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래도 인공수정은 말이 안 돼....그렇다면"
명희는 화영의 병원을 다녀온 뒤 마음이 급했다.
뱃속의 아이는 부쩍부쩍 자라고 있다.
그러니 배는 금방 불러 올 것이다.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국? 좁은 땅이다. 어디서 어떤 것을 해도 소문은 난다.
더구나 외국 출산이라면 최소한 6개월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렇게 자리를 비우고 꾸며 댈 말이야 많다.
그러나 귀국 때 안고 올 아이...입양이라고 하기는 정말 싫다.
별장? 모든 준비를 시켜놨으나 그도 완전치 않다.
화영과의 동거? 허락은 받았는데 두문불출이란 말은 쉬우나 그도 어렵다.
결국 명예를 지킬 것인가 아이를 지킬 것인가인데 둘 다 지키고 싶다. 아니 꼭 지켜야 한다.
"그래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야"
명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네 회장님!"
낭랑한 비서의 목소리가 폰 마이크에서 흘러 나온다.
"이 팀장님께 나 호텔로 퇴근한다고 직접 차 좀 가지고 오시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시를 끝낸 명희가 퇴근을 준비하면서 가볍게 볼터치를 했다.
요즘 들어서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을 명희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화운데이션 팩을 닫는데 인터폰이 울었다.
"예."
"차 대기 되었답니다. 회장님"
"그래? 알았어"
백을 들고 방문을 나서는 명희에게 문 앞에 있던 직원 셋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을 일일히 하나씩 살피며 걸음을 옮긴 명희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직원들의 입에서라도 소문은 돌게 되어 있으며 소문이란 곧 악소문이 될 수도 있었다.
"특별한 일 없으면 퇴근들 해"
"예 회장님"
"하지만 박실장은 모든 체크 철저히 하고...문제 있으면 즉각 콜 하고..."
"예"
박실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늘 하는 말이며 일이지만 요새 명희는 직원들 하나하나가 다 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 그것이 가져 올 파장, 소문들...명희는 두렵기까지 하다.
하루빨리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금껏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경훈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바라 본 이 팀장의 모습이 새삼 중후하다.
지난 30여 년 늘 곁에 있었는데 자신이 늙은 만큼 그도 늙었다.
오늘 그와 이루게 될 역사가 과연 순조로울 것인지...
순조롭게 마무리 되면 지금까지의 고민은 다 없어질 것이다.
또 한 번 입술을 굳게 깨문 명희가 차 앞으로 가지 경훈이 차 뒤문을 열었다.
뒷 좌석에 몸을 던지다시피 눕힌 명희가 눈을 감자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명준이 애들이 움직인다고요?"
"네 회장님"
"어떻게?"
"좀 부쩍 움직임이 빠릅니다. 애들의 숫자도 늘어난 것 같고..."
"갸들...지금 사업이 많이 어려울 거예요"
"예 아마도..."
입을 닫은 명희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모르는 사업을 돈만 바라보고 달려들면 백발백중 실패다.
콘도나 골프장의 신규투자, 그것도 거의 전 재산을 던지다시피하는 올인...
지금 고명준 형제가 하고 있는 바보짓이다.
현재의 경제상황에도 우리나라의 콘도나 골프장은 과잉상태다.
우리나라의 산악지형 상 골프장 건설, 그도 36홀 정도의 대형 시설...
이 사업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업이다.
회원권 분양이 원할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엉키는 사업이다.
은행은 돈장사다. 나오지 않을 구멍에 돈을 밀어넣지 않는다.
은행에서 미적거리면 투자사는 더 발을 뺀다.
펀드는 남의 돈을 불려주는 사업이다.
그런 사업을 하는 투자펀드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명준은 지금 부도 직전에 몰려있다.
많은 이들이 귀뜸으로 알려주고 있다.
또 투자를 간접적으로 압박하기도 한다.
고명준은 고명희의 동생인데, 설마 누나가 보고만 있겠는가?
이런 심리, 고명준에게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희는 애초부터 그런 귀뜸에 확실하게 선을 그었었다.
그리고 결국 명희의 생각대로 고명준은 벼랑에 몰렸다.
명준이 자기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아마도 같은 배에서 나온 명우와 명주의 몫도 모두 끌여들였다.
그러니 이번의 실패는 3남매 모두의 실패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은행과 투자사들에게서 조이는 압박감, 그거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명준이 살수 있는 길은 누나인 명희 자신이 나서는 것 뿐이다.
투자지분을 완전 인수하거나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이다.
지금 그애들이 꾸미는 짓이 뭔지 명희는 감을 잡을 수 있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가 멎었다.
차 문을 열고 서있는 경훈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힐끗 바라 본 그의 뒷덜미에 흰 머리가 가득하다.
"아저씨"
"예 회장님"
"차 대고 방으로 올라 오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차에서 내린 명희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경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땡"
37층...고속 엘리베이터 문자판이 붉은 글씨가 금방 들어오고 멎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 팀장 오시거든 들여 보내시고 퇴근들 하세요"
"예 회장님"
방 문을 열어주며 서있는 여직원에게 지시한 명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겉옷을 벗은 명희가 응접실에 와인 잔 두개와 병을 배설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 선 경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거기 앉으세요. 오늘 저하고 와인 한 잔 해요"
"네"
영문을 모르는 경훈이 엉거주춤 응접실 소파에 엉덩이를 댔다.
앞에 앉은 명희가 손수 와인을 따라 경훈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예"
"우리 참 오래 되었죠?"
"???"
"그래요. 30년..."
"네에"
외인잔을 비운 명희가 다시 병을 들자 경훈이 병을 받아서 따랐다.
"우리도 이젠 늙었어요. 그죠?"
"늙긴요. 저는 모르지만 회장님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
"더 늙기 전에..."
"???"
다신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명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창문 곁으로 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경훈은 오늘따라 다른 행동을 보이는 명희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명준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명희가 아니다.
"아저씨..."
"예 회장님"
"그 회장님 소리 좀 빼요. 둘이 있을 때는..."
"예. 허허"
"지난 몇달 전..."
"...."
"이 방에서...아니 원래는 22층에서부터..."
"!"
"그 때 일 기억하시죠?"
"...."
경훈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대답할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경훈을 물끄러미 바라 본 명희가 다시 말했다.
"그 일로 제가 아이를 가졌어요"
"네에?"
"참 우습죠. 이 나이에 아이가 생긴 것도...아니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도..."
경훈은 둔기로 뒷덜미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요사이 매사에 흔들리는 것 같았던 명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요."
"...."
"저는 이 일이 신의 뜻인 것 같아요"
"네?"
"3년 후면 제가 60이예요"
"네에"
"이 나이에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이 지구에 몇이나 있겠어요?"
"...."
"근데 제가 그 희귀한 사람이 되었어요"
"...."
"그래서 저는 이 애를 낳을 거예요"
"네?"
