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더 현식이와 혜진이가 사랑을 나누고 서로 알몸을 껴안은 채 잠이 든다.
그 동안 현식이는 혼자서 사는 게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아서
편하고 좋았지만, 잠자리에 혼자 드는 것만큼은 싫었다.
침대 속이 아무리 따뜻해도 웬지 썰렁하고 그 순간만큼은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그런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혜진이의 알몸을 껴안고, 그 체온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드니
그렇게 포근하고 좋을 수가 없다.
꿈 한번 꾸지 않고 달콤하게 잠을 잔 모양이다.
어느 순간 품속이 허전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눈을 뜨니, 창 밖엔 어스름한 빛이
어려져 있고 혜진이는 침대 속에 없다.
상체를 일으켜 실내를 둘러 보니, 혜진이가 싱크대 앞에서 무언가 음식 같은 걸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혜진이.. 벌써 일어났어?”
혜진이가 하던 것을 멈추고 현식이를 돌아다 본다.
“응.. 아빠. 일어났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일어난 거야?”
“여섯시 반이 조금 넘었을 거야..”
“근데.. 너 지금 뭐하니?”
“음.. 어제 먹었던 쇠고기 국을 한번 더 만들려고..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두 번 먹을 양을 샀거든..”
현식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속옷을 입고 침대를 정리한 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두 팔을 벌리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다.
어제, 오늘 사이에 혜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을 느낀다.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다시 실내로 들어온다.
작년까지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담배부터 피워 물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식전과 잠들기
바로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한다.
혜진이가 싱크대 앞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오늘 아침은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
진 것 같고 한동안 잃어버렸던 가정의 아늑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동안 미선이와 헤어지지 못해 안달을 하다가, 드디어 이십년 만에 이혼을 하고
앞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서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멋있는 연애도 하면서 살리라 다짐을 했는데..
그 미선이가 낳은 내 딸이 아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모녀간이 이렇게 극과 극일 수가 있는가?
엄마는 자신이 젊었을 때 한번의 실수로 인해 사랑보다는 책임감으로 결혼을 하게 됐고,
내가 도망치려고 했던 그 여자가 낳은 딸은 일편단심으로 아빠인 자신을 따르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됐다.
세상살이란게 아무리 각본 없는 드라마라지만, 이렇게 흘러갈 수가 있는가?
“아빠.. 안 씻고 서서 뭐해?”
거실의 한 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현식을 보고 혜진이가
한마디한다.
“네가 천사 같아서 잠시 너에게 취했나 보다..”
“피이~ 아빠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줄 알아?”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이든 아니든 천사라는 이야길 들으니 기분은 좋네..”
혜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암! 천사지 천사고 말고.. 나에게 혜진이 너는 천사야..
혜진이 등뒤로 가서 혜진이를 가만히 껴안는다.
혜진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현식의 입을 찾는다.
현식이가 혜진이의 입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는 포옹을 풀고 욕실로 들어간다.
오늘 아침은 완전히 신혼 기분이다.
내일 모레면 나이가 오십 줄인데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되나?
욕실에서 세면을 하고 나오니 식탁에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다.
“아빠! 식사 해..”
“그래.. 우리 혜진이가 차린 밥을 먹어 볼까?”
혜진이와 같이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한다.
어제 저녁에도 먹어 봤지만 쇠고기 국의 국물 맛이 담백한 게 식욕이 절로 일어난다.
“우리 혜진인 재주도 많아..”
“뭐가?”
혜진이가 식사를 하다 말고 궁금하다는 듯이 현식이를 쳐다본다.
“혜진이는 공부도 잘하지.. 음식솜씨 좋지.. 마음도 착하지..
무엇 하나 나무랄 게 없는데.. 아빠가 너무 분에 넘친 복을 받는 것 같다.”
“그럼.. 앞으로 나한테 잘해줘.. 사랑도 많이 해주고..”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식사가 끝나고, 혜진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현식이는 진공청소기로 바닥을 청소한다.
이젠 내 딸이 아니라 완전히 마누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도 오십이 다 된 중년의 남편한테 갓 스물하나가 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나이의 신부다.
바닥청소를 끝내고 나니, 혜진이가 커피 두 잔을 타서 소파로 가서 앉는다.
“아빠! 여기 와서 커피 마셔..”
“그래.. 우리 혜진이가 타 주는 커피 한번 마셔볼까?”
현식이가 소파로 와서 앉는다.
