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금지된 욕망에 끌린다."
제1화 화목한 가족
승준은 퇴근 후에 침대만큼 큰 소파에 눕듯이 앉아 느긋하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사실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저녁을 먹기 전이었고 TV에서는 교양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인지 승준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에 위치한 승준의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연봉 5억이 넘어야만 거주가 가능하다는 부자동네였다. 즉 승준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잘 사는 집의 가장이었다. 승준의 집이 큰 만큼 승준의 지루함의 크기도 커져 갔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비가 오네.”
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밖은 이제 막 봄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승준이 취미로 가꾸는 베란다의 화단에선 꽃향기가 가득해 거실에까지 퍼지고 있었고 아파트의 유리창으로 밖으로 보이는 단지 내 공원의 나무들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잎들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봄비.
그렇다. 조금은 늦었지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준오빠. 우리 공주님들 올 시간이에요. 우산 좀 챙겨 줄래요?"
고운 목소리가 부엌에서부터 거실로 퍼져 나온다. 승준은 목소리에 반응에 리모컨은 탁자 위에 내려놓고 벌떡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늘어지게 누워서 있을 팔자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 지수의 오더가 내려온 것이다.
"끄응, 이 녀석들 우산을 안 갖고 갔나?"
"오전에는 비가 안 내렸으니까.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네."
승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인지라 순간 아이들이 걱정 되었다. 승준과 지수 사이에는 총 아홉의 자녀가 있다. 부부금술이 좋아서도 있지만, 아홉 명의 자녀를 건사할 능력이 충분히 되기에 많은 자녀를 두는 것이 가능했다.
현재 승준이 운영하는 회사의 전력기획본부장으로 발령이 난 26살의 장녀 가영과 몇 개월 전에 같은 회사에 입사해 갓 사회인이 된 24살의 차녀 시영, 결혼해서 분가한 프로야구 선수인 22살의 장남 규영, 그리고 모델이자 직접 쇼핑몰을 운영하는 21살의 대학생이기도 한 삼녀 수영.
올해로 19살이 된 아이돌 연습생인 차남 태영. 그리고 갖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살의 사녀 예영과 15살 중학생인 오녀 하영. 그리고 현재 미국 조기 유학중인 13살 막내 딸 유영과 11살인 막내아들 준영까지. 총 9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다른이들이 보며 아홉 남매를 어찌 키우고 있는지 걱정할 테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승준은 올해 마흔 일곱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가장 잘나가는 기업이자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 디지털-라인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현재 CEO로서 기본 연봉만 10억이 넘으며 기업의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실세이기도 했다.
정승준이라는 이름은 재계에서도 꽤나 유명하다. 특히 광고분야와 검색엔진기술 분야에서는 승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초반에 작은 검색사이트로 시작한 그의 회사는 현재 포털사이트뿐만 아니라 게임과 통신사업, 유통과 건설까지 그 영역을 넓힌 상황이었다. 업계에서는 디지털-라인이라는 회사명보다 DL그룹으로 알려져 있었다.
승준은 자기 관리도 매우 철저한 남자였다. 항상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을 했다. CEO로서의 특별권한으로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시에 퇴근하지 하지 못하는 것은 곧 스스로 능력이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업무철칙이었다.
만일 오늘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면 일찍 퇴근해 미리 와서 일을 하는 것이 능률이 높다는 것도 그의 경영방침이었고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늘 6시면 칼 같이 퇴근을 했다. 직원들 역시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더욱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일을 할 수가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 꽤나 명망 높고 인기 있는 대표 이사님이었다.
또한 그는 늘 운동을 쉬지 않았다.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운동을 했다. 식사도 딱 정량만 먹는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신체조건이어서 인지 40대 중반인 그는 선명하게 복근이 남아있을 정도의 몸매를 유지했다. 겉으로만 보면 여느 40대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184cm의 모델 같은 키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몸에 맞게 외모 또 한 출중했다. 웬만한 인기 남자 연예인도 그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런 그의 외모와 체형 때문에 그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골드미스터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여기에 승준 보다 네 살 아래의 올해 43살의 아내인 유지수는 최고의 아내였다.
지수는 대학생시절에는 유명 패션잡지모델로 활동했고, 잠깐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졌다. 특히 최근에 자격증까지 딴 바디아트로 다져진 그녀의 몸매는 웬만한 20대의 미모 여배우들이나 모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녀는 현재 강남에서 바디아트센터를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원채 동안이기도 하지만 43세의 나이와 9남매를 낳은 엄마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눈가에 주름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백옥 같은 피부와 탄력 있는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 그녀의 목소리였다. 40대 주부가 가진 목소리나 말투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20대 여성의 목소리와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늘 젊게 살자는 것이 두 부부의 인생 모토이기도 했다.
이처럼 승준은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가장이었고 성공한 남자들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고생 하나 없이 자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승준과 지수는 둘 다 천애 고아였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 했고 승준이 21세, 지수가 17세에 장녀인 가영을 낳고 혼인신고를 해 함께 살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장성한 자녀들이 있는 것은 그 이유이기도 했다.
승준의 아내인 지수는 최근 예능방송 출연도 해, 초 동안 40대 얼짱 몸짱 아줌마로 주목을 받았고, 현재 그 효과로 인해 그녀가 운영하는 바디아트센터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였다.
승준은 재빨리 외출을 위해 옷을 입고는 지수를 향해 물었다.
"예영이랑 하영이지?"
자녀가 많은 것은 좋기도 했지만 조금은 불편한 점도 있다. 일일이 자식들에게 신경을 쓰려면 다른 집안의 몇 배를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응. 맞아."
고등학생인 예영과 중학생인 하영은 지금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태영이 녀석은 어떡하지?"
승준은 순간 비슷한 시간에 오는 차남인 태영 생각이 났다.
"괜찮아요. 태영이는 회사버스가 데려다 주는 거 잊었어요? 그리고 꼼꼼한 녀석이라 우산도 챙겨 갔어요."
지수의 말에 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에게 있어 9남매 중 아들 셋은 자랑거리 중에 자랑거리였다. 특히 둘째인 태영은 현재 기획사 연습생으로 남자아이돌 그룹 멤버로 확정되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현재도 승준이 사는 동네에서는 이미 예비스타로 불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태영의 팬클럽이 온라인에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여기에 이미 결혼해서 분가를 한 장남 규영도 대단했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규영은 현재는 부상으로 AAA에 내려가 있기는 하지만 20살에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그해 신인상과 MVP를 휩쓸었고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데뷔 해에 20-20-20클럽을 달성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또한 포스트시즌에 연타석 7회 홈런을 때려내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었다. 야구팬들은 규영이 곧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 이야기 했다.
그리고 현재 지면광고 아역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11살 막내 준영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것이 탈이지만 그 만큼 총명하고 똘똘했다. 한 달 전에는 수학경시대회에서 대상까지 타와 천재로 불리고 있었다.
