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보니, 여전히 창밖에는 가로등이 켜져 더러운 창문에 노란 색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잠들기 전보다는 적지만, 아직도 간간히 고함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얘는... 자존심도 없나?’
일 년 쯤 전이었다면, 자고 있는 내게 누가 몸을 부비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덥석 끌어안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나는 내 의사가 거부당한 것에 대해, 우선 화부터 낼 만큼 자존심이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내 곁에 누워 반라의 몸을 붙이고 있는 서정을 인지하는 순간, 성욕보다는 짜증이 앞섰다. 딱딱한 목재 테이블의 압력에 등 이곳저곳이 아팠지만, 움직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별 짓 하겠어?’
하지만 서정은 곱게 누워 내 체온을 느끼는 대신, 손으로 내 가슴팍을 더듬어 왔다. 얇은 면 티 위로 손가락이 더듬이처럼 움직이며 근육의 융기와 그 사이의 고랑을 탐색했다. 그리고는, 복부의 영역으로 내려가더니, 혹시 뱃살이 찌지 않았는지 궁금하다는 듯, 여기저기를 슬며시 움켜 쥐어보곤 했다. 가만히 두고 보자니, 조금 후에는 노골적으로 손바닥이 아랫배를 미끄러져 사타구니 쪽으로 향했다.
“가서 자라...”
“깨...깨어 있었어?”
“싫다고 했잖아... 응?”
“누가 뭐래? 그냥 추워서 그래...”
하긴... 낮엔 마치 여름처럼 더워도, 새벽엔 몸이 떨릴 만큼 추울 때였다. 달랑 브래져와 팬티만 걸친 서정에겐 특히... 사무실에 뭐 덮을만한 게 있나 생각해 보다 포기했다. 지금껏 소파에 누군가를 던져 놓기만 했지, 뭘 덮어준 기억은 없었다.
“소파로 가. 안아 줄게.”
서정을 소파 안쪽에 파묻고 내가 바깥쪽 경계에 걸쳐 누웠다. 나는 소파의 팔걸이를 베고, 서정은 내 팔을 베었다. 그 좁은 면적에서 서로 마주보고 눕다 보니, 인체 구조 상 자연스럽게 내 다리가 서정의 하체를 덮었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건, 불편한 자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 때문이기도 했다. 밤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때문에 의식이 멍한 상태로 낮을 견디기 일쑤였다.
외박이 자연스러울 만큼 생활 패턴도 무너져 있었다. 처음에는 자고 가겠다는 내 전화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염려해 주시던 부모님도, 외박이 만성화되자 그저 ‘술 너무 마시지 말아라.’하시며, 쉽게 승낙을 해 주셨다. 목불인견이었을 내 행동을 그분들은 어떻게 참고 이해해 주셨을까?
“아... 너무 좋다.”
서정이 내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래봤자 기껏 땀 냄새나 좀 날 텐데...
“너도 참 대책 없는 얘다.”
“동기생이 나한테 너, 너 하면 기분 나빠야 하는데... 그렇지? 근데, 수호 씨가 하니까 괜찮네.”
“나 가까이 하지 마. 자존심 많이 상할 거야.”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구나... 히히~. 돈 주은 기분이야.”
여자친구라...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친구, 애인, 아내... 독점적 소유와 누군가에 대한 배려를 의미하는 그 단어들 전체가 다... 나하곤 거리가 있었다.
“나 위쪽은 아직 추운데...”
내 옆구리에 어색하게 올려놓았던 남은 손으로 서정의 벗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거짓말이 아닌 듯, 차가운 피부에 까칠한 소름이 돋아 있는 게 손바닥에 느껴졌다. 팔과 등, 옆구리... 손이 닿는 곳은 모두 쓰다듬어 주었다. 사타구니가 딱딱해지는 걸, 서정도 알아챈 듯 했지만, 그걸 피하는 대신 지그시 눌러대는 그 압력을 그냥 받아들였다.
“수호씨, 나... 생각해 봤더니...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뭐가?”
“섹스...”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정의가 좀 모호해서 그렇지.”
