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女와 그녀의 딸 7부
7 부 - 친구
놀이동산을 다녀온 후, 일주일 만에 미순을 만났습니다. 전 지난 두 세 달 동안
너무 많은 외박과 잦은 외출로 집에서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전 미순에게 더 이상 외박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수긍을 했습니다. 전 대신 자주 만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날은 일찍 만나, 일찌감치 한 판 하고 10시 전에 모텔에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가니까 덜 피곤하겠네...”
전 아무소리 없이 운전만 했습니다.
“자기, 나랑 밤 안 세우니까 좋지?”
그래도 전 아무소리 안했습니다.
“요즘 자기 말 수가 너무 적어진 거 알아?”
“마누라가 요즘 날 의심해. 골치 아파...”
“뭐라고 그래?”
“무슨 장거리 출장이 그렇게 많냐고...”
“요즘 조심해야겠다. 와이프한테 잘 해줘라.”
“그래야지...”
“우리가 만나는 거 눈치 챘을까?”
“글쎄...”
저는 한 동안 또 깊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
“우리 만나지 말까?”
“......”
“그러고 싶으면 얘기해, 난 괜찮으니까.”
“됐어. 괜히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마.”
전 모질게 이 여자를 내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요즘은 미순을 만나서 해도 처음처럼 정력적으로 하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아선, 차라리(?) 아내랑 하는 게 부담도 없고 잘 될 것
같았습니다.
한 참 뒤, 부담스런 적막을 깨고 그녀가 말을 걸었습니다.
“자기야, 우리 집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
“커피? 아냐 됐어.”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 애들도 지난번에 삼촌이 너무 고마웠다고 언제 한 번
집에 데리고 오라 했단 말야.”
“그랬어? 애들이 지금 집에 있단 말이지?”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혜진이도...?”
“아마 그럴 껄...”
전 혹시나 혜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애들 자는 시간인데, 괜히 그런 거 아냐...?”
“괜찮아. 우리 애들 이렇게 일찍 안 자... 아마, 안 자고들 있을 거야.”
“그럼 커피만 한 잔 하고 갈까... 요즘 피곤해서 자꾸 졸음운전을 하게
되더라구...”
“그래, 들어가자. 나 커피 잘 끓인다.”
저는 이런 시간에 그 녀 집에 들른다는 게 조금 그랬지만, 혜진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혜민이는 잠잘 때 입는 츄리닝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미순의 집은
여자들만 집치곤 좀 어수선했습니다. 미순이 주섬주섬 치우면서 괜스레 변명을
했습니다.
“원래, 여자들만 사는 집이 더 청소를 안 하는 법이야. 헤헤헤”
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혜진이가 어디 있나 찾았습니다.
제가 혜민이와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동안, 미순은 커피 물을 끓이며, 사과를
깎았습니다.
“혜민아, 언니 나와서 삼촌한테 인사드리라고 그래.”
혜민이는 언니를 부르러 방으로 갔습니다.
‘혜진이가 있긴 있구나...’
방에서 나온 혜진은 흰 면T에 반바지를 입고 나왔습니다. 화장끼가 하나도 없는
18살의 순수한 얼굴 그 자체였습니다. 어찌보면 앳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피부는 자기 엄마 닮아서 뽀얀 게 깨끗했습니다. 전에 놀이동산에선 몰랐는데,
혜진은 목도 길고, 손가락도 길고 팔다리도 긴 게 조금 마른 체형이었습니다.
“오셨어요....”
“어, 그래 잘 있었니?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 시간은 저희 집에선 초저녁이에요.”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혜진을
흘긋흘긋 쳐다보았습니다.
‘쟤도 과연 남자경험이 있을까, 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번에 보니
날라리 기질이 조금 있던데...’
요런 불순한 생각과
‘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쟤는 아직 어린애 인데... 안 되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괴롭혔습니다.
아무튼 그 날 저녁은, 혜진이를 다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아주 우연한 기회에 혜진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살려고 벼르던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기 위해, 강남역(驛) 부근의
T 전자마트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전자제품 상가를 다 돌아본 후, 또 뭔가 구경할게 없나 해서, 8층 컴퓨터 상가를
둘러 볼 때였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와락’ 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두 여자애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혜진이였습니다. 또 하나는 친구 같아 보였습니다.
