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오랜 역사동안 고민했지만 근원적이고 명확한 답은 정의되어 있지 않다. 철학, 종교, 그리고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만 먼 미래의 우리의 인류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본능일 것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부족함을 느껴 이를 채우려고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본능이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된 사회적 산물이든 간에, 욕망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한마디로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욕망은 신기루와 같다. 잡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더 큰 욕망의 늪으로 빠진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프랑스의 어느 정신분석학자는“욕망의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의 대상은 환유이다”라고 말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욕망은 경제적인 사회, 나아가 상품사회라는 사회체제와 결합하면서,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이 돈에 대한 욕망,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환유되었다. 특히, 경제성장은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거의 완벽하게 상품으로 환유시켰다. 노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망의 상품’에 고객이 되었다. 어쩌면 인간 스스로를 상품화 시키고 먹잇감의 대상으로 만든다.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약한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지 않고 사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축적하고, 가족을 성적인 상품으로 내몰고, 재물과 성상납을 받는 공직자들로 진화하는 욕망의 사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우주라면 욕망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별들과 같다.
인간의 욕망으로 문명은 발달하고 도시는 점점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뀐다. 문명이 발달하는 인간 도시의 밤에는 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도시의 밤, 하늘의 별은 희미하고 땅에서의 욕망은 현란한 불빛들로 번쩍거린다. 도시의 어둠 속에 박혀있는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와 러브호텔의 호사스런 불빛들이 모두 하나같이 경박해 보인다.
마치 성스러움과 속된 것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도시의 밤을 가득 메워 수를 놓고 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충무로의 대로변에 매머드 급의 웅장한 건물에서는 대낮같이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달 전에 신축한 대영그룹의 사옥이었다.
기존의 그룹들이 깊은 관심과 염려를 받을 만큼 고속성장하고 있는 대영의 회장은 박 태환이었다. 그는 13층의 자신의 회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이사회에서 주식증자 안건을 통과시킨 그는 한 시름 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그의 장남 박 찬규와 작은 아들 박 상욱이 탁자의 좌우에 앉았다.
박 찬규는 카키색 점퍼의 자유분방한 차림이고 박 상욱은 깔끔하게 정장을 하고 있었다. 박태환은 비서실로 통하는 인터폰을 눌러 냉수를 달라고 했다. 여비서가 가지고 온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 킨 박 태환이 박 찬규를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넌, 이사회 같은 공식 자리에서는 점잖은 모습을 보일 수 없니?"
"형님! 아버님 체면도 좀 생각하세요."
박 상욱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거들었다. 박 찬규는 그들의 핀잔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느긋한 미소를 흘렸다. 장남의 태도가 못마땅한 박 태환은 입맛을 다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두 아들을 상대로 불쑥 물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주식증자를 반대하는 이사도 있었는데......."
"아버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어차피 흡수 합병한 한성의 기업들도 확장시켜야하고, 이번에 시작한 영화기획사에도 투자를 해야 하니까요."
박 상욱은 서슴지 않고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작은 아들의 말을 듣고 흡족한 박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 찬규는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탁자위의 신문을 들추고 있었다. 박 태환이 탁자를 툭툭 쳐서 큰 아들의 시선을 끌게 하고 물었다.
"너는 왜 말이 없니?"
"결정된 사항에 의견이니 잘 되길 바랄 뿐이죠......."
"장남이라는 놈이 항상 그 꼴이냐! 좀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해야지?"
"꼭 말씀해야 된다면,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저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고, 이미 사업에서 저를 배제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명칭만 이사지 제가 할일도 별로 없고........"
"그럼 넌 그 음악인가 뭔가, 딴따라 생활만 할 거냐!? 차라리 상욱이처럼 회사를 하나 차려줄까?"
박 태환은 언제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 입장에 있는 장남을 서운하게 여기고 있었다. 의견 충돌로 잠시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누구보다 장남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그였기에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심정과는 다르게 박 찬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면 한성을 무너트린 것은 비도덕적이고, 도리어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그룹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 어느 그룹이던 새로운 기업을 키우기보다는 장래성 있는 기업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잖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나갈 길이 없어."
박 찬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의 반론을 듣는 박 상욱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형을 대신해서 장차 대성그룹의 총수가 되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는 아버지의 의견에 적극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박 상욱이라고 한성을 흡수 합병한 것에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성의 회장 민 정호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처갓집이 처참하게 몰락한다고 해도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큰 아들의 시큰둥한 반응이 탐탁지 않은 박 태환이 작은 아들을 향해 물었다.
"상욱인 기획사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니?"
"지금 영화 시나리오는 완성되었고 감독 선정과 전속 연기자들 모집하는 마지막 오디션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 앞으로 우리 기업사회에 콘텐츠 사업은 투자가치가 큰 돈 덩어리니. 면밀하면서도 종합적으로 대체해 나가야 해."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을 실망 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박 상욱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지만 꼿꼿한 자세를 취하며 군인처럼 대답했다. 박 태환은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업을 만들고 있었다. 콘텐츠 사업에 눈독을 들였던 그는 영화제작기획사를 차려서 작은 아들 상욱을 대표이사로 앉힌 것이다. 집념이 큰 작은 아들에 비해 무관심해 보이는 큰 아들을 바라보는 박 태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박 찬규는 여전히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박 태환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회장실을 나갔다. 잠시 주춤거리던 박 상욱이 부지런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사옥의 입구에서 박 태환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승용차로 향했다.
