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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2 996회 0건
소희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과연 아주버니가 자신을 정말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어느 여자들에게나 물질적인 공세로 선량한 마음을 베푸는 것인지, 그녀는 아주버니의 배려를 의심했다. 아니 아주버니의 배려에 감격하는 자신의 감정도 정말 애정인지, 그녀는 자신마저도 의심스러웠다. 문득 며칠 전에 방문했던 정 혜영의 이지적인 모습을 떠올린 그녀는 아주버니에게 불쑥 물었다.

“얼마 전에 찾아왔던 분, 만나셨어요?”
“누구........!?”

“정 혜영이라고........”
“아! 테마 CD 가져다주느라고 방송국에 갔을 때 만났지. 왜?”
“아뇨! 아주버니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운전을 하는 찬규가 소희를 힐끔 바라봤다. 앞 유리창을 주시하고 있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찬규는 그녀의 표정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그것은 여자의 본능에서 일으키는 질투일 수도 있었다. 찬규는 정 혜영을 단순히 캠퍼스 후배이거나 방송국의 피디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굳이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캠퍼스 후배인데, 가족들과도 잘 알고. 이따금 연락도 해.”
“미인이고 능력 있어 보이던데요?”
“그렇게 봤다면 혜영이가 좋아하겠지만.......”

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소희는 솔직한 아주버니의 말이 오히려 정 혜정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혜정에 대한 그의 감정을 알고 싶었다. 소희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멈춘 그의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헤아릴 뿐 침묵만이 흘렀다. 주차장에서 브레이크를 당기는 찬규가 그때서야 한마디 했다.

“제수씨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
“.........”

소희에 대한 찬규의 감정 표현. 소희는 의도적으로 그 말을 기다렸던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탄 소희는 자신의 집에서 내리지 않고, 짐을 든 아주버니를 따라 위층에서 내렸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보모와 놀고 있던 민지가 양팔을 벌리고 소희에게 달려왔다.

“작은엄마! 보고 싶었어. 어디 갔다 와?”
“응. 마트에. 나도 민지가 보고 싶었어.”

소희는 민지를 껴안고 양 볼에 입맞춤을 했다. 바라보고 있던 보모 연경이 부러운 눈빛을 했다. 연경은 삼십대이지만 아기가 없었다. 두 번이나 유산한 경험이 있는 연경은 아기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는 민지이기에 소희를 엄마처럼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모가 민지에게 하얗게 눈을 흘기며 웃었다.

“깍쟁이! 여태 잘 놀고 작은엄마 오니까, 능청을 떠네.”
“헤 헤~!”
“호호호.......”

소희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민지를 보고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오기를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던 연경이 집을 나가고, 소희는 쇼핑백에서 민지의 옷을 꺼내 입혀 보았다. 거울 앞에 선 민지가 무척 좋아하는 모습에 찬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소희는 아주버니를 위해 사온 속옷과 양말들을 꺼내 옷장 서랍에 차곡차곡 쌓았다.

작업실로 들어가려던 찬규가 소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집안 정리를 마친 소희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의 앞면에는 ‘그림자향기전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찬규가 한 감독에게 받아 온 시나리오였다.

소희는 집어든 서류 봉투를 살피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찬규는 이따금 흘러내린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곡에 열중이었다. 소희는 작곡에만 열중인 그가 서운하기도 하면서도 그의 섬세하면서도 정열적인 모습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첫눈이 내리고 며칠간 추위가 이어지더니 햇볕이 따스한 날씨였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흙탕물을 튀기며 달려오는 승용차 한 대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승용차는 을지로의 GS기획사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와 급정거를 했다. 뒷좌석의 문이 왈칵 열리고 미간을 찌푸린 상욱이 뛰어 내렸다.

승용차에서 내린 상욱은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건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향해갔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그는 안절부절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곧 바로 GS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상의를 벗어 들었다. 그리고 와락 고함을 질렀다.

“안 실장! 오라고 그래!”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놀라서 상욱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다. 문이 열리고 앞이마가 조금 벗겨진 안부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기획관리 담당을 하고 있는 안 익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강 준식이 어떻게 된 거야? "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하려고.........”
“당신이 보고 담당하는 직원이야! 오디션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애들 관리를 그렇게 해?”