“아저씨. 안녕. 깜짝 놀랬죠?”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나이보다 조숙한 화장을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번의 그 삐딱한 반항아가 아니라 생기발랄한 여자애의
모습이었습니다.
“어, 혜진이 아니니? 깜짝 놀랐네...”
(속마음 : 놀란 게 아니라, 널 만나서 좋네...^^)
혜진이는 친구가 화상채팅 할 때 쓰는 카메라를 사러 오는데, 따라 왔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어, 그냥 우리 삼촌.” 친구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그까짓 걸 사려고, 여기 까지 왔어?”
“이따 저녁에 옷 보러 동대문에도 갈 거예요.”
“점심은 먹었니?”
“아저씨 우리 맛있는 거 사주실래요? 배고파 죽겠어요.”
“그래? 그럼 우리 어디 가서 밥 먹자.”
“와~ 신난다. 우리 엄청 배고팠었는데...”
덩달아 친구도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친구라는 아이는 정말
오리지널(?) 날라리 차림이었습니다. 왜색풍(倭色風)의 화장을 하고 촌스런
머리핀에, 청치마, 끝이 뾰족하고 긴 구두... 정말 혜진이만 아니었다면,
제가 그런 아이랑 밥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세 사람은 건물 지하, ‘푸드 파크(food park)’로 갔습니다. 혜진과 친구는
여학생답게 떡볶이니 김밥이니 이런 걸 잔뜩 시켜서 먹었습니다. 재잘재잘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여고생 특유의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은
수다를 떨었습니다. 전 그저 혜진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오늘 안 바빠요?”
“왜? 오늘 바쁜 일은 없는데...”
(속마음 : 오늘도 늦게 들어가면 나 집에서 쫓겨난다.)
“그럼 우리 영화 보여주세요.”
“영화? 무슨 영화?”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친구’라고 외쳤습니다.
“친구? 그거 미성년자 관람불가잖아?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 영화,
표 구하기도 꽤나 힘들 껄...”
“우리가 알아서 표 구해오면 보여주실 거예요?”
“그래도 니들은 못 들어가잖아?”
“그런 건 걱정 마시고요...”
“음... 그렇게 자신 있으면 좋다, 가자.”
둘은 또 다시 환호를 질렀습니다.
극장 앞에서 그 친구는 표를 구해 온다며, 5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인데다가, 미성년자 특별 통과비용 얼마가 더 든다며 날름 돈을
받아갔습니다. 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오려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그저
그 돈으로 암표나 구해오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됐어요, 가요.”
그들은 저를 끌고 극장으로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표를 받는 곳을 지날 때
혜진이 친구가 창구에 다가 그저 웃으면서 손만 흔들고 통과했습니다.
창구에 있던 여직원이 답례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분명히 거기엔 직원인 듯한 나이 많은 남자도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못 본 척 했습니다. 알고 보니, 창구 여직원은 학교를 일찍 그만둔 그녀들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그 극장에 와서 그런 식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곤 했던 겁니다. 어쩐지 좋은 극장 다 나두고, 왜 이런
변두리 극장을 택해서 오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저, 혜진이, 친구 이런 순서로 앉아서 영화를 봤습니다. 둘은 내내 소리를 지르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팝콘을 씹으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어머머머, 장동건, 저 눈빛 좀 봐... 쥑인다이...”
“나 벌써 질질 쌌어...”
둘은 비속어나 욕을 정말 잘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전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녀들의 천박한 언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혜진과
살이 맞닿아 있다는 느낌...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온 신경이
그녀와 맞닿고 있는 한 쪽 팔에 가있으니까, 당연히 저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혜진이가 제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요. 저 이 영화 꼭 보고 싶었거든요...”
전 그저 담담한 미소로 답했지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제 귀를 자극한
그녀의 입김... 정말 뜨거웠습니다.
‘후~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얜 이제 고2 인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예쁜 애도
아닌데... 내가 어린애를 두고 왜 이러지 정말...’
전 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그냥 혜진이를 조카 정도로만 여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혜진이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화면을 보고나서야
전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는 장동건이 웬 사내에게
아주 잔인하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장동건은 피를 를 흘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마니 묵었다... 고마 해라...”
혜진은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물었습니다.
“끝났어요, 그 장면?”
“어, 장동건 죽었어.”
혜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게 뭐가 잔인하다 그래, 이 년아.” 친구가 한 마디 했습니다.