사옥의 로비를 부리나케 뛰어나온 박 상욱이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타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검은 승용차를 바라보고 있는 박 상욱 옆으로 그의 회색 승용차가 미끄러져 다가와 멈추었다. 그의 운전기사 김 은철이 승용차 뒷좌석 문을 열고 기다렸다. 승용차에 올라앉은 그는 그때서야 긴장을 풀었다. 김 기사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집으로 갈까요?"
"아니 을지로로 가."
상욱은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장인의 한성그룹을 몰락시키고 흡수 합병시킨 아버지의 열렬한 동조자였다. 아버지에게는 공로자일지 모르지만 처갓집에서는 그를 결코 좋은 시각으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나 아내와의 사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냉랭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한성이 부도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내는 그에게 눈물로 호소했었다.
"자기야!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는 거야?"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우리 대성도 타격을 받으니 어쩔 수 없어."
"당신 아버님, 너무 잔인해. 그렇다고 고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렇게 안하면 한성의 금융기관 보증 채무를 부담하게 된 대성까지 무너진다는 걸 몰라!?"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박 상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상욱에게 여자는 삶의 도구일 뿐이었다. 아니 권력과 재물이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 민 소희는 부모의 슬하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름답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다.
삼십 여분이 지난 후 을지로의 대리석 빌딩 앞에 도착했다.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그가 들어간 곳은 GS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이었다. GS는 그가 아버지와 의논 끝에 근래에 창업한 대성그룹의 영화제작과 연예종합기획사였다.
사무실 안에는 머리를 마주하고 토의하는 직원들도 있었고 각자 자신들의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 사이를 지나쳐간 상욱은 자신의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직원 한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마케팅 담당 팀장인 장 철호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 팀장이 책상위의 서류철을 집어 들고 걸어가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상욱은 책상위에 다리를 얹어 놓고 비스듬히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장 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내와의 문제가 혼란스러운 상욱은 머리를 짚고 있었다. 책상위에서 다리를 내려놓은 상욱은 언짢은 표정을 했다.
“뭐지.......!?”
“오디션 결선 때문인데요.”
“음! 그래.”
“2차에 합격한 명단입니다.”
장 팀장은 상욱의 책상위에 파일 철을 펼쳐 놓았다. 상욱은 규모가 큰 영화를 제작할 기획을 끝내고 있었다. 대성 그룹이 콘텐츠 부문에서도 성공할지를 판가름하는 사업이기에 매스컴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연예계에 캐스팅할 연기자들을 선정하느라고 대대적인 오디션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상욱은 최종 오디션에 올라갈 지원자들 명단에 시선을 집중했다. 장 절호 팀장은 미국유학을 다녀왔고, 다른 기획사에서도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집중해서 후보자 명단을 살피는 상욱은 장 팀장과 의견을 나누었다.
“강 준식!?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연극계에서 연기력만큼은 인정받는 배우입니다.”
“음. 주연급으로 캐스팅하기에는 모험이 아닌가?”
“어쩌면 기존의 연기자 이미지가 더 부담스러울 겁니다. 한 용우가 아끼는 재원이기도 합니다.”
“한 용우!?”
“네. 한 용우 감독이 직접 영화제작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먼저 강 준식을 캐스팅 하려고 눈독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한 용우! 서른이 갓 넘은 젊은 나이에도 요즘 그의 명성은 국외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예감독이었다. 연극과 오페라 감독으로 출발했던 그가 얼마 전에 처음으로 감독한 영화는 관람객이 오백만을 돌파했고 국외 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상욱은 그가 형 찬규의 친구이기도 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상욱이 볼펜을 두드리며 오디션 명단을 넘기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 미영!? 얘는 MK 전속이잖아.”
“인기가 한물가서 MK에서 버린 애입니다.”
“그런데 왜!? 적당하게 탈락시켜.”
“아직 연기는 쓸 만한데요.”
“XX장관 섹스파트너였던 것 몰라? 남이 쓰던 물건 갖고 싶지 않아.”
“알았습니다.”
연기자의 사생활을 떠나 연기력을 중시하고 싶었던 장 팀장은 마지못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명단을 넘기던 상욱의 시선이 나이가 어려보이는 여자배우의 사진에 멈추었다.
“장 애리.......! 별로 연기력이 신통치 않은 걸로 아는데........ 얘는 탈락시킨 줄 알았는데?”
“이미지를 봐서는 키울만한 아이입니다.”
“장 팀장! 우리가 연기자 학원 아니잖아? 애리는 다른 기획사 오디션에서도 여러 번 탈락했다면서........”
“그, 그것이.......”
난처한 표정을 한 장 팀장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를 믿었던 상욱은 실망스러웠다. 보고 있던 명단을 내려놓은 상욱이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고 장 팀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장 팀장은 자신을 신뢰하기에 나름대로 오디션 후보들을 맡겨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세밀하게 따지는 상욱이기에 장 팀장은 당황스러웠다.
“사실은........K 방송의 김 영직 피디 부탁으로....... 마케팅이나 홍보를 위해서는 김 피디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거 같아서........”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애리 같은 애 때문에 내가 도박을 하라는 말이야?”
“조연정도는 쓸 만할 겁니다. 사장님이 다시 한 번 만나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김 피디가 오늘 술자리를 마련한다고 연락 왔습니다.”