경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 소리를 들은 것도 놀랄 일인데 아이를 낳겠단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를 천하의 고명희가 낳겠단다.
이제 이를 어쩔 것인가?
자기는 그러면 이제 이 일을 어찌 막을 것인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경훈의 귀에 다시 더 큰 폭탄이 터졌다.
"그래서 부탁인데...아저씨가 저와 결혼을 해 주세요"
"네에?"
"아 아이에게 당당하고 합법적인 탄생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요"
"???"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예요"
"..."
"지금껏 아저씨가 결혼하지 않은 것..."
"그거야..."
"아뇨. 그리고 나도 결혼하지 않은 것..."
"..."
"아마도 이 아이 때문이었다는 생각...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도 전..."
"아니요. 아저씨 뿐이예요"
와인 잔을 들고 서성이며 말을 하던 명희가 다시 경훈의 앞에 앉았다.
그리곤 그윽하게 경훈을 바라보면서 경훈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오늘...저하고 여기서 자요"
"안 됩니다. 그건..."
"왜요?"
"전임 회장님과의 약속입니다"
"아버지?"
"네"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
"죽을 때까지 회장님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다치지도 않게 보호한다는 약속..."
"지금껏 그 약속 때문에 저를 보호하신 거예요?"
"그거야..."
"아버진 이미 백골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어요"
"..."
"그동안 하신 것으로 이미 그 약속을 아저씨는 200%도 넘게 지켰어요"
말을 마친 명희가 잔을 내려 놓고 다시 경훈에게 와인을 따랐다.
경훈은 그 잔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명희의 눈을 바라봤다.
마주친 눈길에서 명희는 불꽃을 발했다.
경훈은 심각하게 그 눈길을 받으며 고민했다.
"이건 사랑도 아니다. 정략도 아니다. 그럼 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명희가 그런 경훈의 고민이 깨지는 소리를 했다.
"사랑...아니예요. 정략...아니예요"
"아!"
"안 믿으시겠지만, 그리고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전 이미 이 아이의 아빠에게 모든 것을 드렸어요"
"...."
"단 하루하고 반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
"우연히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생긴 일이었는데..."
"...."
"그 분은 저의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가져갔어요"
"...."
"그리고 남겨주신 것이 이 아이예요"
그렇게 말을 하는 명희의 동공에 물기가 어렸다.
경훈은 그런 명희를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더욱 들었다.
"이 아이는 그래서 더욱 소중히 낳아야 해요"
"...."
"어저씨 뿐이예요"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지켜주실 분이..."
"...."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어요"
"???"
"그냥 아저씨와 제가 공개적으로 결혼식만 하는 거 외에는..."
"그러면?"
"네, 그냥 우린 지금처럼 똑같이 사는 거예요"
"혼인신고는?"
"하고 싶으세요?"
"아니 그냥..."
"혼인신고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이 아이에겐 고씨성을 줄 거예요"
"??"
"지금은 엄마 성을 따라서 입적신고를 해도 되니까..."
"그건 그렇죠"
"또 아버지도 아저씨로 올리지 않을 거예요"
"그럼?"
"아이와 이 아이 아빠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아요"
결국 그거였다.
경훈은 명희가 아이를 공개적으로 낳기 위해 대외적인 조건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이제 결심은 자신만 하면 되었다.
끝까지 명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회로 이용할 것인가의 선택...
와인잔을 한입에 비운 경훈이 결심한 듯 말했다.
"회장님 뜻대로 하지요"
2
"엄마"
"응?"
"고회장님 말야..."
"누구? 고명희 회장?"
"응"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너무 자주 오시잖아?"
"그야..."
"뭐 내가 모르는 질병이 있을리는 없고..."
"너도 참"
"그니까...내가 바보도 아니고..."
"엄마가 친구니까..."
"아니야. 뭔가가 있어"
퇴근 후 지수가 본격적으로 심문하듯 화영을 다그쳤다.
지 남편과 사는 집으로 가지 않고 부득이 같이 퇴근한 이유가 그것인 것 같았다.
화영은 명희의 말이 생각났다.
명희는 사위인 강철준 검사가 지수와 결혼한 것이 고명희와 가까워지기 위한 작전이라고 했었다.
"너"
"응"
"강검사 때문이야?"
"무슨?"
"감검사가 고회장 신변에 대해 궁금해 해?"
"아아니...뭐"
지수가 화영의 돌직구 공격에 머뭇거렸다.
갑자기 공수가 교대된 것 같았다.
"말 해. 그렇지?"
"아 니...뭐...종종 묻기는 해"
"뭐라고?"
"명희 아줌마 근황이라든지...뭐 건강 상태 그런 거..."
"왜 그러겠어?"
"그거야..."
"고회장이 오늘 그러더라"
"뭐라고?"
"강검사가 너하고 결혼한 것은 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왜?"
"너도 알지?"
"???"
"고회장이 자기 직원들 말고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친구가 엄마친구 들 뿐이라는 거..."
"그 정돈 알지"
"지난 번..."
"???"
"그 친구 중 한 명인...너도 아는 주여사..."
"아 그 회장님 초등 동창이라는?"
"그래..."
"근데?"
"그 주여사에게 제비들이 꼬였어"
"뭐? 세상에...그래서?"
"그 제비들을 잡고 보니까 목표가 주여사가 아니라 고회장이었어"
"어머어머..."
"그런 일이 한 두번이 아냐. 지금까지..."
"세상에..."
"의상실 하는 친구 알지?"
"응. 경찰하는 내 친구 보연이 엄마?"
"그래....그 박마담을 통해서도...선을 대려고 하고...이 엄마를 통해서도 마찬가지고..."
"누가?"
"누구겠어? 고회장 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들이지"
"불나방?"
"그중 가장 핵심들이 고회장 배다른 동생들이고..."
"아하!!"
"고회장한테 상속자가 없잖아?"
"아~항"
"그러니까 동생들이 여러 방법으로...그래서 니 남편도 거기 얽힌 것으로 보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그렇지만 너도 함부로 고회장에 대해 말 전하거나 그러지 마"
지수는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의심이 가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남편은 시간만 되면 고회장 아줌마 근황을 물었었다.
특히 밤일이 끝나면서 하는 예기들은 거의가 고회장 관련 건이었다.
고회장에 대해 자세히 묻는 날은 더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직 그에게서 열락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다.
언제나 부족함 뿐이었으며 그럴 수록 더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되려 쾌감과 희열에 젖어 있는 것처럼 하면 그는 고회장에 대해 물었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지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가 자신에게 대쉬하던 때 부 터 생각하자 그 의심은 배가되었다.
퇴근길. 우연한 교통사고 같았다.
하지만 그리 큰 사고도 아닌, 그냥 흔히 있을 접촉사고로 미등이 하나 깨졌을 뿐이었다.
그는 친절했다. 물론 지수 자신의 차가 수리비가 비싼 외제차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필요이상으로 친절했다.