“우리 혜진이라고 하지말고 내 색씨라고 하면 안돼?”
현식이가 커피잔을 들면서 혜진이에게 말한다.
“정말 내 색씨가 되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당연하지! 아빠는 앞으로 영원히 내 서방님이야..”
“앞으로 세월이 흘러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혜진이는 한참 나이일 텐데..
그때가 되면 혜진이를 사랑해주고 싶어도 안아줄 수도 없고.. 어떡하나?”
“관계없어.. 내가 지금 아빠를 사랑하는 게 꼭 육체적인 접촉때문만은 아니야..
그리고, 외국배우를 보면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이십대 여자랑 살던데 뭘..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빠랑 삼십년 차이도 나지 않잖아?”
“글쎄다…”
같이 아파트를 나선다.
“혜진이 넌 학교로 바로 갈 거야?”
“그럴려고 해..”
“내가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버스타고 가면 돼..”
“그리고, 너 용돈..”
현식이가 지갑을 꺼내 십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서 혜진이에게 준다.
“이렇게 많이 줘?”
“어제 너 음식 장만하느라고 있는 돈 다 썼다며?”
“그래도 이 돈은 많은데..”
“그냥 넣어두고 필요할 때 써.. 돈 떨어지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고..”
현식이가 차를 몰고 혜진이를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고 회사로 출근한다.
현식이는 회사에서 퇴근하기 전 미주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네! 강 미주입니다.
“저.. 김 현식입니다.”
-아.. 김 사장님. 웬일로 저에게 전화를 다 주시고..
“모레가 일요일인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식사를 했으면 하고요..”
-저야 좋지요..
“그럼 모레 열 두시 경에 미주씨 가게 앞으로 갈게요.”
-그렇게 해요. 그 시간에 맞춰 나갈게요.
“그럼 모레 뵙기로 하죠.”
그리고는 전화를 끊는다.
미주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이젠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서 이다.
더 이상 미주를 만나서 관계를 가지는 것은 혜진이에게 죄를 짓는 셈이니..
또, 미주씨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자고 있는데, 잠결에 전화벨이 울린다.
잠이 조금 덜 깬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나 응접탁자에 있는 전화기로 가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빠! 나 혜진이..
“아침 일찍 웬일이야?”
-시간이 몇 신데? 지금 일어난 거야?
“그래.. 네 전화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보자.. 벌써 열시가 넘었네?”
-나.. 지금 아빠한테 가려고..
“안 되겠는데? 아빠 오늘 누구 만날 약속이 있어.”
-누구랑 만나는데? 혹시.. 전에 그 아줌마 아냐?
녀석.. 예감 하난 기가 막히네..
“그래.. 그 아줌마와 만나기로 했다.”
-아빠…
혜진이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다.
“혜진아! 네가 걱정 안 해도 돼.. 설마 아빠가 너를 두고 그 여자랑 데이트하려고 만나겠니?
아무래도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서..”
-정말이지?
갑자기 혜진이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그럼.. 인석아. 너 속고만 살았니?”
-알았어.. 그럼 잘하고 와.”
세면을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는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다가 열 한시 반경에 아파트를 나선다.
차를 몰고 미주씨의 가게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열 한시 오십분이 된다.
아직 미주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 십분 정도 기다리고 있으니, 가게에서 미주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여 클락션을 울리니 차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미주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탄다.
자기와 만난다고 그랬는지 꽤 신경을 쓴 것 같다.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올림머리를 하고, 하얀 원피스에 검은 털코트를 입은 모습이
원숙한 중년부인의 티가 물씬 난다.
향수를 뿌렸는지 은은한 향기가 차 안에 가득찬다.
잠시 미주와 혜진이를 비교해 본다.
미주는 자신과 같은 세대라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할 것이고 육체관계를 갖더라도
마음이 편할 수가 있다.
같이 다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무난할 것이고..
하지만, 미주 역시 임자가 있는 몸이라 같이 만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고
내 반려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혜진이는 원천적으로 근친이란 굴레에 갇혀 세상 사람들이 정한 윤리에 어긋나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아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는 아이 이고..
누구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혜진이 이다.
육체관계를 가지더라도 자신에게는 너무 분에 넘친다는 생각을 한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현식이를 보고 미주가 겸연쩍은 듯 말한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그제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현식이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한다.
“오늘 미주씨가 너무 멋있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좋게 봐 주시니까 그렇죠.”
“오늘도 미리 가게에 나왔던 모양이죠?”
