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와서 소희는 일주일에 한두 번도 남편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자괴감!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사육당하고 있다는 죄괴감에 그녀는 자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활비로 넣어주는 통장의 잔액이 점점 줄어들어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낮에 그녀의 남편이 이방인처럼 집에 불쑥 들어왔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박 상욱은 예리한 눈빛으로 소희의 표정과 집안을 살폈다. 상욱과 소희는 일상적인 부부로서의 대화가 끊어져 있었다.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온 상욱과 소희는 시선을 외면하면서 무언의 표정으로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침묵이 흐르고 남편이 불쑥 음료수를 달라는 말에 소희는 터질 것 같은 울분 대신에 한마디 했었다.
“생활비 넣어주는 거.......! 잊어버렸나봐.”
“생활비.......!? 집에서 음료수도 돈 내고 달래야 돼?”
“오죽하면 생활비를 말하겠어.”
“넌, 생활비 벌 능력이 없어? 벌어서 쓰라고!”
“벌어서 쓰라니! 너무한 거 아냐?”
“뭘 너무해? 생활비는 알아서 해야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 없어.”
“날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최소한 가정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잖아?”
“책임이라고? 우리가 정략 결혼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정말 비열한 인간! 어떻게 그런 말을.........”
“철부지 애들도 아니고, 성인답게 가정생활은 알아서 해!”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의 남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갔다.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인줄 알면서도 큰마음 먹고 한마디 했던 소희는 어의가 없었다. 요란하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베란다로 다가섰다.
이미 부부 사이에 앙금이 깊게 패였지만, 상욱은 그래도 아내에게 다정한 남편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차라리 굴복하는 자세였다면 동정심이라도 느낄 텐데 갈수록 도도해지는 아내의 표정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건물을 나온 상욱은 매번 똑같은 심정이지만 괜히 집에 들렀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직접 운전하고 온 승용차로 다가갔다. 승용차 조수석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쓴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미소를 띠고 나왔다. 그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고, GS 전속배우로 발탁하여 활동을 시작한 장 애리였다. 승용차로 다가서는 상욱은 건물 베란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베란다 창문으로 건물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보던 소희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대기하고 있는 남편의 승용차 안에서 여자가 나와 남편의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이미 남편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지만, 직접 목격하니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희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들어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남편의 행동은 소희 자신이 스스로 그룹의 며느리를 포기하여 도의적으로나 법적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 소희가 생각한 결론은 자신의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욕망과 시아버지의 야망 사이에서 그녀는 재물로 희생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전, 일 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뜬 구름 같은 시간이었다.
매스컴과 세간에서 생각하는 재벌 간의 화려한 결혼이라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황당한 결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말이 곧 행복이라고 여겼던 그녀 자신이 어리석음도 잘못이었다.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는 사람의 운명을 탓할 수도 없다.
소희는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스스로 아내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어떤 결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박 씨 집안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원통함 때문에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데로 자진해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의 딸로 꿈에 부풀었던 소희였다. 대학시절에는 장래가 유망한 신인연극배우로 촉망 받았던 그녀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지난 세월동안 소희의 단란했던 가정과 꿈을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니 박 태환의 야망에 그녀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어떤 대책도 할 수 없는 소희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무의미하고 절망스럽기만 하였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가을은 깊어가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길거리에 뒹구는 낙엽처럼 소희는 쓸쓸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겨울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만, 작은 장바구니를 든 소희는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심정이었다.
슈퍼마켓을 나온 소희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의 시선이 주차장을 향했다. 유통회사 마크가 달린 큰 트럭 옆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중의 한 남자의 시선이 소희와 마주쳤다.
햇빛을 등진 남자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는 장바구니를 뒤로 감추며 긴장을 했다. 자신의 초췌하게 변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이기에 그녀는 외면을 했다. 그런데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당혹감으로 남자를 올려다 본 소희는 마지못해 쓴 웃음을 지었다.
“아!? 광호구나!”
“하하~! 소희, 오래간만이다.”
소희는 그 남자가 캠퍼스 시절의 남자 친구였기에 사실 지나쳐가기를 바랬다. 동아리 활동도 같이 했었고, 소희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도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최 광호였다. 최 광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유통회사에서 영업파트 담당 부장으로 마트에 공급한 물품들을 조사하러 나온 것이다. 먼발치로 최 광호와 같이 나온 회사직원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의 아버지 민 정호의 죽음, 그리고 민 정호의 기업이 박 태환에게 넘어간 소식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져 있었다. 최 광호는 언론보다도 소희의 가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짝사랑했던 소희가 반갑기도 하고 왠지 초라해 보여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하하~! 차 한 잔 할래?”
“난 생각 없어.”
소희는 그의 웃음이 조소같이 보였다. 비록 집안이 몰락했어도 소희의 자존심은 살아 있었다. 고개를 저은 그녀는 앞을 막고 서 있는 광호를 피해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그러나 광호는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웃었다.
