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2부
씩씩거리며, 숨을 조아리고, 여자의 등 위에 축 늘어져서, 방울방울 땀을
흘리는 준석.
여자는 여전히 말없이 흐느끼고만 있었다. 사정하기 전과 사정한 후. 나른
하게 빠져나가는 쾌감도 잠시, 준석은 제가 저지른 일을 새삼 떠올리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후회막급한 일이었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준석이 퍼뜩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여자는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내린다. 다시 가슴이 방망이
질치기 시작했다.
준석은 빠르게 바지를 올리고, 벗어던졌던 신발을 찾아 신었다. 풀어헤쳐진
상의를 추스리면서 슬금슬금 한두 발, 그러다가 정신없이 준석은 뛰기 시작
했다. 도망가야 해. 멀리. 멀리. 제 발소리에 놀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멈
출 수 없었다. 길고 긴 개천가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 준석은 개천가로부터 빠져나
왔다. 다시 텅빈 거리였다. 가까이 열려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혹시
피라도 묻어있는 건 아닐지. 옷이라도 찢어진 건 아닐지. 이리저리 살피고,
얼굴과 몸을 매만져 보았다. 젠장. 이런 거였나.
"그래. 그 수년 동안 상상만 했었던 강간을, 했다는 거지, 내가."
조금 전의 섹스. 그 조그만 보지 속으로 정액을 쏟아냈을 때, 준석은 마치
실신할 듯한 쾌감으로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직후
의 황량함. 흐느끼는 지지배와 마구 몰려드는 죄책감, 불안감, 잡힐지도 모
른다는 두려움.
아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내가 강간범이 되다니. 건물
앞으로 왁자지껄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준석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
겼다.
씨발. 내가 강간범이 되다니.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엄청난 것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허전함도. 준석은 털썩 주저앉아 아예 두 발을 뻗고 벽에
몸을 주욱 기대버렸다. 담배라도. 꾸깃꾸깃 구겨진 담배갑을 찾아 꺼냈지만
한 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담배가 없다는 사실이 준석을 또다른 불안감으로 조급하게 만들었다. 돈이
남았던가? 몸을 일으켜 습관적으로 뒷주머니로 손을 옮기던 준석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악. 지갑이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
다.
"빨리 가야해. 그년이 신고하기 전에 경찰보다 먼저 가야해."
하지만 생각 뿐. 건물을 나서는 준석의 다리는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다. 뛰
어야 하는데. 몸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 될대로 되라지."
기집애가 신고야 하겠어? 여대생 같던데. 지 인생 조질려고. 설사 고발한다
해도, 씨발. 잡혀서 쪽 좀 팔더라도, 돈 천 만원이면 해결된대며. 하지만.
혜진이는? 부모님은?
". 될대로 되라지. 뭐."
그렇게 되뇌이며, 준석은 한층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위로 지나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 곳에 가까워 올수록, 준석의 가슴은 크게 고동
쳤다. 경찰차는 없군. 그러나 그 길을 그대로 갈 용기는 없었다.
아직까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 듯이, 그러면서도 주위를 연신 두리번
거리며, 준석은 한참 떨어진 또 다른 입구를 찾아돌아 슬그머니 발을 내디
뎠다. 어렴풋한 주위가 익숙해지고, 아까 그 장소를 서둘러 찾는데. 니기미
. 그 장소, 그 벽 그대로. 아까 준석이 싸질러댔던 그 자세 그대로. 그 병
신같은 년은 구겨져 엎어져 있었다.
니기미. 준석은 한동안 꼼짝않고 서서,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가 움직인다면, 혹 핸드폰이라도 꺼내 든다면, 바로 뛰어들
생각으로. 그렇게 5분, 10분이 흘렀다. 끝내 꼼짝도 않는, 니기미. 병신같
은 년.
느릿느릿, 슬그머니 준석은 그쪽을 향해 걸었다. 나즉히 들리는 흐느낌 소
리. 그녀에 대한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지갑을 찾아 땅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발소리가 충분히 들릴 거리까지 왔는데도 그녀는 엎어진 자세에서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아. 있었다. 그녀의 벗겨진 바지 옆에 준석의 갈색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준석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됐어."
