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혹성상인 55. --- 이사회
55.
오후 늦게 일어난 한스가 커다란 꽃무늬나 그려진 시원스런 그림물감 느낌의 헐렁한 남국풍 셔츠를 입는 것을 도와주던 쿠엔 쓰루가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며 한스를 밖으로 내몰았다. 드레스룸에서 컨벤션룸까지는 고작 100여 미터 밖에 안되는데… 한스는 건물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정원을 지나 건물 현관을 지나 복도로 들어서다가 등을 툭치는 느낌에 뒤돌아 보았다.
아니… 뒤에는 남국풍의 셔츠를 입은 두 여자가 서있었다. 앞의 여자는 이오츠카 레이코, 트윈의 지배자고 그 뒤에는 이오츠카 리에가 있었다. 아니 리에가 여길 왜? 한스는 리에를 곁눈질하며 허리를 굽혀 레이코에게 인사를 했다. 레이코와 함께 목례로 답하는 리에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컨벤션룸은 넓기는 했지만 단아하고 소박했다. 이사들과 간부들이 모여앉고 잠시후 회장이 들어와 모두가 좌정했다. 한스는 고개를 돌리다가 장리웨이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고 고개를 돌렸다. 장리웨이는 여느 때와 달리 사람좋게 선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한스는 갑자기 가슴이 요동쳤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장리웨이, 이 나쁜 새끼. 언젠가 네놈이 쓰고 있는 위선의 탈을 벗기고 네놈을 죽일거다. 하지만 죽이기 전에 반드시 그 이유를 알려 줄거다. 네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그렇지 않으면 넌 죽으면서도 왜 죽는지 이유를 모를 테니…
한스는 장리웨이를 피해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다가 그만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카를로스 역시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한스에게 눈인사를 했다. 한스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자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다른 곳을 쳐다보니 이번에는 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리에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날렸다.
리에의 눈웃음도 한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지만 그래도 장리웨이나 카를로스를 보는 것 보다는 나았다. 한스는 멍한 눈으로 리에를 쳐다보고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칼레나 생각으로 무감각한 한스의 사정과 달리 확대이사회는 회사에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회장을 제외한 현임 이사들이 모두 퇴진했다. 거기에는 사외이사인 이오츠카 레이코도 포함됐다. 이어 새로운 이사들을 선임했다. 새로운 이사는 장리웨이, 칼리프 야마니, 카를로스 메사, 세르게이 베조프, 우자이 네루다, 그리고 한스였다. 한스는 자신의 이름을 호명받고 서야 이사진이 개편된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사외이사 자리는 리에에게 돌아갔다.
회의가 끝나자 잠시후 만찬파티가 열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회의를 할 때는 헐렁한 셔츠차림을 했는데 파티를 할 때는 오히려 정장을 입었다. 레이스가 달리고 소매끝이 헐렁한 최고급 실크 브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검은색의 화려한 정장을 걸쳤다. 거울에 비춰보는 자신의 모습이 영화에서나 보았던 중세 귀족의 자제같아 한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 이사가 된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둘러 싸여 축하를 받고 있었다. 한스가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마농을 데리고 홀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를 했다. 케뮬러 이사, 아니 이제 전이사의 인자한 축하를 받자 한스는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답례했다.
한스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리에가 다가왔다. 리에의 뒤를 따라 카를로스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이사님, 저는 이번에 새로 사외이사가 된 이오츠카에요. 새로 이사에 선임된 것을 축하드려요.”
리에는 한스에게 마치 처음보는 사람을 대한다는듯이 인사를 했다.
“아, 서로 처음 보시나 보죠? 미쓰 이오츠카, 이분은 회장의 아드님이에요. 그리고 도련님, 미쓰 이오츠카는 트윈의 지배자인 레이코님의 따님이시지요.”
카를로스가 친절하게 한스와 리에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아, 그러세요. 맞아요, 그러니까 생각나네요. 그러니까 이분이 나사미야 행성에서 그 검은 성처녀를 겁탈했던 분이군요.”
