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아, 차돌아 [제61부]
황산으로 가는 버스.
그 버스의 뒤쪽 차창 가에 얼굴을 두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차돌이가 보인다.
이제 서서히 날이 밝아오려는데 이른 아침부터 황산엔 왜 가는 것일까.
날이 어두컴컴할 무렵 도망치다시피 나온 차돌 이는 황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었다.
지금쯤 양양은 어찌하고 있을까,
우려도 되고 마음도 아파온다.
이제껏 많은 여자를 접하면서도 강간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양양과는 순간의 충동으로 상대방의 의사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섹스를 행했으니...양양도 그렇지만 선생님을 대할 면목도 없었다.
자기를 위해 평생을 수집하고 연구한 모든 것을 개방하고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셈이 되었다.
미안하다는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겨두고 집을 살짝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양양의 얼굴을 대면할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배은망덕하게도 양양에게 그러한 짓을 하고도 선생님이 일러주신 곳을 찾아가고 있으니 조금 더 자제하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나무라며 침통한 표정으로 있는 것이다.
차창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도 간혹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앞에 보이는 정경도 모든 것들을 보고 있어도 느낌이 없다.
밖을 내다보고는 있었지만 눈엔 울고 있을 양양의 모습만 떠오르고 있다.
[휴우....내가 어쩌다가......이 일을 어찌해야하나.....휴우....]
깊은 한숨만 입에서 토해져 나올 뿐이다.
이젠 도리가 없다.
나중에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하더라도 지금은 잊자.
내가 못나고 더럽고 짐승 같은 놈이지만 일단 내가 할일은 하고 처벌을 받자.
나중에 이 일로 말미암아 내 앞길에 장애가 생기더라도 내가 저지른 짓이니 달게 받자.
그러한 심정을 안고 차돌 이는 황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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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8시간이나 걸렸는가 보다.
오다가 몇 번이고 쉬었지만 지루한 버스길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하늘과 먼 산을 쳐다본다.
하늘은 우울한 기분처럼 을씨년스럽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옷깃을 날리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도 모두 몸을 움 추리며 걷고 있다.
먼 산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어렴프시 보이는 고봉마다 눈이 얹혀 져 있다.
깍 아 지른 고봉위에 쌓인 눈들과 바람에 흩날려 마구 날리고 있는 눈가루들...
새삼 추위를 실감케 한다.
차돌 이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호텔로 향한다.
지금은 늦어 목적하는 곳에 갈수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어떻게 가야하는지 낯선 곳의 지형을 어찌 함부로 혼자 오를 수 있겠는가,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결정하고 호텔로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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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객실에 들어 온 차돌 이는 짐을 들고 들어온 호텔보이에게 가고자하는 곳을 묻고 내일 안내해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물어본다.
[예, 손님 길이 험하고 외진 곳이지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대령시켜 놓을 테니 염려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보이가 친절히 대답해준다.
아마 겨울철이고 모두가 할일이 없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시기인 듯하다.
차돌 이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약간의 팁을 보이 손에 집혀준다.
보이는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곤 방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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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떠날 모든 채비를 갖추고 호텔로비를 가자 어제 안내했던 종업원이 나이가 40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온다.
[손님, 이분입니다.
이분이 손님을 그곳으로 안내할 사람입니다.]
종업원이 차돌 이에게 남자를 인사시킨다.
종업원이 데려온 남자는 수부 덕 한 얼굴에 면도도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그득했다.
그는 차돌이 앞에 마주하더니 고개를 숙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전 손 차돌이라고 합니다.]
차돌이도 마주 허리를 숙이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무슨 말씀을.....어디,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젊고 건장하며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자기를 반갑게 환대해주니 기분도 좋았고 어딘가 조금은 모습이 틀린 것을 보며 한국 사람인지 아님 일본사람인지 궁금했다.
[예, 한국에서 왔습니다.]