승준의 자식자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녀인 가영은 23살에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만 3년 만에 전력기획본부장 자리를 꿰찼다. 물론 대표이사의 후계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임원이 된 것은 오롯이 그녀의 능력이었다. 올해 26살인 그녀는 현재 본부장으로서의 역량을 발휘에 승준의 회사가 통신사업까지 나가는 길목을 마련하기도 했고 최근 엔터테인먼트 사업까지 확장 중에 있었다. 그 일환으로 태영이 연습생으로 있는 기획사와 업부상 제휴를 맺은 상황이었다.
차녀인 시영도 작년에 대학을 마치고 24살의 나이에 수석으로 회사에 입사를 했다. 입사하자마자 3개월 만에 좋은 실적을 기록해 최 단기 주임 승진을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워낙에 일을 잘하는 두 딸들은 대표이사의 딸이기 때문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기 위해 두 딸은 현재 승준의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에 기거하고 있었다.
삼녀인 수영은 올해 21살이 되었지만 승준과 같은 CEO명함을 달고 있다. 17살에 모델로 데뷔에 세계적인 모델로 주목을 받았던 수영은 쇼핑몰을 오픈했고 현재 연 매출 200억에 가까운 대형 쇼핑몰의 CEO가 되었다. 최근에는 사업적으로 오히려 승준에게 충언을 할 정도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사녀인 예영은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다. 국내 최고의 사립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는 수재이다. 외모도 뛰어났고 공부는 물론 운동실력도 뛰어났다. 여기에 사교성도 좋아 학교에서 인기녀로 통한다.
예영이 다니는 학교의 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중학교의 2학년인 하영도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다. 공부도 잘하지만 특히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나 각종 운동부에서 러브콜까지 받고 있다.
그리고 6살 때부터 천재로 각종 TV 출연을 했던 올해 13살의 막내딸 유영은 주변의 권유로 인해 10살에 조기 유학을 보낸 지 3년이 흘렀다.
이처럼 자식농사를 매우 잘 지은 승준과 지수였다.
"지수야."
"응, 승준오빠."
여전히 지수는 승준을 여보라기보다는 승준 오빠라고 부른다. 그리고 승준 역시 지수를 여보라는 말 보다는 이름을 불러준다. 그것은 언제나 아내인 지수가 여자라는 의미였다. 지수 역시 여전히 남편이기 보다는 남자로 승준은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말들의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가면 어떠한 의미를 담은 음성으로 바뀐다. 그것은 둘의 애정의 신호이기도 했다. 승준은 지수의 뒤로 다가와 살포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밖에 비도 오고 그런데... 오늘 폭풍 치는 밤을 보내는 건 어때?"
살며시 지수의 목에 승준이 키스를 했다.
"뭐 나야 좋지만, 그 전에 우리 딸들 비 젖는단 말이야. 빨리 다녀와요. 얘들 감기 걸리면 오빠가 책임질래요?"
"알았습니다. 중전마마."
승준은 지수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는 현관으로 나와 우산을 꺼내 들고는 아파트 밖을 나섰다. 이미 동네에서도 구남매의 아빠로 유명인사인 승준은 단지 정문을 나오는 동안 동네 주민들과 목례로 인사를 여러 번 해야 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를 지나는데 계단에서 한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오고 있자 승준은 바로 달려가 짐을 들어 입구까지 올려주었다.
"아이고, 총각이 참 착하네. 내 딸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총각이라는 말을 들은 승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총각이라뇨. 할머니 제가 이래 뵈도 올해 47살입니다."
"47살? 젊은 총각이 어른을 놀리는 거야?"
"하하, 제가 애들만 아홉이에요."
"정말이야? 장하네."
"하하, 네. 그런데 제가 정말 총각으로 보이나요?"
"키도 훤칠하고 잘생겨서 누가 봐도 총각으로 보겠어. 애아버지라고 전혀 못 느껴."
"하하, 감사합니다."
승준은 들뜬 기분으로 예영과 하영을 마중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비도 참 잘 온다..."
숭준의 두 눈에 비가 내리는 풍경이 가득 들어왔다. 아스팔트로 내려 붓는 비가 따스한 기운을 머금고 하수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예영와 하영이가 다니는 대로 가에 위치한 아파트상가 정문 앞으로 나온 승준은 조심스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담배가 습기에 젖어 축축했다. 겨우 불을 붙은 승준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여 연기를 폐 깊숙이 밀어 넣었다.
"후우..."
연기를 내뱉자 순식간에 빗 바람에 연기가 사라져 버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어깨는 벌써 슬금슬금 함락되어 어깨언저리가 살짝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빨리 예영이와 하영이가 오기가 기다려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어린애로 여겨지던 예영이와 하영이. 어느새 성숙한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애교를 부리며 승준의 무릎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엉덩이가 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아빠한테도 새침때기처럼 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딸아이들이었다. 승준이 그런 행복한 생각에 잠길 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전화를 꺼내어 보니 장녀인 시영이었다.
"우리 큰 공주님~."
승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조금은 카랑한 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뭐해?]
"아빠는 넷째 공주님과 다섯 째 공주님 마중 나왔지."
[그래요? 난 시영이랑 퇴근하는 길이야.]
승준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일곱 시였다.
"벌써 일곱 시네. 저녁은 먹었고?"
[오피스텔 가서 먹으려고. 아참 상반기 1차 결산 보고서 메일로 첨부 했어요.]
"아고, 가영아. 일은 회사에서만 하자. 아빤 그거 오늘 안 보고 내일 아침에 볼 거야."
[아빤 회사 대표이사면서 너무 느긋한 거 아냐?]
"하하, 우리 딸이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해서, 아빠가 느긋한 거지."
[아빠, 그거 노동 착취야. 노동착취.]
"아이고 이놈아~. 노동 착취는 내가 일 시켰니?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뭐, 내가 쫌 일을 잘하기는 해.]
"좀 띄워주니까 잘난 척 하네? 하하."
[그럼 내일 보시고, 결제 부탁드립니다. 대표이사님.]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본부장님. 아 그리고 가영아.]
[응?]
"집에도 좀 오고해라. 먼 지천도 아니고,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린데, 너무 안 오니까 아빠가 섭섭하다."
[회사에서 매일 보잖아.]
"회사에는 사장님과 직원으로 만나는 거고, 집에서는 아빠와 딸로 좀 보면 안 되니?]
[우리 아빠는 딸들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해서 큰일이야.]
"아빠가 딸들 예뻐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니?"
[훗, 알았어요. 시영이랑 이번 달 말에 들릴게.]
"그래, 꼭 그래라. 같이 외식이나 한 번 하자."
[네, 알았어요.]
"시영이 녀석 좀 바꿔봐."
승준은 가영뿐만 아니라 시영의 목소리도 듣고 싶어졌다.
[네, 아빠.]
"시영아. 너는 아빠랑 전화하기 싫니? 아빠가 꼭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야만 전화를 받니?"
승준이 앓는 소리를 했다.
[언니랑 통화 하면 됐지. 뭐.]
"우리 둘째 공주님은 시크해도 너~~~~무 시크해."
[네가 시크한 게 뭐.]
시영은 다른 딸들에 비해 무뚝뚝한 편이다.