“예.. 조금 일찍 나와서 어제 정리 못했던 것들을 좀 치우고 하느라고..”
“어디로 갈까요?”
“현식씨가 알아서 가세요.”
“그럼..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가요.. 여기서 가깝고 해수욕장 주변에 횟집이 괜찮던데요..”
“그렇게 해요..
한동안 바빴던 모양이죠? 요즘 저희 가게에 들리시는 게 뜸하시고..”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어느덧 차가 다대포 해수욕장 입구로 들어선다.
전에 한번씩 와본 횟집 앞에 차를 세운다.
같이 차에서 내리니 미주가 현식이 옆에서 팔짱을 낀다.
두 번 육체관계를 가지고 나서인지 팔짱을 끼는 걸 어색해 하지 않고 상당히 자연스럽게
행동을 한다.
무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팔짱을 낀 채로 횟집 안으로 들어간다.
횟집 주인여자가 아는 채를 한다.
“김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층에 자리 있지요?”
“예! 이층으로 올라가세요.”
이층으로 올라가서 바다를 접한 쪽의 방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주인여자가 따라와서 주문을 받는다.
“여기 광어하고 우럭을 섞어서 주고 술은 매취순으로 줘요.”
창 밖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많이 나르고 있다. 고기떼들이 지나가고 있는지..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배들이 한가하게 수평선을 거닌다.
잠시 창 밖을 내다보던 현식이가 미주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기 전망 좋지요?”
“아주 좋네요.. 가슴이 다 트이는 것 같아요.”
“요즘 하시는 장사는 어때요?”
“전보다는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전보다 마음을 좀 편히 가져서 그런가 봐요. 안달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세상 일이 다 그렇지요. 조급히 생각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요..
어려워도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일이 잘될 수도 있고요..
힘들고 지치게 보이는 사람보다는 편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더 따르는
이치하고 같은 거지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주문했던 회와 술이 나오고, 현식이가 미주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 몇잔 마셔도 되겠지요?”
“두 세잔 정도는.. 현식씨는 차 때문에 술 마셔도 괜찮겠어요?”
“나중에 봐서 안되면 대리운전 부르면 돼요.”
미주가 현식이에게 술병을 받아 들고 현식이의 잔에 술을 따른다.
“자.. 미주씨. 건배합시다.”
“그래요..”
“미주씨의 가게번창을 위해..”
“현식씨의 건강을 위해..”
같이 잔을 들고 한잔씩 비운다.
미주는 ‘우리의 사랑을 위해’라고 건배하고 싶었지만, 너무 노골적인 것 같고
속이 보이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건배를 하지 못한다.
현식이가 술 석 잔을 연속해서 마신다.
미주가 그런 현식이를 바라보다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어본다.
“김 사장님.. 무슨 일이 있어요? 그렇게 급히 술을 드시고..”
“사실은 오늘 미주씨에게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런데.. 입이 잘 안 떨어지네요?”
입이 안 떨어질 정도의 말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인가?
미주가 좀 떨리는 음성으로 현식이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시길래?”
“저.. 사실은..”
현식이가 술을 한잔 더 마시고 말을 잇는다.
“사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아무래도 미주씨에게 말을 해야겠기에..”
“그러..셨어요?”
미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그 동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식이가 자신의 마음속 깊이 들어 와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남편이 있고, 홀몸이 된 현식이의 반려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식이의 그 말이 천둥소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다.
미주가 술잔을 들고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술잔을 비운다.
“미주씨에게 그 동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미주씨를 사랑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제약이 따르네요..”
“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현식씨와 저와의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나 봐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 동안 미주씨와의 관계가 제 진심이었으니..”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현식씨가 사랑한다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어떻게 내 딸이라고 말하겠는가?
현식이가 비어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마신다.
“그냥.. 너무 사랑스런 여자예요.. 그 여자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여자이고요..”
“어쨌든 축하 드려요. 좋은 분이 생겼다는 거..”
“그렇다고 해서 저와 미주씨의 사이가 완전히 끝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좋은 친구로써.. 단골 술 손님으로써.. 그렇게 지내면 안될까요?”
“그건.. 제가 부탁드릴 말인데요?”
“그럼.. 앞으로 제가 한번씩 미주씨의 가게에 찾아가더라도 예전처럼 그렇게 대해주면
고맙겠어요.”
미주는 몇 잔을 계속해서 마신 술로 인해 많이 취하는 것 같다.
아니.. 현식이의 고백으로 인해 더 취하는 것인지..