“아직도 콧대가 높은 가!? 박 상욱은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던데, 그럴 필요 뭐 있어.”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니, 비켜.”
“그러지 말고, 차 한 잔 하자니까.”
“너하고 농담할 기분이 아냐.”
“그럼, 기분 전환으로 술 한 잔 하지.”
최 광호가 소희의 팔목을 잡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억센 남자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는 더욱 힘을 주며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과 남편에게 버림받고 있다는 루머에 시달리는 소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래!? 촌스럽게.”
“촌스럽다고!? 하하~! 지금 네 모습이 촌스러워. 그냥 편하게 차 한 잔 하자는데. 뭘 그래.”
“길거리에서 이게 뭐야! 이거 놓으라고.”
“진짜, 창피하게 놀고 있네. 아직도 한성의 따님인 줄 아나!?”
손목이 잡힌 소희와 광호는 승강이를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때 급정거를 하는 차 소리와 함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도로변에 멈추어 섰다. 승용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남자는 균형 잡힌 체격에 헐렁한 카키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본 소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염도 깍지 않은 그 남자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그녀의 시아주버니 박 찬규였다. 난처한 상황에 있던 소희는 반가우면서도 추한 모습을 시아주버니에게 보이기가 민망하였다.
이맛살을 찡그린 박 찬규가 소희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광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소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최 광호는 앞을 가로막고 서는 상대가 귀찮다는 눈빛이었다. 찬규는 길거리에서 남자에게 곤욕을 당하는 제수씨를 보고 몹시 화가 치밀었으나 점잖은 말투로 최 광호에게 말했다.
“점잖은 분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야!? 넌. 건방지게.”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최 광호는 대뜸 반말을 했다. 입가에 비웃음을 흘린 찬규가 한발자국 다가섰다. 동시에 광호는 소희의 손목을 놓고 후다닥 한걸음 물러섰다. 위압감을 느낀 광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먼저 공격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를 바라본 찬규는 어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광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보아하니 배울 만큼 배운 사람 같은데, 왜, 반말을 합니까?”
“이게 어디다가 손짓이야!”
광호는 상대가 폭력을 쓰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찬규의 뻗친 손을 낚아챈 광호는 주먹을 날려 선제공격을 했다. 하지만 합기도의 유단자이기도 한 찬규가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었다. 낚아 채인 손을 등 뒤로 돌려 몸을 비튼 그는 광호의 명치끝을 팔꿈치로 올려쳤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찬규의 행동이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라서 뒷걸음치던 소희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소희의 손에 들렸던 장바구니가 떨어지고 물건들이 길바닥에 흩어졌다. 명치를 가격당한 광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존심이 상한 광호는 벌떡 일어나 시근덕거렸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야! 남의 일에 왜 끼어들어?”
“우리 제수씨인데, 당신은 왜 길거리에서 여자를 괴롭혀?”
“제수.........!?”
“..........”
광호는 상대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말은 없지만 그녀는 찬규의 말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광호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에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 했던 것이 실수였다.
새삼스럽게 상대의 훤칠한 이목구비와 균형 잡힌 체격을 의식하는 광호는 열등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는 않은 그였기에 한마디 했다.
“진작 말씀하시지,...... 대학 동기라 차 한 잔 마시자고 했던 거요.”
“대학 동기.........!?”
이맛살을 찌푸린 찬규는 소희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동생의 아내라는 관계를 떠나서 그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동생과 결혼하여 불행해지는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호의 거친 행동에 분노하지만 그는 더 이상 소란스럽게 하여 소희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의식한 광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광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소희에게 말했다.
“미안해! 반가워서 그랬던 건데........”
“..........”
광호의 말에 소희나 찬규는 아무런 반응도하지 않았다. 주춤거리던 광호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찬규가 소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다친 데는 없어요?”
“..........네.”
부끄러움에 몸을 사리고 있던 소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장바구니에서 떨어진 물건들을 집기 시작했다. 찬규도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서 그녀의 장바구니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장바구니를 받아 든 찬규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집으로 갈 거지? 내 차를 타요.”
“.........”
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서 소희를 태운 찬규는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그는 주차장으로 드나드는 차량들을 피해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 도로가 혼잡했다. 힐끔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희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찬규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가깝지도 않은 먼 길을 걸어 왔어요.......!?”
“.........”
“승용차는 어쩌고.........?”
“........처분했어요.”
“왜.......!?”
“비용도 많이 나가고.........”
“그 정도로 상욱이가 집에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군.........미안해 제수씨.”
“...........”
