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母子)에서 부부(夫婦)로 맺어지기 까지》
나는 올해 32살의 총각으로 이름은 강 현이다(성은 강, 이름이 현으로 외자이다.부모님은 대게 나를 현아~ 혹은 현이야~ 라고 부르셨다)
제주도 어느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외아들로서 꽤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현재 아버지는 58세로 지역 농협의 조합장을 지내시고 계시고 어머니는 역시 아버지와 동갑인 58세로 집에서 농사를 지으신다.
아버지는 4남 1녀의 3남으로 작은 키에 강건한 인상으로 일함에 있어서 대충이란 없으신 아주 철저하신 분이시고, 어머니 4녀 1남의 막내로 역시 작고 아담한 체구에 조금은 뚱뚱한 편의 풍만한 몸매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자상한 시골 아낙네다.
지금은 비록 나이살 때문에 얼굴이나 몸매가 여느 시골 아줌마와 다르지가 않지만, 그래도 처녀일적에는 일본에 사는 언니집에서 2-3년 머물다 오면서 제주도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 다녔을 정도로 예쁘고 센스가 있는 분이셨다.
(일본에 사는 큰이모는 어머니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외할아버지의 본부인의 딸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딸로 일본에서 성공한 제주출신 제일교포 사업가와 결혼한 큰이모는 막내 여동생으로 태어난 어머니를 딸처럼 아꼈다고 한다)
아버지는 비록 시골에서 태어나셨지만, 어릴때 부터 머리가 영특하여 지역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닐때는 사람들로 수재라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명문이라 일컫는 제주 국제 고등학교에 들어 가실 수가 있었다(당시의 명문 고등학교들은 과거의 대학입시처럼 가고 싶은 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들어 갈 수 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곧잘 공부를 잘하였고, 작은 체구지만 운동에 소질이 있어 유도 선수로서 전국 소년 체전에 나가 3위에 입상하시기도 하셨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는 그림에 소실이 있으셔서, 장차 화가를 꿈꾸며 홍익대 미대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 하셨지만, 가난 농촌의 시골집에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그것도 그림 공부를 위해 보내 주실리 만무 하셨다.
일찍이 남편을 여위고, 물질(해녀의 잠수 활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우셨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그림 같은건 생각하지도 말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얼른 공무원이라도 되서 자기 앞가림을 하시길 원하셨다.
아버지는 결국 그일을 통해 좌절하시고는 남밑에 들어가 아부할 인물이 못되는 성격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아시는 지라, 졸업후에 그냥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셨다.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가 의사가 되느니 판사가 되느니 하시는데, 자신은 혼자 시골에 남아 농사 지어야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좌절을 하셨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어릴적부터 동네 동갑내기로 친하게 지냈던 엄마를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榮?
둘은 단박에 서로에게 뜨거운 사랑을 느꼈고, 엄마는 당시 자신의 통통하고 귀여운 예쁜 외모에 끌려 구애를 해오던 수많은 남자들을 뿌리치고 아버지를 선택하게 되었다.
둘은 그렇게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동네에 작은 초가집을 빌려 신혼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가진게 없었던터라 결혼식 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농사지을 땅도 없어 남의 밭을 빌려 근근히 생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내가 태어나고 두분은 조그마한 자신들만의 밭도 가지시게 되었다.
워낙 아버지 머리가 시골에서도 특출나셨기 때문에, 남들이 안하는 농사를 미리 앞서 해야 한다는 선진 농업 개념이 워낙 강하셨던 아버지는 당시 제주도에는 실패할까바 다른 사람들은 잘 손대지 않았던 토마토, 바나나, 백합 등의 농사를 지으시면서 크게 성공 하시게 되었다.
물론 그런 성공이 원인으로 아버지의 특출난 머리가 가장 큰 작용을 하였겠지만, 그런 아버지 옆에서 말없이 착실하게 따라와 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란 사실은 아버지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고향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 하게 되었고, 똑똑한 머리를 살려 농협의 조합장과 같은 지역 유지 역할을 하시면서 지내시고 계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며 아직도 다양한 농사를 지으시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가신다.
