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다음 주에 시험을 앞두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 그런지 다른 때에 비해 반 녀석들이 시험에 압박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작년과는 달리 반 녀석들이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한다. 나도 미리 준비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타서 좀 더 기합을 넣어 공부를 하고 있다.
누나는 이미 시험이 끝나서 방학을 했다. 대학교는 방학을 금방 한다는 점이 부럽다. 고등학교는 대체 학생들에게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지 시험이 끝나도 2주는 붙잡고 있는다. 게다가 방학을 해도 그건 형식상 하는 것이고, 그래도 학생들은 매일 학교에 나온다. 뭐, 나는 안 나오겠지만.
나는 내 원래의 목표대로 누나와 지은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둘을 최대한 교묘하게 속이고 있다. 누나에게는 지은이와 얼마 안 가 헤어질 것이라고 속였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지자고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지은이와는 매주 한 번은 데이트를 하면서 평범한 연인처럼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둘을 속이는 것에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시험이 끝나고 이주일 후면 방학이다. 방학과 동시에 부모님의 기일이다. 다음 주에 제사를 위해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아마 다음 주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우리 남매와 기껏해야 삼촌밖에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 지은이네 부모님과 첫 대면을 했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격투기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미지대로 커다란 체구의 근육남이었지만, 또 생김새와는 다르게 세심한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지은이의 어머니는 과연 지은이 자매의 어머니답게 매우 아름다우셨다. 두 분은 내게 매우 잘해주셔서 타인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도 두 분을 대하는데 부담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지은이의 동생과도 꽤 친해졌다. 지은이의 동생, 유은이는 과연 지은이의 동생답게 친화력이 넘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오늘은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를 하는 날이다. 정확히는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다. 지난주부터 하고 있는데, 횟수로 치면 오늘까지 합쳐서 다섯 번 정도 된다. 지은이를 가르치러 갔다가 지은이네 부모님도 뵙게 된 것이다.
학교의 정규 수업이 끝났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옆에서 은미가 말을 걸었다.
“저, 운하야.”
“응?”
“혹시, 아, 아니야.”
“그냥 말해도 되는데.”
결국 은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의아스러웠지만, 지은이가 어느새 가방을 챙기고 다가왔기 때문에 작별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시험기간이다보니 지은이와 하는 얘기도 대부분 시험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지은이가 갑자기 공부에 관심이 많아졌다. 기필코 성적을 대폭 올리겠다는 각오다. 이해가 안 되는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는 일이 늘어났다.
“운하는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아. 뭐든지 물어봐도 다 알고.”
“그냥 할 일이 없으면 공부를 해서 그래.”
“아니야. 정말 머리가 좋아. 3년 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어.”
“3년 전에? 뭘 봤는데?”
“비밀이야.”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대답해주지도 않다니, 너무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가지 않는데. 한동안 대답을 재촉하다가 결국 말을 해주지 않아서 포기했다. 진짜 궁금하다.
지은이네 집에 도착했다. 지은이가 아버지의 부탁으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지은이 방에 들어가서 공부할 것을 준비했다.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정리해놓은 노트를 꺼냈다. 남을 가르치려면 그 분야에서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물론 가르치는 기술이나 집중력을 높이는 화술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엇이든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은이를 가르치기 위해 과목별로 노트 정리를 하다 보니, 그동안 몰랐거나 놓쳤던 부분을 다시 체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까지 남을 가르쳐본 기억이 없다. 대부분의 내 나이 또래 학생들이 그럴 것이다. 물론 가끔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는 녀석들에게 설명해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과외 하듯 한 것은 처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생이 되면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가르칠 범위를 한 번 훑어보는 동안 지은이가 방으로 돌아왔다.
“물 다 줬어?”
“응.”
“자, 그럼 이제 공부 시작하자. 수학이랑 국어랑 뭐부터 할래?”
“음. 국어.”
문학책과 시험범위를 정리해놓은 노트를 꺼내들었다.
“언어영역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학을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어려워하는데, 전혀 안 그래. 만약에 문학을 진짜 대학 교수 정도 돼서 파고들면 몰라도,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 알만한 게 나오거든.”
“너는 공부를 잘 하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얼마나 어려운데.”
