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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3:17 2,117회 0건
별거女와 그녀의 딸 5부
5 부 - 아내와 브루넷(brunette)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 안에 거뭇거뭇한 선지와 콩나물이 맛있게

익어갔습니다. 그녀가 제 국그릇에 고추기름과 다대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해장국은 왜 이렇게 허름한 집에서 먹어야 맛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와 전

약간 부운 얼굴로 말없이 해장국만 먹었습니다.

지난 밤, 두 사람은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세 번의 격렬한 정사(情事)를

치러냈습니다. 솔직히 눈도 안 떠지는 걸 억지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그녀를 데려다 주는 차안에서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그녀도 얼른 들어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애들은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걱정마라니까. 나 가끔 밤새고 들어갈 때 있어... 요즘 방학이라 애들 아침

일찍 일어날 일도 없고... 막내나 이따 오후에 학원 보내면 돼.”

“오늘 토요일인데도 학원엘 가? 우리 딸은 토요일에 미술학원 안 가던데...”

“애들이랑 똑같나... 중학생들 보습학원은 토요일 일요일도 없어...”

“애들도 고생이 많구나... 세상에 원 학원 안 다니는 애들이 없으니...”

“누가 아니래, 생각 같아서는 나도 놀게 두고 싶은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야지...”


지난밤의 환락(歡樂)은 어디가고, 두 사람은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녀를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려주고 저는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한참동안 서서 저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 한 번씩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외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하는 시간에

그녀를 만나서 그 짓거리를 하기는 더 더욱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서울에라도 산다면 저녁 때 퇴근하고 만나서, 한 번하더라도 늦게 집에 들어가면

되는데, 안양까지는 퇴근시간에 이래저래 길 막히고,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 나중에라도 전화해서 두 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만나자고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사무실 부근으로 돌아오자 이래저래 11시가 되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한다는 게

무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오늘 출근 못한다고 얘기하고,

처리하지 못한 일 몇 가지를 이것저것 지시했습니다. 토요일은 그나마 반나절만

일하니까 다행이지만, 바람피우면서 일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제 자신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피곤이 급속히 밀려 왔습니다.

전 사무실 뒤 사우나에 가서 한숨자고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왠지 무거운

마음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알지 못할 허전함과 써늘함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벌써 2시가 넘었습니다.

전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두 시간을 넘게 잠을 잤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오히려 몸이 더 뻐근했습니다.

탈의실에서 주섬주섬 옷을 입다 보니 와이셔츠 칼라가 시커멓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입고 또 입으려고 하니 그런 모양입니다.


‘난 와이셔츠 이틀 안 입는데...’


바람을 피운 흔적이었습니다. 집에서 오늘 아침 출근을 했다면, 이렇게 더러운

옷을 다시 입진 않았을 텐데... 아니, 정말 상갓집에만 갔어도 이 더러움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만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출근도 안했다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내는 보자마자 신경질을 냈습니다. 벌써 미스 곽하고 통화를 한 모양입니다.

전 댓구할 기력도 없었습니다.


“토요일이라고 일찍 들어오는 것도 없고, 요즘 애 데리고 어디 놀러간 적도 없고...

당신 요즘 왜 그래?”


아내의 짜증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평소 같으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아무 소리 못했습니다.


“롯데 월드가 여기서 몇 분이나 걸리냐... 몇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고 엎드리면

코 닿는 곳 인데 애 데리고 거길 한 번 못 가냐, 지은이가 벌써 언제부터

롯데 월드 얘기를 했어?”

“알았어... 다음에 꼭 갈께... 오늘은 피곤해서 그래...” “맨 날 다음에, 다음에... 도대체 다음에 언제? 애 데리고 가서 스케이트 한 번

타는 게 그렇게 힘들어? 상갓집에 가서 늦게 와가지곤 출근도 안 하고...

지은아빠 요즘 너무 변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하니까 밤새느냐고

늦게 일어나서 그러지...”