외아들로 태어났기에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부모님으로 부터 워낙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던 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해지면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까지 진학하여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건 전부 어릴적 끝까지 학업을 이루지 못하셨던 아버지가 나를 자기 대신으로 생각하여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외지에 나가 공부하기 보다는 자신의 곁에 남아 선생님 같은 직업을 얻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조금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이렇게 완벽하고 착실하게 보이는 아버지에게도 크나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여자이다.
어린시절의 좌절한 경험에 의한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상시 착실하시고 검소하신 아버지도 유독 여자만은 굉장히 집착하셔셔 옛날부터도 여자문제로 어머니를 꽤나 속썩여 오셨다.
아버지의 여자문제가 발생할때마다 부모님은 크게 다투시고, 아버지가 다시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셨지만, 다 헛수고 였다.
어머니는 굉장히 착하고 남들한테 자상하신 성격이라, 자신의 생각을 잘 말씀 안하시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꾸욱 참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여자문제로 다투면서 마음에 큰병을 얻으셨다. 바로 우울증이다.
지금은 우울증이라고 하면 누구나 스트레스에 의해 한번정도는 앓을 수 있는 현대인의 병으로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신경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그럴 수 있지만, 당시로서 정신과에 간다는 것은 미친사람이나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울증을 제때 치료 못하시고 마음속에서 병을 점점 키워 오시게 되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지내시다가도 아버지의 핸드폰으로 여자로부터 의미불명의 문자라도 오는 날에는 몇일씩 크게 앓아 누우시곤 하셨다.
항상 뜨거운 태양 아래서 농사를 짓고 하다보니 피부도 까무잡잡하게 타시고, 이제는 나이살도 붙고 하여 젊은 여자와 비교하면 볼품없는 몸매 지만 그래도 내게는 가장 자상하고 예쁘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 그렇게 변해 버린 어머니의 외모에서 여자를 못느끼고 점점 더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관계를 안하신지도 벌써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나는 외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는 나를 진짜 자신의 분신처럼 많이 아끼셨다(실제로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왔으니 분신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어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커서도 어리광을 부릴때가 많았다. 남들 앞에서는 의젓한 어른인 것 처럼 굴었지만, 어머니랑만 있게 되면 영락없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가끔씩 어머니 젖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럴때 마다 어머니는 다큰 녀석이 징그럽다면서 웃으면서 자신의 젖을 만지는 나의 손을 떼어 놓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와 모자(母子)의 관계가 아닌 부부(夫婦)의 관계로서 맺어지게 된건 불과 1년전의 일이었다.
계기가 된건 나의 귀향이었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유수의 대기업을 다니던 나는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커다란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하던 프로젝트에 팀장이란 자리에 앉게 된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 하여 시장에 내놓게 되는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개발과정의 여러 난관도 헤치고 겨우 완성해 놓은 내용을 팀원 중에 한명이 경쟁회사에 정보를 빼돌리면서 결국 경쟁회사가 먼저 제품을 발표하는 일이 벌어 지게 되었다.
그것은 프로젝트에 많은 개발비를 쏟아 부었던 우리 회사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되었고, 나는 결국 그 책임을 물어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처음 몇달은 엄청나게 방황을 하였다.
못마시던 술도 밤새 마시기도 하고, 길에 지쳐 쓰러져 아무데서나 자고, 술에 취해 아무나 하고도 멱살을 잡고 싸우기 일쑤였다. 거의 석달같을 그렇게 폐인 처럼 살았다.
그런 나를 다시 원래대로 돌아 올수 있도록 도와준건 어머니였다.
나의 그런 낙심을 아시는지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는 당시 폐인 처럼 살고 있던 나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
나는 어릴적이후로 오랜만에 어머니 품에 안겨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
"현아...힘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내려가자"
".........."
"현이한테 아무리 힘들일이 있어도, 내가 항상 현이곁에서 지켜 줄테니까 힘들면 모든걸 있고 어머니랑 집으로 돌아가서 같이 살자꾸나"
"흐어어어엉....엉엉엉엉엉..."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 내며 펑펑울어 본건 어릴적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탕을 훔치고 어머니한테 엄청 혼났을때 이후로 처음이었던것 같다.