차돌이도 그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굳이 숨길이유도 없었고 오늘 종일 같이 있어야할 텐데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게 좋다 생각했다.
[허허...그래요,
손님이 가고자하는 곳은 사실 이곳 사람도 잘 가지 못하는 험한 산중에 있습니다.
쾌 유명한 절이지만 원체 험한 산중에 있고 길도 험한지라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한국분이 그 곳을 알고 찾다니....정말 뜻밖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곳 사람도 잘 찾지 않는 그곳을 가려는 그가 의아한 것이다.
외국 관광객이 황산에 오르는 일은 허다하지만 험한 산중의 그곳을 찾아간다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십니까, 아는 분의 소개로 한번 찾아 볼 까 해서.....]
[하여간 잘 알았습니다,
어때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지금 출발하시죠.]
남자는 차돌이가 이미 떠날 차비를 갖춘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없고 해서 차돌 이에게 출발하자며 그의 짐 가방을 들더니 앞장서서 걷는다.
차돌 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종업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전하고는 중년의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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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산 아래 외진 곳에 두 사람이 내린다.
차돌 이와 중년남자이다.
남자는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의식했는지 어느새 준비했던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며 앞장서서 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 이르자 거센 바람이 나무에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치 새소리처럼 여겨진다.
고개를 들어 산머리를 보니 깍 아 지른 고봉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헤아릴 수도 없는 고봉들이 저마다의 위용을 자랑하며 한껏 뽐내고 있는 것이 있다,
금강산의 봉우리보다 10배 이상 많다는 곳이 이곳 황산이 아니던가....
엄청난 수효의 고봉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그 정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무거운 마음이 탁 터여 진다.
남자는 그런 고봉들의 정경에는 안중에 없다는 듯 계속하여 산을 오르고 있다.
남자의 입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오고 이마에는 땀이 나는지 가끔 머리를 싼 목도리를 제켜 땀을 닦기도 하면서 산을 오르고 있다.
차돌 이는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면서도 발걸음은 남자와 보조를 맞추며 그를 따라가고 있다.
남자의 거친 호흡소리와는 대조로 차돌이의 호흡은 여전히 고르기만 하다.
험한 산을 오르면서도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그렇다면 엄청난 체력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근 2시간을 산을 오른다.
길을 막고 있는 돌을 피하기도 하고 드문드문 가파른 길을 지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다니기 좋게 만든 길이 나온다.
그렇게 안정된 산 길 양옆으로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별로 멀지도 않는 곳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사가 보인다.
깍 아 지른 절벽아래 5-6개의 건물로 단장하고 지붕엔 까만 기와를 얹은 오래된 절이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기쁜 숨을 몰아쉬며 차돌 이를 뒤돌아본다.
[손님, 저 절입니다, 이제 다 온 것 같습니다.]
[하하...그렇습니까, 어서 가시죠.]
차돌 이는 이마에 땀방울이 그득한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준다.
두 사람은 또다시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결국 산사에 도착했고 남자는 목이 마른지 부리나케 샘터로 가더니 물부터 떠 마신다.
차돌 이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려 절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적막같이 조용한 절이었다.
[손님, 이제 제 할 일은 끝난 것 같군요.]
이때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소매로 훔치며 남자가 다가와서 차돌이 옆에 선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정말 수월히 이곳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차돌 이는 남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안내보수로 주기로 한 액수에 많은 수고비를 더 드린다.
남자도 마주 작별인사를 하고 차돌이가 건네는 보수를 받는다.
보수를 헤아리던 남자는 깜작 놀란다.
이미 계약한 금액을 초과한 금액이었다.
너무 많은 보수에 놀란 빛을 띠우며 차돌 이를 보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괜찮다는 손짓을 하지 않는가.
남자는 너무 고마웠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이만한 보수면 한동안 놀고먹어도 될 돈 이였기에 그걸 미련 없이 안내비로 내놓고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차돌 이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곤 다시 오던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차돌 이는 남자를 보내고 산사의 제일 큰 건물로 향해 발길을 움직인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마침 저쪽에서 스님이 한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차돌 이는 재빨리 스님 앞으로 다가가 합장을 하며 인사를 드린다.