“차일피일 전속계약을 미루던 강 준식을 믿었다가.......”
“뭐라고!? 아직 전속 계약도 안했다고? 이런........”

분통이 터진 상욱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을 안 실장을 향해 집어 던지며 일어섰다. 안 실장의 이마에 맞고 떨어진 유리컵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조각이 났다. 이마에 피를 흘리는 안 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 준식은 매스컴이 들썩이도록 GS에서 오디션을 치루고 선발한 주연급 배우였다. 그런데 강 준식이 한 용우의 프로덕션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상욱이기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격분한 감정을 참지 못하는 상욱이 안 실장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당신 믿고 어떻게 일 해!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고, 장 팀장 오라고 해!”
“..........”

안 익현은 나이가 오십이 가깝도록 국내 연예기획 사업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만큼 연예 사업정보에 밝은 그에게 치욕적인 모멸감을 주는 상욱의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안 실장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상욱의 방을 나갔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안 실장을 향했다. 놀란 여직원 한명이 급하게 안 실장에게 다가왔다.

“어머! 안 실장님!”

여직원이 피가 흐르는 안 실장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눌렀다. 여직원과 안 실장이 응급처치를 위해 사무실을 나가고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긴장한 장 철호 팀장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상욱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장 팀장을 대동한 상욱이 화가 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퇴근 시간을 맞이한 도심지는 차량과 인파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해가 저무는 황혼의 노을이 물들여진 도시는 흥분한 짐승의 눈빛처럼 붉게 물들여 보였다. 소희는 베란다에서서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동차 대리점으로 인수받은 미색 승용차였다.

승용차를 구입하던 날부터 그녀는 유난히 아주버니 찬규의 일거일동에 더욱 민감해졌다. 때로는 그에게 속옷을 꺼내주며 갈아입으라고 말하는 아내 같은 자신의 말투에 그녀는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소희의 시부모는 그녀를 며느리로 여기지 않는지 찾아오기는커녕 연락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남편의 모습도 소희는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럴수록 소희의 마음은 의지를 하고 있는 아주버니에게 기울었다. 지루한 시간이면 위층으로 올라가 민지를 보살피며 아주버니와 스스럼없는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소희는 순간순간 너무 허무하고 무능력하기만 하여 허탈감에 젖기도 했다. 그것은 비관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저주이고,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괴감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숨겨진 열정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찬규와의 뜨거워지는 스킨십의 열기는 그녀의 욕망과 본능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 열기는 그녀를 지탱하게 하는 보호막이었다.

소희의 그 은밀한 보호막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가정부와 보모가 있는 시간은 아주버니에 대한 애정 표현을 하기가 두려웠다. 보모가 돌아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는 베란다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던 파출부 아줌마 진숙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사십대의 몸집이 뚱뚱한 진숙이 앞치마를 벗어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모님! 저, 이제 가볼게요.”
“위층은요?”
“위층은 미리 다 했어요. 세탁기 돌려 놨었는데 보모에게 봐 달라고 했어요.”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가 놓인 탁자로 걸어가는 소희는 가겠다고 인사를 하는 진숙에게 손짓으로 대답을 했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진숙이 사라졌다. 현관문이 잘 닫히지 않기에 진숙이 힘껏 당겼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현관문을 고친다고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전화기를 집어 들고 얼굴이 밝아진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아주버니 찬규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네. 아주버님!”
“지금 밖으로 나올 수 있어요?”

“왜요.......!?”
“제수씨와 같이 식사를 할 사람이 있어서.”

“저하고요!? 누군데요?”
“영화감독 한 용우, 아는지 모르겠는데, 캠퍼스 동기야.”

“만나 적은 없는데, 한 감독님이 왜요.........!?”
“하여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에는 내차로 가고, 일단 택시 타고 한 감독 사무실로와.”
“어딘데요.......?”

소희는 혹시 아주버니가 남자를 소개시켜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녀 자신이 아주버니에 대한 연정도 있지만, 아무리 남편과의 관계가 끝이라고 해도 아주버니가 동생의 아내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할리는 없었다. 통화를 끝낸 그녀는 어찌해야할지 망설였다.