자신과 현식이와의 사이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식이의 입에서 애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그 동안 현식이는 혼자서 사는 게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아서
편하고 좋았지만, 잠자리에 혼자 드는 것만큼은 싫었다.
침대 속이 아무리 따뜻해도 웬지 썰렁하고 그 순간만큼은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그런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혜진이의 알몸을 껴안고, 그 체온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드니
그렇게 포근하고 좋을 수가 없다.
꿈 한번 꾸지 않고 달콤하게 잠을 잔 모양이다.
어느 순간 품속이 허전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눈을 뜨니, 창 밖엔 어스름한 빛이
어려져 있고 혜진이는 침대 속에 없다.
상체를 일으켜 실내를 둘러 보니, 혜진이가 싱크대 앞에서 무언가 음식 같은 걸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혜진이.. 벌써 일어났어?”
혜진이가 하던 것을 멈추고 현식이를 돌아다 본다.
“응.. 아빠. 일어났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일어난 거야?”
“여섯시 반이 조금 넘었을 거야..”
“근데.. 너 지금 뭐하니?”
“음.. 어제 먹었던 쇠고기 국을 한번 더 만들려고..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두 번 먹을 양을 샀거든..”
현식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속옷을 입고 침대를 정리한 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두 팔을 벌리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다.
어제, 오늘 사이에 혜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을 느낀다.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다시 실내로 들어온다.
작년까지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담배부터 피워 물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식전과 잠들기
바로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한다.
혜진이가 싱크대 앞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오늘 아침은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
진 것 같고 한동안 잃어버렸던 가정의 아늑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동안 미선이와 헤어지지 못해 안달을 하다가, 드디어 이십년 만에 이혼을 하고
앞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서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멋있는 연애도 하면서 살리라 다짐을 했는데..
그 미선이가 낳은 내 딸이 아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모녀간이 이렇게 극과 극일 수가 있는가?
엄마는 자신이 젊었을 때 한번의 실수로 인해 사랑보다는 책임감으로 결혼을 하게 됐고,
내가 도망치려고 했던 그 여자가 낳은 딸은 일편단심으로 아빠인 자신을 따르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됐다.
세상살이란게 아무리 각본 없는 드라마라지만, 이렇게 흘러갈 수가 있는가?
“아빠.. 안 씻고 서서 뭐해?”
거실의 한 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현식을 보고 혜진이가
한마디한다.
“네가 천사 같아서 잠시 너에게 취했나 보다..”
“피이~ 아빠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줄 알아?”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이든 아니든 천사라는 이야길 들으니 기분은 좋네..”
혜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암! 천사지 천사고 말고.. 나에게 혜진이 너는 천사야..
혜진이 등뒤로 가서 혜진이를 가만히 껴안는다.
혜진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현식의 입을 찾는다.
현식이가 혜진이의 입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는 포옹을 풀고 욕실로 들어간다.
오늘 아침은 완전히 신혼 기분이다.
내일 모레면 나이가 오십 줄인데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되나?
욕실에서 세면을 하고 나오니 식탁에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다.
“아빠! 식사 해..”
“그래.. 우리 혜진이가 차린 밥을 먹어 볼까?”
혜진이와 같이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한다.
어제 저녁에도 먹어 봤지만 쇠고기 국의 국물 맛이 담백한 게 식욕이 절로 일어난다.
“우리 혜진인 재주도 많아..”
“뭐가?”
혜진이가 식사를 하다 말고 궁금하다는 듯이 현식이를 쳐다본다.
“혜진이는 공부도 잘하지.. 음식솜씨 좋지.. 마음도 착하지..
무엇 하나 나무랄 게 없는데.. 아빠가 너무 분에 넘친 복을 받는 것 같다.”
“그럼.. 앞으로 나한테 잘해줘.. 사랑도 많이 해주고..”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식사가 끝나고, 혜진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현식이는 진공청소기로 바닥을 청소한다.
이젠 내 딸이 아니라 완전히 마누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도 오십이 다 된 중년의 남편한테 갓 스물하나가 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나이의 신부다.
바닥청소를 끝내고 나니, 혜진이가 커피 두 잔을 타서 소파로 가서 앉는다.
“아빠! 여기 와서 커피 마셔..”
“그래.. 우리 혜진이가 타 주는 커피 한번 마셔볼까?”
현식이가 소파로 와서 앉는다.
“우리 혜진이라고 하지말고 내 색씨라고 하면 안돼?”
