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늘을 마지막으로 기말고사가 끝났다. 지은이와 함께 문제를 맞춰보았는데, 결과가 매우 좋은 것 같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도 지은이를 가르쳐주면서 약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풀이가 훨씬 수월했다.
“이번에 성적 진짜 많이 올랐을 것 같애.”
지은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쁨을 감추지 않는 깨끗한 미소다. 지은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지난주 일요일에 기분전환 겸 하려고 했던 데이트를 취소하면서까지 공부에 열의를 불태웠다.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임과 동시에 지은이와 데이트를 약속한 날이다. 영화를 보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방학 때 입을 옷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기로 했다. 바로 시내로 향하지는 않는다. 일단 집에 가서 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만나기로 했다.
“이따가 봐.”
“응. 1시에 역 앞에서 봐.”
교문 앞에서 지은이와 헤어졌다. 그동안 하교를 하면 일단 지은이네 집으로 먼저 갔는데, 오늘은 곧바로 집으로 향하니 뭔가 어색하다. 횟수로 따지면 집으로 곧바로 갔던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어느새 지은이네 집으로 가는 것에 익숙해졌나 보다.
누나는 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집이 비어있다. 집이 평소보다 넓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옷을 벗었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땀이 조금 났다. 샤워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현재 시간이 12시 20분이기 때문에 샤워를 하면 약속시간에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샤워를 하기로 했다. 여름이니까 차가운 물 한번 뒤집어쓰고 대충 물기만 닦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몸으로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위로 올렸다. 차가운 물을 그대로 몸에 묻혔다. 혹시나의 상황을 대비해 발부터 적셨다. 욕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려져 병원에 알몸으로 실려 간다는 상상만 해도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도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로 욕실에서 나왔다. 몸에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어서 후텁지근한 공기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옷장 앞에 꺼내놓은 옷을 입었다. 어제 데이트 때 입을 옷을 미리 골라놓았다. 옷을 다 입고 시간을 확인 하니 12시 30분이다. 약속시간에 충분히 맞출 수 있겠다. 주머니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일부러 바지도 주머니가 깊은 것으로 준비했다. 신발장에서 깨끗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이제 출발이다.
바깥이 덥다. 잠시 집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뿐인데, 그새 햇살이 더 강력해진 것 같다. 10분도 안 돼서 머리가 다 마를 것 같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버스가 도착해서 올라탔다. 교통카드를 찍고 빈자리에 앉았다.
어제 누나에게 지은이와 데이트가 있다고 말해놓았다. 감출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누나는 별 반응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누나와 일요일에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내일은 삼촌이 집에 오시기로 했다. 어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삼촌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버스가 역 앞에 멈췄다. 얼른 버스에서 내렸다. 지금 시간은 12시 45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금방 도착했다. 생각해보면 역 앞에서 만나자고는 했는데, 역 앞 정확히 어디라고는 정한 적이 없다. 기다리면 오겠지, 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을 다시 확인해볼 겸 핸드폰을 꺼냈을 때, 이제 1시가 다 되었을 때서야 전화를 해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핸드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자꾸 잊어버린다. 지은이에게 전화했다. 통화음이 잠시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지은아, 지금 어디야?”
“응, 지금 버스에서 내렸어. 보여?”
길 건너에 손을 흔들고 있는 지은이가 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얼마 안 가 신호등에서 초록불이 들어오고, 지은이가 길은 건너왔다. 지은이는 연두색 원피스에 흰색 칠부스키니를 입었다. 굽이 거의 없는 구두는 나를 배려한 것이겠지. 얼른 내 키가 커졌으면 좋겠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해.”
“아니야. 약속시간에 딱 맞춰 온 거지.”
“그럼, 이제 영화관으로 갈까?”
“그래.”
지은이가 가까이 오자, 전에도 맡아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향수를 뿌렸나 보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가볍게 화장도 한 것 같다. 이 짧은 시간에 준비를 끝내다니, 여자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아, 오늘 이쁘다.”
“고마워.”
진심을 담은 내 말에 지은이가 기뻐했다.
지은이와 손을 잡았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전에 누나와도 함께 갔었던 백화점이다. 잠시 밖에 서있기만 했는데도, 햇빛 때문에 피부가 뜨거웠다. 얼른 백화점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아야겠다.
백화점은 한산했다.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평일인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 가보다. 백화점의 1층은 역시 여성을 위한 상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은이를 살펴보니 화장품이나 악세서리에 시선이 가 있다.
“사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거짓말이라는 티가 다 난다.
이따가 지은이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기로 마음먹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영화관 매표소가 있는 8층을 눌렀다. 도중에 누가 타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8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1층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특히 학생들이 꽤 많았다. 아마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오늘부로 기말고사를 마쳤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학교 교복도 보였다.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지은아, 영화 제목이 뭐였지?”
지은이가 꽤 긴 제목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무슨 영화인지 기억을 못한 게 아니라 영화 제목이 너무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다. 20대 중반의 회사원과 10대 중반의 여자애가 서로 사랑하는 내용의 영화다. 연애 관련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영화의 줄거리가 꽤 재미있어 보였다. 예고편도 웃기게 잘 만들었다. 설마 예고편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겠지.