이미 약속을 했기에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그녀는 오래간만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을 하고 옷장 앞에 선 그녀는 어떤 옷을 입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찌했든 아주버니의 체면을 유지하는 복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결혼 초에 입었던 옷들을 걸쳐 보았다.

짧은 스커트를 걸치고 옷맵시를 살피던 소희는 너무 어려 보이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얼마 되지 않은 결혼생활에 그만큼 감각이 둔해진 탓인가. 차이나 칼라의 블라우스를 걸친 그녀는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사파리코트를 꺼냈다. 그녀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수입 명품이었다. 대영그룹의 며느리로서가 아니고, 여자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싶은 그녀였다. 코트를 걸친 그녀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오래간만에 약속된 외출이기에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 소희는 택시를 불러 탔다. 약속장소인 한 용우의 프로덕션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 그녀는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프로덕션의 넓은 사무실 안에 비어 있는 책상이 많았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몇 명 되지 않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 앞쪽의 책상에 앉아있던 여직원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에게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직원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박 찬규 씨, 여기 계신가요?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요.”
“아! 이리 오세요.”

소희의 아래위를 살핀 여직원이 사무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여직원을 따라가는 소희의 시선이 또 다른 사무실의 유리창 안으로 향했다. 유리창 안에는 머리를 맞대고 책상 위의 서류를 주시하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정면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찬규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찬규는 한 감독이 제작할 영화의 음악을 맡기로 했기에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희를 안내한 여직원이 문을 열고 말했다.

“손님 오셨는데요.”

시나리오에 집중하고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소희에게 향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주춤했던 소희는 찬규의 친근한 눈빛에 안정감을 찾았다. 무심코 소희를 바라보고 시선을 옮기려던 한 용우가 뒤돌아섰다. 밝은 미소를 지은 소희가 천천히 그들에게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 오셨군요.”

얼떨결에 어색한 미소로 소희를 맞이하는 한 용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찬규의 말을 들을 때만해도 그는 그녀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그녀가 나이 들어 보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환상적인 광채가 흐르는 착각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무척 매혹적이었다.

한 용우는 소희에게서 시선을 땔 수 없었다. 세월을 거스른 듯이 뿜어 나오는 상큼함, 약간 튀어나온 이마에서 느끼는 영리함과 정열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한 매력이 한 용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찌 보면 나이보다 앳된 그녀의 미모는 당돌함까지도 들어내 보였다. 그녀를 주시하던 한 감독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 용우입니다. 결혼식에서 봤기에 초면은 아니지요.”
“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찬규가 제수씨 자랑을 하더군요. 실제 보니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잠간 앉으시지요.”

소희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표정으로 책상 옆에 놓인 소파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그러나 내심 조심스러운 그녀는 손가방으로 무릎 위로 올라가려는 스커트 앞자락을 가렸다. 그녀는 자신을 유심하게 살피는 박 용우의 반짝이는 눈빛을 의식했다. 그를 처음 대하는 소희지만 그녀는 왠지 그의 눈빛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박 용우가 감독이라기보다는 캠퍼스 시절에 무대에서 같이 연기를 했던 남자배우 같은 인상을 받았고, 의외로 미남일 뿐만 아니라, 친근감마저 들었다.

잠시 소희를 바라본 찬규는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었다. 찬규와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도 한 용우는 소희에게 시선을 때지 않았다. 그는 제작할 영화의 여배우를 캐스팅하거나 오디션을 보기위해 그녀를 만나보겠다고 찬규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던 소희의 이미지가 어쩌면 찾고 있는 여배우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의한 것이었다.

한 용우가 제작하려는 영화는 기업 간의 정보 전쟁이면서도 남녀 간의 애정갈등을 섬세한 영상으로 펼치는 스토리였다. 주연 여배우는 기업의 정보를 빼내는 바이어 생활을 하면서 많은 남자들과 교제를 하는 산업 스파이였다. 여러 남자와 사랑을 하며 고뇌하면서도 주연여배우는 당당하게 삶을 선택하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작품에 캐스팅할 여주연배우로 고민하던 한 감독은 소희를 직접 만나고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 영화에 캐스팅 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그가 알고 있던 그녀에게서 풍기는 이미지는 더 강렬하였다. 찬규가 검토하던 시나리오를 들고 소희의 옆에 와서 앉았다. 탁자 사이를 마주하고 앉은 한 용우가 찬규에게 넌지시 말했다.