그렇게 제주도로 다시 내려오게 된 나는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어머니가 하시는 농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불거진 아버지의 여자문제로 어머니가 힘들어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도 힘든데, 힘들어 하는 자식을 위해 멀리 서울까지 올라오셔서 따뜻하게 보듬어 주신 어머니...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 감사하고 못나게 굴은 내 자신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이미 부부관계를 안한지가 15년이나 넘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또다시 여자를 만들어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던 것이었다.
물론 같은 남자로서 성(性)의 고충을 어느정도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저런 착한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딴 여자를 몰래 만난다고 생각 하니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몰래 일곤 하였다.
어머니가 가엽다...
평생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아버지한테 여자로서의 기쁨도 못받는 그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니..
그렇게 집에 내려온 이후로 가엾은 어머니를 자꾸 생각하다보니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연민은, 점점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그런 사랑의 감정으로 바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향을 하고 1년정도 지났을 때였다.
처음 내려와서 어머니 곁에서 농삿일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어릴적부터 외아들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신들은 밭에나가 고생하시면서도, 흙조차 한번 손에 안묻게 나를 키워오셨던 지라, 서른이 다되서 시작한 농사일은 꽤나 힘이 부쳤다.
하지만 1년정도 지나자 농삿일도 어느정도 손에 익게 되었고 그동안 시골에 적응하는 일로만 꽉착던 머리속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귤 열매가 실하도록 하기 위해 늦은 오후 까지 귤나무에서 잔가지를 전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젠 거의 다 정리가 되어 나머지는 내가 하고 들어 갈려고 어머니 먼저 집으로 돌려 보내 쉬시게 하려고 했다.
"어머니. 이제 그만 들어 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께요"
"호호...아니야, 같이 해야 빨리 하지"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거의 다했잖아요. 제가 마무리 해도 되니깐 먼저 들어가서 목욕하세요"
"같이 하면 되는데두...."
"아니에요, 어머니가 가서 먼저 목욕하셔야 저도 집에 가면 바로 하죠. 같이 가면 한사람은 기다려야 하잖아요. 다 저좋으려고 이러는 거에요...하하...그러니 먼저 들어 가세요"
"녀석두 참..."
어머니는 내 손에 떠밀려 먼저 집으로 돌아 가셨다.
이제는 전지 작업쯤은 익숙해진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마무리를 하고 기구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금방 목욕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안방으로 이동하다가 나랑 딱 마주친 것이다.
얼굴은 햇餠?타 까무잡잡한 편이셨지만, 목 아래로의 나신은 아주 새하야셨다.
비록 나이살로 인해 배도 좀 나오고 엉덩이도 풍만할 정도로 펑퍼짐 하셨지만, 58세라는 나이치고는 꽤나 사랑스러운 몸매 셨다. 내 어머니 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오히려 어머니의 풍만한 살집은 젖가슴을 튼실하게 받쳐줘서 그나이때의 여성들의 젖가슴이 쭈글쭈글 쪼그라 드는걸 생각하면 커다랗고 만지기 좋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커서도 종종 어머니와 장난을 치다 가슴에 손을 넣고 만지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기는 초등학교때 같이 목욕했던걸 마지막으로 처음이었다.
커다란 젖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연륜이 느껴지는 짙은색의 유두하며...오히려 젊은 여성의 핑크색보다는 왠지 어머니의 그런 유두가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 아 저 젖가슴을 손에 한움큼 쥐고서 저걸 빨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어머니의 굴곡있는 뱃살을 따라 더 아래로 내려가자 검은 숲으로 무성한 비경이 살짝 보였다.
몇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지며 씹두덩이를 자세하게 구경한적은 많았지만, 어머니의 그곳처럼 털이 무성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 마치 어머니의 아랫도리가 털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이 될정도로 검은숲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검은색의 무성한 털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흰색털이 어머니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2-3초간의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머니의 몸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욕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니..얘..감짝 놀랬잖니...."
"아..목욕 다하셨어요....?"
"응...현이도..얼른 들어와서 물식기 전에 목욕해"
"네..."
어머니는 자신의 나신을 이제는 성인이 되 버린 아들에게 보이신게 민망하신지 수건으로 얼른 몸을 가리시고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가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작업복을 벗고는 욕실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육煮?어머니께서 받아 놓으신 따뜻한 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방금전에 본 어머니의 나신이 아른 아른 거린다.
