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몰아 쉰 수진은 구석진 곳의 빈 탁자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준우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그녀는 그때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발견한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녀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음료수를 주문하며 그의 의향을 물었다. 준우는 차를 마실 목적이 아니었고, 단지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설 기회를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번거롭게 생각한 준우가 수진과 같은 음료수를 달라고 했다. 웨이터가 사라지고 준우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가슴에 안겨 당황했던 흥분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빙그레 미소를 흘리며 한마디 흘렸다.
“차갑지 않고 따뜻하던데.”
“뭐가요.......?”
“가슴이.”
“못됐어! 짓궂어요.”
수진은 처음으로 준우의 농담을 살갑게 받아 들였다. 그녀의 표정은 토라진 것이 아니라 여자의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 준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이 듬직한 손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애인처럼 다정해 보였다. 준우가 수진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윙크를 했다.
“이런데서 수진 씨와 있으니 기분 나쁘지 않은데........”
“그런 말,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억지로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뭐가 이상해요? 수진 씨가 좋아서 하는 말 인데........!”
“제가 좋다고요.......!? 지금 나에게 작업하는 거예요?”
“수진 씨! 느낌에는 내가 작업하는 거 같아요?”
수진은 준우의 묘하게 되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당황하였다. 다행히도 웨이터가 주문한 음료수를 가져다주어서 그녀는 부자연스러움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가 싫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 균형 잡힌 체격을 가진 그에게서는 현명함과 유모까지 깃들어 보였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한 흡입력을 그에게 느꼈다. 그녀는 아직까지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말 여자가 없고,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음료수 잔을 손으로 돌리며 물었다.
“민 비서님은 애인 없어요?”
“하하~! 내 앞에 앉아 있잖아.”
준우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농담 같은 말투를 흘렸다. 궁금해서 물어 보았던 수진이 홍조를 띠며 하얗게 눈을 흘겼다. 비록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했어도 그녀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자존심으로 도도한 태도를 보였던 그녀는 비로소 준우에 대한 적대감정이 사라졌다. 아니 부담스럽지 않고 도리어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온 사람처럼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준우는 수진이 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그녀도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집안 식구들 중에 수정이 혼자만 유달리 생모를 찾는 까닭이 궁금했다. 그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생모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수진 씨, 생모가 병원에 있다는데, 자주 찾아가 보고 있어요?”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세요?”
“우연히 병원에서 수정 이를 만나게 돼서.”
“수정 이를 병원에서 만났다고요?”
“수정 이는 자주 어머니를 찾아 가는 것 같던데, 어머니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모양이야. 수진 씨는 어머니 생각 안나요?”
“가끔은.......! 하지만 내가 찾아 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요. 수정인 어릴 때 떠난 엄마를 잊지 못할 거예요. 엄마도 막내인 수정일 무척 귀여워했고.........”
“그래도 생모인데. 수진 씨도 찾아가 보는 게 도리가 아닌가! 어머님은 이혼하기 전에 병원에 입원 한 건가.........?
“아뇨!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런 말 물어 봐도 될는지 모르지만, 부모님이 왜 이혼을.........?”
준우는 수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진은 집안 사정에 대해 말해도 괜찮은 건지 망설였다. 그녀는 부모님의 이혼을 두려움 없이 받아 들였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이 나무나 대조적이어서 항상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에 비해 어머니는 결단성이 없고 연악하기만 했다.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한 말투를 흘렸다.
“부모님이지만, 부부간의 문제에 자식이 간섭할 수는 없었어요. 어머니는 귀가 여려서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친정 식구들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었고. 결국은 엄마가 빚보증을 해준 외삼촌이 부도가 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혼을 했나........!?”
“아뇨! 처음에 아버지는 부채관계 때문에 어머니와 서류상 이혼한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두 분이 이별하게 되고 타격을 받은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가 너무 냉혹하군.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데?”
“같은 동네에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럼 처음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텐데!”
“사랑!? 사랑이 인생 전체를 책임 질 수는 없잖아요. 사랑하는 감정이 영원할 수도 없고, 나는 사랑 때문에 상대의 인생을 옭아매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보수적이에요. 순간의 감정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준우는 순수하게만 보였던 수진이 의외로 자유 분망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에 다소 놀라웠다. 그는 수진이 예술을 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수진이나 수정, 두자매가 같은 성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우는 그녀의 생각에 동조 할 수 없었다.