리에는 카를로스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약간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한스도 퉁명스럽게 받았다.
“네, 하지만 그 일은 회사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련님은 그 공로로 이번에 이사가 되신 거지요.”
카를로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카를로스 이사님은 어떤 서버를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건가요?”
“네?…”
리에의 조롱섞인 질문에 카를로스의 낯빛이 변했다. 이런 시건방진 계집애 같으니라고…
“아, 미쓰 이오츠카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카를로스 이사님은 여자를 가까이 안하십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잇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한스가 리에에게 맞장구를 치며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카를로스 이사님이 저를 강간하실까봐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요.”
카를로스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는 것을 옆에 두고 한스와 리에는 계속 그를 조롱하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때 장리웨이가 끼어들었다. 장리웨이도 카를로스의 낯빛이 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즐거운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를 했다.
“트윈의 후계자를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유머가 많으신 분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 이사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이분은 여자를 무서워하는 분이라 아름다운 숙녀의 말에는 너무 상처를 입는답니다.”
“아, 그랬군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궁금해요. 카를로스 이사님은 여자 하나 강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회사의 이사가 되었는지 알고 싶네요.”
“미쓰 이오츠카, 사실 카를로스 이사는… 여자가 아닌 남자를 강간해서 이사가 된 겁니다.”
장리웨이의 농담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다만 순식간에 놀림감이 되어 능욕당한 카를로스만이 얼굴이 빨개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호호호호… 그러니까 카를로스 이사님은 남자를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거였군요. 근데 카를로스 이사는 그렇다고 치고 장이사님은 누굴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거에요? 이사님도 남자를 강간한 건가요?”
“저는 그게 아니고… 카를로스에게 뒤를 대줘서 이사가 되었지요.”
장리웨이의 농담에 다시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역시 장리웨이였다. 한스는 리에가 장리웨이의 농담에 허리를 쥐고 웃으며 그 잘생긴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며 어제의 일이 되살아났다. 장리웨이 이 새끼, 여자 후리는 기술은 정말 죽여주는구나. 마칼레나를 욕보이더니 이젠 또 리에에게 찝쩍거려. 한스는 장리웨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든 여자를 다 빼았기겠다는 생각이 들며 장리웨이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다.
“호호호호… 근데 김이사님은 이 좋은 날 왜 그렇게 얼굴이 굳어있어요? 김이사님이 그러면 어디 다른 사람들이 농담이나 하겠어요?”
한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리에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한스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아마 김이사님은 질투를 느끼는가 봅니다. 자기만 카를로스에게 줬는줄 알았는데 저도 줬다고 그러니까…”
장리웨이의 말에 다시 모두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한스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개새끼 네가 어제 마칼레나에게 그랬기 때문에 내가 이런 기분이라는 걸 모른단 말야?
한스는 마농을 데리고 그들에게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한스는 기분이 우울해져 사람들을 피해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쪽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있던 사람이 한스를 불렀다.
“아! 아니 기무라 박사님 아니십니까? 여기에 어떻게…”
“이리와 보라니까…”
한스는 기무라 박사의 옆에 앉았다. 타이힐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옛친구. 반역적 언사를 서슴지 않던 노인. 기무라박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한스에게 말을 했다.
“자네가 이사가 된 것을 축하하네. 이대로 계속 나아가 회장이 되길 바라네.”
“과분한 말씀입니다.”
“… 자네는 이번 인사의 의미가 무언지 아나?”
“의미요? … 글쎄요.”
“늙은 이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젊은 사람들이 이사 자리를 모두 물려 받은 것은… 그건 회사의 세데교체를 뜻하는 걸쎄.”
“그렇겠네요.”
한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자네가 이해하는 수준이 아냐. 바라크는… 바라크는 곧 자신도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바라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늙은 이사들이 모두 퇴진에 동의한 것이지.”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러나실 생각이라고…
“바라크는 이제 회장 자리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친구 냉혹하긴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정한 사람이지, 당연히 바라크도 자네가 회장 자리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을거야.”