커다랗고 부드러울 것 같은 젖가슴...그리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검은숲으로 무성하게 뒤덮인 어머니의 씹두덩이....
어머니의 나신을 떠올렸더니 갑자기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욕정이 끓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속으로 손을 집어 넣고서는 어머니의 몸을 생각하며 이미 커다랗게 커질대로 커진 좆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찰랑...찰랑....탁탁탁.."
좆을 잡은 손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수면과의 마찰 때문에 작은 물결이 일어나 찰랑찰랑거리며 넘실 거렸다.
"탁탁탁..찰랑....탁탁탁....탁탁...찰랑...탁탁"
- 어머니...보지속에 내 좆을 박아 드릴께요...아들의 좆을...으윽...어머니가 낳으신 친아들의...좆을...하~~~흐으윽....
나는 어머니를 뒤로 돌려세워 풍만한 엉덩이를 잡고 보지속에 내 좆을 박는 상상을 하며 자지를 쥔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탁탁탁....탁탁...찰랑...찰랑....탁탁탁.."
"탁탁탁탁탁...."
사정의 기미를 느낀 나는 더욱 빠르게 손을 놀렸다. 잠시후 나는 엄청난 양의 좆물을 욕탕의 물속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울컥...울컥....울컥....
"허억~~~으으흑.......으~~"
정말 많은 양의 좆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쌌는지 욕탕안 물이 내 좆물로 인하여 혼탁해질 정도 였다.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지도 꽤나 오래 된되다가, 농삿일에 적응 하는데만 신경쓰다가 그동안 한번도 풀지 못했으니 이렇게 많이 쌓였을 수 밖에....
욕탕물속에 좆물을 다 토해낸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남녀간의 사랑에서 이제는 욕정으로 바뀐 것에 살짝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죄책감 같은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어떤 남자보다도....아니 정확히 짚어서 아버지 보다도 어머니를 사랑해 드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를 여자로서 내 소유로 독점 하고 싶은데도, 모자(母子)라는 관계의 벽에 부딪혀 이렇게 욕탕안에 앉아 혼자 자위나 해야하는 현실의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나는 올해 32살의 총각으로 이름은 강 현이다(성은 강, 이름이 현으로 외자이다.부모님은 대게 나를 현아~ 혹은 현이야~ 라고 부르셨다)
제주도 어느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외아들로서 꽤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현재 아버지는 58세로 지역 농협의 조합장을 지내시고 계시고 어머니는 역시 아버지와 동갑인 58세로 집에서 농사를 지으신다.
아버지는 4남 1녀의 3남으로 작은 키에 강건한 인상으로 일함에 있어서 대충이란 없으신 아주 철저하신 분이시고, 어머니 4녀 1남의 막내로 역시 작고 아담한 체구에 조금은 뚱뚱한 편의 풍만한 몸매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자상한 시골 아낙네다.
지금은 비록 나이살 때문에 얼굴이나 몸매가 여느 시골 아줌마와 다르지가 않지만, 그래도 처녀일적에는 일본에 사는 언니집에서 2-3년 머물다 오면서 제주도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 다녔을 정도로 예쁘고 센스가 있는 분이셨다.
(일본에 사는 큰이모는 어머니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외할아버지의 본부인의 딸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딸로 일본에서 성공한 제주출신 제일교포 사업가와 결혼한 큰이모는 막내 여동생으로 태어난 어머니를 딸처럼 아꼈다고 한다)
아버지는 비록 시골에서 태어나셨지만, 어릴때 부터 머리가 영특하여 지역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닐때는 사람들로 수재라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명문이라 일컫는 제주 국제 고등학교에 들어 가실 수가 있었다(당시의 명문 고등학교들은 과거의 대학입시처럼 가고 싶은 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들어 갈 수 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곧잘 공부를 잘하였고, 작은 체구지만 운동에 소질이 있어 유도 선수로서 전국 소년 체전에 나가 3위에 입상하시기도 하셨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는 그림에 소실이 있으셔서, 장차 화가를 꿈꾸며 홍익대 미대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 하셨지만, 가난 농촌의 시골집에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그것도 그림 공부를 위해 보내 주실리 만무 하셨다.