“싫어, 난 저런 거. 장동건이 왜 죽어야 돼. 씨발 이 영화 졸라 못 만들었다.”
“니가 더 재수 없다. 이 년아. 멋있기만 한데.”
둘이서 옥신각신하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극장에서 나온 우리는,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습니다. 혜진과 친구는 동대문상가까지 가는 일을 상의하는
듯싶었습니다.
“저기요, 삼촌. 동대문도 같이 가실 건가요?” 친구가 저에게 대신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건데?”
“실은요, 제가 오늘 혜진이랑 동대문 같이 가기로 했는데, 못 갈 거 같아서요.
갑자기 아는 오빠한테 연락이 와서 가봐야 돼요. 그래서 얘긴데, 혜진이 혼자
동대문가긴 그렇잖아요... 삼촌이 저 대신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그렇구나. 난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혜진이는 안양까지 데려다 줄
참이었으니까.”
(속마음 : 너 아직도 안 갔니?)
“잘 됐다. 너 그럼 삼촌이랑 동대문가라.”
“야 이 년아, 너 정말 이런 식으로 그럴래?”
“미안, 상철이 오빠가 지금 졸라 짱나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나 먼저 간다.”
“이 쌍놈의 기집애, 너 두고 봐.”
친구는 미안한 표정으로 가는 것 같더니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야, 너 저 삼촌. 니 네 진짜 삼촌 아니지? 이거지?”
친구는 손가락으로 원(동그라미)을 그려 보였습니다.
“미친 년.”
친구가 약 올리듯 메롱거리며 저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아까 그게 무슨 뜻이야? 걔가 손으로 뭐라는 거야?”
“몰라도 돼요.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쳐요.”
“내가 니 물주(物主)라는 뜻이니?”
“아니요, 비슷한 거. 아저씨도 해봤는지 모르겠는만...”
“그게 도대체 뭔데?”
“원조.”
원조... 심장이 다시 한 번 멎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정말 눈하나
까닥 안하고 그 단어를 뱉어냈습니다.
“너 원조교제도 하니?”
“그런 거 안 해요.”
“그런 거 하면 큰일 난다. 절대하지 마.”
“걱정 마세요. 제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한답니다.”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
“동대문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그녀는 매몰차게 제 얘기를 끊어버렸습니다.
토요일 오후의 동대문은 별천지였습니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지 발 딛을
틈이 없었습니다. 혜진과 저는 서로 놓치지 않으려고 팔짱을 꼭 낀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전 평상시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는데, 그 날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허허거리며 따라 다녔습니다.
혜진은 저랑 팔짱끼고 다니는 게 별일 아니라는 듯 여기저기 옷이니,
액세서리니 구경하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음 골라봐. 아저씨가 하나 사 줄게.”
“정말요? 아이 좋아라.”
혜진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습니다. 그런 모습은 자기 엄마랑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할 뿐, 어떤 옷을
사달라고 하질 않았습니다.
“왜 맘에 드는 옷이 없어?”
“아뇨. 맘 같아선 여기 있는 옷 다 갖고 싶죠.”
“근데 왜 안 골라. 하나 사준다는데...”
“아저씨 정말 나 뭐 사줄 거예요?”
“그렇다니까. 얼른 골라봐.”
“아저씨 그럼 나 옷 말고 다른 거 사줘요.”
“뭐?”
“조금 비싼 건데.”
“말해 봐.”
“아저씨 나 핸드폰 하나 사주세요.”
“핸드폰?”
“네, 엄마가 직장 나가기 시작하면서, 제 핸드폰을 뺏어갔어요. 자기가 새로
하나 사지 정말 짜증나.”
“후후, 그랬구나.”
“요즘, 핸드폰 없이 다니는 애들 하나도 없는데, 제가 요즘 쪽 다 까고 살잖아요.”
“하하하, 그러니? 그럼 정말 하나 사줘야겠네...”
“정말요? 오... 아저씨 정말 캡이다.”
그녀는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며 저에게 매달렸습니다.
“그 대신 나도 두 가지만 약속하자.”
그 소리에 그녀는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착 내리깔고
말했습니다.
“뭐요?”
“하하, 너 왜 갑자기 표정이 왜 그러냐?”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그래, 그래. 첫째는 내가 핸드폰 사준 거 엄마한테 비밀로 하자.”
“왜요? 엄마한테 비밀로 하면 요금은 누가 내요? 저 돈 없어요.”