“…”
“지금 젊은 이사들은 능력은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다… 회장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야.”
“네? …”
“희망은 자네 밖에 없네. 난 자네가 회장이 되길 바라네.”
“…”
“내 말을 잘듣게.”
“…”
“내일 칼리프와 장리웨이가 회사에 새로운 제안을 할거야. 그 둘은 큰일을 해내서 그 공로로 회장이 되길 노리는 거야.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바라크에게는 그들이 그일을 해내서 공로를 인정받기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네.”
“…”
“카를로스는 그걸 알아. 그래서 그는 아마 빠른 시간안에 칼리프와 장리웨이, 그리고 자넬 죽이려고 할거야.”
“네! 저를…”
“바라크는 병이 있어. 이제 오래 살지 못할거야. 그래서 이 오랜 친구를 이곳까지 불러준거지. 마지막으로 옛친구가 보고 싶어서 말야. 바라크가 차기 회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면 카를로스는 그틈에 자네와 그들을 죽일거야.”
“아버지가 병이 있으시다구요? 어디가요?”
“그건…”
그때 저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와 기무라 박사의 말이 중단되었다. 기무라 박사가 일어섰다. 그리고 다가온 회장의 손을 잡았다. 회장은 기무라 박사의 손을 정답게 잡았지만 바로 기무라 박사를 외면하고 한스를 불렀다. 회장은 한스를 다른 쪽으로 데리고 갔다.
“너, 기무라 박사와는 어떻게 아느냐?”
“전에 타이힐에 갔을 때…”
“그가 뭐라고 하더냐?”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아버지 어디가…”
회장이 손을 내저어 한스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한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 친구는 문제아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옛 친구에 대한 정리때문이지. 저 친구의 말을 믿지 마라. 그리고 앞으로는 저 친구와 이야기하지도 마라.”
한스는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한쪽에서 여전히 깔깔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에와 장리웨이의 모습을 보고 자꾸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네. 하지만 아버지가 편찮으…”
“난 아무렇지 않다. 그 친구는 어떻게든 회사를 흔들고 싶어서 없는 말을 꾸며대는 거다. 만일 그런 소리가 흘러다니면 회사는 쓸데없는 피를 흘리게 될거다. 난 전혀 이상이 없으니까 저 친구 말에 현혹되지 마라.”
“…”
“넌 네 아비 말을 믿느냐, 아니면 저 늙은이의 말을 믿느냐?”
“…네. 전 아버지의 말씀을 믿습니다.”
회장은 자신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꾸 눈이 딴곳으로 돌아가는 한스의 시선을 따라 저쪽을 쳐다보고 난 후에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들어라. 트윈은 너에게 결정적인 힘이 되줄 것이다. 이오츠카 가문은 믿어도 좋다. 그들과 잘 사귀어 두거라.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가까이는 하지 말거라.”
“왜죠?”
한스는 리에가 여동생이란 것을 잘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채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주마. 여하튼 네가 지금 바라보는 저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되 그녀를 여자로 대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됐다. 그럼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사람들과 잘사귀어서 네 능력을 키워라.”
“네.”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쌍쌍이되어 춤을 췄다. 음악에 소질이 없는 한스는 이게 왈츤지 탱고진 구분은 안되었지만 어쨌든 격식을 갖춘 음악이고 격식을 갖춘 춤이었다. 그저 마음껏 몸을 흔드는 디스코나 무조건 비벼대는 람바다 같으면 한스도 잘출 수 있으련만 그냥 눈을 뜨고 앉아 장리웨이와 리에가 현란한 동작으로 우아하게 추는 춤을 쳐다보고만 있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리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오를 때마다 한없이 솟아나는 장리웨이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cksdn852 (2003-08-20 09:52:44)
너무 재밌게 보고 감니다..^^*
빨리 좀 올려주세염..~!~^^*
사신해달 (2003-08-20 11:20:20)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 있어요~~~
kw (2003-08-20 12:09:11)
야설을 SF로보니 또다른 기분이드네요.
