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결혼식(3부)
실업계 고등학교를 입학을 하고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아들은 가게에 나와서 아빠에게 회 뜨는 기술을 배웠다.
동시에 복 요리 자격증과 일식 요리 자격증 시험 두 가지에 꿈을 두고 있었다.
일식 자격증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동거남은 말하였지만 복 요리 자격증시험은 소문에 합격을 시키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떨어트리기 위하여 시험을 본다고 할 정도로 합격이 힘들다고 하였다.
그랬기에 회중에서 최고급 축에 든다는 복 회를 동거남은 취급을 하지 않은 아니 하지 못 하는 입장이었다.
아들은 방학이면 거의 아침부터 횟집에서 살다시피 해 가며 기술을 익혔고 이학년 여름방학 전에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2학년 학생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일식 요리자격증을 획득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덕에 동거남이자 기춘이 아빠는 기춘이가 방학을 하면 아들에게 주방을 맡기고는 낚시 여행을 떠나가도 하였고 그러면 아들과 난 숨어서 하던 자위를 밝은 곳에서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힘든 것은 할 때마다 발가락이 아닌 좆을 제 보지에 박고 싶다며 칭얼대어 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싫다고 하면 빨게라고 해 달라고 하였고 그것도 싫다고 하면 손으로 만지게라도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며 그도 싫다고 하면 보게 만이라도 해 달라고 애원을 하였지만 저는 한 결 같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건 한 마디로 인내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동거남의 좆이 제 보지 안에 들어와 방아를 찧을 때보다 비록 발가락이지만 아들의 발가락이 제 보지를 더 뜨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동거남의 좆은 제 보지에 풀칠을 겨우 하는 것이었지만 뜨겁게는 만들지 못 하였기에 전 동거남의 좆이 들어오면 아들의 좆이란 생각을 함으로서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었던 반면 아들의 발가락은 보지에 들어오지 않고 보지 털만 건들어도 제 몸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는데 그런 아들의 좆이 제 보지에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하는 저로서 아들의 좆을 거절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강한 안내심을 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었고 저는 그것을 이겨내었습니다.
“엄마 오늘 따 한 번만 잠시 넣어만 볼게”그날도 동거남은 아들이 여름방학을 시작하자 밤낚시를 떠났고 둘만 남은 집에서 아들은 침대에 걸터앉고 저는 방바닥에 앉은 채 아들의 좆을 빻고 흔들며 제 보지 안을 후비는 아들의 발가락 감각을 느끼는데 아들이 제 치마를 들치며 말하기에
“아들 이럼 이것도 안 해 넌 내 동거남의 아들이야 엄마하고 아들하고 한다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죄를 범하는 것이야”치마를 잡으며 너그러운 말투로 달래었습니다.
“엄마라고 하기는 하지만 난 엄마하고 피가 섞이지도 않았지만 아빠하고도 혼인신고도 안 한 상태니까 그건 아니잖아?”아들이 발가락으로 계속 제 보지를 후비며 말하였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니 내가 너희 아빠하고 몸을 섞고 있는 이상은 아니야”하고 말하자
“그럼 엄마가 나가면 되잖아”아들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자기 아빠하고 헤어지고 자기하고 하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너 그럼 앞으로 안 해”하며 일어서려하자
“아냐 그럼 취소할게 내가 학교 졸업하고 다른 횟집에 취직하면 어때?”아들이 어깨를 누르며 다른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건 그때 생각하자”저는 다시 앉아 아들의 좆을 입으로 빨았습니다.
이 여년 만에 가장 흥분을 하여 가장 많이 오르가즘을 느꼈던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들의 이학년 겨울방학이 시작이 되고부터는 동거남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밤낚시를 떠났고 그러면 아들과 저는 다 놓고 서로의 좆과 보지를 공략하며 즐길 수가 있었으며 설을 얼마 안 두고 동거남은 세를 들고 있던 건물 자체를 매입을 했을 정도로 횟집은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3학년 초에는 그 어렵다는 복 요리 자격증을 아들은 땄습니다.
그 자격증만으로도 동거남은 복을 취급 할 수가 있었고 복을 취급한다는 소문이 나자 우리 횟집은 미식가들로 발을 디딜 공간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동거남은 저에게 결혼을 하자고 부탁하였지만 저는 그냥 동거로 지내자고 하며 피하였습니다.
그건 제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문제는 아들이 삼학년 여름 방학 때 발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여름방학에 접어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동거남이 아들이 여름방학이 시작이 되던 날 밤 밤낚시를 떠난 것입니다.
방학과 함께 아들과 저는 먼동이 틀 때까지 다시 오르가즘의 천국을 해매였습니다.
그리고 가게로 나가 문을 열고 바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거남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위독하다는 경찰의 연락이었습니다.
아들과 저는 택시를 대절하여 연락을 한 곳으로 갔습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틀 후 동거남은 핏줄이라고는 아들 그도 형님의 아들(호적은 고쳐서 자기 아들로 입적을 시켰음)하나만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시신을 우리 횟집 근처의 장례식장으로 옮기고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물론 아들은 상주이지만 저는 사람들의 만류와 아들의 치밀한 계획 하에서 상복을 입지 못 하고 검정색 옷만 입고 빈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였고 한 줌도 안 되는 뼈 가루는 그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바닷가에 뿌림으로서 동거남과의 인연은 끝이었습니다.
아들과 긴 상의를 하였습니다.