“당분간 내가 내줄게.”
“정말이죠?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또 뭐요?”
“또 한 가지는 거친 말 좀 하지 마라. 귀에 거슬리더라.”
제 얘기를 듣더니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겨우 그거에요?”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닷!”
안양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녀는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당시 제일
유행하던 ‘더블 폴더’형 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그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새 번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전 먼 산 바라보듯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했습니다. 요란스러운 통화를 끝낸
혜진은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무리하신 것 아니에요?”
“후후, 괜찮아. 아저씨 돈 많아.”
“아저씨 정말 돈 많이 벌어요?”
“후후, 그래... 후후후” 전 그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 왜 사주셨어요?”
“너가 사달라며?”
“그래서 사주신거에요?”
“그리고 니 네 엄마가 취직하면서 니 껄 가져갔다며? 니 네 엄마 취직시켜준 건
나니까, 나한테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 하하하...”
“그리고 또 없어요?”
“또 뭐?”
“그거 외엔 이 핸드폰 사주면서 저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냐고요?”
“아까 다 얘기했잖아. 바라는 거 두 가지.”
“정말 그게 다죠?”
“그래, 너한테 그거 하나 사주고 바랄게 뭐있어.”
“그럼 아저씨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뭘?”
“우리 엄마랑 같이 잤죠?”
“하하하, 그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잤어요, 안 잤어요? 대답 확실히 해봐요.”
“안 잤어. 엄마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정말이죠?”
“그래.”
(그 때 라디오에선 GOD의 ‘거짓말’이란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후로 한 동안 혜진이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인덕원에 다다라서야 혜진은
입을 뗐습니다.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핸드폰 잘 쓸게요.”
전 그저 말없이 웃었습니다.
“엄마 나오시라고 할까요?”
“아니.”
혜진은 저의 눈을 쳐다보면서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오늘 나한테 점수 많이 딴 거 알죠?”
“그랬니?”
“핸드폰 1번에 아저씨 번호 입력해 놓을게요.”
“저 그러면, 혜진아...”
“네?” 혜진이는 핸드폰에 제 번호를 입력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뭐요?...”
“내가 전화하면... 만날 수 있겠니?”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치켜뜨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7 부 - 친구
놀이동산을 다녀온 후, 일주일 만에 미순을 만났습니다. 전 지난 두 세 달 동안
너무 많은 외박과 잦은 외출로 집에서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전 미순에게 더 이상 외박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수긍을 했습니다. 전 대신 자주 만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날은 일찍 만나, 일찌감치 한 판 하고 10시 전에 모텔에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가니까 덜 피곤하겠네...”
전 아무소리 없이 운전만 했습니다.
“자기, 나랑 밤 안 세우니까 좋지?”
그래도 전 아무소리 안했습니다.
“요즘 자기 말 수가 너무 적어진 거 알아?”
“마누라가 요즘 날 의심해. 골치 아파...”
“뭐라고 그래?”
“무슨 장거리 출장이 그렇게 많냐고...”
“요즘 조심해야겠다. 와이프한테 잘 해줘라.”
“그래야지...”
“우리가 만나는 거 눈치 챘을까?”
“글쎄...”
저는 한 동안 또 깊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
“우리 만나지 말까?”
“......”
“그러고 싶으면 얘기해, 난 괜찮으니까.”
“됐어. 괜히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마.”
전 모질게 이 여자를 내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요즘은 미순을 만나서 해도 처음처럼 정력적으로 하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아선, 차라리(?) 아내랑 하는 게 부담도 없고 잘 될 것
같았습니다.
한 참 뒤, 부담스런 적막을 깨고 그녀가 말을 걸었습니다.
“자기야, 우리 집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
“커피? 아냐 됐어.”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 애들도 지난번에 삼촌이 너무 고마웠다고 언제 한 번
집에 데리고 오라 했단 말야.”
“그랬어? 애들이 지금 집에 있단 말이지?”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혜진이도...?”
“아마 그럴 껄...”
전 혹시나 혜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애들 자는 시간인데, 괜히 그런 거 아냐...?”
“괜찮아. 우리 애들 이렇게 일찍 안 자... 아마, 안 자고들 있을 거야.”
“그럼 커피만 한 잔 하고 갈까... 요즘 피곤해서 자꾸 졸음운전을 하게
되더라구...”
