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는 지은이가 세 번째 절정을 느낄 때까지 계속했다. 체력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급속도로 저하되더니, 두 번째로 느끼게 할 때까지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세 번째에는 거의 어거지로 움직였다.
“운하야,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걱정되는 투로 물어보는 지은이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그대로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근데, 운하야 저, 그거 안 하지 않았어? 괜찮아?”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행위에 몰두하다보니 사정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대신 체력이 다 빠져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괜찮다는 표시로 들어올렸다. 체력이 다 빠지고도 움직이면, 더 이상 몸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뱃속이 차갑게 식는다.. 그런 느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은이가 내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10분 정도 잠자코 누워 있으니 그나마 움직일 만해졌다. 힘이 다 빠진 시체 같은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가서 수건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지은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고마워.”
“당연하게 할 일이니까.”
행위를 끝마치고 여자를 챙겨주는 것은 남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의 몸을 닦아주고는 내 몸을 닦았다. 완전히 땀에 젖었다.
“차라리 샤워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게. 먼저 샤워해. 나는 뒷정리하고 있을게.”
“같이 샤워 해.”
지은이가 나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에너지를 다 빼버렸더니 반항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끌려갔다. 애초에 평소 체력이라도 끌려갔을 테지만.
샤워기 물을 틀고 같이 샤워를 시작했다. 바디워시로 충분히 거품이 난 바스타올로 서로의 몸을 닦아주었다. 내가 먼저, 그 다음은 지은이가. 생각보다 간지럽다. 하지만 기분 좋은 간지럼이었다.
얼굴에 거품을 묻히거나 물을 뿌리거나 장난도 쳤다. 힘이 빠져있으니까 장난도 힘이 많이 들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거실로 나갔다. 시간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5시 45분이다. 곧 있으면 누나가 올 것이다.
“지은아, 얼른 옷 입어야겠다. 누나가 곧 올 것 같아.”
“응.”
나도 얼른 옷을 입었다.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서 입었다. 일부러 낡고 오래된 옷으로 입었다. 깨끗하고 산 지 얼마 안 된 옷은 나중에 데이트 때 입을 생각이다. 핸드폰을 집었다. 누나가 어디 있는지 전화해볼 생각이다. 아까 하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야릇한 분위기가 되어서 잊어버렸다.
전화 신호가 가는 동안 이름 모를 음악이 흘러나왔다. 영어니까 팝송이겠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나, 학교야?”
“아니, 지금 집에 가는 중이야. 6시면 집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근데 무슨 일로 전화 했어?”
“그냥 전화하고 싶어서.”
“뭐야 그게. 쿡쿡. 금방 들어갈게.”
“응.”
통화가 짧게 끝났다. 15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 방에서 나와서 욕실에 가보니 지은이가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다.
“지은아, 머리 말리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10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왜?”
“이제 곧 누나가 올 것 같아서.”
“그래? 언제쯤 오는데?”
“15분 정도래.”
“15분이면 물기도 없이 충분히 말릴 수 있어.”
지은이가 장담했다. 아니, 그보다.
“지은아, 15분이 아니라. 그 전에 나가야 돼.”
“왜?”
왜라니.
“누나한테 여기 있는 거 들키잖아.”
“들키면 뭐 어때.”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나 지은이 지금 우리 누나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좋지 않은데.
“머리 감은 티만 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고등학생인데 이상한 짓 했다고 생각하겠어?”
곤란하다. 지은이는 확실히 우리 누나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다.
“누나랑 만나볼 거야?”
“응. 어차피 만나게 될 건데 이 기회에 만나보려고. 오늘 운하네 집에 온 이유도 그거야.”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다. 나는 지금부터 지은이도 누나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둘 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오늘 둘이 만나버리면, 내 결심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하지만 지은이에게 돌아가라고 종용할 수도 없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잔머리는 좋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상황을 타개할 만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상태로 15분이 지났다. 그동안의 성과란, 지은이가 머리를 물기 하나 없이 깨끗이 말렸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태연자약하게 거실 소파에 앉았다.