“흠, 일단은 시험공부를 하는 거니까, 내신 위주로 가르쳐 줄게. 일단 문학을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 뭐랄까, 좀 더 쉽다는 마음가짐으로 봐야 돼.”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내가 전교 1등 했지.”
역시 설명이란 것은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싶은데 막상 말을 하고 나면 나조차도 뭐라고 말하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문학과목도 어떻게 보면 수학이랑 똑같아. 공식이 있고, 그 공식을 외우면 되거든. 만약에 문학을 서술형으로 낸다면 답이 무궁무진해지겠지. 하지만 객관식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문제를 푸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문제를 내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뻔한 문제를 낼 수밖에 없어.”
“전혀 뻔하지 않은데.”
“답이 뻔하니까, 최대한 헷갈리게 내는 거지. 앞에 말한 것처럼 객관식이라서 1번부터 5번 안에는 무조건 납득할 만한 정해진 답을 써놔야 돼. 그렇다보니, 아무리 문학 작품이 많고 다양해도 그 패턴이 정해질 수밖에 없어. 이렇게 얘기하면 더 모를 것 같으니까 일단 지문을 읽으면서 해보자.”
“응.”
지은이를 가르치는 동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벌써 6시 30분이 되었다. 누나에게 조금 늦을 거라고 말했으니 아마 저녁을 먹고 있겠지. 문학 공부는 시험범위의 절반 정도까지 끝났다.
“운하야, 배 안 고파?”
“조금 고프긴 한데.”
“그럼 밥 먹자.”
지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며 방에서 나간다. 나도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부모님이랑 유은이 아직 안 들어왔네?”
“응. 오늘 늦게 들어와. 아빠 우리 체육관 선수 시합 때문에 태국에 가셨어.”
“시합을 태국에서 해?”
“응, 원정 경기야. 어쨌든 그래서 며칠 동안 안 들어오셔. 그리고 엄마는 아는 사람이랑 약속이 있어서 12시는 다 돼서 들어오신다고 그랬어.”
그렇구나. 그런데 유은이는 왜 안 들어오는 거지? 하고 물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시켜먹으라고 돈 주고 가셨어. 뭐 먹고 싶어?”
“음, 글쎄.”
“피자 먹을까?”
“그러지 뭐.”
피자라. 정말 오랜만, 이 아니라 지난번에 누나와 데이트를 할 때 먹었구나.
“사이즈는 스몰로 하면 되겠지?”
“응.”
지은이가 전화로 피자를 시키고, 나는 그동안 지은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정리해놓은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지은이에게 공부하라고 빌려줄 생각인데, 혹시 고칠 곳이 없는지 체크하기 위해서다.
“공부하고 있는 거야?”
“그냥, 고칠 데 없는지 확인하고 있어.”
“그게 그거지.”
지은이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샴푸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다.
“지은아, 혹시 향수 뿌렸어?”
“응. 어때?”
“좋다.”
원래 나는 향수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다지 향기롭다고 생각되는 냄새도 아닐뿐더러, 맡고 있으면 어지럽기까지 해서다. 근데 지은이가 뿌린 향수는 별로 독하지 않고 은은해서 괜찮다.
“한번 사봤어. 괜찮아하니까 다행이다.”
“나 원래 향수 냄새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냄새는 좋다.”
한동안 지은이가 나를 끌어안은 자세로 있었다. 이대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뜻한 지은이의 품을 느끼면서, 향기로운 냄새도 맡고. 등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느낌도 괜찮다. 이건 좀 낭만적이지 못한가?
“에잇!”
“윽!”
갑자기 지은이가 나를 내리 눌러서 그대로 상체가 꺾였다. 운동은커녕 걷는 것조차 잘 하지 않는 나의 유연하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최근에는 온몸에 근육통을 달고 사는 터라 더 괴로웠다.
“했다 이거지.”
“꺄악!”
지은이는 간지럼에 약하다. 나는 간지럼에 강하다. 그래서 장난을 치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다.
“졌어! 기권! 기권!”
지은이를 바닥에 엎어놓고 등에 올라타 간지럼을 태웠다. 패배를 시인했지만 봐주는 것은 없다. 계속 간지럼을 태웠다. 지은이가 갑자기 간지럼을 극복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제압했다. 잠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동안 내가 바닥에 깔리고 지은이가 내 양팔을 잡아 못 움직이게 제압했다.