전해 준 명함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라고 찍혀있었다.
그 정도 직함과 직위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 교통사고는 자신이 갑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철저하게 을이었다.
지수는 그게 자신의 미모에 반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그게 작전이었을 것이라고?"
그 사고 후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급기야 한 달 만에 호텔에서 자신의 여자를 그에게 주었다.
그만하면 지수의 배우자로 손색이 없었다.
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후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결혼식을 치렀다.
엄마와 함께 살았으면 했으나 엄마 재산을 노린다는 소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크진 않으나 40평대 아파트를 장만, 둘만의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러면 그것도 작전?"
지수는 갑자기 혼돈이 생겼다.
이대로는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
"응"
"나 갈께"
"왜? 저녁 먹고 가지."
"아냐. 나 좀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강 서방 건?"
"응"
"뭘?"
"날 사랑한 게 아니고 작전이었다면..."
"?"
"좀 심각하잖아? 내가 이용물이란 게..."
"그거야..."
"그래서 확인해볼 게 좀 있어"
백을 들고 일어서는데 주방에서 이모가 나왔다.
"왜, 저녁 먹고 가지. 밥 다 되었는데..."
"아냐 이모...나중에 먹을 게"
"그래도..."
"근데...요즘 이모 더 예뻐진다?"
"뭘..."
미경은 둘 사이가 부럽다.
이 가족과 함께 산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실신했다가 깨어나서 보니 출산은 했는데 아이가 없어졌다.
자신을 돌봐주고 입원시킨 구서방 아저씨도 행방불명이었다.
세상을 모두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원장님이 자신을 잡아줬다. 지수와 연수도 있었다.
그애들은 언제나 바쁜 엄마를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명희는 기꺼이 그애들의 이모가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그애들의 엄마처럼 살았다.
연수가 유학을 가고 지수가 결혼한 뒤 미경은 쓸쓸하다.
그래서 지수가 온 날이면 더 정성껏 저녁상을 준비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 저녁을 먹지 않고 그냥 간단다.
미경은 그것이 섭섭하다. 자신이 낳은 딸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영원한 찬모라는 것...세삼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낳았으나 사산했다는 아이가 생각난다.
살았으면 그애도 이미 스무살이 넘었을 것인데....
"미경씨 섭섭해?"
지수가 나간 뒤 화영이 미경에게 물었다.
"아아뇨...섭섭하기는..."
"나중에 지수 애 낳으면...그때 내 대신 다시 할머니 하면 되잖아?"
"그렇죠 뭐"
"연수도 곧 귀국 할 거야"
"그래요? 언제요?"
"아마 이달 말 쯤? 학위 땄데"
"네에...그럴 줄 알았어요. 연수 걔가 머리가 그리 좋은데..."
"그렇게 좋아?"
"그럼요. 근데 귀국하면..."
"여기저기서 오라는데가 많은가 봐"
"당연하겠죠. 오면 곧 결혼도 시켜야겠네요?"
"그거야. 뭐...지가 다 알아서 하겠지"
화영은 미경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일을 생각했다.
"불쌍한 여자..."
지난 20여 년,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겠지만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종종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도 있었으나 내면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이를 그렇게 잃고도 저토록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함에도 자수와 연수에게 최선을 다해 이모노릇을 했다.
그 둘에겐 엄마인 자신보다 더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영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경이 허락만 한다면 명희에겐 매우 좋은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회영이 미경을 불렀다.
"참...미경씨"
"네"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닌데..."
"네"
"내 친구 중에 임신한 애가 있어"
"네에??"
"놀랐지? 나도 놀랐어. 우리 나이에 임신이 되었다니..."
"그러게요"
"그래서...그 친구와 태아가 모두 건강하게 출산을 하려면..."
"네.."
"내가 아마도 당분간 그 친구 집에 입주해서 돌봐야 하거든?"
"아!!"
"그때 미경씨도 나랑 같이 그 집에 들어갔으면 해서..."
"그 친구분은 가족이 없나요?"
"응. 없어. 돈은 많은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
"형제분도 없어요?"
"형제 자매들이 있기는 한데...도와줄 입장이 못 돼"
"네에"
미경으로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화영은 자신의 은인이다. 생명만 살려준 것이 아니다.
오갈 곳도 없는 자신에게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게 대한 사람이다.
지수와 연수, 그 애들이 없었다면 미경은 아마도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은인인 원장님의 애들, 그애들이 이모라고 따랐으니 오늘이 있었다.
원장의 제안에 대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형제가 있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친구라고 말은 하지만 원장님의 성격으로 봤을 때 알만 하다.
자신의 옛날 처지와 비슷한 사람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미경이 말했다.
"여기는 요?"
"연수 들어오면 혼자서 살라고 하지 뭐..."
"될까요?"
"미경씨가 종종 들러서 반찬이나 챙겨 주면..."
"그래도..."
"아냐. 단 몇 달인데 뭐"
"원장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래 고마워. 근데 아직 결정된 것은 아냐"
"네...결정되면 그때 말씀하세요"
미경은 말을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화영은 미경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남자가 생각났다.
"아! 그이...그분은 지금..."
그 남자를 생각하지 갑자기 하체가 시큰했다.
그의 품에서 헐떡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단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옥선의 남자 얘기가 부럽기도 했다. 명희의 임신도 부러웠다.
자신도 그의 품에서 그리 말했었다.
"조화영. 화영이라고 불러줘요"
"당신의 아기를 갖고 싶어요"
"나 버리지 말아요"
"나 당신 떠나서 살 수 없어요"
"당신하고라면 여기 산속에서 살아도 좋아요"
그런 고백을 수없이 했는데 깨어보니 그는 없었다.
처음에는 딸들에게 부끄러워서 그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와 밤을 새우고 그의 품에서 죽어갔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계집이고 그는 그 계집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있을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서울로 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가 생각난다. 보지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처녀적이거나 지수와 연수아빠가 있을 때 없었던 일이다.
하루에 팬티를 두어장 씩 갈아입어야 한다.
화영은 혼자 있을 때면 그가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다.
그를 생각에서 잠시라도 지우려면 명희의 집으로 입주하는 것이 그나마 좋을 것 같았다.
뭔가 일에라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런데 미경은 어땠을까? 자식을 잃고 삶도 잃은 그녀의 20년이 새삼 애처럽다.
3
"나야"
"응"
"바뻐?"
"형사가 늘 그렇지 안 바쁘면 대한민국이 아니지"
"나 지금 너 있는 곳으로 가는데..."
"그래?"
"잠깐만 봐"
"그래 그 정도야 뭐"
지수는 보연과의 통화를 생각하며 악셀레이터에 힘을 줬다.
최보연 경감...
엄마 친구의 딸이기도 하지만 같은 최씨라고 더 친해졌다.
더구나 둘 다 아빠가 없었으며 엄마들이 유명하다.
