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랑 5-2
오랜만에 나와보는 명동이다.
초저녁의 다소 분주한 듯한 분위기에 살짝 온 비의 물내가 섞여 비릿하게 느껴지는데
"오필리아"의 2층 나무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떨리는 듯 가볍다
오크목으로 만든 문을 밀고 들어가니 실내의 어둠이 동공을 덮쳐와 시야를 가린다.
테이블마다 빨간 막대등이 그나마 발길을 비쳐주는 가운데 코너를 돌아서니 전면창에 코발트빛 저녁거리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그 가운데 서혜가 뒤쪽 2번째 테이블에 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다.
서혜.
한달간 그렇게 찾았던, 그리워하던, 수업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무시로 다가오던 그 서혜가. 그래서 가을 하늘의 시린 청명함처럼 나를 그리움에 슬프게 하던 그녀가, 바로 이 앞에 불과 3발자국 앞에 앉아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 항상 떠오르던 그녀. 분명히 나의 품안에서 감은 눈을 파르르 떨며 관능을 불태웠던 그녀가 이제 또 다른 여인의 모습으로 가까이 앉아 있다. 오필리아의 모습으로.
"오랫만이네요" 그녀 앞좌석의 시트에 몸을 묻으며 말을 건넨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미소로 답한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왼쪽 머리를 쓸어올린다. 실컷 울고 난 뒤의 개운함같은 푸르스름이 그녀 왼쪽 뺨에 비친다.
"비가 참 예쁘게 왔어요." 입고 있는 하늘색 니트 티처럼 화사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비로소 그녀와 같이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테이블위의 성냥을 집어 담배불을 붙이고 말을 건넨다. 약간의 투정을 섞어서.
"많이 찾았더랬어요"
하긴 하루 같이 잤다고 내가 그녀의 행방을 추궁할 입장은 아니다.
"본국에 다녀왔어요. 할머니도 편찮으시고 머리도 아프고 해서요"
"본국?" 아, 그렇지 그녀는 화교였었지.
"그랬어요? 미리 얘기라도 좀 하고..." 염치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려는데
"미안해요." 그녀의 다소곳한 사과가 들려온다.
그녀도 그날 밤의 일을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시시콜콜히 말하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입밖으로 차마 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는 말. 대신에
"할머님은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
"예. 이번에 모시고 나와서 입원시켜드렸어요. 오빠가 고생많았어요"
"오빠가 있었어요?"
"예, 많아요. 5남1녀중 막내예요. 셋째 오빠가 본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해요"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도형씨 생각 많이 했어요. 고마운 분이라는 걸 알았어요."
난처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저 그녀의 가슴께에 무심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가는 숨을 쉬면서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져 온다.
"강재씨가 입버릇처럼 말했었어요."
" ? "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형씨를 찾지 말라고요. 절대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리고 2년 후에 찾아가라고요. 저는 그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어요. 제가 물으면 그냥 웃기만 했었어요" 그녀는 목이 메이는 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을 삼킨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드는 모습에서 여인의 냄새가 강하게 전해져 온다. 그래 강재녀석이라면 그 웃음과 함께 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따뜻하게 보듬어 줬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그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반추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관능과는 또 다른 따뜻함과 그리움일 것이다.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 본다. 눈으로만.
"강재씨는 그렇게 갈 줄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도형씨에게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요. 2년 후에요" 핸드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낸다.
"그이 장례가 끝난 후 많은 분들이 위로해 줬어요. 김교수님도 여러번 다녀 가셨구요."
"김교수님?"
"예. 한성대학교의 김두기 교수님이요"
김두기 교수님이라면 우리 대학시절의 지도 교수님이시다. 강재의 서울에서 자리도 주선해 주시고, 실증사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고대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 분.
한민족, 대동이족의 묻혀 있던 역사를 발굴하여 21세기 세계 문화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고자 고독하게 분투하시는 분. 우리는 그 분을 선지자, 오딧세이등으로 불렀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멀리 독일에서도 많은 학자분들이 오셨었는데 하나같이 강재씨의 연구가 막 성과를 거두려는 참에 정말 아깝게 되었다면서, 그이의 연구물들 뿐만 아니라 낙서까지 복사해갔었어요. 심지어 도형씨에게 보내라는 편지도 다 보여주었지요."
그 탁본이 사실이라면 온 세계의 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학계에는 탁본에 대한 어떤 보고도 없었다. 그렇다면 탁본이란 건 애초부터 엉터리 거짓말일수도 있다. 아니면 탁본도, 비석도 어딘가로 증발한 것이거나. 어쨌거나 녀석의 죽음이 그 탁본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지 좀 줘 보세요" 내 목소리도 다급해진다.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며 전해 받은 봉투는 약간 헤어져, 많은 손을 탔다는 것이 분명했다.