“김 피디는 나이도 많잖아! 애리와 어떤 관계라는데?”
“아마도 금전 거래가 있는 듯........”
장 팀장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하자면 김 피디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설명을 했다. 상욱은 장 팀장의 간곡한 설명에도 장 애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오디션 후보 명단을 검토한 상욱은 장 팀장과 함께 늦은 시간에 밤에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도 이슬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흙탕물을 튀기고 달리는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상욱은 장 팀장과 함께 강남의 고급 클럽의 룸에서 김 영직 피디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VIP를 맞이한 지배인은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기분을 맞추느라 분주하고, 그들 옆에는 각자 젊은 여종업원들이 파트너가 되어 흥을 돋우었다. 그들은 벌써 양주 몇 잔째를 마주치고 있었다. 김 피디가 잔을 들어 다시 술을 권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 방송국뿐만 아니라, 매스컴에서는 GS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머지않아 연예계의 중추적 GS가 될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도리어 저희가 김 피디님에게 부탁 들여야지요. 저희는 아직 이 계통에 초년병인데........”
머리가 희끗희끗하도록 나이가 든 김 피디의 격찬에 상욱은 그룹의 후계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려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김 영직 피디는 방송계에서 오랜 경험에서 쌓아온 노하우로 상당한 재산도 축적한 인물이었다.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을 접촉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현혹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김 피디는 사적인 자리인 만큼 상욱과 돈독한 친근감을 만들고 싶었고 상욱은 되도록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그룹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김 피디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의도로 상의를 벗어 파트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겸손의 말씀을.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실례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 뵈려던 참입니다.”
“오늘은 사업관계가 아니니,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 피디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아주 편합니다.”
김 피디의 파트너가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허벅지가 들어나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김 피디의 파트너가 눈웃음을 치며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 피디는 여자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손길은 서슴지 않고 여자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상욱의 눈치를 살피는 김 피디는 노골적으로 여자의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허~! 어린 것이 젖가슴은 제법이구만.”
“아 잉! 사장님 살살해요. 아프다니까요.”
“사장님 이라고!? 미안하지만 난 사장님이 아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과장님, 아니면 부장님?”
여자는 별다른 거부 없이 김 피디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얹어 놓으며 애교를 부렸다. 상욱과 장 팀장을 위해 김 피디가 솔선해서 분위기를 이끌려는 것이다. 김 피디의 행동은 각자의 여자파트너를 움직이게 하는 신호탄이었다. 앞가슴이 들어나고 허벅지가 들어나 보이는 옷을 걸친 여자들이 상욱과 장 팀장에게 술을 권하며 교태를 부렸다. 흐뭇한 미소를 흘린 김 피디가 파트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너 인물이 반반하구나. 하하~! 너 앞으로 앞에 계신 분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사람의 운명은 모르는 것이다.”
“저희 집에 처음 오신 분 같은데, 뭐하시는 분인데요?”
상욱과 장 팀장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김 피디 파트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장 팀장은 눈치를 살폈으나 상욱은 여전히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웃음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음에 김 피디는 대뜸 파트너의 짧은 스커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 맛! 사, 사장님 아프단 말예요.”
“하하~! 이년이 벌써 젖었네.”
여자는 김 피디의 손아귀에 음모가 잡혀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VIP 손님이니 잘 모시라는 지배인의 말을 떠올리는 그녀는 그렇다고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통증을 견디는 그녀는 눈을 흘길 뿐이었다. 분위기를 위해서 짓궂은 장난을 한 김 피디는 파트너를 번쩍 안아서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허벅지 사이를 거머쥐었던 김 피디의 손길에 빠져 나가자, 그때서야 여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너무 하세요. 오늘 저녁, 나, 책임 져야 되요.”
“하하~! 요것 좀 봐라! 요즘은 여자가 남자를 책임져야 하는 거 아냐?”
“피 잇~! 그렇게 돈이 많으세요?”
“네가 하는 것 봐서, 얼마든지. 하하하........”
김 피디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상욱과 장 팀장, 그리고 여자들이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삼인조의 가라오케 룸 밴드가 들어와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소리와 함께 그들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주흥을 즐겼다. 하지만 상욱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술이 거나해져도 상욱이 분위기에 젖어들지 않음에 김 피디는 여자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얘들아! 분위기 좀 더 올려봐.”
여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한 여자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자들은 젖가슴을 들어 내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여자는 팬티 차림으로 탁자위에 올라가 성적인 묘사로 몸을 흔들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상욱은 즐겁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돈으로 자신의 육체를 들어 내보이는 여자들에게 그는 관심이 없었다.
의도대로 분위기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김 피디가 슬쩍 장 팀장의 옆구리를 찌르고 룸을 나갔다. 복도로 뒤따라 나온 장 팀장과 마주선 김 피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장 팀장! 어찌된 거야?”
“뭘요.......?”
“장 애리 말이야. 내 말이 안 먹히는 거야?”
“잘 될 겁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우리 사장님이 오신 거 아닙니까. 다만 원래 성격이 까칠해서........”
김 피디는 장 팀장의 호의적인 말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김 피디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장 팀장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대답을 안했잖아?”
“성격이 까칠해서 그렇다니까요. 급하시기는! 기다려 보시지요.”
“나중에 어떻게 되던장 애리를 꼭 오디션에 합격시켜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시장에서 물건 사듯이 대답할 수는 없잖아요.”