지수는 동생인 연수라도 있으나 보연은 동생도 없다.
지수는 나중에 이모라도 생겼으나 보연은 그도 없었다.
그래서 보연은 더욱 운동에만 열중했던 것 같다.
보연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지수는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보연이 경찰이 되고 자신도 레지던트 수련을 할 때는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친구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보연이 유일했다.
그런 친구 보연이므로 자신의 일을 부탁하기엔 안성마춤이었다.
"기집애 이뻐졌다?"
"너는?"
"나야 뭐...그래 시집가서 신랑품에 안기니까 이뻐지냐?"
"그런다 어쩔래?"
"부러워서 그런다 기집애야"
"부러우면 너도 가"
"안 그래도 가려고 해"
"그으래? 그래서 이처럼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어?"
"표시 나?"
"그래 이 기집애야"
"호호호"
"호호호"
지수를 만난 보연은 경찰서 앞 커피熾【 찻잔을 앞에 두고 마음껏 웃었다.
지수가 검사와 결혼을 했을 때 사실 부럽기도 했었다.
어려서 엄마가 의사인 것도 부러웠다. 동생이 있는 것도 부러웠다.
둘 다 공부도 잘했다. 언니는 의대에 동생은 법대에 합격했다.
자신이 그들과 동등해지려면 금메달을 따야한다고 입술을 몇번이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해냈다. 금메달도 따고 경찰 간부도 되었다.
지수의 엄마만큼이나 자신의 엄마도 유명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유명하다.
지수네 엄마는 흔한 산부인과 의사 중 하나지만 박주희는 단 하나 박주희다.
지금 이 나라에서 청담동 박주희가 만든 의상은 부의 상징이다.
거기다 이제 자신에겐 그분이 계신다.
비록 엄마와 동등하게 나누고 있으나 그분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다.
그분은 검사 100명 하고도 바꿀 수 없다. 이제 지수가 부럽지 않다.
"그래...무슨 일이신데 바쁘신 박사님이 여기까지 오셨을까?"
실없는 농담을 나누다가 보연이 본론을 꺼냈다.
지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휴지로 닦고나서 말했다.
"어려운 부탁인데..."
"응"
"비밀을 철통같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뭔데? 남편?"
"...."
"맞구나...바람펴?"
"아니...그건 아냐"
"그럼?"
"속은 거 같애"
"속다니?"
"내가, 이 최지수가 아내로 필요한 게 아니고...작전용이었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심각하게 말하는 지수의 표정을 읽으며 보연도 같이 심각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다.
대한민국 최고 사정기관인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가 그다.
그런데 그의 뒤를 캐겠다고 지금 지수는 자신을 찾아왔다.
"그래서 그의 뒤를 캐보려고?"
"응. 요즘 그런 일 하는 사립탐정들 있다며?"
"뭐 탐정이랄 거는 아니고...뒷조사 전문인 심부름 센터 뭐 그런데지"
"그니까...너가 경찰이니 그런 사람 중 괜찮은 사람 알 거 아냐?"
"있기야 하지...근데"
"근데 뭐?"
"네 남편이 특수부 검사 아냐?"
"그래서?"
"그 사람들 천성적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해"
"하기야.."
"일탈을 해도 완전범죄, 뭐 그렇지"
"...."
"그래서 심부름센터 애들이 되려 당할 걸?"
"그 정도야?"
"그러니 아예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지"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진 않아"
"그럼 알려 줘"
보연은 말을 하고도 아차 했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그분을 떠올렸는데 그렇다면 그분을 지수에게 노출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어차피"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까지 친구에게도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는 이미 공유했으나 비밀도 철저히 공유했다.
공식적으론 앞으로 엄마가 그분의 장모가 되기로도 했다.
경찰서에서도 형사과장과 경찰서장은 그분의 존재를 안다.
형사들도 그분을 알지만 자신과의 관계까지는 짐작만 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이 처리한 사건들...그동안 경찰의 골치를 였던 미결사건들...
그 사건들을 처리해낸 최보연 경감은 경찰의 꽃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존재는 철저한 비밀이다. 이것은 보연이 소속된 경찰서 외엔 비밀이다.
물론 보연의 경찰서 형사과에서도 그분은 그냥 비범한 프로파일러다.
그 프로파일러가 호적도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다.
지난 몇 주 보연은 그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다음 주면 그분에게 정식으로 주민증이 나올 것이다.
그때서야 그분의 존재가 언론에 알려져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보연은 무의식중에 친구에게 말해버릴 기세였다.
자신의 입에 실망한 보연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왜? 뭔데?"
"아냐...혹시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니까...그걸 알려 줘"
"그래...생각 좀 해 보고..."
"나 한시가 바빠"
"그렇게 심각해?"
"기분이 나쁘잖아? 내가. 이 최지수가 어떤 남자의 이용물이란 게"
"하기야..."
"그니까..."
보연이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 놓았다.
그런 보연을 지수가 눈을 동그렇게 뜨고 재촉했다.
"네가 만나는 것 안 되고..."
"그럼?"
"네 남편을 내가 아니까..."
"그래서?"
"어떻든 그가 누굴 만나는지, 뭘 생각하는지 그걸 알고싶은 거 아냐?"
"그치"
"한 열흘만 시간을 줘. 그럼 그거 내가 알아봐 줄께"
"열흘"
"응 열흘"
두 여자가 대회를 나누고 있는데 커피?문이 열리며 색을 맨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건장한 체격을 가졌는데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했다.
"여기 있었어?"
남자가 보연과 지수가 있는 탁자 앞으로 와서 앉으며 보연을 향해 말했다.
"아!. 끝났어요?"
"응"
보연이 얼굴을 붉히면서 다소곳이 남자를 대했다.
둘 사이를 가늠한 지수가 보연을 향해 물었다.
"누구야?"
"응? 아!"
보연이 우물쭈물했다.
용주가 둘 사이를 보면서 말했다.
"친구 분?"
"아! 네"
보연의 대답이 끝나자 용주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고용줍니다"
"아! 네. 최지수예요"
지수는 그의 눈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이 윤곽 전체를 가렸으나 눈이 너무 맑았다.
한참을 그 눈 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으로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타구니 사이가 뜨거워졌다.
순간적으로 손을 가랑이 사이로 내린 뒤 남자가 볼 수 없도록 눌렀다.
보연이 그런 지수의 상태를 눈치챘다. 빨리 자리를 떠야했다.
보연이 용주의 가방을 대신 들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지수야. 내가 나중에..."
"응? 어 엉"
내용을 모르는 용주가 가방을 잡으며 말했다.
"뭔데?"
"아....아네요"
"알았어"
보연을 따라 일어 선 남자가 휘적휘적 보연을 따라 나갔다.
지수는 그 둘의 뒷 모습을 보면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앉은 자리에 남을 물기와 얼룩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온 몸이 열병이 든 것처럼 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인공수정은 말이 안 돼....그렇다면"
명희는 화영의 병원을 다녀온 뒤 마음이 급했다.