“그래, 들어가자. 나 커피 잘 끓인다.”
저는 이런 시간에 그 녀 집에 들른다는 게 조금 그랬지만, 혜진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혜민이는 잠잘 때 입는 츄리닝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미순의 집은
여자들만 집치곤 좀 어수선했습니다. 미순이 주섬주섬 치우면서 괜스레 변명을
했습니다.
“원래, 여자들만 사는 집이 더 청소를 안 하는 법이야. 헤헤헤”
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혜진이가 어디 있나 찾았습니다.
제가 혜민이와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동안, 미순은 커피 물을 끓이며, 사과를
깎았습니다.
“혜민아, 언니 나와서 삼촌한테 인사드리라고 그래.”
혜민이는 언니를 부르러 방으로 갔습니다.
‘혜진이가 있긴 있구나...’
방에서 나온 혜진은 흰 면T에 반바지를 입고 나왔습니다. 화장끼가 하나도 없는
18살의 순수한 얼굴 그 자체였습니다. 어찌보면 앳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피부는 자기 엄마 닮아서 뽀얀 게 깨끗했습니다. 전에 놀이동산에선 몰랐는데,
혜진은 목도 길고, 손가락도 길고 팔다리도 긴 게 조금 마른 체형이었습니다.
“오셨어요....”
“어, 그래 잘 있었니?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 시간은 저희 집에선 초저녁이에요.”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혜진을
흘긋흘긋 쳐다보았습니다.
‘쟤도 과연 남자경험이 있을까, 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번에 보니
날라리 기질이 조금 있던데...’
요런 불순한 생각과
‘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쟤는 아직 어린애 인데... 안 되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괴롭혔습니다.
아무튼 그 날 저녁은, 혜진이를 다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아주 우연한 기회에 혜진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살려고 벼르던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기 위해, 강남역(驛) 부근의
T 전자마트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전자제품 상가를 다 돌아본 후, 또 뭔가 구경할게 없나 해서, 8층 컴퓨터 상가를
둘러 볼 때였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와락’ 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두 여자애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혜진이였습니다. 또 하나는 친구 같아 보였습니다.
“아저씨. 안녕. 깜짝 놀랬죠?”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나이보다 조숙한 화장을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번의 그 삐딱한 반항아가 아니라 생기발랄한 여자애의
모습이었습니다.
“어, 혜진이 아니니? 깜짝 놀랐네...”
(속마음 : 놀란 게 아니라, 널 만나서 좋네...^^)
혜진이는 친구가 화상채팅 할 때 쓰는 카메라를 사러 오는데, 따라 왔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어, 그냥 우리 삼촌.” 친구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그까짓 걸 사려고, 여기 까지 왔어?”
“이따 저녁에 옷 보러 동대문에도 갈 거예요.”
“점심은 먹었니?”
“아저씨 우리 맛있는 거 사주실래요? 배고파 죽겠어요.”
“그래? 그럼 우리 어디 가서 밥 먹자.”
“와~ 신난다. 우리 엄청 배고팠었는데...”
덩달아 친구도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친구라는 아이는 정말
오리지널(?) 날라리 차림이었습니다. 왜색풍(倭色風)의 화장을 하고 촌스런
머리핀에, 청치마, 끝이 뾰족하고 긴 구두... 정말 혜진이만 아니었다면,
제가 그런 아이랑 밥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세 사람은 건물 지하, ‘푸드 파크(food park)’로 갔습니다. 혜진과 친구는
여학생답게 떡볶이니 김밥이니 이런 걸 잔뜩 시켜서 먹었습니다. 재잘재잘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여고생 특유의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은
수다를 떨었습니다. 전 그저 혜진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오늘 안 바빠요?”
“왜? 오늘 바쁜 일은 없는데...”
(속마음 : 오늘도 늦게 들어가면 나 집에서 쫓겨난다.)
“그럼 우리 영화 보여주세요.”
“영화? 무슨 영화?”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친구’라고 외쳤습니다.
“친구? 그거 미성년자 관람불가잖아?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 영화,
표 구하기도 꽤나 힘들 껄...”
“우리가 알아서 표 구해오면 보여주실 거예요?”
“그래도 니들은 못 들어가잖아?”
“그런 건 걱정 마시고요...”
“음... 그렇게 자신 있으면 좋다, 가자.”
둘은 또 다시 환호를 질렀습니다.