찬규는 동생 상욱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량을 유지 못할 정도로 동생이 아내를 등한시 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기에 안타까운 눈빛을 하였다. 소희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주버니 찬규의 말에 콧등이 시큰했다. 시댁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소희를 위로 하는 사람은 아주버니 찬규뿐이었다. 소희는 시아버지를 닮은 남편이 곱상한 외모이지만 차가운 인상인 반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호남인 시아주버니 찬규는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상욱은 욕심이 많고 다혈질이지만 박 찬규는 소희의 시어머니같이 자상하면서도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여러 기업을 거느린 그룹의 오너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권력은 형제라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소희의 남편 박 상욱은 형을 대신해서 아버지 박 태환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적극적이었다. 박 상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을 확장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복종하는 스타일이지만, 박 찬규는 아버지의 마구잡이식의 사업방침이 경제논리에 어긋나고 비인간적이라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아버지와 잦은 의견충돌을 하던 박 찬규는 따로 독립해서 나와 있는 실정이었다.
서울 외곽의 아버지 저택에서 독립한 박 찬규는 슈퍼마켓에서 조금 떨어진 상가주택에서 살고 있다. 도로변에 인접한 상가주택은 박 찬규의 소유였다, 아래층들은 상가로 임대하고 박 찬규는 5층을 그리고 소희는 4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박태환은 작은 아들 박 상욱에게 결혼 선물로 아파트를 구입해 줄때까지 당분간만 박 찬규의 건물에 신혼살림을 차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소희의 남편은 분가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든 약속이 물 건너가고 만 것이다.
아주버니를 볼 면목이 없는 소희는 달리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에서 남의 식구처럼 냉대를 받고 있는 그녀였다. 며느리가 길거리에서 남자들에게 추태를 당했다고 하면 시부모들은 더욱 그녀를 천박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고 시부모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아주버니의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소희는 잘 알지만, 자신을 신뢰하는 아주버니가 천박하게 여기지나 않을는지 신경이 쓰였다.
핸들을 잡고 있는 박 찬규는 소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동생 박 상욱이 결혼하기 전에 소희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찬규는 결혼한 지 두해도 지나지 않아서 아내를 잃어버린 아픔을 갖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그의 아내는 딸을 낳고 산후조리중에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어린 딸 민지를 데리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그에게 부모는 수시로 재혼을 권유했다.
원래 박 태환은 민 소희를 장남 박 찬규의 재혼 상대자로 권유했었다. 박 찬규는 이미 소희가 한성그룹의 딸이라는 사실과 사석에서 만났었기에 안면이 있었다. 그의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 같기도 하고,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 인형 같았다. 또한 전혀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당찬 열정이 깃들어 보인 그녀의 눈빛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찬규는 재혼 상대자로 소희를 만나보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재혼을 해야 하는 입장인 그는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를 잊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그는 그녀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장남인 박 찬규가 재혼을 거부하자, 박 태환은 서둘러서 소희와 박 상욱의 결혼을 주선한 것이었다. 동생 상욱과 소희의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박 찬규는 무척 안타까웠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동생의 까칠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그녀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생과 소희의 결혼생활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은연중에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던 찬규의 판단이 결국은 옳았던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해지는 그녀에게 남다른 애착심을 느끼는 그의 감정은 특별한 것이었다. 찬규의 소희에 대한 감정은 보호 본능이었다. 남자의 보호 본능은 어쩌면 애정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박 상욱과 결혼하고 나서 나중에서야 찬규와 먼저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담이 오가기전에 소희가 박 상욱과 박 찬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신년초의 기업 오너들의 가족들과 함께했던 리셉션장소에서였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박 상욱과는 대조되게 박 찬규는 재킷을 걸친 털털한 프리 스타일이었다.
파티 장소에서 다소 섬세한 외모를 지닌 박 상욱이 오너들을 만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서구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박 찬규는 마치 이웃을 만나는 것처럼 여유롭게 사람들과 담소를 하였다. 많은 남성과 교제를 해보지 않은 소희에게 박 찬규에 대한 첫인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물론 상욱과 결혼 성립이 되기 전에 찬규의 재혼 상대로 결혼이 추진되었다면, 아무리 아버지의 권유라고 해도 소희가 거부감을 느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소희가 조금의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박 찬규였다. 그것은 아주버니라는 가족관계를 넘어선 이성간의 감정 일수도 있다.
침묵 속에 소희는 차창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수없이 그리고 있었다. 좌절 속의 현실에서 벗어나 작은 동그라미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녀는 힐끔 찬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윤곽이 뚜렷한 서구적인 이미지의 얼굴에 수염도 깍지 않았지만 왠지 무한한 포옹력이 들어나 보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과 대학을 졸업한 박 찬규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좋아했고, 틈틈이 익힌 그의 음악에 대한 조예와 작곡실력에 기성 음악인들도 놀라며 인정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는 아예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음표처럼 굽으러진 그의 긴 머리카락과 정감어린 표정에서 소희는 새삼스럽게 예술적인 멋스러움이 깃든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찬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수씨, 기분도 우울할 텐데 맥주 한잔하고 들어갈래?”
“민지! 혼자 있을 텐데요........!?”