“두 자매가 똑같은 성격인 것 같군.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책임감 없는 사랑은 이기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난 한국을 떠나고 싶어요. 부담 없는 사람 만나서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하고........우리나라는 남녀 사이에 애정 표시도 너무 자유롭지 못해요. 억제한다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부모의 이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수진 씨를 낳아준 생모에 대한 애착이 없어!? 그래도 수진 씨를 낳아준 어머니인데.........”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고, 저는 저의 삶이 있어요. 엄마의 살 속에 갇혀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지만 수진은 시선을 돌리고 잠시 생각을 했다. 그녀라고 생모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를 생각함으로서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던 것이었다. 아니 같이 고통스러워한다고 세상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녀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내가 너무 쓸데없는 얘기를 했나 봐요. 갈게요.”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좋을 텐데. 하여튼 내가 수진 씨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어........”
“저도 좋았어요. 다음 기회에 술 한 잔 해요.”
“그러면 더욱 고맙고........”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수진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고 부리나케 일어섰다. 커피숍을 나온 그녀는 준우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우는 스커트 자락을 찰랑거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다음 목표의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수진과 헤어진 준우는 회사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층 로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멈추어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수정의 모습이 들어났다. 준우를 발견한 그녀가 짧은 스커트를 찰랑거리며 상큼한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오빠! 어디 갔다 와?”
“미라는 웬일이냐?”
“아빠한테 용돈 타러 왔어.”
“너,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말썽만 피는데, 아빠가 돈을 줘?”
“헤헤~! 잔소리는 해도, 용돈은 받았어.”
“집에서 걱정하니, 일찍 들어와라.”
준우는 싱긋이 웃으면서 발걸음을 돌리면서 수정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그는 그녀를 뒤로 하고 부지런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 수정이 뒤 쫓아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저녁에 뭐해?”
“오늘.........! 집에 퇴근해야지.”
“내 부탁, 하나 들어 줄 수 있어?”
“뭔데.......!”
“친구들하고 클럽에 가기로 했는데, 오빠가 남자친구 역할 좀 해주면 안 돼?”
“아버지 집에 퇴근시켜야 돼.”
“퇴근하고 나서 만날 수 없어?”
“피곤한데........”
수정이 준우의 대답을 재촉하며 팔을 흔들었다. 사실 준우는 퇴근 후에 다시 집에서 나오기가 귀찮았다. 그리고 밖으로 떠도는 수정과 어울린다는 것을 식구들이 눈치 채면 입장만 곤란해질 것 같았다. 수정이 쌜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준우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피 잇~! 그러지 말고 한번만 부탁 들어줘. 쓸데없는 남자들이 귀찮게 한단 말이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하하~! 미라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오빠! 이 잉. 오빠도 나 미워하지......?”
준우는 토라진 표정으로 매달리는 수정이 무척 귀엽게 느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숨을 쉴 때마다 들어나는 볼록한 젖가슴, 짧은 스커트 밑의 뽀얀 허벅지. 껴안으면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풋풋하고 청순한 그녀의 모습에 준우는 빙긋이 웃었다.
“밉기는! 집에서 걱정하니 그렇지........”
“집에서 말썽 피운다고 잔소리 듣고 있는 것보다 났잖아.”
“알았어. 일곱 시 지나서 전화해.”
“헤헤~! 고마워.”
준우는 마지못해 수정의 요구를 승낙하였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장 사장을 태우고 퇴근하였다. 장 사장이 정원을 살피는 동안 그가 거실로 들어서니 진숙이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숙은 은근히 준우와 은밀한 관계가 다시 갖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장 사장이 집을 비우는 날이 없어 그녀는 애만 태우고 있었다.
“민 비서, 혼자 퇴근한 거야?”
“아뇨.”
준우의 대답에 진숙은 실망하였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이어 장 사장이 뒤쫓아 들어왔다. 밝았던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준우와 정사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남편과 같이 퇴근한 시간이후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연스럽게 업무시간의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강릉댁이 벌써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구들이 하나둘 주방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찍 집에 들어와 있던 수진이 거실로 나왔다. 준우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는 예전처럼 도도한 표정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그녀의 변화된 마음을 식구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식사준비를 하던 강릉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정인, 오늘도 늦게 들어오는 모양이네요.........”
“..........”
아무도 강릉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수정을 만나기로 한 준우만이 혼자 자격지심이 들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에 앉아 있던 준우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수정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만날 약속장소를 알려온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장 사장에게 다가섰다.
“저.......저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나갔다 오겠습니다.”
“음. 그래! 다녀와.”
장 사장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꾸벅인 준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진숙과 수진이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수진은 이제까지 그가 퇴근 후에 외출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준우는 그녀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집을 나온 준우는 대로변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난 후, 수정을 만난 준우는 요란한 록밴드의 음악소리와 사이키 조명이 눈부신 클럽 안에 있었다. 남자 파트너를 동반한 수정의 두 명의 친구들은 각자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면서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준우도 수정의 이끌림에 스테이지로 나가서 무리 속에 섞여 있다가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수정이 대뜸 그의 팔을 끌어 당겨 자신의 목에 감았다.
