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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3:13 1,301회 0건
SF] 혹성상인 41. --- 카를로스
41.

“부탁이네. 그 애에게는 비밀로 해주게.”
레이코의 부탁을 들으며 한스의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다시 문이 열리며 리에가 찻잔을 받쳐들고 살랑살랑 걸어 들어왔다.

저 걸음걸이. 한스는 이제야 모든 것을 뚜렷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리에를 처음 보았을 때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 익숙하고 낯익은 느낌. 그 모든 것이 그 누구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매일 보면서도 인식해지 못했던 대상,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사람. 바로 나 자신의 모습. 나의 뉘앙스, 나의 프로필, 바로 나 자신과 닮았던 것이다.

차분하게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는 리에의 얼굴과 몸을 보면서 그제 밤이 떠올랐다. 특별한 느낌의 젖꼭지, 허리를 감싸고 조여오던 두 다리, 쫄깃쫄깃하던 보지. 한스는 그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며 리에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리에가 들어오고 나서는 의례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회사와 트윈의 협력을 당부하는 레이코의 말에 한스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는 끝났다. 한스는 방문을 나와 들어왔던 역순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하주차장을 나와 한참을 달려 Queen Mother Road에 이르러 콜걸을 내려놓고 한스는 길을 찾아 트라이어드 호텔로 향했다.

머리 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한스는 건성으로 운전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한스가 멍청하게 우회전 하는 순간 바로 앞에는 큰 트레일러가 뒷문을 열어 놓은 채 앞을 막고 있었다. 앗하고 놀랄 틈도 없이 한스의 차는 그대로 트레일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바로 문이 닫히고 트레일러는 빠른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한참을 달린 트레일러가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뒷문이 열렸다. 밖은 어두웠다. 어딘가 창고 안 같았다. 한스는 더듬더듬 트레일러에서 내렸다, 한스가 트레일러를 빠져 나오자 갑자기 불이 켜지며 온통 환해졌다. 한스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안을 둘러 보았다.

“겁내지 말아요. 나에요.”
한쪽에 리에가 서 있었다. 한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리에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머리 속이 복잡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한스가 다가가자 리에가 웃었다.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오빠.”
오빠?! 한스는 리에의 말에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빠라니! 그럼 리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한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리에가 미소를 띠었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아요. 비록 공식적으로는 엄마가 지도자지만 실제로 트윈은 내가 운영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한스는 더욱 의혹스러운 얼굴로 리에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하나의 정보도 놓치지 않아요. 어제 내가 돌아와 바로 내 몸에서 정액을 채취해서 DNA 분석을 했죠. 우리는 중요 인물의 DNA는 모두 분석해서 보관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오빠의 DNA를 분석한 결과는 나를 기절하게 했어요.”
“그래서 알게 된 것이군.”
“네, 그래요. DNA분석 비교 결과 뜻밖에도 내 DNA하고 형제보다는 멀고 사촌보다는 가깝다는 판정이 나왔어요. 나는 엄마의 DNA와도 비교해 봤죠. 그런데 그건 아무 연관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오빠와 나는 아빠만 같고 엄마가 다른 남매란 것을 알게 됐죠. 남매, 오빠, 이런 단어는 너무나 오래된 단어라서 나는 고어사전을 뒤져서야 이 단어를 찾았어요.”
“…”
“엄마가 오빠한테는 사실을 말해줬죠?”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멀리 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한스는 또다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그러지 말아요. 흘러가는 대로 운명에 맡겨요.”
한스는 리에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 리에. 그러면 안돼. 그건 죄악이야.”
“왜 안되죠? 그게 왜 죄악이죠? 고대에 파라오는 남매끼리 결혼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왕가에서 남매끼리 결혼한 사례는 무지하게 많아요. 오빠는 회사의 회장이 될 거에요. 회사의 회장이 제국의 황제와 뭐가 다르지요? 나도 트윈의 여왕이나 마찬가지에요.”
“리에…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에요?”
“…내 마음이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성과 영성이 있어. 리에와 함께하면 내 마음이 절대 편하지 않아.”
“하하하하…”

리에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웃음을 멈추더니 한스를 매섭게 쏘아봤다.
“웃기지 말아요. 사람은 누구나 영성이 있다고요? 그래서 언제 회사가 서버들을 사람 대접한 적이 있나요? 서버들에게 영성이 있고 감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있나요? 자신들의 알량한 도덕과 양심은 그토록 소중하면서 수십억 서버들은 물건처럼 취급해도 되나요? 언제 그들한테 그들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나요? 웃기지 말아요, 오빠. 오빠도 그들과 똑같군요. 위선자에다 이기주의자, 이중 인격자들.”
“…”
“내 말이 틀렸으면 어디 틀렸다고 말 좀 해봐요. 그제 밤에도 오빠는 나를 성욕을 채워줄 고깃덩어리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리에! 그만, 그만해. 네가 뭐라해도 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 이건 장난이 아냐.”