김 피디는 꼭 일을 성사 시켜야만 했다. 그는 얼마 전에 개발지역의 토지를 구입했었다. 그 토지는 현금 매매가 아니고 장 애리를 오디션에 합격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양도 받은 것이었다. 확신을 할 수 없는 김 피디는 답답했다.
“하아 참, 나 원.......! 박 상욱이 여자를 좋아 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오늘 애리를 호텔로 보낼까?”
“네.......!?”
장 팀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장 애리를 오디션에 합격시키려는 김 피디의 간절함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는 것을 느낀 장 팀장은 호기심이 일어났다. 장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혹시 김 피디님과 애리의 관계가........!?”
“아냐! 이상하게 오해를 하지 마. 난 그 애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이번은 장 팀장이 내 부탁을 꼭 들어줘야 돼.”
김 피디는 장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흔들어 자신과는 관계를 강하게 부인했다. 여전히 장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친인척관계라면 노골적으로 장 애리를 호텔까지 들어가게 할 리가 없었다. 장 팀장은 김 피디가 남녀관계가 아니라면 단단히 돈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 애리, 남자들과 관계는 어때요?”
“내가 알기로는 아직 맹물인거 같은데.”
“그렇다면 처녀라고요.......!?”
“여자 속은 모르지만, 그렇게 알아야지.”
“애리가 과연 올 가요?”
“이미 얘기를 해놔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든지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구는 대단해.”
장 팀장은 대학 선후배 사이인 상욱과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했었다. 누구보다도 상욱의 평소 성격과 습관을 잘 알고 있는 장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자를 좋아하는 상욱은 자신과 하룻밤 관계를 갖는 여자들에 대해 무척 예민하게 신경을 썼다. 장 팀장은 눈치를 살피는 김 피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면 곤란합니다.”
“알았어. 내 명예에도 먹칠 하는 일이잖아.”
장 팀장을 안심 시키려고 김 피디는 어깨를 투덕거렸다. 김 피디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사이에 장 팀장이 먼저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 안으로 들어선 장 팀장은 왠지 실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을 느꼈다. 가라오케 밴드들이 악기를 들고 나가고, 상욱과 여자파트너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상욱의 파트너가 앙칼지게 쏘아 붙였다.
“아무리 직업여성이지만 이해 해 주시면 안돼요?”
“뭐라고! 배우지 못한 것들이.......”
“제가 일부러 술을 엎지른 것이 아니잖아요?”
“미안하다고 그래야지!”
“그렇다고 점잖은 분이 욕을 하세요?”
“이 년이 누구한테 대들고 있어!”
말과 동시에 상욱의 손이 여자 파트너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철썩 소리와 함께 뺨을 얻어맞은 여자 파트너가 주저앉았다.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이 놀라고, 주저앉았던 상욱의 파트너가 파랗게 질려 발딱 일어섰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여자 파트너는 처음부터 거만한 자세로 있는 상욱이 마땅치 않았다. 상욱을 노려본 여자의 입에서 거친 말투가 흘렀다.
“왜 때려!? 권력과 돈 있는 놈들은 다 그래?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뭐라고!”
상욱이 다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돌아가도록 강하게 맞은 그녀가 뒷걸음쳤다. 그리고 짧은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허벅지 사이로 보라색 팬티가 들어나 보일 정도로 그녀는 다리를 들고 소파에 처박혔다. 그때 룸 문이 열리고 김 피디가 들어섰다. 온갖 상황에 대처하고 살아온 김 피디였다. 룸 안의 분위기를 판단한 김 피디가 얼른 상욱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여자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 이따위로 하려면 모두 나가!”
“.........”
여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룸을 나가기 시작했다. 김 피디의 호통소리를 들었는지 지배인이 들어왔다. 김 피디가 금방 환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내가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들이 버릇없이 굴었나봐. 괜찮으니 걱정 마.”
“죄송합니다. 다른 애들 들여보낼까요?”
“아니, 우리끼리 술 한 잔 할 테니 술이나 줘.”
“서비스로 드릴 테니 즐겁게 드십시오.”
지배인이 굽실거리며 룸을 나가더니 양주병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지배인은 그들에게 술을 따르며 여자들의 접대가 부실했던 점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김 피디에게 술을 받아 마신 지배인이 나가고, 상욱은 자신의 행동이 처세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과격했다는 점에 무안함을 느꼈다. 상욱이 김 피디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미안합니다. 분위기를 맞추지 못해서.”
“하하~! 이런데 애들이 모두 버릇이 없어요. 이해해 줘요.”
“이해는 뭐! 내가 어울릴 줄 몰라서 그렇지.”
“저기........괜찮다면 장 애리를 만나보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김 피디는 상욱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 빤히 쳐다보았다. 상욱은 김 피디가 갑작스럽게 제안하는 말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상욱과 시선이 마주친 장 팀장이 한 쪽 눈을 감아 보였다. 장 팀장의 눈빛에 상욱은 무엇인가 대화가 있었던 것을 의식했다.
“장 애리.......!?”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버릇없던 애들 때문에 상한 기분도 풀고, 본인도 오디션이 아닌 자리에서 오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글쎄........”