찬규는 자신의 파출부를 소희의 집도 보살피게 하는 배려를 하고 있었고, 민지를 위해 별도로 시간제 보모를 쓰고 있었다. 보모가 없는 시간에 소희가 틈틈이 민지를 보살펴 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없이 자라난 민지는 작은 엄마인 소희를 무척 따르고 있었다. 민지를 걱정해주는 소희가 고마우면서도 찬규는 무표정하게 다시 물었다.
“늦어진다고 파출부에게 말해 놨는데, 괜찮겠어?”
“..........네.”
찬규는 살고 있는 상가주택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 시켰다. 그리고 도로변으로 나와 카페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많지 않은 카페 안은 조용하고 온화한 분위기였다. 여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소희는 집에서 아주버니와 가끔 맥주 한잔씩은 마시기도 했었다. 그러나 카페에서 그와 마주하기는 처음이라 그녀는 조금은 쑥스러웠다. 주문한 맥주와 안주가 도착하고 찬규가 맥주병을 집어 들어 소희 앞에 놓인 그라스를 채워주었다.
“난, 제수씨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많이 못해요. 조금만 마실게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소희가 찬규의 그라스에 맥주를 따랐다. 찬규는 맥주를 권하거나 잔을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라스를 들어 보이기만 하고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어쩌면 상대를 강요하지 않는 그의 자유스러운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공연히 부자연스러움을 불어 내듯이 거품을 불어내고 한 모금 마셨다. 찬규는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으면서도 소희의 모습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을 했다.
“제수씨, 미안해.”
“아주버니가 왜.........!?”
“우리 집안에 와서 고생하니, 내가 미안하지........”
“........!”
미안해하는 찬규의 표정에 소희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자상하고 포옹력 넘치는 아주버니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른 체격만큼 남편의 날카로움에 비해 찬규는 감상적이고 자상한 성격이면서도 야성적인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남편의 까칠한 말에 이끌려 다니던 소희는 찬규의 넉넉함을 마주하면 이따금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싶은 감정에 젖어들기도 했다.
소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찬규는 자신의 감정을 들어 낼 수도 없고, 그녀를 도와준다는 것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평범한 남녀관계가 아니고 가족관계라는 한계가 그의 행동과 말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동생과 결혼한 그녀의 불행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요즘 상욱이가 집에는 잘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
찬규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소희는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아주버니이지만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남편이라는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그녀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자신의 마음도 남편에게서 멀어져 있으나 어쩔 수 없는 혼돈과 현실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한 건물에 살고 있기에 찬규는 그녀가 처해있는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점점 냉담해지는 동생의 사생활, 시댁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그녀의 마음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마저도 들어내지 못하는 그녀가 애틋하기 때문이었다. 그라스에 남은 맥주를 마신 찬규는 자신의 일처럼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놈이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제수씨!”
“아주버니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소희는 찬규가 내려놓은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남은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그들은 침묵을 대신해서 그라스를 비우고, 서로의 표정을 읽으며 빈 잔을 채워주었다. 몇 잔인가 그라스를 비운 찬규가 주춤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수씨는 알고 있었어?”
“무슨.........!?”
“혹시, 결혼 전에........”
“네........!?”
찬규는 평소에도 소희가 동생과 결혼 전에 자신과의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게 여겼었다. 막상 말을 꺼냈으나 만약 그녀가 모르고 있었다면, 오히려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소희의 의아스러워하는 눈빛을 마주한 찬규는 주춤거렸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소희는 아주버니가 무슨 질문하려는지 헤아려 보았다. 그녀는 아주버니가 어떤 질문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반문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치 않아서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저는 결혼하리라고 생각은 못했어요.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본 것도 처음이고.......”
“그게 아니고.......! 혹시 나하고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
찬규의 질문 요지를 알아챈 소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의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말로 표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그녀는 만약 그와 결혼이 성립되었다면, 지금의 환경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떠올랐다.
찬규를 바라보는 소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쩌면 남편과는 다른 포근한 사랑을 그에게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거의 매일같이 대면을 하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을 느낌만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찬규의 아늑한 눈빛은 따스함과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시선을 외면한 그녀는 그라스 잔을 손으로 돌리면서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결혼 후에 알았어요.”
“음.......! 그랬군.”
소희의 목소리에는 그에 대한 아릿한 감정도 함께 들어나 보였다. 그녀의 한마디에 찬규는 더욱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은밀한 애정의 불씨이기도 하여 바로 들어낼 수는 거북함이었다. 맥주잔을 기울여 마신 찬규가 애틋한 눈빛을 했다.
“어머니와 동생들 생활은 어때?”
“그냥.......”
찬규의 말 한마디로 가슴속에 갇혔던 서러움이 울컥해진 소희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내 등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습기가 맺힌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찬규는 그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어떤 방법이던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난 알고 있어. 제수씨가 우리 집안과 동생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생활비도 안주고, 제가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음! 그 녀석이 결국 그 정도까지.......!? 매달 생활비는 내가 입금시켜 줄게. 어떻게든지 도와주고 싶어.........”
