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부]
"아빠?"
상념에 빠져있던 태현은 유리의 갑작스런 부름에 황급히, 따스한 이불 속에서 딸을 안고 있는 행복한 현실로 돌아왔다.
"으..응?"
유리는 숨소리를 들어보아 분명히 자고 있는 건 아닌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는 아빠에게 뾰루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해?"
"아..응, 아무 것도 아냐."
"피이...그래?"
유리는 좀 더 아빠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고, 태현은 부드러운 유리의 살결이 맞부대껴 오는 기분 좋은 감각을 느끼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러다 순간 자신의 딸이 무척이나 총명함을 떠올린 태현.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곤 넌지시 운을 떼었다.
"저...유리야?"
"응..."
아빠의 따스한 체취를 맡으며 유리는 노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그곳이 흘려낸 더러운 물도 아빠는 괘념치 않으며 다 닦아주었고, 갈아입으라고 속옷도 찾아주는 상냥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지금 유리는 뽀송뽀송한 몸에 개운한 기분으로 아빠의 포근한 품 속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태현은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 빙둘러 비유로 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유리라면 대답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빠의 말에 유리는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살며시 들어 아빠를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자신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하다니 유리는 잠도 확 달아나고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태현은 초롱초롱 거리는 유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음...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응."
방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이는 유리. 유리가 귀 기울여 들어주자 태현은 한결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갑과 을은 동료, 또 갑은 병과는 친구사이야. 그리고 정과 무는 나쁜 사람이고 기는 무의 부하야. 경은 앞선 모든 사람들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이고."
"응, 응."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태현은 왠지 그런 유리가 사랑스러워 보여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아빠의 부드러운 손길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유리에게 태현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이었어. 정은 을을 리치..아니, 해치우기로 마음 먹었어. 그래서 정은 무와 편을 먹었고, 무는 갑이 을을 도와주는 걸 막기 위해 기를 갑에게 자객으로 보내었지. 갑은 자객인 기를 처치했지만 기는 이상한 말을 갑에게 했어. 경이 을을 해치웠다는 거야. 그런데 갑이 을을 도와주러 갔던 병으로부터 들은 말은 을을 죽인 것은 경이 아니라 정과 무였다는 거야."
"음...응."
잠시 다른 곳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유리는 금세 고개를 까닥였다. 말을 돌려 말하는데 참 힘들었던 태현은 드디어 궁금했던 것을 유리에게 물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왜 굳이 무는 기를 시켜서 갑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것일까?"
태현의 물음에 유리는 푸훗, 하고 웃었다. 그리곤 귀엽다는 듯이 아빠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뭐야아. 우리 아빠 바보. 간단하잖아, 그런 건."
"응...?"
유리는 생긋 웃으며 답변을 내려주었다.
"당연히 무는 기가 임무를 실패할 것을 대비한 것이겠지. 기가 임무에 실패해서 갑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이 을을 해치웠다는 사실은 숨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잘못을 경에게 떠넘길 수는 있다는 말이야. 게다가 경은 모두와 대립관계였다면서? 그러면 더 그럴싸한 얘기가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변수는 병이야. 병이 을을 도와준 덕분에, 뭐 아빠의 말을 들어보면 을은 결국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병은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음, 갑은 병에게 고마워해야 될려나? 아무튼, 병 때문에 정과 무의 음모는, 일단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계획은 틀어지게 되었고, 이젠 갑이 정과 무에게 복수할 차례겠네."
말을 끝마친 유리는 이제 "나 잘했어?"하는 얼굴로 아빠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현의 시선은 유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복수......"
유리가 마치 자신의 앞날을 얘기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했다. 그리고,
"삼합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수작이었군......"
얄팍한 술수다. 물론 자신은 그 간단한 것을 읽어내지 못했지만. 한편 유리는 또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아빠를 흘겨보더니 그의 가슴에 도로 머리를 묻었다. 그러며 아무런 칭찬도 해주지 않는 아빠가 얄밉긴 했지만 그래도 이어서 떠오른 생각을 아빠에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은 아닐 거야."
"응...?"
이제야 대꾸를 해오는 아빠. 유리는 꿀밤 대신 아빠의 가슴에 입술을 살짝 맞추곤 말을 이었다.
"정과 무는 갑에게 자객을 보낼 정도로 어느 정도의 치밀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굳이 경을 끌어들이려 것도 속셈이 있는 걸 거야. 말했듯이 정과 무는 치밀성을 가진 계획을 세웠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경을 자기네들 싸움에 끌어들이진 않을 테니까. 응...다시 말하자면, 갑이 경과 싸우길 바란다는 것 정도?"
"......!"
유리의 말에 태현은 아까 낮에 현석에게 했던, 어째서 자신이 그에게 삼합회를 배제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수상한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유리는 그저 비유 한 번으로 모든 것을 알아낸 것이다.
"기특한 녀석..."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주었다. 한편 유리는 아빠가 이제야 기다렸던 반응(자신을 예뻐해주는 행동)을 보여오자 기분이 좋은지 방긋이 웃음 지었다. 태현은 왠지 속이 시원해진 기분으로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이제 갑은 경을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겠네?"
"응...글쎄?"
"......?"
유리는 별로 대단치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지만 태현의 얼굴은 급격히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유리는 부드러운 아빠의 손길을 즐기며 곧바로 해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태현은 속이 타들어갔고, 그런 태현이 더 이상 참지(마치 다그치듯 이유를 재촉하면 유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못하고 반문을 던지려는 순간, 유리가 마치 그런 건 어찌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한 나지막하고 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과 무가 단지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만으로 갑과 경을 싸우게 만들려 했다는...응..그런 장담도 할 수 없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정과 무는 갑과 경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르니까."
"아......"
유리의 말에 태현은 한방 먹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직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한편, 아무리 총명하고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유리라고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유람선에서의 일을 잊으려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녀가 태현의 이야기를 통해 정을 김형필로, 무를 야마구치 타사부로로, 기를 카나코로, 경을 삼합회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따뜻한 체온에 감싸인 유리는 서서히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을 느끼며 흘러가는 음성으로 나직히 아빠에게 묻는다.
"그런데...이거..하아-품...응...누구 얘기야......?"
{사..사신! 사신이오...!!}
유리가 아빠에게 안겨 편안한 행복감을 즐기고 있는 때로부터 수일 전.
어둠에 휩싸인 선착장. 화물 컨테이너가 즐비한 그곳의 구석에서 진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눈앞의 사내에게 황급히 말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구타는 말라붙은 피딱지 위로 다시 새로운 핏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고, 지금 진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사신?}
진의 앞에서 고급스런 가죽의자에 앉은 채 시가를 피워물고 있던 거대한 덩치의 중년 사내는 한쪽 눈썹을 꿈틀 떨었다. 목을 타고 얼굴까지 올라와 있는 용문신은 안 그래도 흉악한 인상의 중년사내를 더욱 괴기스런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중년 사내는 시가의 몸통을 혀로 낼름 핥으며 진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사신이라고 했나?}
진과 중년 사내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덩치들의 눈동자에도 놀람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들의 뒷편에는 한 때는 진의 부하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시체가 된 검은 작업복 남자들이 뒹굴고 있었고, 중년 사내의 옆으로는 뚱뚱한 체구에 탐욕스런 인상의 중국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붙이고 있었다. 여객선에서 납치된 백만장자 인질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중년 사내는 길게 땋은 검은 머리에 터질 듯한 근육질 체구가 옷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한 번 줬다. 그러자 근육질 남자는 다시 진의 허리를 세게 걷어찼다.
퍼억...!!
"커헉!!"
입에서 한웅큼의 피를 뿜어내며 진이 앞으로 철푸덕 쓰러진다. 중년 사내가 험악하게 일그린 얼굴로 진에게 다시 물음을 던졌다.
{지금 사신이라고 했나? 응? 내 아들을 죽인 게 사신이라고?}
그때로부터 수시간 전. 진은 만족스런 얼굴로 왕펑을 만나고 있었다.
"큭큭큭, 아쉽군. 화려한 불꽃 놀이를 놓쳐야 된다니 말이야."