“아, 맞다. 우리 밥 안 먹었는데 밥 먹고 영화 볼까, 아니면 영화보고 밥 먹을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영화 먼저 보자.”
지은이의 말에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그래서 팝콘은 안 사기로 했다. 나는 표를 사고, 지은이는 음료수를 사러 가기로 했다.
“음료수는 뭘로 먹을 거야?”
“사이다.”
사람이 적어서 별로 기다리지 않고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지은이도 마찬가지라서 벌써 음료수를 구입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컵은 검은 게 비치고 있으니 콜라겠지.
“자, 여기 사이다.”
“고마워.”
지은이가 내미는 컵을 받았다. 살짝 흔들어보니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영화 상영 시작까지 20분이 남았다.
“상영시작 10분 전부터 들어갈 수 있으니까, 일단 올라가서 앉아서 기다리자. 앉을 곳이 있거든.”
“그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이 있는 9층으로 향했다. 어제 에스컬레이터 사고에 관한 뉴스를 봐서 조금 긴장한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밟았다. 9층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올 때도 조심했다. 지은이도 무사히 내렸다. 내가 지금 뉴스 때문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담배와 에스컬레이터다. 뉴스를 보면 지구상에 안전한 곳이란 없다.
꽤 많은 수의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주위에 테이블이 네 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여기에 처음 온 거야?”
“영화관 자체를 초등학교 이후로는 안 와본 것 같아.”
“영화관 별로 안 좋아해?”
“아니야. 좋아해. 근데 내 친구들이 영화관을 안 좋아해서 별로 올 기회가 없었어. 혼자서는 올 용기가 없었고.”
살짝 안도했다. 영화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데려왔으면 미안하니까.
“그리고,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영화관에는 남자 친구랑 같이 오고 싶었어.”
지은이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이제 소원을 이뤘네.”
“응.”
잠시 후 영화 상영 시작 시간 10분 전이 되었다. 영화관 앞에서 표를 검사 받고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2번 상영관이었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서 스크린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조명은 켜져 있다. 스피커에서는 조용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일단은 표에 적혀 있는 대로 가서 앉았다. H열 11, 12번.
지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영화 상영 시간이 다 되었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졌다. 이 근처의 식당 광고도 나오고, 패션 광고도 나왔다. 다른 상영 예정작의 예고도 나왔다. 그러다 잠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웃기는 부분에서는 뒤집어질 만큼 웃겼고, 사랑 이야기는 애틋했다.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도 등장해서 장면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지만, 구분을 잘 지어놓아서 헷갈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2시간을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영화는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역시 해피엔딩이 좋다. 끝난 뒤 속이 후련하다. 새드나 배드엔딩은 뒷맛이 찝찝해서 별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한 번 쭉 폈다. 시원하게 우두둑 하고 소리가 난다.
“재미있네.”
“응.”
영화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있다가 상영관에서 빠져나왔다.
“보너스 영상 같은 건 없나보네.”
“그러게.”
외국인들은 엔딩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와도 나가지 않고 끝까지 앉아 있어서 뒷부분에 보너스영상을 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영관에서 나와 바로 보이는 쓰레기통에 빈 컵을 버렸다. 지은이 것도 받아서 버려주었다.
“어차피 밖에 나가야 되니까, 점심은 밖에서 먹는 게 낫겠지?”
“그러자.”
지은이의 동의를 받고, 백화점에서 나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1층으로 나왔다. 1층에 진열된 화장품이나 악세서리 등이 보인다. 지금 보니 조명색도 악세서리를 돋보이도록 한 것 같다. 과연 이런 커다란 장사를 벌이려면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사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있으면 말해도 되는데.”
“아니야, 정말 없어. 그냥 가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지은이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백화점 내부와는 달리, 밖은 후덥지근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태양이 땅을 달구어놨는지 아까보다 더 더웠다. 얼른 어디든지 냉방중인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점심은 저기 가서 먹자.”
“그래.”
어제 점심 먹기에 괜찮을 만한 곳을 몇 군데 찾아두었다. 몇 군데 지금 가장 가까운 곳이 내가 가리킨 식당이다. 가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가격도 싸고 맛도 있어서 평가가 좋은 곳이다. 식당 내부로 들어가자, 에어컨의 냉기가 뜨거워진 체온을 식혀주었다. 무엇보다 햇빛을 직접 맞지 않아서 좋았다. 기온 자체가 더운 것은 괜찮은데, 햇빛에 정면으로 맞는 것은 참기 힘들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아직 저녁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식당에 사람이 꽤 많았다.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가가 좋은 만큼 인기도 있는 모양이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직원 한 명이 우리를 안내했다. 창가 바로 옆쪽에 앉게 되었다. 직원이 메뉴판을 주고, 메뉴를 결정하면 벨을 눌러달라고 하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지은이에게 물었다. 혹시 와봤으면 괜찮은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보기만 했어. 너는 와봤어?”
“아니 나도 한 번도 안 와봤어.”
그냥 알아서 시켜야겠다. 적당해 보이는 메뉴를 골랐다. 어제 어떤 메뉴가 괜찮은지도 찾아 봤었는데 까먹었다. 식당의 위치를 외우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메뉴를 골랐다. 벨을 누르자 곧장 직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골랐던 메뉴를 시켰다. 직원이 계산서에 메뉴를 적고, 메뉴판을 가지고 돌아갔다.