안의 A4용지는 더욱 닳아져 그걸 봤던 사람들의 조바심이 느껴진다.
「도형아.
우리가 찾던 문제의 실마리가 역시 우리나라에 있다는 생각이 맞는 거 같아.
역사의 흔적기관은 우리 방언에 있다고 한 내 말 생각나지?
난 여기 와서 보물을 찾았다. 너같은 총각놈한테는 약만 올리는 일이겠지만.
우리 마누라를 빨리 보여 주고 싶구나.
밤마다 날 새는 줄 모르고 땀을 흘려도 그 깊고 오묘한 맛이란 끝이 없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방중도인이 될 것도 같은데 .. . 욕 나오지?
썅 꼴리지용? 킬킬. 너 오면 나눠줄 수도 있지.
도형아, 그 동안에 너는 싹이 난 감자의 잎파리나 주워 담고 있어라.
안녕. 강재 씀
추신. 소새끼가 송아지인 까닭은? 」
길지도 않은 편지를 읽는데 10분넘어 걸렸다.
처음에는 가볍게 읽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들어오질 않아 두 번 세 번 읽어야 했다.
다 읽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담배를 다시 한 대 문다.
자신을 빗대어 음란한 표현을 한 편지를 읽은 사내를 앞에 두고 서혜는 부끄러운 듯
아무 말이 없다. 게다가 그 사내는 불과 한 달전 자신과 격렬한 섹스를 나누고 자신의 몸안에 세 번이나 정액을 방사한 사내이지 않은가. 그것보다도 무수히 많은 남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면서 이 섬세한 여인은 마치 윤간을 당하는 참담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그러면서도 한가닥 남편을 위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그 모욕을 감수한 그녀의 마음씨가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찻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잡아본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매우 난처한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잡은 손에 힘을 넣어 본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는 서혜의 입술.
"저, 저기요" 살며시 손을 뺀다.
손안에서 세상이 새나가는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 온다.
"무슨 뜻이예요?"
"글쎄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참 싱거운 친구네요."
정말이지 웃기는 놈이다. 원래 좀 덜 덜어지게 싱겁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싶다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 두서도 없다.
방언연구 어쩌구 하다가 느닷없이 마누라하고의 섹스얘기라니. 그러다가 욕지거리를 늘어놓고 나중에는 마누라를 대준다니 어쨌다니.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서로 딸딸이를 쳐주기도 했지만 그거야 애들 때 얘기아닌가? 우리 사이야 스와핑도 가능하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감자 잎파리는 또 뭐고 그 골때리는 추신은 또 뭐냐 말인가.
그래도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2년후에 전해주라고 한 걸 보면 무슨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자체도 실없는 장난인지도 모르고.
"이 편지 제가 가져도 되나요?"
"그럼요. 도형씨 거잖아요"
밖에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간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의 치마자락이 저녁바람에 부드럽다.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몸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보여 준다.
허리에서 ?으로 이어지는 선에 왼손을 두르고 밤새도록 걷고 싶다.
침이 마른다.
손을 올려본다.
멈칫. 그녀의 걸음이 멈춘다.
나를 그윽히 올려다 본다. 상기된 듯도 하다.
"도형씨, 고마워요. 하지만 더는 힘들어요. 혼란스러워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이성과는 다르게 발기가 시작된다.
마주 선 채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에서 향수인지 샴푸인지 냄새가 자극한다
그 머리에 코를 묻는다. 그녀 어깨가 떨린다.
고개를 들려 본다.
눈물이 고여 있다.
"미안해요" 둘이 동시에 뱉은 말이다.
그녀를 태운 택시의 빨간 미등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 보았다.
지독한 갈증과 함께 성욕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수첩을 뒤져 전화번호를 찾아 낸다.
정란. 일본에 가기 전 나를 ?아다니던 후배.
걔네 졸업여행때 지도선배로 따라갔다가 콘도 뒤쪽 솔숲벤치에서 첫 관계를 가진 후 2년여 동안 원없이 섹스를 나누고, 일본에 있는 동안 시집간다며 울면서 전화를 했던, 결혼하기 일주일전 동경에 와서 마지막으로 온 몸을 불사르고 갔던, 내가 귀국했을 때 건강한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갑다면서 존경하는 선배로 지켜봐주겠다고 했던 그 정란이에게 전화를 건다.
"어머, 도형이 형. 웬일이예요. 이 밤에". 5-2편 끝
오랜만에 나와보는 명동이다.