극장 앞에서 그 친구는 표를 구해 온다며, 5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인데다가, 미성년자 특별 통과비용 얼마가 더 든다며 날름 돈을
받아갔습니다. 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오려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그저
그 돈으로 암표나 구해오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됐어요, 가요.”
그들은 저를 끌고 극장으로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표를 받는 곳을 지날 때
혜진이 친구가 창구에 다가 그저 웃으면서 손만 흔들고 통과했습니다.
창구에 있던 여직원이 답례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분명히 거기엔 직원인 듯한 나이 많은 남자도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못 본 척 했습니다. 알고 보니, 창구 여직원은 학교를 일찍 그만둔 그녀들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그 극장에 와서 그런 식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곤 했던 겁니다. 어쩐지 좋은 극장 다 나두고, 왜 이런
변두리 극장을 택해서 오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저, 혜진이, 친구 이런 순서로 앉아서 영화를 봤습니다. 둘은 내내 소리를 지르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팝콘을 씹으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어머머머, 장동건, 저 눈빛 좀 봐... 쥑인다이...”
“나 벌써 질질 쌌어...”
둘은 비속어나 욕을 정말 잘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전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녀들의 천박한 언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혜진과
살이 맞닿아 있다는 느낌...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온 신경이
그녀와 맞닿고 있는 한 쪽 팔에 가있으니까, 당연히 저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혜진이가 제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요. 저 이 영화 꼭 보고 싶었거든요...”
전 그저 담담한 미소로 답했지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제 귀를 자극한
그녀의 입김... 정말 뜨거웠습니다.
‘후~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얜 이제 고2 인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예쁜 애도
아닌데... 내가 어린애를 두고 왜 이러지 정말...’
전 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그냥 혜진이를 조카 정도로만 여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혜진이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화면을 보고나서야
전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는 장동건이 웬 사내에게
아주 잔인하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장동건은 피를 를 흘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마니 묵었다... 고마 해라...”
혜진은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물었습니다.
“끝났어요, 그 장면?”
“어, 장동건 죽었어.”
혜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게 뭐가 잔인하다 그래, 이 년아.” 친구가 한 마디 했습니다.
“싫어, 난 저런 거. 장동건이 왜 죽어야 돼. 씨발 이 영화 졸라 못 만들었다.”
“니가 더 재수 없다. 이 년아. 멋있기만 한데.”
둘이서 옥신각신하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극장에서 나온 우리는,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습니다. 혜진과 친구는 동대문상가까지 가는 일을 상의하는
듯싶었습니다.
“저기요, 삼촌. 동대문도 같이 가실 건가요?” 친구가 저에게 대신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건데?”
“실은요, 제가 오늘 혜진이랑 동대문 같이 가기로 했는데, 못 갈 거 같아서요.
갑자기 아는 오빠한테 연락이 와서 가봐야 돼요. 그래서 얘긴데, 혜진이 혼자
동대문가긴 그렇잖아요... 삼촌이 저 대신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그렇구나. 난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혜진이는 안양까지 데려다 줄
참이었으니까.”
(속마음 : 너 아직도 안 갔니?)
“잘 됐다. 너 그럼 삼촌이랑 동대문가라.”
“야 이 년아, 너 정말 이런 식으로 그럴래?”
“미안, 상철이 오빠가 지금 졸라 짱나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나 먼저 간다.”
“이 쌍놈의 기집애, 너 두고 봐.”
친구는 미안한 표정으로 가는 것 같더니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야, 너 저 삼촌. 니 네 진짜 삼촌 아니지? 이거지?”
친구는 손가락으로 원(동그라미)을 그려 보였습니다.
“미친 년.”
친구가 약 올리듯 메롱거리며 저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아까 그게 무슨 뜻이야? 걔가 손으로 뭐라는 거야?”
“몰라도 돼요.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쳐요.”
“내가 니 물주(物主)라는 뜻이니?”
“아니요, 비슷한 거. 아저씨도 해봤는지 모르겠는만...”
“그게 도대체 뭔데?”
“원조.”
원조... 심장이 다시 한 번 멎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정말 눈하나
까닥 안하고 그 단어를 뱉어냈습니다.
“너 원조교제도 하니?”
“그런 거 안 해요.”
“그런 거 하면 큰일 난다. 절대하지 마.”
“걱정 마세요. 제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한답니다.”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
“동대문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그녀는 매몰차게 제 얘기를 끊어버렸습니다.