"너무 시크하게 답하니까. 아빠가 할 말이 없다."
[아...아빠 또 삐칠라 그러지?]
"몰라~."
[아...알았어. 알았어. 삐치지 좀 마.]
"아빠 달래주는 거야?"
[아 정말, 아빠가 이러면 내가 아빠 엄마 같아.]
"엄마 보다는 애인으로 하자. 너 옛날에는 나랑 결혼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에이~, 그건 어릴 때고.]
"뭐야~, 다 컸다고 아빠를 외면하는 것이야~"
[외면이라니. 와~ 순식간에 불효녀를 만드시는 우리 아빠.]
"작년까지만 해도 너 나랑 손잡고 데이트 하고 그랬다."
[알았어요. 다음 주말에 영화 같이 봐요.]
"약속했다~."
[영화는 아빠가 쏘기.]
"하하, 우리 따님의 데이트 신청에 영화만 쏠까. 밥도 쏘고~ 맥주도 쏘겠습니다~."
승준과 시영의 통화 사이에 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도 그날 갈꺼야~.]
[언니가 왜 와? 아빠, 나랑 둘이서만 보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큰 딸과 둘째 딸이 아빠와의 데이트를 놓고 다툼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준은 그것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기뻤다.
"아놔~ 이놈의 인기~."
승준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
승준이 전화기를 드려다 보았다. 전화기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녀석들이."
딸들의 장난이었다. 승준은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안했다. 분명이 차 안에서 둘이 티격태격 하고 있을 것이다. 괜시리 전화를 해서 운전을 방해 할 것 같았다. 승준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비 오는 밤에 기다리는 것도 할 만하다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축 처져있는 가로수의 초록빛이 띄엄띄엄 켜진 가로등과 아스팔트에 고인 물의 장난으로 인해 오만 가지 색으로 비쳐 보였다. 한갓진 길가에서 가끔 제한속도를 넘긴 듯한 자동차들의 질주를 보는 것도 썩 괜찮았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통해 확대되어 보였다. 도시가 서서히 밤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 뒤로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만이 새까만 하늘에 별빛보다 밝게 요란하게 번지고 있었다. 승준은 몸을 움츠리며 지수의 따스한 품을 생각했다.
"애들을 빨리 재우고 난 후에 지수를 안는 거야. 달콤한 키스를 하며 나를 녹일 육체를 껴안는 거야."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인 자신의 아내 지수. 생각할 때마다 지수의 뜨거운 육체가 머리에 떠올랐다. 무려 27년을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아내는 아름다웠고, 여전히 아내는 승준에게 최고의 여자였다. 남들은 자기관리를 못한 아내를 생각하면 한숨을 내쉬지만 승준은 달랐다. 자신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준 신에게 감사했다.
20살이 되었을 때, 고아원을 나와야만 했던 승준을 따라 나온 16살의 여자아이. 그 아이는 지금 농익은 여자로서 자신의 옆에 여전히 함께 있었다. 그 누가 지수를 9남매를 낳은 주부로 보겠는가. 간혹 지수와 장을 보러 마트를 나가면 다른 집 남자들이 지수의 몸매를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는 했다. 그것은 승준에게 우월감이자 승리의 표본이었다. 웬만한 젊은 여자들도 지수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27년 동안 봐온 여자지만 매일 새로운 여자인 지수는 승준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승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자지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참으로 튼실했다.
"오늘 한 세 번 정도 해야겠어. 3일 동안 못해서 그런지 이 녀석이 벼르고 있는 걸."
승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 피운 담배를 흙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닥 위에 비볐다.
"아빠!"
옥구슬 굴러가듯한 소리에 승준이 고개를 돌렸다. 저 만치에서 학원용 승합차에서 내리는 다섯째 딸 예영이 보였다. 아마도 여섯째인 하영보다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우리 공주님~."
승준은 늘 딸들을 부르는 수식어로 불렀다. 공주님. 자신은 왕이니 딸들은 공주님이 맞다. 그리고 늘 그렇게 대했다. 딸들을 떠받듯이 대하니 자연스럽게 딸들도 자신을 왕처럼 대우해 줬다. 너무 예뻐하면 아이들의 버릇이 없어진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자식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예영이 승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성큼 자란 키가 승준의 턱 바로 아래에 있었다. 17살. 이제 고1이지만 170cm 가까운 키였다. 모델출신인 아내의 키를 넘어선 것이 벌써 1년 전쯤인가 싶다. 비를 피해 깡총깡총 뛰어서 우산 밑으로 기어들어오는 폼이 어린 시절 제 어미를 쏙 빼다 밖았다.
"자, 여기 우산 대령입니다."
예영이 애지중지하는 우산을 건네주었다. 제비꽃들이 천위에 피어나 있는 우산이었다. 딸들 마다 좋아하는 무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예영은 꽃무늬를 좋아했다. 언제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서인지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몰래 언니들 것을 쓰고 갔었다. 다행이 인심 좋은 언니들은 그런 예영을 곧 잘 봐주고는 했었다.
"에이. 그냥 아빠 거 쓰고 갈래. 따로따로 쓰면 낭비잖아. 그리고 난 아빠 옆이 좋아요."
"그러다가 하영이 나타나면 자리 빼앗길 텐데?"
"힘은 내가 더 세다고."
예영이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승준은 아빠로서 집 안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다. 여섯 딸 모두 아빠인 승준을 좋아한다. 흔히 아버지와 딸들이 갖는 어색함은 승준의 집안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건 앞서 말한 것 같이 딸들을 공주님 대하듯이 대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아빠보다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 승준의 교육적 방침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큰 딸인 가영은 독립하기 전까지 목욕을 하고서는 알몸으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승준에게 자신의 방에 있는 속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지금도 집에 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고는 한다. 사실 26살난 딸이 집에서 그런다고 하면 다른 집안 아버지들이 놀라 자빠질 일이지만 승준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딸과 아버지 사이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성한 딸들이 샤워 타올 을 건네며 등을 밀어달라고 하면, 등을 밀어주는 것이 승준이었다. 엄마인 지수도 전혀 거리낌 없어 했다. 승준은 아파트를 새로 인테리어 할 때 목욕탕을 크게 만들어 욕탕을 만들었다. 매번은 아니지만 온 가족이 모이면 같이 혼욕을 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 살을 부딪치다 보니, 그런 사춘기시절에 생겨 골이 깊어지는 어색함은 없었다. 여섯 딸아이 모두 아빠인 승준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좋아해 준다. 몰론 그 내면에는 승준의 두둑한 용돈세례가 늘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길게 하품을 하며 승준이 우산을 예영에게 건네주고는 예영이 매고 있던 가방을 들어주었다. 딸아이의 가방이 제법 묵직했고 무거웠다. 예영은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립고등학교에서도 전교권에 드는 수재였다. 게다가 미술에 소질이 있어 미술학원까지 다니고 있었다. 얼마전에는 전국대회에서 입상까지 했다. 그렇다고 화가가 꿈은 아니다. 훗날 승준이 운영하는 회사의 디자인 실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하영이는 고입 반이라서 그런가? 더 늦게 끝나네?"