“흔한 정의는 그래. 남자의 성기를 여자의 성기에 쑤셔 박는 것. 여자 성기 입구의 양쪽 언덕을 잇는 선 안쪽으로 남자 성기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는 섹스야.”
“호호호호!”
“크크...”
괜히 웃음이 나오고, 기분도 좀 나아지는 듯 했다. 예전에 삽입만 하지 않으면 섹스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보편적인 사고에 불만을 가졌던 기억이 났다.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꼭... 남자 성기여야 해?”
“응.”
“그럼... 아직 안 해 본 거 맞구나.”
“뭘 넣었는데?”
“히... 창피해서 말 못하겠다...”
“손가락?”
“아니...... 음.... 안웃는다고 약속하면 말할게.”
“약속해.”
“저기... 그... 쏘세지... 쪼그만 거...”
“푸하하하!”
“안웃는다고 해놓구, 씨이...”
“아... 미안... 하하하하... 근데... 좋던? 크흐흐흐...”
“몰라, 씨이. 말 안 해!”
“남자 친구 없었어? 고등학교 때도?”
“공부만 했잖아.”
“아~ 네~!”
갑작스럽게 서정에게서 친밀감이 느껴졌다. 거부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그녀의 팬티 속으로 집어넣어, 풍성한 엉덩이 살을 한 옹큼 쥐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탄력 때문인지, 갑작스레 성욕이 치밀어 올랐다. 팬티를 밀어내리려 하자, 서정의 몸이 소파에서 살짝 뜬 다음 다시 내려 왔다. 내 가운데 손가락이 이제는 벗겨진 서정의 엉덩이 한가운데 고랑을 누르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른 곳에 비해 체온이 높은 그 곳에 땀이 맺힐 때까지 엉덩이를 만져 주었다.
브래져의 후크를 풀었다. 서정이 긴 한숨을 내쉬었고, 그 끝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후유......!”
“싫어?”
“아니...... 할 거야?”
“그래...... 섹스하자.”
“왜 마음이 바뀌었어?”
“나보다 섹스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치이...!”
“한 번 먹어 달라고 애원하는 게 애처럽기도 하고...”
“치이...!”
꿈틀꿈틀 몸을 움직여, 서정을 내 아래로 두었다. 오래된 소파가 아프다며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허겁지겁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내리는 동안, 서정도 몸을 비틀어 팬티를 벗어 내렸다. 딱딱해진 자지로 서정의 치골 부위를 눌렀다. 간헐적으로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떠는 걸 보면, 말은 하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크가 풀려 느슨해진 브래져를 위로 젖혀 버리고, 젖무덤을 손으로 쥐었다. 얘 몸매가 이런 줄 알면, 얘랑 같이 어울려 다니는 녀석들이 전부 침을 질질 흘릴 거야. 크크크.
서정은 양 손으로 내 옆구리의 티셔츠 자락을 어색하게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내밀어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키스를 하면, ‘감정’이라는 불필요한 것이 살아나 옮겨다닐 것 같았다. 대신, 뾰족하게 도드라진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끝으로 유두를 쓸자, 서정이 몸서리를 쳤다.
“아......!”
“싫어?”
“아니... 기분이 좀 묘해서... 짜릿한 건가?”
게걸스럽게 젖을 빨아대는 내 머리를 서정이 손바닥으로 가만히 눌렀다. ?, ? 하는 음란한 소리에, 흑, 흑 하는 서정의 서툰 교성이 섞였다. 자지가 딱딱하게 굳은 게 몇 달 만인지... 잊었던 기억 속의 뭔가가 떠오르는 듯... 내 속에 죽어 있었던 뭔가가 꿈틀꿈틀 살아나는 듯... 나는 허리를 서정의 몸에서 띄워 삽입을 준비했다.
“후회하지 않겠지?”
“괜찮아... 으윽!”
서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경험 없는 점막에 불기둥이 꽉 차는 동안 숨도 쉬지 않았다. 끝까지 밀어 넣은 다음 동작을 멈추자, 그녀가 눈을 떴다.
“후우... 헉... 헉...”
“아파?”
“아니... 근데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아얏! 움직이니까 아파... 찢어지는 거 아닐까?”
“쏘세지하고는 많이 다르지? 프흐흐...”