[반갑습니다. 주지스님을 뵙고자 합니다만......]
[무량수불, 이렇게 외진 곳에 오늘 귀한손님이 오셨네요.
주지스님은 저곳 불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계십니다만.......]
스님도 두 손을 합장하며 반갑게 차돌 이를 맞이한다.
그리고 손을 들어 주지스님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알려준다.
[감사합니다, 스님.]
차돌 이는 다시 합장을 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곤 스님이 가르쳐준 건물로 들어간다.
머리가 하얀 늙은 스님이 앉아 있었다.
노스님이 무슨 경전을 읊으며 불공 삼매경에 빠져있다.
차돌 이는 조용히 스님의 뒤편에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합장을 하며 스님이 불공을 끝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통상 절이라면 스님이 아미타불하고 손님을 접견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 스님은 무량수불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 부처님을 섬기지만 일반절과는 다른 도인들이 수양하고 그리고 중생을 선도하는 그런 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지스님이라는 분은 머리도 깍지 않았지 않는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다.
차돌이의 무릎이 아련하게 저려오려 할 때 노스님은 불공을 끝냈는지 자리를 뒤로한다.
아마 뒤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행동이다.
[무량수불..시주님, 어서 오십시오.]
노스님이 다소곳이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며 고개를 숙인다.
[예, 스님. 처음 뵙겠습니다...]
차돌이도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노스님은 합장을 한 체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차돌 이를 살핀다.
[보아하니 이곳 사람은 아닌 듯 하 외다.
말투도 이곳과는 틀리 고 약간 어눌한 것을 보니........
그래, 시주님께서 험한 산사를 찾아오신 것은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보는데...
어찌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노스님은 차돌이의 이목구비와 말투를 보고 어디서 오신 젊은인가 궁금한 것이다.
또한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길이 험해 잘 찾지도 않는 절에 젊은 이방인이 찾아왔으니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전 한국에서 온 손 차돌이라 합니다.
무아거사님을 찾아뵈려 왔습니다.]
차돌 이는 신분을 밝히고 찾아 온 용건을 말한다.
[아니....사부님을.....
허허허... 사부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시주님이 알고 있다니....
그 것도 한국분이..........허허허.....]
노스님은 깜작 놀란다.
이 절을 찾아온 것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데 더군다나 자기가 섬기는 사부님을 찾아왔다 하지 않는가.
사부님이 어디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다니신 분도 아니고 속세와 거의 단절하다시피하고 계시는 분인데 젊은 사람이 더군다나 외국 청년이 사부님을 찾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노스님이 손님을 대하는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저.....이분이 소개하여 왔습니다.]
차돌 이는 2개의 봉투를 품에서 꺼내 스님 앞에 놓는다.
선생님이 이곳을 찾으면 보이라며 주신 서신이다.
하나는 주지스님에게 하나는 거사님께 보내는 서신이었다.
노스님은 두 개의 봉투를 살피더니 자기 앞으로 온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는다.
글을 다 읽고 봉투를 갈무리하더니 다시 차돌 이를 본다.
[대단한 젊은이군,
그 분과 사부님은 막역지우처럼 지내던 분이셨어요.
그 분을 못 뵌 지도 근 10년도 넘은 것 같은데.......
그래, 그분은 안녕하신지요,]
노스님도 선생님을 아는지 사부님의 막역지우인 선생님의 안부를 묻는다.
[예, 편안히 건강히 계십니다.]
차돌 이는 주지스님이 선생님을 알자 얼굴이 환해지며 공손히 대답한다.
[허허허..나이가 구순인데도 ....허허.......
하여간 시주님, 사부님은 지금 출타중입니다.
언제 이곳을 들릴지....원체 기약도 없이 바람같이 사시는 분이라 언제 올지 모릅니다.