아주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55.
오후 늦게 일어난 한스가 커다란 꽃무늬나 그려진 시원스런 그림물감 느낌의 헐렁한 남국풍 셔츠를 입는 것을 도와주던 쿠엔 쓰루가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며 한스를 밖으로 내몰았다. 드레스룸에서 컨벤션룸까지는 고작 100여 미터 밖에 안되는데… 한스는 건물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정원을 지나 건물 현관을 지나 복도로 들어서다가 등을 툭치는 느낌에 뒤돌아 보았다.
아니… 뒤에는 남국풍의 셔츠를 입은 두 여자가 서있었다. 앞의 여자는 이오츠카 레이코, 트윈의 지배자고 그 뒤에는 이오츠카 리에가 있었다. 아니 리에가 여길 왜? 한스는 리에를 곁눈질하며 허리를 굽혀 레이코에게 인사를 했다. 레이코와 함께 목례로 답하는 리에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컨벤션룸은 넓기는 했지만 단아하고 소박했다. 이사들과 간부들이 모여앉고 잠시후 회장이 들어와 모두가 좌정했다. 한스는 고개를 돌리다가 장리웨이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고 고개를 돌렸다. 장리웨이는 여느 때와 달리 사람좋게 선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한스는 갑자기 가슴이 요동쳤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장리웨이, 이 나쁜 새끼. 언젠가 네놈이 쓰고 있는 위선의 탈을 벗기고 네놈을 죽일거다. 하지만 죽이기 전에 반드시 그 이유를 알려 줄거다. 네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그렇지 않으면 넌 죽으면서도 왜 죽는지 이유를 모를 테니…
한스는 장리웨이를 피해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다가 그만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카를로스 역시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한스에게 눈인사를 했다. 한스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자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다른 곳을 쳐다보니 이번에는 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리에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날렸다.
리에의 눈웃음도 한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지만 그래도 장리웨이나 카를로스를 보는 것 보다는 나았다. 한스는 멍한 눈으로 리에를 쳐다보고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칼레나 생각으로 무감각한 한스의 사정과 달리 확대이사회는 회사에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회장을 제외한 현임 이사들이 모두 퇴진했다. 거기에는 사외이사인 이오츠카 레이코도 포함됐다. 이어 새로운 이사들을 선임했다. 새로운 이사는 장리웨이, 칼리프 야마니, 카를로스 메사, 세르게이 베조프, 우자이 네루다, 그리고 한스였다. 한스는 자신의 이름을 호명받고 서야 이사진이 개편된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사외이사 자리는 리에에게 돌아갔다.
회의가 끝나자 잠시후 만찬파티가 열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회의를 할 때는 헐렁한 셔츠차림을 했는데 파티를 할 때는 오히려 정장을 입었다. 레이스가 달리고 소매끝이 헐렁한 최고급 실크 브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검은색의 화려한 정장을 걸쳤다. 거울에 비춰보는 자신의 모습이 영화에서나 보았던 중세 귀족의 자제같아 한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 이사가 된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둘러 싸여 축하를 받고 있었다. 한스가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마농을 데리고 홀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를 했다. 케뮬러 이사, 아니 이제 전이사의 인자한 축하를 받자 한스는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답례했다.
한스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리에가 다가왔다. 리에의 뒤를 따라 카를로스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이사님, 저는 이번에 새로 사외이사가 된 이오츠카에요. 새로 이사에 선임된 것을 축하드려요.”
리에는 한스에게 마치 처음보는 사람을 대한다는듯이 인사를 했다.
“아, 서로 처음 보시나 보죠? 미쓰 이오츠카, 이분은 회장의 아드님이에요. 그리고 도련님, 미쓰 이오츠카는 트윈의 지배자인 레이코님의 따님이시지요.”
카를로스가 친절하게 한스와 리에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아, 그러세요. 맞아요, 그러니까 생각나네요. 그러니까 이분이 나사미야 행성에서 그 검은 성처녀를 겁탈했던 분이군요.”