토요일 오후의 동대문은 별천지였습니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지 발 딛을
틈이 없었습니다. 혜진과 저는 서로 놓치지 않으려고 팔짱을 꼭 낀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전 평상시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는데, 그 날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허허거리며 따라 다녔습니다.
혜진은 저랑 팔짱끼고 다니는 게 별일 아니라는 듯 여기저기 옷이니,
액세서리니 구경하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음 골라봐. 아저씨가 하나 사 줄게.”
“정말요? 아이 좋아라.”
혜진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습니다. 그런 모습은 자기 엄마랑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할 뿐, 어떤 옷을
사달라고 하질 않았습니다.
“왜 맘에 드는 옷이 없어?”
“아뇨. 맘 같아선 여기 있는 옷 다 갖고 싶죠.”
“근데 왜 안 골라. 하나 사준다는데...”
“아저씨 정말 나 뭐 사줄 거예요?”
“그렇다니까. 얼른 골라봐.”
“아저씨 그럼 나 옷 말고 다른 거 사줘요.”
“뭐?”
“조금 비싼 건데.”
“말해 봐.”
“아저씨 나 핸드폰 하나 사주세요.”
“핸드폰?”
“네, 엄마가 직장 나가기 시작하면서, 제 핸드폰을 뺏어갔어요. 자기가 새로
하나 사지 정말 짜증나.”
“후후, 그랬구나.”
“요즘, 핸드폰 없이 다니는 애들 하나도 없는데, 제가 요즘 쪽 다 까고 살잖아요.”
“하하하, 그러니? 그럼 정말 하나 사줘야겠네...”
“정말요? 오... 아저씨 정말 캡이다.”
그녀는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며 저에게 매달렸습니다.
“그 대신 나도 두 가지만 약속하자.”
그 소리에 그녀는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착 내리깔고
말했습니다.
“뭐요?”
“하하, 너 왜 갑자기 표정이 왜 그러냐?”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그래, 그래. 첫째는 내가 핸드폰 사준 거 엄마한테 비밀로 하자.”
“왜요? 엄마한테 비밀로 하면 요금은 누가 내요? 저 돈 없어요.”
“당분간 내가 내줄게.”
“정말이죠?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또 뭐요?”
“또 한 가지는 거친 말 좀 하지 마라. 귀에 거슬리더라.”
제 얘기를 듣더니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겨우 그거에요?”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닷!”
안양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녀는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당시 제일
유행하던 ‘더블 폴더’형 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그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새 번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전 먼 산 바라보듯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했습니다. 요란스러운 통화를 끝낸
혜진은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무리하신 것 아니에요?”
“후후, 괜찮아. 아저씨 돈 많아.”
“아저씨 정말 돈 많이 벌어요?”
“후후, 그래... 후후후” 전 그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 왜 사주셨어요?”
“너가 사달라며?”
“그래서 사주신거에요?”
“그리고 니 네 엄마가 취직하면서 니 껄 가져갔다며? 니 네 엄마 취직시켜준 건
나니까, 나한테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 하하하...”
“그리고 또 없어요?”
“또 뭐?”
“그거 외엔 이 핸드폰 사주면서 저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냐고요?”
“아까 다 얘기했잖아. 바라는 거 두 가지.”
“정말 그게 다죠?”
“그래, 너한테 그거 하나 사주고 바랄게 뭐있어.”
“그럼 아저씨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뭘?”
“우리 엄마랑 같이 잤죠?”
“하하하, 그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잤어요, 안 잤어요? 대답 확실히 해봐요.”
“안 잤어. 엄마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정말이죠?”
“그래.”
(그 때 라디오에선 GOD의 ‘거짓말’이란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후로 한 동안 혜진이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인덕원에 다다라서야 혜진은
입을 뗐습니다.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핸드폰 잘 쓸게요.”
전 그저 말없이 웃었습니다.
“엄마 나오시라고 할까요?”
“아니.”
혜진은 저의 눈을 쳐다보면서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오늘 나한테 점수 많이 딴 거 알죠?”
“그랬니?”
“핸드폰 1번에 아저씨 번호 입력해 놓을게요.”
“저 그러면, 혜진아...”
“네?” 혜진이는 핸드폰에 제 번호를 입력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뭐요?...”
“내가 전화하면... 만날 수 있겠니?”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치켜뜨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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