전 제자지만 그 분의 허락 없이 그분의 행적을 혹 알아도 말씀 드릴수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 어디 계시는지 무얼 하시는지 모르고 있기도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시주님, 그만 돌아가시던지 아님 여기서 며칠 기다려보시겠습니까.........
돌아가신다면 편지는 소승이 필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주님께서 기거하는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사부님이 돌아오시면 연락드리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주님.]
노스님의 얼굴이 환해진다.
사부님의 막역지우인 진 선생이 나이가 지긋함에도 불구하고 무탈하며 건강하게 사신다니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차돌 이를 보며 무아사부님의 근황을 알려드리며 안타까운 표정도 짓는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왕 왔으니 며칠 기다려볼 겸, 잠시 폐를 끼쳤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거사님을 뵐 인연이 있길 빌 수밖에요.
그리고 이렇게 환대를 해주어 정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차돌 이는 노스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차피 여기올 때에는 목적을 가지고 왔고 또한 선생님이 소개해 주시는 분이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한 기인이시고 필시 선생님이 그분의 사 사를 받을 수 있게 소개 글까지 올렸으니 뭔가 틀리신 분일게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일이 얼마가 지나도 꼭 만나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노스님이 절에 기거할 수 있도록 선처까지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차돌 이는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드린 것이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시오.
먼 곳 이곳까지 찾아준 시주님이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그럼,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소승이 쉴 곳을 안내해 드리리다.
시주님. 따라나서지요,]
노스님은 일어난다.
불당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마침 지나가는 행자스님이 있어 노스님은 그를 불러 차돌 이를 어디론가 안내하라는 지시를 한다.
그리고 노스님은 차돌 이에게 합장을 해보이며 인사를 하더니 다른 건물로 사라진다.
차돌 이는 행자스님에게 인도되어 불당과 약간 떨어진 바위 밑의 암자로 가더니 방으로 차돌 이를 인도하며 앉게 한다..
[시주님, 여기서 푹 쉬시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이 방에서 물러나고 잠시 앉아있던 차돌이가 밖으로 나온다.
그는 암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엄청나게 큰 바위가 암자 뒤에 병풍처럼 펼쳐져 바람을 막고 있어 포근하게 느낄 만큼 양지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암자였다.
아마 이곳 암자는 손님이 묵고가게 만들은 곳으로 보였다.
암자의 앞과 옆으로는 아름드리 고목이 수도 없이 자라있고 낙엽은 떨어지고 없지만 우람한 덩치를 보노라면 수많은 세월을 산 나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이야.......]
차돌 이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한동안 주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간다.
방엔 조그만 탁상이 있었으며 벽에 호롱이 걸려있었다.
방 한쪽구석에는 정갈하게 개여 진 이불이 있었고 방바닥은 싸늘하고 훈기조차 없어 오래 동안 비워두지 않았나 싶었다.
차돌 이는 대충 짐을 정리하고 가뿐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암자 뒤편으로 조금 전 스님이 간곳으로 가본다.
행자스님이 암자 뒤편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계셨다.
[스님, 제가하겠습니다.]
차돌이가 다가가 스님을 밀쳐내자 행자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비켜준다.
[그래요,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일을 시주님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이곳 절엔 정말 사람의 왕래가 드뭅니다. 스님....
참, 그리고 주지스님의 법호는 어찌되시는지요....]
차돌 이는 아궁이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얼굴에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행자스님을 쳐다본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는 곳이지요.
워낙 산세가 험하다보니 정신수양이나 신체 수련하러 오시는 분외에는 거의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절이지요.
사실 소승도 사람이 그리울 때가 한두 번도 아니랍니다.
그리고 시주님을 보니 문득 한사람이 떠오르는군요.
제가 어릴 때 지금 시주님처럼 한국에서 오신분이 주지스님의 제자가 되어 한 2년
정도 이곳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지요...
그리고 주지스님의 도호는 진양이라 합니다.