뱃속의 아이는 부쩍부쩍 자라고 있다.
그러니 배는 금방 불러 올 것이다.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국? 좁은 땅이다. 어디서 어떤 것을 해도 소문은 난다.
더구나 외국 출산이라면 최소한 6개월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렇게 자리를 비우고 꾸며 댈 말이야 많다.
그러나 귀국 때 안고 올 아이...입양이라고 하기는 정말 싫다.
별장? 모든 준비를 시켜놨으나 그도 완전치 않다.
화영과의 동거? 허락은 받았는데 두문불출이란 말은 쉬우나 그도 어렵다.
결국 명예를 지킬 것인가 아이를 지킬 것인가인데 둘 다 지키고 싶다. 아니 꼭 지켜야 한다.
"그래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야"
명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네 회장님!"
낭랑한 비서의 목소리가 폰 마이크에서 흘러 나온다.
"이 팀장님께 나 호텔로 퇴근한다고 직접 차 좀 가지고 오시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시를 끝낸 명희가 퇴근을 준비하면서 가볍게 볼터치를 했다.
요즘 들어서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을 명희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화운데이션 팩을 닫는데 인터폰이 울었다.
"예."
"차 대기 되었답니다. 회장님"
"그래? 알았어"
백을 들고 방문을 나서는 명희에게 문 앞에 있던 직원 셋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을 일일히 하나씩 살피며 걸음을 옮긴 명희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직원들의 입에서라도 소문은 돌게 되어 있으며 소문이란 곧 악소문이 될 수도 있었다.
"특별한 일 없으면 퇴근들 해"
"예 회장님"
"하지만 박실장은 모든 체크 철저히 하고...문제 있으면 즉각 콜 하고..."
"예"
박실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늘 하는 말이며 일이지만 요새 명희는 직원들 하나하나가 다 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 그것이 가져 올 파장, 소문들...명희는 두렵기까지 하다.
하루빨리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금껏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경훈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바라 본 이 팀장의 모습이 새삼 중후하다.
지난 30여 년 늘 곁에 있었는데 자신이 늙은 만큼 그도 늙었다.
오늘 그와 이루게 될 역사가 과연 순조로울 것인지...
순조롭게 마무리 되면 지금까지의 고민은 다 없어질 것이다.
또 한 번 입술을 굳게 깨문 명희가 차 앞으로 가지 경훈이 차 뒤문을 열었다.
뒷 좌석에 몸을 던지다시피 눕힌 명희가 눈을 감자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명준이 애들이 움직인다고요?"
"네 회장님"
"어떻게?"
"좀 부쩍 움직임이 빠릅니다. 애들의 숫자도 늘어난 것 같고..."
"갸들...지금 사업이 많이 어려울 거예요"
"예 아마도..."
입을 닫은 명희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모르는 사업을 돈만 바라보고 달려들면 백발백중 실패다.
콘도나 골프장의 신규투자, 그것도 거의 전 재산을 던지다시피하는 올인...
지금 고명준 형제가 하고 있는 바보짓이다.
현재의 경제상황에도 우리나라의 콘도나 골프장은 과잉상태다.
우리나라의 산악지형 상 골프장 건설, 그도 36홀 정도의 대형 시설...
이 사업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업이다.
회원권 분양이 원할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엉키는 사업이다.
은행은 돈장사다. 나오지 않을 구멍에 돈을 밀어넣지 않는다.
은행에서 미적거리면 투자사는 더 발을 뺀다.
펀드는 남의 돈을 불려주는 사업이다.
그런 사업을 하는 투자펀드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명준은 지금 부도 직전에 몰려있다.
많은 이들이 귀뜸으로 알려주고 있다.
또 투자를 간접적으로 압박하기도 한다.
고명준은 고명희의 동생인데, 설마 누나가 보고만 있겠는가?
이런 심리, 고명준에게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희는 애초부터 그런 귀뜸에 확실하게 선을 그었었다.
그리고 결국 명희의 생각대로 고명준은 벼랑에 몰렸다.
명준이 자기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아마도 같은 배에서 나온 명우와 명주의 몫도 모두 끌여들였다.
그러니 이번의 실패는 3남매 모두의 실패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은행과 투자사들에게서 조이는 압박감, 그거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명준이 살수 있는 길은 누나인 명희 자신이 나서는 것 뿐이다.
투자지분을 완전 인수하거나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이다.
지금 그애들이 꾸미는 짓이 뭔지 명희는 감을 잡을 수 있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가 멎었다.
차 문을 열고 서있는 경훈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힐끗 바라 본 그의 뒷덜미에 흰 머리가 가득하다.
"아저씨"
"예 회장님"
"차 대고 방으로 올라 오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차에서 내린 명희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경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땡"
37층...고속 엘리베이터 문자판이 붉은 글씨가 금방 들어오고 멎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 팀장 오시거든 들여 보내시고 퇴근들 하세요"
"예 회장님"
방 문을 열어주며 서있는 여직원에게 지시한 명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겉옷을 벗은 명희가 응접실에 와인 잔 두개와 병을 배설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 선 경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거기 앉으세요. 오늘 저하고 와인 한 잔 해요"
"네"
영문을 모르는 경훈이 엉거주춤 응접실 소파에 엉덩이를 댔다.
앞에 앉은 명희가 손수 와인을 따라 경훈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예"
"우리 참 오래 되었죠?"
"???"
"그래요. 30년..."
"네에"
외인잔을 비운 명희가 다시 병을 들자 경훈이 병을 받아서 따랐다.
"우리도 이젠 늙었어요. 그죠?"
"늙긴요. 저는 모르지만 회장님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
"더 늙기 전에..."
"???"
다신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명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창문 곁으로 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경훈은 오늘따라 다른 행동을 보이는 명희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명준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명희가 아니다.
"아저씨..."
"예 회장님"
"그 회장님 소리 좀 빼요. 둘이 있을 때는..."
"예. 허허"
"지난 몇달 전..."
"...."
"이 방에서...아니 원래는 22층에서부터..."
"!"
"그 때 일 기억하시죠?"
"...."
경훈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대답할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경훈을 물끄러미 바라 본 명희가 다시 말했다.
"그 일로 제가 아이를 가졌어요"
"네에?"
"참 우습죠. 이 나이에 아이가 생긴 것도...아니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도..."
경훈은 둔기로 뒷덜미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요사이 매사에 흔들리는 것 같았던 명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요."
"...."
"저는 이 일이 신의 뜻인 것 같아요"
"네?"
"3년 후면 제가 60이예요"
"네에"
"이 나이에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이 지구에 몇이나 있겠어요?"
"...."
"근데 제가 그 희귀한 사람이 되었어요"
"...."
"그래서 저는 이 애를 낳을 거예요"
"네?"
