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간의 여행이 내게 준 것은 스키 실력만이 아니었다. 2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온 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이성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주관과 사고의 중심이 없다는 걸 깨닫는 계기였다. 특히, 성 관계에 대한 그 간의 내 사고방식이 순전히 나를 중심으로 하는 ‘아전인수’ 형의 사고방식이었다는 걸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광식 군의 외도에 분노한다면, 나와 선미 누나의 관계도 광식 군이 분노할 관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냥 가벼운 장난처럼 간주하고 있던 숙모와의 관계도, 사실은 삼촌의 입장에서 보면, 입에 담지 못할 인륜의 파괴라는 것도...
같은 원리로, 훗날 내가 결혼한 후에 내가 내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내 아내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은 내게, 이제 나도 내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오빠 집에 가서 공부하면 안 돼요?]
[무슨 말이야, 그게?]
[오빠랑 언니가 오는 대신 내가 간다고...]
[왜?]
[그냥... 그러고 싶어요. 우리 집보다 오빠 집이 더 좋아, 시부모님들도 편안하고...]
[시부모님이라니?]
[오빠네 아빠랑 엄마... 전에 봤잖아요. 오빠한테 시집가면 시부모님 되잖아요?]
[이걸 콱!]
[호호호, 오빠 방학 동안만 그렇게 해 주라. 내 소원인데...]
[그래, 한 번 시험 삼아 해 보자.]
[우와~! 고마워요, 오빠. 오늘부터 갈게요.]
유진이가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정서적으로 더 좋았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전철을 한 번 더 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유진이 새엄마를 볼 기회가 적어진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볼 일이 있으면 찾아가면 될 터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버님이라니... 하지만 따지고 보니 유진이가 우리 아빠에게 할 수 있는 호칭이 아버님 말고 다른 것도 없었다. 하여튼 여우같은 계집애... 싹싹한 유진이의 인사에 아빠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신 듯... 유진이를 천하에 둘도 없는 모범 소녀로 알고 계시는 엄마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여행 가방은 뭐니?”
“옷가방이에요. 공부할 때는 편한 복장이 좋잖아요.”
“그걸 날마다 가지고 다니려고?”
“아니, 여기 가져다 두려고요. 괜찮죠, 어머님?”
“그래. 괜찮아. 선미 방에 두면 되겠다. 더러워지면 내가 빨아 놓을 게...”
“고맙습니다, 어머님. 그리고 저 오빠 없을 때도 혼자 와서 공부하면 안돼요?”
“그래라. 늦으면 자고 가도 괜찮아.”
“야~! 정말요? 고맙습니다.”
어찌나 좋은 티를 내는지, 아빠한테 달려들어 뽀뽀라도 할 태세였다. 아예 둥지를 틀려고 그러나? 그런 유진이의 모습에서 맨 처음 그 애를 봤을 때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른들의 말대로 그 동안 정붙일 데가 없어서 그런 건가? 좀 더 정상적인 집에서 자랐더라면 성수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제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계집애가 며칠 못 본 사이에 살까지 올라서 제법 처녀티도 났다.
물론 공부를 마치고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는 노동은 감수해야 했다.
“집에 바로 들어가. 딴 데로 새지 말고...”
“그건 약속 위반인데요? 처음에 사생활엔 간섭안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오빠 친구로서 하는 얘기야.”
“집까지 데려다 주면 그냥 들어가고...”
“어휴, 너 왜 그렇게 뺀질거리냐?”
“나 원래 이렇잖아요. 근데 아버님이 나 좋아하시는 거 같아. 맞죠?”
“얻다 대고 아버님이래?”
“그럼, 아버님이지 뭐라고 불러요? 아빠라고 불러요? 아니면, 아저씨?”
“그래, 그래. 너 맘대로 불러라.”
“오빠는... 그러다 내가 진짜 나중에 오빠 각시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치?”
“그럼 그 때는 내가... 오빠랑 유미 언니 사이 감시해야지. 흐흐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고, 그런 내 표정을 보고, 그 애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눈치 챈 듯 했다. 그렇게까지 과민할 필요는 없었는데... 얼른 표정을 바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적표 언제 나오니?”
“금방 나올 거예요.”
“이번에도 성적이 올랐으면 뽀뽀해 줄게.”
“입술에?”
“응. 입술에...”
“정말? 약속해요!”
