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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9 634회 0건
[29부]



"하아..아...아빠...들어오고 있어..."

유리의 가는 허리가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탐스러운 젖무덤을 유리가 스스로 어루만지며 아미를 찌푸린 채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흐으..응...기분...좋아...아빠..보고 있어...? 어차피..아빠는 나 안지 않을 거니까...하악, 아앙...그렇게 세게 하지마아..."

남자의 위에 올라타 있는 유리. 그녀가 앙탈스러운 목소리로 교태롭게 웃음을 날리며 남자의 배를 짚곤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악, 하아아..아앙, 하아..앙...좋아..흐으..응...더..세게...하악, 하아아..."

태현은 어쩌할 줄을 몰라하며 유리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유리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며 말한다.

"탕수육 먹고 싶어!"
"타..탕수육?"

당황하는 태현에게 유리는 조소를 지었다.

"어차피 바닷물이 차가워서 수영도 못해. 그러니까 상관하지마."

유리는 그러더니 다시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며 애절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앙...나..하악, 나아...갈 것..같애...하아..으응..."
"유..유리야..."

태현은 다시 유리의 어깨를 잡았고 유리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아빠를 노려보았다.

"억울합니다, 형님."

유리가 아니라 길수였다.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어째서 우리를 버리신 겁니까 형님...어째서...으흐흐흐흑..."
"기..길수야! 나..나는..."

길수가 고개를 번쩍 들어 노려본다.

"병신 새끼...니 딸년도 죽여주마."

형필의 손에 잡힌 사시미가 유리의 목을 천천히 파고들고 있었다. 새빨간 피가 유리의 목에서 흘러나온다.

"아빠 때문이야."

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나 안아주지 않으니까. 아빠가 나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야."

형필의 사시미가 유리의 목을 꿰뚫었다. 서서히 허물어지는 유리. 태현은 죽을힘을 다해 유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이미 시한폭탄의 시간은 -1초를 표시하고 있다. 자신은 유람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유리는 배의 난간에 서서 애타는 손길을 자신에게로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옆에 세워져있던 포르쉐가 폭발했다.





"허어어억!!!"

태현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아빠! 깼어?"

고개를 돌려 보니 유리가 자신의 내뻗어 있는 손을 꼬옥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야...!!"

태현은 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헉...헉...헉......"

목메이는 가쁜숨을 몰아쉬며 태현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딸의 체온에 점점 안도의 표정을 얼굴에 띄우는 태현.

"...유리야......"
"안심해...여기 병원이야......"

유리의 따스한 목소리. 태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서야 하얀 천장이 눈앞에 있고, 자신은 침대에 누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현은 천천히 팔을 풀었고 유리는 눈물을 닦으며 생긋 미소 지었다.

"과로였데. 아빠 이틀이나 잠들어있었어."

태현은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주는 유리에게 당황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때...그 다음엔 어떻게 된 거야...?"

아빠의 물음에 유리는 그때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지 눈물을 지으며 말해주었다.





"젠장!! 안 떠올라!! 라이트 비춰!!"

배의 후미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라이트 불빛이 태현을 찾기 위해 바닷물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라이프 가드들을 비췄다. 1분...2분...점점 시간은 흘러가고, 승객들 중에서 몇몇 사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라이프 가드들과 함께 태현을 찾는데 동참했다. 그렇게 대략 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고,

"나왔다!!!"

라이프 가드들 중 한 사람이 물속에서 태현을 건져 내어 올라왔다.

우와아아아아아!!

그때 터져나온 함성은 그날 사람들이 지른 환호성 중에서 아마 가장 컸을 것이다.





"......라이프 가드가 인공호흡을 하는데 어찌나 걱정되던지...난 그냥 옆에서 엉엉 울고만 있었어......"

금방이라도 다시 엉엉 울 것 같은 분위기로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태현은 천천히 몸을 벽쪽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며 유리에게 말했다.

"일루 들어와."