리에는 카를로스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약간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한스도 퉁명스럽게 받았다.
“네, 하지만 그 일은 회사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련님은 그 공로로 이번에 이사가 되신 거지요.”
카를로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카를로스 이사님은 어떤 서버를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건가요?”
“네?…”
리에의 조롱섞인 질문에 카를로스의 낯빛이 변했다. 이런 시건방진 계집애 같으니라고…
“아, 미쓰 이오츠카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카를로스 이사님은 여자를 가까이 안하십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잇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한스가 리에에게 맞장구를 치며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카를로스 이사님이 저를 강간하실까봐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요.”
카를로스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는 것을 옆에 두고 한스와 리에는 계속 그를 조롱하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때 장리웨이가 끼어들었다. 장리웨이도 카를로스의 낯빛이 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즐거운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를 했다.
“트윈의 후계자를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유머가 많으신 분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 이사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이분은 여자를 무서워하는 분이라 아름다운 숙녀의 말에는 너무 상처를 입는답니다.”
“아, 그랬군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궁금해요. 카를로스 이사님은 여자 하나 강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회사의 이사가 되었는지 알고 싶네요.”
“미쓰 이오츠카, 사실 카를로스 이사는… 여자가 아닌 남자를 강간해서 이사가 된 겁니다.”
장리웨이의 농담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다만 순식간에 놀림감이 되어 능욕당한 카를로스만이 얼굴이 빨개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호호호호… 그러니까 카를로스 이사님은 남자를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거였군요. 근데 카를로스 이사는 그렇다고 치고 장이사님은 누굴 강간해서 이사가 되신 거에요? 이사님도 남자를 강간한 건가요?”
“저는 그게 아니고… 카를로스에게 뒤를 대줘서 이사가 되었지요.”
장리웨이의 농담에 다시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역시 장리웨이였다. 한스는 리에가 장리웨이의 농담에 허리를 쥐고 웃으며 그 잘생긴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며 어제의 일이 되살아났다. 장리웨이 이 새끼, 여자 후리는 기술은 정말 죽여주는구나. 마칼레나를 욕보이더니 이젠 또 리에에게 찝쩍거려. 한스는 장리웨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든 여자를 다 빼았기겠다는 생각이 들며 장리웨이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다.
“호호호호… 근데 김이사님은 이 좋은 날 왜 그렇게 얼굴이 굳어있어요? 김이사님이 그러면 어디 다른 사람들이 농담이나 하겠어요?”
한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리에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한스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아마 김이사님은 질투를 느끼는가 봅니다. 자기만 카를로스에게 줬는줄 알았는데 저도 줬다고 그러니까…”
장리웨이의 말에 다시 모두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한스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개새끼 네가 어제 마칼레나에게 그랬기 때문에 내가 이런 기분이라는 걸 모른단 말야?
한스는 마농을 데리고 그들에게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한스는 기분이 우울해져 사람들을 피해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쪽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있던 사람이 한스를 불렀다.
“아! 아니 기무라 박사님 아니십니까? 여기에 어떻게…”
“이리와 보라니까…”
한스는 기무라 박사의 옆에 앉았다. 타이힐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옛친구. 반역적 언사를 서슴지 않던 노인. 기무라박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한스에게 말을 했다.
“자네가 이사가 된 것을 축하하네. 이대로 계속 나아가 회장이 되길 바라네.”
“과분한 말씀입니다.”
“… 자네는 이번 인사의 의미가 무언지 아나?”
“의미요? … 글쎄요.”
“늙은 이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젊은 사람들이 이사 자리를 모두 물려 받은 것은… 그건 회사의 세데교체를 뜻하는 걸쎄.”
“그렇겠네요.”
한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자네가 이해하는 수준이 아냐. 바라크는… 바라크는 곧 자신도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바라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늙은 이사들이 모두 퇴진에 동의한 것이지.”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러나실 생각이라고…
“바라크는 이제 회장 자리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친구 냉혹하긴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정한 사람이지, 당연히 바라크도 자네가 회장 자리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을거야.”