“오늘 무슨 옷 살 거야?”
“아직 모르겠어.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거 사려고. 그리고 오늘은 내 옷보다 네 옷 사러 돌아다닐 거야.”
“내 옷?”
“응. 내가 이쁘게 코디해줄게.”
지은이는 나에게 이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느낌이다. 나쁜 뜻으로 말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장난인 것 같지도 않은 게 마음에 걸린다.
“이쁘다는 말은 빼주면 안 될까?”
“이쁘다는 말을 빼면 다른 말이 별로 없단 말이야.”
슬슬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후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시켰던 음식이 나왔다. 빠르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만큼 신속함을 중요시하는 모양이다.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지은이에게 주고, 내가 쓸 수저도 꺼냈다. 식사를 시작했다.
맛도 괜찮다. 집에서 내가 주로 식사를 맡고 있어서 그런지, 맛있는 음식을 접하면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분석을 하게 된다. 소금은 적당히. 고춧가루도 조금 들어간 모양이고. 이 소스는 여기서 따로 만든 건가.
지은이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지은이에 맞춰서 먹는 속도도 조절했다. 지은이의 식사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느라 점심을 걸렀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시간이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니, 점심이라고 하기도, 저녁이라고 하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다.
식사가 금방 끝났다. 배가 고파서 이야기보다는 먹는 것에 더 집중을 했다.
“아, 배부르다. 밥을 좀 빨리 먹어서 그런가.”
“빨리 먹긴 했어.”
“사실 나 영화 볼 때, 배고파서 집중 잘 안 됐다. 밥 먼저 먹을 걸, 하고 후회했어.”
지은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소화도 시킬 겸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 슬슬 일어나기로 했다. 지은이가 핸드백을 메는 것을 확인하고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지은이가 막는다.
“지난번에는 네가 냈으니까, 오늘은 내가 낼게.”
“알았어.”
나와 지은이는 데이트를 할 때 비용을 거의 반반씩 낸다. 정확히 나누는 것은 아니고, 내가 전에 냈으면 다음엔 지은이가. 지은이가 냈으면 다음은 내가. 이런 식으로 교대로 낸다.
“옷은 어디서 살 거야?”
“내가 자주 가는 옷가게가 있어.”
지은이를 따라 시내를 걸었다. 원래 시내에 잘 안 나오는 편이지만, 이쪽은 특히 생소하다. 다른 지역으로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큰 규모의 옷가게다.
“어머, 지은이 왔어? 오랜만이다.”
“네, 언니. 안녕하세요.”
가게에 들어서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지은이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화려한 옷차림새가 패션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이 짙다. 눈 주위에 저렇게 진하게 칠하는 걸 스모키 화장이라고 하던가. 붙임성 좋아 보이는 미소와 사근사근한 말투가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일 것 같다.
“운하야, 인사해. 미선이 언니야. 언니, 운하라고 해.”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지은이의 말에 미선이라고 하는 화려한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어머, 네가 지은이 남자 친구니?”
“네.”
“이쁘게 생겼다. 지은이 남자 참 잘 잡았다.”
“언니!”
지은이가 미선이 누나의 말에 부끄러워하며 화를 냈다.
“운하라 그랬지? 이름이 참 예쁘다. 내 이름은 지은이가 말했지만, 미선이라고 해. 윤미선. 잘 부탁해.”
“네. 안녕하세요.”
“귀엽다아!”
미선이 누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다른 것보다 이쁘다던가 귀엽다던가 하는 말이 신경이 쓰이고 있다. 지은이가 말할 땐 장난 정도로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내가 남에게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제 옷도 사고, 운하 옷도 같이 사려고 왔어요. 운하 옷 좀 잘 골라주세요.”
“그래? 그럼 운하야 나를 따라오렴.”
따라오라고 말해놓고는 미선이 누나는 나를 끌고 간다.
“너처럼 선이 가는 애는 이런 옷이랑 이런 옷이 좋을 거야. 색은, 음. 무슨 색 좋아해?”
“파란색이요.”
“좋아. 자, 너는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낫겠다.”
그럼 좋아하는 색은 왜 물어 본 겁니까. 미선이 누나는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며 옷을 골랐다. 옷이 수천 벌은 되어 보이는데 어디에 무슨 옷이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잠시 후 결국 누나가 몇 쌍의 옷을 골라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는 거 입어봐.”
“네.”
거울을 보며 셔츠와 바지 한 쌍씩 몸에 대보았다. 대단하다. 그냥 대충 집어낸 것 같은데 색이나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다. 나처럼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옷을 골라내지 못할 것이다.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쌍을 골랐다. 다들 마음에 들었지만, 그중 파란색이 많이 들어간 옷을 골랐다. 뭔가 기준을 정해서 하지 않으면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걸로 할게요.”
“그럼, 한번 입어 볼래?”
“네.”
“탈의실은 이쪽.”
미선이 누나의 안내를 받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딱 옷만 갈아입을 수 있을 만한 좁은 공간이다. 지금 입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다. 몸에 딱 맞는다. 그러고 보면 신체 사이즈도 안 쟀는데 어떻게 내 옷 사이즈를 알았을까. 그냥 때려 맞춘 걸까.