“네 동생은 복도 많구나.”
“왜.......?”

“너한테 미안한 말이지만........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대한민국 최고의 기획사를 꿈꾸고 있으니.”
“하하~! 미안하긴!? 난, 하고 싶은 일하고 있으니 편하고 자유로워.”
“하기야! 넌, 전쟁이 일어나도 꿈쩍하지 않을 테니.........”

한 감독의 말에 찬규, 그리고 소희는 엷은 미소를 흘렸다. 소희는 자신을 칭송하는 한 감독의 말이 싫지 않았다. 소희는 빤히 바라보는 강렬한 한 감독의 눈빛을 슬며시 외면했다. 소희의 눈치를 살피는 한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물쭈물하였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한 감독의 입에서 소희의 미모를 찬사하는 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과찬의 말씀을.......감사합니다.”

“그런데, 소희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요!? 별로........”

한 감독의 찬사에 얼굴을 붉혔던 소희는 안부를 묻는 질문에 머뭇거렸다. 그녀는 단지 식사를 같이 하자는 아주버니의 말을 듣고 나왔던 것이다.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한 용우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그녀는 찬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찬규는 무관심하게 시나리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희는 관심이 깃든 눈빛으로 물어보는 한 용우에게 우울한 일상생활을 들어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한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감독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연기자 생활을 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연기자라고요.........!? 글쎄요.”

뜻밖의 제안에 소희는 더욱 당황하였다. 그녀는 대답대신 아주버니 찬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찬규는 빙긋이 웃기만 할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따금 하루하루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있던 소희에게 한 용우의 제안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소희는 마땅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연기자는 어쩌면 그녀가 소망하던 일인지도 모른다.

망설이는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액자들을 향했다. 그 중에 큰 글자만으로 디자인된 액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림자향기‘ 그것은 얼마 전에 그녀가 시아주버니 찬규가 들고 온 봉투 겉면에 적혔던 것이다.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바라본 한 감독이 다시 말했다.

“소희 씨의 이미지가 제작하려는 영화 ‘그림자향기’에 아주 적합할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갑작스런.......말이라서.........”

“뭐, 당장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희 씨의 의향을 알고 싶은데.”
“제가 그런 역을 소화해 낼는지 모르겠네요. 연기를 해본지도 오래됐고........”

물론 소희는 한 용우가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알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 감독이 자신에게 연기자를 제의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버니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기자의 꿈을 잊지 않고 있던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용우가 그녀의 결단을 재촉하듯이 말했다.

“소희 씨의 연기력은 결혼 전의 경력으로 일단 인정받은 것입니다. 요즘 연기력은 캐릭터가 창조해 내는 것인데. 그만큼 캐릭터의 마인드를 소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중요해요. 내 생각에는 소희 씨가 적합할 것 같은데........”
“글쎄요. 저한테는 과분하지만, 조금 시간을.........”

소희는 당장이라도 한 용우의 제안을 받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넙죽 받아드린다는 것이 신중하지 못한 것 같고, 이미 타인이나 다름없지만 남편과의 문제, 그리고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꼭 캐스팅할 것 같은 한 용우의 강렬한 눈빛에 여유를 느꼈다. 어쩌면 한 용우의 눈빛이 그녀에게 자만심을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자의 본능! 그녀는 그가 어쩌면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기에 대답을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한 용우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묻으며 찬규를 향해 웃었다.

“하하하~! 찬규한테도 음악을 부탁했고, 아직 배우들을 캐스팅하지 않았는데, 소희 씨한테도 부탁하는 입장이 됐네.”
“하하~! 일이 잘되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러고 보니 내가 도리어 찬규의 프로젝트에 완전히 휘말리는데. 너! 의도적으로 소희 씨 얘기를 한 거지?”
“아니라고 하지는 않아. 어쨌든 너한테 도움이 되고, 바라는 대로 성공하면 좋지.”
“그렇기는 하지만, 하하하........!”