경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 소리를 들은 것도 놀랄 일인데 아이를 낳겠단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를 천하의 고명희가 낳겠단다.
이제 이를 어쩔 것인가?
자기는 그러면 이제 이 일을 어찌 막을 것인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경훈의 귀에 다시 더 큰 폭탄이 터졌다.
"그래서 부탁인데...아저씨가 저와 결혼을 해 주세요"
"네에?"
"아 아이에게 당당하고 합법적인 탄생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요"
"???"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예요"
"..."
"지금껏 아저씨가 결혼하지 않은 것..."
"그거야..."
"아뇨. 그리고 나도 결혼하지 않은 것..."
"..."
"아마도 이 아이 때문이었다는 생각...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도 전..."
"아니요. 아저씨 뿐이예요"
와인 잔을 들고 서성이며 말을 하던 명희가 다시 경훈의 앞에 앉았다.
그리곤 그윽하게 경훈을 바라보면서 경훈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오늘...저하고 여기서 자요"
"안 됩니다. 그건..."
"왜요?"
"전임 회장님과의 약속입니다"
"아버지?"
"네"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
"죽을 때까지 회장님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다치지도 않게 보호한다는 약속..."
"지금껏 그 약속 때문에 저를 보호하신 거예요?"
"그거야..."
"아버진 이미 백골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어요"
"..."
"그동안 하신 것으로 이미 그 약속을 아저씨는 200%도 넘게 지켰어요"
말을 마친 명희가 잔을 내려 놓고 다시 경훈에게 와인을 따랐다.
경훈은 그 잔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명희의 눈을 바라봤다.
마주친 눈길에서 명희는 불꽃을 발했다.
경훈은 심각하게 그 눈길을 받으며 고민했다.
"이건 사랑도 아니다. 정략도 아니다. 그럼 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명희가 그런 경훈의 고민이 깨지는 소리를 했다.
"사랑...아니예요. 정략...아니예요"
"아!"
"안 믿으시겠지만, 그리고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전 이미 이 아이의 아빠에게 모든 것을 드렸어요"
"...."
"단 하루하고 반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
"우연히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생긴 일이었는데..."
"...."
"그 분은 저의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가져갔어요"
"...."
"그리고 남겨주신 것이 이 아이예요"
그렇게 말을 하는 명희의 동공에 물기가 어렸다.
경훈은 그런 명희를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더욱 들었다.
"이 아이는 그래서 더욱 소중히 낳아야 해요"
"...."
"어저씨 뿐이예요"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지켜주실 분이..."
"...."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어요"
"???"
"그냥 아저씨와 제가 공개적으로 결혼식만 하는 거 외에는..."
"그러면?"
"네, 그냥 우린 지금처럼 똑같이 사는 거예요"
"혼인신고는?"
"하고 싶으세요?"
"아니 그냥..."
"혼인신고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이 아이에겐 고씨성을 줄 거예요"
"??"
"지금은 엄마 성을 따라서 입적신고를 해도 되니까..."
"그건 그렇죠"
"또 아버지도 아저씨로 올리지 않을 거예요"
"그럼?"
"아이와 이 아이 아빠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아요"
결국 그거였다.
경훈은 명희가 아이를 공개적으로 낳기 위해 대외적인 조건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이제 결심은 자신만 하면 되었다.
끝까지 명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회로 이용할 것인가의 선택...
와인잔을 한입에 비운 경훈이 결심한 듯 말했다.
"회장님 뜻대로 하지요"
2
"엄마"
"응?"
"고회장님 말야..."
"누구? 고명희 회장?"
"응"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너무 자주 오시잖아?"
"그야..."
"뭐 내가 모르는 질병이 있을리는 없고..."
"너도 참"
"그니까...내가 바보도 아니고..."
"엄마가 친구니까..."
"아니야. 뭔가가 있어"
퇴근 후 지수가 본격적으로 심문하듯 화영을 다그쳤다.
지 남편과 사는 집으로 가지 않고 부득이 같이 퇴근한 이유가 그것인 것 같았다.
화영은 명희의 말이 생각났다.
명희는 사위인 강철준 검사가 지수와 결혼한 것이 고명희와 가까워지기 위한 작전이라고 했었다.
"너"
"응"
"강검사 때문이야?"
"무슨?"
"감검사가 고회장 신변에 대해 궁금해 해?"
"아아니...뭐"
지수가 화영의 돌직구 공격에 머뭇거렸다.
갑자기 공수가 교대된 것 같았다.
"말 해. 그렇지?"
"아 니...뭐...종종 묻기는 해"
"뭐라고?"
"명희 아줌마 근황이라든지...뭐 건강 상태 그런 거..."
"왜 그러겠어?"
"그거야..."
"고회장이 오늘 그러더라"
"뭐라고?"
"강검사가 너하고 결혼한 것은 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왜?"
"너도 알지?"
"???"
"고회장이 자기 직원들 말고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친구가 엄마친구 들 뿐이라는 거..."
"그 정돈 알지"
"지난 번..."
"???"
"그 친구 중 한 명인...너도 아는 주여사..."
"아 그 회장님 초등 동창이라는?"
"그래..."
"근데?"
"그 주여사에게 제비들이 꼬였어"
"뭐? 세상에...그래서?"
"그 제비들을 잡고 보니까 목표가 주여사가 아니라 고회장이었어"
"어머어머..."
"그런 일이 한 두번이 아냐. 지금까지..."
"세상에..."
"의상실 하는 친구 알지?"
"응. 경찰하는 내 친구 보연이 엄마?"
"그래....그 박마담을 통해서도...선을 대려고 하고...이 엄마를 통해서도 마찬가지고..."
"누가?"
"누구겠어? 고회장 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들이지"
"불나방?"
"그중 가장 핵심들이 고회장 배다른 동생들이고..."
"아하!!"
"고회장한테 상속자가 없잖아?"
"아~항"
"그러니까 동생들이 여러 방법으로...그래서 니 남편도 거기 얽힌 것으로 보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그렇지만 너도 함부로 고회장에 대해 말 전하거나 그러지 마"
지수는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의심이 가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남편은 시간만 되면 고회장 아줌마 근황을 물었었다.
특히 밤일이 끝나면서 하는 예기들은 거의가 고회장 관련 건이었다.
고회장에 대해 자세히 묻는 날은 더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직 그에게서 열락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다.
언제나 부족함 뿐이었으며 그럴 수록 더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되려 쾌감과 희열에 젖어 있는 것처럼 하면 그는 고회장에 대해 물었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지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가 자신에게 대쉬하던 때 부 터 생각하자 그 의심은 배가되었다.
퇴근길. 우연한 교통사고 같았다.
하지만 그리 큰 사고도 아닌, 그냥 흔히 있을 접촉사고로 미등이 하나 깨졌을 뿐이었다.
그는 친절했다. 물론 지수 자신의 차가 수리비가 비싼 외제차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필요이상으로 친절했다.