그제서야 준석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한껏 고요한 어둠 속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아무 일 없었던 거라구. 아무 일도."
그러나 웅웅거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준석의 가슴을 긁고 있었다. 이리저
리 나뒹구는 신발과 옷가지들.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그녀. 얼핏 그
녀가 애처로워 보였다. 이 여자 이러다가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하지만 물
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어줍잖은 동정심.
"병신. 꼴값하네. 나는 가면 되는 거야. 이제 집에 가서 푹 잠들면 되는 거
라구."
크게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 걷는 준석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병신같은 년,
잊어버리고, 그냥 미친 개한테 물린 셈 치고, 잘 살면 되잖아. 개천가를 벗
어나는, 입구에서 준석은 다시 뒤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 아직까지 그 모
습 그대로, 꼼짝않는 그녀.
니기미, . 그래, 미쳤다. 미쳤어. 준석은 그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뒷일
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불쌍했고, 잘 살아주기를 바랬다. 물론,
죄책감도......
준석의 조급함과는 달리,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 멀리서부터 조막조막 떨
어진 그녀의 소지품들을 주워 하나 둘 그녀의 발 밑으로 모았다. 가방, 신
발, 바지, 그리고 반쯤 찢어진 팬티까지. 역시 그녀의 움직임은 없었고.
잠시 고민 끝에, 준석은 떨리는 손을 내뻗어 자신의 정액으로 어지럽혀진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흠칫하는 그녀의 반응. 팔에 느껴진 그녀의 몸
이 백짓장처럼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엉거주춤한 준석의 다가섬에 그제
서야 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녀, 스치듯 눈이 마주쳤고 준석은 깜짝 놀라 이
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미,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병신. 왠 어색한 존대말. 준석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더욱 당황하여
손에 들고 있던 여자의 신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질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까지 준석을 바라
보는 그녀. 니기미.
"병신. 역시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아. 이게 무슨 개쪽이야. 병신. 병신."
준석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돌렸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감 뿐이었다. 동정심은 무슨 얼어죽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는데,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가 준석을 등 뒤로 날아들
었다.
"가지, 말아요."
뭐? 한두 걸음 내딛던 준석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서, 더 이
상 움직일 수 없었다. 뭐? 가지 말라구? 다시 돌아서 그녀의 눈을 바라볼
용기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물론, 못들은 척 떠날 용기도......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꽤 이어졌다.
"도와줘요. 저 좀."
다시 이어지는 그녀의 말. 속는건 아닐까. 벌써 신고하고, 시간을 보내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함께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면 어떡하지?
"이, 이봐. 나, 난, 널 가, 강간한, 사람이라구."
"아저씨, 가면... 죽어요, 나... 그니까, 제발... 이대로, 집에 가도, 새아
버진 날 죽일거야... 이대로는, 아무데도, 갈 수 없구... 죽어버릴, 그럴
...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니까 아저씨... 제발, 저 좀..."
다시 울먹이는, 끊어질 듯 연신 이어지는 한마디한마디를 들으면서, 준석은
차츰 그녀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다는 마음을 굳혀갔다. 뭔가 밝아지는 듯
한 마음도 그렇고. 흐려지는 그녀의 말끝을 흘리며 준석은 그녀를 안아들었
다.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드러난 그녀의 속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흙묻은 바지를 주워 툭툭 털고 입히는데, 얼핏 준석의 손이 그녀의 이곳저
곳에 스쳐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준석에 대한 경계심이 풀렸을까.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려는 준석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한걸음 두걸음 내딛는데,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지? 그것보다도 몇 걸음 준석을 따라 걷던 그녀는,
이미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나쁜사람 아닐꺼야, 아저씨는..."
미친년. 난 널 강간한 나쁜새끼라구.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준석
의 가슴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인연일까, 이것도?
준석은 아예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 그녀 앞에 주저 앉았다.
몇 초간의 침묵.
"업혀! 이 미친년아."