“오빠, 생각보다 멋져. 리듬도 잘 타고. 나, 기분 최고야.”
“다행이구나.”
“오빠가 자꾸 좋아지는 걸.”
“이런 곳에만 다니지 말고 공부도 해야지. 미라는 졸업반이잖아.”
수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큰 눈동자를 글리며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마치 연인처럼 준우의 팔을 당겨 목을 감게 하고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맥주 몇 잔을 마신 상태인 그녀가 다시 맥주잔을 들어 마셨다. 거품이 묻어난 그녀의 입술이 조명등 불빛에 유난히 붉게 들어났다.
“피 잇! 난 대학 안가고 의상공부 할거야. 오빠는 이제부터 내 파트너니까, 꼼짝 말라야.”
“하하~! 쪼그만 아가씨가 협박이네.”
“아까, 인사한 그 여자 누구야?”
“아! 다른 회사 여직원.”
“그런데 그렇게 다정하게 인사를 해? 한눈만 팔아봐, 가만 안둘 거야.”
준우는 토라진 표정을 짓는 수정이 무척 앙증맞게 보였다. 그는 자신의 팔을 목에 감고 가슴 속을 파고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녀가 커다란 눈동자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앉은 주변에는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서로 껴안고 스킨십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정이 불쑥 일어섰다. 맥주잔을 집어 들던 준우가 흠칫하였다. 대담하게도 수정이 무릎위에 털썩 올라앉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는 준우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당황한 준우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긴속눈썹을 깜박거리는 검은 수정의 큰 눈망울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위에 앉은 그녀의 가벼운 체중을 의식하는 준우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늘어진 티셔츠 속에 들어난 젖가슴이 보이고 그녀의 둔부가 페니스를 깔고 앉은 상태였다.
“오빠. 안아줘.”
“...........!”
수정이 속삭이듯이 말하며 허리로 준우의 손을 당겼다. 그리고 수정이 다시 준우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그는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아니 그가 그녀의 혀를 빨아 당긴 것이다. 그녀의 허리로 당겨진 그의 손이 셔츠 속을 더듬었다.
땀에 젖은 수정의 브래지어가 밀려 올라갔다. 준우의 손바닥에 그녀의 아담하고도 탄력 있는 젖가슴이 쥐어졌다. 이성을 마비시킬 듯이 요란한 음악소리,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의 분위기는 알코올에 달아오른 그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가쁜 숨소리를 흘리며 가슴을 파고드는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앙증맞은 수정의 둔부가 준우의 손아귀에서 꼼틀거렸다. 그때 홀로 나갔던 수정의 친구 영미가 파트너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왔다. 부둥켜 껴안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던 영미가 피식하고 웃었다.
“호 홋~! 미라, 이런 모습 처음 본다.”
“...........!?”
영미의 목소리에 수정이 발딱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영미에게 눈을 흘겼다. 영미가 의미 있는 눈빛으로 자신의 파트너 남자친구를 쳐다보더니 야유를 하였다.
“차라리 호텔로 가라. 애구! 달아올랐네. 달아올랐어.”
“계집애! 까불고 있어.”
눈을 흘기는 수정과 영미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수정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준우의 팔을 당겨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준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어 기울였다. 그때 준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의 벨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식했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준우는 여러 번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전화를 받을 수 없기에 그는 황급히 홀 안을 빠져 나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는 혹시 회사에서 긴급한 연락이라도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적이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준우 씨!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어디신데요?”
“아! 여기 XX정신병원입니다. 민정아씨 보호자 되시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입니까?”
술기운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준우는 조금은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 조금은 당황하는 상대방의 말에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병원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 밤중에........!? 왜 그러시는데요?”
준우는 술기운이 깨는 것 같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들고 있는 핸드폰을 고쳐 잡고 귀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민 정아 씨가 옥상에서 투신했습니다.”
“무슨 말.......!? 투신이라니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여튼 XX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는데 생명이 위급한 상태이라고 보호자를 오라고 합니다.”
“그, 그럴 리가.......”
준우는 갑자기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아가 자살을 했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피붙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위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는 ‘안 돼!’ 라는 혼잣말을 흘리며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수정이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오빠! 뭐해? 빨리 들어가.”
“정아가! 정아가.........”
수정은 귀신에 홀린 듯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준우를 의아스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여동생 이름이 정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눈가가 발그스름한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무슨 말이야?”
“내 동생.......내 동생, 정아가! 위독해.........”