말을 더듬는 상욱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상욱은 장 팀장의 눈짓과 김 피디의 능글능글한 표정의 의미를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바쁜 일정 속에서 여자관계를 못하기도 했지만, 아내에 대한 우울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더욱이나 아직 연예계에 나오지 않은 신인이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에 그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는 술집여자들보다는 장 애리를 상대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에 만족할 것 같았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부족함을 느껴 이를 채우려고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본능이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된 사회적 산물이든 간에, 욕망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한마디로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욕망은 신기루와 같다. 잡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더 큰 욕망의 늪으로 빠진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프랑스의 어느 정신분석학자는“욕망의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의 대상은 환유이다”라고 말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욕망은 경제적인 사회, 나아가 상품사회라는 사회체제와 결합하면서,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이 돈에 대한 욕망,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환유되었다. 특히, 경제성장은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거의 완벽하게 상품으로 환유시켰다. 노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망의 상품’에 고객이 되었다. 어쩌면 인간 스스로를 상품화 시키고 먹잇감의 대상으로 만든다.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약한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지 않고 사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축적하고, 가족을 성적인 상품으로 내몰고, 재물과 성상납을 받는 공직자들로 진화하는 욕망의 사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우주라면 욕망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별들과 같다.
인간의 욕망으로 문명은 발달하고 도시는 점점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뀐다. 문명이 발달하는 인간 도시의 밤에는 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도시의 밤, 하늘의 별은 희미하고 땅에서의 욕망은 현란한 불빛들로 번쩍거린다. 도시의 어둠 속에 박혀있는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와 러브호텔의 호사스런 불빛들이 모두 하나같이 경박해 보인다.
마치 성스러움과 속된 것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도시의 밤을 가득 메워 수를 놓고 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충무로의 대로변에 매머드 급의 웅장한 건물에서는 대낮같이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달 전에 신축한 대영그룹의 사옥이었다.
기존의 그룹들이 깊은 관심과 염려를 받을 만큼 고속성장하고 있는 대영의 회장은 박 태환이었다. 그는 13층의 자신의 회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이사회에서 주식증자 안건을 통과시킨 그는 한 시름 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그의 장남 박 찬규와 작은 아들 박 상욱이 탁자의 좌우에 앉았다.
박 찬규는 카키색 점퍼의 자유분방한 차림이고 박 상욱은 깔끔하게 정장을 하고 있었다. 박태환은 비서실로 통하는 인터폰을 눌러 냉수를 달라고 했다. 여비서가 가지고 온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 킨 박 태환이 박 찬규를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넌, 이사회 같은 공식 자리에서는 점잖은 모습을 보일 수 없니?"
"형님! 아버님 체면도 좀 생각하세요."
박 상욱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거들었다. 박 찬규는 그들의 핀잔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느긋한 미소를 흘렸다. 장남의 태도가 못마땅한 박 태환은 입맛을 다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두 아들을 상대로 불쑥 물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주식증자를 반대하는 이사도 있었는데......."
"아버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어차피 흡수 합병한 한성의 기업들도 확장시켜야하고, 이번에 시작한 영화기획사에도 투자를 해야 하니까요."
박 상욱은 서슴지 않고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작은 아들의 말을 듣고 흡족한 박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 찬규는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탁자위의 신문을 들추고 있었다. 박 태환이 탁자를 툭툭 쳐서 큰 아들의 시선을 끌게 하고 물었다.
"너는 왜 말이 없니?"
"결정된 사항에 의견이니 잘 되길 바랄 뿐이죠......."
"장남이라는 놈이 항상 그 꼴이냐! 좀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해야지?"
"꼭 말씀해야 된다면,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저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고, 이미 사업에서 저를 배제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명칭만 이사지 제가 할일도 별로 없고........"
"그럼 넌 그 음악인가 뭔가, 딴따라 생활만 할 거냐!? 차라리 상욱이처럼 회사를 하나 차려줄까?"
박 태환은 언제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 입장에 있는 장남을 서운하게 여기고 있었다. 의견 충돌로 잠시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누구보다 장남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그였기에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심정과는 다르게 박 찬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면 한성을 무너트린 것은 비도덕적이고, 도리어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그룹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 어느 그룹이던 새로운 기업을 키우기보다는 장래성 있는 기업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잖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나갈 길이 없어."
박 찬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의 반론을 듣는 박 상욱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형을 대신해서 장차 대성그룹의 총수가 되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는 아버지의 의견에 적극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박 상욱이라고 한성을 흡수 합병한 것에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성의 회장 민 정호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처갓집이 처참하게 몰락한다고 해도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큰 아들의 시큰둥한 반응이 탐탁지 않은 박 태환이 작은 아들을 향해 물었다.
"상욱인 기획사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니?"
"지금 영화 시나리오는 완성되었고 감독 선정과 전속 연기자들 모집하는 마지막 오디션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 앞으로 우리 기업사회에 콘텐츠 사업은 투자가치가 큰 돈 덩어리니. 면밀하면서도 종합적으로 대체해 나가야 해."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을 실망 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박 상욱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지만 꼿꼿한 자세를 취하며 군인처럼 대답했다. 박 태환은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업을 만들고 있었다. 콘텐츠 사업에 눈독을 들였던 그는 영화제작기획사를 차려서 작은 아들 상욱을 대표이사로 앉힌 것이다. 집념이 큰 작은 아들에 비해 무관심해 보이는 큰 아들을 바라보는 박 태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박 찬규는 여전히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박 태환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회장실을 나갔다. 잠시 주춤거리던 박 상욱이 부지런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사옥의 입구에서 박 태환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승용차로 향했다.