“너희 누나 이름 윤하 언니라고 그랬지.”
“응.”
“조금 긴장된다.”
지은이는 조금 긴장되는 정도지만,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6시 정각. 누나가 정말로 딱 6시에 도착했다. 도어락이 열리며 현관문이 열렸다.
“운하야, 나 왔어!”
기분이 좋은 듯 밝은 목소리로 들어오는 누나. 신발을 벗어던지며 현관에서 올라왔다. 그렇게 신발 벗을 때 아무렇게나 던져놓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누나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다가, 지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굳어가는 표정. 결국 절대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아, 누구?”
“그게,”
“아, 저, 운하 여자 친구인 정지은이라고 합니다.”
“아.”
내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지은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소개를 했다. 긴장했는지 지은이의 표정이 굳어있다. 다른 이유로, 누나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여자 친구구나.”
“네.”
“아, 재밌게 놀다가. 응.”
누나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슥 들어간다. 누나를 따라가려다 따라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지은이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저, 나, 지금 미움 받은 거야?”
“아마도 놀라서 그랬을 거야. 사실 부끄러워서 아직 누나한테 여자 친구 얘기를 안 하고 있었거든. 원래 우리 집에 남자도 데려온 적이 없는데 갑자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으니까.”
“그러면 안심이야.”
어떻게든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 다행히 변명이 먹힌 듯하다. 지은이가 갑자기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아니, 심호흡이다. 계속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쉰다.
“아, 긴장했더니 힘들다.”
“괜찮아?”
“응. 근데 운하야,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저녁 먹고 가도 될까?”
뭐시라.
“나, 운하네 언니랑 친해지러 온 거거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잖아.”
물러서는 편이 나에게는 좋다. 마땅히 거절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럼 누나한테 물어볼게.”
누나의 방에 이렇게 들어가기 싫은 적이 없었다. 누나는 지금 책상에 앉아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 누나. 지은이가 저녁 먹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괜찮아?”
“어, 괜찮아. 응.”
누나가 바로 승낙했다.
결국 지은이도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한 사람 분의 밥그릇을 더 펐다. 실로 몇 년 만에 식탁에 나와 누나 이외의 사람이 앉게 되었다. 한 명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식탁의 느낌이 달랐다.
지은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이 있다. 지은이를 자세히 알게 된 최근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저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친화력이 어느 정도는 누나에게도 먹혀들었는지, 지금도 조금 어색하지만 아까처럼 숨이 막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언니는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이시죠?”
“응.”
“무슨 과세요?”
“영문학과야.”
“아, 그러시구나. 대학 공부는 어려워요?”
“글쎄. 별로 특별한 건 없어. 중요한 건 수업이 어렵고 쉬운 게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니까.”
거의 지은이의 질문에 누나가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그래도 누나의 대답이 단답형에서 문장형으로 바뀌었다. 조금은 대하기가 편해졌단 뜻이겠지.
“운하야, 이거 네가 만든 반찬이지 맛있다.”
“운하는 요리를 잘 해.”
“가끔 운하를 보면, 저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같아요. 참한 색시 같다고 할까.”
“나도 가끔은 그렇게 느껴. 운하야, 너는 좋은 색시가 될 수 있을 거야.”
멋대로 남을 색시로 만든다.
식사가 끝났다. 지은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가봐야겠네요.”
“그래?”
지은이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지은이. 나도 누나도 지은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현관 앞에 섰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
“운하야, 내일 봐.”
“응.”
지은이가 누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고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어락을 풀며 현관문을 여는 지은이. 지은이가 한 번 더 인사를 하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았다.
“누나, 나 지은이 좀 배웅해주고 올게.”
“응.”
문이 닫히자 자동으로 잠긴 도어락을 다시 풀고, 밖으로 나갔다. 지은이는 그새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있었다.
“지은아.”
“아, 운하야.”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나를 눈치챈 지은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은이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문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우리.
“너희 누나 이쁘다. 그리고 많이 닮았네.”
“응.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
“혹시나 나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닐 거야.”