리에는 한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보았다.
“좋아요. 오빠가 그렇다면 일단 접어 둘께요.”
“…”
“그렇다면 이제 비즈니스를 이야기해요. 나를 트윈의 지배자, 그리고 확장되는 트윈의 정복자로 인정해줄 수 있나요?”
“… 트윈의 소유자로 인정하지. 그러나 확장과 정복은 안돼.”
“솔직히 말해 봐요. 트윈을 가지고 싶지요? 그러면 트윈을 가져요. 트윈과 나를 동시에 가지면 되잖아요.”
“리에, 제발…”
한스의 말에 리에는 다시 표정을 바꾸며 한스를 보았다.

“오빠는 자신은 있나요?”
리에의 말에 한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리에를 보았다.
“회장이 될 자신은 있냐고요?”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리에가 피식 웃었다.

“그게 자신감만 가지고 될 것 같아요?”
“… 어쨌든 해볼 거야.”
“자신의 몸 안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투쟁에서 이기겠어요. 투쟁은 생각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실력이 있어야 해요.”
“내 몸 안에?”
한스는 리에의 말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내 몸 안에 뭐가 있다는 건가.

“카를로스가 오빠 몸 안에 바이오 도청벌레를 심었어요. 이건 잘게 나뉘어져 몸 안에 흡수되고 몸 안에서 결합되어 도청기로 작동하죠. 누군가가 음식물에 이 걸 투입해 넣은 것이에요. 그게 누군지는 잘 알겠죠? 난 그 년을 보고 바로 알았어요.”
“링링이?”
한스는 말을 하면서도 불안에 떨었다.

“그래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까 엄마의 집무실이나 이곳은 도청 차단이 되는 장소에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은 절대 그들이 못들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는 그동안 회사의 차기 후계자가 누가 될까 주시해 왔어요. 서열 6위 마켓팅기획서기 장리웨이, 서열 7위 전략정보처 헤드 메사 카를로스, 서열 8위 특전단사령관 질풍노도 칼리프 야마니, 이 셋이 유력한 후보들이었죠. 그 중에서도 카를로스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어요.”
“…”
“카를로스가 트윈에 온 적이 있죠. 그때도 나는 그를 시험해 봤어요. 그자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요. 본부에 와서도 그자는 엄마와만 협상을 했죠. 옆에 있던 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했어요. 나는 그때 그 자를 마음에서 지웠어요. 그런데 이번에 오빠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죠. 회장의 아들.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온 남자들을 세심히 조사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제임스에게 접근했던 것이에요. 그리고 오빠가 나를 알아봤죠.”
“…”
“그때의 떨리는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아세요?”
“…”
“회장의 아들은 다르구나. 이 남자는 나와 뭐가 통하겠지. 이 남자가 회장의 아들이고 후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제임스는 회장의 아들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지요.
“…”
“그런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가 회장의 딸이었을까. 난 어제 그 사실을 알고 한잠도 못잤어요.”
“…”
“오빠. 어찌 됐던 먼저 힘을 키워 카를로스를 누르세요. 내가 도와 드릴께요.”
“…”
“언제 어느 곳이 되었던 리에는 오빠의 곁에서 오빠의 힘이 되어 드릴께요. 나를 100% 믿고 신뢰해도 좋아요. 회사 밖에서는 회사가 더 잘보인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좋아, 리에. 너를 믿을게. 그리고 네 말을 명심할께.”
“…됐어요, 오빠. 이만 가세요. 너무 오래 있으면 엄마와 카를로스가 의심해요.”
“그러면…”
“연락할 방법은 나중에 전달될 것이에요.”
“고마워, 리에. 그럼… 안녕히…”
한스는 말꼬리를 흐리며 돌아서서 트레일러 쪽으로 걸어갔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마음은 답답하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스가 트레일러에 오르려는 순간 울음 섞인 외침이 들렸다.
“바보! 한번만 안아주고 가란 말야!”

한스는 잠깐 멈칫하고 멈춰 섰다가 잦아드는 울먹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뒤돌아보지 않고 트레일러에 올랐다. 자신의 차에 타고 후진 기어를 넣은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내일은 블루센?에 가봐야 해요.”
링링이 언제나처럼 명랑하게 말했다. 한스는 무표정하게 링링을 쳐다봤다. 이 여자가 정말 카를로스의 끄나풀? 그렇다면 어제 마칼레나가 한 말은… 한스는 카를로스에게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와 마칼레나에게 했던 행동, 그리고 리에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 속이 무거웠다.
“레드상깡이 금융중심지라면 블루센?은 현물 교역의 중심지에요. 그곳도 가봐야 트윈을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있죠. 바로 출발할 거니까 준비하세요.”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링링을 따라 나설 차비를 했다.

또다시 부글거리는 붉은 가스거성의 궤도를 따라 도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폭풍에 따라 이리 저리 휘몰아치는 붉은 색 가스덩어리들의 모습은 한스의 가슴 속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멀리서 자그마한 푸른 색 혹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네랄 보지 판매 주식회사’
한스가 블루센?의 지상 계류장에 내려 제일 먼저 접한 광고판의 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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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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