방학이 끝나면 주방장을 들이던지 아님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올 동안 홀과 주방의 인테리어를 고쳐서 다른 업을 하다가 아들이 졸업을 하면 다시 횟집으로 변신을 시키느냐를 가지고 많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 주방장을 들여서 계속 횟집을 하자는 안이었고 주방장을 고용하여 횟집을 계속 운영하면 제가 행여 주방장하고 눈이 맞아버릴 경우가 있다면서 다른 업종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아들을 달래었지만 아들은 자가 아바의 꼬임에 빠져서 그 동안 동거를 한 것을 들먹이며 안 된다고 하는 데는 저로서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번뜩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그도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전주 출신이었는데 엄마가 해 주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의 유명하다는 콩나물국밥집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제일 앞 편에서도 잠시 화학조미료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 엄마의 경우 화학조미료라고 하면 질색을 하시기에 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모주를 만드는 솜씨는 가히 전문가 뺨을 칠 정도였습니다.
엄마를 횟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기찬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올 동안만이라고 콩나물국밥에 모주를 만들어 팔고 싶다며 요리 방법을 전수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그 비법을 전수시켜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콩나물국밥 만드는 방법은 이제 기찬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다시 횟집을 하지만 언제 다시 콩나물국밥집으로 업종을 바꿀지 몰라 전수를 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모주 만드는 방법 정도는 알려드리겠습니다.
갈근은 물에 좀 담가두었다 씻어냅니다.계피를 뺀 모든 재료를 다 넣고, 막걸리까지 30분 이상 끓입니다.일반 가게에서는 오랫동안 끓이겠지만, 집에서 그냥 먹으려면 한 30분도 너무 길게 느껴지기에 한 20분 정도만 팔팔 끓이면 됩니다.그리고 식힌 후 살얼음을 될 정도로 냉동한 모주에 계피가루를 뿌려먹는다.
물론 계피를 싫어 할 경우 넣지 않아도 됩니다.
이놈의 모주는 막걸리를 끓였기에 알코올도수도 거의 없다 시피 하기에 음주운전에 걸릴 염려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아들도 우리 엄마가 만든 콩나물국밥을 먹어보고는 그것을 업종을 전환하자고 하였습니다.
동거남이 죽고 인테리어를 고치고 보름 만에 콩나물국밥집을 오픈하였습니다.
근처에 고급 음식점은 허다하게 많았지만 허름하지만 값싸고 질 좋은 콩나물국밥집이 오픈하자 또 하나의 유명한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녁에 시장을 봐서 콩나물을 다듬고 끓이기 시작하고 새벽 손님 준비를 위하여 밥을 안치고 나면 종업원들은 퇴근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엄마하고 저 그렇게 둘만 남아 양념은 만들어 혼합을 시키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24시간 영업을 하라고 하였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없이 기찬이가 군대에서 제대만하면 그만 둘 것이기에 새벽 장사 점심 장사 저녁 장사로 구분하여 대형 가마솥에 한 솥씩만 팔면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체인점을 개설하겠다는 사람들도 생겼지만 엄마하고 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돈과는 거리가 멀었던 엄마가 돈에 눈을 뜨기 시작 한 것입니다.
한 달 간 저에게 콩나물국밥 만드는 법을 전수 시키고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시험을 본 결과 제 솜씨도 거의 엄마 수준에 올라있었습니다.
돈에 눈을 뜬 엄마도 엄마 집 근처에다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직접 몸으로 돕고 싶었지만 가게를 닫을 수가 없기에 저는 그 동안 모았던 돈으로 엄마 가게를 얻어주고 인테리어를 해 드림으로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언니와 함께 콩나물국밥집을 운영하는데 노는 날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서 24시강 영업 체제로 전환하여 밤과 새벽은 엄마가 카운터를 맡고 콩나물국밥의 간을 보고 중요한 부분만 직접하며 낮에는 언니가 맡아서 엄마에게 배운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데 올 가을 추석만 지나면 형부도 그 대열에 합류를 할 것이란 소식도 들었습니다.
새벽 장사 점심 장사 저녁 장사로 구분하여 장사를 한 것은 혼자 몸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기찬이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를 계속 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새벽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집에서 저는 기찬이와 함께 희열의 도가니에 빠져 들어야 하였고 새벽 장사와 점심 장사 사이 그리고 점심 장사와 저녁 장사 사이에 콩나물국밥을 만드는 일도 하긴 하였지만 그 보다는 저녁 장사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가 기찬이와 행할 열락의 시간을 대비하여 미리 잠을 좀 자두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기찬이 아빠가 살아생전에는 기찬이 아빠가 집에 없더라도 뭔가에 ?기는 기분이라 빨리 사정을 하였지만 기찬이 아빠가 죽은 후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를 아니하였던지 기찬이는 아주 느긋하게 제 보지를 공략을 하면서도 사정은 갈수록 늦어졌습니다.
그만큼 제 보지로 느끼는 오르가즘의 횟수도 많아진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전 동거남이자 기찬이 아빠가 죽었지만 기찬이의 끈질긴 애원에도 보지에 좆을 박는 것은 물론이고 만지기는커녕 보지를 눈으로 보지도 못 하게 하였습니다.
군대에 다녀올 동안 몸을 정갈하게 하여 떳떳한 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저의 그런 말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하자고 하더니 날이 갈수록 기찬이는 점점 단념을 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하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구대 다녀와서 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군대 입대 바로 전날 사고가 생길 뻔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평소 잘 먹지 못 하던 술을 작별주란 핑계로 먹이는 통에 먹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훈련소까지 데려다 주려는 마음에서 가게 앞문에는 22일 저녁부터 23일 저녁까지 영업 안 합니다, 라는 패찰을 달아놓고 우리 둘은 집에서 오붓하게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물론 기찬이는 완전히 알몸이었고 저는 노팬티차림에 치마만 두른 상태였습니다.
석별의 아쉬움 때문에 저는 침대 밑에 앉아서 기찬이 발가락의 후빔을 받으며 좆을 빨고 흔들었지만 눈물이 기찬이 좆을 얼룩지게 만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빨고 흔들었습니다.
가찬이가 맥주를 잔에 따라주면 빨기를 멈추고 마셨습니다.
