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ude
미지근한 공기를 뚫고 차가운 부슬비가 내린다. 오동나무 잎새로 물안개가 짙게 피어 오르고, 불규칙하게 흩어지는 빗줄기 아래 남녀가 마주 보며 서 있다. 근처 처마 밑에는 나란히 앉아서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는 두 노인네가 있다.
남자가 열렬하게 외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간절한 울림을 토해낸다. 하소연하는 것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친다.
“왜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지? 왜! 도대체 왜!”
“……”
여자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얼굴 가득 괴로움만이 떠올라 있다. 앙 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억지로 참는 듯 교차되어 어깨를 감싼 두 손이 가늘게 떨린다.
“은서야…”
남자의 얼굴에는 낙심한 표정이 떠오른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추위가 심장을 타고 사지로 퍼져 나간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태어나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옷이 젖어 달라붙은 모습이 살짝 선정적이면서도 보는 이를 애처롭게 만든다. 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한 피부는 놀랍도록 선명해서 병약한 기운을 물씬 풍긴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그는 침묵으로 강요한다.
“…지금 이유가 필요한가요?”
결국 여자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빗방울이 투명하게 맺힌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고, 한 쌍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 위로 형용하기 어려운 슬픈 빛이 떠오른다. 동정과 애증, 원망과 갈구, 그리고 사랑까지. 눈빛 하나에 모두 녹아 들어있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 것처럼?”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심 충격을 받아 동요가 퍼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른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속이지 못한다.
“알고… 있었니?”
“그래요. 처음부터 순수한 사랑이 아니란 거…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복수를 원했다는 것도. 그래서 나를 선택했다는 것도.”
“그런데 넌 어째서…”
숨이 탁 막힌다. 그가 끝맺지 못한 한 마디에는 수많은 질문이 맴돌고 있다. 그렇게 슬퍼하는 이유가 뭐지? 왜 나를 가만히 놔둔 거야? 그게 너한테 아픔을 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 왜… 너는 지난날 내게 사랑을 속삭인 거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딱 잘라 말한다. 어느새 입가에는 애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처음 만난 날처럼 살짝 상기된 볼이 무척 사랑스럽다. 슬프도록… 미치도록… 머리 속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을.
“나는… 나는 모르겠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요? 이상한가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 순간에 모르게 되어 버렸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묻는다. 그녀의 말투에 조소 따윈 찾아볼 수 없다. 기만으로 가득 찬 그들의 인연에 오로지 이 순간만큼은 진실했다.
말문이 막힌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후회하지 말아요. 나를 이용한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것까지도… 후회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정작 상처받은 장본인이면서 놀랍도록 강인해 보인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마음 약한 아가씨는 이 자리에 없다. 이 것도 그가 모르던 그녀의 일면일 까. 어쩐지 예전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째서?”
간신히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비참했다. 비가 내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지금 삼키는 것은 빗방울인가, 아니면….
“…춥네요.”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여자는 다소 힘이 없는 모습으로 말한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더없이 밉고 원망스럽다. 점차 생명이 꺼져 가는 이 몸이…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그는 모르지만, 그는 모르겠지만.
“안아줘요.”
“…….”
남자는 말없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는다. 얼마나 체구가 작고 가냘픈지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한번도 그녀를 안지 않았으니까. 정녕 몰랐다. 자신이 그토록 그녀를 안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아니, 사실은 줄곧 느끼면서도 일부러 내면의 외침을 무시하고 있었다.
“후후.. 따뜻하네요.”
그녀는 수줍게 말했다. 그 말이 가시처럼 아팠다. 가슴을 통해 들려오는 심장의 맥박 소리에 남자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가 숨겨온 마음이 모두 전해질 것만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처음이군.”
“네.”