전철을 태워 보내고 돌아와, 유미 누나의 방 밑에 쪽지를 밀어 넣어 두었다.
‘유진이가 우리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어.’
말로 해도 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 스키 여행 이후로 시종일관 유미 누나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그 미소에 나는 겁먹고 있었다. 그냥 미소일 뿐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그게 섬?한 흉기보다 더 큰 불안을 줬다. 어떻게든 유미 누나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좋은 변화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잖은가? 누나, 선미 누나랑 내가 섹스하는 거 보고 뭐 결심한 거 있어?
계집애가 새엄마한테 얘기할 리 없으니, 나라도 알려줘야 했다.
[저예요.]
[수호 씨?]
[네. 유진이 들어왔어요?]
[좀 전에...]
[얘기하던가요?]
[무슨 얘기요?]
[당분간 유진이가 우리 집에 오기로 했어요.]
[네...]
[제가 어머님을 어떻게 부르면 좋겠어요?]
[......]
[어머님이라는 말 싫어하시잖아요?]
[그냥 소영 씨라고 하거나... ]
[.......]
[미미라고...]
[네...]
[이제 그럼... 우리 집에는 안 오겠네요?]
[제가 가면 좋겠어요?]
[네...]
[가끔 들를게요.]
그녀가 아무리 피학적 성애에 길들여져 있다 해도, 누군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인격체로 봐주는 사람에 대해서, 그녀는 낯선 불안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일 테니...
‘똑, 똑, 똑.’
“열렸어요.”
유미 누나다. 집에 돌아와 내가 넣어둔 쪽지를 본 것이다. 그녀가 내 방 문을 노크한 게 얼마만인가? 돌아보는 내게 누나가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초승달처럼 귀엽게 변하는 두 눈... 정말, 왜 저럴까?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해?”
“아! 들어와, 누나.”
누나가 들어와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침대의 시트를 손으로 쓰다듬어 뭔가 회상하는 듯... 그 짧은 적막을 참지 못해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쪽지 봤지? 유진이가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고 싶대. 조금 전에 다녀갔었어.”
“응. 근데, 나, 네 방 참 오랜만에 들어와 봤다.”
“그러네...”
“......”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 아냐?”
“아니...”
“......”
“누나가 동생 방에 들어오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그냥 한 번 와보고 싶었어. 유진이 일은 잘 됐다.”
누나가 일어서서 방 문을 향해 걸었다. 문 고리를 잡더니 다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 보았다.
“그 다음에도... 언니 만났어?”
뜨끔! 역시 당당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화제였다.
“아니...”
“응... 잘 자.”
“누나도...”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걸까? 내가 선미 누나와 섹스 하는 걸 보고 자기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유미 누나는 나와 자신의 핏줄이 서로 다른 것으로 알고 있으니, 나와 관계를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 아니다. 유미 누나는. 그런 난잡함을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그 겨울이 내가 놀 수 있는 마지막 겨울이라고 했다. 2학년이 되면 본과(의학과)에 들어가기 전의 예비 스터디를 해야 하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방학 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통적인 의견은 ‘무조건 놀아라’ 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다지 뭔가 준비하고 싶지도, 뭔가 건수를 만들어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그해는 마지막까지 그저 무위도식하면서 새 해의 첫 2개월의 방학 기간 동안 뭘 하며 지낼 지를 차분히 생각할 작정이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잔 들어.”
자리에 앉자마자 진규 군이 소주 잔을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소주병이 두개, 진규 군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웬 낮술이야, 형?”
영문도 모르고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아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잔을 돌려주고 술을 따라 주니, 그가 또 원 샷...
“무슨 일 있어, 형?”
진규 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얼굴 한 번 보자는 연락을 받고 나온 터였다. 연말이니 둘이서 송년회나 하자는 뜻으로 알고 나왔는데, 대명천지에 벌써 술을 푸고 있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무척이나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 응, 있지. 언젠가는 있을 줄 알았지만...”
또 마신다, 또. 병에 남은 마지막 술을 따라 주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유미 누나와 무슨 일이 있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도 마셔라, 너하고 인연도 오늘로 끝인가 보다.”
역시...
“누나하고 헤어졌어요?”
“응, 그랬다. 근데 내가 싫어서가 아니랜다. 크크크.”
“싸웠어요?”
“싸움?”
진규 군이 내 머리 뒤쪽의 창 밖을 쳐다 보았다.
“그런 거...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좀 덜 괴로울 텐데...”