그럼 전 이만,
참, 저녁시간은 6시입니다. 시간 맞추어 내려오십시오. 무량수불.......]
행자스님은 차돌이의 궁금증을 이해라도 하듯이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것까지 소상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다 방금 생각났는지 몸을 돌려 식사시간을 알려주며 합장을 한다.
[예, 스님....고맙습니다. 앞으로 폐 끼칠 일이 많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돌 이는 공손하게 나가는 행자스님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스님을 보내고 다시 아궁이 앞에 앉아 한편에 쌓아 둔 장작들을 꺼내와 불이 붙은 나무에 그 무게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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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 차돌 이는 지루하지만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하나 올바르게 살았던 것이 없는 삶이였기에 연신 허무한 미소만 얼굴에 그린다.
지닌 욕심이 과하기에 그걸 이루기 위해 악마의 발톱도 자제하지 않고 살았다..
모든 욕망은 필요와 결핍, 그리고 빈곤에서 오는 것인데.............모든 것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여겼기에 그것들을 충족하기위해 추잡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지 않았던가.
그로해서 욕망이 채워진 것도 있겠지만 채워지지 못한 것이 그보다 훨씬 많기에 지금도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기위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시련이라 여겼다.
향락을 누리는 기간은 짧다.
짧음을 길게 엮어가기 위해 시련으로 여기며 역경을 이겨내고 욕망이 충족되어 쾌락을 얻었다하더라도 그 쾌락은 외형적인 환상이나 다름없으며 다음에 다른 쾌락이 나타나면 전자는 소실되어 형태는 사라지고 다음에 온 쾌락 역시 환상에 불과할 뿐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의지를 진정시켜 잠재우거나 또는 계속해서 붙잡아둘 그런 힘은 아무 곳에도 없다.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도 어쩌면 거지의 발아래 던져준 한 푼의 동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의 목숨에 풀칠하며 괴롭고 힘든 세상을 그렇게 사는 생을 내일로 연장시키는데 불과 할뿐이다.
모든 것에서 탈출하고 싶어진다.
잠시나마 끊임없는 욕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나의 정신을 압박에서 구출하여 탐욕의 대상이 아닌 관조의 대상으로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혐오의 대상이 아닌 존경의 대상으로 살고 싶어진다.
진정 나는 어떤 놈인가.
추한 육신과 천한 욕정 그리고 속된 야망. 온갖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지 않는가.
부자연스럽고 타락한 생활에서 오는 천박하고 횡포한 그런 인간이 아닌가.
남들의 눈에 위대하고 놀라운 존재로 보이도록 하며 살았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한낮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보았으며 그런 사람들은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모든 것들을 감수하는것이 귀중한 마음의 산물이라 여기고 덮고 당하여도 잊어버리고자 하는데 나는 그들을 평생 존재한 나를 위해 그 무엇도 마다않는 고독 속에 유배된 자처럼 여기며 살았던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부끄러웠고 허무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을 바꾼다.
세상에 누가 있어 날 돌봐줄 수 있더란 말인가.
오로지 내 몸은 나 아니면 어디 발붙이며 살아갈 수도 없는 외톨이다.
순진하고 착한 마음은 버려야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면 그땐 진정 사람으로 태어나도 지금은 악마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손을 잡고 내일을 성사시켜야한다.
안일하고 정화된 마음은 진정 나에게는 사치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못난 생각을 하다니 차돌 이는 눈에 찬 광기를 드러내며 입술을 굳게 앙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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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지스님에게서 아직 아무른 언질도 없다.
차돌 이는 무료한 나날을 오로지 심신단련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예전에 배웠던 운동의 동작을 기억해내어 나름대로 산속에서 홀로 뜀박질하며 또는 발차기와 주먹단련 등 지루한 나날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이날도 홀로 산에서 땀을 흘리고 내려오니 행자스님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량수불....주지스님이 찾으십니다.]