가까스로 꺼낸 한 마디. 남녀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단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오로지 울고 있는 하늘뿐이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린 공간 속에서 그의 귓가에 자장가처럼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키스…해 줄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위험했다. 아직… 아직은 무너져선 안돼. 하지만…
“사랑해…”
남자는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여자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가볍게 문지르듯, 이윽고 치열이 맞물리고 혀가…
“잠깐…”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좀 전과는 달리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쁜 숨을 고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자신만만한 어투였다. 덕분에 두 노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흰색 한복에 풍성한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은 어쩐지 매우 난감한 기색이었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허허, 이 승부는….”
그 때, 성마른 인상의 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연기 대결은 지민이 네가 졌다!
그 말 한마디에 남녀의 표정에 일희일비가 교차했다. 남자의 표정에는 기쁨이, 여자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아니 이 경우 남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째서?”
그녀, 아니 그의 머리에서 가발이 굴러 떨어졌다. 목소리가 울 것처럼 떨렸다. 여자 같은, 아니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은 가슴을 붙잡고 소리쳤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역할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고요. 처음에 주어진 상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애드립이라고 하셨잖아요? 대사, 표정, 손짓, 눈빛, 감정까지 모두 완벽했다고요. 할아버지도 보셨잖아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하마터면 연기의 귀재라고 불리는 그조차 자신을 잃고 빠져들 뻔했다. 그만큼 소년의 연기는 완벽했고 오히려 그를 계속 리드해 나갔다. 실로 애드립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래서 그도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결은 상대방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했잖아요.”
“그래서 네가 진 것이다.”
성마른 인상의 노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아, 그 순간 남자는 납득했다. 소년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 스쳐간 쓰디쓴 미소의 의미를.
이내 노인은 표정을 바꾸고 사납게 소리쳤다.
“너는 대결에서 패했으니 꿈을 접어라.”
그 말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던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니, 자네!”
“어르신!”
남자도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반발하든 말든 성마른 인상의 노인은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단호하고 잔인하게 말했다.
“두말 할 필요 없다. 너는 할애비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뿐만 아니라 크게 실망시키고 말았다. 못난 놈.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건만! 네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의지가 무너졌다. 소년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미지근한 공기를 뚫고 차가운 부슬비가 내린다. 오동나무 잎새로 물안개가 짙게 피어 오르고, 불규칙하게 흩어지는 빗줄기 아래 남녀가 마주 보며 서 있다. 근처 처마 밑에는 나란히 앉아서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는 두 노인네가 있다.
남자가 열렬하게 외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간절한 울림을 토해낸다. 하소연하는 것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친다.
“왜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지? 왜! 도대체 왜!”
“……”
여자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얼굴 가득 괴로움만이 떠올라 있다. 앙 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억지로 참는 듯 교차되어 어깨를 감싼 두 손이 가늘게 떨린다.
“은서야…”
남자의 얼굴에는 낙심한 표정이 떠오른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추위가 심장을 타고 사지로 퍼져 나간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태어나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옷이 젖어 달라붙은 모습이 살짝 선정적이면서도 보는 이를 애처롭게 만든다. 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한 피부는 놀랍도록 선명해서 병약한 기운을 물씬 풍긴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그는 침묵으로 강요한다.
“…지금 이유가 필요한가요?”
결국 여자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빗방울이 투명하게 맺힌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고, 한 쌍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 위로 형용하기 어려운 슬픈 빛이 떠오른다. 동정과 애증, 원망과 갈구, 그리고 사랑까지. 눈빛 하나에 모두 녹아 들어있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 것처럼?”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심 충격을 받아 동요가 퍼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른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속이지 못한다.
“알고… 있었니?”
“그래요. 처음부터 순수한 사랑이 아니란 거…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복수를 원했다는 것도. 그래서 나를 선택했다는 것도.”
“그런데 넌 어째서…”
숨이 탁 막힌다. 그가 끝맺지 못한 한 마디에는 수많은 질문이 맴돌고 있다. 그렇게 슬퍼하는 이유가 뭐지? 왜 나를 가만히 놔둔 거야? 그게 너한테 아픔을 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 왜… 너는 지난날 내게 사랑을 속삭인 거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딱 잘라 말한다. 어느새 입가에는 애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처음 만난 날처럼 살짝 상기된 볼이 무척 사랑스럽다. 슬프도록… 미치도록… 머리 속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을.