일찍이 남편을 여위고, 물질(해녀의 잠수 활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우셨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그림 같은건 생각하지도 말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얼른 공무원이라도 되서 자기 앞가림을 하시길 원하셨다.
아버지는 결국 그일을 통해 좌절하시고는 남밑에 들어가 아부할 인물이 못되는 성격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아시는 지라, 졸업후에 그냥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셨다.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가 의사가 되느니 판사가 되느니 하시는데, 자신은 혼자 시골에 남아 농사 지어야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좌절을 하셨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어릴적부터 동네 동갑내기로 친하게 지냈던 엄마를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榮?
둘은 단박에 서로에게 뜨거운 사랑을 느꼈고, 엄마는 당시 자신의 통통하고 귀여운 예쁜 외모에 끌려 구애를 해오던 수많은 남자들을 뿌리치고 아버지를 선택하게 되었다.
둘은 그렇게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동네에 작은 초가집을 빌려 신혼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가진게 없었던터라 결혼식 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농사지을 땅도 없어 남의 밭을 빌려 근근히 생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내가 태어나고 두분은 조그마한 자신들만의 밭도 가지시게 되었다.
워낙 아버지 머리가 시골에서도 특출나셨기 때문에, 남들이 안하는 농사를 미리 앞서 해야 한다는 선진 농업 개념이 워낙 강하셨던 아버지는 당시 제주도에는 실패할까바 다른 사람들은 잘 손대지 않았던 토마토, 바나나, 백합 등의 농사를 지으시면서 크게 성공 하시게 되었다.
물론 그런 성공이 원인으로 아버지의 특출난 머리가 가장 큰 작용을 하였겠지만, 그런 아버지 옆에서 말없이 착실하게 따라와 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란 사실은 아버지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고향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 하게 되었고, 똑똑한 머리를 살려 농협의 조합장과 같은 지역 유지 역할을 하시면서 지내시고 계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며 아직도 다양한 농사를 지으시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가신다.
외아들로 태어났기에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부모님으로 부터 워낙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던 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해지면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까지 진학하여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건 전부 어릴적 끝까지 학업을 이루지 못하셨던 아버지가 나를 자기 대신으로 생각하여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외지에 나가 공부하기 보다는 자신의 곁에 남아 선생님 같은 직업을 얻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조금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이렇게 완벽하고 착실하게 보이는 아버지에게도 크나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여자이다.
어린시절의 좌절한 경험에 의한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상시 착실하시고 검소하신 아버지도 유독 여자만은 굉장히 집착하셔셔 옛날부터도 여자문제로 어머니를 꽤나 속썩여 오셨다.
아버지의 여자문제가 발생할때마다 부모님은 크게 다투시고, 아버지가 다시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셨지만, 다 헛수고 였다.
어머니는 굉장히 착하고 남들한테 자상하신 성격이라, 자신의 생각을 잘 말씀 안하시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꾸욱 참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여자문제로 다투면서 마음에 큰병을 얻으셨다. 바로 우울증이다.
지금은 우울증이라고 하면 누구나 스트레스에 의해 한번정도는 앓을 수 있는 현대인의 병으로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신경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그럴 수 있지만, 당시로서 정신과에 간다는 것은 미친사람이나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울증을 제때 치료 못하시고 마음속에서 병을 점점 키워 오시게 되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지내시다가도 아버지의 핸드폰으로 여자로부터 의미불명의 문자라도 오는 날에는 몇일씩 크게 앓아 누우시곤 하셨다.
항상 뜨거운 태양 아래서 농사를 짓고 하다보니 피부도 까무잡잡하게 타시고, 이제는 나이살도 붙고 하여 젊은 여자와 비교하면 볼품없는 몸매 지만 그래도 내게는 가장 자상하고 예쁘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 그렇게 변해 버린 어머니의 외모에서 여자를 못느끼고 점점 더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관계를 안하신지도 벌써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나는 외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는 나를 진짜 자신의 분신처럼 많이 아끼셨다(실제로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왔으니 분신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어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커서도 어리광을 부릴때가 많았다. 남들 앞에서는 의젓한 어른인 것 처럼 굴었지만, 어머니랑만 있게 되면 영락없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가끔씩 어머니 젖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럴때 마다 어머니는 다큰 녀석이 징그럽다면서 웃으면서 자신의 젖을 만지는 나의 손을 떼어 놓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와 모자(母子)의 관계가 아닌 부부(夫婦)의 관계로서 맺어지게 된건 불과 1년전의 일이었다.