“우와, 잘 어울린다. 지은아 이리 와서 봐봐.”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미선이 누나가 또 호들갑을 떨며 지은이를 불렀다.
“잘 어울리지, 그치.”
“네, 언니. 운하야 잘 어울린다.”
“고마워.”
새 옷 특유의 냄새가 난다.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처음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와서 누나에게 옷을 내밀자, 잘 포장해서 종이가방에 넣어서 주었다. 이 가게의 로고가 그려진 종이가방이다. 계산은 지은이가 옷을 고르면 같이 하기로 했다.
“지은아, 너는 옷 골랐어?”
“음, 아직. 고르고 있는 중이야.”
한참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 한번 누나와 쇼핑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누나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를 때까지 꽤 오랜 시간 기다렸다. 몸에만 맞으면 어떤 옷이든 별로 상관없는 나에 비해 지은이는 옷에 대한 기준이 심히 엄격해 보인다.
“그럼, 기다릴 동안 저기 앉아 있을래?”
미선이 누나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진 곳을 가리켰다. 소파에 가서 앉으니, 누나가 음료수를 따른 종이컵을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소파에 앉아서 지은이가 옷을 고르기에 집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잡아서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고, 앞뒤로 훑어보면서 옷을 고른다. 즐거워 보인다. 소파 손잡이에 팔을 걸쳐 턱을 괴고 지은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찰칵하는 소리와 불빛이 번쩍였다. 시선을 돌리자,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미선이 누나가 보였다.
“미안. 나도 모르게 찍었네.”
미선이 누나가 카메라를 나에게 내밀었다. 사진을 확인할 겸 카메라를 받으려는데 다시 플래쉬가 터졌다.
“미안, 잘못 눌렀어. 이왕 찍은 김에 그냥 저장할게.”
일부러 찍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카메라 찍는 게 취미세요?”
“아니, 특기야. 나 카메라 엄청 잘 찍거든.”
“아, 네.”
대단하다. 자기자랑을 농담식이 아니라 진담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서비스 같은 거야. 여기서 산 옷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사진을 찍어주거든. 여기서 산 옷을 입은 사람만 찍힐 수 있는 카메라야.”
“전 지금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는데요.”
“아까 지은이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주 좋아보여서 찍었어. 영광인줄 알아. 내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인물사진을 찍은 건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 아니라 그건 제가 사과 받아야 할 일 아닌가요.
“사진 잘 나왔는데 한번 볼래?”
“네.”
미선이 누나에게서 카메라를 받아 저장된 사진을 보았다. 이걸 옆으로 누르면 사진이 넘어가는 건가.
카메라 화면에 내가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화면이라 세세한 것까지 볼 수는 없지만, 사진이 잘 나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사진 잘 찍으시네요.”
“그거 모델이 잘났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지?”
“아니요.”
미선이 누나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카메라의 전원을 끄는 미선이 누나.
“사진은 메일로 보내줄게. 지금 보낼 테니까 메일 주소 알려줄래?”
메일 주소를 불러주자, 누나가 계산대로 갔다.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를 연결했다.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다 됐어.”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감사하면 이 사진 좀 내 미니홈피에 올릴게.”
이 사람은 참,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
“운하야, 이 옷 어때?”
지은이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와 내 앞에서 보여주었다. 옅은 노란색의 블라우스다. 지은이에게 어울릴 것 같다.
“어울리겠다. 근데 노란색보다는 연두색 계열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나도 노란색이랑 연두색이랑 고민했는데. 그럼 연두색으로 해야지.”
이런 식으로 옷을 몇 벌 더 고르고 드디어 지은이의 쇼핑이 끝났다. 조금 많이 지쳤다.
계산대에서 함께 돈을 계산했다. 내가 지은이 것도 계산해준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가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지 않았다. 지은이가 굳이 여기로 온 이유를 알겠다.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디자인이나 기능을 중요시해서 쓸데없이 비싸지도 않다.
미선이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7시다. 슬슬 하늘이 아까 같은 푸른빛을 잃고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햇빛이 약해지니 더위도 수그러들었다.
“운하야, 혹시 내가 옷을 고르는 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어?”
지은이가 밖에 나와서야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안 지루했어.”
“진짜?”
“응.”
지은이를 안도시켰다. 지루하지 않았다. 조금 생소한 기분이었다. 지은이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이를 잘 모르던 시절, 지은이는 아까 나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럼, 이제 집으로 가자.”
“응.”
지은이의 손을 잡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5분 정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하자, 함께 버스를 탔다.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렸다. 지은이네 아파트 복도 앞까지 같이 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오늘 재미 있었어.”
“나도.”
“이제 곧 여름방학이기도 하고, 시험도 끝나서 여유가 있으니까 데이트 많이 하자.”
“응. 나 가고 싶은 데가 엄청 많아.”
“그래, 꼭 가자.”
지은이와 약속했다.
이제 하늘에 완연하게 노을이 졌다. 하늘이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붉은 태양빛을 받아, 지은이의 얼굴도 붉게 빛났다. 노을에 물든 얼굴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지은이의 따뜻한 손을 잡았다. 천천히 지은이와 가까워졌다. 지은이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쯤부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은이의 입술이 저녁노을만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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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어제는 딴짓하느라 글을 많이 못썼군요
“이번에 성적 진짜 많이 올랐을 것 같애.”