진들이 탄 상당한 규모의 어선은 서서히 여객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진의 혼잣말(한국어)에 왕펑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음? 지금 뭐라고 하셨소?}
진은 시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그보다, 미키로부터 선물은 잘 전달받았소?}
{아, 제법 질이 좋은 물건이더군요.}
왕펑은 뒤룩뒤룩한 살집이 잡힌 배를 문지르며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펑은 그러다 이상하단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진에게 물었다.
{헌데, 현 대형께서는 안 보이십니다?}
{현?}
왕펑의 물음에 진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핫!! 그 녀석은 죽었소. 큭큭큭...안 그래도 제 멋대로 날뛰던 놈인데 잘 되었지.}
{......!!}
진의 대답에 왕펑의 얼굴이 꿈틀 떨렸다. 하지만 유쾌한 기분에 빠져 있는 진은 그런 왕펑의 얼굴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고, 왕펑은 떨리는 음성으로 진에게 되물었다.
{현..대형께서는 진 대형의 친우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친우?}
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신도 모르는 작자가 단지 실력이 좀 좋아서 데리고 다닌 것일 뿐. 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소이다. 녀석도 나와 있으면 재미가 있으니 내 뒤를 똥개처럼 졸졸 따라다녔었지. 큭큭.}
{아...아아. 그렇..군요.}
왕펑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곤 태연한 얼굴로 진에게 말했다.
{허, 흠. 그럼 저는 물건 좀 맛보러 가야겠습니다.}
{아, 뭐. 좋을 대로 하시오.}
왕펑은 금세 배 안으로 들어갔고, 진은 배의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즐거운 얼굴로 멀리 보이는 초호화유람선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 진에게 미키가 다가온다.
{대장.}
{음?}
진은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된 것 때문인지 너그러운 얼굴로 미키를 돌아보았다. 미키는 주변을 둘러봐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시익 웃으며 진에게 말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큭큭큭, 그래. 이제 저 인질들한테서 돈만 잘 뜯어내면 되는 거야. 뭐, 그 일은 금융전문가인 왕펑이 알아서 해주겠지만.}
미키는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흐흐. 그리고, 현 녀석 일도 잘 처리되어서 다행입니다. 사실 좀 난감했거든요.}
{뭐? 난감했다고?}
진은 피식 웃으며 미키의 팔을 턱, 쳤다.
{보기보다 소심한 남자로군, 미키. 현 녀석은 조무래기야. 사신이 놈을 대신 처리해주긴 했지만, 뭐 그건 우리가 수고를 한 번 던 것 정도일 뿐이라고. 현 같은 놈이야 약 좀 먹인다음에 죽이면 그만인 녀석인걸 뭐.}
미키는 대범한 대장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능글거렸다.
{그건 그렇다 쳐도, 현 놈은 우리에게 보너스였군요.}
{큭큭, 그래. 놈을 죽이는 것만으로 2천만 달러나 받게 되었으니 말이야.}
진은 그러더니 마치 떡고물이나 바라고 있는 듯한 미키의 얼굴 표정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아호나 다케시가 죽어버렸으니, 보너스의 절반은 네 차지다 미키.}
{어, 정말입니까?}
미키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미키는 떨리는 손길로 담배를 피워물곤 헤헤거리며 담배를 쪽 빨아들였다 연기를 내뱉었다.
{...참, 그런데. 현을 암살하란 의뢰를 한 건 누구입니까?}
진은 시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비밀로 하는 것까지 합쳐서 2천만 달러다. 이봐 미키. 내 장사의 모토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흐흐, 예. 바로 신용입죠.}
{저..정말이오! 사신이 현을 죽였소..!!}
진은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중년 사내에게 애걸했다.
{내..내가 직접 봤소이다! 현을 도와주러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신이 현을 죽이고 난 뒤였소...!}
진의 피 반 눈물 반의 호소에 중년 사내는 시가를 씹어물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리곤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부여잡는다.
{......사신. ...사신이라고......}
중년 사내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인텔리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사신이 정말로 그 배에 탔었는지 알아봐라.}
{존명.}
부하가 급히 몇 명의 수하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떠나가고, 중년 사내는 진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놈은 내 첫째 아들을 죽였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라......}
{저, 저는 현이 당신의 아들일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진은 이마를 땅에 박으며 황급히 말했다. 진은 지금 정말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단지 조무래기 싸움꾼인 줄 알았던 녀석이 사실은...
{그렇겠지. 네 놈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인질이고 뭐고 내 아들이 죽은 순간 배에서 뛰어내렸을 테니까 말이야. 삼합회의 태부(太父)인 나의 아들의 죽음을 내버려둔 죄는 차라리 물고기밥이 되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고통스런 벌이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사..살려, ..살려주십시오...!!}
진은 마치 오체투지를 하듯 이마를 마구 땅에 박았다. 중국인과 자주 일을 하다보니 진은 어느새 그들의 예법을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진을 쳐다보며 땅에 박혔다 들리는 진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땅에 짓이겨지는 진의 머리.
{그래, 그건 그렇고. 그 한국인들은 어쩔 속셈이었나.}
진은 중년 사내에게 머리를 밟힌 그대로 급히 대답했다.
{와..왕펑을 통해 저들의 모든 재산을 빼낼 생각이었습니다.}
중년 사내는 자신의 옆에서 아까부터 계속 땅에 이마를 가져다 붙이고 있는 왕펑에게 물었다.
{왕펑. 사실이냐?}
굵고 스산한 중년 사내의 음성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왕펑은 두려움에 몸을 흠칫 떨며 너무나도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하..하지만 소인은 저자와 단지 몇 번 거래를 한 사이일 뿐이고 별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안다. 왕펑.}
중년 사내는 손을 뻗어 왕펑의 두툼한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너의 연락 덕분으로 내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너의 충의를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치 말아라.}
{가..감사합니다! 만복이 태부 대인께 함께하시길 기원하나이다...!!}
왕펑은 이마를 몇 번이고 땅에 찍었다. 중년 사내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진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를 퍽퍽 짓밟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네 녀석의 벌을 정할 차례인 거냐.}
{큭, 커억..으..부..부디...부디 자비를...커헉...}
중년 사내는 이제 어쩔 생각인지 진에게서 발을 떼어내었다. 그러자 급히 부하 하나가 다가와 중년 사내의 구두에 묻은 진의 피를 소매로 닦아내었다. 중년 사내는 구두가 도로 깨끗해지자 의자에서 일어나 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아직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는 시가의 앞부분을 진의 목 뒷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익...
{크아악!!}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진이 울부짖는다. 그러자 그를 구타했던 근육질 남자가 꿈틀거리는 진의 몸을 꽉 부여잡았다. 중년 사내가 여전히 시가로 진의 살갗을 지지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녀석이 데리고 온 한국인들은 내가 위로금으로 받아두겠다. 그리고, 내 아들의 죽음을 방치한 네 녀석은... 뭐,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로 사신이 내 아들을 죽였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손목 하나와 엄지발가락 두 개를 자르는 것으로 용서해주지.}
진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애걸했다.
{부..부디 자비, 크허..억...부디 자비를...!!}
진의 간청에 중년 사내는 인상을 화악 찡그렸다.
{자비? 지금 베풀어주고 있잖나.}
기가 막힌다는 짜증섞인 음성이었다. 한편 진은 잔인한 삼합회 두목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 그로서는 정말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한국놈 새끼..."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은 부하가 일러준 정보를 통해 그 한국인이 한국에서 상당한 지위의 조폭 우두머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마 퀸 엘리자베스호를 털려는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세어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한 한국인 남자가 찾아왔었다. 현찰로 무려 1천만 달러를 가지고. 그가 원한 것은 단 한가지. 최근 자신과 어울리고 있는 싸움꾼 현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뢰가 성공하고나면 싱가폴 은행을 통해서 자신에게 1천만 달러를 더 송금해 준단다. 자신은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2천만 달러면 아버지라도 죽일 돈이니까. 그런데, 그랬는데 사실은 현이 삼합회 두목의 아들이었다니. 진은 그 한국인에게 완전히 속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놈은 현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신분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을 덧붙인 것이겠지.