“지은아, 기권.”
“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운하는 간지럼도 잘 안타니까.”
“기권.”
열심히 기권을 선언했지만 전혀 듣지 않는 지은이. 갑자기 지은이가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내 오른팔을 잡고는 바닥에 누웠다. 잠깐, 이 자세는
“그럼 일단 암바.”
“잠깐, 지은아. 그거 아퍼. 아프다고.”
“괜찮아. 안 아프게 할게.”
안 아픈 암바가 어딨어.
“으아아악!”
결국 지은이에게 암바를 당하며 장난 같은 싸움으로 시작하여 종합격투기로 막을 내렸다.
“으으, 아파.”
“많이 아파?”
“괜찮아.”
내가 일부러 과장스럽게 아픈 척을 하니 지은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본다. 지은이는 사실 힘도 주지 않았다. 만약에 힘을 줬으면 여기서 피자를 먹는 대신 병원에서 링겔을 맞았을 것이다.
“괜찮은 거지?”
“응, 그냥 장난친 거야. 힘도 안 줬는데 왜 아프겠어. 그것보다 치마 입고 그런 기술 쓰지 마.”
“변태.”
순수한 의도로 한 말인데 변태 취급을 받았다.
잠시 지은이와 장난을 치느라 바닥에 내팽개쳐놓았던 문학 정리 노트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 부분에 또 고칠 것이 없는지 다시 훑어보았다. 음, 이 정도면 딱히 수정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 같다.
“자, 이 정도면 고칠 데도 거의 없겠다. 시험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운하야, 정말 고마워.”
지은이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쩐지 쑥스럽다.
“그럼, 피자 올 때가지 우리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자.”
“그럴까?”
지은이와 함께 거실로 나가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소파에 같이 붙어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이렇게 있으니 어쩐지 집에서 누나와 있는 기분이다. 지은이도 쿠션을 끌어안고 텔레비전을 본다. 여자는 뭔가 끌어안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자가 도착했다. 지은이가 나가서 현관문을 열어주고 돈을 지불했다.
“맛있게 드세요.”
“안녕히 가세요.”
공손히 인사하며 다시 돌아가는 피자 배달부. 우리도 피자배달부에게 인사했다.
“여기 피자가 꽤 맛있어. 가격도 비싸지 않고.”
“괜찮으면 나도 번호 외웠다가 시켜야겠다.”
그러고 보면 집에서 뭔가를 시켜먹었던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늘 집에서 요리를 해먹다보니까 배달을 시킨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누나도 원래 어릴 때부터 피자를 좋아했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누나와 함께 뭔가를 시켜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피자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괜찮은 맛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에 누나와 데이트하면서 갔던 피자집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가격 차이는 1.5배는 그쪽이 비쌌는데.
“여기 괜찮지.”
“그러네. 다음에 집에서 시켜 먹어야지.”
피자와 함께 온 전단지에 쓰여 있는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놓았다.
작은 사이즈를 시켜서 그랬는지 금방 사라지는 피자. 한 판이 사라질 때쯤 되니 배가 적당히 찼다. 지은이 방에 가서 가방을 뒤져 치약 칫솔을 꺼냈다. 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나 양치 좀 하고 올게.”
“기다려 나도 같이 해.”
지은이와 함께 양치를 하게 되었다. 윗니는 위에서 아래로. 아랫니는 아래서 위로. 안쪽도 빠짐없이. 어금니도 정교히. 칫솔이 잘 안 닿는 부분이라도 신경 써서 닦는다.
“운하는 양치를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학교에서도 점심 먹으면 꼭 하고. 여자보다 더 깔끔한 것 같다.”
“이가 상하면 돈이 많이 나가잖아.”
내가 이렇게 양치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남매는 삼촌에게서 생활비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그래서 늘 감사히 여기고,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가 썩어서 충치를 치료하는 등의 돈이 나가면 은혜는 고사하고 삼촌에게 짐만 될 것이다. 그래서 양치를 꾸준히 하게 되었다. 치과는 현재 가정의 돈을 가장 많이 빼먹는 것 중 하나니까. 삼촌은 아마 우리가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해도 아낌없이 우리에게 돈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삼촌에게 신세를 질 수 없다.