지은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쁨을 감추지 않는 깨끗한 미소다. 지은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지난주 일요일에 기분전환 겸 하려고 했던 데이트를 취소하면서까지 공부에 열의를 불태웠다.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임과 동시에 지은이와 데이트를 약속한 날이다. 영화를 보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방학 때 입을 옷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기로 했다. 바로 시내로 향하지는 않는다. 일단 집에 가서 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만나기로 했다.
“이따가 봐.”
“응. 1시에 역 앞에서 봐.”
교문 앞에서 지은이와 헤어졌다. 그동안 하교를 하면 일단 지은이네 집으로 먼저 갔는데, 오늘은 곧바로 집으로 향하니 뭔가 어색하다. 횟수로 따지면 집으로 곧바로 갔던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어느새 지은이네 집으로 가는 것에 익숙해졌나 보다.
누나는 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집이 비어있다. 집이 평소보다 넓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옷을 벗었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땀이 조금 났다. 샤워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현재 시간이 12시 20분이기 때문에 샤워를 하면 약속시간에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샤워를 하기로 했다. 여름이니까 차가운 물 한번 뒤집어쓰고 대충 물기만 닦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몸으로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위로 올렸다. 차가운 물을 그대로 몸에 묻혔다. 혹시나의 상황을 대비해 발부터 적셨다. 욕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려져 병원에 알몸으로 실려 간다는 상상만 해도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도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로 욕실에서 나왔다. 몸에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어서 후텁지근한 공기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옷장 앞에 꺼내놓은 옷을 입었다. 어제 데이트 때 입을 옷을 미리 골라놓았다. 옷을 다 입고 시간을 확인 하니 12시 30분이다. 약속시간에 충분히 맞출 수 있겠다. 주머니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일부러 바지도 주머니가 깊은 것으로 준비했다. 신발장에서 깨끗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이제 출발이다.
바깥이 덥다. 잠시 집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뿐인데, 그새 햇살이 더 강력해진 것 같다. 10분도 안 돼서 머리가 다 마를 것 같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버스가 도착해서 올라탔다. 교통카드를 찍고 빈자리에 앉았다.
어제 누나에게 지은이와 데이트가 있다고 말해놓았다. 감출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누나는 별 반응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누나와 일요일에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내일은 삼촌이 집에 오시기로 했다. 어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삼촌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버스가 역 앞에 멈췄다. 얼른 버스에서 내렸다. 지금 시간은 12시 45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금방 도착했다. 생각해보면 역 앞에서 만나자고는 했는데, 역 앞 정확히 어디라고는 정한 적이 없다. 기다리면 오겠지, 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을 다시 확인해볼 겸 핸드폰을 꺼냈을 때, 이제 1시가 다 되었을 때서야 전화를 해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핸드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자꾸 잊어버린다. 지은이에게 전화했다. 통화음이 잠시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지은아, 지금 어디야?”
“응, 지금 버스에서 내렸어. 보여?”
길 건너에 손을 흔들고 있는 지은이가 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얼마 안 가 신호등에서 초록불이 들어오고, 지은이가 길은 건너왔다. 지은이는 연두색 원피스에 흰색 칠부스키니를 입었다. 굽이 거의 없는 구두는 나를 배려한 것이겠지. 얼른 내 키가 커졌으면 좋겠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해.”
“아니야. 약속시간에 딱 맞춰 온 거지.”
“그럼, 이제 영화관으로 갈까?”
“그래.”
지은이가 가까이 오자, 전에도 맡아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향수를 뿌렸나 보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가볍게 화장도 한 것 같다. 이 짧은 시간에 준비를 끝내다니, 여자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아, 오늘 이쁘다.”
“고마워.”
진심을 담은 내 말에 지은이가 기뻐했다.
지은이와 손을 잡았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전에 누나와도 함께 갔었던 백화점이다. 잠시 밖에 서있기만 했는데도, 햇빛 때문에 피부가 뜨거웠다. 얼른 백화점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아야겠다.
백화점은 한산했다.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평일인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 가보다. 백화점의 1층은 역시 여성을 위한 상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은이를 살펴보니 화장품이나 악세서리에 시선이 가 있다.
“사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거짓말이라는 티가 다 난다.
이따가 지은이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기로 마음먹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영화관 매표소가 있는 8층을 눌렀다. 도중에 누가 타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8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1층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특히 학생들이 꽤 많았다. 아마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오늘부로 기말고사를 마쳤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학교 교복도 보였다.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지은아, 영화 제목이 뭐였지?”
지은이가 꽤 긴 제목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무슨 영화인지 기억을 못한 게 아니라 영화 제목이 너무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다. 20대 중반의 회사원과 10대 중반의 여자애가 서로 사랑하는 내용의 영화다. 연애 관련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영화의 줄거리가 꽤 재미있어 보였다. 예고편도 웃기게 잘 만들었다. 설마 예고편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겠지.
“아, 맞다. 우리 밥 안 먹었는데 밥 먹고 영화 볼까, 아니면 영화보고 밥 먹을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영화 먼저 보자.”