"재능이 부족해서 그래, 그림도 못 그리는 애가 왜 날 따라와서는."
예영이 말이 맞았다. 하영은 집안에서 가장 성격이 드센 아이였고 지기를 싫어했다. 특히 바로 위의 예영과는 라이벌 의식이 남달랐다. 예영이 승준에게 안겨있으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야 했고, 사실 예영보다는 뭐든 능력이 한 단계는 떨어졌지만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였다.
"예영아, 너 행여 하영이한테 그런 소리하면, 큰일 난다."
"내가 언니인데 제 까짓 게 뭘 어쩌겠어?"
"아빠는 네가 한 번도, 하영이를 이기는 걸 못 보았는데?"
"......"
분명 언니인 예영보다 키도 작고 아직은 어린애 티가 물씬 하영은 중3이 유일하게 예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엄마인 지수를 닮아 운동신경이 탁월한 점이었다. 그렇다고 예영이 운동실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영역시 발군의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영이 더 뛰어났다. 한 번은 예영의 학교 운동부 감독들이 때로 몰려와 하영을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영은 이미 운동선수인 큰 오빠 규영 때문인지 스포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취미로 즐기는 수준이 다였다. 그래서인지 체격에 비해 힘도 세고, 언니들과의 몸 다툼에서 늘 승리를 했다. 사실상 승준의 집의 힘으로는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차피 지금은 자리에 없으니까. 괜찮아"
"하하하하."
아빠를 놓고 다투는 귀여운 딸들이라니, 지금은 독립한 가영과 시영이 생각이 났다. 그 아디들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놓고 싸우지 않았던가. 자매들이라서 그런지 매우 닮아보였다. 승준은 순간 흐뭇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아원 시절, 자신을 두고 고아원의 여자아이들이 서로 다투던 시절이 있었다. 미남의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여자들의 대시에 난감해 할 때마다 지수가 와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지수는 고아원 시절에 남자애들까지 통틀어서 고아원 짱이었었다.
"지금 내 욕했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했던가. 어느새 하영이가 예영과 승준의 뒤로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예영이 급히 승준의 팔을 붙들며 뒤로 숨고는 하영을 보고 메롱 거렸다. 그러자 하영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어보였다. 딸들의 재롱에 승준은 더욱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아빠. 글쎄 학원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저번 선생님보다 더 못 가르치는 거 있지?"
"언니는 성적 떨어지면 만날 학원 선생님 탓하더라."
"너도 알잖아. 강서진 선생님. 이상해. 그 선생님. 재미도 없고."
"몰라. 나는 중등반이라서 마주칠 일이 없는 걸. 뭐 언니 말대로 맥아리 없이 다니는 것 같기는 해."
두 딸들의 대화에 승준이 살짝 끼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다니는 길목에 있는 학원에 같이 다니라니까."
"헹, 그러면 이렇게 아빠가 마중 나와 주는 일이 없게?"
"맞아. 그리고 언니가 옮기면 나도 따라갈 거야!"
예영과 하영이 승준의 양팔을 콱 붙들었다. 그러자 우산을 든 승준의 팔이 휘청거렸다. 딸아이들은 살갑게 잘 키운 것 같았다. 물이 고여 곳을 피해서 발장단을 맞추어 딸들과 정답게 집으로 향했다. 승준과 같이 자식을 마중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둘러 아파트를 향해 발을 재촉하는지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멀어지는 사람들. 거리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나이를 먹을수록 정답던 친구들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가정의 울타리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승준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길을 올라가는 길에 예영이 승준을 보며 말했다.
"아빠, 내가 얘기하나 해줄까?"
"뭔데?"
"있잖아.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알 수가 없었대."
예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 승준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왜?"
"근데, 중요한 건 왜 그런지도 모른대. 헤헤~"
승준은 그제 서야 예영이 자신에게 우스갯소리를 한 것을 알아차리고 이마로 예영의 머리를 군밤 주듯 부딪쳤다. 딸아이의 젖은 머리칼에서 아스라한 비 내음이 풍겼다. 예영의 귓불에 잔잔한 솜털이 소록소록 돋아 있는 게 보였다.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하영이 예영을 보며 역성을 냈다. 그러자 예영은 또 다시 혀를 빼꼽 내밀어 하영을 놀렸다. 하영이 그런 예영에게 덤벼들려하자 승준이 얼른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그렇게 두 자매와 함께 장난스럽게 길을 걸어 올라는 중 빗줄기가 더 세차지는지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굵어졌다. 예영과 하영의 어깨가 걱정스러웠다.
"여자들은 어깨가 젖으면 좋지 않다던데..."
막 입을 벌려 더 들어오라고 하려는 순간 예영의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팔꿈치에 느껴졌다. 하영은 우산을 든 팔을 잡고 있어서 인지 가슴이 닿지 않았지만 예영의 가슴이 팔에 닿은 것이다.
"하... 추워."
예영의 입에서 가냘픈 김이 솟아올랐다. 하영의 어깨도 어느새 젖었는지 승준의 옆구리로 더욱 바짝 붙었다. 그 순간 하영의 가슴이 승준의 옆구리에 살짝 닿았다.
"얘들이 이렇게 자랐나..."
승준의 가슴 한 구석에 알듯 모를듯한 도취감이 퍼졌다. 팔 언저리에 느껴지는 봉긋한 딸들의 가슴의 감촉이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아빠. 나 추워."
예영릐 말에 승주은 가방과 우산을 한 손에 움켜쥐고는 한 손을 예영의 어깨로 돌려 감았다. 물기에 젖은 예영의 어깨에서 정다운 안정감이 느껴졌다. 예영의 젖은 옷을 통해 느끼는 어깨의 온기가 승준에게 아내의 체온을 떠올리게 했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느껴지는 예영의 따스한 몸이 기뻤다.
"어어! 안돼! 아빠는 내꺼야!"
승준이 예영의 어깨를 감싸 안은 것은 본 하영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하영~! 너~!"
"흥! 아빠는 내꺼야!"
이번에는 하영의 어깨가 승준의 팔 안에 들어왔다. 하영은 반대쪽이 젖어서인지 승준의 겨드랑이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싸우지들 말고. 다왔다. 우리 뛰자!"
승준은 장난 치듯이 우산을 들고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당황한 두 딸들이 빠르게 승준을 따라 아파트 건물 정문 까지 뛰어 들어왔다.
"우아, 아빠 치사하게."
"맞아, 딸을 버리고 가다니."
"하하 미안. 그렇다고 셋이 비 맞고 있을 수는 없잖니."
딸들이 귀엽게 불평을 하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앞서 나갔다. 승준은 우산을 접고는 밖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땅으로 안기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승준은 머릿속으로 가족들을 세어보았다.
"가영이랑 시영이는 자기들 집에 잘 들어갔나 몰라. 유영이랑 준영이는 집에 있고. 수영이는 아직 퇴근 전이구나."