아내의 바가지와 저의 변명 섞인 거짓말은 내내 이어졌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아내의 바가지를 그냥 참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닌데, 그 날은 무조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내의 끝없는 잔소리를 뒤로한 채 전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옷도 대충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습니다. 더러워진 와이셔츠, 러닝셔츠, 팬티를 갈아입으면서

허탈한 감정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옷들을 보고 있자니, ‘은주’생각이

났습니다. 은주하고도 지금 이런 무거운 기분으로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박. 은. 주...

그녀가 누구냐고요? 전에 언급했던 대학 후배 기억하십니까? 한 번 뽀지게

하고 나니까 저를 ‘너’라 불렀다던... 그녀는 저에게 ‘여자’를 처음 알게 해준

여자였습니다. 그녀와 키스도 처음 해봤고, 제 동정도 그녀가 가졌습니다. 그녀는

약간 통통한 여자였습니다.

머릿결이 유난히 검고 윤기가 나서 제가 ‘백 만 불짜리 머릿결’이라 불렀습니다.

피부도 약간 까무잡잡해서 쉽게 설명해 ‘브루넷(brunette)’스타일의 여자였습니다.

그녀와는 제대(除隊)하고 복학하기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복학 전, 미리 공부 좀

하겠다고 학교 도서관을 오고 가던 시절, 휴학 전에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사회참여봉사 동아리를 찾았습니다. 복학은 아직 안했지만, 예전 동기들과

선후배들 사이에서 열심히 활동을 다시 시작한 저는 일찌감치 차기회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은주가 있었습니다. 은주는 피아노를 잘 치던

음악과 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대민 봉사 활동이나 학생회 출정식 등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앞에 나가 키보드를 쳤습니다. 코도 납작하고 앞니가 덧니인 그녀의

얼굴은 별로 예쁜 편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색기(色氣)가 철철 넘치던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주변에 남자가 많았고, 듣기에는 누구누구가 그녀와

자봤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도 그녀가 섹시하게

보였습니다. 피아노도 잘치고 매사 자신이 넘치는 모습, 무엇보다도 뇌쇄적인

그 눈빛... 여러분도 한 번 봤다면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리라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전 굉장히 보수적이고, 개성보다는 전체를 중시하는 꽉 막힌

인간이었습니다.

속으로는 은주를 생각하면서 딸(?)을 잡았지만,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했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너무 천박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녀와 가까와진 계기는 저의 그 고지식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복학을 하고 차기 회장이 되어 동아리 일에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그녀가 아주

많이 짧은 미니스커트에 검은 망사스타킹을 신고 동아리 방에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남학생들의 시선은 거기에 집중되었고, 여자애들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저도 자꾸만 거기에 시선이 가서 일이 집중이 안됐습니다. 그녀는 주위 시선에

아랑곳 않고 평소 성격대로 깔깔거리며, 이리저리 동아리 방안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전 그런 모습을 회장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대학생이면 성인인데 옷 입은 것 가지고

뭐라 했으니... 동아리 방이 무슨 청학동 서당도 아니고...^^;


“야, 박은주, 너 옷 그렇게 밖에 못 입고 다녀? 그게 학생이냐, 어디 일 나가는

애들 복장이지.”


그렇지 않아도 앞뒤 꽉 막히고, 보수적이란 소릴 많이 듣던 전 데,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여학생한테 옷 입은 걸 갖고 그런 식으로 소리를 질렀으니,

분위기 상상만 해도 아시겠죠? 동아리 방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것처럼

썰렁해졌습니다. 은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여자 후배들이 그녀를 내보내고 저한테 뭐라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선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너무 심했어요.”


저도 표현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면 사과 하세요...”


전 아무소리 않고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며칠 후, 도서관에서 그녀를 다시 보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뭔가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커피나 한 잔 사주면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하니?”


그녀가 깜짝 놀라며, 저를 올려다 봤습니다.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밝은 웃음으로 저를 반겼습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너랑 커피나 한 잔 할까 해서... 바쁘니?”


은주와 저는 따뜻한 봄볕이나 쐬자며, 커피를 들고 학교 호숫가로 갔습니다.


“선배님은 너무 무서워요.” 그녀가 웃는 얼굴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번엔 내가 실수했다. 화 많이 났지?”