그 한마디를 뱉어놓고 준우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여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수정은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정의 곁을 떠나 클럽을 나온 그는 대로변으로 뛰어나갔다. 도로변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려는 사람을 밀어내고 먼저 올라탔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준우는 안절부절 하였다. 택시가 병원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한 걸음에 달려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의료진들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아는 이미 하얀 천에 덮여 병상에 누워있었다. 준우는 하얀 천을 벗겨내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정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죽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준우는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정아의 손을 붙잡았다. 티 없이 맑고 명랑하던 정아는 행복의 의미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삶을 마친 정아를 생각하며 준우는 흐느껴 울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는 죽음인지도 모르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정아의 죽음은 준우에게 크나 큰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그가 해야 할 일들을 깊게 새겨 준 것이었다.
삼일 후에 준우는 어머니 산소가 있는 야산 기슭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이모의 산소 옆에 정아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에게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듯이 흰나비들이 주위를 날고 있고, 시야 멀리로는 북한강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그것은 여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들에게 고통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태양이 기울어가도 준우는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아가 괴로워 할 동안 너무나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멸감에 휩싸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여동생을 보살피지 못한 자책감이었다. 그 자책감은 가슴 속에 새겨져 있던 어머니와 이모의 죽음을 다시 일깨워 주는 불꽃이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덥던 여름의 끝에서 입추가 지나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한 초록의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 밑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롭게 움직인다. 서울에 인접한 성남의 대로는 차량들로 혼잡하였다. 차량들의 물결 속에 승용차 한 대가 대로변에 멈추어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진한갈색 선글라스를 낀 준우의 모습이었다.
승용차에 내려선 준우는 대로변의 건물들을 훑어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주변에 부유층의 저택들이 운집하고 있는 도로변에는 높고 낮은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남한산성 입구로 향하는 도로로서 특히 여러 개의 모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텔들 중에 정원까지 갖추어진 건물 벽에는 조각으로 ‘화이트 하우스’라는 간판이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도로변 건물 중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건물은 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이미 여러 번 이곳을 다녀간 준우는 슈퍼마켓과 ‘화이트 하우스’의 간판을 걸린 모텔이 조 창식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모텔과 대형 슈퍼마켓을 살피던 준우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부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듯이 높게 세워진 저택의 담장이 골목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가서 저택이 즐비한 좌측 끝으로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공원으로 사용하는 동산 앞에는 아름드리 노송을 등지고 규모가 큰 이층 저택들이 웅크리고 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선 준우는 저택들 중에 정원이 들여다보이는 철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가 요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조 창식의 저택이었다. 골목안의 저택들을 눈여겨보면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범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일거일동이 CCTV를 비롯한 초 첨단 장비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
준우는 장 인호와 조창식이 어떻게 한 밤중에 침입했는지 살폈었다. 그는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조 창식의 집으로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은밀하게 숨겨진 방법시스템이 문제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게 숨어들기는 쉽지 않았다. 저택 뒤로 돌아간 그는 아름드리나무 밑에 섰다. 조 창식의 저택 지붕으로 뻗어 있는 굵은 나뭇가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나무 가지를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면 CCTV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준우는 이내 실망하였다. 지붕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가려하지만, 발각되지 않고 어떻게 잠겨있는 창문을 열고 들어 갈 것인가? 이 시간쯤이면 조 창식의 딸인 혜림과 은지는 집안에 없고 가정부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그는 저택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을 나선 준우는 슈퍼마켓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화이트 하우스’ 모텔로 걸음을 옮겼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자들, 허벅지를 들어내며 짧은 옷을 걸친 여자들, 팔짱을 끼고 가는 젊음 연인들, 가방을 둘러멘 학생들, 제각기 제 삶에 바쁜 그들 모두가 그를 의심하거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텔 간판을 올려다보며 걷던 준우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마주하여 걸어오던 여인도 멈추어 섰다. 무릎 밑으로 찰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를 걸친 여인은 다름 아닌 황 은지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서며 놀라는 눈빛을 했다.
“준우 씨! 여기는 웬일로.......!?”
“은지........!”
은지는 자신의 동네에서 준우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이 의외라고 생각한 그녀는 쑥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혹시나 동네 사람들에게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보이게 될 것이 두려워서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조 창식의 주변을 살피던 준우도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조금은 당황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차 한 잔 할 수 있어?”
“.........응.”
망설이던 은지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옆 건물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혹시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지 스커트 자락을 추슬렀다. 준우가 음료수를 시키며 눈빛으로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수를 탁자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며 음료수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은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준우의 여자가 된 후에 한 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가슴속에 살아 숨 쉬던 그에 대한 애정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는 나를 여자로 만들어준 남자야!’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를 받아 드리고 황홀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준우가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만나서 반가워. 요즘 어떻게 지냈어?”
“그냥..........”