승준은 가장으로서 할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예쁜 두 딸 예영과 하영이 자신이 엘리베이터로 들어오기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제1화 화목한 가족
승준은 퇴근 후에 침대만큼 큰 소파에 눕듯이 앉아 느긋하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사실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저녁을 먹기 전이었고 TV에서는 교양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인지 승준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에 위치한 승준의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연봉 5억이 넘어야만 거주가 가능하다는 부자동네였다. 즉 승준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잘 사는 집의 가장이었다. 승준의 집이 큰 만큼 승준의 지루함의 크기도 커져 갔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비가 오네.”
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밖은 이제 막 봄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승준이 취미로 가꾸는 베란다의 화단에선 꽃향기가 가득해 거실에까지 퍼지고 있었고 아파트의 유리창으로 밖으로 보이는 단지 내 공원의 나무들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잎들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봄비.
그렇다. 조금은 늦었지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준오빠. 우리 공주님들 올 시간이에요. 우산 좀 챙겨 줄래요?"
고운 목소리가 부엌에서부터 거실로 퍼져 나온다. 승준은 목소리에 반응에 리모컨은 탁자 위에 내려놓고 벌떡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늘어지게 누워서 있을 팔자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 지수의 오더가 내려온 것이다.
"끄응, 이 녀석들 우산을 안 갖고 갔나?"
"오전에는 비가 안 내렸으니까.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네."
승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인지라 순간 아이들이 걱정 되었다. 승준과 지수 사이에는 총 아홉의 자녀가 있다. 부부금술이 좋아서도 있지만, 아홉 명의 자녀를 건사할 능력이 충분히 되기에 많은 자녀를 두는 것이 가능했다.
현재 승준이 운영하는 회사의 전력기획본부장으로 발령이 난 26살의 장녀 가영과 몇 개월 전에 같은 회사에 입사해 갓 사회인이 된 24살의 차녀 시영, 결혼해서 분가한 프로야구 선수인 22살의 장남 규영, 그리고 모델이자 직접 쇼핑몰을 운영하는 21살의 대학생이기도 한 삼녀 수영.
올해로 19살이 된 아이돌 연습생인 차남 태영. 그리고 갖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살의 사녀 예영과 15살 중학생인 오녀 하영. 그리고 현재 미국 조기 유학중인 13살 막내 딸 유영과 11살인 막내아들 준영까지. 총 9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다른이들이 보며 아홉 남매를 어찌 키우고 있는지 걱정할 테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승준은 올해 마흔 일곱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가장 잘나가는 기업이자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 디지털-라인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현재 CEO로서 기본 연봉만 10억이 넘으며 기업의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실세이기도 했다.
정승준이라는 이름은 재계에서도 꽤나 유명하다. 특히 광고분야와 검색엔진기술 분야에서는 승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초반에 작은 검색사이트로 시작한 그의 회사는 현재 포털사이트뿐만 아니라 게임과 통신사업, 유통과 건설까지 그 영역을 넓힌 상황이었다. 업계에서는 디지털-라인이라는 회사명보다 DL그룹으로 알려져 있었다.
승준은 자기 관리도 매우 철저한 남자였다. 항상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을 했다. CEO로서의 특별권한으로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시에 퇴근하지 하지 못하는 것은 곧 스스로 능력이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업무철칙이었다.
만일 오늘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면 일찍 퇴근해 미리 와서 일을 하는 것이 능률이 높다는 것도 그의 경영방침이었고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늘 6시면 칼 같이 퇴근을 했다. 직원들 역시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더욱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일을 할 수가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 꽤나 명망 높고 인기 있는 대표 이사님이었다.
또한 그는 늘 운동을 쉬지 않았다.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운동을 했다. 식사도 딱 정량만 먹는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신체조건이어서 인지 40대 중반인 그는 선명하게 복근이 남아있을 정도의 몸매를 유지했다. 겉으로만 보면 여느 40대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184cm의 모델 같은 키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몸에 맞게 외모 또 한 출중했다. 웬만한 인기 남자 연예인도 그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런 그의 외모와 체형 때문에 그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골드미스터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여기에 승준 보다 네 살 아래의 올해 43살의 아내인 유지수는 최고의 아내였다.
지수는 대학생시절에는 유명 패션잡지모델로 활동했고, 잠깐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졌다. 특히 최근에 자격증까지 딴 바디아트로 다져진 그녀의 몸매는 웬만한 20대의 미모 여배우들이나 모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녀는 현재 강남에서 바디아트센터를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원채 동안이기도 하지만 43세의 나이와 9남매를 낳은 엄마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눈가에 주름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백옥 같은 피부와 탄력 있는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 그녀의 목소리였다. 40대 주부가 가진 목소리나 말투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20대 여성의 목소리와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늘 젊게 살자는 것이 두 부부의 인생 모토이기도 했다.
이처럼 승준은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가장이었고 성공한 남자들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고생 하나 없이 자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승준과 지수는 둘 다 천애 고아였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 했고 승준이 21세, 지수가 17세에 장녀인 가영을 낳고 혼인신고를 해 함께 살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장성한 자녀들이 있는 것은 그 이유이기도 했다.
승준의 아내인 지수는 최근 예능방송 출연도 해, 초 동안 40대 얼짱 몸짱 아줌마로 주목을 받았고, 현재 그 효과로 인해 그녀가 운영하는 바디아트센터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였다.
승준은 재빨리 외출을 위해 옷을 입고는 지수를 향해 물었다.
"예영이랑 하영이지?"
자녀가 많은 것은 좋기도 했지만 조금은 불편한 점도 있다. 일일이 자식들에게 신경을 쓰려면 다른 집안의 몇 배를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응. 맞아."
고등학생인 예영과 중학생인 하영은 지금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태영이 녀석은 어떡하지?"
승준은 순간 비슷한 시간에 오는 차남인 태영 생각이 났다.
"괜찮아요. 태영이는 회사버스가 데려다 주는 거 잊었어요? 그리고 꼼꼼한 녀석이라 우산도 챙겨 갔어요."
지수의 말에 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에게 있어 9남매 중 아들 셋은 자랑거리 중에 자랑거리였다. 특히 둘째인 태영은 현재 기획사 연습생으로 남자아이돌 그룹 멤버로 확정되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현재도 승준이 사는 동네에서는 이미 예비스타로 불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태영의 팬클럽이 온라인에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여기에 이미 결혼해서 분가를 한 장남 규영도 대단했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규영은 현재는 부상으로 AAA에 내려가 있기는 하지만 20살에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그해 신인상과 MVP를 휩쓸었고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데뷔 해에 20-20-20클럽을 달성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또한 포스트시즌에 연타석 7회 홈런을 때려내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었다. 야구팬들은 규영이 곧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 이야기 했다.
그리고 현재 지면광고 아역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11살 막내 준영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것이 탈이지만 그 만큼 총명하고 똘똘했다. 한 달 전에는 수학경시대회에서 대상까지 타와 천재로 불리고 있었다.