다른 이유로는, 역시 여자 친구 앞에서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다.
양치를 다 하고 나서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 안에 국어를 시험범위까지 끝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우는 소리르 했지만, 오늘 한 과목을 끝내지 않으면 일정이 더 빡빡해진다. 다행히 뒤쪽은 지은이도 공부를 해놨고, 앞부분보다는 쉬워서 금방 정리가 끝났다.
“아, 이제 끝났다.”
“내일은 수학 가르쳐 줄게.”
“고마워.”
어느새 시간이 8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 슬슬 집으로 가야 할 때다. 누나에게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늦는다고 말해두었다. 일단 가방을 챙겨놓고, 지은이와 함께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은아, 나 누나한테 전화 좀 할게. 이따가 들어간다고.”
“응.”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니 전화가 연결된다. 이름 모를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가 몇 초 나오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나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들어올 거야? 더 늦게 들어와?”
“한 9시 정도에 들어갈 것 같아.”
“알았어. 얼른 들어와.”
누나와의 통화가 짧게 끝났다.
“9시까지 돌아가면, 이제 얼마 안 있어 가야겠네.”
“한 45분에 가도 되니까. 이제 30분은 시간이 있어.”
“30분밖에 없는 거지.”
지은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30분은 짧다. 얼마 있지 않아 시간이 다 지나갈 것이다.
“운하야, 너는 대학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아직 정한 건 없어.”
딱히 어디로 가겠다고 한 군데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몇 군데 갈 만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있다. 대학 이름을 몇 개 나열했다.
“나 운하랑 같은 대학에 가고 싶어.”
지은이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많이 힘들겠지만, 한번 하는 데까지 해보고 싶어.”
지은이가 갑자기 공부에 집중하는 이유가 이거구나. 지은이의 성적은 중간에서 중상의 사이정도 된다. 내가 가려는 대학은 상위의 성적을 필요로 한다. 지금 지은이의 성적으로는 솔직히 무리이다. 지은이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나도 많이 무리라는 건 알아. 그래도 최대한 해볼 거야.”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금부터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대학에 붙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요령이거든. 전형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어떤 식으로 대비를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합격확률을 높일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지은이가 몸을 날리듯 나에게 포옹했다. 당연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침대 위에서 지은이에게 깔렸다. 동시에 지은이가 나에게 키스했다. 자연스럽게 혀와 혀가 얽혔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지은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교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 지은아.”
“왜? 혹시 콘돔 없어?”
“아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 괜찮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최근에는 콘돔을 가지고 다닌다. 지금까지 세 번, 피임기구나 피임약 없이 행위를 했다. 운 좋게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아무런 준비가 없으면 분명히 언젠가는 뉴스에 내 이름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혹시나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서 콘돔을 가방 한 켠에 넣어두었다.
변명 같지만, 더 이상 지은이와도 누나와도 성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미성년자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콘돔도 만약을 대비해서 사놓은 것이지, 사용하기 위해서 산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사실 지은이와 누나 모두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로 5일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
문제는 5일이 지난 후, 토요일이었다. 그날 토요일에도 지은이네 집에 갔다. 그때도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쉬는 동안, 지은이가 갑자기 소지품 검사를 한다며 내 가방을 뒤졌다. 그러다 지은이가 콘돔을 발견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날 지은이네 집에 나와 지은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어쩌다 보니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다.
정말로 어쩌다 보니다.
“잠깐, 지은아. 누가 오면 어떡해.”
“안 와.”
지은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부모님은 그렇다 쳐도 유은이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잖아.”
“괜찮아 안 와.”
“어떻게 장담해.”
지은이는 확신하듯 말하고 있지만, 정말 위험하다. 만약에 누군가가 본다면 ‘어라, 들켰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지은아,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흠. 싫어.”
“갑자기 유은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진짜.”
“안 들어온다니까.”
이대로 가면, 나는 금방 이성을 잃어버리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이런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차피 이미 선을 넘어버린 거 더 넘는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망설임이 있는 결심은 쉽게 부서진다. 유은이의 존재는 현재 내 이성을 잡는 마지막 끈이다.
“유은이는 걱정하지 마.”
지은이가 나에게 다시 입을 맞춘다. 천천히 떨어지며 요염하게 웃었다. 이성의 끝자락이 서서히 부서져나간다.