현식이가 커피잔을 들면서 혜진이에게 말한다.
“정말 내 색씨가 되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당연하지! 아빠는 앞으로 영원히 내 서방님이야..”
“앞으로 세월이 흘러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혜진이는 한참 나이일 텐데..
그때가 되면 혜진이를 사랑해주고 싶어도 안아줄 수도 없고.. 어떡하나?”
“관계없어.. 내가 지금 아빠를 사랑하는 게 꼭 육체적인 접촉때문만은 아니야..
그리고, 외국배우를 보면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이십대 여자랑 살던데 뭘..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빠랑 삼십년 차이도 나지 않잖아?”
“글쎄다…”
같이 아파트를 나선다.
“혜진이 넌 학교로 바로 갈 거야?”
“그럴려고 해..”
“내가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버스타고 가면 돼..”
“그리고, 너 용돈..”
현식이가 지갑을 꺼내 십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서 혜진이에게 준다.
“이렇게 많이 줘?”
“어제 너 음식 장만하느라고 있는 돈 다 썼다며?”
“그래도 이 돈은 많은데..”
“그냥 넣어두고 필요할 때 써.. 돈 떨어지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고..”
현식이가 차를 몰고 혜진이를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고 회사로 출근한다.
현식이는 회사에서 퇴근하기 전 미주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네! 강 미주입니다.
“저.. 김 현식입니다.”
-아.. 김 사장님. 웬일로 저에게 전화를 다 주시고..
“모레가 일요일인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식사를 했으면 하고요..”
-저야 좋지요..
“그럼 모레 열 두시 경에 미주씨 가게 앞으로 갈게요.”
-그렇게 해요. 그 시간에 맞춰 나갈게요.
“그럼 모레 뵙기로 하죠.”
그리고는 전화를 끊는다.
미주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이젠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서 이다.
더 이상 미주를 만나서 관계를 가지는 것은 혜진이에게 죄를 짓는 셈이니..
또, 미주씨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자고 있는데, 잠결에 전화벨이 울린다.
잠이 조금 덜 깬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나 응접탁자에 있는 전화기로 가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빠! 나 혜진이..
“아침 일찍 웬일이야?”
-시간이 몇 신데? 지금 일어난 거야?
“그래.. 네 전화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보자.. 벌써 열시가 넘었네?”
-나.. 지금 아빠한테 가려고..
“안 되겠는데? 아빠 오늘 누구 만날 약속이 있어.”
-누구랑 만나는데? 혹시.. 전에 그 아줌마 아냐?
녀석.. 예감 하난 기가 막히네..
“그래.. 그 아줌마와 만나기로 했다.”
-아빠…
혜진이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다.
“혜진아! 네가 걱정 안 해도 돼.. 설마 아빠가 너를 두고 그 여자랑 데이트하려고 만나겠니?
아무래도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서..”
-정말이지?
갑자기 혜진이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그럼.. 인석아. 너 속고만 살았니?”
-알았어.. 그럼 잘하고 와.”
세면을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는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다가 열 한시 반경에 아파트를 나선다.
차를 몰고 미주씨의 가게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열 한시 오십분이 된다.
아직 미주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 십분 정도 기다리고 있으니, 가게에서 미주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여 클락션을 울리니 차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미주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탄다.
자기와 만난다고 그랬는지 꽤 신경을 쓴 것 같다.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올림머리를 하고, 하얀 원피스에 검은 털코트를 입은 모습이
원숙한 중년부인의 티가 물씬 난다.
향수를 뿌렸는지 은은한 향기가 차 안에 가득찬다.
잠시 미주와 혜진이를 비교해 본다.
미주는 자신과 같은 세대라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할 것이고 육체관계를 갖더라도
마음이 편할 수가 있다.
같이 다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무난할 것이고..
하지만, 미주 역시 임자가 있는 몸이라 같이 만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고
내 반려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혜진이는 원천적으로 근친이란 굴레에 갇혀 세상 사람들이 정한 윤리에 어긋나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아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는 아이 이고..
누구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혜진이 이다.
육체관계를 가지더라도 자신에게는 너무 분에 넘친다는 생각을 한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현식이를 보고 미주가 겸연쩍은 듯 말한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그제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현식이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한다.
“오늘 미주씨가 너무 멋있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좋게 봐 주시니까 그렇죠.”
“오늘도 미리 가게에 나왔던 모양이죠?”
“예.. 조금 일찍 나와서 어제 정리 못했던 것들을 좀 치우고 하느라고..”