승준의 자식자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녀인 가영은 23살에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만 3년 만에 전력기획본부장 자리를 꿰찼다. 물론 대표이사의 후계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임원이 된 것은 오롯이 그녀의 능력이었다. 올해 26살인 그녀는 현재 본부장으로서의 역량을 발휘에 승준의 회사가 통신사업까지 나가는 길목을 마련하기도 했고 최근 엔터테인먼트 사업까지 확장 중에 있었다. 그 일환으로 태영이 연습생으로 있는 기획사와 업부상 제휴를 맺은 상황이었다.
차녀인 시영도 작년에 대학을 마치고 24살의 나이에 수석으로 회사에 입사를 했다. 입사하자마자 3개월 만에 좋은 실적을 기록해 최 단기 주임 승진을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워낙에 일을 잘하는 두 딸들은 대표이사의 딸이기 때문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기 위해 두 딸은 현재 승준의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에 기거하고 있었다.
삼녀인 수영은 올해 21살이 되었지만 승준과 같은 CEO명함을 달고 있다. 17살에 모델로 데뷔에 세계적인 모델로 주목을 받았던 수영은 쇼핑몰을 오픈했고 현재 연 매출 200억에 가까운 대형 쇼핑몰의 CEO가 되었다. 최근에는 사업적으로 오히려 승준에게 충언을 할 정도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사녀인 예영은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다. 국내 최고의 사립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는 수재이다. 외모도 뛰어났고 공부는 물론 운동실력도 뛰어났다. 여기에 사교성도 좋아 학교에서 인기녀로 통한다.
예영이 다니는 학교의 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중학교의 2학년인 하영도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다. 공부도 잘하지만 특히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나 각종 운동부에서 러브콜까지 받고 있다.
그리고 6살 때부터 천재로 각종 TV 출연을 했던 올해 13살의 막내딸 유영은 주변의 권유로 인해 10살에 조기 유학을 보낸 지 3년이 흘렀다.
이처럼 자식농사를 매우 잘 지은 승준과 지수였다.
"지수야."
"응, 승준오빠."
여전히 지수는 승준을 여보라기보다는 승준 오빠라고 부른다. 그리고 승준 역시 지수를 여보라는 말 보다는 이름을 불러준다. 그것은 언제나 아내인 지수가 여자라는 의미였다. 지수 역시 여전히 남편이기 보다는 남자로 승준은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말들의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가면 어떠한 의미를 담은 음성으로 바뀐다. 그것은 둘의 애정의 신호이기도 했다. 승준은 지수의 뒤로 다가와 살포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밖에 비도 오고 그런데... 오늘 폭풍 치는 밤을 보내는 건 어때?"
살며시 지수의 목에 승준이 키스를 했다.
"뭐 나야 좋지만, 그 전에 우리 딸들 비 젖는단 말이야. 빨리 다녀와요. 얘들 감기 걸리면 오빠가 책임질래요?"
"알았습니다. 중전마마."
승준은 지수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는 현관으로 나와 우산을 꺼내 들고는 아파트 밖을 나섰다. 이미 동네에서도 구남매의 아빠로 유명인사인 승준은 단지 정문을 나오는 동안 동네 주민들과 목례로 인사를 여러 번 해야 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를 지나는데 계단에서 한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오고 있자 승준은 바로 달려가 짐을 들어 입구까지 올려주었다.
"아이고, 총각이 참 착하네. 내 딸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총각이라는 말을 들은 승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총각이라뇨. 할머니 제가 이래 뵈도 올해 47살입니다."
"47살? 젊은 총각이 어른을 놀리는 거야?"
"하하, 제가 애들만 아홉이에요."
"정말이야? 장하네."
"하하, 네. 그런데 제가 정말 총각으로 보이나요?"
"키도 훤칠하고 잘생겨서 누가 봐도 총각으로 보겠어. 애아버지라고 전혀 못 느껴."
"하하, 감사합니다."
승준은 들뜬 기분으로 예영과 하영을 마중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비도 참 잘 온다..."
숭준의 두 눈에 비가 내리는 풍경이 가득 들어왔다. 아스팔트로 내려 붓는 비가 따스한 기운을 머금고 하수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예영와 하영이가 다니는 대로 가에 위치한 아파트상가 정문 앞으로 나온 승준은 조심스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담배가 습기에 젖어 축축했다. 겨우 불을 붙은 승준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여 연기를 폐 깊숙이 밀어 넣었다.
"후우..."
연기를 내뱉자 순식간에 빗 바람에 연기가 사라져 버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어깨는 벌써 슬금슬금 함락되어 어깨언저리가 살짝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빨리 예영이와 하영이가 오기가 기다려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어린애로 여겨지던 예영이와 하영이. 어느새 성숙한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애교를 부리며 승준의 무릎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엉덩이가 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아빠한테도 새침때기처럼 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딸아이들이었다. 승준이 그런 행복한 생각에 잠길 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전화를 꺼내어 보니 장녀인 시영이었다.
"우리 큰 공주님~."
승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조금은 카랑한 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뭐해?]
"아빠는 넷째 공주님과 다섯 째 공주님 마중 나왔지."
[그래요? 난 시영이랑 퇴근하는 길이야.]
승준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일곱 시였다.
"벌써 일곱 시네. 저녁은 먹었고?"
[오피스텔 가서 먹으려고. 아참 상반기 1차 결산 보고서 메일로 첨부 했어요.]
"아고, 가영아. 일은 회사에서만 하자. 아빤 그거 오늘 안 보고 내일 아침에 볼 거야."
[아빤 회사 대표이사면서 너무 느긋한 거 아냐?]
"하하, 우리 딸이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해서, 아빠가 느긋한 거지."
[아빠, 그거 노동 착취야. 노동착취.]
"아이고 이놈아~. 노동 착취는 내가 일 시켰니?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뭐, 내가 쫌 일을 잘하기는 해.]
"좀 띄워주니까 잘난 척 하네? 하하."
[그럼 내일 보시고, 결제 부탁드립니다. 대표이사님.]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본부장님. 아 그리고 가영아.]
[응?]
"집에도 좀 오고해라. 먼 지천도 아니고,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린데, 너무 안 오니까 아빠가 섭섭하다."
[회사에서 매일 보잖아.]
"회사에는 사장님과 직원으로 만나는 거고, 집에서는 아빠와 딸로 좀 보면 안 되니?]
[우리 아빠는 딸들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해서 큰일이야.]
"아빠가 딸들 예뻐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니?"
[훗, 알았어요. 시영이랑 이번 달 말에 들릴게.]
"그래, 꼭 그래라. 같이 외식이나 한 번 하자."
[네, 알았어요.]
"시영이 녀석 좀 바꿔봐."
승준은 가영뿐만 아니라 시영의 목소리도 듣고 싶어졌다.
[네, 아빠.]
"시영아. 너는 아빠랑 전화하기 싫니? 아빠가 꼭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야만 전화를 받니?"
승준이 앓는 소리를 했다.
[언니랑 통화 하면 됐지. 뭐.]
"우리 둘째 공주님은 시크해도 너~~~~무 시크해."
[네가 시크한 게 뭐.]
시영은 다른 딸들에 비해 무뚝뚝한 편이다.