“내가 9시 전에 들어오면 죽인다고 그랬어.”
누나는 이미 시험이 끝나서 방학을 했다. 대학교는 방학을 금방 한다는 점이 부럽다. 고등학교는 대체 학생들에게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지 시험이 끝나도 2주는 붙잡고 있는다. 게다가 방학을 해도 그건 형식상 하는 것이고, 그래도 학생들은 매일 학교에 나온다. 뭐, 나는 안 나오겠지만.
나는 내 원래의 목표대로 누나와 지은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둘을 최대한 교묘하게 속이고 있다. 누나에게는 지은이와 얼마 안 가 헤어질 것이라고 속였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지자고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지은이와는 매주 한 번은 데이트를 하면서 평범한 연인처럼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둘을 속이는 것에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시험이 끝나고 이주일 후면 방학이다. 방학과 동시에 부모님의 기일이다. 다음 주에 제사를 위해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아마 다음 주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우리 남매와 기껏해야 삼촌밖에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 지은이네 부모님과 첫 대면을 했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격투기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미지대로 커다란 체구의 근육남이었지만, 또 생김새와는 다르게 세심한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지은이의 어머니는 과연 지은이 자매의 어머니답게 매우 아름다우셨다. 두 분은 내게 매우 잘해주셔서 타인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도 두 분을 대하는데 부담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지은이의 동생과도 꽤 친해졌다. 지은이의 동생, 유은이는 과연 지은이의 동생답게 친화력이 넘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오늘은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를 하는 날이다. 정확히는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다. 지난주부터 하고 있는데, 횟수로 치면 오늘까지 합쳐서 다섯 번 정도 된다. 지은이를 가르치러 갔다가 지은이네 부모님도 뵙게 된 것이다.
학교의 정규 수업이 끝났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옆에서 은미가 말을 걸었다.
“저, 운하야.”
“응?”
“혹시, 아, 아니야.”
“그냥 말해도 되는데.”
결국 은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의아스러웠지만, 지은이가 어느새 가방을 챙기고 다가왔기 때문에 작별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시험기간이다보니 지은이와 하는 얘기도 대부분 시험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지은이가 갑자기 공부에 관심이 많아졌다. 기필코 성적을 대폭 올리겠다는 각오다. 이해가 안 되는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는 일이 늘어났다.
“운하는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아. 뭐든지 물어봐도 다 알고.”
“그냥 할 일이 없으면 공부를 해서 그래.”
“아니야. 정말 머리가 좋아. 3년 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어.”
“3년 전에? 뭘 봤는데?”
“비밀이야.”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대답해주지도 않다니, 너무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가지 않는데. 한동안 대답을 재촉하다가 결국 말을 해주지 않아서 포기했다. 진짜 궁금하다.
지은이네 집에 도착했다. 지은이가 아버지의 부탁으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지은이 방에 들어가서 공부할 것을 준비했다.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정리해놓은 노트를 꺼냈다. 남을 가르치려면 그 분야에서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물론 가르치는 기술이나 집중력을 높이는 화술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엇이든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은이를 가르치기 위해 과목별로 노트 정리를 하다 보니, 그동안 몰랐거나 놓쳤던 부분을 다시 체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까지 남을 가르쳐본 기억이 없다. 대부분의 내 나이 또래 학생들이 그럴 것이다. 물론 가끔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는 녀석들에게 설명해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과외 하듯 한 것은 처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생이 되면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가르칠 범위를 한 번 훑어보는 동안 지은이가 방으로 돌아왔다.
“물 다 줬어?”
“응.”
“자, 그럼 이제 공부 시작하자. 수학이랑 국어랑 뭐부터 할래?”
“음. 국어.”
문학책과 시험범위를 정리해놓은 노트를 꺼내들었다.
“언어영역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학을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어려워하는데, 전혀 안 그래. 만약에 문학을 진짜 대학 교수 정도 돼서 파고들면 몰라도,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 알만한 게 나오거든.”
“너는 공부를 잘 하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얼마나 어려운데.”
“흠, 일단은 시험공부를 하는 거니까, 내신 위주로 가르쳐 줄게. 일단 문학을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 뭐랄까, 좀 더 쉽다는 마음가짐으로 봐야 돼.”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내가 전교 1등 했지.”