한 용우는 소희를 슬금슬금 훔쳐보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눈웃음을 짓는 소희를 곁눈질하는 찬규도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때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여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직원은 대화를 하고 있는 찬규와 소희, 그리고 한 용우의 눈치를 살폈다. 한 용우가 머뭇거리는 여직원에게 물었다.

“왜......!? 미스 진.”
“손님이 와서요.”

“누군데........!?”
“대영에 박 상욱 이사님이라고.........”

여직원의 말을 들은 한 용우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박 상욱이 왔다는 말을 들은 소희는 난처했다. 그러나 찬규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찬규와 소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상욱이가 왔다는군. 어쩌지?”
“음....... 괜찮아.”

찬규는 자신의 의견을 묻는 한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이런 자리에서 동생을 만난다는 것이 석연치 않지만 찬규는 그렇다고 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을 듣고 있던 소희는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이런 자리에서 만난 남편이 어떤 표정을 할지, 아주버니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녀는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여직원에게 박 상욱을 들어오게 하라고 손짓을 하는 한 용우가 중앙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잠시 후 여직원의 안내를 받은 박 상욱이 장 팀장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경색된 표정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박 상욱은 무척 놀라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외면하고 있는 아내와 여유로워 보이는 형의 모습에 박 상욱은 당황했다. 그는 한 용우의 사무실에 아내와 형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한 용우가 빙긋이 웃으며 상욱을 맞이했다.

“오! 박 이사님께서, 이제는 GS의 대표님이신가. 하여튼 반가워요.”
“상욱이 오래간만이구나!”

찬규도 곁들여 의례적으로 상욱에게 말했다. 상욱은 한 감독이 형의 친구이기에 사적으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욱은 강 준식을 빼앗긴 분노로 인사조차도 하기 싫었다. 상욱은 뚜벅거리는 걸음으로 장 팀장과 찬규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어깨에 힘을 준 상욱은 아내 소희를 잠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소 흥분한 어조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여기 웬일이야?”
“아! 내가 제작할 영화에 캐스팅할까 해서.”

“캐스팅........!?”

소희를 대신하는 한 감독의 말에 상욱은 어의가 없었다. 아내를 캐스팅하려 한다는 한 감독의 말에 상욱은 혼란스러웠다. 물론 결혼 전에 연극 활동을 하던 아내가 무슨 일을 하던 그가 관여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가 영화에 출연하도록 역할이 있었을 것 같은 형 찬규가 못마땅했다. 눈살을 찌푸린 상욱이 한 감독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그럴 수 있습니까?”
“하하~! 박 이사, 형도 음악을 담당해주기로 했고, 모두 좋은 일 아닌가?”
“그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우리가 오디션으로 뽑은 강 준식을 어떻게 낚아챌 수 있습니까?”
“하하~! 이 사람 큰일 날 소리하네. 강 준식이 무슨 물건인가? GS와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강 준식이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기획사 간의 도의적인 문제 아닌가요?”
“아! 글쎄, GS 전속이라는 공시를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선택했는데 나한테 이러면 안 돼지.”

흥분한 박 상욱은 달려들 기세로 한 감독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한 감독은 박 상욱을 타이르듯이 조목조목 설명했다. 듣고 있던 찬규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이지만 더 이상 그들의 언쟁에 휩쓸리고 싶지 않은 찬규는 한 용우에게 가겠다는 눈짓을 했다. 찬규가 일어나서 문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소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찬규를 따라 한 용우의 사무실을 나왔다.

비록 남편의 출현으로 긴장했었지만 소희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녀가 신인 배우로 주목 받았고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연기자의 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한창 인기가 있는 감독의 대형 영화 여배우로 캐스팅되는 것이 확실시 된 상황이 아닌가. 같이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구세주 같은 한 용우 감독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소희는 밝은 미래를 열어준 아주버니 찬규가 누구보다도 고마웠다. 고마운 것을 떠나 그녀는 아주버니의 깊은 배려에 감정이 들떠 있었다. 그 감정은 아주버니에 대한 고마움을 떠나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었다. 운전을 하면서 쳐다보는 찬규와 마주친 시선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감동을 대신해서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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