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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2:59 1,327회 0건
젊음, 그 열기 속으로 15부
서울에 올라온지 한 달이 되어갔다.
그 동안 달라진 서울 모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못보던 건물이 많이 들어섰고, 있던 건물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이런 나를 미나는 자기가 선배인마냥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해주기를 좋아했고, 나 역시 미나와 다니면서 서울에 익숙해져갔다.
처음엔 미나와 다니면서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에 갔다온 사람이라면 누구가 갖게되는 불안감...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에 예전 내 주위에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렸고, 또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도 항상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무엇인가라도 하지않으면 영원히 처질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영어학원과 밤에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일주일에 4일가는 영어학원은 미나의 적극적인 권유덕택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활용하려는 생각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운좋게도 대리운전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늦으막하게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서 미나와 함께 영어학원을 갔다오면 저녁에는 미정이의 과외를 했고, 틈틈이 야간 운전을 하는 것이 요즈음의 내 생활이었다. 여전히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크기는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았기에 다행스러웠다.
그 날도 그런 하루 중에 하나였다.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달력은 9월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직 여름의 열기는 그대로였고, 그런 후텁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내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뿌연 물안개 때문에 몇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런 아침이었지만 그 물안개 덕분에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하기만 했다.
이미 주위의 학교들은 개강을 했고, 미나 역시 이 비를 맞으면서 학교에 갔을것이다. 나도 복학일자를 알아보려면 학교에 가야만 했다.
-학교라... 뭐, 이젠 괜찮겠지...
입대 후, 난 의식적으로 학교를 잊으려고 했다. 휴가를 나와서도 학교가 서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산에만 있었을뿐... 이런 나를 보고서 친구 녀석들은 못된 놈이라느니 하면서 한 번 오라고 난리를 쳤지만 그렇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학교를 가서 친구를 만난다면, 친구녀석들의 입에서 입으로 얘기가 이어질것이고, 결국에는 그녀에게도 들릴테니까...
조 은하... 한 때 내 인생의 반쪽이라 생각했던 여자...
1학년, 뭣 모르고 대학에 들어와 오직 그 자유스러움만을 즐기던 때.
신입생환영회에서 만난 우리는 누가 먼저하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고, 어느 새 주위의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들은 재미없다고 하는 대동제 때에도 우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고, 떨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서로의 입술을 맛보았다. 언제까지나 행복이 계속될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누군가의 시기 때문인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 날... 입대 일주일을 앞두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온 날...
그녀에게 뭐라 말해야될지 몰랐던 난 그냥 통지서를 그녀에게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통지서를 받아든 그녀는 처음엔 통지서의 글자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마치 한 글자 한 글자 틀린 곳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의 고개가 숙여지고 말았고, 두 손에 받아 든 통지서 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졌다.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기에는 내 용기가 모자랐고,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어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듯이 보였다.
결국 훈련소 입대 날 새벽이 되어서도 그녀는 내 품안에서 눈물만 떨굴 뿐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그녀가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한 조각 불안이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단지 편지하라는 말만을 던진채 훈련소에 들어갔다.
6주간의 신병훈련을 그리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것도 그녀에게서 날아오는 편지 덕분이었고, 자대에서의 훈련과 고참들의 구타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내음이 묻어나는 편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한달이 가고 두달이 가고... 그녀의 편지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통씩은 왔던 것이 어느 새 한 달에 한 통이 되었고... 첫 휴가를 일주일 앞둔 날, 결국 마지막 편지가 왔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날...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구타하는 고참을 때리고 말았다. 나중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이미 그 고참은 실신해 있었고, 내 주위에는 소대장과 내무반장이 내 팔을 잡고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내 첫휴가는 영창에 가지않는 조건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소대장과 내무반장이 내 편지를 보았으리라... 그 일 이후로 고참들은 날 건드리지 않았다. 내가 때린 고참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던 때, 친구 녀석이 면회를 왔다. 그 녀석에게서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말... 말없이 앉아있는 날 위로하던 친구의 말...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씁씁할 뿐이었다. 그녀에게서 확인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한 조각 남아있던 내 자존심이 그걸 눌렀다.
작업이란 작업은 다 나갔고, 고참 대신에 유격도 두번이나 갔다왔다. 일부러 나를 힘들게 하고싶다는 생각은 하지않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야전상의에 상병 계급장을 달고서 내 첫휴가를 나왔다. 이젠 잊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매표소 창구 앞에서 행선지를 묻는 직원의 말을 듣고는 애써 부산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서울은 26개월이란 시간 속에서 내 의식밖에 있었다.