아빠의 말에 유리는 맺혀있던 눈물을 닦곤 입가에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아빠 옆으로 들어왔다. 태현은 자신쪽으로 돌아 눕는 유리의 귀여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특전대는 왔어? 그 테러범들은 잡혔고?"
"그 사람들은 아직 못잡았데. 인질들도 한 명도 못구했구. 특전대는 아빠 말대루 두 시간 정도 있으니까 왔어. 치...아빠가 벌써 다 해결해놨는데, 그 사람들 인천까지 보호해간다고 되게 생색 내더라."

태현은 테러범들이 끝내 도주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착찹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유리에게는 빙긋 웃어주었다. 유리는 면도를 하지 않아 까칠하게 수염이 나있는 아빠의 턱을 살며시 매만지며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에~인천에 도착하니까 오전 11시쯤이었는데 진짜 난리가 나있었다? 막 방송국에서 취재나오구 난리도 아니었어. 사람들 가족들도 나와서 엉엉 울고...참! 윤지가 친구들이랑 같이 와있었다고 했는데 난 엠뷸런스 타고 아빠랑 곧바로 여기로 온다고 애들 못 만났어. 헤헤~내 친구들 참 기특하지?"

태현은 언제 그런 악몽 같은 경험을 했었냐는듯 어느새 원래대로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유리의 모습을 보자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태현은 유리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유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아빠의 얼굴을 보곤 천천히 얼굴을 진지함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아빠..있잖아..."
"응..."

유리가 천천히 얼굴을 움직여가 아빠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살짝 입술만 갖다대고 떨어뜨린 유리는 애타는 음성으로 태현에게 말했다.

"나...거기에 갔다와서...아빠를 더 사랑하게 되었어......"
"......"

태현은 아무말 없이 유리의 머리카락만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스친다. 유리는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더욱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그랬는데......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이제는 계속 계속...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빠를 더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

유리의 손이 천천히 태현의 환자복을 파고들어 아빠 등의 맨살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나아......"

살며시 유리가 고개를 들어 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노력할 거야. 아빠 마음에 들도록......"

태현은 아무말 없이 유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는 아직도 자길 여자로 봐주길 원하는걸까. 솔직히......모르겠다. 지금은 단지 그 끔찍했던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와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리에게 너무 고마웠다. 너무 고마워서......이젠 유리가 원하는 대로...유리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거나 다 해주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똑똑.

두 부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포옹을 풀었다.

"내가...나갈게."

한 순간 유리의 애탄 눈동자가 마주친 아빠의 눈빛을 질책했다. 어째서 자신의 고백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던 거냐며. 태현의 얼굴은 안타까움으로 얼룩졌고, 유리는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재빨리 입가에 깜찍한 미소를 띄우며 아빠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아빠가 무사해서...나 너무 행복해."

유리는 아빠에게 생긋이 미소 지어주며 침대에서 내려가 문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어...유리냐? 나다.>

"현석 아저씨?"

유리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저씨~! 어라? 아줌마두 왔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문천장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며 들어온 현석과 그와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지닌 그의 아내 가희였다. 현석은 아직 태현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 한 번 병문안을 왔었기에 유리의 머리만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곧바로 태현쪽으로 향했고 가희는 반가운 얼굴로 유리에게 인사했다.

"잘 지냈니? 유리 넌 다친데 없구?"
"네에. 아, 감사합니다~."

유리는 가희가 내미는 과일 바구니를 받으며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형님......"

병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유리와 가희의 시선에 떠오른 광경은 곰만한 덩치의 현석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희는 그 모습을 보곤 유리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우리는 나가자."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일단 과일 바구니를 병상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가희를 따라 병실을 나갔다. 조용하게 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리고, 현석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형님...죄송합니다. 형님께서 그런 위험에 처하셨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해서...끄..흑..."

태현은 현석이 울먹이는 모습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석아. 누가 보면 나 죽은줄 알겠다."
"죄,죄송합니다 형님. 징그럽게 눈물이나 짜고...끄흑..."