전해 준 명함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라고 찍혀있었다.
그 정도 직함과 직위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 교통사고는 자신이 갑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철저하게 을이었다.
지수는 그게 자신의 미모에 반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그게 작전이었을 것이라고?"
그 사고 후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급기야 한 달 만에 호텔에서 자신의 여자를 그에게 주었다.
그만하면 지수의 배우자로 손색이 없었다.
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후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결혼식을 치렀다.
엄마와 함께 살았으면 했으나 엄마 재산을 노린다는 소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크진 않으나 40평대 아파트를 장만, 둘만의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러면 그것도 작전?"
지수는 갑자기 혼돈이 생겼다.
이대로는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
"응"
"나 갈께"
"왜? 저녁 먹고 가지."
"아냐. 나 좀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강 서방 건?"
"응"
"뭘?"
"날 사랑한 게 아니고 작전이었다면..."
"?"
"좀 심각하잖아? 내가 이용물이란 게..."
"그거야..."
"그래서 확인해볼 게 좀 있어"
백을 들고 일어서는데 주방에서 이모가 나왔다.
"왜, 저녁 먹고 가지. 밥 다 되었는데..."
"아냐 이모...나중에 먹을 게"
"그래도..."
"근데...요즘 이모 더 예뻐진다?"
"뭘..."
미경은 둘 사이가 부럽다.
이 가족과 함께 산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실신했다가 깨어나서 보니 출산은 했는데 아이가 없어졌다.
자신을 돌봐주고 입원시킨 구서방 아저씨도 행방불명이었다.
세상을 모두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원장님이 자신을 잡아줬다. 지수와 연수도 있었다.
그애들은 언제나 바쁜 엄마를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명희는 기꺼이 그애들의 이모가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그애들의 엄마처럼 살았다.
연수가 유학을 가고 지수가 결혼한 뒤 미경은 쓸쓸하다.
그래서 지수가 온 날이면 더 정성껏 저녁상을 준비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 저녁을 먹지 않고 그냥 간단다.
미경은 그것이 섭섭하다. 자신이 낳은 딸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영원한 찬모라는 것...세삼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낳았으나 사산했다는 아이가 생각난다.
살았으면 그애도 이미 스무살이 넘었을 것인데....
"미경씨 섭섭해?"
지수가 나간 뒤 화영이 미경에게 물었다.
"아아뇨...섭섭하기는..."
"나중에 지수 애 낳으면...그때 내 대신 다시 할머니 하면 되잖아?"
"그렇죠 뭐"
"연수도 곧 귀국 할 거야"
"그래요? 언제요?"
"아마 이달 말 쯤? 학위 땄데"
"네에...그럴 줄 알았어요. 연수 걔가 머리가 그리 좋은데..."
"그렇게 좋아?"
"그럼요. 근데 귀국하면..."
"여기저기서 오라는데가 많은가 봐"
"당연하겠죠. 오면 곧 결혼도 시켜야겠네요?"
"그거야. 뭐...지가 다 알아서 하겠지"
화영은 미경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일을 생각했다.
"불쌍한 여자..."
지난 20여 년,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겠지만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종종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도 있었으나 내면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이를 그렇게 잃고도 저토록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함에도 자수와 연수에게 최선을 다해 이모노릇을 했다.
그 둘에겐 엄마인 자신보다 더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영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경이 허락만 한다면 명희에겐 매우 좋은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회영이 미경을 불렀다.
"참...미경씨"
"네"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닌데..."
"네"
"내 친구 중에 임신한 애가 있어"
"네에??"
"놀랐지? 나도 놀랐어. 우리 나이에 임신이 되었다니..."
"그러게요"
"그래서...그 친구와 태아가 모두 건강하게 출산을 하려면..."
"네.."
"내가 아마도 당분간 그 친구 집에 입주해서 돌봐야 하거든?"
"아!!"
"그때 미경씨도 나랑 같이 그 집에 들어갔으면 해서..."
"그 친구분은 가족이 없나요?"
"응. 없어. 돈은 많은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
"형제분도 없어요?"
"형제 자매들이 있기는 한데...도와줄 입장이 못 돼"
"네에"
미경으로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화영은 자신의 은인이다. 생명만 살려준 것이 아니다.
오갈 곳도 없는 자신에게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게 대한 사람이다.
지수와 연수, 그 애들이 없었다면 미경은 아마도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은인인 원장님의 애들, 그애들이 이모라고 따랐으니 오늘이 있었다.
원장의 제안에 대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형제가 있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친구라고 말은 하지만 원장님의 성격으로 봤을 때 알만 하다.
자신의 옛날 처지와 비슷한 사람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미경이 말했다.
"여기는 요?"
"연수 들어오면 혼자서 살라고 하지 뭐..."
"될까요?"
"미경씨가 종종 들러서 반찬이나 챙겨 주면..."
"그래도..."
"아냐. 단 몇 달인데 뭐"
"원장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래 고마워. 근데 아직 결정된 것은 아냐"
"네...결정되면 그때 말씀하세요"
미경은 말을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화영은 미경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남자가 생각났다.
"아! 그이...그분은 지금..."
그 남자를 생각하지 갑자기 하체가 시큰했다.
그의 품에서 헐떡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단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옥선의 남자 얘기가 부럽기도 했다. 명희의 임신도 부러웠다.
자신도 그의 품에서 그리 말했었다.
"조화영. 화영이라고 불러줘요"
"당신의 아기를 갖고 싶어요"
"나 버리지 말아요"
"나 당신 떠나서 살 수 없어요"
"당신하고라면 여기 산속에서 살아도 좋아요"
그런 고백을 수없이 했는데 깨어보니 그는 없었다.
처음에는 딸들에게 부끄러워서 그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와 밤을 새우고 그의 품에서 죽어갔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계집이고 그는 그 계집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있을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서울로 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가 생각난다. 보지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처녀적이거나 지수와 연수아빠가 있을 때 없었던 일이다.
하루에 팬티를 두어장 씩 갈아입어야 한다.
화영은 혼자 있을 때면 그가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다.
그를 생각에서 잠시라도 지우려면 명희의 집으로 입주하는 것이 그나마 좋을 것 같았다.
뭔가 일에라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런데 미경은 어땠을까? 자식을 잃고 삶도 잃은 그녀의 20년이 새삼 애처럽다.
3
"나야"
"응"
"바뻐?"
"형사가 늘 그렇지 안 바쁘면 대한민국이 아니지"
"나 지금 너 있는 곳으로 가는데..."
"그래?"
"잠깐만 봐"
"그래 그 정도야 뭐"
지수는 보연과의 통화를 생각하며 악셀레이터에 힘을 줬다.
최보연 경감...
엄마 친구의 딸이기도 하지만 같은 최씨라고 더 친해졌다.
더구나 둘 다 아빠가 없었으며 엄마들이 유명하다.