계기가 된건 나의 귀향이었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유수의 대기업을 다니던 나는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커다란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하던 프로젝트에 팀장이란 자리에 앉게 된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 하여 시장에 내놓게 되는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개발과정의 여러 난관도 헤치고 겨우 완성해 놓은 내용을 팀원 중에 한명이 경쟁회사에 정보를 빼돌리면서 결국 경쟁회사가 먼저 제품을 발표하는 일이 벌어 지게 되었다.
그것은 프로젝트에 많은 개발비를 쏟아 부었던 우리 회사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되었고, 나는 결국 그 책임을 물어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처음 몇달은 엄청나게 방황을 하였다.
못마시던 술도 밤새 마시기도 하고, 길에 지쳐 쓰러져 아무데서나 자고, 술에 취해 아무나 하고도 멱살을 잡고 싸우기 일쑤였다. 거의 석달같을 그렇게 폐인 처럼 살았다.
그런 나를 다시 원래대로 돌아 올수 있도록 도와준건 어머니였다.
나의 그런 낙심을 아시는지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는 당시 폐인 처럼 살고 있던 나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
나는 어릴적이후로 오랜만에 어머니 품에 안겨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
"현아...힘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내려가자"
".........."
"현이한테 아무리 힘들일이 있어도, 내가 항상 현이곁에서 지켜 줄테니까 힘들면 모든걸 있고 어머니랑 집으로 돌아가서 같이 살자꾸나"
"흐어어어엉....엉엉엉엉엉..."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 내며 펑펑울어 본건 어릴적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탕을 훔치고 어머니한테 엄청 혼났을때 이후로 처음이었던것 같다.
그렇게 제주도로 다시 내려오게 된 나는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어머니가 하시는 농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불거진 아버지의 여자문제로 어머니가 힘들어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도 힘든데, 힘들어 하는 자식을 위해 멀리 서울까지 올라오셔서 따뜻하게 보듬어 주신 어머니...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 감사하고 못나게 굴은 내 자신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이미 부부관계를 안한지가 15년이나 넘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또다시 여자를 만들어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던 것이었다.
물론 같은 남자로서 성(性)의 고충을 어느정도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저런 착한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딴 여자를 몰래 만난다고 생각 하니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몰래 일곤 하였다.
어머니가 가엽다...
평생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아버지한테 여자로서의 기쁨도 못받는 그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니..
그렇게 집에 내려온 이후로 가엾은 어머니를 자꾸 생각하다보니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연민은, 점점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그런 사랑의 감정으로 바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향을 하고 1년정도 지났을 때였다.
처음 내려와서 어머니 곁에서 농삿일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어릴적부터 외아들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신들은 밭에나가 고생하시면서도, 흙조차 한번 손에 안묻게 나를 키워오셨던 지라, 서른이 다되서 시작한 농사일은 꽤나 힘이 부쳤다.
하지만 1년정도 지나자 농삿일도 어느정도 손에 익게 되었고 그동안 시골에 적응하는 일로만 꽉착던 머리속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귤 열매가 실하도록 하기 위해 늦은 오후 까지 귤나무에서 잔가지를 전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젠 거의 다 정리가 되어 나머지는 내가 하고 들어 갈려고 어머니 먼저 집으로 돌려 보내 쉬시게 하려고 했다.
"어머니. 이제 그만 들어 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께요"
"호호...아니야, 같이 해야 빨리 하지"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거의 다했잖아요. 제가 마무리 해도 되니깐 먼저 들어가서 목욕하세요"
"같이 하면 되는데두...."
"아니에요, 어머니가 가서 먼저 목욕하셔야 저도 집에 가면 바로 하죠. 같이 가면 한사람은 기다려야 하잖아요. 다 저좋으려고 이러는 거에요...하하...그러니 먼저 들어 가세요"
"녀석두 참..."
어머니는 내 손에 떠밀려 먼저 집으로 돌아 가셨다.