지은이의 말에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그래서 팝콘은 안 사기로 했다. 나는 표를 사고, 지은이는 음료수를 사러 가기로 했다.
“음료수는 뭘로 먹을 거야?”
“사이다.”
사람이 적어서 별로 기다리지 않고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지은이도 마찬가지라서 벌써 음료수를 구입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컵은 검은 게 비치고 있으니 콜라겠지.
“자, 여기 사이다.”
“고마워.”
지은이가 내미는 컵을 받았다. 살짝 흔들어보니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영화 상영 시작까지 20분이 남았다.
“상영시작 10분 전부터 들어갈 수 있으니까, 일단 올라가서 앉아서 기다리자. 앉을 곳이 있거든.”
“그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이 있는 9층으로 향했다. 어제 에스컬레이터 사고에 관한 뉴스를 봐서 조금 긴장한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밟았다. 9층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올 때도 조심했다. 지은이도 무사히 내렸다. 내가 지금 뉴스 때문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담배와 에스컬레이터다. 뉴스를 보면 지구상에 안전한 곳이란 없다.
꽤 많은 수의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주위에 테이블이 네 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여기에 처음 온 거야?”
“영화관 자체를 초등학교 이후로는 안 와본 것 같아.”
“영화관 별로 안 좋아해?”
“아니야. 좋아해. 근데 내 친구들이 영화관을 안 좋아해서 별로 올 기회가 없었어. 혼자서는 올 용기가 없었고.”
살짝 안도했다. 영화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데려왔으면 미안하니까.
“그리고,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영화관에는 남자 친구랑 같이 오고 싶었어.”
지은이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이제 소원을 이뤘네.”
“응.”
잠시 후 영화 상영 시작 시간 10분 전이 되었다. 영화관 앞에서 표를 검사 받고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2번 상영관이었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서 스크린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조명은 켜져 있다. 스피커에서는 조용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일단은 표에 적혀 있는 대로 가서 앉았다. H열 11, 12번.
지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영화 상영 시간이 다 되었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졌다. 이 근처의 식당 광고도 나오고, 패션 광고도 나왔다. 다른 상영 예정작의 예고도 나왔다. 그러다 잠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웃기는 부분에서는 뒤집어질 만큼 웃겼고, 사랑 이야기는 애틋했다.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도 등장해서 장면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지만, 구분을 잘 지어놓아서 헷갈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2시간을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영화는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역시 해피엔딩이 좋다. 끝난 뒤 속이 후련하다. 새드나 배드엔딩은 뒷맛이 찝찝해서 별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한 번 쭉 폈다. 시원하게 우두둑 하고 소리가 난다.
“재미있네.”
“응.”
영화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있다가 상영관에서 빠져나왔다.
“보너스 영상 같은 건 없나보네.”
“그러게.”
외국인들은 엔딩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와도 나가지 않고 끝까지 앉아 있어서 뒷부분에 보너스영상을 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영관에서 나와 바로 보이는 쓰레기통에 빈 컵을 버렸다. 지은이 것도 받아서 버려주었다.
“어차피 밖에 나가야 되니까, 점심은 밖에서 먹는 게 낫겠지?”
“그러자.”
지은이의 동의를 받고, 백화점에서 나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1층으로 나왔다. 1층에 진열된 화장품이나 악세서리 등이 보인다. 지금 보니 조명색도 악세서리를 돋보이도록 한 것 같다. 과연 이런 커다란 장사를 벌이려면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사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있으면 말해도 되는데.”
“아니야, 정말 없어. 그냥 가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지은이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백화점 내부와는 달리, 밖은 후덥지근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태양이 땅을 달구어놨는지 아까보다 더 더웠다. 얼른 어디든지 냉방중인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점심은 저기 가서 먹자.”
“그래.”
어제 점심 먹기에 괜찮을 만한 곳을 몇 군데 찾아두었다. 몇 군데 지금 가장 가까운 곳이 내가 가리킨 식당이다. 가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가격도 싸고 맛도 있어서 평가가 좋은 곳이다. 식당 내부로 들어가자, 에어컨의 냉기가 뜨거워진 체온을 식혀주었다. 무엇보다 햇빛을 직접 맞지 않아서 좋았다. 기온 자체가 더운 것은 괜찮은데, 햇빛에 정면으로 맞는 것은 참기 힘들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아직 저녁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식당에 사람이 꽤 많았다.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가가 좋은 만큼 인기도 있는 모양이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직원 한 명이 우리를 안내했다. 창가 바로 옆쪽에 앉게 되었다. 직원이 메뉴판을 주고, 메뉴를 결정하면 벨을 눌러달라고 하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지은이에게 물었다. 혹시 와봤으면 괜찮은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보기만 했어. 너는 와봤어?”
“아니 나도 한 번도 안 와봤어.”
그냥 알아서 시켜야겠다. 적당해 보이는 메뉴를 골랐다. 어제 어떤 메뉴가 괜찮은지도 찾아 봤었는데 까먹었다. 식당의 위치를 외우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메뉴를 골랐다. 벨을 누르자 곧장 직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골랐던 메뉴를 시켰다. 직원이 계산서에 메뉴를 적고, 메뉴판을 가지고 돌아갔다.