차돌 이는 행자스님이 이끄는 데로 암자를 내려와 불당 건물로 들어선다.
머리가 하얀 마른 노인이 불상을 보며 앉아있고 주지스님은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계신다.
차돌 이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마 저분이 내가 만나고자 그리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분이라고.....
차돌이도 말없이 주지스님과 부처님에게 합장을 하고 주지스님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된다.
그렇게 답답한 분위기가 카랑카랑한 소리에 의해 깨지고 만다.
[허허허...젊은이가 수양이 깊 구만.........
이런 자리에서도 호흡이 고르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다니........
진영감이 사람을 보기는 제대로 본 듯 하구만........
그래,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길을 왜 찾으려하는고.........]
맨 앞쪽에 앉은 노인이 몸을 돌려 앉으며 차돌 이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낮은 웃음을 터뜨린다.
도인 차림의 노인이 차돌 이를 칭찬하고 또한 차돌 이를 가르친 선생님을 칭찬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며 차돌 이를 직시한다.
[거사님,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쉬 잊어지고 어렵게 간 길은 좀체 잊어지지 않고 영원히
뇌리에 남는다, 들었습니다.
전 남들이 다닌 길보다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함입니다.]
차돌이의 대답은 시원하고도 명쾌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는 차돌이의 행동이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몸가짐을 가볍게 하면 경솔하고 경망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눈밖에 있는 모든 사물에 현혹되면 몸가짐은 자기도 모르게 방정스럽게 된다.
무아거사의 위엄에 현혹되면 안 된다.
물론 그분의 제자가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주눅은 들지 않아야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행동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허허...무지 랭이 같은 인간이로고.....
나에게 무얼 배울게 있다고......고생만 할 텐데.....그래도 따라나서겠느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이 약간 상기한 것이 조금은 놀란 것 같았다.
깊은 물은 조용히 흐르듯이 젊은이가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면서도 건방지지도 않았고 경박하지도 않았다.
즉 그의 마음이 깊은 물처럼 고요함이니 무엇이 그를 불안케 하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별별 탐욕을 부리려는 법이고 은연중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이놈은 나에게서 많은걸 빼앗아갈 놈으로 보인다.
늘그막에.... 인생의 황혼녘에 찾아온 무지랑 이가 아닌 총명하고 비범한 놈이니 속으로 너무나 기뻤다.
당당하고.....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거사님, 아니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차돌 이는 벌떡 일어나 절을 한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대로 중국의 옛 풍습에 사부로 모시고자하면 구배를 올린다, 듣고는 그 자리에서 아홉 번 빠르게 절을 한다.
[허허. 성질이 급한 젊은이로고........
지금 바로 출발해야하니 준비하고 산문에서 기다 리 거라.
짐은 간편하게 하고 중요한 것만 소지하면 될 것이니라.......]
노스님은 차돌이가 절을 하자 만류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제자로 삼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차돌 이는 환하게 웃으며 주지스님과 부처님에게 합장을 하고는 재빨리 불당을 나온다.
그리고 번개같이 내달려 자기가 거처했던 암자로 가서 여권이랑 간단한 소지품을 담은 등 가방을 메고 빠르게 달려 산문 앞으로 간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지금 절이란 곳도 잊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고 있는 것이다.
산문 앞엔 무아거사가 주지스님과 있다가 차돌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걷는다.
차돌 이는 주지스님께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곤 무아거사의 뒤를 따른다.
주지스님도 무아거사의 등에 대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는 의아한 듯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다.
자기가 아는 사부님은 언제부턴가 제자를 받지 않으셨다.
이제 구십 고령을 넘었는데 그것도 타국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 드린듯하니 사부님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부님이 제자를 받아드린 것은 사실이 아닌가,
자기에겐 사제가 하나 생긴 것이 되었지 않는가......
눈에 총기가 있고 범상하진 않아 보였지만 사부님이 너무 쉽게 제자를 받아들인듯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부님의 마음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6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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