이제는 전지 작업쯤은 익숙해진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마무리를 하고 기구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금방 목욕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안방으로 이동하다가 나랑 딱 마주친 것이다.
얼굴은 햇餠?타 까무잡잡한 편이셨지만, 목 아래로의 나신은 아주 새하야셨다.
비록 나이살로 인해 배도 좀 나오고 엉덩이도 풍만할 정도로 펑퍼짐 하셨지만, 58세라는 나이치고는 꽤나 사랑스러운 몸매 셨다. 내 어머니 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오히려 어머니의 풍만한 살집은 젖가슴을 튼실하게 받쳐줘서 그나이때의 여성들의 젖가슴이 쭈글쭈글 쪼그라 드는걸 생각하면 커다랗고 만지기 좋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커서도 종종 어머니와 장난을 치다 가슴에 손을 넣고 만지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기는 초등학교때 같이 목욕했던걸 마지막으로 처음이었다.
커다란 젖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연륜이 느껴지는 짙은색의 유두하며...오히려 젊은 여성의 핑크색보다는 왠지 어머니의 그런 유두가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 아 저 젖가슴을 손에 한움큼 쥐고서 저걸 빨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어머니의 굴곡있는 뱃살을 따라 더 아래로 내려가자 검은 숲으로 무성한 비경이 살짝 보였다.
몇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지며 씹두덩이를 자세하게 구경한적은 많았지만, 어머니의 그곳처럼 털이 무성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 마치 어머니의 아랫도리가 털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이 될정도로 검은숲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검은색의 무성한 털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흰색털이 어머니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2-3초간의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머니의 몸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욕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니..얘..감짝 놀랬잖니...."
"아..목욕 다하셨어요....?"
"응...현이도..얼른 들어와서 물식기 전에 목욕해"
"네..."
어머니는 자신의 나신을 이제는 성인이 되 버린 아들에게 보이신게 민망하신지 수건으로 얼른 몸을 가리시고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가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작업복을 벗고는 욕실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육煮?어머니께서 받아 놓으신 따뜻한 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방금전에 본 어머니의 나신이 아른 아른 거린다.
커다랗고 부드러울 것 같은 젖가슴...그리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검은숲으로 무성하게 뒤덮인 어머니의 씹두덩이....
어머니의 나신을 떠올렸더니 갑자기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욕정이 끓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속으로 손을 집어 넣고서는 어머니의 몸을 생각하며 이미 커다랗게 커질대로 커진 좆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찰랑...찰랑....탁탁탁.."
좆을 잡은 손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수면과의 마찰 때문에 작은 물결이 일어나 찰랑찰랑거리며 넘실 거렸다.
"탁탁탁..찰랑....탁탁탁....탁탁...찰랑...탁탁"
- 어머니...보지속에 내 좆을 박아 드릴께요...아들의 좆을...으윽...어머니가 낳으신 친아들의...좆을...하~~~흐으윽....
나는 어머니를 뒤로 돌려세워 풍만한 엉덩이를 잡고 보지속에 내 좆을 박는 상상을 하며 자지를 쥔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탁탁탁....탁탁...찰랑...찰랑....탁탁탁.."
"탁탁탁탁탁...."
사정의 기미를 느낀 나는 더욱 빠르게 손을 놀렸다. 잠시후 나는 엄청난 양의 좆물을 욕탕의 물속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울컥...울컥....울컥....
"허억~~~으으흑.......으~~"
정말 많은 양의 좆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쌌는지 욕탕안 물이 내 좆물로 인하여 혼탁해질 정도 였다.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지도 꽤나 오래 된되다가, 농삿일에 적응 하는데만 신경쓰다가 그동안 한번도 풀지 못했으니 이렇게 많이 쌓였을 수 밖에....
욕탕물속에 좆물을 다 토해낸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남녀간의 사랑에서 이제는 욕정으로 바뀐 것에 살짝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죄책감 같은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어떤 남자보다도....아니 정확히 짚어서 아버지 보다도 어머니를 사랑해 드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를 여자로서 내 소유로 독점 하고 싶은데도, 모자(母子)라는 관계의 벽에 부딪혀 이렇게 욕탕안에 앉아 혼자 자위나 해야하는 현실의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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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9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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