진은 이를 바드득 갈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한편 벌써 중년 사내의 부하 하나가 커다란 작두를 가지고 왔고, 중년 사내는 볼 것도 없는지 이미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근육질 남자가 움츠리고 있는 진의 팔을 빼내어 작두 위에 올린다.
{......!}
근육질 남자의 우악스런 힘에 의해 억지로 팔이 작두 위로 올려진 진이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황급히 중년 사내에게 외쳤다.
{태부 대인!! 사실은 저에게 현 대형을 암살해달라는 의뢰를 한 자가 있었습니다!!}
{......}
중년 사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중년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진에게로 다가왔다.
{호오, 아직 흥미로운 얘기를 가지고 있었군.}
{하..하핫! 예! 아주 흥미로우실 겁니다!}
중년 사내가 도로 가죽의자에 앉자 진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급히 대꾸했다. 중년 사내는 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하지만 얘기를 듣기 전에, 네 녀석만 흥미로운 것을 알고 있었던 죄값은 치루어야겠지?}
{......??!!!}
중년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육질 남자가 뺀치를 가지고와 진의 왼손 엄지 손톱을 집었다. 두려움으로 물드는 진의 얼굴. 한 부하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중년 사내의 귀를 공손히 막아준다.
{뭐..뭘 하려는..!!}
...빠삭-!!
{크아아악!!!}
손톱이 뒤틀려 부러진 진이 왼손을 부여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중년 사내는 시익 웃으며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어 진에게로 자기 나름의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주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풀어놓기가 한결 수월해졌나?}
모르는 정보를 전해듣기 전에 삼합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정보가 전달되는 도중 거짓말을 하거나 의문점이 생기는 말을 하면 정보제공자의 손톱들을 차례차례 하나씩 더 뽑아낸다. 이것이 삼합회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보를 전해듣는 올바른 방식이었다. 중년 사내는 전통을 중시했고, 진은 말을 꺼내기 전부터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지금의 고문은 하나의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에 관련된 것이든 정보를 숨기고 있던 자는 그 정보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다. 진도 알고 있는 법칙이었다. 지금 삼합회의 두목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진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응...아빠아......"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새벽의 미명이 비춰들어온다. 유리는 이게 참 신기했다. 아빠와 함께 자면 언제나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깨어난다. 유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아빠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가득한 행복에 감싸여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채 옆자리를 쓰다듬었다. 아빠의 따스한 체온이 손가에 느껴지길 기대하면서.
"......?"
그런데 왠지 허전한 기분. 손에서는 보드라운 침대 시트만 느껴질 뿐이고 아빠의 몸은 만져지지 않았다. 유리는 급격히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똑바로 떴다.
"아..빠?"
텅 비어있는 옆자리. 유리는 갑작스레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추위가 아니었다. 외로움과 소외감이었다. 유리는 황망한 눈길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스라한 새벽의 햇살에 잠긴 자신의 방.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유리의 눈가에 어째서인지 이슬이 떠올랐다.
"...아빠. 아빠아...?"
유리는 마치 어린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를 찾는 것처럼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끼익..바스락.
그런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간 유리의 발에 종이 하나가 걸렸다. 유리는 손바닥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종이를 주워들었다. 아빠의 글씨가 보인다. <우리 유리 잘잤니? 유리야. 아빠 먼저 가게에 갈게. 아침 차려놨으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고, 나중에 가게에서 봐^^>
"......"
아빠답지 않게 이모티콘까지 쓴 쪽지. 유리는 입술을 잘근 씹어물었다.
"잘 잤냐고?"
당연히 잘 잤다. 잘 잤었다. 아빠의 품에서 잤으니까. 하지만 얄밉게도 자신을 깨우지도 않고 먼저 나가버리다니. 아침을 차릴 시간 있으면 깨우면 좋았잖아.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다.
"씹지도 않고 물 말아서 후루룩 먹어버릴 거야. 나도 금방 가주지. 흥. 가서 보자구."
유리는 좀 있다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간 아빠에게 팍팍 심술을 부릴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한편 같은 시간. 태현은 레스토랑 네잎클로버에서 현석을 만나고 있었다.
"4시?"
"예. 아무래도 상백 형님이나 철상 형님 같은 분은 오시는데 시간이 좀 걸리시니까, 오후 4시까지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해두었습니다. 어제는 연락이 닿지 않던 쓰리박 형님들도 한달음에 달려오시겠다고 했습니다."
현석의 시원스런 말에 태현은 눈썹을 긁적였다.
"시간이 빠듯하군. 3시간만에 부산까지 가야되잖아."
태현의 곤란한 음성에 현석은 그저 빙글거리기만 했다.
"오랜만에 형님 드라이빙 실력 좀 보겠군요."
태현은 피식 웃었다.
"고속열차라도 얼른 개통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만에 간다는 그 기차 말입니까?"
"그래. 만든다 만든다 하더니 영 소식이 없군."
"우하핫. 정부에서 뭐 하나 빨리 하는 게 있겠습니까."
현석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감싸인 레스토랑 홀을 시원스레 깨웠다. 여하튼 곧 현석의 웃음소리는 잦아들었고, 태현은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은 듯해 보이는 현석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김형필은 부산에서 쇼부를 볼 생각인 것 같다."
"......"
태현의 말에 현석의 얼굴이 급속도로 침착해졌다. 태현은 창 밖으로 보이는, 아침 일찍 등교하는 고등학생들(아마도 방학 없는 고3)에게 시선을 두며 담배 한개피를 꼬나물었다. 그러자 재빨리 현석이 불을 붙여준다.
...칙!...
"쓰-읍...후우..우......"
길게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태현.
"우리는 김형필 녀석이 차려놓은 밥상 위로 올라간다는 걸 명심해라."
"예. 형님."
깊숙히 고개를 숙이는 현석. 지난 8년간의 시간 덕택에 사이가 많이 허물어진 두 사람이었지만, 현석은 지금처럼 이렇게 태현의 눈빛이 과거로 돌아가면 그 즉시로 태도를 예전처럼 바꾸었다. 그런 현석을 가만히 쳐다보던 태현이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현석아."
"예."
"오늘 유리 좀 너희 집에 맡겨야 될 것 같다."
"집사람한테 친정으로 갈 준비해두라고 하겠습니다."
태현이 하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들은 현석이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 형님은 유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김형필은 간사한 녀석이라 형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리를 노릴지도 모르고 형님은 그래서 유리를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좀 더 안전을 기하려면, 아예 유리를 아내와 함께 아내의 친정댁에 보내는 게 더 좋다.
"음."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석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유리는 지금 자신이 모레를 씹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빠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느껴지는 음식은 맛있고, 먹는 것만으로 아빠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모레를 씹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먹고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신경 거슬리게 2층에서 조그맣게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다. 나중에 보자는 쪽지를 보아 지금 이건 아빠의 전화일 리는 없었다.
<......that I heard of once in lullaby...>
탁.
유리는 결국 젓가락을 놓고 휴대폰을 받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dream really do come true~~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어제도 그렇고 유리는 사실 요 며칠간 휴대폰이 꺼진줄도 모르고 살았었다. 아빠 때문에 정신이 온통 거기에 팔려 휴대폰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이 꺼져있는 것을 알고 도로 켜놓은 건 아까 샤워를 하고 난 뒤였다. 유리는 부재중 통화가 서른통이 넘게 와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전부다 윤지나 친구들의 전화. 유리는 친구들이 왠지 기특했지만 시간도 이르고 해서 나중에 일일이 문자로 답장을 보낼 생각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유리는 충전장치에서 휴대폰을 빼어내곤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뿐 윤지>. 벨소리에 귀찮은 얼굴이던 유리는 정작 발신자를 확인하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지니?"
<아휴!! 이제야 전화받네! 너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문자에는 답장도 안 하고!!>
시작부터 바락바락 고함지르는 친구. 유리는 헤헤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아잉~우리 윤지띠 삐졌쪄?"
<그래. 삐졌다 요것아. 너는 어쩜 유람선에서 그런 일을 겪고도 날 한 번 안 만나? 응? 아니, 안 만난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연락이 한 번 없어?>
유리는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곤 그대로 뒤로 풀썩 누웠다. 통화를 하기 전까지는 아빠 때문에 생각도 못한 친구였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또 친구와 얘기를 나누니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히잉~너무 혼내지 마아. 우리 아빠 간호한다고 그랬다구......"