석별을 해야 한다는 아쉬운 마음은 기찬이의 좆 물이 나오고도 계속 삼키며 빨고 흔들었고 그러면 다시 기찬이는 맥주를 저에게 주었고 몇 잔을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이 가물가물하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치마가 들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 돼!”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놀라 눈을 떴을 때는 기찬이가 손바닥으로 제 보지 둔덕을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밀쳐버렸습니다.
“약속 잊었어!”고함을 질렀습니다.
“어....엄마 미안해 취중에 그만 나도 모르게.......”기찬이가 말을 흐리며 일어났습니다.
“의도가 불순해 믿고 함께 안고 자려고 했는데 취소야 어서 네 방으로 가”기찬이의 옷을 거실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 조용하게 잘게 그만 용서 해 줘”기찬이가 무릎을 꿇으며 애원을 하였습니다.
“아니 약속 지키지 아니한 벌로 혼자 자”전 기어이 기찬이를 ?아내고는 문을 걸어버렸습니다.
“기찬아 나 한 숨도 못 잤다. 넌 잘 잤니?”새벽에 아들 방으로 가서 알몸의 좆을 만지며 물었습니다.
“.............미안해 엄마”기찬이가 겨우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게 마지막이겠지?”웃으며 말하고는 엎드려 아들의 좆을 입으로 넣고 빨면서 흔들었습니다.
“엄마 나도”기찬이가 침대에서 허리를 들며 말하자
“그럼 그렇게 하자”하고 말하면서 좆을 입에서 때자 기찬이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저는 가랑이를 벌리고 침대 밑에 앉아서 다시 기찬이의 좆을 입에 넣고 빨면서 흔들기 시작하였으나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의 안타까움에 복받쳐서 제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은 기찬이 좆 털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는 침대시트를 적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울면서 서로의 자위를 거의 한 시간 이상 도왔고 전 두 번의 좆 물을 삼켰으며 끝나고 일어섰을 때는 제가 앉았던 자리는 마치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으나 놀랍게도 기찬이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일어서서 침대 밑으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엎드렸고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그 물을 모조리 핥아서 삼켜버렸습니다.
그게 기찬이와 군대 가기 전의 저의 마지막 자위였습니다.
기찬이는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는 아주 좋은 곳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얼마 없는 복 요리 자격증을 가진 것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모 사단의 최고급 장교들만이 사용하는 식당으로 배치를 받은 것입니다.
그 사단은 사단장부터가 회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복 회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복 회를 즐겼습니다.
일주일이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보급 병이 수산시장으로 가서 복이며 고급 횟감을 사 가지고 오면 기찬이는 회를 뜨고 매운탕 혹은 복국을 끓이는 일만 하였답니다.
나중엔 횟감을 직접 사는 일까지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푼돈도 벌었기에 갈 때도 비행기를 이용하였고 올 때도 비행기를 이용하였지만 저에게 손을 내밀기는커녕 오히려 저에게 선물을 사 오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시간은 기찬이 마음대로였고 힘들다는 유격 훈련도 한 번 받지 않았을 정도로 기찬이는 편한 생활을 하였지만 반면 휴가는 사단장이 지정한 날에만 가능하였답니다.
그만큼 사단장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기찬이가 휴가를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기찬이가 휴가를 나오면 저는 가게에 가서 콩나물국밥의 간을 맞추고 나면 돈이고 뭐고 필요 없이 집으로 와서는 기찬이의 자위도 돕는 일도 하였지만 기찬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기찬이의 제대를 얼마 앞두고 전 콩나물국밥집의 간판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가게의 인테리어를 횟집으로 바꾸는 동시에 평소에 마음먹었던 것을 한 가지 실행하였습니다.(그건 여기에선 비밀로 합니다)팔아버린 회 수송 차량도 새 것으로 한 대 구입하였습니다.
기찬이가 제대를 하고 와서는 몇 칠은 집에서 쉬게 하였습니다.
영업을 시작하면 놀 날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게의 인테리어를 횟집으로 바꾸고 간판도 새로 달았지만 상호를 기찬이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감동의 물결을 치게 하려는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몇 칠을 쉬면서 자위를 도왔지만 저는 제 보지에 접근을 시키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달라진 변화에 처음에는 무척 당황해 하였지만 기찬이는 참아주었습니다.
“엄마 나랑 결혼 안 할래?”제대하고 이틀이 지난 새벽 기찬이의 자위를 돕는데 기찬이가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다렸던 말이었는지 모를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고 천천히 결정하자”조용하게 타이르며 전 기찬이 좆을 빨고 흔들었으며
“그래 그럼 그렇게 해”기찬이도 순순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제대 모름 후 가게 오픈을 하기 위하여 기찬이로부터 인테리어에 대한 심사부터 받고 철학관에 가서 오픈 날짜를 준비하고 날짜가 정하여 지면 그 전에 오픈 기념품도 준비를 해야 하고 또 제일 중요한 횟감을 사러 가야하였기에 기찬이와 함께 가게로 갔습니다.
<기찬 횟집>우리 가게 상호였습니다.
손님들 입장에서는 맛이 기찬 횟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기찬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기찬이가 간판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며 그릇들을 보고 모두 만족해하였습니다.
철학관에 들렀더니 이번에는 기찬이가 절를 놀래게 만들었습니다.