은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잊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준우 씨도 나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닌지, 그러나 문득 그녀는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의 가족을 헤치고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 남편일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그가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두려운 예감을 느꼈다.---------------------------------------------------
번거롭게 생각한 준우가 수진과 같은 음료수를 달라고 했다. 웨이터가 사라지고 준우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가슴에 안겨 당황했던 흥분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빙그레 미소를 흘리며 한마디 흘렸다.
“차갑지 않고 따뜻하던데.”
“뭐가요.......?”
“가슴이.”
“못됐어! 짓궂어요.”
수진은 처음으로 준우의 농담을 살갑게 받아 들였다. 그녀의 표정은 토라진 것이 아니라 여자의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 준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이 듬직한 손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애인처럼 다정해 보였다. 준우가 수진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윙크를 했다.
“이런데서 수진 씨와 있으니 기분 나쁘지 않은데........”
“그런 말,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억지로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뭐가 이상해요? 수진 씨가 좋아서 하는 말 인데........!”
“제가 좋다고요.......!? 지금 나에게 작업하는 거예요?”
“수진 씨! 느낌에는 내가 작업하는 거 같아요?”
수진은 준우의 묘하게 되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당황하였다. 다행히도 웨이터가 주문한 음료수를 가져다주어서 그녀는 부자연스러움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가 싫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 균형 잡힌 체격을 가진 그에게서는 현명함과 유모까지 깃들어 보였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한 흡입력을 그에게 느꼈다. 그녀는 아직까지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말 여자가 없고,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음료수 잔을 손으로 돌리며 물었다.
“민 비서님은 애인 없어요?”
“하하~! 내 앞에 앉아 있잖아.”
준우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농담 같은 말투를 흘렸다. 궁금해서 물어 보았던 수진이 홍조를 띠며 하얗게 눈을 흘겼다. 비록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했어도 그녀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자존심으로 도도한 태도를 보였던 그녀는 비로소 준우에 대한 적대감정이 사라졌다. 아니 부담스럽지 않고 도리어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온 사람처럼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준우는 수진이 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그녀도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집안 식구들 중에 수정이 혼자만 유달리 생모를 찾는 까닭이 궁금했다. 그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생모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수진 씨, 생모가 병원에 있다는데, 자주 찾아가 보고 있어요?”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세요?”
“우연히 병원에서 수정 이를 만나게 돼서.”
“수정 이를 병원에서 만났다고요?”
“수정 이는 자주 어머니를 찾아 가는 것 같던데, 어머니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모양이야. 수진 씨는 어머니 생각 안나요?”
“가끔은.......! 하지만 내가 찾아 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요. 수정인 어릴 때 떠난 엄마를 잊지 못할 거예요. 엄마도 막내인 수정일 무척 귀여워했고.........”
“그래도 생모인데. 수진 씨도 찾아가 보는 게 도리가 아닌가! 어머님은 이혼하기 전에 병원에 입원 한 건가.........?
“아뇨!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런 말 물어 봐도 될는지 모르지만, 부모님이 왜 이혼을.........?”
준우는 수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진은 집안 사정에 대해 말해도 괜찮은 건지 망설였다. 그녀는 부모님의 이혼을 두려움 없이 받아 들였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이 나무나 대조적이어서 항상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에 비해 어머니는 결단성이 없고 연악하기만 했다.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한 말투를 흘렸다.
“부모님이지만, 부부간의 문제에 자식이 간섭할 수는 없었어요. 어머니는 귀가 여려서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친정 식구들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었고. 결국은 엄마가 빚보증을 해준 외삼촌이 부도가 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혼을 했나........!?”
“아뇨! 처음에 아버지는 부채관계 때문에 어머니와 서류상 이혼한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두 분이 이별하게 되고 타격을 받은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가 너무 냉혹하군.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데?”
“같은 동네에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럼 처음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텐데!”
“사랑!? 사랑이 인생 전체를 책임 질 수는 없잖아요. 사랑하는 감정이 영원할 수도 없고, 나는 사랑 때문에 상대의 인생을 옭아매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보수적이에요. 순간의 감정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준우는 순수하게만 보였던 수진이 의외로 자유 분망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에 다소 놀라웠다. 그는 수진이 예술을 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수진이나 수정, 두자매가 같은 성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우는 그녀의 생각에 동조 할 수 없었다.