<......그래. 아저씬 좀 어떠셔?>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친구의 물음에 유리는 생긋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우리 아빠야 원체 건강하니까 뭐."
<그래? 다행이네. 넌? ...배에서..>
"......?"
유리는 갑자기 윤지의 목소리가 떨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유리에게 울먹이는 윤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흐으..윽...배에서 그런 일..겪으, 니까...많이 무서웠지...? 우리 유리...많이 무서웠, 끅, 흐윽..무서웠지...?>
"윤지야아..."
친구의 걱정이 가득한 음성에 유리의 눈동자에도 이슬이 물들었다. 유리는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했다.
"으으응~...난 괜찮으니까...그러니까 울지마아......"
<응...흐..윽...미안...너 목소리 너무 오랜만에 듣는 거 같아서...미안..해...>
유리는 눈시울이 빨개진 얼굴로 옆으로 돌아누우며 휴대폰을 귓가에 꼬옥 가져다 붙였다.
"아냐...고마워. 응...선영이나 다른 애들은?"
<치이, 걔네들도 전부 네 걱정하느라 난리두 아냐.>
한결 밝아진 음성이었다. 유리는 윤지와 대화하는 이 순간만큼은 얄미운...물론, 얄밉긴 얄미워도 정말로 무지하게 사랑하는 아빠보다 친구들이 더 보고 싶었다. 같이 만나서 옷구경도 가고 수다도 마음껏 떨고 싶었다.
"...그래? 흐응...그럼 오늘 다같이 만날까?"
<응! 좋지. 이제야 예쁜 말 좀 하네. 그래, 시간 언제 돼?>
"응...나야 학원두 안 가고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 되는데, 한 한 시간 후 정도?"
<좋~았어. 내가 애들한테 학원이고 과외고 다 때려치우고 오라고 연락해둘 테니까, 9시까지 학교 앞에서 만나.>
"응~~."
<응~그럼 그때봐아~.>
"응~사랑해 윤지야앙~~."
애교로 간드러지는 유리의 목소리에 윤지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웩. ..삑. 뚜..뚜...>
...탁.
휴대폰 폴더를 닫은 유리는 아직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생글거렸다. 이렇게 친구와 얘길 나누면 아빠와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낀다. 유리는 아빠에게 좀 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전화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운 얼굴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아침의 햇살이 버티칼을 타고 희미하게 비춰들어오는 고급스런 느낌의 사무실. 형필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심각한 얼굴로 책상 너머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 두 녀석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예. 형님. 이미 부산으로 수송할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음.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이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형필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턱을 긁적이다 다시 물었다.
"김장군하곤 몇 시에 만날 시간을 잡아놓았나."
"예. 오후 1시, 연화정입니다."
"...그래, 그래. 큰 걸로 두 박스 정도 잘 포장해놓아라."
"예. 형님. ...아. 그리고."
"음?"
젊은 남자는 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어 정중히 책상 위에 올려놓곤 형필 쪽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어제 전화를 통해 정태현과 그의 딸이 조사했던 주소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곳이 주소입니다."
쪽지를 집어들어 거기에 적힌 주소를 한 번 훑어본 형필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입꼬리를 조금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외라는 비웃음을 머금고.
"흐-음?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군? 생각보다 좋은 동네는 아닌데? 뭐, 수고했다. 내가 지시할 때까지는 건드리지 말도록."
젊은 사내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형필은 담배를 피워물며 그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젊은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취하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형필은 부하가 나가고 나자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천천히 버티칼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열어젓히는 형필. 그의 눈동자에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가 비춰졌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후우~우......"
형필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입가로 담배 연기를 푸욱 뿜어내었다.
"이제...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형필의 눈동자에 억제되었던 야망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아앙, 팬티가 없어."
유리는 한숨을 포옥 내쉬곤 속옷을 넣어두는 서랍장을 닫곤 1층으로 내려갔다. 허벅지를 절반가량 감싸는 레이스 달린 하얀 스타킹에 무릎을 조금 못 덮는 하늘색 스커트. 위로는 어깨가 시원스레 드러나는 헐렁한 반팔티에 그 안으론 형광빛 노란색 민소매 티를 입었다. 누가 봐도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옷차림이었는데, 사실 유리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센스보다는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 그 자체에 넋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신경써서 옷을 입은 유리는 아름다웠다.
한편 1층 세탁실로 들어온 유리. 단순히 세탁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서 빨래도 하고 바로 연결되는 베란다에는 ?은 옷가지들을 넌다. 유리는 베란다의 빨랫줄을 바라보았다.
"아이참."
하지만 옷가지는 하나도 널려있지 않았다. 빨래는 항상 아빠가 도맡아서 했는데 며칠간 정신이 없다보니 아빠가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리의 시선에 세탁실 구석으로 두 개의 양동이가 뿌연 비눗물이 꽉찬 채 놓여있는 모습이 잡혔다. 유리는 저게 뭘까 고개를 갸웃하며 양동이들로 다가갔다. 먼저 왼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아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유리는 단지 젖은 빨랫감이었지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아빠의 팬티를 조물락 거리다가 도로 양동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오른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이번엔 자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축축히 젖어 있는 조그만 팬티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는 유리. 그런데 그때, 뭔가를 눈치 챈 듯 유리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이거. 나랑 아빠 거 따로 ?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정말로 기분 나쁘고 아빠에게 섭섭했다. 아니, 하긴 아빠가 자신을 대하는 행동을 보면 자신의 속옷도 더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치만.
"기분 나뻐. 씨이.."
유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물며 자신의 팬티를 왼쪽 양동이에 집어 던졌다. 팬티를 찾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유리는 곧바로 탁, 탁, 탁, 탁, 화난 발걸음으로 1층 욕실로 향했다.
"어디 두고봐. 복수할 거야."
1층 욕실에는 태현의 칫솔이 있었다. 아직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지 않은 유리는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빠의 칫솔을 잡곤 치약을 꾹 짜서 발라 입에 탑, 물어버렸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며 아빠에게 말한다.
"잘 보라구. 나쁜 짓을 해주지."
곧바로 치카치카 마구 양치질을 시작하는 유리.
"어때. 어때?"
마치 아빠를 괴롭히듯 심술이 가득한 얼굴로 유리는 그렇게 보통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깨끗히 이를 닦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흐음..."
이는 깨끗히 닦았지만 왠지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아. 팬티."
금세 자신의 기분이 개운치 않은 이유를 깨달은 유리는 어쩔까 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줄기 미소를 입가에 달며 아빠의 방으로 향했다. 아빠의 방으로 들어온 유리는 곧바로 아빠의 속옷이 있는 서랍장을 열어젓혔다. 빨래를 개는 것은 유리의 몫이었고, 그녀의 눈에는 곱고 단정하게 접혀있는 아빠의 팬티들이 들어왔다. 유리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주 철저히 복수해줄게, 아빠."
유리는 입고 있던 팬티를 벗곤 아빠의 사각 트렁크 팬티를 하나 꺼내어 걸쳤다.
"......"
그랬다. 걸쳤다는 말이 딱 맞았던 것이다.
"아이차암..."
날씬한 유리의 허리 탓에 팬티는 자꾸만 흘러내렸고, 유리는 엉덩이에 겨우 걸리는 팬티를 몇 번이나 잡아 올리다 결국엔 고개를 포옥 수그리며 포기를 했다. 아빠의 팬티를 벗어 도로 정성껏 접어 서랍장 안에 넣어둔 유리는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팬티를 징그럽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어젯밤에 갈아입은 거니까."
유리는 마치 자신이 아빠에게 방금 나쁜 짓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는 체념어린 얼굴로 벗었던 팬티를 도로 입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불쌍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띄우는 유리.
"참...! 팔찌."
유리는 태현에게서 받은 팔찌를 잘 때나 목욕을 할 때 외에는 언제나 차고 다녔다. 유리는 금세 생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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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 하나 추천 하나...남겨주시는 흔적들 제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르실 거예요ㅜ_ㅜ 감사드립니다. 낼 뵐게요^^
"아빠?"