사장 이름을 묻자 자기 이름을 대더니 제 이름을 대며 동업이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제가 기찬에에게 감격의 쓰나미를 선물하려다가 되레 제가 선물을 받은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철학관의 사람은 상호를 짓기 위하여 왔느냐고 묻기에 아차 싶어 하는데(철학관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지웠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무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기찬이가 상호는 이미 <기찬 횟집>으로 정하고 간판까지 달았다고 하자 그 철학관 남자는 다시 저와 기찬이의 사주를 물었으나 기찬이는 생년월일까지는 알았지만 시를 몰랐으나 전에 동거남으로부터 들었던 시를 기억하고 알려주자 제 사주도 묻기에 답하였더니 이름을 풀고 또 사주로 뭔가를 계산을 하는 것 같더니 둘이 동업을 하는데 사용하는 상호로서 아주 적합하다고 하면서도 기찬이와 제 이른 그리고 사주를 짚으며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날짜를 잡아주고도 계속 갸우뚱하기에 불안한 나머지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철학관 사주쟁이는 놀랍게도 나이가 17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이상하게 부부 운이 있다면 다시 보고 이야기 하겠다고 하더니 다른 종이에 기찬이의 이름과 사주 그리고 제 이름과 사주를 베끼더니 획수도 새로 계산하여 적었고 사주 옆에 한문으로 木 水 金 등의 글을 쓰고는 위에는 무슨 알아보지도 못 할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밑에도 알아보지도 못 할 한문들로 꾸며진 책을(나중에 안 일이지만 역학 책이었음)펼치고 짚으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무릎을 탁 치며 사주쟁이 자기 자신이 거의 30년 이상을 궁합을 봐 왔지만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은 보지 못 했노라고 하며 둘이 혹시 결혼을 하기로 한 사이가 아니냐고 묻기에 전 아니라고 하였지만 제가 아뇨 라고 하는 대답과 동시에 기찬이 입에서는 놀랍게도 예 라고 말함으로서 다시 한 번 더 기찬이는 저를 놀래게 만들었습니다.
사주쟁이는 기찬이의 말만 믿고는 개업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결혼식이 급하다고 하였고 그러자 기찬이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주쟁이에게 결혼식 날짜와 시를 잡아주고 개업 날짜도 잡아달라고 하였으며 본의 아니게 저는 생가도 못 하였던 결혼식 날짜와 시 그리고 개업 날짜까지 받고 철학관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기찬이 아니 그이의 고집을 저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 의견은 들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개업 준비를 하기는커녕 결혼식장을 잡으러 다니느라 개업 준비는 뒷전이었습니다.
사주쟁이가 결혼식 날짜를 앞에 하고 개업식을 뒤로 그도 거의 3주 이상 뒤로 잡으려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부린 제 고집으로 결혼식과 개업 날짜는 일주일로 당겼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개업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장을 잡으러 눈에 불 켜고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결혼식장을 잡으려면 적어도 6개월 이전에 예약을 해도 될지 말지 하는 마당에 고작 열흘을 앞에 둔 상황에 결혼식장을 구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도 엉겁결에 날짜를 받기는 받았지만 제가 결혼을 하겠다고 승낙도 안 한 마당에 이게 말이나 될법한 일입니까.
그건 다음으로 치고라도 군대 가기 전 아니 최근으로 치면 마지막 휴가를 와서 제가 그이의 자위를 돕는 동안 그이가 예전처럼 9놈의 강간범들과 동거남으로부터 더러워 질 대로 더러워 진 보지였기에 지금은 그이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동거남이 죽기 전처럼 아들이라고 부르던 기찬에에게 주기를 꺼려하며 발가락으로 후비게 하였지 만지기는커녕 보지도 못 하게 한 보지에 결혼 날짜까지 받은 사이인데 동침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는 데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동거남이 죽기 전부터 기찬이의 자위를 돕다가 저도 모르게 기찬이에게 발가락으로 후비는 정도까지는 양보한 사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여 기찬이가 저와 꼭 결혼을 하고 저를 아내로 맡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적어도 프러포즈 정도는 기본이고 예의가 아닌가요?
하지만 기찬이는 막무가내로 덤비며 덮치려 들었고 저는 그런 기찬이를 달래기에 힘들었습니다.
또 동시에 전 그이를 설득하였습니다.
꼭 나와 결혼식을 하려면 날 욕 먹이는 짓은 피하라고 말입니다.
또 생각을 해 보세요.
법적으로는 결혼식을 한 번도 올리지 아니하였기에 깨끗한 처녀 몸이지만 도덕적으로 본다면 저란 년은 기찬이가 아빠라고 불렀던 작은 아빠하고 살을 맞대고 살았던 여자가 아닙니까.
그런 년이 어찌 17살이나 아린 기찬이와 백주의 대낮에 하객들을(얼마 안 되겠지만)모셔 놓고 결혼식을 올린단 말입니까.
울며불며 설득하며 회유를 하였습니다.
작은 암자나 사찰에서 정화수 앞에 놓고 간단하게 서로 다짐만 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자고 말입니다.
사주쟁이가 잡아준 결혼식 날짜를 5일 앞두고 우리는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암자에서 하기로 하고 신랑신부 측 친척 하객은 부르지 않기로 하였고 우인은 부르기로 하였지만 강간을 당하고 학교는 물론이고 사회와 단절하고 살아온 저에게 우인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저는 예전에 일하였던 식당들에서 일하던 동료 몇 명하고 횟집에서 함께 일하던 몇 명만(그녀들은 동거남이 살아생전 같이 일을 할 때 손발이 척척 맡아 떨어졌던 사이라 이번에 개업을 하면서 같이 일하기로 한 사이였음)초대하기로 하였고 그이는 학고 친구들과 자기에게 많은 신경을 써 주었던 선생님 몇 분만 초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합의를 하고 나자 집요하게 안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죽으면 죽었지 안 된다고 하였으며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피로연을 한 다음 인근의 호텔에서 진정한 초야를 치르는 것이 제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설득을 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합의를 하였지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 주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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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입니다.
에어컨이 마누라나 애인보다도 좋다는 계절이기도 하고요.
무더위에 무기력증까지 겹친 저는 그 어느 해보다도 더 힘든 하루하루입니다.