역시 설명이란 것은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싶은데 막상 말을 하고 나면 나조차도 뭐라고 말하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문학과목도 어떻게 보면 수학이랑 똑같아. 공식이 있고, 그 공식을 외우면 되거든. 만약에 문학을 서술형으로 낸다면 답이 무궁무진해지겠지. 하지만 객관식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문제를 푸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문제를 내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뻔한 문제를 낼 수밖에 없어.”
“전혀 뻔하지 않은데.”
“답이 뻔하니까, 최대한 헷갈리게 내는 거지. 앞에 말한 것처럼 객관식이라서 1번부터 5번 안에는 무조건 납득할 만한 정해진 답을 써놔야 돼. 그렇다보니, 아무리 문학 작품이 많고 다양해도 그 패턴이 정해질 수밖에 없어. 이렇게 얘기하면 더 모를 것 같으니까 일단 지문을 읽으면서 해보자.”
“응.”
지은이를 가르치는 동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벌써 6시 30분이 되었다. 누나에게 조금 늦을 거라고 말했으니 아마 저녁을 먹고 있겠지. 문학 공부는 시험범위의 절반 정도까지 끝났다.
“운하야, 배 안 고파?”
“조금 고프긴 한데.”
“그럼 밥 먹자.”
지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며 방에서 나간다. 나도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부모님이랑 유은이 아직 안 들어왔네?”
“응. 오늘 늦게 들어와. 아빠 우리 체육관 선수 시합 때문에 태국에 가셨어.”
“시합을 태국에서 해?”
“응, 원정 경기야. 어쨌든 그래서 며칠 동안 안 들어오셔. 그리고 엄마는 아는 사람이랑 약속이 있어서 12시는 다 돼서 들어오신다고 그랬어.”
그렇구나. 그런데 유은이는 왜 안 들어오는 거지? 하고 물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시켜먹으라고 돈 주고 가셨어. 뭐 먹고 싶어?”
“음, 글쎄.”
“피자 먹을까?”
“그러지 뭐.”
피자라. 정말 오랜만, 이 아니라 지난번에 누나와 데이트를 할 때 먹었구나.
“사이즈는 스몰로 하면 되겠지?”
“응.”
지은이가 전화로 피자를 시키고, 나는 그동안 지은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정리해놓은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지은이에게 공부하라고 빌려줄 생각인데, 혹시 고칠 곳이 없는지 체크하기 위해서다.
“공부하고 있는 거야?”
“그냥, 고칠 데 없는지 확인하고 있어.”
“그게 그거지.”
지은이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샴푸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다.
“지은아, 혹시 향수 뿌렸어?”
“응. 어때?”
“좋다.”
원래 나는 향수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다지 향기롭다고 생각되는 냄새도 아닐뿐더러, 맡고 있으면 어지럽기까지 해서다. 근데 지은이가 뿌린 향수는 별로 독하지 않고 은은해서 괜찮다.
“한번 사봤어. 괜찮아하니까 다행이다.”
“나 원래 향수 냄새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냄새는 좋다.”
한동안 지은이가 나를 끌어안은 자세로 있었다. 이대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뜻한 지은이의 품을 느끼면서, 향기로운 냄새도 맡고. 등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느낌도 괜찮다. 이건 좀 낭만적이지 못한가?
“에잇!”
“윽!”
갑자기 지은이가 나를 내리 눌러서 그대로 상체가 꺾였다. 운동은커녕 걷는 것조차 잘 하지 않는 나의 유연하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최근에는 온몸에 근육통을 달고 사는 터라 더 괴로웠다.
“했다 이거지.”
“꺄악!”
지은이는 간지럼에 약하다. 나는 간지럼에 강하다. 그래서 장난을 치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다.
“졌어! 기권! 기권!”
지은이를 바닥에 엎어놓고 등에 올라타 간지럼을 태웠다. 패배를 시인했지만 봐주는 것은 없다. 계속 간지럼을 태웠다. 지은이가 갑자기 간지럼을 극복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제압했다. 잠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동안 내가 바닥에 깔리고 지은이가 내 양팔을 잡아 못 움직이게 제압했다.
“지은아, 기권.”
“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운하는 간지럼도 잘 안타니까.”