급히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눈을 덮은 현석이지만 마음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겠는지 그는 또다시 울먹이며 어깨를 흐느꼈다. 태현은 빙긋 웃으며 천천히 팔을 뻗어 현석의 등어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마라."

따뜻한 태현의 손길에 그제야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낸 현석. 태현은 그런 현석에게 갑자기 떠오른듯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에겐 자객이 찾아가지 않았나."
"자객..이요? ...자객이요?! 형님께 자객이 왔었습니까?!"
"쉬......"

깜짝 놀란듯 병실 안이 떠나갈 목소리로 말하는 현석에게 태현은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야마구치구미에서 두 명이 왔었다."

말을 맺으며 대답을 요구하는 태현의 눈빛에 현석이 주춤거리며 말했다.

"저,저에게는 안 왔었습니다."
"음."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태현은 다시 현석에게 물었다.

"길수나 우철이에게서 연락은 왔었나."
"아..아니요. 그 녀석들은 왜......"
"김형필이 배신을 했다."
"......?!!"

흠짓 커지는 현석의 눈. 태현은 간략하게 요점만 말했다.

"중국 진출을 노리는 야마구치구미에게서 협조의 대가로 홍콩을 약속받은 모양이다. 삼합회의 정예부대를 인천으로 불러들여 길수와 우철이의 손을 빌려 해치울 생각인 것 같아."
"삼합회의...정예부대요?"

현석의 눈에 걱정이 실렸다.

"그러면...혼마기혈대...말씀입니까?"
"글쎄...아무래도 그렇겠지."
"혼마기혈대..정도면, 강남 연합 가지고는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분개한 목소리로 말하는 현석에게 태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음. 일단 길수에게 연락해봐라."
"예!"

현석은 벌떡 일어서서 휴대폰으로 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현은 가만히 기다렸고, 잠시간 신호음만 들은 현석은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휴대폰은 묵묵부답이다. 불길한 예감이 든 현석은 천천히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 걸터앉으며 불안감이 깃든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현을 보곤 이번엔 우철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신호음만 계속 들려온다.

탁...

"두 녀석 다 전화를...받지 않습니다."

휴대폰 폴더를 닫으며 현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태현은 굳은 표정으로 현석에게 말했다.

"내가 연락해볼 테니까 넌 더 이상 개입하지마라."
"......예?"

현석이 억울한 얼굴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어째서...입니까."

태현은 천천히 병상에서 내려와 테이블에 유리가 차곡 차곡 개어놓은 자신의 옷을 주섬 주섬 입기 시작했다.

"자객이 너에게는 찾아가지 않은 걸로 보아 다행히 넌 표적에서 제외된 것 같다. 그러니 괜히 개입해서 제수씨와 용우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태현. 창문 블라인드의 사이를 타고 햇살이 비춰 들어온다. 뒤에서 굴곡진 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혼하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라."

태현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쿵-!

뒤에서 현석이 무릎을 털썩 꿇는 소리가 울려왔다. 태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현석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져온다.

"......형님께서...저에게 이러실 수는..없습니다."
"......"
"제가...형님께 어떤 충성을 바쳐왔는데...이러실 수는...없는 겁니다."

점점 더 서러움이 묻어나는 아우의 목소리에, 점점 더 태현의 얼굴은 그의 아려오는 마음을 말해주듯이 고통스러워졌다.

"현석아...난...네가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 때의 얼굴이 좋다. 난 비록 일찍 잃어버린 행복이지만...너만은...사랑하는 사람과 둘만의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그 행복을 오래도록 느꼈으면 좋겠다."
"......싫습니다. ...형님께서 한평생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돌아가신..우리 어머니 장례 치러주시고, 다 죽어가는 저...죽을 각오하시고..살려주셨을 때부터......제 목숨은 형님 것입니다."
"......"

태현은 천천히 돌아섰다. 현석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고, 태현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하겠다. 만약 길수와 우철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그것은 녀석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내 잘못이다. 여기에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넌 너의 인생을 살아라."

뚝...뚝......