“두 자매가 똑같은 성격인 것 같군.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책임감 없는 사랑은 이기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난 한국을 떠나고 싶어요. 부담 없는 사람 만나서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하고........우리나라는 남녀 사이에 애정 표시도 너무 자유롭지 못해요. 억제한다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부모의 이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수진 씨를 낳아준 생모에 대한 애착이 없어!? 그래도 수진 씨를 낳아준 어머니인데.........”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고, 저는 저의 삶이 있어요. 엄마의 살 속에 갇혀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지만 수진은 시선을 돌리고 잠시 생각을 했다. 그녀라고 생모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를 생각함으로서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던 것이었다. 아니 같이 고통스러워한다고 세상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녀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내가 너무 쓸데없는 얘기를 했나 봐요. 갈게요.”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좋을 텐데. 하여튼 내가 수진 씨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어........”
“저도 좋았어요. 다음 기회에 술 한 잔 해요.”
“그러면 더욱 고맙고........”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수진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고 부리나케 일어섰다. 커피숍을 나온 그녀는 준우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우는 스커트 자락을 찰랑거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다음 목표의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수진과 헤어진 준우는 회사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층 로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멈추어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수정의 모습이 들어났다. 준우를 발견한 그녀가 짧은 스커트를 찰랑거리며 상큼한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오빠! 어디 갔다 와?”
“미라는 웬일이냐?”
“아빠한테 용돈 타러 왔어.”
“너,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말썽만 피는데, 아빠가 돈을 줘?”
“헤헤~! 잔소리는 해도, 용돈은 받았어.”
“집에서 걱정하니, 일찍 들어와라.”
준우는 싱긋이 웃으면서 발걸음을 돌리면서 수정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그는 그녀를 뒤로 하고 부지런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 수정이 뒤 쫓아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저녁에 뭐해?”
“오늘.........! 집에 퇴근해야지.”
“내 부탁, 하나 들어 줄 수 있어?”
“뭔데.......!”
“친구들하고 클럽에 가기로 했는데, 오빠가 남자친구 역할 좀 해주면 안 돼?”
“아버지 집에 퇴근시켜야 돼.”
“퇴근하고 나서 만날 수 없어?”
“피곤한데........”
수정이 준우의 대답을 재촉하며 팔을 흔들었다. 사실 준우는 퇴근 후에 다시 집에서 나오기가 귀찮았다. 그리고 밖으로 떠도는 수정과 어울린다는 것을 식구들이 눈치 채면 입장만 곤란해질 것 같았다. 수정이 쌜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준우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피 잇~! 그러지 말고 한번만 부탁 들어줘. 쓸데없는 남자들이 귀찮게 한단 말이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하하~! 미라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오빠! 이 잉. 오빠도 나 미워하지......?”
준우는 토라진 표정으로 매달리는 수정이 무척 귀엽게 느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숨을 쉴 때마다 들어나는 볼록한 젖가슴, 짧은 스커트 밑의 뽀얀 허벅지. 껴안으면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풋풋하고 청순한 그녀의 모습에 준우는 빙긋이 웃었다.
“밉기는! 집에서 걱정하니 그렇지........”
“집에서 말썽 피운다고 잔소리 듣고 있는 것보다 났잖아.”
“알았어. 일곱 시 지나서 전화해.”
“헤헤~! 고마워.”
준우는 마지못해 수정의 요구를 승낙하였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장 사장을 태우고 퇴근하였다. 장 사장이 정원을 살피는 동안 그가 거실로 들어서니 진숙이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숙은 은근히 준우와 은밀한 관계가 다시 갖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장 사장이 집을 비우는 날이 없어 그녀는 애만 태우고 있었다.
“민 비서, 혼자 퇴근한 거야?”
“아뇨.”
준우의 대답에 진숙은 실망하였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이어 장 사장이 뒤쫓아 들어왔다. 밝았던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준우와 정사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남편과 같이 퇴근한 시간이후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연스럽게 업무시간의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강릉댁이 벌써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구들이 하나둘 주방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찍 집에 들어와 있던 수진이 거실로 나왔다. 준우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는 예전처럼 도도한 표정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그녀의 변화된 마음을 식구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식사준비를 하던 강릉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정인, 오늘도 늦게 들어오는 모양이네요.........”
“..........”
아무도 강릉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수정을 만나기로 한 준우만이 혼자 자격지심이 들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에 앉아 있던 준우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수정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만날 약속장소를 알려온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장 사장에게 다가섰다.
“저.......저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나갔다 오겠습니다.”
“음. 그래! 다녀와.”
장 사장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꾸벅인 준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진숙과 수진이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수진은 이제까지 그가 퇴근 후에 외출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준우는 그녀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집을 나온 준우는 대로변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난 후, 수정을 만난 준우는 요란한 록밴드의 음악소리와 사이키 조명이 눈부신 클럽 안에 있었다. 남자 파트너를 동반한 수정의 두 명의 친구들은 각자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면서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준우도 수정의 이끌림에 스테이지로 나가서 무리 속에 섞여 있다가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수정이 대뜸 그의 팔을 끌어 당겨 자신의 목에 감았다.