"너무 시크하게 답하니까. 아빠가 할 말이 없다."
[아...아빠 또 삐칠라 그러지?]
"몰라~."
[아...알았어. 알았어. 삐치지 좀 마.]
"아빠 달래주는 거야?"
[아 정말, 아빠가 이러면 내가 아빠 엄마 같아.]
"엄마 보다는 애인으로 하자. 너 옛날에는 나랑 결혼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에이~, 그건 어릴 때고.]
"뭐야~, 다 컸다고 아빠를 외면하는 것이야~"
[외면이라니. 와~ 순식간에 불효녀를 만드시는 우리 아빠.]
"작년까지만 해도 너 나랑 손잡고 데이트 하고 그랬다."
[알았어요. 다음 주말에 영화 같이 봐요.]
"약속했다~."
[영화는 아빠가 쏘기.]
"하하, 우리 따님의 데이트 신청에 영화만 쏠까. 밥도 쏘고~ 맥주도 쏘겠습니다~."
승준과 시영의 통화 사이에 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도 그날 갈꺼야~.]
[언니가 왜 와? 아빠, 나랑 둘이서만 보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큰 딸과 둘째 딸이 아빠와의 데이트를 놓고 다툼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준은 그것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기뻤다.
"아놔~ 이놈의 인기~."
승준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
승준이 전화기를 드려다 보았다. 전화기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녀석들이."
딸들의 장난이었다. 승준은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안했다. 분명이 차 안에서 둘이 티격태격 하고 있을 것이다. 괜시리 전화를 해서 운전을 방해 할 것 같았다. 승준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비 오는 밤에 기다리는 것도 할 만하다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축 처져있는 가로수의 초록빛이 띄엄띄엄 켜진 가로등과 아스팔트에 고인 물의 장난으로 인해 오만 가지 색으로 비쳐 보였다. 한갓진 길가에서 가끔 제한속도를 넘긴 듯한 자동차들의 질주를 보는 것도 썩 괜찮았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통해 확대되어 보였다. 도시가 서서히 밤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 뒤로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만이 새까만 하늘에 별빛보다 밝게 요란하게 번지고 있었다. 승준은 몸을 움츠리며 지수의 따스한 품을 생각했다.
"애들을 빨리 재우고 난 후에 지수를 안는 거야. 달콤한 키스를 하며 나를 녹일 육체를 껴안는 거야."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인 자신의 아내 지수. 생각할 때마다 지수의 뜨거운 육체가 머리에 떠올랐다. 무려 27년을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아내는 아름다웠고, 여전히 아내는 승준에게 최고의 여자였다. 남들은 자기관리를 못한 아내를 생각하면 한숨을 내쉬지만 승준은 달랐다. 자신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준 신에게 감사했다.
20살이 되었을 때, 고아원을 나와야만 했던 승준을 따라 나온 16살의 여자아이. 그 아이는 지금 농익은 여자로서 자신의 옆에 여전히 함께 있었다. 그 누가 지수를 9남매를 낳은 주부로 보겠는가. 간혹 지수와 장을 보러 마트를 나가면 다른 집 남자들이 지수의 몸매를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는 했다. 그것은 승준에게 우월감이자 승리의 표본이었다. 웬만한 젊은 여자들도 지수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27년 동안 봐온 여자지만 매일 새로운 여자인 지수는 승준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승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자지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참으로 튼실했다.
"오늘 한 세 번 정도 해야겠어. 3일 동안 못해서 그런지 이 녀석이 벼르고 있는 걸."
승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 피운 담배를 흙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닥 위에 비볐다.
"아빠!"
옥구슬 굴러가듯한 소리에 승준이 고개를 돌렸다. 저 만치에서 학원용 승합차에서 내리는 다섯째 딸 예영이 보였다. 아마도 여섯째인 하영보다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우리 공주님~."
승준은 늘 딸들을 부르는 수식어로 불렀다. 공주님. 자신은 왕이니 딸들은 공주님이 맞다. 그리고 늘 그렇게 대했다. 딸들을 떠받듯이 대하니 자연스럽게 딸들도 자신을 왕처럼 대우해 줬다. 너무 예뻐하면 아이들의 버릇이 없어진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자식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예영이 승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성큼 자란 키가 승준의 턱 바로 아래에 있었다. 17살. 이제 고1이지만 170cm 가까운 키였다. 모델출신인 아내의 키를 넘어선 것이 벌써 1년 전쯤인가 싶다. 비를 피해 깡총깡총 뛰어서 우산 밑으로 기어들어오는 폼이 어린 시절 제 어미를 쏙 빼다 밖았다.
"자, 여기 우산 대령입니다."
예영이 애지중지하는 우산을 건네주었다. 제비꽃들이 천위에 피어나 있는 우산이었다. 딸들 마다 좋아하는 무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예영은 꽃무늬를 좋아했다. 언제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서인지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몰래 언니들 것을 쓰고 갔었다. 다행이 인심 좋은 언니들은 그런 예영을 곧 잘 봐주고는 했었다.
"에이. 그냥 아빠 거 쓰고 갈래. 따로따로 쓰면 낭비잖아. 그리고 난 아빠 옆이 좋아요."
"그러다가 하영이 나타나면 자리 빼앗길 텐데?"
"힘은 내가 더 세다고."
예영이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승준은 아빠로서 집 안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다. 여섯 딸 모두 아빠인 승준을 좋아한다. 흔히 아버지와 딸들이 갖는 어색함은 승준의 집안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건 앞서 말한 것 같이 딸들을 공주님 대하듯이 대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아빠보다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 승준의 교육적 방침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큰 딸인 가영은 독립하기 전까지 목욕을 하고서는 알몸으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승준에게 자신의 방에 있는 속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지금도 집에 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고는 한다. 사실 26살난 딸이 집에서 그런다고 하면 다른 집안 아버지들이 놀라 자빠질 일이지만 승준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딸과 아버지 사이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성한 딸들이 샤워 타올 을 건네며 등을 밀어달라고 하면, 등을 밀어주는 것이 승준이었다. 엄마인 지수도 전혀 거리낌 없어 했다. 승준은 아파트를 새로 인테리어 할 때 목욕탕을 크게 만들어 욕탕을 만들었다. 매번은 아니지만 온 가족이 모이면 같이 혼욕을 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 살을 부딪치다 보니, 그런 사춘기시절에 생겨 골이 깊어지는 어색함은 없었다. 여섯 딸아이 모두 아빠인 승준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좋아해 준다. 몰론 그 내면에는 승준의 두둑한 용돈세례가 늘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길게 하품을 하며 승준이 우산을 예영에게 건네주고는 예영이 매고 있던 가방을 들어주었다. 딸아이의 가방이 제법 묵직했고 무거웠다. 예영은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립고등학교에서도 전교권에 드는 수재였다. 게다가 미술에 소질이 있어 미술학원까지 다니고 있었다. 얼마전에는 전국대회에서 입상까지 했다. 그렇다고 화가가 꿈은 아니다. 훗날 승준이 운영하는 회사의 디자인 실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하영이는 고입 반이라서 그런가? 더 늦게 끝나네?"