"......"

고개를 숙인 현석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태현을 올려다보는 현석. 그의 눈동자는 서글픈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야아-!! 들어와!"

태현을 붉어진 눈시울로 노려보며 고함을 지른 현석. 귓청이 떠나갈듯이 병실 안을 울린 그 고함소리에 이어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가희가 들어왔다.

"저...부르신 거예요?"

현석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어오는 아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당장 짐싸서 니 아들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라. 오늘부로 너와는 이혼이다."
"......네...? 그게..무슨...?"

가희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의 차가운 모습에 당황하며 방금 들었던 말이 믿기지 않는듯이 현석과 태현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저어...여보...무슨..말씀을 하신 건지..저는 잘..."

고개를 확 돌려 가희를 죽일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현석.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천장을 뒤흔드는 현석의 고함소리에 발을 뒤로 헛디딘 가희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저..저어...왜...왜에...흐윽, 왜...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아직도 갑자기 돌변한 남편의 모습과, 그가 한 말이 믿기지 않는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처럼 현석에게 물어오는 가희. 태현은 현석을 보며 화난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연 순간 갑자기 가희가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무릎 걸음으로 현석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에서 서글픈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제..제가...제가 뭐..흐윽, 잘..못이라도..흐으..윽, 한..건가..요? 으흐..윽...왜...왜에...?"

가희는 이게 꿈일까 싶었다. 세상의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에게 점점 사랑을 느껴온 지난 7년간의 세월. 이제는 그가 곁에 없으면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언성을 높인적도 없고 오로지 따뜻하고 다정하게 자신을 대해준 그가 어떻게 저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일까.

"복잡하게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 없다. 더 이상 너와는 할말 없으니까 여기서 나가라."

냉정한 말을 하는 현석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가희는 입술을 깨문 채 싫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석의 옷깃을 꼬옥 부여잡았다.

"서..설명..해주세요..아,아니...설명..해주신다고..해도...싫어요...헤어지기 싫어요..."

태현은 현석의 옆에 꼭붙어 주저앉은 채 현석이 한 번 털어버리면 저 멀리로 날아갈 것만 같은 가냘픈 손짓에 그래도 온힘을 주어 남편의 옷자락을 부여잡곤 고개를 가로젓는 가희의 모습을 보며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게 놔둔 자신을 책망했다.

"......현석아."

태현은 여기서 자신마저도 화를 내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좋은 목소리로 아우를 불렀다. 하지만 현석은 고개를 홱 돌려 태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여자와 이 여자 아이만 떼어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현석아."

잔뜩 도발적인 울림이 묻어나는 현석의 말에도 태현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며 아우를 불렀다. 현석이 거친 손길로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아버리며 태현을 노려보았다. 태현은 현석의 눈을 한 번 똑바로 마주보고는 곧 천천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가희를 일으켰다.

"제수씨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말고 잠깐만 나가 계세요."

태현은 불안한 얼굴로 현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희를 좋게 타일러서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한 얼굴로 서있던 유리가 일단 가희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태현은 병실 문을 닫으며 천천히 현석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고 태현은 병상에 걸터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킬 자신 있냐."
"......예."
"......담배는."

태현의 물음에 현석이 급히 품에서 태현이 즐겨 피우는 말보로를 꺼내어 한 개피를 내밀었다. 태현은 현석이 내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치익!......

현석이 켜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태현.

"쓰..읍......후우우우......"

안 피운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매캐한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자 머리가 몽롱해진다. 태현은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지금 곧바로 강남 연합의 현재 상황과 김형필의 소재를 알아봐라. 그리고 유람선을 점거했던 녀석들이 어디로 도주했는지도 알아보고."

현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고개를 깊숙히 숙이며 힘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형님!"
"제수씨 잘 위로해주고."
"예. 걱정마십시오."

태현은 창문을 열어 담배를 창틀에 비벼끄고는 병실을 환기시켰다. 현석이 눈치있게 병실 안의 공기가 바뀌도록 잠깐 기다린 후에 나갔고, 잠시 후에 유리가 들어왔다.