부디 여러분들만이라도 상쾌한 여름 보냈으면 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입학을 하고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아들은 가게에 나와서 아빠에게 회 뜨는 기술을 배웠다.
동시에 복 요리 자격증과 일식 요리 자격증 시험 두 가지에 꿈을 두고 있었다.
일식 자격증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동거남은 말하였지만 복 요리 자격증시험은 소문에 합격을 시키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떨어트리기 위하여 시험을 본다고 할 정도로 합격이 힘들다고 하였다.
그랬기에 회중에서 최고급 축에 든다는 복 회를 동거남은 취급을 하지 않은 아니 하지 못 하는 입장이었다.
아들은 방학이면 거의 아침부터 횟집에서 살다시피 해 가며 기술을 익혔고 이학년 여름방학 전에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2학년 학생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일식 요리자격증을 획득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덕에 동거남이자 기춘이 아빠는 기춘이가 방학을 하면 아들에게 주방을 맡기고는 낚시 여행을 떠나가도 하였고 그러면 아들과 난 숨어서 하던 자위를 밝은 곳에서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힘든 것은 할 때마다 발가락이 아닌 좆을 제 보지에 박고 싶다며 칭얼대어 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싫다고 하면 빨게라고 해 달라고 하였고 그것도 싫다고 하면 손으로 만지게라도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며 그도 싫다고 하면 보게 만이라도 해 달라고 애원을 하였지만 저는 한 결 같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건 한 마디로 인내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동거남의 좆이 제 보지 안에 들어와 방아를 찧을 때보다 비록 발가락이지만 아들의 발가락이 제 보지를 더 뜨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동거남의 좆은 제 보지에 풀칠을 겨우 하는 것이었지만 뜨겁게는 만들지 못 하였기에 전 동거남의 좆이 들어오면 아들의 좆이란 생각을 함으로서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었던 반면 아들의 발가락은 보지에 들어오지 않고 보지 털만 건들어도 제 몸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는데 그런 아들의 좆이 제 보지에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하는 저로서 아들의 좆을 거절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강한 안내심을 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었고 저는 그것을 이겨내었습니다.
“엄마 오늘 따 한 번만 잠시 넣어만 볼게”그날도 동거남은 아들이 여름방학을 시작하자 밤낚시를 떠났고 둘만 남은 집에서 아들은 침대에 걸터앉고 저는 방바닥에 앉은 채 아들의 좆을 빻고 흔들며 제 보지 안을 후비는 아들의 발가락 감각을 느끼는데 아들이 제 치마를 들치며 말하기에
“아들 이럼 이것도 안 해 넌 내 동거남의 아들이야 엄마하고 아들하고 한다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죄를 범하는 것이야”치마를 잡으며 너그러운 말투로 달래었습니다.
“엄마라고 하기는 하지만 난 엄마하고 피가 섞이지도 않았지만 아빠하고도 혼인신고도 안 한 상태니까 그건 아니잖아?”아들이 발가락으로 계속 제 보지를 후비며 말하였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니 내가 너희 아빠하고 몸을 섞고 있는 이상은 아니야”하고 말하자
“그럼 엄마가 나가면 되잖아”아들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자기 아빠하고 헤어지고 자기하고 하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너 그럼 앞으로 안 해”하며 일어서려하자
“아냐 그럼 취소할게 내가 학교 졸업하고 다른 횟집에 취직하면 어때?”아들이 어깨를 누르며 다른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건 그때 생각하자”저는 다시 앉아 아들의 좆을 입으로 빨았습니다.
이 여년 만에 가장 흥분을 하여 가장 많이 오르가즘을 느꼈던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들의 이학년 겨울방학이 시작이 되고부터는 동거남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밤낚시를 떠났고 그러면 아들과 저는 다 놓고 서로의 좆과 보지를 공략하며 즐길 수가 있었으며 설을 얼마 안 두고 동거남은 세를 들고 있던 건물 자체를 매입을 했을 정도로 횟집은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3학년 초에는 그 어렵다는 복 요리 자격증을 아들은 땄습니다.
그 자격증만으로도 동거남은 복을 취급 할 수가 있었고 복을 취급한다는 소문이 나자 우리 횟집은 미식가들로 발을 디딜 공간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동거남은 저에게 결혼을 하자고 부탁하였지만 저는 그냥 동거로 지내자고 하며 피하였습니다.
그건 제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문제는 아들이 삼학년 여름 방학 때 발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여름방학에 접어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동거남이 아들이 여름방학이 시작이 되던 날 밤 밤낚시를 떠난 것입니다.
방학과 함께 아들과 저는 먼동이 틀 때까지 다시 오르가즘의 천국을 해매였습니다.
그리고 가게로 나가 문을 열고 바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거남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위독하다는 경찰의 연락이었습니다.
아들과 저는 택시를 대절하여 연락을 한 곳으로 갔습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틀 후 동거남은 핏줄이라고는 아들 그도 형님의 아들(호적은 고쳐서 자기 아들로 입적을 시켰음)하나만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시신을 우리 횟집 근처의 장례식장으로 옮기고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물론 아들은 상주이지만 저는 사람들의 만류와 아들의 치밀한 계획 하에서 상복을 입지 못 하고 검정색 옷만 입고 빈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였고 한 줌도 안 되는 뼈 가루는 그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바닷가에 뿌림으로서 동거남과의 인연은 끝이었습니다.
아들과 긴 상의를 하였습니다.