씩씩거리며, 숨을 조아리고, 여자의 등 위에 축 늘어져서, 방울방울 땀을
흘리는 준석.
여자는 여전히 말없이 흐느끼고만 있었다. 사정하기 전과 사정한 후. 나른
하게 빠져나가는 쾌감도 잠시, 준석은 제가 저지른 일을 새삼 떠올리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후회막급한 일이었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준석이 퍼뜩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여자는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내린다. 다시 가슴이 방망이
질치기 시작했다.
준석은 빠르게 바지를 올리고, 벗어던졌던 신발을 찾아 신었다. 풀어헤쳐진
상의를 추스리면서 슬금슬금 한두 발, 그러다가 정신없이 준석은 뛰기 시작
했다. 도망가야 해. 멀리. 멀리. 제 발소리에 놀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멈
출 수 없었다. 길고 긴 개천가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 준석은 개천가로부터 빠져나
왔다. 다시 텅빈 거리였다. 가까이 열려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혹시
피라도 묻어있는 건 아닐지. 옷이라도 찢어진 건 아닐지. 이리저리 살피고,
얼굴과 몸을 매만져 보았다. 젠장. 이런 거였나.
"그래. 그 수년 동안 상상만 했었던 강간을, 했다는 거지, 내가."
조금 전의 섹스. 그 조그만 보지 속으로 정액을 쏟아냈을 때, 준석은 마치
실신할 듯한 쾌감으로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직후
의 황량함. 흐느끼는 지지배와 마구 몰려드는 죄책감, 불안감, 잡힐지도 모
른다는 두려움.
아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내가 강간범이 되다니. 건물
앞으로 왁자지껄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준석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
겼다.
씨발. 내가 강간범이 되다니.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엄청난 것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허전함도. 준석은 털썩 주저앉아 아예 두 발을 뻗고 벽에
몸을 주욱 기대버렸다. 담배라도. 꾸깃꾸깃 구겨진 담배갑을 찾아 꺼냈지만
한 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담배가 없다는 사실이 준석을 또다른 불안감으로 조급하게 만들었다. 돈이
남았던가? 몸을 일으켜 습관적으로 뒷주머니로 손을 옮기던 준석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악. 지갑이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
다.
"빨리 가야해. 그년이 신고하기 전에 경찰보다 먼저 가야해."
하지만 생각 뿐. 건물을 나서는 준석의 다리는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다. 뛰
어야 하는데. 몸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 될대로 되라지."
기집애가 신고야 하겠어? 여대생 같던데. 지 인생 조질려고. 설사 고발한다
해도, 씨발. 잡혀서 쪽 좀 팔더라도, 돈 천 만원이면 해결된대며. 하지만.
혜진이는? 부모님은?
". 될대로 되라지. 뭐."
그렇게 되뇌이며, 준석은 한층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위로 지나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 곳에 가까워 올수록, 준석의 가슴은 크게 고동
쳤다. 경찰차는 없군. 그러나 그 길을 그대로 갈 용기는 없었다.
아직까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 듯이, 그러면서도 주위를 연신 두리번
거리며, 준석은 한참 떨어진 또 다른 입구를 찾아돌아 슬그머니 발을 내디
뎠다. 어렴풋한 주위가 익숙해지고, 아까 그 장소를 서둘러 찾는데. 니기미
. 그 장소, 그 벽 그대로. 아까 준석이 싸질러댔던 그 자세 그대로. 그 병
신같은 년은 구겨져 엎어져 있었다.
니기미. 준석은 한동안 꼼짝않고 서서,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가 움직인다면, 혹 핸드폰이라도 꺼내 든다면, 바로 뛰어들
생각으로. 그렇게 5분, 10분이 흘렀다. 끝내 꼼짝도 않는, 니기미. 병신같
은 년.
느릿느릿, 슬그머니 준석은 그쪽을 향해 걸었다. 나즉히 들리는 흐느낌 소
리. 그녀에 대한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지갑을 찾아 땅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발소리가 충분히 들릴 거리까지 왔는데도 그녀는 엎어진 자세에서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아. 있었다. 그녀의 벗겨진 바지 옆에 준석의 갈색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준석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됐어."