“내가 꼭... 공중에 떠서 수호 씨한테 매달려 있는 거 같아.”
“움직일테니까... 아프면 말해,”
“키스는 안 해?”
“다음에 해 줄게.”
“천천히... 흐윽!”
사실 피부의 감촉도 똑 같은 거다... 표피층이 서로 스치는 건데...
탄력도 비슷하다... 진피 아래 피하지방의 탄성도는 또래 여자들은 다 비슷할 테니...
보지 속의 느낌도 같다... 뜨뜻하고... 미끈거리고... 연체동물처럼 부피감 없이 부드럽고...
그런데 왜 다를까? 뭐가 빠진 걸까?
나도 모르게 허리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서정의 뾰족한 비명소리도 커졌다. 비명소리가 쾌감 때문이 아니라는 걸, 찌푸려진 두 눈의 끝에 맺히는 이슬을 보고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을 배려해주기에는 이미 나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뻣뻣한 막대기는 빽빽하게 압박하는 보지살의 저항을 뚫고 마음껏 욕심을 차리고 있었다.
“흑~! 으윽~! 으윽~! 흑~! 천천히~! 수호씨~! 제발~! 아윽~! 아윽~!...”
‘퍽! 퍽! 퍽! 퍽!...’
서정이 꿈틀거렸다. 두 손으로 내 셔츠 깃을 움켜쥐고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목을 당기며, 길게 노출된 목줄기에 드라큘라처럼 입을 대고 살점을 빨아들였다. 사정기가 몰려왔다.
“흑~! 흑~! 이상해~! 아...! 나 이상해~! 아~! 아~!...”
“안에 해도 돼?”
그녀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렬한 뭔가가 머리 끝에 닿는가 싶더니, 쾌감이 온 몸으로 번졌다. 허리를 있는 힘껏 쳐올리며, 그녀의 몸속에 정액을 쿨럭쿨럭 내뱉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으읏! 읏! 읏!”
“하아! 하아! 하아! 아... 아... 아... 헉... 헉... 헉...”
서정이 내 목을 끌어당기는 대로 어깨 언저리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후련한 기분...
“첫 경험 축하해, 장서정.”
이른 아침까지 사무실에서 잔 사람은 서정이 아니라 나였다. 주섬주섬 팬티와 바지를 주워 입고 사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접어진 쪽지가 눈에 띄었다.
「짜릿한 섹스 고마워, 수호 씨.」
그녀보다는 내가 더 고마워해야 맞았을 것이다. 그녀와의 섹스를 통해 나는 최소한 내가 백 퍼센트 무기력한 존재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것이다.
“수호야!”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이 나를 보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짐짓 못들은 체 하고 그냥 길을 가고 있는데, 그 녀석이 다가와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못 들은 척 하기야?”
“너랑 말도 안 해. 치사한 자식.”
“어제 술 값 땜에 그래?”
“그것 뿐이면 말도 안 한다. 서정이는 왜 두고 갔냐? 내가 어제 그 녀석 덕분에....”
“무슨 일 있었어?”
뜨끔 했지만, 딱 잡아뗐다.
“일은 무슨 일?”
“그래? 나는 너하고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더니.”
“왜? 서정이가 이상해?”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천재지변이다.”
“무슨 말이야?”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
일일 주점을 하느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막 중에 의예과 학생회라고 써진 천막을 향했다. 서정은 임시로 마련한 조리대에 붙어 서서,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오이니, 파 같은 것들을 다듬고 있었다. 인간이 변신 능력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과감한 나시 티에 하얀 허벅지의 절반도 덮지 못하는 짧은 스커트를 입은 서정은 전날까지의 왈가닥 장서정이 아니었다. 계란형의 머리를 더 계란처럼 보이게 만드는 깻잎머리에 연한 화장까지 한 그녀는 주변의 어떤 여학생들보다도 눈에 띄었다.
"수호야 어떡하냐? 난 아무래도 장서정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나도 경민이처럼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의 일이 저 애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놀란 사람은 우리 뿐 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은 다들 그녀를 두고 수근거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와서 농담이라도 건네면, 진짜 수줍은 처녀처럼 입을 가리고 웃음으로써, 변한 게 외모 뿐 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경민아.”