장담하지 못하겠다. 누나는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싫어하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언니 앞에서 너무 긴장했더니 손에서 땀이 막 나더라.”
지은이가 “확인해봐.”하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지은이의 말대로 손이 땀으로 축축하다. 평소에는 뜨거운 손이 땀 때문인지 차갑게 느껴진다. 잠시 서로 양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일 봐 운하야.”
“응.”
지은이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지은이. 지은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밖에서 서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들어오니, 누나가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틀어놓지 않은 채다. 누나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텔레비전 안 봐?”
“여자 친구 이쁘네. 키도 크고. 모델 같아.”
“그런가?”
“성격도 좋고, 착한 것 같더라.”
가라앉아 있는 누나의 말투. 누나를 기쁘게 할 말을 알고 있다. 당장 여자 친구와 헤어진다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지은이도 누나도 속이는 일이 되겠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은이와 누나를 행복하게 해보일 것이다.
“그래도 난 누나가 좋아.”
“거짓말.”
“정말이야. 지은이와는 곧 헤어질 거야.”
“거짓말. 거짓말 치지 마.”
거짓말이다. 어느새 지은이와 헤어지려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조금 아까 지은이한테서 너랑 같은 냄새가 나더라.”
누나가 말하는 순간,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누나. 그건.”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 샴푸 같은 건 우연히 같은 걸 쓸 수도 있으니까. 근데, 둘 다 방금 씻은 것처럼 그렇게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누나가 화가 났다. 눈에 눈물이 고여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 하다.
“날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어? 읍, 읍!”
누나에게 설명을 하는 것보다 먼저, 입을 맞췄다. 거부하는 누나의 손을 잡고 억지로.
“누나, 난 누나가 정말 좋아.”
“거짓말.”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
“믿게 해줄게.”
다시 누나에게 키스했다. 이번엔 거부하지 않는다. 누나를 소파에 그대로 뉘였다.
“운하야.”
누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조심히 닦아주었다. 혀와 혀가 얽히고, 뜨거운 숨결이 교차했다. 누나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도 누나의 옷을 벗겼다.
이런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아니면 누나와 지은이를 동시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둘 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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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사랑하기 위해 애를 쓰는 주인공입니다
“운하야,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걱정되는 투로 물어보는 지은이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그대로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근데, 운하야 저, 그거 안 하지 않았어? 괜찮아?”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행위에 몰두하다보니 사정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대신 체력이 다 빠져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괜찮다는 표시로 들어올렸다. 체력이 다 빠지고도 움직이면, 더 이상 몸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뱃속이 차갑게 식는다.. 그런 느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은이가 내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10분 정도 잠자코 누워 있으니 그나마 움직일 만해졌다. 힘이 다 빠진 시체 같은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가서 수건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지은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고마워.”
“당연하게 할 일이니까.”
행위를 끝마치고 여자를 챙겨주는 것은 남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의 몸을 닦아주고는 내 몸을 닦았다. 완전히 땀에 젖었다.
“차라리 샤워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게. 먼저 샤워해. 나는 뒷정리하고 있을게.”
“같이 샤워 해.”
지은이가 나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에너지를 다 빼버렸더니 반항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끌려갔다. 애초에 평소 체력이라도 끌려갔을 테지만.
샤워기 물을 틀고 같이 샤워를 시작했다. 바디워시로 충분히 거품이 난 바스타올로 서로의 몸을 닦아주었다. 내가 먼저, 그 다음은 지은이가. 생각보다 간지럽다. 하지만 기분 좋은 간지럼이었다.
얼굴에 거품을 묻히거나 물을 뿌리거나 장난도 쳤다. 힘이 빠져있으니까 장난도 힘이 많이 들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거실로 나갔다. 시간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5시 45분이다. 곧 있으면 누나가 올 것이다.
“지은아, 얼른 옷 입어야겠다. 누나가 곧 올 것 같아.”
“응.”
나도 얼른 옷을 입었다.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서 입었다. 일부러 낡고 오래된 옷으로 입었다. 깨끗하고 산 지 얼마 안 된 옷은 나중에 데이트 때 입을 생각이다. 핸드폰을 집었다. 누나가 어디 있는지 전화해볼 생각이다. 아까 하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야릇한 분위기가 되어서 잊어버렸다.
