭주하는 기타소리와 그의 가늘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 방문이 갑자기 열릴 때까지 나는 집에 누가 들어 온지도 몰랐다.
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명희가 서 있었다.
“??”
명희는 날 보고는 예의 그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었구나?”
“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명희는 그냥 내 방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방안에 앉아서 깔아 놓은 이불 속으로 다리를 쭉 펴고는 기지개를 켜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나는 헤드폰을 목에 걸고 그녀를 쳐다 봤다.
내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냥 방안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 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놓여진 내 LP판 진열장을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나 보네.. 이런 걸 모을 여력도 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혹시라도??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이 내가 자기 동생이랑 관계를 가진 것을 우리 어머니에게 협박을 해서 돈이라도 뜯어 내려는 것인가 하고..
그녀는 LP진열장을 한 번 훑어 보고는 내게 말을 던졌다.
“메탈 판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걸 보니... 메탈 무지 좋아하는 모양이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 하지 않고 방안을 돌아 다니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턴테이블에 걸려있던 판이 끝나면서 바늘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헤드폰을 내려 놓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내 책상을 둘러 보다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다는 듯 엘빈 토플러의 책을 들고는 내게 흔들면서 비웃듯이 말했다.
“이런 책을 다 보고..호홋.. 재밌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책이며, 이런저런 책들을 한 권씩 꺼내서는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고는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내 책장에서 ‘독일인의 사랑’ 이란 작은 책을 꺼내 들고 내 앞에 앉아서는 한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내 죽은 친구의 유품이었다.
친구녀석이 내게 생일 선물로 준 그 책은, 한참 경희와 누나와의 관계에 빠져 있을 때 몇 번인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방 여기저기를 건드리는 그녀의 모습을 그냥 바라 봤다.
그녀는 책을 몇 페이진가 읽다가 고개를 들더니 내게 말했다.
“음악 좀 틀어봐. 좋은 걸 루..”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몸은 LP장 앞에서 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판을 집어 들고는 턴테이블에 걸고는 헤드폰을 뺐다.
“어쭈 마일즈 데이비스네? 그래도 분위기는 잡을 줄 아는데?”
그녀는 첫 음악이 나오자 마자 책을 읽다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녀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를 알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있는 여자인지는 몰랐다.
조금은 놀라웠지만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가 궁금했다.
“무슨 일로 온 거죠?”
힘들게 내가 말을 꺼냈다.
“그냥 놀러 온 거야.. 어떻게 사나 싶어서 볼려구..”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 말에 대꾸를 하고는 읽던 책을 들고는 내게 말했다.
“너 이거 다 읽은 거야?”
“에?.. 예.. 예전에..”
“그럼 나한테 빌려 주라. 읽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네.”
“아.. 그건 안 되는데..”
다른 책이라면 몰라도.. 그 책은 누구에게도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책을 보면서 감동 했던 그 느낌도 그렇지만, 친구 녀석이 남긴 유품인데.. 그걸 그 여자에게 빌려주긴 더더욱 싫었다.
명희의 눈이 가자미 눈을 하고는 나를 보았다.
“남자가 쫀쫀하게 책 하나 빌려 달라는데 그것도 싫다고 하고..”
“그게 아니라.. 그 책은 좀 이유가 있어서요.”
“왜? 애인한테 선물 받은 거야?.. 아.. 너 애인이 경희지? 그럼 이 책..경희가 선물해 준 거겠네?”
혼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 지껄여 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말을 했다.
“아뇨..사실 그건 제 친구가 남기고 간 유품입니다.”
“유품?”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가 준 유일한 선물이라서..”
순간 그 녀석의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왠지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듯 아려왔다.
말을 잠시 하지 않고 그 책을 보던 명희는 책 표지 안에 적혀진 친구의 생일 축하 글씨를 보고는 책을 덮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책을 책상 위에 살짝 던져놓는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온 거예요?”
내가 아무래도 불안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렇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니?”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 말은 내가 믿어도 당신 말은 못 믿을꺼야..’
속에서 반항적인 생각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또 이상야릇한 미소를 보내면서 내게 물었다.
“왜? 내가 온 게 불안하니?”
“아..아뇨.. 불안하진 않은데.. 그냥 이상해서..”
그 말에 그냥 코웃음을 치고는 피곤한 듯 기지개를 쫙 폈다.
“야.. 여기서 나 자고 가도 돼?”
“??”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왜 여기서 ?”
그녀는 뒤로 몸을 쭉 펴고 누우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 경희 년이랑 한바탕 했거든.. 그 년 우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내가 나와버렸는데.. 마침 너네 집이 여기라 … 그냥 와 본거야.”
“왜..?”
그녀가 누워서 눈을 감은 채 나오는 음악에 몸을 살랑거리며 말했다.
“왜 싸웠냐고?.. 그럴 일이 있어.”
참.. 뻔뻔스런 여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내 방에서 나가란 이야기는 내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혼자서 흥얼거리면서 음악을 듣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 담배 가진 거 있니? ..아.. 담배 안 피운다고 했지? 너 돈 있으면 내려가서 담배 하나 사오면 안될까? 난 지금 빈털터리 거든..”