사옥의 로비를 부리나케 뛰어나온 박 상욱이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타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검은 승용차를 바라보고 있는 박 상욱 옆으로 그의 회색 승용차가 미끄러져 다가와 멈추었다. 그의 운전기사 김 은철이 승용차 뒷좌석 문을 열고 기다렸다. 승용차에 올라앉은 그는 그때서야 긴장을 풀었다. 김 기사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집으로 갈까요?"
"아니 을지로로 가."
상욱은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장인의 한성그룹을 몰락시키고 흡수 합병시킨 아버지의 열렬한 동조자였다. 아버지에게는 공로자일지 모르지만 처갓집에서는 그를 결코 좋은 시각으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나 아내와의 사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냉랭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한성이 부도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내는 그에게 눈물로 호소했었다.
"자기야!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는 거야?"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우리 대성도 타격을 받으니 어쩔 수 없어."
"당신 아버님, 너무 잔인해. 그렇다고 고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렇게 안하면 한성의 금융기관 보증 채무를 부담하게 된 대성까지 무너진다는 걸 몰라!?"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박 상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상욱에게 여자는 삶의 도구일 뿐이었다. 아니 권력과 재물이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 민 소희는 부모의 슬하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름답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다.
삼십 여분이 지난 후 을지로의 대리석 빌딩 앞에 도착했다.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그가 들어간 곳은 GS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이었다. GS는 그가 아버지와 의논 끝에 근래에 창업한 대성그룹의 영화제작과 연예종합기획사였다.
사무실 안에는 머리를 마주하고 토의하는 직원들도 있었고 각자 자신들의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 사이를 지나쳐간 상욱은 자신의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직원 한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마케팅 담당 팀장인 장 철호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 팀장이 책상위의 서류철을 집어 들고 걸어가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상욱은 책상위에 다리를 얹어 놓고 비스듬히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장 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내와의 문제가 혼란스러운 상욱은 머리를 짚고 있었다. 책상위에서 다리를 내려놓은 상욱은 언짢은 표정을 했다.
“뭐지.......!?”
“오디션 결선 때문인데요.”
“음! 그래.”
“2차에 합격한 명단입니다.”
장 팀장은 상욱의 책상위에 파일 철을 펼쳐 놓았다. 상욱은 규모가 큰 영화를 제작할 기획을 끝내고 있었다. 대성 그룹이 콘텐츠 부문에서도 성공할지를 판가름하는 사업이기에 매스컴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연예계에 캐스팅할 연기자들을 선정하느라고 대대적인 오디션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상욱은 최종 오디션에 올라갈 지원자들 명단에 시선을 집중했다. 장 절호 팀장은 미국유학을 다녀왔고, 다른 기획사에서도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집중해서 후보자 명단을 살피는 상욱은 장 팀장과 의견을 나누었다.
“강 준식!?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연극계에서 연기력만큼은 인정받는 배우입니다.”
“음. 주연급으로 캐스팅하기에는 모험이 아닌가?”
“어쩌면 기존의 연기자 이미지가 더 부담스러울 겁니다. 한 용우가 아끼는 재원이기도 합니다.”
“한 용우!?”
“네. 한 용우 감독이 직접 영화제작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먼저 강 준식을 캐스팅 하려고 눈독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한 용우! 서른이 갓 넘은 젊은 나이에도 요즘 그의 명성은 국외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예감독이었다. 연극과 오페라 감독으로 출발했던 그가 얼마 전에 처음으로 감독한 영화는 관람객이 오백만을 돌파했고 국외 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상욱은 그가 형 찬규의 친구이기도 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상욱이 볼펜을 두드리며 오디션 명단을 넘기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 미영!? 얘는 MK 전속이잖아.”
“인기가 한물가서 MK에서 버린 애입니다.”
“그런데 왜!? 적당하게 탈락시켜.”
“아직 연기는 쓸 만한데요.”
“XX장관 섹스파트너였던 것 몰라? 남이 쓰던 물건 갖고 싶지 않아.”
“알았습니다.”
연기자의 사생활을 떠나 연기력을 중시하고 싶었던 장 팀장은 마지못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명단을 넘기던 상욱의 시선이 나이가 어려보이는 여자배우의 사진에 멈추었다.
“장 애리.......! 별로 연기력이 신통치 않은 걸로 아는데........ 얘는 탈락시킨 줄 알았는데?”
“이미지를 봐서는 키울만한 아이입니다.”
“장 팀장! 우리가 연기자 학원 아니잖아? 애리는 다른 기획사 오디션에서도 여러 번 탈락했다면서........”
“그, 그것이.......”
난처한 표정을 한 장 팀장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를 믿었던 상욱은 실망스러웠다. 보고 있던 명단을 내려놓은 상욱이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고 장 팀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장 팀장은 자신을 신뢰하기에 나름대로 오디션 후보들을 맡겨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세밀하게 따지는 상욱이기에 장 팀장은 당황스러웠다.
“사실은........K 방송의 김 영직 피디 부탁으로....... 마케팅이나 홍보를 위해서는 김 피디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거 같아서........”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애리 같은 애 때문에 내가 도박을 하라는 말이야?”
“조연정도는 쓸 만할 겁니다. 사장님이 다시 한 번 만나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김 피디가 오늘 술자리를 마련한다고 연락 왔습니다.”
“김 피디는 나이도 많잖아! 애리와 어떤 관계라는데?”
“아마도 금전 거래가 있는 듯........”