찬규는 말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가족이지만, 그는 그녀를 잔인하게 희생시키고 있는 부모와 동생 대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침울해 있는 그녀를 예전처럼 발랄하고 당찬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 그의 심정이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박 상욱은 예리한 눈빛으로 소희의 표정과 집안을 살폈다. 상욱과 소희는 일상적인 부부로서의 대화가 끊어져 있었다.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온 상욱과 소희는 시선을 외면하면서 무언의 표정으로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침묵이 흐르고 남편이 불쑥 음료수를 달라는 말에 소희는 터질 것 같은 울분 대신에 한마디 했었다.
“생활비 넣어주는 거.......! 잊어버렸나봐.”
“생활비.......!? 집에서 음료수도 돈 내고 달래야 돼?”
“오죽하면 생활비를 말하겠어.”
“넌, 생활비 벌 능력이 없어? 벌어서 쓰라고!”
“벌어서 쓰라니! 너무한 거 아냐?”
“뭘 너무해? 생활비는 알아서 해야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 없어.”
“날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최소한 가정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잖아?”
“책임이라고? 우리가 정략 결혼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정말 비열한 인간! 어떻게 그런 말을.........”
“철부지 애들도 아니고, 성인답게 가정생활은 알아서 해!”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의 남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갔다.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인줄 알면서도 큰마음 먹고 한마디 했던 소희는 어의가 없었다. 요란하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베란다로 다가섰다.
이미 부부 사이에 앙금이 깊게 패였지만, 상욱은 그래도 아내에게 다정한 남편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차라리 굴복하는 자세였다면 동정심이라도 느낄 텐데 갈수록 도도해지는 아내의 표정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건물을 나온 상욱은 매번 똑같은 심정이지만 괜히 집에 들렀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직접 운전하고 온 승용차로 다가갔다. 승용차 조수석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쓴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미소를 띠고 나왔다. 그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고, GS 전속배우로 발탁하여 활동을 시작한 장 애리였다. 승용차로 다가서는 상욱은 건물 베란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베란다 창문으로 건물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보던 소희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대기하고 있는 남편의 승용차 안에서 여자가 나와 남편의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이미 남편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지만, 직접 목격하니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희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들어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남편의 행동은 소희 자신이 스스로 그룹의 며느리를 포기하여 도의적으로나 법적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 소희가 생각한 결론은 자신의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욕망과 시아버지의 야망 사이에서 그녀는 재물로 희생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전, 일 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뜬 구름 같은 시간이었다.
매스컴과 세간에서 생각하는 재벌 간의 화려한 결혼이라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황당한 결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말이 곧 행복이라고 여겼던 그녀 자신이 어리석음도 잘못이었다.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는 사람의 운명을 탓할 수도 없다.
소희는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스스로 아내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어떤 결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박 씨 집안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원통함 때문에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데로 자진해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의 딸로 꿈에 부풀었던 소희였다. 대학시절에는 장래가 유망한 신인연극배우로 촉망 받았던 그녀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지난 세월동안 소희의 단란했던 가정과 꿈을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니 박 태환의 야망에 그녀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어떤 대책도 할 수 없는 소희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무의미하고 절망스럽기만 하였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가을은 깊어가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길거리에 뒹구는 낙엽처럼 소희는 쓸쓸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겨울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만, 작은 장바구니를 든 소희는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심정이었다.
슈퍼마켓을 나온 소희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의 시선이 주차장을 향했다. 유통회사 마크가 달린 큰 트럭 옆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중의 한 남자의 시선이 소희와 마주쳤다.
햇빛을 등진 남자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는 장바구니를 뒤로 감추며 긴장을 했다. 자신의 초췌하게 변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이기에 그녀는 외면을 했다. 그런데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당혹감으로 남자를 올려다 본 소희는 마지못해 쓴 웃음을 지었다.
“아!? 광호구나!”
“하하~! 소희, 오래간만이다.”
소희는 그 남자가 캠퍼스 시절의 남자 친구였기에 사실 지나쳐가기를 바랬다. 동아리 활동도 같이 했었고, 소희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도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최 광호였다. 최 광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유통회사에서 영업파트 담당 부장으로 마트에 공급한 물품들을 조사하러 나온 것이다. 먼발치로 최 광호와 같이 나온 회사직원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의 아버지 민 정호의 죽음, 그리고 민 정호의 기업이 박 태환에게 넘어간 소식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져 있었다. 최 광호는 언론보다도 소희의 가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짝사랑했던 소희가 반갑기도 하고 왠지 초라해 보여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하하~! 차 한 잔 할래?”
“난 생각 없어.”
소희는 그의 웃음이 조소같이 보였다. 비록 집안이 몰락했어도 소희의 자존심은 살아 있었다. 고개를 저은 그녀는 앞을 막고 서 있는 광호를 피해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그러나 광호는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웃었다.
“아직도 콧대가 높은 가!? 박 상욱은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던데, 그럴 필요 뭐 있어.”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니, 비켜.”