상념에 빠져있던 태현은 유리의 갑작스런 부름에 황급히, 따스한 이불 속에서 딸을 안고 있는 행복한 현실로 돌아왔다.
"으..응?"
유리는 숨소리를 들어보아 분명히 자고 있는 건 아닌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는 아빠에게 뾰루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해?"
"아..응, 아무 것도 아냐."
"피이...그래?"
유리는 좀 더 아빠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고, 태현은 부드러운 유리의 살결이 맞부대껴 오는 기분 좋은 감각을 느끼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러다 순간 자신의 딸이 무척이나 총명함을 떠올린 태현.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곤 넌지시 운을 떼었다.
"저...유리야?"
"응..."
아빠의 따스한 체취를 맡으며 유리는 노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그곳이 흘려낸 더러운 물도 아빠는 괘념치 않으며 다 닦아주었고, 갈아입으라고 속옷도 찾아주는 상냥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지금 유리는 뽀송뽀송한 몸에 개운한 기분으로 아빠의 포근한 품 속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태현은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 빙둘러 비유로 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유리라면 대답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빠의 말에 유리는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살며시 들어 아빠를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자신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하다니 유리는 잠도 확 달아나고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태현은 초롱초롱 거리는 유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음...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응."
방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이는 유리. 유리가 귀 기울여 들어주자 태현은 한결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갑과 을은 동료, 또 갑은 병과는 친구사이야. 그리고 정과 무는 나쁜 사람이고 기는 무의 부하야. 경은 앞선 모든 사람들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이고."
"응, 응."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태현은 왠지 그런 유리가 사랑스러워 보여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아빠의 부드러운 손길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유리에게 태현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이었어. 정은 을을 리치..아니, 해치우기로 마음 먹었어. 그래서 정은 무와 편을 먹었고, 무는 갑이 을을 도와주는 걸 막기 위해 기를 갑에게 자객으로 보내었지. 갑은 자객인 기를 처치했지만 기는 이상한 말을 갑에게 했어. 경이 을을 해치웠다는 거야. 그런데 갑이 을을 도와주러 갔던 병으로부터 들은 말은 을을 죽인 것은 경이 아니라 정과 무였다는 거야."
"음...응."
잠시 다른 곳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유리는 금세 고개를 까닥였다. 말을 돌려 말하는데 참 힘들었던 태현은 드디어 궁금했던 것을 유리에게 물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왜 굳이 무는 기를 시켜서 갑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것일까?"
태현의 물음에 유리는 푸훗, 하고 웃었다. 그리곤 귀엽다는 듯이 아빠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뭐야아. 우리 아빠 바보. 간단하잖아, 그런 건."
"응...?"
유리는 생긋 웃으며 답변을 내려주었다.
"당연히 무는 기가 임무를 실패할 것을 대비한 것이겠지. 기가 임무에 실패해서 갑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이 을을 해치웠다는 사실은 숨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잘못을 경에게 떠넘길 수는 있다는 말이야. 게다가 경은 모두와 대립관계였다면서? 그러면 더 그럴싸한 얘기가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변수는 병이야. 병이 을을 도와준 덕분에, 뭐 아빠의 말을 들어보면 을은 결국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병은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음, 갑은 병에게 고마워해야 될려나? 아무튼, 병 때문에 정과 무의 음모는, 일단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계획은 틀어지게 되었고, 이젠 갑이 정과 무에게 복수할 차례겠네."
말을 끝마친 유리는 이제 "나 잘했어?"하는 얼굴로 아빠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현의 시선은 유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복수......"
유리가 마치 자신의 앞날을 얘기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했다. 그리고,
"삼합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수작이었군......"
얄팍한 술수다. 물론 자신은 그 간단한 것을 읽어내지 못했지만. 한편 유리는 또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아빠를 흘겨보더니 그의 가슴에 도로 머리를 묻었다. 그러며 아무런 칭찬도 해주지 않는 아빠가 얄밉긴 했지만 그래도 이어서 떠오른 생각을 아빠에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은 아닐 거야."
"응...?"
이제야 대꾸를 해오는 아빠. 유리는 꿀밤 대신 아빠의 가슴에 입술을 살짝 맞추곤 말을 이었다.
"정과 무는 갑에게 자객을 보낼 정도로 어느 정도의 치밀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굳이 경을 끌어들이려 것도 속셈이 있는 걸 거야. 말했듯이 정과 무는 치밀성을 가진 계획을 세웠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경을 자기네들 싸움에 끌어들이진 않을 테니까. 응...다시 말하자면, 갑이 경과 싸우길 바란다는 것 정도?"
"......!"
유리의 말에 태현은 아까 낮에 현석에게 했던, 어째서 자신이 그에게 삼합회를 배제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수상한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유리는 그저 비유 한 번으로 모든 것을 알아낸 것이다.
"기특한 녀석..."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주었다. 한편 유리는 아빠가 이제야 기다렸던 반응(자신을 예뻐해주는 행동)을 보여오자 기분이 좋은지 방긋이 웃음 지었다. 태현은 왠지 속이 시원해진 기분으로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이제 갑은 경을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겠네?"
"응...글쎄?"
"......?"
유리는 별로 대단치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지만 태현의 얼굴은 급격히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유리는 부드러운 아빠의 손길을 즐기며 곧바로 해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태현은 속이 타들어갔고, 그런 태현이 더 이상 참지(마치 다그치듯 이유를 재촉하면 유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못하고 반문을 던지려는 순간, 유리가 마치 그런 건 어찌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한 나지막하고 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과 무가 단지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만으로 갑과 경을 싸우게 만들려 했다는...응..그런 장담도 할 수 없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정과 무는 갑과 경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르니까."
"아......"
유리의 말에 태현은 한방 먹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직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한편, 아무리 총명하고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유리라고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유람선에서의 일을 잊으려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녀가 태현의 이야기를 통해 정을 김형필로, 무를 야마구치 타사부로로, 기를 카나코로, 경을 삼합회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따뜻한 체온에 감싸인 유리는 서서히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을 느끼며 흘러가는 음성으로 나직히 아빠에게 묻는다.
"그런데...이거..하아-품...응...누구 얘기야......?"
{사..사신! 사신이오...!!}
유리가 아빠에게 안겨 편안한 행복감을 즐기고 있는 때로부터 수일 전.
어둠에 휩싸인 선착장. 화물 컨테이너가 즐비한 그곳의 구석에서 진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눈앞의 사내에게 황급히 말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구타는 말라붙은 피딱지 위로 다시 새로운 핏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고, 지금 진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사신?}
진의 앞에서 고급스런 가죽의자에 앉은 채 시가를 피워물고 있던 거대한 덩치의 중년 사내는 한쪽 눈썹을 꿈틀 떨었다. 목을 타고 얼굴까지 올라와 있는 용문신은 안 그래도 흉악한 인상의 중년사내를 더욱 괴기스런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중년 사내는 시가의 몸통을 혀로 낼름 핥으며 진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사신이라고 했나?}
진과 중년 사내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덩치들의 눈동자에도 놀람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들의 뒷편에는 한 때는 진의 부하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시체가 된 검은 작업복 남자들이 뒹굴고 있었고, 중년 사내의 옆으로는 뚱뚱한 체구에 탐욕스런 인상의 중국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붙이고 있었다. 여객선에서 납치된 백만장자 인질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중년 사내는 길게 땋은 검은 머리에 터질 듯한 근육질 체구가 옷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한 번 줬다. 그러자 근육질 남자는 다시 진의 허리를 세게 걷어찼다.
퍼억...!!
"커헉!!"
입에서 한웅큼의 피를 뿜어내며 진이 앞으로 철푸덕 쓰러진다. 중년 사내가 험악하게 일그린 얼굴로 진에게 다시 물음을 던졌다.
{지금 사신이라고 했나? 응? 내 아들을 죽인 게 사신이라고?}
그때로부터 수시간 전. 진은 만족스런 얼굴로 왕펑을 만나고 있었다.
"큭큭큭, 아쉽군. 화려한 불꽃 놀이를 놓쳐야 된다니 말이야."