“나는… 나는 모르겠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요? 이상한가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 순간에 모르게 되어 버렸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묻는다. 그녀의 말투에 조소 따윈 찾아볼 수 없다. 기만으로 가득 찬 그들의 인연에 오로지 이 순간만큼은 진실했다.
말문이 막힌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후회하지 말아요. 나를 이용한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것까지도… 후회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정작 상처받은 장본인이면서 놀랍도록 강인해 보인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마음 약한 아가씨는 이 자리에 없다. 이 것도 그가 모르던 그녀의 일면일 까. 어쩐지 예전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째서?”
간신히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비참했다. 비가 내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지금 삼키는 것은 빗방울인가, 아니면….
“…춥네요.”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여자는 다소 힘이 없는 모습으로 말한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더없이 밉고 원망스럽다. 점차 생명이 꺼져 가는 이 몸이…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그는 모르지만, 그는 모르겠지만.
“안아줘요.”
“…….”
남자는 말없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는다. 얼마나 체구가 작고 가냘픈지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한번도 그녀를 안지 않았으니까. 정녕 몰랐다. 자신이 그토록 그녀를 안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아니, 사실은 줄곧 느끼면서도 일부러 내면의 외침을 무시하고 있었다.
“후후.. 따뜻하네요.”
그녀는 수줍게 말했다. 그 말이 가시처럼 아팠다. 가슴을 통해 들려오는 심장의 맥박 소리에 남자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가 숨겨온 마음이 모두 전해질 것만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처음이군.”
“네.”
가까스로 꺼낸 한 마디. 남녀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단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오로지 울고 있는 하늘뿐이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린 공간 속에서 그의 귓가에 자장가처럼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키스…해 줄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위험했다. 아직… 아직은 무너져선 안돼. 하지만…
“사랑해…”
남자는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여자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가볍게 문지르듯, 이윽고 치열이 맞물리고 혀가…
“잠깐…”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좀 전과는 달리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쁜 숨을 고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자신만만한 어투였다. 덕분에 두 노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흰색 한복에 풍성한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은 어쩐지 매우 난감한 기색이었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허허, 이 승부는….”
그 때, 성마른 인상의 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연기 대결은 지민이 네가 졌다!
그 말 한마디에 남녀의 표정에 일희일비가 교차했다. 남자의 표정에는 기쁨이, 여자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아니 이 경우 남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째서?”
그녀, 아니 그의 머리에서 가발이 굴러 떨어졌다. 목소리가 울 것처럼 떨렸다. 여자 같은, 아니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은 가슴을 붙잡고 소리쳤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역할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고요. 처음에 주어진 상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애드립이라고 하셨잖아요? 대사, 표정, 손짓, 눈빛, 감정까지 모두 완벽했다고요. 할아버지도 보셨잖아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하마터면 연기의 귀재라고 불리는 그조차 자신을 잃고 빠져들 뻔했다. 그만큼 소년의 연기는 완벽했고 오히려 그를 계속 리드해 나갔다. 실로 애드립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래서 그도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결은 상대방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했잖아요.”
“그래서 네가 진 것이다.”
성마른 인상의 노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아, 그 순간 남자는 납득했다. 소년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 스쳐간 쓰디쓴 미소의 의미를.
이내 노인은 표정을 바꾸고 사납게 소리쳤다.
“너는 대결에서 패했으니 꿈을 접어라.”
그 말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던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니, 자네!”
“어르신!”
남자도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반발하든 말든 성마른 인상의 노인은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단호하고 잔인하게 말했다.
“두말 할 필요 없다. 너는 할애비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뿐만 아니라 크게 실망시키고 말았다. 못난 놈.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건만! 네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의지가 무너졌다. 소년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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