“그러지 말고, 차 한 잔 하자니까.”
“너하고 농담할 기분이 아냐.”
“그럼, 기분 전환으로 술 한 잔 하지.”
최 광호가 소희의 팔목을 잡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억센 남자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는 더욱 힘을 주며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과 남편에게 버림받고 있다는 루머에 시달리는 소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래!? 촌스럽게.”
“촌스럽다고!? 하하~! 지금 네 모습이 촌스러워. 그냥 편하게 차 한 잔 하자는데. 뭘 그래.”
“길거리에서 이게 뭐야! 이거 놓으라고.”
“진짜, 창피하게 놀고 있네. 아직도 한성의 따님인 줄 아나!?”
손목이 잡힌 소희와 광호는 승강이를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때 급정거를 하는 차 소리와 함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도로변에 멈추어 섰다. 승용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남자는 균형 잡힌 체격에 헐렁한 카키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본 소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염도 깍지 않은 그 남자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그녀의 시아주버니 박 찬규였다. 난처한 상황에 있던 소희는 반가우면서도 추한 모습을 시아주버니에게 보이기가 민망하였다.
이맛살을 찡그린 박 찬규가 소희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광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소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최 광호는 앞을 가로막고 서는 상대가 귀찮다는 눈빛이었다. 찬규는 길거리에서 남자에게 곤욕을 당하는 제수씨를 보고 몹시 화가 치밀었으나 점잖은 말투로 최 광호에게 말했다.
“점잖은 분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야!? 넌. 건방지게.”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최 광호는 대뜸 반말을 했다. 입가에 비웃음을 흘린 찬규가 한발자국 다가섰다. 동시에 광호는 소희의 손목을 놓고 후다닥 한걸음 물러섰다. 위압감을 느낀 광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먼저 공격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를 바라본 찬규는 어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광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보아하니 배울 만큼 배운 사람 같은데, 왜, 반말을 합니까?”
“이게 어디다가 손짓이야!”
광호는 상대가 폭력을 쓰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찬규의 뻗친 손을 낚아챈 광호는 주먹을 날려 선제공격을 했다. 하지만 합기도의 유단자이기도 한 찬규가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었다. 낚아 채인 손을 등 뒤로 돌려 몸을 비튼 그는 광호의 명치끝을 팔꿈치로 올려쳤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찬규의 행동이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라서 뒷걸음치던 소희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소희의 손에 들렸던 장바구니가 떨어지고 물건들이 길바닥에 흩어졌다. 명치를 가격당한 광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존심이 상한 광호는 벌떡 일어나 시근덕거렸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야! 남의 일에 왜 끼어들어?”
“우리 제수씨인데, 당신은 왜 길거리에서 여자를 괴롭혀?”
“제수.........!?”
“..........”
광호는 상대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말은 없지만 그녀는 찬규의 말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광호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에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 했던 것이 실수였다.
새삼스럽게 상대의 훤칠한 이목구비와 균형 잡힌 체격을 의식하는 광호는 열등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는 않은 그였기에 한마디 했다.
“진작 말씀하시지,...... 대학 동기라 차 한 잔 마시자고 했던 거요.”
“대학 동기.........!?”
이맛살을 찌푸린 찬규는 소희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동생의 아내라는 관계를 떠나서 그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동생과 결혼하여 불행해지는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호의 거친 행동에 분노하지만 그는 더 이상 소란스럽게 하여 소희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의식한 광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광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소희에게 말했다.
“미안해! 반가워서 그랬던 건데........”
“..........”
광호의 말에 소희나 찬규는 아무런 반응도하지 않았다. 주춤거리던 광호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찬규가 소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다친 데는 없어요?”
“..........네.”
부끄러움에 몸을 사리고 있던 소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장바구니에서 떨어진 물건들을 집기 시작했다. 찬규도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서 그녀의 장바구니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장바구니를 받아 든 찬규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집으로 갈 거지? 내 차를 타요.”
“.........”
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서 소희를 태운 찬규는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그는 주차장으로 드나드는 차량들을 피해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 도로가 혼잡했다. 힐끔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희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찬규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가깝지도 않은 먼 길을 걸어 왔어요.......!?”
“.........”
“승용차는 어쩌고.........?”
“........처분했어요.”
“왜.......!?”
“비용도 많이 나가고.........”
“그 정도로 상욱이가 집에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군.........미안해 제수씨.”
“...........”
찬규는 동생 상욱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량을 유지 못할 정도로 동생이 아내를 등한시 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기에 안타까운 눈빛을 하였다. 소희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주버니 찬규의 말에 콧등이 시큰했다. 시댁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소희를 위로 하는 사람은 아주버니 찬규뿐이었다. 소희는 시아버지를 닮은 남편이 곱상한 외모이지만 차가운 인상인 반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호남인 시아주버니 찬규는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상욱은 욕심이 많고 다혈질이지만 박 찬규는 소희의 시어머니같이 자상하면서도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여러 기업을 거느린 그룹의 오너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권력은 형제라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소희의 남편 박 상욱은 형을 대신해서 아버지 박 태환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적극적이었다. 박 상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을 확장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복종하는 스타일이지만, 박 찬규는 아버지의 마구잡이식의 사업방침이 경제논리에 어긋나고 비인간적이라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아버지와 잦은 의견충돌을 하던 박 찬규는 따로 독립해서 나와 있는 실정이었다.