그제서야 준석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한껏 고요한 어둠 속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아무 일 없었던 거라구. 아무 일도."
그러나 웅웅거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준석의 가슴을 긁고 있었다. 이리저
리 나뒹구는 신발과 옷가지들.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그녀. 얼핏 그
녀가 애처로워 보였다. 이 여자 이러다가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하지만 물
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어줍잖은 동정심.
"병신. 꼴값하네. 나는 가면 되는 거야. 이제 집에 가서 푹 잠들면 되는 거
라구."
크게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 걷는 준석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병신같은 년,
잊어버리고, 그냥 미친 개한테 물린 셈 치고, 잘 살면 되잖아. 개천가를 벗
어나는, 입구에서 준석은 다시 뒤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 아직까지 그 모
습 그대로, 꼼짝않는 그녀.
니기미, . 그래, 미쳤다. 미쳤어. 준석은 그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뒷일
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불쌍했고, 잘 살아주기를 바랬다. 물론,
죄책감도......
준석의 조급함과는 달리,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 멀리서부터 조막조막 떨
어진 그녀의 소지품들을 주워 하나 둘 그녀의 발 밑으로 모았다. 가방, 신
발, 바지, 그리고 반쯤 찢어진 팬티까지. 역시 그녀의 움직임은 없었고.
잠시 고민 끝에, 준석은 떨리는 손을 내뻗어 자신의 정액으로 어지럽혀진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흠칫하는 그녀의 반응. 팔에 느껴진 그녀의 몸
이 백짓장처럼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엉거주춤한 준석의 다가섬에 그제
서야 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녀, 스치듯 눈이 마주쳤고 준석은 깜짝 놀라 이
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미,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병신. 왠 어색한 존대말. 준석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더욱 당황하여
손에 들고 있던 여자의 신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질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까지 준석을 바라
보는 그녀. 니기미.
"병신. 역시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아. 이게 무슨 개쪽이야. 병신. 병신."
준석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돌렸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감 뿐이었다. 동정심은 무슨 얼어죽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는데,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가 준석을 등 뒤로 날아들
었다.
"가지, 말아요."
뭐? 한두 걸음 내딛던 준석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서, 더 이
상 움직일 수 없었다. 뭐? 가지 말라구? 다시 돌아서 그녀의 눈을 바라볼
용기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물론, 못들은 척 떠날 용기도......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꽤 이어졌다.
"도와줘요. 저 좀."
다시 이어지는 그녀의 말. 속는건 아닐까. 벌써 신고하고, 시간을 보내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함께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면 어떡하지?
"이, 이봐. 나, 난, 널 가, 강간한, 사람이라구."
"아저씨, 가면... 죽어요, 나... 그니까, 제발... 이대로, 집에 가도, 새아
버진 날 죽일거야... 이대로는, 아무데도, 갈 수 없구... 죽어버릴, 그럴
...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니까 아저씨... 제발, 저 좀..."
다시 울먹이는, 끊어질 듯 연신 이어지는 한마디한마디를 들으면서, 준석은
차츰 그녀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다는 마음을 굳혀갔다. 뭔가 밝아지는 듯
한 마음도 그렇고. 흐려지는 그녀의 말끝을 흘리며 준석은 그녀를 안아들었
다.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드러난 그녀의 속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흙묻은 바지를 주워 툭툭 털고 입히는데, 얼핏 준석의 손이 그녀의 이곳저
곳에 스쳐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준석에 대한 경계심이 풀렸을까.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려는 준석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한걸음 두걸음 내딛는데,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지? 그것보다도 몇 걸음 준석을 따라 걷던 그녀는,
이미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나쁜사람 아닐꺼야, 아저씨는..."
미친년. 난 널 강간한 나쁜새끼라구.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준석
의 가슴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인연일까, 이것도?
준석은 아예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 그녀 앞에 주저 앉았다.
몇 초간의 침묵.
"업혀! 이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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