방학이 끝나면 주방장을 들이던지 아님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올 동안 홀과 주방의 인테리어를 고쳐서 다른 업을 하다가 아들이 졸업을 하면 다시 횟집으로 변신을 시키느냐를 가지고 많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 주방장을 들여서 계속 횟집을 하자는 안이었고 주방장을 고용하여 횟집을 계속 운영하면 제가 행여 주방장하고 눈이 맞아버릴 경우가 있다면서 다른 업종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아들을 달래었지만 아들은 자가 아바의 꼬임에 빠져서 그 동안 동거를 한 것을 들먹이며 안 된다고 하는 데는 저로서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번뜩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그도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전주 출신이었는데 엄마가 해 주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의 유명하다는 콩나물국밥집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제일 앞 편에서도 잠시 화학조미료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 엄마의 경우 화학조미료라고 하면 질색을 하시기에 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모주를 만드는 솜씨는 가히 전문가 뺨을 칠 정도였습니다.
엄마를 횟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기찬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올 동안만이라고 콩나물국밥에 모주를 만들어 팔고 싶다며 요리 방법을 전수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그 비법을 전수시켜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콩나물국밥 만드는 방법은 이제 기찬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다시 횟집을 하지만 언제 다시 콩나물국밥집으로 업종을 바꿀지 몰라 전수를 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모주 만드는 방법 정도는 알려드리겠습니다.
갈근은 물에 좀 담가두었다 씻어냅니다.계피를 뺀 모든 재료를 다 넣고, 막걸리까지 30분 이상 끓입니다.일반 가게에서는 오랫동안 끓이겠지만, 집에서 그냥 먹으려면 한 30분도 너무 길게 느껴지기에 한 20분 정도만 팔팔 끓이면 됩니다.그리고 식힌 후 살얼음을 될 정도로 냉동한 모주에 계피가루를 뿌려먹는다.
물론 계피를 싫어 할 경우 넣지 않아도 됩니다.
이놈의 모주는 막걸리를 끓였기에 알코올도수도 거의 없다 시피 하기에 음주운전에 걸릴 염려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아들도 우리 엄마가 만든 콩나물국밥을 먹어보고는 그것을 업종을 전환하자고 하였습니다.
동거남이 죽고 인테리어를 고치고 보름 만에 콩나물국밥집을 오픈하였습니다.
근처에 고급 음식점은 허다하게 많았지만 허름하지만 값싸고 질 좋은 콩나물국밥집이 오픈하자 또 하나의 유명한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녁에 시장을 봐서 콩나물을 다듬고 끓이기 시작하고 새벽 손님 준비를 위하여 밥을 안치고 나면 종업원들은 퇴근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엄마하고 저 그렇게 둘만 남아 양념은 만들어 혼합을 시키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24시간 영업을 하라고 하였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없이 기찬이가 군대에서 제대만하면 그만 둘 것이기에 새벽 장사 점심 장사 저녁 장사로 구분하여 대형 가마솥에 한 솥씩만 팔면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체인점을 개설하겠다는 사람들도 생겼지만 엄마하고 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돈과는 거리가 멀었던 엄마가 돈에 눈을 뜨기 시작 한 것입니다.
한 달 간 저에게 콩나물국밥 만드는 법을 전수 시키고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시험을 본 결과 제 솜씨도 거의 엄마 수준에 올라있었습니다.
돈에 눈을 뜬 엄마도 엄마 집 근처에다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직접 몸으로 돕고 싶었지만 가게를 닫을 수가 없기에 저는 그 동안 모았던 돈으로 엄마 가게를 얻어주고 인테리어를 해 드림으로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언니와 함께 콩나물국밥집을 운영하는데 노는 날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서 24시강 영업 체제로 전환하여 밤과 새벽은 엄마가 카운터를 맡고 콩나물국밥의 간을 보고 중요한 부분만 직접하며 낮에는 언니가 맡아서 엄마에게 배운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데 올 가을 추석만 지나면 형부도 그 대열에 합류를 할 것이란 소식도 들었습니다.
새벽 장사 점심 장사 저녁 장사로 구분하여 장사를 한 것은 혼자 몸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기찬이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를 계속 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새벽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집에서 저는 기찬이와 함께 희열의 도가니에 빠져 들어야 하였고 새벽 장사와 점심 장사 사이 그리고 점심 장사와 저녁 장사 사이에 콩나물국밥을 만드는 일도 하긴 하였지만 그 보다는 저녁 장사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가 기찬이와 행할 열락의 시간을 대비하여 미리 잠을 좀 자두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기찬이 아빠가 살아생전에는 기찬이 아빠가 집에 없더라도 뭔가에 ?기는 기분이라 빨리 사정을 하였지만 기찬이 아빠가 죽은 후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를 아니하였던지 기찬이는 아주 느긋하게 제 보지를 공략을 하면서도 사정은 갈수록 늦어졌습니다.
그만큼 제 보지로 느끼는 오르가즘의 횟수도 많아진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전 동거남이자 기찬이 아빠가 죽었지만 기찬이의 끈질긴 애원에도 보지에 좆을 박는 것은 물론이고 만지기는커녕 보지를 눈으로 보지도 못 하게 하였습니다.
군대에 다녀올 동안 몸을 정갈하게 하여 떳떳한 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저의 그런 말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하자고 하더니 날이 갈수록 기찬이는 점점 단념을 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하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구대 다녀와서 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군대 입대 바로 전날 사고가 생길 뻔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평소 잘 먹지 못 하던 술을 작별주란 핑계로 먹이는 통에 먹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훈련소까지 데려다 주려는 마음에서 가게 앞문에는 22일 저녁부터 23일 저녁까지 영업 안 합니다, 라는 패찰을 달아놓고 우리 둘은 집에서 오붓하게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물론 기찬이는 완전히 알몸이었고 저는 노팬티차림에 치마만 두른 상태였습니다.
석별의 아쉬움 때문에 저는 침대 밑에 앉아서 기찬이 발가락의 후빔을 받으며 좆을 빨고 흔들었지만 눈물이 기찬이 좆을 얼룩지게 만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빨고 흔들었습니다.
가찬이가 맥주를 잔에 따라주면 빨기를 멈추고 마셨습니다.