의례적인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뭐, 만나다 헤어졌다 그런 거잖아. 며칠 있다 다시 연락해보면 될 거야. 내가 집에서 잘 꼬셔 볼게, 형.”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유미 누나가... 뭐든 그렇게 가볍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진규 군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전에 내가 얘기했지, 유미 씨 껍데기만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네...”
“그때 짐작하고 있었어. 언젠가는 유미 씨가 나한테 너는 해고! 할 거라는 거...”
“......”
“눈은 나를 보고 있는데, 머리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었어. 내가 유미 씨 좋아할 때부터 있었으니까 뭐라 나무랄 수도 없지... 근데, 언젠가는 그 사람을 밀어내고 유미 씨 머리에, 유미 씨 가슴에 내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 유미 씨 힘들게 하는 그 사람, 쉽게 맺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그 사람은 나였어, 형. 하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 유미 누나 마음에 내 자리는 없어...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 분 참 대단한 사람이다. 크크크... 유미 씨 나랑 사귀는 동안 그 사람을 같이 만날 배짱은 못되는데... 얼마나 잘난 분 이길래, 얼마나 유미 씨 마음에 콕 박혀 있길래 보지 않아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크크크...”
“누나가 그 사람한테 가겠대요?”
“아니... 그런 말 안 했어. 그냥... 더 이상 나를 기만할 수 없단다... 나한테는 줄 게 아무 것도 없단다.”
“......”
팔을 모으더니 고개를 묻었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낮은 울음소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그저 조용히 술을 따라 마셨다. 그에게 결별을 고한 거하고, 최근에 보이는 그 어이없는 쾌활함하고 뭔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김 유미.
“그래도...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았는데... 그거 말고 나한테 뭐 더 주는 거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술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모를 붉은 결막...
“이제 어떡할까? 유미 씨 없이...”
“형, 집에 가서 푹 쉬고 다시 해봐요. 제가 어떻게든 도울게요.”
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부른 건, 다른 누구하고도 유미 씨 이야기하기 싫어서 뿐이야. 너한테 뭐 해달라는 거 아니고...”
그가 몸을 일으키고, 나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지 마. 그냥 좀 혼자 있고 싶다. 먼저 갈게.. 미안해.”
그가 비틀비틀 카운터에 들르더니,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탐했다. 버림받는 것... 버리는 입장에서는 그 느낌을 모른다. 그런데...곱고 착한 유미 누나가 벌써 두 번이나 그런 짓을 한 거다. 처음엔 내게... 그 다음엔 진규 군... 나야 뭐, 그럴만한 짓을 했지. 진규 군은... 잘못한 거다, 누나가. 결혼하면 평생 유미 누나만 보고 살 사람인데... 왜 그랬을까?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유미 누나가 결별을 고한 게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진규 군과 사귀기 시작할 때 이미 나는 누나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누나를 실망시켰으니까.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따르릉....!
[여보세요?]
[어디냐?]
[성수?]
[그래. 형님이다.]
[어쩐 일로 전화를... 무슨 일 있어?]
[목소리 한 번 들을려고 전화했더니, 까칠하게 받네. 일은 무슨 일.]
[너 하는 짓이 항상 불안 불안해서 그래, 임마. 어디야? 부대야?]
[아니, 휴가 나왔어. 총 잘 쐈다고.]
[오! 그래? 지금 어디 있어?]
[집에...]
[내가 갈게.]
[아니 내가 갈게. 어디냐?]
검게 그을린 얼굴과 까까머리 때문인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수의 모습이 한층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짜식 보게? 대낮부터 웬 술?”
“아니, 원래 먹으려고 했던 거 아니고, 사연이 있어. 마실래?”
“주라.”
주거니 받거니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 하다 보니 시간이 한참 흘러,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둘 다 얼근히 취했다. 아침에 부대에서 나와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나온 성수는 아직 새엄마와 유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였다.
“저녁에 할 일 없지?”
“나야 뭐, 완전히 놈팽이지만 너는 가서 유진이 봐야지.”
“나중에 보지, 뭐.”
“어머니는?”
“나중에...”
“크크크, 보고 싶으면서 자식이...!”
“오늘은... 우리 꼰데 집에 있는 날이야.”
“니가 그걸 어찌 알아? 군대에 소식통이라도 있냐?”
“엄마 제삿날이거든...”
“......”
“유진이도 아마 안 들어올 거야.”