"어떻게...된 일이야?"

유리는 닫겨진 병실 문쪽을 보며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 현석 아저씨가 저렇게 화내는 모습 처음 봐."

태현은 옆으로 다가온 유리의 머리를 어루만졌고 유리는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빠."
"응?"

유리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나한테 뭐 화나는 일 있으면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마. 알겠지?"
"응? 그게..무슨 말이야?"
"나한테 화나는 일 같은 거 있으면 그때 그때 바로 나한테 화내라구. 마음에 담아뒀다가 나중에 한 번에 몰아서 화내지 말구. 응?"

태현은 빙긋 웃었다. 아마도 현석 아저씨가 아빠와 말다툼을 하다가 그동안 쌓였던 것을 아줌마에게 화풀이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빠는 유리한테 화 안 내."

유리는 생긋이 웃으며 아빠를 꼬옥 끌어안았다.





링거를 맞고 있지 않았을 정도로 태현은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급격히 좋아졌기에 간단한 검사만 한 의사는 곧바로 태현에게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의사는 단지 총상 때문에 무리를 하면 안 된다는 주의만 줬다. 퇴원하면 안 된다고 해도 퇴원할 생각이었던 태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퇴원 수속을 마치고 유리와 함께 병원 밖으로 향했다.

"유리야. 아빠랑 탕수육 먹으러 갈까?"
"응? 탕수육?"

뜬금 없는 아빠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던 유리는 금세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탕수육 먹고 싶어~."

태현은 귀여운 딸의 얼굴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병원문을 나서는 두 부녀에게 요란한 플래쉬가 터지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태현씨 되십니까? KBC 시사 특집에서 나왔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안녕하세요! MBS 9시 뉴습니다! 정태현씨가 이번 엘리자베스호 사건의..."
"SBN입니다! 정유리양! 이번 사건에서 아버지의..."

주위를 발디딜틈 없이 둘러싸는 엄청난 숫자의 취재진들의 끊임없는 질문 공세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터져나오는 플래쉬에 잠시 당황하던 태현은 그러나 곧 인상을 찡그리며 유리를 끌어안은 채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우리 MBS에서는 오늘밤 9시에 퀸 엘리자베스호 특집 방송을 전격..."
"정유리양! 한 마디만 해주세요! 벌써 유리양의 동영상이..."
"동향일보입니다! 사진 한 번만 찍게 잠시만 포즈 부탁드립..."

너무나 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와서 무슨 말들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태현은 미처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유리의 얼굴만이라도 노출되지 않도록 그녀의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택시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유리도 단지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고 아무말 없이 아빠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기만 했다. 취재진들은 태현과 유리가 택시에 탈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과 플래쉬 공세를 터트렸지만 결국 태현은 그들에게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유리가 뒷창문으로 아직도 사진의 플래쉬를 터트리고 있는 취재진들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그때 룸미러로 태현과 유리를 본 기사가 대단한 사람들을 태웠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야~. 이거, 내가 누구를 태웠나했더니 그 유명한 사신 선생이구만!"
"......?"

생전 처음보는 택시 기사마저 자신을 알아보자 태현은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유리도 기사 아저씨가 아빠를 알아보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저씨, 우리 아빠 아세요?"
"그럼~! 지금 온 나라가 난리라구! 어제만 해도 그 유람선 승객들이 입만 열었다하면 "사신", "사신" 소리만 해대는 인터뷰만 널렸었는데. 아, 오늘은 글쎄 인터넷에 당신네들 동영상이 떴어. 푸하핫! 아가씨 춤 실력이 장난이 아니던데?"

유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그런 동영상까지..돌아다닌다는 거예요?"
"난리야~지금. MBS는 9시 뉴스도 중단하고 오늘 특집 방송 내보낸다더군. 인터넷에 맛베기로 떠돌아다니던 영상의 풀버전을 아마 엄청 돈을 때려부어서 산 모양이던데. 아무튼~당신네들 벌써 대한민국에서 유명인이 되버렸다고~."