-... 졸업했겠지...
이제 그녀는 학교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앉아있던 도서관 자리는 다른 누군가의 책이 놓여있을것이다. 더이상 그녀의 흔적때문에 혼란스러워 할 일은 없을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삐삐가 울렸다.
지금은 핸드폰이 넘처나지만 그 때만해도 핸드폰은 011밖에 없었고, 가입비도 비쌌다. 미나가 사주고 싶어했지만 필요할것 같지는 않았기에 싫다고 그랬고, 실랑이 끝에 삐삐를 내 허리에 채워주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그 삐삐가 울렸다.
-... 011-301-xxxx...미나??..
집에 전화는 없었기에 골목어귀에 있는 슈퍼까지 가야했다. 대충 옷가지를 걸치고 우산을 쓰고서 전화부스로 갔다.
"여보세요? 오빠? 왜 인제 전화하는거야?"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미나가 새된소리로 쏘아붙였다.
"야! 바로 전화하는건데 뭘 그래? 그것도 못 기다려?"
"그러니까 핸드폰 하라고 그랬잖아! 답답해서 삐삐 어떻게 써?"
"흠... 뭐, 내가 답답할건 없어."
"으이그... 꼭 뭐같은 말만해요. 그건 그렇고 오늘 뭐 할꺼야? 시간있지?"
"왜?"
쫑알쫑알거리는 미나의 얘기를 한귀로 흘려들었다. 오늘 개빙주(개강을 빙자한 술)를 하기로 했는데 거기 가고싶지않다는 거였다. 대신에 학교 앞에 퓨전음식점이 새로 생겼는데 거기를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돈 없다."
"하! 알았어, 알았다구. 나올꺼지?"
"어... 근데 나 오늘 학교에 갈까 하는데...?"
"왜? 아! 복학때문에? 그거 얼마 안걸리잖아! 딴데로 빠지지말고 나와, 알았지?"
"어... 친구도 만나봐야하고..."
"6시에 신촌역 2번출구! 이따 봐."
"어... 야! 야!"
제 할말만 하고는 댕겅 끊어버리는 미나였다. 수화기를 멀거니 들여다 보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튼... 제 멋대로라니까...

대충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속이고는 학교로 향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가늘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와 보는 학교는 교문을 사이에 두고서 내 기억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고 있었다. 학교 앞의 가게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교문 안의 세상은 기억 속의 모습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 달라진 것이라고는 차를 몰고다니는 녀석들이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돈 많은 애들이 많이 들어왔나보군...
건물들 사이로 많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기억 속에 있던 건물들을 ?어보면서 캠퍼스를 걸었다. 비 오는 날 이렇게 걸어가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 새 단대 건물 앞에 이르렀다. 앞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친구 녀석들은 아직 군에 있을 것이고, 새로 들어온 후배들은 본 적이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와 앉곤했던 벤취가 보였다.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그곳에 앉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게 다행이군...
제대를 얼마 앞둔 고참들이 하는 고민을 나는 하지않았다. 그냥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시 학교에 왔다.
-조교는 누굴까...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계단을 올라 학과사무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니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복학때문에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나 보다 두세살 정도 많아보였다. 둥글둥글한 눈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짓고있었다.
"제대한지 얼마 안楹ず립六?"
"아, 예... 머리가 짧죠?"
그렇게 서로 인사를 했다. 88학번의 선배라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낯선 얼굴이라 처음에는 조금 서먹서먹했지만 군대 얘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복학을 묻는 나에게 신청기간이 지났다고 알려주면서 자신의 일인것마냥 미안해했다.
그런 선배가 고마웠고,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선배는 바쁜 와중에도 친절이 설명해주었고, 그런 선배에게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다.
"그래요, 다음에 술 한잔 합시다."
"예. 그럼 이만..."
그렇게 선배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문 앞에서 다시한번 목례를 했는데,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비에 젖은 머리를 털면서 들어섰다. 문 앞에서 서로 부딪힌 나와 그 여자는 서로 미안해 하면서 목례를 했지만...
그 여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그 여자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못한 채 굳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잊으려고 했던 여자...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두 사람, 서로 아세요? 어, 그러고보니 동기네?"
뒤로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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