“그럼 어디 갈래?”
“일어서! 나이트 가자.”
“이 시간에?”
“그래. 삼삼한 계집애들이나 구경해야지.”
내가 광식 군의 외도에 분노한다면, 나와 선미 누나의 관계도 광식 군이 분노할 관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냥 가벼운 장난처럼 간주하고 있던 숙모와의 관계도, 사실은 삼촌의 입장에서 보면, 입에 담지 못할 인륜의 파괴라는 것도...
같은 원리로, 훗날 내가 결혼한 후에 내가 내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내 아내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은 내게, 이제 나도 내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오빠 집에 가서 공부하면 안 돼요?]
[무슨 말이야, 그게?]
[오빠랑 언니가 오는 대신 내가 간다고...]
[왜?]
[그냥... 그러고 싶어요. 우리 집보다 오빠 집이 더 좋아, 시부모님들도 편안하고...]
[시부모님이라니?]
[오빠네 아빠랑 엄마... 전에 봤잖아요. 오빠한테 시집가면 시부모님 되잖아요?]
[이걸 콱!]
[호호호, 오빠 방학 동안만 그렇게 해 주라. 내 소원인데...]
[그래, 한 번 시험 삼아 해 보자.]
[우와~! 고마워요, 오빠. 오늘부터 갈게요.]
유진이가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정서적으로 더 좋았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전철을 한 번 더 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유진이 새엄마를 볼 기회가 적어진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볼 일이 있으면 찾아가면 될 터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버님이라니... 하지만 따지고 보니 유진이가 우리 아빠에게 할 수 있는 호칭이 아버님 말고 다른 것도 없었다. 하여튼 여우같은 계집애... 싹싹한 유진이의 인사에 아빠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신 듯... 유진이를 천하에 둘도 없는 모범 소녀로 알고 계시는 엄마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여행 가방은 뭐니?”
“옷가방이에요. 공부할 때는 편한 복장이 좋잖아요.”
“그걸 날마다 가지고 다니려고?”
“아니, 여기 가져다 두려고요. 괜찮죠, 어머님?”
“그래. 괜찮아. 선미 방에 두면 되겠다. 더러워지면 내가 빨아 놓을 게...”
“고맙습니다, 어머님. 그리고 저 오빠 없을 때도 혼자 와서 공부하면 안돼요?”
“그래라. 늦으면 자고 가도 괜찮아.”
“야~! 정말요? 고맙습니다.”
어찌나 좋은 티를 내는지, 아빠한테 달려들어 뽀뽀라도 할 태세였다. 아예 둥지를 틀려고 그러나? 그런 유진이의 모습에서 맨 처음 그 애를 봤을 때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른들의 말대로 그 동안 정붙일 데가 없어서 그런 건가? 좀 더 정상적인 집에서 자랐더라면 성수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제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계집애가 며칠 못 본 사이에 살까지 올라서 제법 처녀티도 났다.
물론 공부를 마치고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는 노동은 감수해야 했다.
“집에 바로 들어가. 딴 데로 새지 말고...”
“그건 약속 위반인데요? 처음에 사생활엔 간섭안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오빠 친구로서 하는 얘기야.”
“집까지 데려다 주면 그냥 들어가고...”
“어휴, 너 왜 그렇게 뺀질거리냐?”
“나 원래 이렇잖아요. 근데 아버님이 나 좋아하시는 거 같아. 맞죠?”
“얻다 대고 아버님이래?”
“그럼, 아버님이지 뭐라고 불러요? 아빠라고 불러요? 아니면, 아저씨?”
“그래, 그래. 너 맘대로 불러라.”
“오빠는... 그러다 내가 진짜 나중에 오빠 각시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치?”
“그럼 그 때는 내가... 오빠랑 유미 언니 사이 감시해야지. 흐흐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고, 그런 내 표정을 보고, 그 애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눈치 챈 듯 했다. 그렇게까지 과민할 필요는 없었는데... 얼른 표정을 바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적표 언제 나오니?”
“금방 나올 거예요.”
“이번에도 성적이 올랐으면 뽀뽀해 줄게.”
“입술에?”
“응. 입술에...”
“정말? 약속해요!”
전철을 태워 보내고 돌아와, 유미 누나의 방 밑에 쪽지를 밀어 넣어 두었다.
‘유진이가 우리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어.’