서울 외곽의 아버지 저택에서 독립한 박 찬규는 슈퍼마켓에서 조금 떨어진 상가주택에서 살고 있다. 도로변에 인접한 상가주택은 박 찬규의 소유였다, 아래층들은 상가로 임대하고 박 찬규는 5층을 그리고 소희는 4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박태환은 작은 아들 박 상욱에게 결혼 선물로 아파트를 구입해 줄때까지 당분간만 박 찬규의 건물에 신혼살림을 차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소희의 남편은 분가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든 약속이 물 건너가고 만 것이다.
아주버니를 볼 면목이 없는 소희는 달리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에서 남의 식구처럼 냉대를 받고 있는 그녀였다. 며느리가 길거리에서 남자들에게 추태를 당했다고 하면 시부모들은 더욱 그녀를 천박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고 시부모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아주버니의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소희는 잘 알지만, 자신을 신뢰하는 아주버니가 천박하게 여기지나 않을는지 신경이 쓰였다.
핸들을 잡고 있는 박 찬규는 소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동생 박 상욱이 결혼하기 전에 소희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찬규는 결혼한 지 두해도 지나지 않아서 아내를 잃어버린 아픔을 갖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그의 아내는 딸을 낳고 산후조리중에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어린 딸 민지를 데리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그에게 부모는 수시로 재혼을 권유했다.
원래 박 태환은 민 소희를 장남 박 찬규의 재혼 상대자로 권유했었다. 박 찬규는 이미 소희가 한성그룹의 딸이라는 사실과 사석에서 만났었기에 안면이 있었다. 그의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 같기도 하고,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 인형 같았다. 또한 전혀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당찬 열정이 깃들어 보인 그녀의 눈빛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찬규는 재혼 상대자로 소희를 만나보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재혼을 해야 하는 입장인 그는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를 잊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그는 그녀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장남인 박 찬규가 재혼을 거부하자, 박 태환은 서둘러서 소희와 박 상욱의 결혼을 주선한 것이었다. 동생 상욱과 소희의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박 찬규는 무척 안타까웠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동생의 까칠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그녀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생과 소희의 결혼생활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은연중에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던 찬규의 판단이 결국은 옳았던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해지는 그녀에게 남다른 애착심을 느끼는 그의 감정은 특별한 것이었다. 찬규의 소희에 대한 감정은 보호 본능이었다. 남자의 보호 본능은 어쩌면 애정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박 상욱과 결혼하고 나서 나중에서야 찬규와 먼저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담이 오가기전에 소희가 박 상욱과 박 찬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신년초의 기업 오너들의 가족들과 함께했던 리셉션장소에서였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박 상욱과는 대조되게 박 찬규는 재킷을 걸친 털털한 프리 스타일이었다.
파티 장소에서 다소 섬세한 외모를 지닌 박 상욱이 오너들을 만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서구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박 찬규는 마치 이웃을 만나는 것처럼 여유롭게 사람들과 담소를 하였다. 많은 남성과 교제를 해보지 않은 소희에게 박 찬규에 대한 첫인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물론 상욱과 결혼 성립이 되기 전에 찬규의 재혼 상대로 결혼이 추진되었다면, 아무리 아버지의 권유라고 해도 소희가 거부감을 느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소희가 조금의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박 찬규였다. 그것은 아주버니라는 가족관계를 넘어선 이성간의 감정 일수도 있다.
침묵 속에 소희는 차창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수없이 그리고 있었다. 좌절 속의 현실에서 벗어나 작은 동그라미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녀는 힐끔 찬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윤곽이 뚜렷한 서구적인 이미지의 얼굴에 수염도 깍지 않았지만 왠지 무한한 포옹력이 들어나 보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과 대학을 졸업한 박 찬규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좋아했고, 틈틈이 익힌 그의 음악에 대한 조예와 작곡실력에 기성 음악인들도 놀라며 인정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는 아예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음표처럼 굽으러진 그의 긴 머리카락과 정감어린 표정에서 소희는 새삼스럽게 예술적인 멋스러움이 깃든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찬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수씨, 기분도 우울할 텐데 맥주 한잔하고 들어갈래?”
“민지! 혼자 있을 텐데요........!?”
찬규는 자신의 파출부를 소희의 집도 보살피게 하는 배려를 하고 있었고, 민지를 위해 별도로 시간제 보모를 쓰고 있었다. 보모가 없는 시간에 소희가 틈틈이 민지를 보살펴 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없이 자라난 민지는 작은 엄마인 소희를 무척 따르고 있었다. 민지를 걱정해주는 소희가 고마우면서도 찬규는 무표정하게 다시 물었다.