“아뇨. 선배님 말이 맞는 데요, 뭘. 저 그래서 요즘 미니스커트 안 입고

다니잖아요.”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아네요, 저 선배님 말 잘 듣기로 했어요. 그래야 밥도 많이 사줄 거 아니에요...

호호.”

“후후, 그래.”

“선배님, 군대가기 전에 대단했다면서요.”

“누가 그래?”

“얘기 들어보니까,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총학생회에서도 선배님 모르면

우리 학교 학생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지난 번 총선 때는 김OO 의원이 같이

일하자고 그랬다면서요?”

“다 옛날 얘기야, 부풀려진 것도 많고.”


그 날 이후, 은주와 저는 급속도로 가까워 졌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도서관에서도 나란히 앉아 공부도 했습니다. 그녀는 리더십이 있는

남자가 좋다며, 제 말을 아주 잘 들었습니다. 동아리에서는 어느 새 우리 둘을

커플로 인정했습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은주는 순수한 처녀는 아니었습니다.

만났던 남자도 소문대로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랑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와 양다리를 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전력(前歷)

때문일까요, 저도 그녀와 끝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같이 다닌

지 한 달 만에 우리는 첫 키스를 했고, 그로부터 보름 뒤, 전 동정을 그녀에게

바쳤습니다. 저와 그녀는 졸업 때까지, 거의 매일 붙어 다녔습니다.

처음 말씀드린데로, 어느 날 그녀의 자취방에서 뽀지게 한 판 한 다음부터는

그녀와 너, 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나이는 어리지만,

남자를 다룰 줄 아는 여자였습니다.


졸업 후, 그녀는 고향인 대전으로 갔습니다. 모 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것입니다.

전 가지 말라고 붙들지 않았습니다. 당장 결혼하자고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전력과 성격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전 모 보험회사에 취직을 했고,

둘은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계속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옷이니

화장품이니 사달라는 게 많았습니다. 처음엔 부담 없이 사주었지만, 가면 갈수록

도가 지나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자주 보지

못했기에, 그녀에 대한 감정도 점점 시들시들해졌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저에게 새 남자가 생겼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전 몹시 화를 내며 전화를 격하게 끊었지만, 어쩌면 이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전화를 할 수 있니?”

“너가 내 옆에 있어주지도 못하잖아. 난 외로운 건 못 참아. 너가 여기 와 줄 거

아니면 아무소리도 하지 마.”

“너 그 놈 사랑하니?”

“난 누구도 사랑 안 해. 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난 남자 없인 못 살아.

외롭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너의 외로움을 달래준 남자 중에 하나였단 말이구나?”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넌 지금 내 옆에 없잖아...”


전화를 끊고서 한동안 전혀 연락을 안했습니다. 배신감에 연락 안했다고

말 하기엔 제 자신이 떳떳하지만은 않습니다. 솔직히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결혼하기엔 너무 남자경험도 많고 사치성이 강한 여자. 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도 그녀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건 아니었던 같습니다.

그리고선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월미도의 한 모텔 방에서

밤새도록, 그 동안 대전에서 사귀었던 남자들의 얘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전 배신감이나 분노 같은 건 느끼지 안았습니다. 저 역시 따지고 보면 외로워서

수시로 남자를 갈아 치우는 그녀랑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와의 재회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제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보름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나 결혼해...”


그녀와 막 일을 치룬 후, 침대에 걸쳐 앉아 얘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 동안 아무소리 안했잖아... 혹시 사고쳤니?”

“그런 거 아냐.”

“그래서 지금 뭐야...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재미나 보자고

날 부른 거야? 이 나쁜 새끼야!”


그녀는 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날 보낼 수 없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격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전 흐느껴 우는 그녀를 뭐라고 달래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새끼야, 난 그래도 넌 다른 놈들하고 다를 줄 알았어, 이 씨팔 새끼야...

엉엉.”


결혼하고도 가끔 그녀를 만났습니다. 잠자리도 몇 번 했습니다. 그녀는 여태도

마냥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항상 외로워하고, 항상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결혼할 생각은 지금도 없다고 합니다.


“너 같은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안 해.”


전 그게 거짓도 참도 아닌 그녀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항상 다짐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하고

싶을 때마다, 아내보다는 그녀가 먼저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녀가 제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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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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