말로 해도 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 스키 여행 이후로 시종일관 유미 누나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그 미소에 나는 겁먹고 있었다. 그냥 미소일 뿐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그게 섬?한 흉기보다 더 큰 불안을 줬다. 어떻게든 유미 누나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좋은 변화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잖은가? 누나, 선미 누나랑 내가 섹스하는 거 보고 뭐 결심한 거 있어?
계집애가 새엄마한테 얘기할 리 없으니, 나라도 알려줘야 했다.
[저예요.]
[수호 씨?]
[네. 유진이 들어왔어요?]
[좀 전에...]
[얘기하던가요?]
[무슨 얘기요?]
[당분간 유진이가 우리 집에 오기로 했어요.]
[네...]
[제가 어머님을 어떻게 부르면 좋겠어요?]
[......]
[어머님이라는 말 싫어하시잖아요?]
[그냥 소영 씨라고 하거나... ]
[.......]
[미미라고...]
[네...]
[이제 그럼... 우리 집에는 안 오겠네요?]
[제가 가면 좋겠어요?]
[네...]
[가끔 들를게요.]
그녀가 아무리 피학적 성애에 길들여져 있다 해도, 누군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인격체로 봐주는 사람에 대해서, 그녀는 낯선 불안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일 테니...
‘똑, 똑, 똑.’
“열렸어요.”
유미 누나다. 집에 돌아와 내가 넣어둔 쪽지를 본 것이다. 그녀가 내 방 문을 노크한 게 얼마만인가? 돌아보는 내게 누나가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초승달처럼 귀엽게 변하는 두 눈... 정말, 왜 저럴까?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해?”
“아! 들어와, 누나.”
누나가 들어와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침대의 시트를 손으로 쓰다듬어 뭔가 회상하는 듯... 그 짧은 적막을 참지 못해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쪽지 봤지? 유진이가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고 싶대. 조금 전에 다녀갔었어.”
“응. 근데, 나, 네 방 참 오랜만에 들어와 봤다.”
“그러네...”
“......”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 아냐?”
“아니...”
“......”
“누나가 동생 방에 들어오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그냥 한 번 와보고 싶었어. 유진이 일은 잘 됐다.”
누나가 일어서서 방 문을 향해 걸었다. 문 고리를 잡더니 다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 보았다.
“그 다음에도... 언니 만났어?”
뜨끔! 역시 당당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화제였다.
“아니...”
“응... 잘 자.”
“누나도...”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걸까? 내가 선미 누나와 섹스 하는 걸 보고 자기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유미 누나는 나와 자신의 핏줄이 서로 다른 것으로 알고 있으니, 나와 관계를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 아니다. 유미 누나는. 그런 난잡함을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그 겨울이 내가 놀 수 있는 마지막 겨울이라고 했다. 2학년이 되면 본과(의학과)에 들어가기 전의 예비 스터디를 해야 하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방학 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통적인 의견은 ‘무조건 놀아라’ 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다지 뭔가 준비하고 싶지도, 뭔가 건수를 만들어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그해는 마지막까지 그저 무위도식하면서 새 해의 첫 2개월의 방학 기간 동안 뭘 하며 지낼 지를 차분히 생각할 작정이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잔 들어.”
자리에 앉자마자 진규 군이 소주 잔을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소주병이 두개, 진규 군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웬 낮술이야, 형?”
영문도 모르고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아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잔을 돌려주고 술을 따라 주니, 그가 또 원 샷...
“무슨 일 있어, 형?”
진규 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얼굴 한 번 보자는 연락을 받고 나온 터였다. 연말이니 둘이서 송년회나 하자는 뜻으로 알고 나왔는데, 대명천지에 벌써 술을 푸고 있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무척이나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 응, 있지. 언젠가는 있을 줄 알았지만...”
또 마신다, 또. 병에 남은 마지막 술을 따라 주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유미 누나와 무슨 일이 있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도 마셔라, 너하고 인연도 오늘로 끝인가 보다.”
역시...
“누나하고 헤어졌어요?”
“응, 그랬다. 근데 내가 싫어서가 아니랜다. 크크크.”
“싸웠어요?”
“싸움?”
진규 군이 내 머리 뒤쪽의 창 밖을 쳐다 보았다.
“그런 거...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좀 덜 괴로울 텐데...”