“어?”
“너 쟤 차지하려면 앞으로는 힘들겠다.”
“그러게...! 어제까지는 저런 여잔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머리 고치고, 화장하고, 옷 골라 입고... 내가 모처럼의 숙면을 늘어지게 취하고 있는 동안, 서정은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정의 변화가 내게도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무능하고 나태한 김 수호, 이제 그만 인간의 대열에 합류하시지...하는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둘러싼 생활의 틀에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의학과에 진급해서 피터지게 공부하기 전에 1년만 제대로 놀자.’는 핑계를 가지고, 하루 종일 당구장과 주점을 오락가락하는 친구들하고 어울리기는 했어도 진심으로 그들과 섞일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나태할 뿐이었지만, 나는 나에게 처참한 철퇴를 가한 운명 또는 그와 비슷한...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알아채고 계시던 부모님이 직접 나를 나무라지 못하신 건, 내 변화의 원인이 자신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내 반항은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에 의해 누나를 잃어버린 아들이 실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실망이 사그라들어 내가 다시 착실한 김 수호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잠자코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는 나를 야단치는 대신, 나에 대한 걱정을 선미 누나에게 이야기하셨고, 유미 누나와 나의 관계를 샅샅이 알고 있던 선미 누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부모님을 속이고 있는 내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강의 몇 시까지 있니?]
[네 시까지지만, 그 다음엔 실험실에 가야 해.]
[몇 시에 끝나?]
[확실치 않은데...]
[몇 시가 되든 끝나고 꼭 우리 집으로 와. 알았지?]
[......]
[알았냐고!]
[응.]
대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익숙했던 선미 누나의 강압적 어투가 낯설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불쾌했다. 실험실에서는 일곱 시쯤 해방되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다 열 시가 다 될 즈음에 선미누나의 집에 도착했다. 광식 군이 같이 있으면 선미 누나가 심한 독설은 못할 거야... 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누나 혼자 뿐이었다.
“저녁은?”
“먹었어. 매형은?”
“출장이야. 뭐 마실래?”
“맥주.”
“술은 안 돼.”
“아무거나 줘.”
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미 누나는 마치 회사에서 근무 중인 것처럼 무릎까지 오는 폭 좁은 치마에 블라우스 차림이었고, 아직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였다. 그건 아마 내게 허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가져다 준 주스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선미 누나가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나 나나 어차피 빙빙 돌려서 기분 좋게 얘기하는 재주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
“네가 밖에서 어떤 못난 짓을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겠어.”
“......”
“엄마나 아빠한테는 절대 그런 꼴 보이지 마. 그분들은 네가 그분들을 원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계셔. 너 계속 그러면 내가 엄마와 아빠의 죄책감을 덜어드릴 거야.”
“......”
“무슨 뜻인지 알아?”
선미 누나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몇 달 전에는 내 품에 안기던 여자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을까? 마음속의 나는 그녀의 협박에 반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내가 유미 누나를 범했다고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야?
“알았어. 노력해 볼게.”
“노력만 가지고는 안 돼! 꼭 그렇게 해야 해!”
그런 충고를 선미 누나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 사람이 누구라 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선미 누나는 나에게 그녀 자신을 닮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동생하고 육체관계를 가지고도 드러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같다는 듯, 정해진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가는 그녀 자신...
“누나하고 달라. 나하고... 유미 누나는...”
“뭐야?”
나를 쏘아보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조금 남아 있는 주스를 목구멍에 넘겼다. 보나마나 그녀는 강력한 반격을 준비하고, 내 입에서 한마디라도 더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만, 나는 내 용건은 끝났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섰다.
“갈게, 누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한테는 잘 할게.”
“거기 앉아!”
그녀의 명령을 뒤통수로 튕기며 나는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 누나는 자신의 명령을 무시한 내게 화가 났겠지만, 나도 빨리 자리를 끝내고 싶어하는 내 심정을 이해해주지 않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내 어깨에 닿는 누나의 손을 마치 치한한테 하듯 강하게 뿌리쳐 버렸다. 돌아선 내 눈에 선미 누나의 찢어질 듯 떠진 두 눈과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연이은, ‘짝!’소리...... 뺨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 속에 웅크린 뭔가가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선미 누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았다. 누나도 노기가 가득 찬 표정...