“기권.”
열심히 기권을 선언했지만 전혀 듣지 않는 지은이. 갑자기 지은이가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내 오른팔을 잡고는 바닥에 누웠다. 잠깐, 이 자세는
“그럼 일단 암바.”
“잠깐, 지은아. 그거 아퍼. 아프다고.”
“괜찮아. 안 아프게 할게.”
안 아픈 암바가 어딨어.
“으아아악!”
결국 지은이에게 암바를 당하며 장난 같은 싸움으로 시작하여 종합격투기로 막을 내렸다.
“으으, 아파.”
“많이 아파?”
“괜찮아.”
내가 일부러 과장스럽게 아픈 척을 하니 지은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본다. 지은이는 사실 힘도 주지 않았다. 만약에 힘을 줬으면 여기서 피자를 먹는 대신 병원에서 링겔을 맞았을 것이다.
“괜찮은 거지?”
“응, 그냥 장난친 거야. 힘도 안 줬는데 왜 아프겠어. 그것보다 치마 입고 그런 기술 쓰지 마.”
“변태.”
순수한 의도로 한 말인데 변태 취급을 받았다.
잠시 지은이와 장난을 치느라 바닥에 내팽개쳐놓았던 문학 정리 노트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 부분에 또 고칠 것이 없는지 다시 훑어보았다. 음, 이 정도면 딱히 수정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 같다.
“자, 이 정도면 고칠 데도 거의 없겠다. 시험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운하야, 정말 고마워.”
지은이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쩐지 쑥스럽다.
“그럼, 피자 올 때가지 우리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자.”
“그럴까?”
지은이와 함께 거실로 나가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소파에 같이 붙어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이렇게 있으니 어쩐지 집에서 누나와 있는 기분이다. 지은이도 쿠션을 끌어안고 텔레비전을 본다. 여자는 뭔가 끌어안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자가 도착했다. 지은이가 나가서 현관문을 열어주고 돈을 지불했다.
“맛있게 드세요.”
“안녕히 가세요.”
공손히 인사하며 다시 돌아가는 피자 배달부. 우리도 피자배달부에게 인사했다.
“여기 피자가 꽤 맛있어. 가격도 비싸지 않고.”
“괜찮으면 나도 번호 외웠다가 시켜야겠다.”
그러고 보면 집에서 뭔가를 시켜먹었던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늘 집에서 요리를 해먹다보니까 배달을 시킨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누나도 원래 어릴 때부터 피자를 좋아했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누나와 함께 뭔가를 시켜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피자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괜찮은 맛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에 누나와 데이트하면서 갔던 피자집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가격 차이는 1.5배는 그쪽이 비쌌는데.
“여기 괜찮지.”
“그러네. 다음에 집에서 시켜 먹어야지.”
피자와 함께 온 전단지에 쓰여 있는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놓았다.
작은 사이즈를 시켜서 그랬는지 금방 사라지는 피자. 한 판이 사라질 때쯤 되니 배가 적당히 찼다. 지은이 방에 가서 가방을 뒤져 치약 칫솔을 꺼냈다. 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나 양치 좀 하고 올게.”
“기다려 나도 같이 해.”
지은이와 함께 양치를 하게 되었다. 윗니는 위에서 아래로. 아랫니는 아래서 위로. 안쪽도 빠짐없이. 어금니도 정교히. 칫솔이 잘 안 닿는 부분이라도 신경 써서 닦는다.
“운하는 양치를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학교에서도 점심 먹으면 꼭 하고. 여자보다 더 깔끔한 것 같다.”
“이가 상하면 돈이 많이 나가잖아.”
내가 이렇게 양치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남매는 삼촌에게서 생활비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그래서 늘 감사히 여기고,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가 썩어서 충치를 치료하는 등의 돈이 나가면 은혜는 고사하고 삼촌에게 짐만 될 것이다. 그래서 양치를 꾸준히 하게 되었다. 치과는 현재 가정의 돈을 가장 많이 빼먹는 것 중 하나니까. 삼촌은 아마 우리가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해도 아낌없이 우리에게 돈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삼촌에게 신세를 질 수 없다.
다른 이유로는, 역시 여자 친구 앞에서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다.