지수는 동생인 연수라도 있으나 보연은 동생도 없다.
지수는 나중에 이모라도 생겼으나 보연은 그도 없었다.
그래서 보연은 더욱 운동에만 열중했던 것 같다.
보연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지수는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보연이 경찰이 되고 자신도 레지던트 수련을 할 때는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친구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보연이 유일했다.
그런 친구 보연이므로 자신의 일을 부탁하기엔 안성마춤이었다.
"기집애 이뻐졌다?"
"너는?"
"나야 뭐...그래 시집가서 신랑품에 안기니까 이뻐지냐?"
"그런다 어쩔래?"
"부러워서 그런다 기집애야"
"부러우면 너도 가"
"안 그래도 가려고 해"
"그으래? 그래서 이처럼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어?"
"표시 나?"
"그래 이 기집애야"
"호호호"
"호호호"
지수를 만난 보연은 경찰서 앞 커피熾【 찻잔을 앞에 두고 마음껏 웃었다.
지수가 검사와 결혼을 했을 때 사실 부럽기도 했었다.
어려서 엄마가 의사인 것도 부러웠다. 동생이 있는 것도 부러웠다.
둘 다 공부도 잘했다. 언니는 의대에 동생은 법대에 합격했다.
자신이 그들과 동등해지려면 금메달을 따야한다고 입술을 몇번이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해냈다. 금메달도 따고 경찰 간부도 되었다.
지수의 엄마만큼이나 자신의 엄마도 유명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유명하다.
지수네 엄마는 흔한 산부인과 의사 중 하나지만 박주희는 단 하나 박주희다.
지금 이 나라에서 청담동 박주희가 만든 의상은 부의 상징이다.
거기다 이제 자신에겐 그분이 계신다.
비록 엄마와 동등하게 나누고 있으나 그분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다.
그분은 검사 100명 하고도 바꿀 수 없다. 이제 지수가 부럽지 않다.
"그래...무슨 일이신데 바쁘신 박사님이 여기까지 오셨을까?"
실없는 농담을 나누다가 보연이 본론을 꺼냈다.
지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휴지로 닦고나서 말했다.
"어려운 부탁인데..."
"응"
"비밀을 철통같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뭔데? 남편?"
"...."
"맞구나...바람펴?"
"아니...그건 아냐"
"그럼?"
"속은 거 같애"
"속다니?"
"내가, 이 최지수가 아내로 필요한 게 아니고...작전용이었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심각하게 말하는 지수의 표정을 읽으며 보연도 같이 심각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다.
대한민국 최고 사정기관인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가 그다.
그런데 그의 뒤를 캐겠다고 지금 지수는 자신을 찾아왔다.
"그래서 그의 뒤를 캐보려고?"
"응. 요즘 그런 일 하는 사립탐정들 있다며?"
"뭐 탐정이랄 거는 아니고...뒷조사 전문인 심부름 센터 뭐 그런데지"
"그니까...너가 경찰이니 그런 사람 중 괜찮은 사람 알 거 아냐?"
"있기야 하지...근데"
"근데 뭐?"
"네 남편이 특수부 검사 아냐?"
"그래서?"
"그 사람들 천성적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해"
"하기야.."
"일탈을 해도 완전범죄, 뭐 그렇지"
"...."
"그래서 심부름센터 애들이 되려 당할 걸?"
"그 정도야?"
"그러니 아예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지"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진 않아"
"그럼 알려 줘"
보연은 말을 하고도 아차 했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그분을 떠올렸는데 그렇다면 그분을 지수에게 노출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어차피"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까지 친구에게도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는 이미 공유했으나 비밀도 철저히 공유했다.
공식적으론 앞으로 엄마가 그분의 장모가 되기로도 했다.
경찰서에서도 형사과장과 경찰서장은 그분의 존재를 안다.
형사들도 그분을 알지만 자신과의 관계까지는 짐작만 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이 처리한 사건들...그동안 경찰의 골치를 였던 미결사건들...
그 사건들을 처리해낸 최보연 경감은 경찰의 꽃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존재는 철저한 비밀이다. 이것은 보연이 소속된 경찰서 외엔 비밀이다.
물론 보연의 경찰서 형사과에서도 그분은 그냥 비범한 프로파일러다.
그 프로파일러가 호적도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다.
지난 몇 주 보연은 그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다음 주면 그분에게 정식으로 주민증이 나올 것이다.
그때서야 그분의 존재가 언론에 알려져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보연은 무의식중에 친구에게 말해버릴 기세였다.
자신의 입에 실망한 보연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왜? 뭔데?"
"아냐...혹시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니까...그걸 알려 줘"
"그래...생각 좀 해 보고..."
"나 한시가 바빠"
"그렇게 심각해?"
"기분이 나쁘잖아? 내가. 이 최지수가 어떤 남자의 이용물이란 게"
"하기야..."
"그니까..."
보연이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 놓았다.
그런 보연을 지수가 눈을 동그렇게 뜨고 재촉했다.
"네가 만나는 것 안 되고..."
"그럼?"
"네 남편을 내가 아니까..."
"그래서?"
"어떻든 그가 누굴 만나는지, 뭘 생각하는지 그걸 알고싶은 거 아냐?"
"그치"
"한 열흘만 시간을 줘. 그럼 그거 내가 알아봐 줄께"
"열흘"
"응 열흘"
두 여자가 대회를 나누고 있는데 커피?문이 열리며 색을 맨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건장한 체격을 가졌는데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했다.
"여기 있었어?"
남자가 보연과 지수가 있는 탁자 앞으로 와서 앉으며 보연을 향해 말했다.
"아!. 끝났어요?"
"응"
보연이 얼굴을 붉히면서 다소곳이 남자를 대했다.
둘 사이를 가늠한 지수가 보연을 향해 물었다.
"누구야?"
"응? 아!"
보연이 우물쭈물했다.
용주가 둘 사이를 보면서 말했다.
"친구 분?"
"아! 네"
보연의 대답이 끝나자 용주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고용줍니다"
"아! 네. 최지수예요"
지수는 그의 눈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이 윤곽 전체를 가렸으나 눈이 너무 맑았다.
한참을 그 눈 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으로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타구니 사이가 뜨거워졌다.
순간적으로 손을 가랑이 사이로 내린 뒤 남자가 볼 수 없도록 눌렀다.
보연이 그런 지수의 상태를 눈치챘다. 빨리 자리를 떠야했다.
보연이 용주의 가방을 대신 들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지수야. 내가 나중에..."
"응? 어 엉"
내용을 모르는 용주가 가방을 잡으며 말했다.
"뭔데?"
"아....아네요"
"알았어"
보연을 따라 일어 선 남자가 휘적휘적 보연을 따라 나갔다.
지수는 그 둘의 뒷 모습을 보면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앉은 자리에 남을 물기와 얼룩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온 몸이 열병이 든 것처럼 덜덜 떨렸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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