“도대체 요즘 왜 그러니? 신한테 버림이라도 받았어?”
“누나는,”
“......”
“말해도 이해 못하잖아! 외로움, 사랑 이런 거 모르잖아!”
“그래! 너 잘 났다, 나는 속물이고! 정도 없고, 감동할 줄도 모르고, 내 잇속만 챙기고!”
“......”
“나도 유미처럼 약이라도 먹을까? 응? 그래야 네 속이 시원해? 너 나 가지고 놀았잖아! 내가 유미 같으면, 네가 나한테 그렇게 했겠어?”
“그만해!”
“너는 뭘 얼마나 잘 했어?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이데? 머저리 같은 자식아!”
“그만 좀 하라니까!”
속사포처럼 독화살을 쏟아내는 그 입을 막고 싶어서, 그냥 가볍게 밀었을 뿐인데 선미 누나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소파에 쓰러졌다. 폭력으로 인한 죄책감이 피어올랐지만,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 주지 못하고 나도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스로 일어나 앉은 누나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나쁜 놈.......”
“나도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 알아......”
“......”
“누나 말대로 내가 나쁜 놈일 거야. 나 아직도... 내가 누나나, 유미 누나하고 그런 관계를 가진 게 잘못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진짜 나쁜 놈이지?”
“......”
“다만, 너무 외로워... 유미 누나가 너무 보고 싶고... 다른 건 다 허무하고... 그래서 이러는 것 뿐이야. 누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았잖아?”
“나도...... 동생을 둘 다 잃었잖아.”
“그래....... 그렇네....... 미안해.”
“그 중에....... 하나라도 건지고 싶어 이러는 거야.”
“......”
“......”
“갈게...... 누나 말 새기고 있을게.”
“나 피하지 마, 수호야. 네가 그럴 때마다 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사실 힘들어.”
“응.”
제기랄... 내 경솔했던 행동의 결과를 언제까지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집에 들어가기 누구라도 불러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선미 누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편의점에 들러 소주를 몇 병 사서 침대에 앉아 병나발을 불었다. 계기가 필요해... 나한테는... 뭐든.
강의실에서 내 자리는 항상 같았다. 숫자가 많은 의예과 학생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강의는 마치 고등학교 때처럼 고정된 전용 계단식 강의실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이 출입하는 뒤 쪽 문에서 직선으로 가장 가까운 자리가 내 자리였다. 출입문이 내겐 뭔가가 숨통을 조여올 때, 언제든 탈출할 수 있는 자유와 같은 의미였다. 의예과의 성적이 본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강의에 별 관심이 없었고, 강의실은 거의 항상 정원을 다 채우지 못했다. 내 자리에서 보면 강의에 출석한 모든 학생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 날도 귓전까지 와서 그냥 소멸되어 버리는 강의를 그저 하릴 없이 들으며, 노트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수호 씨...”
모기가 윙윙 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의에 늦은 서정이 내게 한 칸만 옆으로 옮겨 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지각생들의 그런 애원을 나는 무시했지만, 그 날은 서정을 위해 엉덩이를 들썩거려 옆자리로 비켜 주었다. 교수님 몰래 잽싸게 들어와 앉은 서정의 몸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내가 낙서하고 있던 노트에 서정이 볼펜을 끄적거렸다.
[고마워.]
그녀가 여자로 ‘변신’한 후에는 그녀 곁에 항상 남학생들이 꼬였기 때문에, 학생회 실에서 본 이후에는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터프하고 왈가닥이던 장서정은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긴 다리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섹시한 장서정이 현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써 놓은 글자 밑에 나도 그저 가볍게 한 줄 대답해 주었다.
[그럼 한 번 줄래?]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느라 목 언저리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다시 한 줄 남겼다.
[숙녀에게 그게 웬 불결한 말?]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끄적거렸다.
[줄거야, 안 줄 거야?]
[지금 나한테 추근대는 거 맞지?]
[그냥 물어본 거야.]
[누가 주겠어? 우리 과 최고의 불량학생!]
[알았어. 대화 끝.]