석별을 해야 한다는 아쉬운 마음은 기찬이의 좆 물이 나오고도 계속 삼키며 빨고 흔들었고 그러면 다시 기찬이는 맥주를 저에게 주었고 몇 잔을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이 가물가물하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치마가 들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 돼!”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놀라 눈을 떴을 때는 기찬이가 손바닥으로 제 보지 둔덕을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밀쳐버렸습니다.
“약속 잊었어!”고함을 질렀습니다.
“어....엄마 미안해 취중에 그만 나도 모르게.......”기찬이가 말을 흐리며 일어났습니다.
“의도가 불순해 믿고 함께 안고 자려고 했는데 취소야 어서 네 방으로 가”기찬이의 옷을 거실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 조용하게 잘게 그만 용서 해 줘”기찬이가 무릎을 꿇으며 애원을 하였습니다.
“아니 약속 지키지 아니한 벌로 혼자 자”전 기어이 기찬이를 ?아내고는 문을 걸어버렸습니다.
“기찬아 나 한 숨도 못 잤다. 넌 잘 잤니?”새벽에 아들 방으로 가서 알몸의 좆을 만지며 물었습니다.
“.............미안해 엄마”기찬이가 겨우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게 마지막이겠지?”웃으며 말하고는 엎드려 아들의 좆을 입으로 넣고 빨면서 흔들었습니다.
“엄마 나도”기찬이가 침대에서 허리를 들며 말하자
“그럼 그렇게 하자”하고 말하면서 좆을 입에서 때자 기찬이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저는 가랑이를 벌리고 침대 밑에 앉아서 다시 기찬이의 좆을 입에 넣고 빨면서 흔들기 시작하였으나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의 안타까움에 복받쳐서 제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은 기찬이 좆 털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는 침대시트를 적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울면서 서로의 자위를 거의 한 시간 이상 도왔고 전 두 번의 좆 물을 삼켰으며 끝나고 일어섰을 때는 제가 앉았던 자리는 마치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으나 놀랍게도 기찬이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일어서서 침대 밑으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엎드렸고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그 물을 모조리 핥아서 삼켜버렸습니다.
그게 기찬이와 군대 가기 전의 저의 마지막 자위였습니다.
기찬이는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는 아주 좋은 곳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얼마 없는 복 요리 자격증을 가진 것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모 사단의 최고급 장교들만이 사용하는 식당으로 배치를 받은 것입니다.
그 사단은 사단장부터가 회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복 회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복 회를 즐겼습니다.
일주일이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보급 병이 수산시장으로 가서 복이며 고급 횟감을 사 가지고 오면 기찬이는 회를 뜨고 매운탕 혹은 복국을 끓이는 일만 하였답니다.
나중엔 횟감을 직접 사는 일까지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푼돈도 벌었기에 갈 때도 비행기를 이용하였고 올 때도 비행기를 이용하였지만 저에게 손을 내밀기는커녕 오히려 저에게 선물을 사 오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시간은 기찬이 마음대로였고 힘들다는 유격 훈련도 한 번 받지 않았을 정도로 기찬이는 편한 생활을 하였지만 반면 휴가는 사단장이 지정한 날에만 가능하였답니다.
그만큼 사단장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기찬이가 휴가를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기찬이가 휴가를 나오면 저는 가게에 가서 콩나물국밥의 간을 맞추고 나면 돈이고 뭐고 필요 없이 집으로 와서는 기찬이의 자위도 돕는 일도 하였지만 기찬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기찬이의 제대를 얼마 앞두고 전 콩나물국밥집의 간판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가게의 인테리어를 횟집으로 바꾸는 동시에 평소에 마음먹었던 것을 한 가지 실행하였습니다.(그건 여기에선 비밀로 합니다)팔아버린 회 수송 차량도 새 것으로 한 대 구입하였습니다.
기찬이가 제대를 하고 와서는 몇 칠은 집에서 쉬게 하였습니다.
영업을 시작하면 놀 날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게의 인테리어를 횟집으로 바꾸고 간판도 새로 달았지만 상호를 기찬이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감동의 물결을 치게 하려는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몇 칠을 쉬면서 자위를 도왔지만 저는 제 보지에 접근을 시키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달라진 변화에 처음에는 무척 당황해 하였지만 기찬이는 참아주었습니다.
“엄마 나랑 결혼 안 할래?”제대하고 이틀이 지난 새벽 기찬이의 자위를 돕는데 기찬이가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다렸던 말이었는지 모를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고 천천히 결정하자”조용하게 타이르며 전 기찬이 좆을 빨고 흔들었으며
“그래 그럼 그렇게 해”기찬이도 순순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제대 모름 후 가게 오픈을 하기 위하여 기찬이로부터 인테리어에 대한 심사부터 받고 철학관에 가서 오픈 날짜를 준비하고 날짜가 정하여 지면 그 전에 오픈 기념품도 준비를 해야 하고 또 제일 중요한 횟감을 사러 가야하였기에 기찬이와 함께 가게로 갔습니다.
<기찬 횟집>우리 가게 상호였습니다.
손님들 입장에서는 맛이 기찬 횟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기찬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기찬이가 간판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며 그릇들을 보고 모두 만족해하였습니다.
철학관에 들렀더니 이번에는 기찬이가 절를 놀래게 만들었습니다.