태현과 유리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탕수육을 밖에서 사먹을 형편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두 부녀. 다행히도 아직 집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는지 취재진들이 집 앞까지는 와있지 않았다. 유리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아빠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가서 인터넷을 켰다. 그리곤 각종 사이트를 켜서 확인해보는 유리.

"이게...뭐야."

각종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일순위는 "사신의 딸" 아니면 "정유리"였고 3순위나 4순위는 "사신" 아니면 "정태현"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이트에서는 "사신의 딸 정유리 춤 동영상"과 "사신의 활약상"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리는 "사신의 활약상"이라는 동영상을 재생시켰고, 그러자 누가 편집을 한듯이 웅장한 음악이 울려퍼지며 그날 승객쪽 각도에서 잡힌듯한 영상이 마치 영화 예고편 같이 3분 가량 재생되었다. 입술을 꼬옥 깨무는 유리.

<......반드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단호한 결의가 담긴 아빠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왔다. 점점 긴박감이 느껴지는 음악에 맞춰 그날 자신도 보지 못한 급박한 여러 장면들이 보이고, 마지막에는 시끄러운 배기음 소리와 함께 은색 스포츠카가 야외 수영장 저 너머의 검은 바다로 달려가는 모습이 잡혔다. 스포츠카가 바다위로 날아오른 순간, 긴박감의 절정을 치닫던 음악이 뚝 그치며 화면에는 애타는 손길을 멀어진 아빠의 차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이 잡혔다. 그리곤 천천히 영상이 어두워진다.

"누구야...이거."

기분 나빴다. 어째서 그 끔찍했던 순간들이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까 택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인터넷에 맛베기로 떠돌아다니던 영상의 풀버전을 아마 엄청 돈을 때려부어서 산 모양이던데."

유리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에 나와있는 "MBS 화제의 영상 단독 입수"라는 제목을 클릭했다. 역시 기사의 내용은 MBS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던 "사신의 활약상"이라는 제목의 영상의 풀버전을 영상 제작자로부터 단독 입수하여 오늘 9시에 방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왜...우리가 돈벌이감이 되어야 하는 거야."

이를 사려무는 유리. 한편 마치 영화 예고편 같은 영상에 자신의 모습이 마치 진짜 영화 주인공과 같은 모습으로 편집되어 있는 것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태현은 유리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돈벌이감?"

유리는 생존자 인터뷰 영상을 클릭하며 말했다.

"맞잖아. 왜 우리가 구경거리가 되어서 전혀 상관도 없는 방송국 시청률을 올려줘야 하냐구."

딸만큼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는지 태현은 그제야 유리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태현은 그것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두 부녀의 앞으로 버퍼링을 끝마친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었다.

<......정말 그 사람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겁니다.>

생존자 김ㅇㅇ씨. 54세.

<진짜 사신은 훈장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승무원 이ㅇㅇ씨. 30세.

<사신 정체가 뭔지 정말 궁금하구요...저 정말 반했어요......>

생존자 박ㅇㅇ씨. 23세.

<사신 선생님. 정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무얼 하시는 분이신지...감사드립니다...흐흑, 감사드립니다......>

생존자 김ㅇㅇ씨. 28세.

사람들의 인터뷰는 온통 사신 일색이었고, 그들의 인터뷰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하나같이 사신의 정체를 궁금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현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옛날 정체가 드러나버린다면, 이제는 유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는 둘째치고 전직 조직 폭력배 두목의 딸이라는 이유로 앞으로 유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가 두려웠다.

"......나 아빠가 유명해지는 거 싫은데."
"응?"

근심어린 얼굴로 인터뷰 영상을 바라보던 태현은 중얼거리듯 말한 유리의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아빠가 유명해지는 거 싫어."

유리의 말에 태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도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 없어."
"저렇게 멋지게 나왔는데 안 유명해지고 싶어도 안 유명해질 리가 없잖아."