“…”
“지금 젊은 이사들은 능력은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다… 회장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야.”
“네? …”
“희망은 자네 밖에 없네. 난 자네가 회장이 되길 바라네.”
“…”
“내 말을 잘듣게.”
“…”
“내일 칼리프와 장리웨이가 회사에 새로운 제안을 할거야. 그 둘은 큰일을 해내서 그 공로로 회장이 되길 노리는 거야.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바라크에게는 그들이 그일을 해내서 공로를 인정받기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네.”
“…”
“카를로스는 그걸 알아. 그래서 그는 아마 빠른 시간안에 칼리프와 장리웨이, 그리고 자넬 죽이려고 할거야.”
“네! 저를…”
“바라크는 병이 있어. 이제 오래 살지 못할거야. 그래서 이 오랜 친구를 이곳까지 불러준거지. 마지막으로 옛친구가 보고 싶어서 말야. 바라크가 차기 회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면 카를로스는 그틈에 자네와 그들을 죽일거야.”
“아버지가 병이 있으시다구요? 어디가요?”
“그건…”
그때 저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와 기무라 박사의 말이 중단되었다. 기무라 박사가 일어섰다. 그리고 다가온 회장의 손을 잡았다. 회장은 기무라 박사의 손을 정답게 잡았지만 바로 기무라 박사를 외면하고 한스를 불렀다. 회장은 한스를 다른 쪽으로 데리고 갔다.
“너, 기무라 박사와는 어떻게 아느냐?”
“전에 타이힐에 갔을 때…”
“그가 뭐라고 하더냐?”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아버지 어디가…”
회장이 손을 내저어 한스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한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 친구는 문제아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옛 친구에 대한 정리때문이지. 저 친구의 말을 믿지 마라. 그리고 앞으로는 저 친구와 이야기하지도 마라.”
한스는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한쪽에서 여전히 깔깔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에와 장리웨이의 모습을 보고 자꾸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네. 하지만 아버지가 편찮으…”
“난 아무렇지 않다. 그 친구는 어떻게든 회사를 흔들고 싶어서 없는 말을 꾸며대는 거다. 만일 그런 소리가 흘러다니면 회사는 쓸데없는 피를 흘리게 될거다. 난 전혀 이상이 없으니까 저 친구 말에 현혹되지 마라.”
“…”
“넌 네 아비 말을 믿느냐, 아니면 저 늙은이의 말을 믿느냐?”
“…네. 전 아버지의 말씀을 믿습니다.”
회장은 자신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꾸 눈이 딴곳으로 돌아가는 한스의 시선을 따라 저쪽을 쳐다보고 난 후에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들어라. 트윈은 너에게 결정적인 힘이 되줄 것이다. 이오츠카 가문은 믿어도 좋다. 그들과 잘 사귀어 두거라.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가까이는 하지 말거라.”
“왜죠?”
한스는 리에가 여동생이란 것을 잘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채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주마. 여하튼 네가 지금 바라보는 저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되 그녀를 여자로 대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됐다. 그럼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사람들과 잘사귀어서 네 능력을 키워라.”
“네.”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쌍쌍이되어 춤을 췄다. 음악에 소질이 없는 한스는 이게 왈츤지 탱고진 구분은 안되었지만 어쨌든 격식을 갖춘 음악이고 격식을 갖춘 춤이었다. 그저 마음껏 몸을 흔드는 디스코나 무조건 비벼대는 람바다 같으면 한스도 잘출 수 있으련만 그냥 눈을 뜨고 앉아 장리웨이와 리에가 현란한 동작으로 우아하게 추는 춤을 쳐다보고만 있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리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오를 때마다 한없이 솟아나는 장리웨이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cksdn852 (2003-08-20 09:52:44)
너무 재밌게 보고 감니다..^^*
빨리 좀 올려주세염..~!~^^*
사신해달 (2003-08-20 11:20:20)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 있어요~~~
kw (2003-08-20 12:09:11)
야설을 SF로보니 또다른 기분이드네요.
아주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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