그러면서 자기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이상한 여자다.. 정말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나였다.
“올 때 시원한 콜라도 하나 사다 줘~”
마당을 내려가는 나의 뒤통수에 그녀의 말이 박혔다.
담배가게의 나이 든 할아버지가 내가 머뭇거리면서 담배를 달라고 하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봤다.
그리고, 슈퍼에서 군것질할 때 먹던 과자 한 봉지랑 콜라를 사서는 집으로 돌아 왔다.
여전히 그녀는 내 방 한가운데 누워서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자 담배를 찾아서는 성냥으로 불을 댕겼다.
내 방에 담배 냄새가 음악을 따라 흔들렸다.
담배 연기를 일부러 내 쪽으로 뿜기도 하면서 그녀는 날 농락하고 있었다.
순간 ‘그냥 덮쳐서..’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전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난 방 구석에서 그녀의 몸이 닿지 않게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너 경희랑 많이 친하지?”
그녀가 또 경희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번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갔었니?”
“예.. 한번이요.”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병인지 알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뇨? 무슨.. 안 좋은 병인가요?”
내가 궁금증을 보이며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실실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말 해줄까 말까?”
내가 궁금하다고 달려 들면 분명히 계속 날 가지고 놀 것 같았다.
그냥 궁금한걸 참기로 했다.
경희도 내게 별거 아니라고 했고.. 게다가 지금 건강한데.. 뭐 그까짓 것..몰라도 된다!
내가 가만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날 한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경희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은 일 초가 일 분처럼.. 일 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느덧 밤이 늦어가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누워 있었고, 나는 LP판이 끝나면 뒤집어 올려 놓기를 반복 할 뿐..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고 졸린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내 방 한가운데 누워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명희를 보았다.
‘정말 여기서 잠을 자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내버려 두고는 안방으로 와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리고, 경희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얼핏 잠이 들어갈 무렵이었다.
경희의 얼굴이 포근히 나를 감싸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촉촉하게 나의 몸을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사실 같은 느낌에 몽롱했다.
잠에 취해서 눈은 뜨지 못한 채 그 몽롱하면서도 짜릿한 느낌에 황홀감을 느꼈다.
경희가 나의 몸을 미친 듯이 더듬어댔다.
그리고, 내 몸의 구석구석을 더듬어가던 손길이 마침내 나의 솟아난 기둥에 닿았다.
부드러운 전율 같은 느낌이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경희가 나의 성기에 입을 대고는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서서히 나의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그만..그만..”
나는 소리를 치며 그녀를 막았지만, 그녀는 나의 성기를 먹어 치우고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고.. 순간 몸이 허둥대면서 얼핏 들었던 잠이 깨고 말았다.
잠은 깼지만 여전히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내 몸이 둥둥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몸에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깼어?”
“??”
어디선가 소근거리는 명희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다.
소리가 들리는 내 발 쪽을 향해 졸리는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녀가 내 아래에서 나의 성기를 잡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하는 졸리움에 눈이 반쯤 감긴 채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 나의 성기로 입을 가져 갔다.
그녀의 혀가 나의 기둥 끝을 휘감으며 자극을 해 왔다.
아찔한 느낌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잠이 달아나면서 나는 몸을 후다닥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내 그곳을 물고는 놓아 주지 않았다.
“아.. 아파요”
네가 고통을 호소하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가 그제서야 내 기둥을 입에서 빼주었다.
그리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내 몸 위로 다시 올라 와서는 내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는 내 런닝셔츠를 위로 들추며 벗기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거부하면서 손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내 손에 그녀의 알몸이 닿았다.
난 그제서야 그녀가 옷을 다 벗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만.. 왜 자꾸..”
그녀는 내가 밀어내자 내 다리에 자신의 가슴을 비벼대면서 말했다.
“넌 이런 게 안 좋아? 난 좋던데..”
달빛이 교교하게 창문 사이로 비쳐 들어 왔다.
어느새 내 한쪽 허벅지에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비비면서 다가온 그녀가 서서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손톱으로 살짝 긁으면서 말했다
“내 몸을 원하지 않아?”
하지만.. 나의 몸은 전혀 반응이 없다.
그리고 예전 나를 바보로 만든 멍청한 아랫도리가 이번에는 반응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 허벅지에 자신의 다리 사이를 절묘하게 문지르면서 내 가슴을 손톱으로 긁으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정말 난감해 졌다.
순간 머리 속이 복잡하게 돌아 갔다.
그녀가 내게서 뭘 원하는지.. 왜 이러는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 없이 내 머리 속은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혼자서 생각하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이번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어둠 속에서 그녀의 요사스런 웃음이 번져왔다.
그리고, 그녀가 머뭇거리는 나를 천천히 밀어 눕혔다.
조금 있으면 그녀는 내 몸 위에서 환락의 춤을 추리라.
잠시 후면 나의 몸은 그녀가 일으키는 쾌락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리라.
깊은 심연 같은 그녀의 몸을 벗어나면 허무한 섹스의 기억만을 가지게 되리라.
그리고..
내 시야에 그녀의 유혹의 몸짓이 느껴지는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다음 편에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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