전화 신호가 가는 동안 이름 모를 음악이 흘러나왔다. 영어니까 팝송이겠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나, 학교야?”
“아니, 지금 집에 가는 중이야. 6시면 집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근데 무슨 일로 전화 했어?”
“그냥 전화하고 싶어서.”
“뭐야 그게. 쿡쿡. 금방 들어갈게.”
“응.”
통화가 짧게 끝났다. 15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 방에서 나와서 욕실에 가보니 지은이가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다.
“지은아, 머리 말리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10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왜?”
“이제 곧 누나가 올 것 같아서.”
“그래? 언제쯤 오는데?”
“15분 정도래.”
“15분이면 물기도 없이 충분히 말릴 수 있어.”
지은이가 장담했다. 아니, 그보다.
“지은아, 15분이 아니라. 그 전에 나가야 돼.”
“왜?”
왜라니.
“누나한테 여기 있는 거 들키잖아.”
“들키면 뭐 어때.”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나 지은이 지금 우리 누나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좋지 않은데.
“머리 감은 티만 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고등학생인데 이상한 짓 했다고 생각하겠어?”
곤란하다. 지은이는 확실히 우리 누나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다.
“누나랑 만나볼 거야?”
“응. 어차피 만나게 될 건데 이 기회에 만나보려고. 오늘 운하네 집에 온 이유도 그거야.”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다. 나는 지금부터 지은이도 누나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둘 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오늘 둘이 만나버리면, 내 결심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하지만 지은이에게 돌아가라고 종용할 수도 없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잔머리는 좋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상황을 타개할 만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상태로 15분이 지났다. 그동안의 성과란, 지은이가 머리를 물기 하나 없이 깨끗이 말렸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태연자약하게 거실 소파에 앉았다.
“너희 누나 이름 윤하 언니라고 그랬지.”
“응.”
“조금 긴장된다.”
지은이는 조금 긴장되는 정도지만,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6시 정각. 누나가 정말로 딱 6시에 도착했다. 도어락이 열리며 현관문이 열렸다.
“운하야, 나 왔어!”
기분이 좋은 듯 밝은 목소리로 들어오는 누나. 신발을 벗어던지며 현관에서 올라왔다. 그렇게 신발 벗을 때 아무렇게나 던져놓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누나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다가, 지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굳어가는 표정. 결국 절대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아, 누구?”
“그게,”
“아, 저, 운하 여자 친구인 정지은이라고 합니다.”
“아.”
내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지은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소개를 했다. 긴장했는지 지은이의 표정이 굳어있다. 다른 이유로, 누나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여자 친구구나.”
“네.”
“아, 재밌게 놀다가. 응.”
누나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슥 들어간다. 누나를 따라가려다 따라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지은이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저, 나, 지금 미움 받은 거야?”
“아마도 놀라서 그랬을 거야. 사실 부끄러워서 아직 누나한테 여자 친구 얘기를 안 하고 있었거든. 원래 우리 집에 남자도 데려온 적이 없는데 갑자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으니까.”
“그러면 안심이야.”
어떻게든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 다행히 변명이 먹힌 듯하다. 지은이가 갑자기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아니, 심호흡이다. 계속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쉰다.
“아, 긴장했더니 힘들다.”
“괜찮아?”
“응. 근데 운하야,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저녁 먹고 가도 될까?”
뭐시라.
“나, 운하네 언니랑 친해지러 온 거거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잖아.”
물러서는 편이 나에게는 좋다. 마땅히 거절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럼 누나한테 물어볼게.”
누나의 방에 이렇게 들어가기 싫은 적이 없었다. 누나는 지금 책상에 앉아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 누나. 지은이가 저녁 먹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괜찮아?”
“어, 괜찮아. 응.”
누나가 바로 승낙했다.
결국 지은이도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한 사람 분의 밥그릇을 더 펐다. 실로 몇 년 만에 식탁에 나와 누나 이외의 사람이 앉게 되었다. 한 명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식탁의 느낌이 달랐다.