초저녁의 다소 분주한 듯한 분위기에 살짝 온 비의 물내가 섞여 비릿하게 느껴지는데
"오필리아"의 2층 나무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떨리는 듯 가볍다
오크목으로 만든 문을 밀고 들어가니 실내의 어둠이 동공을 덮쳐와 시야를 가린다.
테이블마다 빨간 막대등이 그나마 발길을 비쳐주는 가운데 코너를 돌아서니 전면창에 코발트빛 저녁거리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그 가운데 서혜가 뒤쪽 2번째 테이블에 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다.
서혜.
한달간 그렇게 찾았던, 그리워하던, 수업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무시로 다가오던 그 서혜가. 그래서 가을 하늘의 시린 청명함처럼 나를 그리움에 슬프게 하던 그녀가, 바로 이 앞에 불과 3발자국 앞에 앉아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 항상 떠오르던 그녀. 분명히 나의 품안에서 감은 눈을 파르르 떨며 관능을 불태웠던 그녀가 이제 또 다른 여인의 모습으로 가까이 앉아 있다. 오필리아의 모습으로.
"오랫만이네요" 그녀 앞좌석의 시트에 몸을 묻으며 말을 건넨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미소로 답한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왼쪽 머리를 쓸어올린다. 실컷 울고 난 뒤의 개운함같은 푸르스름이 그녀 왼쪽 뺨에 비친다.
"비가 참 예쁘게 왔어요." 입고 있는 하늘색 니트 티처럼 화사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비로소 그녀와 같이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테이블위의 성냥을 집어 담배불을 붙이고 말을 건넨다. 약간의 투정을 섞어서.
"많이 찾았더랬어요"
하긴 하루 같이 잤다고 내가 그녀의 행방을 추궁할 입장은 아니다.
"본국에 다녀왔어요. 할머니도 편찮으시고 머리도 아프고 해서요"
"본국?" 아, 그렇지 그녀는 화교였었지.
"그랬어요? 미리 얘기라도 좀 하고..." 염치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려는데
"미안해요." 그녀의 다소곳한 사과가 들려온다.
그녀도 그날 밤의 일을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시시콜콜히 말하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입밖으로 차마 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는 말. 대신에
"할머님은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
"예. 이번에 모시고 나와서 입원시켜드렸어요. 오빠가 고생많았어요"
"오빠가 있었어요?"
"예, 많아요. 5남1녀중 막내예요. 셋째 오빠가 본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해요"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도형씨 생각 많이 했어요. 고마운 분이라는 걸 알았어요."
난처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저 그녀의 가슴께에 무심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가는 숨을 쉬면서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져 온다.
"강재씨가 입버릇처럼 말했었어요."
" ? "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형씨를 찾지 말라고요. 절대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리고 2년 후에 찾아가라고요. 저는 그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어요. 제가 물으면 그냥 웃기만 했었어요" 그녀는 목이 메이는 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을 삼킨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드는 모습에서 여인의 냄새가 강하게 전해져 온다. 그래 강재녀석이라면 그 웃음과 함께 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따뜻하게 보듬어 줬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그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반추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관능과는 또 다른 따뜻함과 그리움일 것이다.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 본다. 눈으로만.
"강재씨는 그렇게 갈 줄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도형씨에게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요. 2년 후에요" 핸드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낸다.
"그이 장례가 끝난 후 많은 분들이 위로해 줬어요. 김교수님도 여러번 다녀 가셨구요."
"김교수님?"
"예. 한성대학교의 김두기 교수님이요"
김두기 교수님이라면 우리 대학시절의 지도 교수님이시다. 강재의 서울에서 자리도 주선해 주시고, 실증사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고대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 분.
한민족, 대동이족의 묻혀 있던 역사를 발굴하여 21세기 세계 문화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고자 고독하게 분투하시는 분. 우리는 그 분을 선지자, 오딧세이등으로 불렀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멀리 독일에서도 많은 학자분들이 오셨었는데 하나같이 강재씨의 연구가 막 성과를 거두려는 참에 정말 아깝게 되었다면서, 그이의 연구물들 뿐만 아니라 낙서까지 복사해갔었어요. 심지어 도형씨에게 보내라는 편지도 다 보여주었지요."
그 탁본이 사실이라면 온 세계의 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학계에는 탁본에 대한 어떤 보고도 없었다. 그렇다면 탁본이란 건 애초부터 엉터리 거짓말일수도 있다. 아니면 탁본도, 비석도 어딘가로 증발한 것이거나. 어쨌거나 녀석의 죽음이 그 탁본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지 좀 줘 보세요" 내 목소리도 다급해진다.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며 전해 받은 봉투는 약간 헤어져, 많은 손을 탔다는 것이 분명했다.