“늦어진다고 파출부에게 말해 놨는데, 괜찮겠어?”
“..........네.”
찬규는 살고 있는 상가주택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 시켰다. 그리고 도로변으로 나와 카페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많지 않은 카페 안은 조용하고 온화한 분위기였다. 여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소희는 집에서 아주버니와 가끔 맥주 한잔씩은 마시기도 했었다. 그러나 카페에서 그와 마주하기는 처음이라 그녀는 조금은 쑥스러웠다. 주문한 맥주와 안주가 도착하고 찬규가 맥주병을 집어 들어 소희 앞에 놓인 그라스를 채워주었다.
“난, 제수씨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많이 못해요. 조금만 마실게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소희가 찬규의 그라스에 맥주를 따랐다. 찬규는 맥주를 권하거나 잔을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라스를 들어 보이기만 하고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어쩌면 상대를 강요하지 않는 그의 자유스러운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공연히 부자연스러움을 불어 내듯이 거품을 불어내고 한 모금 마셨다. 찬규는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으면서도 소희의 모습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을 했다.
“제수씨, 미안해.”
“아주버니가 왜.........!?”
“우리 집안에 와서 고생하니, 내가 미안하지........”
“........!”
미안해하는 찬규의 표정에 소희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자상하고 포옹력 넘치는 아주버니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른 체격만큼 남편의 날카로움에 비해 찬규는 감상적이고 자상한 성격이면서도 야성적인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남편의 까칠한 말에 이끌려 다니던 소희는 찬규의 넉넉함을 마주하면 이따금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싶은 감정에 젖어들기도 했다.
소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찬규는 자신의 감정을 들어 낼 수도 없고, 그녀를 도와준다는 것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평범한 남녀관계가 아니고 가족관계라는 한계가 그의 행동과 말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동생과 결혼한 그녀의 불행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요즘 상욱이가 집에는 잘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
찬규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소희는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아주버니이지만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남편이라는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그녀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자신의 마음도 남편에게서 멀어져 있으나 어쩔 수 없는 혼돈과 현실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한 건물에 살고 있기에 찬규는 그녀가 처해있는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점점 냉담해지는 동생의 사생활, 시댁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그녀의 마음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마저도 들어내지 못하는 그녀가 애틋하기 때문이었다. 그라스에 남은 맥주를 마신 찬규는 자신의 일처럼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놈이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제수씨!”
“아주버니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소희는 찬규가 내려놓은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남은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그들은 침묵을 대신해서 그라스를 비우고, 서로의 표정을 읽으며 빈 잔을 채워주었다. 몇 잔인가 그라스를 비운 찬규가 주춤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수씨는 알고 있었어?”
“무슨.........!?”
“혹시, 결혼 전에........”
“네........!?”
찬규는 평소에도 소희가 동생과 결혼 전에 자신과의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게 여겼었다. 막상 말을 꺼냈으나 만약 그녀가 모르고 있었다면, 오히려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소희의 의아스러워하는 눈빛을 마주한 찬규는 주춤거렸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소희는 아주버니가 무슨 질문하려는지 헤아려 보았다. 그녀는 아주버니가 어떤 질문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반문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치 않아서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저는 결혼하리라고 생각은 못했어요.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본 것도 처음이고.......”
“그게 아니고.......! 혹시 나하고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
찬규의 질문 요지를 알아챈 소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의 혼담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말로 표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그녀는 만약 그와 결혼이 성립되었다면, 지금의 환경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떠올랐다.
찬규를 바라보는 소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쩌면 남편과는 다른 포근한 사랑을 그에게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거의 매일같이 대면을 하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을 느낌만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찬규의 아늑한 눈빛은 따스함과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시선을 외면한 그녀는 그라스 잔을 손으로 돌리면서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결혼 후에 알았어요.”
“음.......! 그랬군.”
소희의 목소리에는 그에 대한 아릿한 감정도 함께 들어나 보였다. 그녀의 한마디에 찬규는 더욱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은밀한 애정의 불씨이기도 하여 바로 들어낼 수는 거북함이었다. 맥주잔을 기울여 마신 찬규가 애틋한 눈빛을 했다.
“어머니와 동생들 생활은 어때?”
“그냥.......”
찬규의 말 한마디로 가슴속에 갇혔던 서러움이 울컥해진 소희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내 등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습기가 맺힌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찬규는 그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어떤 방법이던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난 알고 있어. 제수씨가 우리 집안과 동생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생활비도 안주고, 제가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음! 그 녀석이 결국 그 정도까지.......!? 매달 생활비는 내가 입금시켜 줄게. 어떻게든지 도와주고 싶어.........”
찬규는 말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가족이지만, 그는 그녀를 잔인하게 희생시키고 있는 부모와 동생 대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침울해 있는 그녀를 예전처럼 발랄하고 당찬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 그의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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