장 팀장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하자면 김 피디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설명을 했다. 상욱은 장 팀장의 간곡한 설명에도 장 애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오디션 후보 명단을 검토한 상욱은 장 팀장과 함께 늦은 시간에 밤에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도 이슬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흙탕물을 튀기고 달리는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상욱은 장 팀장과 함께 강남의 고급 클럽의 룸에서 김 영직 피디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VIP를 맞이한 지배인은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기분을 맞추느라 분주하고, 그들 옆에는 각자 젊은 여종업원들이 파트너가 되어 흥을 돋우었다. 그들은 벌써 양주 몇 잔째를 마주치고 있었다. 김 피디가 잔을 들어 다시 술을 권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 방송국뿐만 아니라, 매스컴에서는 GS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머지않아 연예계의 중추적 GS가 될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도리어 저희가 김 피디님에게 부탁 들여야지요. 저희는 아직 이 계통에 초년병인데........”
머리가 희끗희끗하도록 나이가 든 김 피디의 격찬에 상욱은 그룹의 후계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려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김 영직 피디는 방송계에서 오랜 경험에서 쌓아온 노하우로 상당한 재산도 축적한 인물이었다.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을 접촉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현혹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김 피디는 사적인 자리인 만큼 상욱과 돈독한 친근감을 만들고 싶었고 상욱은 되도록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그룹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김 피디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의도로 상의를 벗어 파트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겸손의 말씀을.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실례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 뵈려던 참입니다.”
“오늘은 사업관계가 아니니,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 피디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아주 편합니다.”
김 피디의 파트너가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허벅지가 들어나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김 피디의 파트너가 눈웃음을 치며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 피디는 여자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손길은 서슴지 않고 여자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상욱의 눈치를 살피는 김 피디는 노골적으로 여자의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허~! 어린 것이 젖가슴은 제법이구만.”
“아 잉! 사장님 살살해요. 아프다니까요.”
“사장님 이라고!? 미안하지만 난 사장님이 아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과장님, 아니면 부장님?”
여자는 별다른 거부 없이 김 피디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얹어 놓으며 애교를 부렸다. 상욱과 장 팀장을 위해 김 피디가 솔선해서 분위기를 이끌려는 것이다. 김 피디의 행동은 각자의 여자파트너를 움직이게 하는 신호탄이었다. 앞가슴이 들어나고 허벅지가 들어나 보이는 옷을 걸친 여자들이 상욱과 장 팀장에게 술을 권하며 교태를 부렸다. 흐뭇한 미소를 흘린 김 피디가 파트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너 인물이 반반하구나. 하하~! 너 앞으로 앞에 계신 분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사람의 운명은 모르는 것이다.”
“저희 집에 처음 오신 분 같은데, 뭐하시는 분인데요?”
상욱과 장 팀장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김 피디 파트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장 팀장은 눈치를 살폈으나 상욱은 여전히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웃음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음에 김 피디는 대뜸 파트너의 짧은 스커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 맛! 사, 사장님 아프단 말예요.”
“하하~! 이년이 벌써 젖었네.”
여자는 김 피디의 손아귀에 음모가 잡혀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VIP 손님이니 잘 모시라는 지배인의 말을 떠올리는 그녀는 그렇다고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통증을 견디는 그녀는 눈을 흘길 뿐이었다. 분위기를 위해서 짓궂은 장난을 한 김 피디는 파트너를 번쩍 안아서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허벅지 사이를 거머쥐었던 김 피디의 손길에 빠져 나가자, 그때서야 여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너무 하세요. 오늘 저녁, 나, 책임 져야 되요.”
“하하~! 요것 좀 봐라! 요즘은 여자가 남자를 책임져야 하는 거 아냐?”
“피 잇~! 그렇게 돈이 많으세요?”
“네가 하는 것 봐서, 얼마든지. 하하하........”
김 피디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상욱과 장 팀장, 그리고 여자들이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삼인조의 가라오케 룸 밴드가 들어와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소리와 함께 그들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주흥을 즐겼다. 하지만 상욱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술이 거나해져도 상욱이 분위기에 젖어들지 않음에 김 피디는 여자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얘들아! 분위기 좀 더 올려봐.”
여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한 여자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자들은 젖가슴을 들어 내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여자는 팬티 차림으로 탁자위에 올라가 성적인 묘사로 몸을 흔들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상욱은 즐겁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돈으로 자신의 육체를 들어 내보이는 여자들에게 그는 관심이 없었다.
의도대로 분위기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김 피디가 슬쩍 장 팀장의 옆구리를 찌르고 룸을 나갔다. 복도로 뒤따라 나온 장 팀장과 마주선 김 피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장 팀장! 어찌된 거야?”
“뭘요.......?”
“장 애리 말이야. 내 말이 안 먹히는 거야?”
“잘 될 겁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우리 사장님이 오신 거 아닙니까. 다만 원래 성격이 까칠해서........”
김 피디는 장 팀장의 호의적인 말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김 피디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장 팀장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대답을 안했잖아?”
“성격이 까칠해서 그렇다니까요. 급하시기는! 기다려 보시지요.”
“나중에 어떻게 되던장 애리를 꼭 오디션에 합격시켜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시장에서 물건 사듯이 대답할 수는 없잖아요.”