지은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이 있다. 지은이를 자세히 알게 된 최근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저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친화력이 어느 정도는 누나에게도 먹혀들었는지, 지금도 조금 어색하지만 아까처럼 숨이 막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언니는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이시죠?”
“응.”
“무슨 과세요?”
“영문학과야.”
“아, 그러시구나. 대학 공부는 어려워요?”
“글쎄. 별로 특별한 건 없어. 중요한 건 수업이 어렵고 쉬운 게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니까.”
거의 지은이의 질문에 누나가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그래도 누나의 대답이 단답형에서 문장형으로 바뀌었다. 조금은 대하기가 편해졌단 뜻이겠지.
“운하야, 이거 네가 만든 반찬이지 맛있다.”
“운하는 요리를 잘 해.”
“가끔 운하를 보면, 저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같아요. 참한 색시 같다고 할까.”
“나도 가끔은 그렇게 느껴. 운하야, 너는 좋은 색시가 될 수 있을 거야.”
멋대로 남을 색시로 만든다.
식사가 끝났다. 지은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가봐야겠네요.”
“그래?”
지은이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지은이. 나도 누나도 지은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현관 앞에 섰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
“운하야, 내일 봐.”
“응.”
지은이가 누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고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어락을 풀며 현관문을 여는 지은이. 지은이가 한 번 더 인사를 하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았다.
“누나, 나 지은이 좀 배웅해주고 올게.”
“응.”
문이 닫히자 자동으로 잠긴 도어락을 다시 풀고, 밖으로 나갔다. 지은이는 그새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있었다.
“지은아.”
“아, 운하야.”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나를 눈치챈 지은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은이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문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우리.
“너희 누나 이쁘다. 그리고 많이 닮았네.”
“응.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
“혹시나 나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닐 거야.”
장담하지 못하겠다. 누나는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싫어하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언니 앞에서 너무 긴장했더니 손에서 땀이 막 나더라.”
지은이가 “확인해봐.”하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지은이의 말대로 손이 땀으로 축축하다. 평소에는 뜨거운 손이 땀 때문인지 차갑게 느껴진다. 잠시 서로 양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일 봐 운하야.”
“응.”
지은이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지은이. 지은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밖에서 서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들어오니, 누나가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틀어놓지 않은 채다. 누나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텔레비전 안 봐?”
“여자 친구 이쁘네. 키도 크고. 모델 같아.”
“그런가?”
“성격도 좋고, 착한 것 같더라.”
가라앉아 있는 누나의 말투. 누나를 기쁘게 할 말을 알고 있다. 당장 여자 친구와 헤어진다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지은이도 누나도 속이는 일이 되겠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은이와 누나를 행복하게 해보일 것이다.
“그래도 난 누나가 좋아.”
“거짓말.”
“정말이야. 지은이와는 곧 헤어질 거야.”
“거짓말. 거짓말 치지 마.”
거짓말이다. 어느새 지은이와 헤어지려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조금 아까 지은이한테서 너랑 같은 냄새가 나더라.”
누나가 말하는 순간,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누나. 그건.”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 샴푸 같은 건 우연히 같은 걸 쓸 수도 있으니까. 근데, 둘 다 방금 씻은 것처럼 그렇게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누나가 화가 났다. 눈에 눈물이 고여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 하다.
“날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어? 읍, 읍!”
누나에게 설명을 하는 것보다 먼저, 입을 맞췄다. 거부하는 누나의 손을 잡고 억지로.
“누나, 난 누나가 정말 좋아.”
“거짓말.”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
“믿게 해줄게.”
다시 누나에게 키스했다. 이번엔 거부하지 않는다. 누나를 소파에 그대로 뉘였다.
“운하야.”
누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조심히 닦아주었다. 혀와 혀가 얽히고, 뜨거운 숨결이 교차했다. 누나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도 누나의 옷을 벗겼다.
이런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아니면 누나와 지은이를 동시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둘 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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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사랑하기 위해 애를 쓰는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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