“어디로 갈까요?”
“현식씨가 알아서 가세요.”
“그럼..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가요.. 여기서 가깝고 해수욕장 주변에 횟집이 괜찮던데요..”
“그렇게 해요..
한동안 바빴던 모양이죠? 요즘 저희 가게에 들리시는 게 뜸하시고..”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어느덧 차가 다대포 해수욕장 입구로 들어선다.
전에 한번씩 와본 횟집 앞에 차를 세운다.
같이 차에서 내리니 미주가 현식이 옆에서 팔짱을 낀다.
두 번 육체관계를 가지고 나서인지 팔짱을 끼는 걸 어색해 하지 않고 상당히 자연스럽게
행동을 한다.
무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팔짱을 낀 채로 횟집 안으로 들어간다.
횟집 주인여자가 아는 채를 한다.
“김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층에 자리 있지요?”
“예! 이층으로 올라가세요.”
이층으로 올라가서 바다를 접한 쪽의 방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주인여자가 따라와서 주문을 받는다.
“여기 광어하고 우럭을 섞어서 주고 술은 매취순으로 줘요.”
창 밖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많이 나르고 있다. 고기떼들이 지나가고 있는지..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배들이 한가하게 수평선을 거닌다.
잠시 창 밖을 내다보던 현식이가 미주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기 전망 좋지요?”
“아주 좋네요.. 가슴이 다 트이는 것 같아요.”
“요즘 하시는 장사는 어때요?”
“전보다는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전보다 마음을 좀 편히 가져서 그런가 봐요. 안달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세상 일이 다 그렇지요. 조급히 생각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요..
어려워도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일이 잘될 수도 있고요..
힘들고 지치게 보이는 사람보다는 편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더 따르는
이치하고 같은 거지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주문했던 회와 술이 나오고, 현식이가 미주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 몇잔 마셔도 되겠지요?”
“두 세잔 정도는.. 현식씨는 차 때문에 술 마셔도 괜찮겠어요?”
“나중에 봐서 안되면 대리운전 부르면 돼요.”
미주가 현식이에게 술병을 받아 들고 현식이의 잔에 술을 따른다.
“자.. 미주씨. 건배합시다.”
“그래요..”
“미주씨의 가게번창을 위해..”
“현식씨의 건강을 위해..”
같이 잔을 들고 한잔씩 비운다.
미주는 ‘우리의 사랑을 위해’라고 건배하고 싶었지만, 너무 노골적인 것 같고
속이 보이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건배를 하지 못한다.
현식이가 술 석 잔을 연속해서 마신다.
미주가 그런 현식이를 바라보다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어본다.
“김 사장님.. 무슨 일이 있어요? 그렇게 급히 술을 드시고..”
“사실은 오늘 미주씨에게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런데.. 입이 잘 안 떨어지네요?”
입이 안 떨어질 정도의 말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인가?
미주가 좀 떨리는 음성으로 현식이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시길래?”
“저.. 사실은..”
현식이가 술을 한잔 더 마시고 말을 잇는다.
“사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아무래도 미주씨에게 말을 해야겠기에..”
“그러..셨어요?”
미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그 동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식이가 자신의 마음속 깊이 들어 와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남편이 있고, 홀몸이 된 현식이의 반려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식이의 그 말이 천둥소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다.
미주가 술잔을 들고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술잔을 비운다.
“미주씨에게 그 동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미주씨를 사랑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제약이 따르네요..”
“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현식씨와 저와의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나 봐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 동안 미주씨와의 관계가 제 진심이었으니..”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현식씨가 사랑한다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어떻게 내 딸이라고 말하겠는가?
현식이가 비어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마신다.
“그냥.. 너무 사랑스런 여자예요.. 그 여자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여자이고요..”
“어쨌든 축하 드려요. 좋은 분이 생겼다는 거..”
“그렇다고 해서 저와 미주씨의 사이가 완전히 끝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좋은 친구로써.. 단골 술 손님으로써.. 그렇게 지내면 안될까요?”
“그건.. 제가 부탁드릴 말인데요?”
“그럼.. 앞으로 제가 한번씩 미주씨의 가게에 찾아가더라도 예전처럼 그렇게 대해주면
고맙겠어요.”
미주는 몇 잔을 계속해서 마신 술로 인해 많이 취하는 것 같다.
아니.. 현식이의 고백으로 인해 더 취하는 것인지..
자신과 현식이와의 사이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식이의 입에서 애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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