“오빠, 생각보다 멋져. 리듬도 잘 타고. 나, 기분 최고야.”
“다행이구나.”
“오빠가 자꾸 좋아지는 걸.”
“이런 곳에만 다니지 말고 공부도 해야지. 미라는 졸업반이잖아.”
수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큰 눈동자를 글리며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마치 연인처럼 준우의 팔을 당겨 목을 감게 하고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맥주 몇 잔을 마신 상태인 그녀가 다시 맥주잔을 들어 마셨다. 거품이 묻어난 그녀의 입술이 조명등 불빛에 유난히 붉게 들어났다.
“피 잇! 난 대학 안가고 의상공부 할거야. 오빠는 이제부터 내 파트너니까, 꼼짝 말라야.”
“하하~! 쪼그만 아가씨가 협박이네.”
“아까, 인사한 그 여자 누구야?”
“아! 다른 회사 여직원.”
“그런데 그렇게 다정하게 인사를 해? 한눈만 팔아봐, 가만 안둘 거야.”
준우는 토라진 표정을 짓는 수정이 무척 앙증맞게 보였다. 그는 자신의 팔을 목에 감고 가슴 속을 파고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녀가 커다란 눈동자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앉은 주변에는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서로 껴안고 스킨십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정이 불쑥 일어섰다. 맥주잔을 집어 들던 준우가 흠칫하였다. 대담하게도 수정이 무릎위에 털썩 올라앉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는 준우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당황한 준우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긴속눈썹을 깜박거리는 검은 수정의 큰 눈망울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위에 앉은 그녀의 가벼운 체중을 의식하는 준우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늘어진 티셔츠 속에 들어난 젖가슴이 보이고 그녀의 둔부가 페니스를 깔고 앉은 상태였다.
“오빠. 안아줘.”
“...........!”
수정이 속삭이듯이 말하며 허리로 준우의 손을 당겼다. 그리고 수정이 다시 준우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그는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아니 그가 그녀의 혀를 빨아 당긴 것이다. 그녀의 허리로 당겨진 그의 손이 셔츠 속을 더듬었다.
땀에 젖은 수정의 브래지어가 밀려 올라갔다. 준우의 손바닥에 그녀의 아담하고도 탄력 있는 젖가슴이 쥐어졌다. 이성을 마비시킬 듯이 요란한 음악소리,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의 분위기는 알코올에 달아오른 그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가쁜 숨소리를 흘리며 가슴을 파고드는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앙증맞은 수정의 둔부가 준우의 손아귀에서 꼼틀거렸다. 그때 홀로 나갔던 수정의 친구 영미가 파트너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왔다. 부둥켜 껴안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던 영미가 피식하고 웃었다.
“호 홋~! 미라, 이런 모습 처음 본다.”
“...........!?”
영미의 목소리에 수정이 발딱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영미에게 눈을 흘겼다. 영미가 의미 있는 눈빛으로 자신의 파트너 남자친구를 쳐다보더니 야유를 하였다.
“차라리 호텔로 가라. 애구! 달아올랐네. 달아올랐어.”
“계집애! 까불고 있어.”
눈을 흘기는 수정과 영미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수정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준우의 팔을 당겨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준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어 기울였다. 그때 준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의 벨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식했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준우는 여러 번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전화를 받을 수 없기에 그는 황급히 홀 안을 빠져 나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는 혹시 회사에서 긴급한 연락이라도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적이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준우 씨!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어디신데요?”
“아! 여기 XX정신병원입니다. 민정아씨 보호자 되시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입니까?”
술기운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준우는 조금은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 조금은 당황하는 상대방의 말에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병원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 밤중에........!? 왜 그러시는데요?”
준우는 술기운이 깨는 것 같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들고 있는 핸드폰을 고쳐 잡고 귀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민 정아 씨가 옥상에서 투신했습니다.”
“무슨 말.......!? 투신이라니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여튼 XX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는데 생명이 위급한 상태이라고 보호자를 오라고 합니다.”
“그, 그럴 리가.......”
준우는 갑자기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아가 자살을 했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피붙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위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는 ‘안 돼!’ 라는 혼잣말을 흘리며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수정이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오빠! 뭐해? 빨리 들어가.”
“정아가! 정아가.........”
수정은 귀신에 홀린 듯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준우를 의아스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여동생 이름이 정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눈가가 발그스름한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무슨 말이야?”
“내 동생.......내 동생, 정아가! 위독해.........”