김 피디는 꼭 일을 성사 시켜야만 했다. 그는 얼마 전에 개발지역의 토지를 구입했었다. 그 토지는 현금 매매가 아니고 장 애리를 오디션에 합격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양도 받은 것이었다. 확신을 할 수 없는 김 피디는 답답했다.
“하아 참, 나 원.......! 박 상욱이 여자를 좋아 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오늘 애리를 호텔로 보낼까?”
“네.......!?”
장 팀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장 애리를 오디션에 합격시키려는 김 피디의 간절함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는 것을 느낀 장 팀장은 호기심이 일어났다. 장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혹시 김 피디님과 애리의 관계가........!?”
“아냐! 이상하게 오해를 하지 마. 난 그 애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이번은 장 팀장이 내 부탁을 꼭 들어줘야 돼.”
김 피디는 장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흔들어 자신과는 관계를 강하게 부인했다. 여전히 장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친인척관계라면 노골적으로 장 애리를 호텔까지 들어가게 할 리가 없었다. 장 팀장은 김 피디가 남녀관계가 아니라면 단단히 돈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 애리, 남자들과 관계는 어때요?”
“내가 알기로는 아직 맹물인거 같은데.”
“그렇다면 처녀라고요.......!?”
“여자 속은 모르지만, 그렇게 알아야지.”
“애리가 과연 올 가요?”
“이미 얘기를 해놔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든지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구는 대단해.”
장 팀장은 대학 선후배 사이인 상욱과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했었다. 누구보다도 상욱의 평소 성격과 습관을 잘 알고 있는 장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자를 좋아하는 상욱은 자신과 하룻밤 관계를 갖는 여자들에 대해 무척 예민하게 신경을 썼다. 장 팀장은 눈치를 살피는 김 피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면 곤란합니다.”
“알았어. 내 명예에도 먹칠 하는 일이잖아.”
장 팀장을 안심 시키려고 김 피디는 어깨를 투덕거렸다. 김 피디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사이에 장 팀장이 먼저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 안으로 들어선 장 팀장은 왠지 실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을 느꼈다. 가라오케 밴드들이 악기를 들고 나가고, 상욱과 여자파트너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상욱의 파트너가 앙칼지게 쏘아 붙였다.
“아무리 직업여성이지만 이해 해 주시면 안돼요?”
“뭐라고! 배우지 못한 것들이.......”
“제가 일부러 술을 엎지른 것이 아니잖아요?”
“미안하다고 그래야지!”
“그렇다고 점잖은 분이 욕을 하세요?”
“이 년이 누구한테 대들고 있어!”
말과 동시에 상욱의 손이 여자 파트너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철썩 소리와 함께 뺨을 얻어맞은 여자 파트너가 주저앉았다.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이 놀라고, 주저앉았던 상욱의 파트너가 파랗게 질려 발딱 일어섰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여자 파트너는 처음부터 거만한 자세로 있는 상욱이 마땅치 않았다. 상욱을 노려본 여자의 입에서 거친 말투가 흘렀다.
“왜 때려!? 권력과 돈 있는 놈들은 다 그래?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뭐라고!”
상욱이 다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돌아가도록 강하게 맞은 그녀가 뒷걸음쳤다. 그리고 짧은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허벅지 사이로 보라색 팬티가 들어나 보일 정도로 그녀는 다리를 들고 소파에 처박혔다. 그때 룸 문이 열리고 김 피디가 들어섰다. 온갖 상황에 대처하고 살아온 김 피디였다. 룸 안의 분위기를 판단한 김 피디가 얼른 상욱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여자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 이따위로 하려면 모두 나가!”
“.........”
여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룸을 나가기 시작했다. 김 피디의 호통소리를 들었는지 지배인이 들어왔다. 김 피디가 금방 환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내가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들이 버릇없이 굴었나봐. 괜찮으니 걱정 마.”
“죄송합니다. 다른 애들 들여보낼까요?”
“아니, 우리끼리 술 한 잔 할 테니 술이나 줘.”
“서비스로 드릴 테니 즐겁게 드십시오.”
지배인이 굽실거리며 룸을 나가더니 양주병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지배인은 그들에게 술을 따르며 여자들의 접대가 부실했던 점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김 피디에게 술을 받아 마신 지배인이 나가고, 상욱은 자신의 행동이 처세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과격했다는 점에 무안함을 느꼈다. 상욱이 김 피디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미안합니다. 분위기를 맞추지 못해서.”
“하하~! 이런데 애들이 모두 버릇이 없어요. 이해해 줘요.”
“이해는 뭐! 내가 어울릴 줄 몰라서 그렇지.”
“저기........괜찮다면 장 애리를 만나보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김 피디는 상욱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 빤히 쳐다보았다. 상욱은 김 피디가 갑작스럽게 제안하는 말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상욱과 시선이 마주친 장 팀장이 한 쪽 눈을 감아 보였다. 장 팀장의 눈빛에 상욱은 무엇인가 대화가 있었던 것을 의식했다.
“장 애리.......!?”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버릇없던 애들 때문에 상한 기분도 풀고, 본인도 오디션이 아닌 자리에서 오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글쎄........”
말을 더듬는 상욱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상욱은 장 팀장의 눈짓과 김 피디의 능글능글한 표정의 의미를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바쁜 일정 속에서 여자관계를 못하기도 했지만, 아내에 대한 우울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더욱이나 아직 연예계에 나오지 않은 신인이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에 그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는 술집여자들보다는 장 애리를 상대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에 만족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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