"재능이 부족해서 그래, 그림도 못 그리는 애가 왜 날 따라와서는."
예영이 말이 맞았다. 하영은 집안에서 가장 성격이 드센 아이였고 지기를 싫어했다. 특히 바로 위의 예영과는 라이벌 의식이 남달랐다. 예영이 승준에게 안겨있으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야 했고, 사실 예영보다는 뭐든 능력이 한 단계는 떨어졌지만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였다.
"예영아, 너 행여 하영이한테 그런 소리하면, 큰일 난다."
"내가 언니인데 제 까짓 게 뭘 어쩌겠어?"
"아빠는 네가 한 번도, 하영이를 이기는 걸 못 보았는데?"
"......"
분명 언니인 예영보다 키도 작고 아직은 어린애 티가 물씬 하영은 중3이 유일하게 예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엄마인 지수를 닮아 운동신경이 탁월한 점이었다. 그렇다고 예영이 운동실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영역시 발군의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영이 더 뛰어났다. 한 번은 예영의 학교 운동부 감독들이 때로 몰려와 하영을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영은 이미 운동선수인 큰 오빠 규영 때문인지 스포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취미로 즐기는 수준이 다였다. 그래서인지 체격에 비해 힘도 세고, 언니들과의 몸 다툼에서 늘 승리를 했다. 사실상 승준의 집의 힘으로는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차피 지금은 자리에 없으니까. 괜찮아"
"하하하하."
아빠를 놓고 다투는 귀여운 딸들이라니, 지금은 독립한 가영과 시영이 생각이 났다. 그 아디들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놓고 싸우지 않았던가. 자매들이라서 그런지 매우 닮아보였다. 승준은 순간 흐뭇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아원 시절, 자신을 두고 고아원의 여자아이들이 서로 다투던 시절이 있었다. 미남의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여자들의 대시에 난감해 할 때마다 지수가 와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지수는 고아원 시절에 남자애들까지 통틀어서 고아원 짱이었었다.
"지금 내 욕했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했던가. 어느새 하영이가 예영과 승준의 뒤로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예영이 급히 승준의 팔을 붙들며 뒤로 숨고는 하영을 보고 메롱 거렸다. 그러자 하영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어보였다. 딸들의 재롱에 승준은 더욱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아빠. 글쎄 학원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저번 선생님보다 더 못 가르치는 거 있지?"
"언니는 성적 떨어지면 만날 학원 선생님 탓하더라."
"너도 알잖아. 강서진 선생님. 이상해. 그 선생님. 재미도 없고."
"몰라. 나는 중등반이라서 마주칠 일이 없는 걸. 뭐 언니 말대로 맥아리 없이 다니는 것 같기는 해."
두 딸들의 대화에 승준이 살짝 끼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다니는 길목에 있는 학원에 같이 다니라니까."
"헹, 그러면 이렇게 아빠가 마중 나와 주는 일이 없게?"
"맞아. 그리고 언니가 옮기면 나도 따라갈 거야!"
예영과 하영이 승준의 양팔을 콱 붙들었다. 그러자 우산을 든 승준의 팔이 휘청거렸다. 딸아이들은 살갑게 잘 키운 것 같았다. 물이 고여 곳을 피해서 발장단을 맞추어 딸들과 정답게 집으로 향했다. 승준과 같이 자식을 마중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둘러 아파트를 향해 발을 재촉하는지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멀어지는 사람들. 거리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나이를 먹을수록 정답던 친구들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가정의 울타리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승준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길을 올라가는 길에 예영이 승준을 보며 말했다.
"아빠, 내가 얘기하나 해줄까?"
"뭔데?"
"있잖아.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알 수가 없었대."
예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 승준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왜?"
"근데, 중요한 건 왜 그런지도 모른대. 헤헤~"
승준은 그제 서야 예영이 자신에게 우스갯소리를 한 것을 알아차리고 이마로 예영의 머리를 군밤 주듯 부딪쳤다. 딸아이의 젖은 머리칼에서 아스라한 비 내음이 풍겼다. 예영의 귓불에 잔잔한 솜털이 소록소록 돋아 있는 게 보였다.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하영이 예영을 보며 역성을 냈다. 그러자 예영은 또 다시 혀를 빼꼽 내밀어 하영을 놀렸다. 하영이 그런 예영에게 덤벼들려하자 승준이 얼른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그렇게 두 자매와 함께 장난스럽게 길을 걸어 올라는 중 빗줄기가 더 세차지는지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굵어졌다. 예영과 하영의 어깨가 걱정스러웠다.
"여자들은 어깨가 젖으면 좋지 않다던데..."
막 입을 벌려 더 들어오라고 하려는 순간 예영의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팔꿈치에 느껴졌다. 하영은 우산을 든 팔을 잡고 있어서 인지 가슴이 닿지 않았지만 예영의 가슴이 팔에 닿은 것이다.
"하... 추워."
예영의 입에서 가냘픈 김이 솟아올랐다. 하영의 어깨도 어느새 젖었는지 승준의 옆구리로 더욱 바짝 붙었다. 그 순간 하영의 가슴이 승준의 옆구리에 살짝 닿았다.
"얘들이 이렇게 자랐나..."
승준의 가슴 한 구석에 알듯 모를듯한 도취감이 퍼졌다. 팔 언저리에 느껴지는 봉긋한 딸들의 가슴의 감촉이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아빠. 나 추워."
예영릐 말에 승주은 가방과 우산을 한 손에 움켜쥐고는 한 손을 예영의 어깨로 돌려 감았다. 물기에 젖은 예영의 어깨에서 정다운 안정감이 느껴졌다. 예영의 젖은 옷을 통해 느끼는 어깨의 온기가 승준에게 아내의 체온을 떠올리게 했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느껴지는 예영의 따스한 몸이 기뻤다.
"어어! 안돼! 아빠는 내꺼야!"
승준이 예영의 어깨를 감싸 안은 것은 본 하영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하영~! 너~!"
"흥! 아빠는 내꺼야!"
이번에는 하영의 어깨가 승준의 팔 안에 들어왔다. 하영은 반대쪽이 젖어서인지 승준의 겨드랑이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싸우지들 말고. 다왔다. 우리 뛰자!"
승준은 장난 치듯이 우산을 들고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당황한 두 딸들이 빠르게 승준을 따라 아파트 건물 정문 까지 뛰어 들어왔다.
"우아, 아빠 치사하게."
"맞아, 딸을 버리고 가다니."
"하하 미안. 그렇다고 셋이 비 맞고 있을 수는 없잖니."
딸들이 귀엽게 불평을 하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앞서 나갔다. 승준은 우산을 접고는 밖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땅으로 안기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승준은 머릿속으로 가족들을 세어보았다.
"가영이랑 시영이는 자기들 집에 잘 들어갔나 몰라. 유영이랑 준영이는 집에 있고. 수영이는 아직 퇴근 전이구나."
승준은 가장으로서 할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예쁜 두 딸 예영과 하영이 자신이 엘리베이터로 들어오기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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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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