양치를 다 하고 나서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 안에 국어를 시험범위까지 끝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우는 소리르 했지만, 오늘 한 과목을 끝내지 않으면 일정이 더 빡빡해진다. 다행히 뒤쪽은 지은이도 공부를 해놨고, 앞부분보다는 쉬워서 금방 정리가 끝났다.
“아, 이제 끝났다.”
“내일은 수학 가르쳐 줄게.”
“고마워.”
어느새 시간이 8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 슬슬 집으로 가야 할 때다. 누나에게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늦는다고 말해두었다. 일단 가방을 챙겨놓고, 지은이와 함께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은아, 나 누나한테 전화 좀 할게. 이따가 들어간다고.”
“응.”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니 전화가 연결된다. 이름 모를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가 몇 초 나오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나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들어올 거야? 더 늦게 들어와?”
“한 9시 정도에 들어갈 것 같아.”
“알았어. 얼른 들어와.”
누나와의 통화가 짧게 끝났다.
“9시까지 돌아가면, 이제 얼마 안 있어 가야겠네.”
“한 45분에 가도 되니까. 이제 30분은 시간이 있어.”
“30분밖에 없는 거지.”
지은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30분은 짧다. 얼마 있지 않아 시간이 다 지나갈 것이다.
“운하야, 너는 대학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아직 정한 건 없어.”
딱히 어디로 가겠다고 한 군데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몇 군데 갈 만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있다. 대학 이름을 몇 개 나열했다.
“나 운하랑 같은 대학에 가고 싶어.”
지은이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많이 힘들겠지만, 한번 하는 데까지 해보고 싶어.”
지은이가 갑자기 공부에 집중하는 이유가 이거구나. 지은이의 성적은 중간에서 중상의 사이정도 된다. 내가 가려는 대학은 상위의 성적을 필요로 한다. 지금 지은이의 성적으로는 솔직히 무리이다. 지은이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나도 많이 무리라는 건 알아. 그래도 최대한 해볼 거야.”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금부터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대학에 붙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요령이거든. 전형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어떤 식으로 대비를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합격확률을 높일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지은이가 몸을 날리듯 나에게 포옹했다. 당연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침대 위에서 지은이에게 깔렸다. 동시에 지은이가 나에게 키스했다. 자연스럽게 혀와 혀가 얽혔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지은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교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 지은아.”
“왜? 혹시 콘돔 없어?”
“아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 괜찮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최근에는 콘돔을 가지고 다닌다. 지금까지 세 번, 피임기구나 피임약 없이 행위를 했다. 운 좋게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아무런 준비가 없으면 분명히 언젠가는 뉴스에 내 이름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혹시나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서 콘돔을 가방 한 켠에 넣어두었다.
변명 같지만, 더 이상 지은이와도 누나와도 성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미성년자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콘돔도 만약을 대비해서 사놓은 것이지, 사용하기 위해서 산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사실 지은이와 누나 모두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로 5일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
문제는 5일이 지난 후, 토요일이었다. 그날 토요일에도 지은이네 집에 갔다. 그때도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쉬는 동안, 지은이가 갑자기 소지품 검사를 한다며 내 가방을 뒤졌다. 그러다 지은이가 콘돔을 발견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날 지은이네 집에 나와 지은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어쩌다 보니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다.
정말로 어쩌다 보니다.
“잠깐, 지은아. 누가 오면 어떡해.”
“안 와.”
지은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부모님은 그렇다 쳐도 유은이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잖아.”
“괜찮아 안 와.”
“어떻게 장담해.”
지은이는 확신하듯 말하고 있지만, 정말 위험하다. 만약에 누군가가 본다면 ‘어라, 들켰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지은아,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흠. 싫어.”
“갑자기 유은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진짜.”
“안 들어온다니까.”
이대로 가면, 나는 금방 이성을 잃어버리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이런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차피 이미 선을 넘어버린 거 더 넘는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망설임이 있는 결심은 쉽게 부서진다. 유은이의 존재는 현재 내 이성을 잡는 마지막 끈이다.
“유은이는 걱정하지 마.”
지은이가 나에게 다시 입을 맞춘다. 천천히 떨어지며 요염하게 웃었다. 이성의 끝자락이 서서히 부서져나간다.
“내가 9시 전에 들어오면 죽인다고 그랬어.”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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