안의 A4용지는 더욱 닳아져 그걸 봤던 사람들의 조바심이 느껴진다.
「도형아.
우리가 찾던 문제의 실마리가 역시 우리나라에 있다는 생각이 맞는 거 같아.
역사의 흔적기관은 우리 방언에 있다고 한 내 말 생각나지?
난 여기 와서 보물을 찾았다. 너같은 총각놈한테는 약만 올리는 일이겠지만.
우리 마누라를 빨리 보여 주고 싶구나.
밤마다 날 새는 줄 모르고 땀을 흘려도 그 깊고 오묘한 맛이란 끝이 없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방중도인이 될 것도 같은데 .. . 욕 나오지?
썅 꼴리지용? 킬킬. 너 오면 나눠줄 수도 있지.
도형아, 그 동안에 너는 싹이 난 감자의 잎파리나 주워 담고 있어라.
안녕. 강재 씀
추신. 소새끼가 송아지인 까닭은? 」
길지도 않은 편지를 읽는데 10분넘어 걸렸다.
처음에는 가볍게 읽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들어오질 않아 두 번 세 번 읽어야 했다.
다 읽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담배를 다시 한 대 문다.
자신을 빗대어 음란한 표현을 한 편지를 읽은 사내를 앞에 두고 서혜는 부끄러운 듯
아무 말이 없다. 게다가 그 사내는 불과 한 달전 자신과 격렬한 섹스를 나누고 자신의 몸안에 세 번이나 정액을 방사한 사내이지 않은가. 그것보다도 무수히 많은 남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면서 이 섬세한 여인은 마치 윤간을 당하는 참담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그러면서도 한가닥 남편을 위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그 모욕을 감수한 그녀의 마음씨가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찻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잡아본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매우 난처한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잡은 손에 힘을 넣어 본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는 서혜의 입술.
"저, 저기요" 살며시 손을 뺀다.
손안에서 세상이 새나가는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 온다.
"무슨 뜻이예요?"
"글쎄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참 싱거운 친구네요."
정말이지 웃기는 놈이다. 원래 좀 덜 덜어지게 싱겁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싶다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 두서도 없다.
방언연구 어쩌구 하다가 느닷없이 마누라하고의 섹스얘기라니. 그러다가 욕지거리를 늘어놓고 나중에는 마누라를 대준다니 어쨌다니.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서로 딸딸이를 쳐주기도 했지만 그거야 애들 때 얘기아닌가? 우리 사이야 스와핑도 가능하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감자 잎파리는 또 뭐고 그 골때리는 추신은 또 뭐냐 말인가.
그래도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2년후에 전해주라고 한 걸 보면 무슨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자체도 실없는 장난인지도 모르고.
"이 편지 제가 가져도 되나요?"
"그럼요. 도형씨 거잖아요"
밖에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간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의 치마자락이 저녁바람에 부드럽다.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몸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보여 준다.
허리에서 ?으로 이어지는 선에 왼손을 두르고 밤새도록 걷고 싶다.
침이 마른다.
손을 올려본다.
멈칫. 그녀의 걸음이 멈춘다.
나를 그윽히 올려다 본다. 상기된 듯도 하다.
"도형씨, 고마워요. 하지만 더는 힘들어요. 혼란스러워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이성과는 다르게 발기가 시작된다.
마주 선 채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에서 향수인지 샴푸인지 냄새가 자극한다
그 머리에 코를 묻는다. 그녀 어깨가 떨린다.
고개를 들려 본다.
눈물이 고여 있다.
"미안해요" 둘이 동시에 뱉은 말이다.
그녀를 태운 택시의 빨간 미등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 보았다.
지독한 갈증과 함께 성욕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수첩을 뒤져 전화번호를 찾아 낸다.
정란. 일본에 가기 전 나를 ?아다니던 후배.
걔네 졸업여행때 지도선배로 따라갔다가 콘도 뒤쪽 솔숲벤치에서 첫 관계를 가진 후 2년여 동안 원없이 섹스를 나누고, 일본에 있는 동안 시집간다며 울면서 전화를 했던, 결혼하기 일주일전 동경에 와서 마지막으로 온 몸을 불사르고 갔던, 내가 귀국했을 때 건강한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갑다면서 존경하는 선배로 지켜봐주겠다고 했던 그 정란이에게 전화를 건다.
"어머, 도형이 형. 웬일이예요. 이 밤에". 5-2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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