의례적인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뭐, 만나다 헤어졌다 그런 거잖아. 며칠 있다 다시 연락해보면 될 거야. 내가 집에서 잘 꼬셔 볼게, 형.”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유미 누나가... 뭐든 그렇게 가볍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진규 군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전에 내가 얘기했지, 유미 씨 껍데기만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네...”
“그때 짐작하고 있었어. 언젠가는 유미 씨가 나한테 너는 해고! 할 거라는 거...”
“......”
“눈은 나를 보고 있는데, 머리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었어. 내가 유미 씨 좋아할 때부터 있었으니까 뭐라 나무랄 수도 없지... 근데, 언젠가는 그 사람을 밀어내고 유미 씨 머리에, 유미 씨 가슴에 내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 유미 씨 힘들게 하는 그 사람, 쉽게 맺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그 사람은 나였어, 형. 하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 유미 누나 마음에 내 자리는 없어...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 분 참 대단한 사람이다. 크크크... 유미 씨 나랑 사귀는 동안 그 사람을 같이 만날 배짱은 못되는데... 얼마나 잘난 분 이길래, 얼마나 유미 씨 마음에 콕 박혀 있길래 보지 않아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크크크...”
“누나가 그 사람한테 가겠대요?”
“아니... 그런 말 안 했어. 그냥... 더 이상 나를 기만할 수 없단다... 나한테는 줄 게 아무 것도 없단다.”
“......”
팔을 모으더니 고개를 묻었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낮은 울음소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그저 조용히 술을 따라 마셨다. 그에게 결별을 고한 거하고, 최근에 보이는 그 어이없는 쾌활함하고 뭔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김 유미.
“그래도...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았는데... 그거 말고 나한테 뭐 더 주는 거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술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모를 붉은 결막...
“이제 어떡할까? 유미 씨 없이...”
“형, 집에 가서 푹 쉬고 다시 해봐요. 제가 어떻게든 도울게요.”
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부른 건, 다른 누구하고도 유미 씨 이야기하기 싫어서 뿐이야. 너한테 뭐 해달라는 거 아니고...”
그가 몸을 일으키고, 나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지 마. 그냥 좀 혼자 있고 싶다. 먼저 갈게.. 미안해.”
그가 비틀비틀 카운터에 들르더니,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탐했다. 버림받는 것... 버리는 입장에서는 그 느낌을 모른다. 그런데...곱고 착한 유미 누나가 벌써 두 번이나 그런 짓을 한 거다. 처음엔 내게... 그 다음엔 진규 군... 나야 뭐, 그럴만한 짓을 했지. 진규 군은... 잘못한 거다, 누나가. 결혼하면 평생 유미 누나만 보고 살 사람인데... 왜 그랬을까?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유미 누나가 결별을 고한 게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진규 군과 사귀기 시작할 때 이미 나는 누나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누나를 실망시켰으니까.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따르릉....!
[여보세요?]
[어디냐?]
[성수?]
[그래. 형님이다.]
[어쩐 일로 전화를... 무슨 일 있어?]
[목소리 한 번 들을려고 전화했더니, 까칠하게 받네. 일은 무슨 일.]
[너 하는 짓이 항상 불안 불안해서 그래, 임마. 어디야? 부대야?]
[아니, 휴가 나왔어. 총 잘 쐈다고.]
[오! 그래? 지금 어디 있어?]
[집에...]
[내가 갈게.]
[아니 내가 갈게. 어디냐?]
검게 그을린 얼굴과 까까머리 때문인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수의 모습이 한층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짜식 보게? 대낮부터 웬 술?”
“아니, 원래 먹으려고 했던 거 아니고, 사연이 있어. 마실래?”
“주라.”
주거니 받거니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 하다 보니 시간이 한참 흘러,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둘 다 얼근히 취했다. 아침에 부대에서 나와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나온 성수는 아직 새엄마와 유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였다.
“저녁에 할 일 없지?”
“나야 뭐, 완전히 놈팽이지만 너는 가서 유진이 봐야지.”
“나중에 보지, 뭐.”
“어머니는?”
“나중에...”
“크크크, 보고 싶으면서 자식이...!”
“오늘은... 우리 꼰데 집에 있는 날이야.”
“니가 그걸 어찌 알아? 군대에 소식통이라도 있냐?”
“엄마 제삿날이거든...”
“......”
“유진이도 아마 안 들어올 거야.”
“그럼 어디 갈래?”
“일어서! 나이트 가자.”
“이 시간에?”
“그래. 삼삼한 계집애들이나 구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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