사장 이름을 묻자 자기 이름을 대더니 제 이름을 대며 동업이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제가 기찬에에게 감격의 쓰나미를 선물하려다가 되레 제가 선물을 받은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철학관의 사람은 상호를 짓기 위하여 왔느냐고 묻기에 아차 싶어 하는데(철학관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지웠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무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기찬이가 상호는 이미 <기찬 횟집>으로 정하고 간판까지 달았다고 하자 그 철학관 남자는 다시 저와 기찬이의 사주를 물었으나 기찬이는 생년월일까지는 알았지만 시를 몰랐으나 전에 동거남으로부터 들었던 시를 기억하고 알려주자 제 사주도 묻기에 답하였더니 이름을 풀고 또 사주로 뭔가를 계산을 하는 것 같더니 둘이 동업을 하는데 사용하는 상호로서 아주 적합하다고 하면서도 기찬이와 제 이른 그리고 사주를 짚으며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날짜를 잡아주고도 계속 갸우뚱하기에 불안한 나머지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철학관 사주쟁이는 놀랍게도 나이가 17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이상하게 부부 운이 있다면 다시 보고 이야기 하겠다고 하더니 다른 종이에 기찬이의 이름과 사주 그리고 제 이름과 사주를 베끼더니 획수도 새로 계산하여 적었고 사주 옆에 한문으로 木 水 金 등의 글을 쓰고는 위에는 무슨 알아보지도 못 할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밑에도 알아보지도 못 할 한문들로 꾸며진 책을(나중에 안 일이지만 역학 책이었음)펼치고 짚으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무릎을 탁 치며 사주쟁이 자기 자신이 거의 30년 이상을 궁합을 봐 왔지만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은 보지 못 했노라고 하며 둘이 혹시 결혼을 하기로 한 사이가 아니냐고 묻기에 전 아니라고 하였지만 제가 아뇨 라고 하는 대답과 동시에 기찬이 입에서는 놀랍게도 예 라고 말함으로서 다시 한 번 더 기찬이는 저를 놀래게 만들었습니다.
사주쟁이는 기찬이의 말만 믿고는 개업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결혼식이 급하다고 하였고 그러자 기찬이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주쟁이에게 결혼식 날짜와 시를 잡아주고 개업 날짜도 잡아달라고 하였으며 본의 아니게 저는 생가도 못 하였던 결혼식 날짜와 시 그리고 개업 날짜까지 받고 철학관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기찬이 아니 그이의 고집을 저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 의견은 들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개업 준비를 하기는커녕 결혼식장을 잡으러 다니느라 개업 준비는 뒷전이었습니다.
사주쟁이가 결혼식 날짜를 앞에 하고 개업식을 뒤로 그도 거의 3주 이상 뒤로 잡으려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부린 제 고집으로 결혼식과 개업 날짜는 일주일로 당겼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개업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장을 잡으러 눈에 불 켜고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결혼식장을 잡으려면 적어도 6개월 이전에 예약을 해도 될지 말지 하는 마당에 고작 열흘을 앞에 둔 상황에 결혼식장을 구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도 엉겁결에 날짜를 받기는 받았지만 제가 결혼을 하겠다고 승낙도 안 한 마당에 이게 말이나 될법한 일입니까.
그건 다음으로 치고라도 군대 가기 전 아니 최근으로 치면 마지막 휴가를 와서 제가 그이의 자위를 돕는 동안 그이가 예전처럼 9놈의 강간범들과 동거남으로부터 더러워 질 대로 더러워 진 보지였기에 지금은 그이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동거남이 죽기 전처럼 아들이라고 부르던 기찬에에게 주기를 꺼려하며 발가락으로 후비게 하였지 만지기는커녕 보지도 못 하게 한 보지에 결혼 날짜까지 받은 사이인데 동침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는 데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동거남이 죽기 전부터 기찬이의 자위를 돕다가 저도 모르게 기찬이에게 발가락으로 후비는 정도까지는 양보한 사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여 기찬이가 저와 꼭 결혼을 하고 저를 아내로 맡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적어도 프러포즈 정도는 기본이고 예의가 아닌가요?
하지만 기찬이는 막무가내로 덤비며 덮치려 들었고 저는 그런 기찬이를 달래기에 힘들었습니다.
또 동시에 전 그이를 설득하였습니다.
꼭 나와 결혼식을 하려면 날 욕 먹이는 짓은 피하라고 말입니다.
또 생각을 해 보세요.
법적으로는 결혼식을 한 번도 올리지 아니하였기에 깨끗한 처녀 몸이지만 도덕적으로 본다면 저란 년은 기찬이가 아빠라고 불렀던 작은 아빠하고 살을 맞대고 살았던 여자가 아닙니까.
그런 년이 어찌 17살이나 아린 기찬이와 백주의 대낮에 하객들을(얼마 안 되겠지만)모셔 놓고 결혼식을 올린단 말입니까.
울며불며 설득하며 회유를 하였습니다.
작은 암자나 사찰에서 정화수 앞에 놓고 간단하게 서로 다짐만 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자고 말입니다.
사주쟁이가 잡아준 결혼식 날짜를 5일 앞두고 우리는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암자에서 하기로 하고 신랑신부 측 친척 하객은 부르지 않기로 하였고 우인은 부르기로 하였지만 강간을 당하고 학교는 물론이고 사회와 단절하고 살아온 저에게 우인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저는 예전에 일하였던 식당들에서 일하던 동료 몇 명하고 횟집에서 함께 일하던 몇 명만(그녀들은 동거남이 살아생전 같이 일을 할 때 손발이 척척 맡아 떨어졌던 사이라 이번에 개업을 하면서 같이 일하기로 한 사이였음)초대하기로 하였고 그이는 학고 친구들과 자기에게 많은 신경을 써 주었던 선생님 몇 분만 초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합의를 하고 나자 집요하게 안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죽으면 죽었지 안 된다고 하였으며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피로연을 한 다음 인근의 호텔에서 진정한 초야를 치르는 것이 제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설득을 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합의를 하였지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 주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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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입니다.
에어컨이 마누라나 애인보다도 좋다는 계절이기도 하고요.
무더위에 무기력증까지 겹친 저는 그 어느 해보다도 더 힘든 하루하루입니다.
부디 여러분들만이라도 상쾌한 여름 보냈으면 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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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9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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