진들이 탄 상당한 규모의 어선은 서서히 여객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진의 혼잣말(한국어)에 왕펑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음? 지금 뭐라고 하셨소?}
진은 시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그보다, 미키로부터 선물은 잘 전달받았소?}
{아, 제법 질이 좋은 물건이더군요.}
왕펑은 뒤룩뒤룩한 살집이 잡힌 배를 문지르며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펑은 그러다 이상하단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진에게 물었다.
{헌데, 현 대형께서는 안 보이십니다?}
{현?}
왕펑의 물음에 진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핫!! 그 녀석은 죽었소. 큭큭큭...안 그래도 제 멋대로 날뛰던 놈인데 잘 되었지.}
{......!!}
진의 대답에 왕펑의 얼굴이 꿈틀 떨렸다. 하지만 유쾌한 기분에 빠져 있는 진은 그런 왕펑의 얼굴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고, 왕펑은 떨리는 음성으로 진에게 되물었다.
{현..대형께서는 진 대형의 친우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친우?}
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신도 모르는 작자가 단지 실력이 좀 좋아서 데리고 다닌 것일 뿐. 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소이다. 녀석도 나와 있으면 재미가 있으니 내 뒤를 똥개처럼 졸졸 따라다녔었지. 큭큭.}
{아...아아. 그렇..군요.}
왕펑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곤 태연한 얼굴로 진에게 말했다.
{허, 흠. 그럼 저는 물건 좀 맛보러 가야겠습니다.}
{아, 뭐. 좋을 대로 하시오.}
왕펑은 금세 배 안으로 들어갔고, 진은 배의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즐거운 얼굴로 멀리 보이는 초호화유람선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 진에게 미키가 다가온다.
{대장.}
{음?}
진은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된 것 때문인지 너그러운 얼굴로 미키를 돌아보았다. 미키는 주변을 둘러봐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시익 웃으며 진에게 말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큭큭큭, 그래. 이제 저 인질들한테서 돈만 잘 뜯어내면 되는 거야. 뭐, 그 일은 금융전문가인 왕펑이 알아서 해주겠지만.}
미키는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흐흐. 그리고, 현 녀석 일도 잘 처리되어서 다행입니다. 사실 좀 난감했거든요.}
{뭐? 난감했다고?}
진은 피식 웃으며 미키의 팔을 턱, 쳤다.
{보기보다 소심한 남자로군, 미키. 현 녀석은 조무래기야. 사신이 놈을 대신 처리해주긴 했지만, 뭐 그건 우리가 수고를 한 번 던 것 정도일 뿐이라고. 현 같은 놈이야 약 좀 먹인다음에 죽이면 그만인 녀석인걸 뭐.}
미키는 대범한 대장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능글거렸다.
{그건 그렇다 쳐도, 현 놈은 우리에게 보너스였군요.}
{큭큭, 그래. 놈을 죽이는 것만으로 2천만 달러나 받게 되었으니 말이야.}
진은 그러더니 마치 떡고물이나 바라고 있는 듯한 미키의 얼굴 표정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아호나 다케시가 죽어버렸으니, 보너스의 절반은 네 차지다 미키.}
{어, 정말입니까?}
미키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미키는 떨리는 손길로 담배를 피워물곤 헤헤거리며 담배를 쪽 빨아들였다 연기를 내뱉었다.
{...참, 그런데. 현을 암살하란 의뢰를 한 건 누구입니까?}
진은 시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비밀로 하는 것까지 합쳐서 2천만 달러다. 이봐 미키. 내 장사의 모토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흐흐, 예. 바로 신용입죠.}
{저..정말이오! 사신이 현을 죽였소..!!}
진은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중년 사내에게 애걸했다.
{내..내가 직접 봤소이다! 현을 도와주러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신이 현을 죽이고 난 뒤였소...!}
진의 피 반 눈물 반의 호소에 중년 사내는 시가를 씹어물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리곤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부여잡는다.
{......사신. ...사신이라고......}
중년 사내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인텔리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사신이 정말로 그 배에 탔었는지 알아봐라.}
{존명.}
부하가 급히 몇 명의 수하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떠나가고, 중년 사내는 진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놈은 내 첫째 아들을 죽였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라......}
{저, 저는 현이 당신의 아들일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진은 이마를 땅에 박으며 황급히 말했다. 진은 지금 정말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단지 조무래기 싸움꾼인 줄 알았던 녀석이 사실은...
{그렇겠지. 네 놈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인질이고 뭐고 내 아들이 죽은 순간 배에서 뛰어내렸을 테니까 말이야. 삼합회의 태부(太父)인 나의 아들의 죽음을 내버려둔 죄는 차라리 물고기밥이 되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고통스런 벌이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사..살려, ..살려주십시오...!!}
진은 마치 오체투지를 하듯 이마를 마구 땅에 박았다. 중국인과 자주 일을 하다보니 진은 어느새 그들의 예법을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진을 쳐다보며 땅에 박혔다 들리는 진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땅에 짓이겨지는 진의 머리.
{그래, 그건 그렇고. 그 한국인들은 어쩔 속셈이었나.}
진은 중년 사내에게 머리를 밟힌 그대로 급히 대답했다.
{와..왕펑을 통해 저들의 모든 재산을 빼낼 생각이었습니다.}
중년 사내는 자신의 옆에서 아까부터 계속 땅에 이마를 가져다 붙이고 있는 왕펑에게 물었다.
{왕펑. 사실이냐?}
굵고 스산한 중년 사내의 음성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왕펑은 두려움에 몸을 흠칫 떨며 너무나도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하..하지만 소인은 저자와 단지 몇 번 거래를 한 사이일 뿐이고 별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안다. 왕펑.}
중년 사내는 손을 뻗어 왕펑의 두툼한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너의 연락 덕분으로 내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너의 충의를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치 말아라.}
{가..감사합니다! 만복이 태부 대인께 함께하시길 기원하나이다...!!}
왕펑은 이마를 몇 번이고 땅에 찍었다. 중년 사내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진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를 퍽퍽 짓밟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네 녀석의 벌을 정할 차례인 거냐.}
{큭, 커억..으..부..부디...부디 자비를...커헉...}
중년 사내는 이제 어쩔 생각인지 진에게서 발을 떼어내었다. 그러자 급히 부하 하나가 다가와 중년 사내의 구두에 묻은 진의 피를 소매로 닦아내었다. 중년 사내는 구두가 도로 깨끗해지자 의자에서 일어나 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아직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는 시가의 앞부분을 진의 목 뒷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익...
{크아악!!}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진이 울부짖는다. 그러자 그를 구타했던 근육질 남자가 꿈틀거리는 진의 몸을 꽉 부여잡았다. 중년 사내가 여전히 시가로 진의 살갗을 지지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녀석이 데리고 온 한국인들은 내가 위로금으로 받아두겠다. 그리고, 내 아들의 죽음을 방치한 네 녀석은... 뭐,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로 사신이 내 아들을 죽였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손목 하나와 엄지발가락 두 개를 자르는 것으로 용서해주지.}
진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애걸했다.
{부..부디 자비, 크허..억...부디 자비를...!!}
진의 간청에 중년 사내는 인상을 화악 찡그렸다.
{자비? 지금 베풀어주고 있잖나.}
기가 막힌다는 짜증섞인 음성이었다. 한편 진은 잔인한 삼합회 두목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 그로서는 정말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한국놈 새끼..."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은 부하가 일러준 정보를 통해 그 한국인이 한국에서 상당한 지위의 조폭 우두머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마 퀸 엘리자베스호를 털려는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세어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한 한국인 남자가 찾아왔었다. 현찰로 무려 1천만 달러를 가지고. 그가 원한 것은 단 한가지. 최근 자신과 어울리고 있는 싸움꾼 현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뢰가 성공하고나면 싱가폴 은행을 통해서 자신에게 1천만 달러를 더 송금해 준단다. 자신은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2천만 달러면 아버지라도 죽일 돈이니까. 그런데, 그랬는데 사실은 현이 삼합회 두목의 아들이었다니. 진은 그 한국인에게 완전히 속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놈은 현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신분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을 덧붙인 것이겠지.