“오늘 무슨 옷 살 거야?”
“아직 모르겠어.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거 사려고. 그리고 오늘은 내 옷보다 네 옷 사러 돌아다닐 거야.”
“내 옷?”
“응. 내가 이쁘게 코디해줄게.”
지은이는 나에게 이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느낌이다. 나쁜 뜻으로 말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장난인 것 같지도 않은 게 마음에 걸린다.
“이쁘다는 말은 빼주면 안 될까?”
“이쁘다는 말을 빼면 다른 말이 별로 없단 말이야.”
슬슬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후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시켰던 음식이 나왔다. 빠르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만큼 신속함을 중요시하는 모양이다.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지은이에게 주고, 내가 쓸 수저도 꺼냈다. 식사를 시작했다.
맛도 괜찮다. 집에서 내가 주로 식사를 맡고 있어서 그런지, 맛있는 음식을 접하면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분석을 하게 된다. 소금은 적당히. 고춧가루도 조금 들어간 모양이고. 이 소스는 여기서 따로 만든 건가.
지은이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지은이에 맞춰서 먹는 속도도 조절했다. 지은이의 식사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느라 점심을 걸렀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시간이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니, 점심이라고 하기도, 저녁이라고 하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다.
식사가 금방 끝났다. 배가 고파서 이야기보다는 먹는 것에 더 집중을 했다.
“아, 배부르다. 밥을 좀 빨리 먹어서 그런가.”
“빨리 먹긴 했어.”
“사실 나 영화 볼 때, 배고파서 집중 잘 안 됐다. 밥 먼저 먹을 걸, 하고 후회했어.”
지은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소화도 시킬 겸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 슬슬 일어나기로 했다. 지은이가 핸드백을 메는 것을 확인하고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지은이가 막는다.
“지난번에는 네가 냈으니까, 오늘은 내가 낼게.”
“알았어.”
나와 지은이는 데이트를 할 때 비용을 거의 반반씩 낸다. 정확히 나누는 것은 아니고, 내가 전에 냈으면 다음엔 지은이가. 지은이가 냈으면 다음은 내가. 이런 식으로 교대로 낸다.
“옷은 어디서 살 거야?”
“내가 자주 가는 옷가게가 있어.”
지은이를 따라 시내를 걸었다. 원래 시내에 잘 안 나오는 편이지만, 이쪽은 특히 생소하다. 다른 지역으로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큰 규모의 옷가게다.
“어머, 지은이 왔어? 오랜만이다.”
“네, 언니. 안녕하세요.”
가게에 들어서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지은이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화려한 옷차림새가 패션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이 짙다. 눈 주위에 저렇게 진하게 칠하는 걸 스모키 화장이라고 하던가. 붙임성 좋아 보이는 미소와 사근사근한 말투가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일 것 같다.
“운하야, 인사해. 미선이 언니야. 언니, 운하라고 해.”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지은이의 말에 미선이라고 하는 화려한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어머, 네가 지은이 남자 친구니?”
“네.”
“이쁘게 생겼다. 지은이 남자 참 잘 잡았다.”
“언니!”
지은이가 미선이 누나의 말에 부끄러워하며 화를 냈다.
“운하라 그랬지? 이름이 참 예쁘다. 내 이름은 지은이가 말했지만, 미선이라고 해. 윤미선. 잘 부탁해.”
“네. 안녕하세요.”
“귀엽다아!”
미선이 누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다른 것보다 이쁘다던가 귀엽다던가 하는 말이 신경이 쓰이고 있다. 지은이가 말할 땐 장난 정도로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내가 남에게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제 옷도 사고, 운하 옷도 같이 사려고 왔어요. 운하 옷 좀 잘 골라주세요.”
“그래? 그럼 운하야 나를 따라오렴.”
따라오라고 말해놓고는 미선이 누나는 나를 끌고 간다.
“너처럼 선이 가는 애는 이런 옷이랑 이런 옷이 좋을 거야. 색은, 음. 무슨 색 좋아해?”
“파란색이요.”
“좋아. 자, 너는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낫겠다.”
그럼 좋아하는 색은 왜 물어 본 겁니까. 미선이 누나는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며 옷을 골랐다. 옷이 수천 벌은 되어 보이는데 어디에 무슨 옷이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잠시 후 결국 누나가 몇 쌍의 옷을 골라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는 거 입어봐.”
“네.”
거울을 보며 셔츠와 바지 한 쌍씩 몸에 대보았다. 대단하다. 그냥 대충 집어낸 것 같은데 색이나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다. 나처럼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옷을 골라내지 못할 것이다.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쌍을 골랐다. 다들 마음에 들었지만, 그중 파란색이 많이 들어간 옷을 골랐다. 뭔가 기준을 정해서 하지 않으면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걸로 할게요.”
“그럼, 한번 입어 볼래?”
“네.”
“탈의실은 이쪽.”
미선이 누나의 안내를 받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딱 옷만 갈아입을 수 있을 만한 좁은 공간이다. 지금 입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다. 몸에 딱 맞는다. 그러고 보면 신체 사이즈도 안 쟀는데 어떻게 내 옷 사이즈를 알았을까. 그냥 때려 맞춘 걸까.