그 한마디를 뱉어놓고 준우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여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수정은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정의 곁을 떠나 클럽을 나온 그는 대로변으로 뛰어나갔다. 도로변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려는 사람을 밀어내고 먼저 올라탔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준우는 안절부절 하였다. 택시가 병원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한 걸음에 달려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의료진들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아는 이미 하얀 천에 덮여 병상에 누워있었다. 준우는 하얀 천을 벗겨내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정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죽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준우는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정아의 손을 붙잡았다. 티 없이 맑고 명랑하던 정아는 행복의 의미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삶을 마친 정아를 생각하며 준우는 흐느껴 울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는 죽음인지도 모르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정아의 죽음은 준우에게 크나 큰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그가 해야 할 일들을 깊게 새겨 준 것이었다.
삼일 후에 준우는 어머니 산소가 있는 야산 기슭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이모의 산소 옆에 정아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에게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듯이 흰나비들이 주위를 날고 있고, 시야 멀리로는 북한강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그것은 여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들에게 고통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태양이 기울어가도 준우는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아가 괴로워 할 동안 너무나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멸감에 휩싸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여동생을 보살피지 못한 자책감이었다. 그 자책감은 가슴 속에 새겨져 있던 어머니와 이모의 죽음을 다시 일깨워 주는 불꽃이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덥던 여름의 끝에서 입추가 지나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한 초록의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 밑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롭게 움직인다. 서울에 인접한 성남의 대로는 차량들로 혼잡하였다. 차량들의 물결 속에 승용차 한 대가 대로변에 멈추어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진한갈색 선글라스를 낀 준우의 모습이었다.
승용차에 내려선 준우는 대로변의 건물들을 훑어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주변에 부유층의 저택들이 운집하고 있는 도로변에는 높고 낮은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남한산성 입구로 향하는 도로로서 특히 여러 개의 모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텔들 중에 정원까지 갖추어진 건물 벽에는 조각으로 ‘화이트 하우스’라는 간판이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도로변 건물 중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건물은 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이미 여러 번 이곳을 다녀간 준우는 슈퍼마켓과 ‘화이트 하우스’의 간판을 걸린 모텔이 조 창식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모텔과 대형 슈퍼마켓을 살피던 준우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부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듯이 높게 세워진 저택의 담장이 골목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가서 저택이 즐비한 좌측 끝으로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공원으로 사용하는 동산 앞에는 아름드리 노송을 등지고 규모가 큰 이층 저택들이 웅크리고 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선 준우는 저택들 중에 정원이 들여다보이는 철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가 요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조 창식의 저택이었다. 골목안의 저택들을 눈여겨보면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범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일거일동이 CCTV를 비롯한 초 첨단 장비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
준우는 장 인호와 조창식이 어떻게 한 밤중에 침입했는지 살폈었다. 그는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조 창식의 집으로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은밀하게 숨겨진 방법시스템이 문제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게 숨어들기는 쉽지 않았다. 저택 뒤로 돌아간 그는 아름드리나무 밑에 섰다. 조 창식의 저택 지붕으로 뻗어 있는 굵은 나뭇가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나무 가지를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면 CCTV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준우는 이내 실망하였다. 지붕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가려하지만, 발각되지 않고 어떻게 잠겨있는 창문을 열고 들어 갈 것인가? 이 시간쯤이면 조 창식의 딸인 혜림과 은지는 집안에 없고 가정부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그는 저택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을 나선 준우는 슈퍼마켓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화이트 하우스’ 모텔로 걸음을 옮겼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자들, 허벅지를 들어내며 짧은 옷을 걸친 여자들, 팔짱을 끼고 가는 젊음 연인들, 가방을 둘러멘 학생들, 제각기 제 삶에 바쁜 그들 모두가 그를 의심하거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텔 간판을 올려다보며 걷던 준우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마주하여 걸어오던 여인도 멈추어 섰다. 무릎 밑으로 찰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를 걸친 여인은 다름 아닌 황 은지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서며 놀라는 눈빛을 했다.
“준우 씨! 여기는 웬일로.......!?”
“은지........!”
은지는 자신의 동네에서 준우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이 의외라고 생각한 그녀는 쑥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혹시나 동네 사람들에게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보이게 될 것이 두려워서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조 창식의 주변을 살피던 준우도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조금은 당황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차 한 잔 할 수 있어?”
“.........응.”
망설이던 은지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옆 건물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혹시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지 스커트 자락을 추슬렀다. 준우가 음료수를 시키며 눈빛으로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수를 탁자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며 음료수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은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준우의 여자가 된 후에 한 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가슴속에 살아 숨 쉬던 그에 대한 애정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는 나를 여자로 만들어준 남자야!’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를 받아 드리고 황홀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준우가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만나서 반가워. 요즘 어떻게 지냈어?”
“그냥..........”
은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잊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준우 씨도 나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닌지, 그러나 문득 그녀는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의 가족을 헤치고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 남편일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그가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두려운 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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