그냥 가벼운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한참 강의를 듣던 서정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끄적거리기 전에는...
[왜 그렇게 살아?]
촉각이 곤두섰다. 누군가의 비난에 나는 무척이나 약했다.
[대화 끝! 이라고 했잖아.]
[신한테 버림이라도 받았어?]
선미 누나의 입에서 나왔던 말과 같은, 그 한 줄에 얼굴이 뻣뻣해져 왔다. 어떤 할일 없는 작가가 책에 그런 말을 써서 유통이라도 시키는 걸까? 노트에 뭔가 쓰는 대신 고개를 돌려 서정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강의에 신경의 절반을 몰두하고 있던 서정은 그런 내 눈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내 대답이 없자 비난을 한 줄 더 했다.
[수호 씨 별명, 외로운 늑대, 그리고 또 뭔 지 알아?]
[......]
[막판 인생!]
서정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남학생들의 관심의 중심에 선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다. 나는 슬며시 노트를 집어 그녀의 볼펜이 닿지 않는 반대편에 옮겼다. 뭐... 자업자득이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데, 누군가에 대해 수군거리는 건 당연했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을 여전히 초탈하지 못한 내 자신이 우스울 뿐...
만약, 유미 누나가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면 정말 힘들었겠다. 진규 형과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 테니... 못된 별명도 가져다 붙일 테고...
장난을 그만두고 싶은 내 마음을 무시하고, 서정이 자신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려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부모님은 알고나 계셔? 수호 씨 이러는 지?]
그녀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구는 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몸의 체온은 죄다 얼굴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당장 강의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서정이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내 고정석을 타고 넘어야만 했다. 부글부글 끓는 뭔가를 꾹 억누르며, 서정의 노트에 내키지 않는 글자를 써 넣었다.
[그만 하자. 네가 나해 대해 알기나 해?]
마치 그 날은 나를 놀리려고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아니면, 평소에 내게 하고 싶었던 비난을 옆자리에 앉은 기회를 이용해 죄다 퍼붓고 싶었거나...
[아, 네, 무슨 그리 대단하신 경험을 했는데요?]
링 코너에 몰린 나는 정신이 없었다. 서정이 일부러 그런 것이든, 아니든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서정의 노트에 막말을 적어나갔다.
[넌 알 거 없어. 섹스나 구걸하는 주제에!]
서정과 나와의 첫 섹스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기는 힘들어진 게 분명했다. 서정의 얼굴도 내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강의실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걸 봤지만, 나도 이미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있었다. 서정이 마지막 글을 끄적거렸다.
[주면 제대로 먹기나 해? 등신아!]
우린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험한 반칙을 결행했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드러나 있는 서정의 허벅지 사이 중심에 손바닥을 대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반대쪽으로 다리를 돌렸지만, 좁은 의자에서는 일어서지 않는 한, 손이 닿지 않을 거리만큼 도망갈 수가 없었다. 허벅지가 붙기 전에 이미 내 손바닥은 그녀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급하게 노트에 글자를 끄적거렸다.
[하지 마! 미쳤어?]
대답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워 보지 언저리를 움켜쥐었다.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챈 서정이 두 손으로 내 손목을 쥐고 사타구니에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보다는 뻔뻔함에 있어 내가 그녀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었다. 강의에 열중하시는 교수님의 시선 내에서 서정은 적극적인 움직임을 할 수 없었고, 나는 그녀의 저항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그녀의 보지에 추잡한 난행을 가했다. 귀에 대고 조용하지만 불결한 폭언까지 곁들이며......
“보여 줄게. 얼마나 제대로 먹는지......”
자리를 옮기려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뒤쪽에서 칠판이 잘 보이지 않으면 앞자리로 옮기는 건 강의를 듣는 학생의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에 어느 교수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책을 덮는 서정의 한쪽 손목을 우왁스럽게 움켜쥐고 끌어내린 다음 손바닥이 내 사타구니에 닿도록 고정했다. 서정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지만, 그게 측은하게 느껴지는 대신 자지가 발딱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서정이 남은 손으로 조금 전 덮였던 책을 다시 폈다. 그리고 볼펜을 쥐고 필기하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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