“우와, 잘 어울린다. 지은아 이리 와서 봐봐.”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미선이 누나가 또 호들갑을 떨며 지은이를 불렀다.
“잘 어울리지, 그치.”
“네, 언니. 운하야 잘 어울린다.”
“고마워.”
새 옷 특유의 냄새가 난다.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처음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와서 누나에게 옷을 내밀자, 잘 포장해서 종이가방에 넣어서 주었다. 이 가게의 로고가 그려진 종이가방이다. 계산은 지은이가 옷을 고르면 같이 하기로 했다.
“지은아, 너는 옷 골랐어?”
“음, 아직. 고르고 있는 중이야.”
한참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 한번 누나와 쇼핑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누나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를 때까지 꽤 오랜 시간 기다렸다. 몸에만 맞으면 어떤 옷이든 별로 상관없는 나에 비해 지은이는 옷에 대한 기준이 심히 엄격해 보인다.
“그럼, 기다릴 동안 저기 앉아 있을래?”
미선이 누나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진 곳을 가리켰다. 소파에 가서 앉으니, 누나가 음료수를 따른 종이컵을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소파에 앉아서 지은이가 옷을 고르기에 집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잡아서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고, 앞뒤로 훑어보면서 옷을 고른다. 즐거워 보인다. 소파 손잡이에 팔을 걸쳐 턱을 괴고 지은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찰칵하는 소리와 불빛이 번쩍였다. 시선을 돌리자,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미선이 누나가 보였다.
“미안. 나도 모르게 찍었네.”
미선이 누나가 카메라를 나에게 내밀었다. 사진을 확인할 겸 카메라를 받으려는데 다시 플래쉬가 터졌다.
“미안, 잘못 눌렀어. 이왕 찍은 김에 그냥 저장할게.”
일부러 찍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카메라 찍는 게 취미세요?”
“아니, 특기야. 나 카메라 엄청 잘 찍거든.”
“아, 네.”
대단하다. 자기자랑을 농담식이 아니라 진담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서비스 같은 거야. 여기서 산 옷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사진을 찍어주거든. 여기서 산 옷을 입은 사람만 찍힐 수 있는 카메라야.”
“전 지금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는데요.”
“아까 지은이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주 좋아보여서 찍었어. 영광인줄 알아. 내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인물사진을 찍은 건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 아니라 그건 제가 사과 받아야 할 일 아닌가요.
“사진 잘 나왔는데 한번 볼래?”
“네.”
미선이 누나에게서 카메라를 받아 저장된 사진을 보았다. 이걸 옆으로 누르면 사진이 넘어가는 건가.
카메라 화면에 내가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화면이라 세세한 것까지 볼 수는 없지만, 사진이 잘 나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사진 잘 찍으시네요.”
“그거 모델이 잘났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지?”
“아니요.”
미선이 누나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카메라의 전원을 끄는 미선이 누나.
“사진은 메일로 보내줄게. 지금 보낼 테니까 메일 주소 알려줄래?”
메일 주소를 불러주자, 누나가 계산대로 갔다.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를 연결했다.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다 됐어.”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감사하면 이 사진 좀 내 미니홈피에 올릴게.”
이 사람은 참,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
“운하야, 이 옷 어때?”
지은이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와 내 앞에서 보여주었다. 옅은 노란색의 블라우스다. 지은이에게 어울릴 것 같다.
“어울리겠다. 근데 노란색보다는 연두색 계열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나도 노란색이랑 연두색이랑 고민했는데. 그럼 연두색으로 해야지.”
이런 식으로 옷을 몇 벌 더 고르고 드디어 지은이의 쇼핑이 끝났다. 조금 많이 지쳤다.
계산대에서 함께 돈을 계산했다. 내가 지은이 것도 계산해준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가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지 않았다. 지은이가 굳이 여기로 온 이유를 알겠다.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디자인이나 기능을 중요시해서 쓸데없이 비싸지도 않다.
미선이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7시다. 슬슬 하늘이 아까 같은 푸른빛을 잃고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햇빛이 약해지니 더위도 수그러들었다.
“운하야, 혹시 내가 옷을 고르는 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어?”
지은이가 밖에 나와서야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안 지루했어.”
“진짜?”
“응.”
지은이를 안도시켰다. 지루하지 않았다. 조금 생소한 기분이었다. 지은이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이를 잘 모르던 시절, 지은이는 아까 나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럼, 이제 집으로 가자.”
“응.”
지은이의 손을 잡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5분 정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하자, 함께 버스를 탔다.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렸다. 지은이네 아파트 복도 앞까지 같이 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오늘 재미 있었어.”
“나도.”
“이제 곧 여름방학이기도 하고, 시험도 끝나서 여유가 있으니까 데이트 많이 하자.”
“응. 나 가고 싶은 데가 엄청 많아.”
“그래, 꼭 가자.”
지은이와 약속했다.
이제 하늘에 완연하게 노을이 졌다. 하늘이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붉은 태양빛을 받아, 지은이의 얼굴도 붉게 빛났다. 노을에 물든 얼굴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지은이의 따뜻한 손을 잡았다. 천천히 지은이와 가까워졌다. 지은이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쯤부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은이의 입술이 저녁노을만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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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어제는 딴짓하느라 글을 많이 못썼군요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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