진은 이를 바드득 갈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한편 벌써 중년 사내의 부하 하나가 커다란 작두를 가지고 왔고, 중년 사내는 볼 것도 없는지 이미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근육질 남자가 움츠리고 있는 진의 팔을 빼내어 작두 위에 올린다.
{......!}
근육질 남자의 우악스런 힘에 의해 억지로 팔이 작두 위로 올려진 진이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황급히 중년 사내에게 외쳤다.
{태부 대인!! 사실은 저에게 현 대형을 암살해달라는 의뢰를 한 자가 있었습니다!!}
{......}
중년 사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중년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진에게로 다가왔다.
{호오, 아직 흥미로운 얘기를 가지고 있었군.}
{하..하핫! 예! 아주 흥미로우실 겁니다!}
중년 사내가 도로 가죽의자에 앉자 진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급히 대꾸했다. 중년 사내는 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하지만 얘기를 듣기 전에, 네 녀석만 흥미로운 것을 알고 있었던 죄값은 치루어야겠지?}
{......??!!!}
중년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육질 남자가 뺀치를 가지고와 진의 왼손 엄지 손톱을 집었다. 두려움으로 물드는 진의 얼굴. 한 부하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중년 사내의 귀를 공손히 막아준다.
{뭐..뭘 하려는..!!}
...빠삭-!!
{크아아악!!!}
손톱이 뒤틀려 부러진 진이 왼손을 부여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중년 사내는 시익 웃으며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어 진에게로 자기 나름의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주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풀어놓기가 한결 수월해졌나?}
모르는 정보를 전해듣기 전에 삼합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정보가 전달되는 도중 거짓말을 하거나 의문점이 생기는 말을 하면 정보제공자의 손톱들을 차례차례 하나씩 더 뽑아낸다. 이것이 삼합회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보를 전해듣는 올바른 방식이었다. 중년 사내는 전통을 중시했고, 진은 말을 꺼내기 전부터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지금의 고문은 하나의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에 관련된 것이든 정보를 숨기고 있던 자는 그 정보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다. 진도 알고 있는 법칙이었다. 지금 삼합회의 두목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진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응...아빠아......"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새벽의 미명이 비춰들어온다. 유리는 이게 참 신기했다. 아빠와 함께 자면 언제나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깨어난다. 유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아빠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가득한 행복에 감싸여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채 옆자리를 쓰다듬었다. 아빠의 따스한 체온이 손가에 느껴지길 기대하면서.
"......?"
그런데 왠지 허전한 기분. 손에서는 보드라운 침대 시트만 느껴질 뿐이고 아빠의 몸은 만져지지 않았다. 유리는 급격히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똑바로 떴다.
"아..빠?"
텅 비어있는 옆자리. 유리는 갑작스레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추위가 아니었다. 외로움과 소외감이었다. 유리는 황망한 눈길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스라한 새벽의 햇살에 잠긴 자신의 방.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유리의 눈가에 어째서인지 이슬이 떠올랐다.
"...아빠. 아빠아...?"
유리는 마치 어린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를 찾는 것처럼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끼익..바스락.
그런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간 유리의 발에 종이 하나가 걸렸다. 유리는 손바닥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종이를 주워들었다. 아빠의 글씨가 보인다. <우리 유리 잘잤니? 유리야. 아빠 먼저 가게에 갈게. 아침 차려놨으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고, 나중에 가게에서 봐^^>
"......"
아빠답지 않게 이모티콘까지 쓴 쪽지. 유리는 입술을 잘근 씹어물었다.
"잘 잤냐고?"
당연히 잘 잤다. 잘 잤었다. 아빠의 품에서 잤으니까. 하지만 얄밉게도 자신을 깨우지도 않고 먼저 나가버리다니. 아침을 차릴 시간 있으면 깨우면 좋았잖아.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다.
"씹지도 않고 물 말아서 후루룩 먹어버릴 거야. 나도 금방 가주지. 흥. 가서 보자구."
유리는 좀 있다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간 아빠에게 팍팍 심술을 부릴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한편 같은 시간. 태현은 레스토랑 네잎클로버에서 현석을 만나고 있었다.
"4시?"
"예. 아무래도 상백 형님이나 철상 형님 같은 분은 오시는데 시간이 좀 걸리시니까, 오후 4시까지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해두었습니다. 어제는 연락이 닿지 않던 쓰리박 형님들도 한달음에 달려오시겠다고 했습니다."
현석의 시원스런 말에 태현은 눈썹을 긁적였다.
"시간이 빠듯하군. 3시간만에 부산까지 가야되잖아."
태현의 곤란한 음성에 현석은 그저 빙글거리기만 했다.
"오랜만에 형님 드라이빙 실력 좀 보겠군요."
태현은 피식 웃었다.
"고속열차라도 얼른 개통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만에 간다는 그 기차 말입니까?"
"그래. 만든다 만든다 하더니 영 소식이 없군."
"우하핫. 정부에서 뭐 하나 빨리 하는 게 있겠습니까."
현석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감싸인 레스토랑 홀을 시원스레 깨웠다. 여하튼 곧 현석의 웃음소리는 잦아들었고, 태현은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은 듯해 보이는 현석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김형필은 부산에서 쇼부를 볼 생각인 것 같다."
"......"
태현의 말에 현석의 얼굴이 급속도로 침착해졌다. 태현은 창 밖으로 보이는, 아침 일찍 등교하는 고등학생들(아마도 방학 없는 고3)에게 시선을 두며 담배 한개피를 꼬나물었다. 그러자 재빨리 현석이 불을 붙여준다.
...칙!...
"쓰-읍...후우..우......"
길게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태현.
"우리는 김형필 녀석이 차려놓은 밥상 위로 올라간다는 걸 명심해라."
"예. 형님."
깊숙히 고개를 숙이는 현석. 지난 8년간의 시간 덕택에 사이가 많이 허물어진 두 사람이었지만, 현석은 지금처럼 이렇게 태현의 눈빛이 과거로 돌아가면 그 즉시로 태도를 예전처럼 바꾸었다. 그런 현석을 가만히 쳐다보던 태현이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현석아."
"예."
"오늘 유리 좀 너희 집에 맡겨야 될 것 같다."
"집사람한테 친정으로 갈 준비해두라고 하겠습니다."
태현이 하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들은 현석이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 형님은 유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김형필은 간사한 녀석이라 형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리를 노릴지도 모르고 형님은 그래서 유리를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좀 더 안전을 기하려면, 아예 유리를 아내와 함께 아내의 친정댁에 보내는 게 더 좋다.
"음."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석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유리는 지금 자신이 모레를 씹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빠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느껴지는 음식은 맛있고, 먹는 것만으로 아빠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모레를 씹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먹고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신경 거슬리게 2층에서 조그맣게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다. 나중에 보자는 쪽지를 보아 지금 이건 아빠의 전화일 리는 없었다.
<......that I heard of once in lullaby...>
탁.
유리는 결국 젓가락을 놓고 휴대폰을 받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dream really do come true~~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어제도 그렇고 유리는 사실 요 며칠간 휴대폰이 꺼진줄도 모르고 살았었다. 아빠 때문에 정신이 온통 거기에 팔려 휴대폰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이 꺼져있는 것을 알고 도로 켜놓은 건 아까 샤워를 하고 난 뒤였다. 유리는 부재중 통화가 서른통이 넘게 와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전부다 윤지나 친구들의 전화. 유리는 친구들이 왠지 기특했지만 시간도 이르고 해서 나중에 일일이 문자로 답장을 보낼 생각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유리는 충전장치에서 휴대폰을 빼어내곤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뿐 윤지>. 벨소리에 귀찮은 얼굴이던 유리는 정작 발신자를 확인하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지니?"
<아휴!! 이제야 전화받네! 너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문자에는 답장도 안 하고!!>
시작부터 바락바락 고함지르는 친구. 유리는 헤헤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아잉~우리 윤지띠 삐졌쪄?"
<그래. 삐졌다 요것아. 너는 어쩜 유람선에서 그런 일을 겪고도 날 한 번 안 만나? 응? 아니, 안 만난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연락이 한 번 없어?>
유리는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곤 그대로 뒤로 풀썩 누웠다. 통화를 하기 전까지는 아빠 때문에 생각도 못한 친구였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또 친구와 얘기를 나누니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히잉~너무 혼내지 마아. 우리 아빠 간호한다고 그랬다구......"