태현은 유리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손가락 사이로 스치도록 유리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빠보다는 유리가 더 유명해질 거 같은데? 유리 춤 영상도 한 번 틀어봐."

한편 기분 나쁜 얼굴이었던 유리는 태현이 머리를 어루만져주기 시작할 때부터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얼굴에 조그만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유리는 아빠가 이런식으로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게 너무 좋았다. 가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어주기도하고 그럴 때면 너무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하루 종일 아빠에게 머리를 내맡기고 있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유리는 더 이상 아빠에게 말대꾸하지 않으며 자신의 춤 영상을 클릭했고, 곧바로 미인대회 결승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었다.

<~yeah yeah yeah~I think I did it again~I made you believe......>

"우..와..."

점점 노래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태현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깃들었다. 실제로 봤을 때도 놀랐었지만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새로웠다. 마치 진짜 가수같은 유리의 실력에 태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유리도 이렇게 잘 찍혔는지는 몰랐었기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질려고 했지만 그러나 금세 얼굴을 굳히며 영상의 중간에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어,왜?"
"재미없어."

컴퓨터를 종료시키며 안 좋은 얼굴로 일어났던 유리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를 보자 금세 표정을 싹 바꾸어 생긋 웃으며 아빠에게 팔짱을 꼈다.

"아빠~. 나 배고파. 우리 밥먹자. 응~?"

태현은 화난 것 같은 얼굴이던 유리가 이렇게 거의 노골적으로 표정을 180도 바꾸며 말하자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뭐..먹을래?"





"아빠."

길수와 우철의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고 김형필의 소재도 파악되지 않는데다 테러범 일당의 소식도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는 씁쓸한 현석의 전화에 근심어린 얼굴로 서있던 태현은 파자마를 입고 귀여운 얼굴을 문틈으로 살짝 들이미는 딸을 보자 급히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 유리야, 아직 안 잤어?"
"치이~.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뭘 벌써 자?"
"그래도...피곤하지 않아? 아빠 간호한다고 많이 지쳤을 텐데..."

태현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온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유리는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아빠의 가슴에 볼을 붙였다.

"하나두 안 피곤해. 그보다...TV 안 봐?"
"9시에 하는 거?"
"응."

태현은 천천히 유리를 끌어당겨 침대로 앉으며 말했다.

"유리는 보고 싶어?"

아빠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았던 유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아니. 별루......괜히 거기서 있었던 일들...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빠도 그래."

태현은 유리의 손목을 잡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아빠에게 손목을 잡혀 따라가 아빠를 바라보고 옆으로 누운 유리. 그녀는 태현의 등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기...있잖아...아빠."
"으응...?"

자신의 부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빠의 음성에 용기를 얻은 유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아직 연인사이 맞지...?"

태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가 아직 아빠 안 찼으니까, 연인사이 맞지."

유리는 아빠의 말에 기분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앞으로두 아빠랑 같이 자도 되는 거지?"
"......응? 같이?"

유리의 말에 태현은 당황했다. 사실 오늘 낮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유리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점점 유리가 옆에서 이렇게 웃음 짓는 것이 또다시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은근히 바뀌었던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여행을 가기 전 정도의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냥 유리가 원할 때 기분 좋게 해주고, 여차하면 자신은 커다란 죄책감 없이 발을 뺄 수 있을 정도의 사이.

"......왜..망설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며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아직 연인사이라고 말해줬으니까 당연히 같이 자는 것도 좋다고 곧바로 대답해줄 줄 알았는데. 눈동자를 당황으로 물들이는 아빠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리가 점점 눈꼬리를 올렸다.

"뭐야. 그냥 내 비위 맞춰줄려고 했던 말이었어?"

태현은 입술을 꼬옥 깨무는 유리를 보며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유..유리야. 응...그러니까, 원래 연인사이라고 같이 자는 건 아냐. 유리도 생각해봐. 아무래도 서로 조금 떨어져있는 게 서로가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그렇게 되겠지?"
"아니."

유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러더니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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