<......그래. 아저씬 좀 어떠셔?>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친구의 물음에 유리는 생긋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우리 아빠야 원체 건강하니까 뭐."
<그래? 다행이네. 넌? ...배에서..>
"......?"
유리는 갑자기 윤지의 목소리가 떨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유리에게 울먹이는 윤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흐으..윽...배에서 그런 일..겪으, 니까...많이 무서웠지...? 우리 유리...많이 무서웠, 끅, 흐윽..무서웠지...?>
"윤지야아..."
친구의 걱정이 가득한 음성에 유리의 눈동자에도 이슬이 물들었다. 유리는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했다.
"으으응~...난 괜찮으니까...그러니까 울지마아......"
<응...흐..윽...미안...너 목소리 너무 오랜만에 듣는 거 같아서...미안..해...>
유리는 눈시울이 빨개진 얼굴로 옆으로 돌아누우며 휴대폰을 귓가에 꼬옥 가져다 붙였다.
"아냐...고마워. 응...선영이나 다른 애들은?"
<치이, 걔네들도 전부 네 걱정하느라 난리두 아냐.>
한결 밝아진 음성이었다. 유리는 윤지와 대화하는 이 순간만큼은 얄미운...물론, 얄밉긴 얄미워도 정말로 무지하게 사랑하는 아빠보다 친구들이 더 보고 싶었다. 같이 만나서 옷구경도 가고 수다도 마음껏 떨고 싶었다.
"...그래? 흐응...그럼 오늘 다같이 만날까?"
<응! 좋지. 이제야 예쁜 말 좀 하네. 그래, 시간 언제 돼?>
"응...나야 학원두 안 가고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 되는데, 한 한 시간 후 정도?"
<좋~았어. 내가 애들한테 학원이고 과외고 다 때려치우고 오라고 연락해둘 테니까, 9시까지 학교 앞에서 만나.>
"응~~."
<응~그럼 그때봐아~.>
"응~사랑해 윤지야앙~~."
애교로 간드러지는 유리의 목소리에 윤지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웩. ..삑. 뚜..뚜...>
...탁.
휴대폰 폴더를 닫은 유리는 아직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생글거렸다. 이렇게 친구와 얘길 나누면 아빠와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낀다. 유리는 아빠에게 좀 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전화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운 얼굴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아침의 햇살이 버티칼을 타고 희미하게 비춰들어오는 고급스런 느낌의 사무실. 형필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심각한 얼굴로 책상 너머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 두 녀석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예. 형님. 이미 부산으로 수송할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음.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이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형필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턱을 긁적이다 다시 물었다.
"김장군하곤 몇 시에 만날 시간을 잡아놓았나."
"예. 오후 1시, 연화정입니다."
"...그래, 그래. 큰 걸로 두 박스 정도 잘 포장해놓아라."
"예. 형님. ...아. 그리고."
"음?"
젊은 남자는 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어 정중히 책상 위에 올려놓곤 형필 쪽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어제 전화를 통해 정태현과 그의 딸이 조사했던 주소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곳이 주소입니다."
쪽지를 집어들어 거기에 적힌 주소를 한 번 훑어본 형필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입꼬리를 조금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외라는 비웃음을 머금고.
"흐-음?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군? 생각보다 좋은 동네는 아닌데? 뭐, 수고했다. 내가 지시할 때까지는 건드리지 말도록."
젊은 사내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형필은 담배를 피워물며 그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젊은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취하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형필은 부하가 나가고 나자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천천히 버티칼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열어젓히는 형필. 그의 눈동자에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가 비춰졌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후우~우......"
형필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입가로 담배 연기를 푸욱 뿜어내었다.
"이제...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형필의 눈동자에 억제되었던 야망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아앙, 팬티가 없어."
유리는 한숨을 포옥 내쉬곤 속옷을 넣어두는 서랍장을 닫곤 1층으로 내려갔다. 허벅지를 절반가량 감싸는 레이스 달린 하얀 스타킹에 무릎을 조금 못 덮는 하늘색 스커트. 위로는 어깨가 시원스레 드러나는 헐렁한 반팔티에 그 안으론 형광빛 노란색 민소매 티를 입었다. 누가 봐도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옷차림이었는데, 사실 유리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센스보다는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 그 자체에 넋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신경써서 옷을 입은 유리는 아름다웠다.
한편 1층 세탁실로 들어온 유리. 단순히 세탁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서 빨래도 하고 바로 연결되는 베란다에는 ?은 옷가지들을 넌다. 유리는 베란다의 빨랫줄을 바라보았다.
"아이참."
하지만 옷가지는 하나도 널려있지 않았다. 빨래는 항상 아빠가 도맡아서 했는데 며칠간 정신이 없다보니 아빠가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리의 시선에 세탁실 구석으로 두 개의 양동이가 뿌연 비눗물이 꽉찬 채 놓여있는 모습이 잡혔다. 유리는 저게 뭘까 고개를 갸웃하며 양동이들로 다가갔다. 먼저 왼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아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유리는 단지 젖은 빨랫감이었지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아빠의 팬티를 조물락 거리다가 도로 양동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오른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이번엔 자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축축히 젖어 있는 조그만 팬티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는 유리. 그런데 그때, 뭔가를 눈치 챈 듯 유리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이거. 나랑 아빠 거 따로 ?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정말로 기분 나쁘고 아빠에게 섭섭했다. 아니, 하긴 아빠가 자신을 대하는 행동을 보면 자신의 속옷도 더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치만.
"기분 나뻐. 씨이.."
유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물며 자신의 팬티를 왼쪽 양동이에 집어 던졌다. 팬티를 찾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유리는 곧바로 탁, 탁, 탁, 탁, 화난 발걸음으로 1층 욕실로 향했다.
"어디 두고봐. 복수할 거야."
1층 욕실에는 태현의 칫솔이 있었다. 아직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지 않은 유리는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빠의 칫솔을 잡곤 치약을 꾹 짜서 발라 입에 탑, 물어버렸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며 아빠에게 말한다.
"잘 보라구. 나쁜 짓을 해주지."
곧바로 치카치카 마구 양치질을 시작하는 유리.
"어때. 어때?"
마치 아빠를 괴롭히듯 심술이 가득한 얼굴로 유리는 그렇게 보통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깨끗히 이를 닦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흐음..."
이는 깨끗히 닦았지만 왠지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아. 팬티."
금세 자신의 기분이 개운치 않은 이유를 깨달은 유리는 어쩔까 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줄기 미소를 입가에 달며 아빠의 방으로 향했다. 아빠의 방으로 들어온 유리는 곧바로 아빠의 속옷이 있는 서랍장을 열어젓혔다. 빨래를 개는 것은 유리의 몫이었고, 그녀의 눈에는 곱고 단정하게 접혀있는 아빠의 팬티들이 들어왔다. 유리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주 철저히 복수해줄게, 아빠."
유리는 입고 있던 팬티를 벗곤 아빠의 사각 트렁크 팬티를 하나 꺼내어 걸쳤다.
"......"
그랬다. 걸쳤다는 말이 딱 맞았던 것이다.
"아이차암..."
날씬한 유리의 허리 탓에 팬티는 자꾸만 흘러내렸고, 유리는 엉덩이에 겨우 걸리는 팬티를 몇 번이나 잡아 올리다 결국엔 고개를 포옥 수그리며 포기를 했다. 아빠의 팬티를 벗어 도로 정성껏 접어 서랍장 안에 넣어둔 유리는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팬티를 징그럽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어젯밤에 갈아입은 거니까."
유리는 마치 자신이 아빠에게 방금 나쁜 짓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는 체념어린 얼굴로 벗었던 팬티를 도로 입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불쌍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띄우는 유리.
"참...! 팔찌."
유리는 태현에게서 받은 팔찌를 잘 때나 목욕을 할 때 외에는 언제나 차고 다녔다. 유리는 금세 생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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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 하나 추천 하나...남겨주시는 흔적들 제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르실 거예요ㅜ_ㅜ 감사드립니다. 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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