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부]
"오백원?"
어이없다는 얼굴로 태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동전을 바라보는 카나코. 한편 그녀의 시선을 왼손으로 집중시켜 놓은 태현은 살며시 오른손을 뒤로 빼돌려 바지 뒷춤에 꼽아 놓았던 조그만 권총을 꺼내었다.
카나코가 무슨 엉뚱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태현의 얼굴을 바라 본 순간, 태현은 카나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타앙-!!
"꺄악!"
유리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하악..!!"
태현이 쏜 총알의 첫발은 방아쇠에 걸쳐져 있던 카나코의 손가락 겉부분을 스쳐 그녀의 머리카락을 뚫고 지나갔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총알은 유리의 목을 끌어잡고 있던 그녀의 팔과 유리가 서있는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서 보이는 카나코의 한쪽 다리에 각각 명중되었다.
총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리는 카나코를 시선에서 지우며 태현은 꼬옥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려는 유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야...!! 괜찮아...? 무서웠지...?"
사실 아까 유리가 건내준 탄환들을 도로 가방 안에 집어 넣을 때 두 사람 몰래 조그만 미니 권총 하나를 꺼내어 숨겨왔었다. 한 손으론 여전히 카나코에게 총을 겨눈 채 방금 전까지 차가운 총구가 맞닿아있던 유리의 관자놀이 부근을 어루만지는 태현. 그의 얼굴엔 지금 바로 전까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었다. 냉정한척했지만 인생에 있어서 이런 건 몇 번 없었다고 생각될 만큼 조금 전 태현은 정말로 무서웠었다. 혹시 실수일지라도 이 여자가 유리에게 총을 쏴버리는 건 아닐까하고.
"아빠..아......"
태현은 가슴에서 느껴져 오는 딸의 음성에 간신히 마음을 놓으며 유리를 끌어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흐윽..아빠아......"
자신의 가슴을 꼬옥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유리. 이 아이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여자는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다. 태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카나코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하군. 일곱판이나 연속으로 스트레이트 플러쉬 아니면 포커라니."
진의 말에 현준은 으쓱하며 새로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그때 검은 복면 사내 하나가 진에게 다가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케시가 당한 것같습니다.}
{Y조는?}
{일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나머지 대원들이 객실을 수색 중에 있습니다.}
현준은 중국어로 말하는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끈 채 담배만 뻐끔거리며 하릴없이 자신의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카드들을 담배곽으로 쳐서 한곳으로 모아 놓기 시작했다. 별 표정의 변화 없이 현준이 모은 카드를 탁탁 튕기는 것을 쳐다보며 진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신이냐?}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타앙-!! 타앙-!! 타앙-!!
6층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진은 시익 웃으며 옆에 앉아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현을 바라보았고 그는 벌써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아호.}
진의 부름에 뒤쪽에 서있던 체구가 좋은 복면인 하나가 다가왔다.
{현을 따라가라.}
{존명.}
보고하러 온 복면인에게서 기관단총을 뺏어든 현이 벌써 저만치 달려가버렸고, 진의 명령을 받은 아호라는 사내와 그의 대원 열두명이 현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가 날 이용했듯이 나도 널 이용했다. 혼자서 싸움과 유리를 지키는 것을 둘 다 하는 건 좀 힘들었으니까."
"언제..부터 눈치 챈 거지..."
카나코의 힘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카나코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 유리가 먼저 카나코를 볼려는 몸짓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아빠의 가슴을 온 힘껏 끌어안고 있을 뿐.
"난 치밀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아니, 세울 줄도 모르지. 하지만 직감만은 상당히 정확했다. 당신이 여자로서 보기 드문 운동 능력으로 4층 객실로 들어왔을 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런 능력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과 만났을 일은 없을 테니까."
"후후..크..으윽...후후...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이로군."
카나코는 살이 찢어지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태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남자의 척살 명령을 받았을 때, 괜히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들었지. 후후..크..윽...후후후...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더군. 당신이 간단하게 제압..해..버린 그 녀석들은 우리 야마구치구미의 일급..격투가들이었어."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에게 말했다.
"그들이 정말로 일급 격투가들이었다면, 너희 야쿠자들이 한국 건달계을 삼키는 건 아직 30년은 이르다."
"...벌써 눈치 챈 건가...후훗, ......하긴 어찌보면 너무..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었지..."
카나코의 말은 단지 일본이 한국에 원하는 것은 김형필의 협력뿐이라는 자신의 말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속일 수가 없는 남자다.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형필도 한국은 온전히 자신에게 주겠다는 너희의 약속을 곧이 곧대로 들은 것은 아닐 거다. 누가 봐도 중국을 삼킨 너희들이 한국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까."
"......"
태현은 입술을 씹어물며 시선을 피하는 카나코를 잠시 바라보곤 이어서 말했다.
"급소는 피해서 쏘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유리를 데리고 선장실에서 나가려했다.
"죽여줘."
그때, 뒤에서 카나코의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를 앞에 세우고 카나코를 등진 채 말했다.
"네가 불쌍해서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헛웃음이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의 딸과 알고 지낸 사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죽이지 않는 건가."
"......"
"이대로 야마구치구미에 돌아가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할복밖에 없게 된다."
"어째서요?!"
그때, 아무런 말 없이 아빠에게 꼭 붙어서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유리가 홱 돌아서서 카나코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어째서...어째서 언니 자신의 인생을 살려하지 않는 거냐구요!"
카나코는 가만히 유리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행복감에 폭 싸여 자라온 것을 저 어여쁜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삶. 주워져와서, 양녀로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부터 오로지 고달픈 훈련만을 거듭해왔던 인생. 자신은 단 한차례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저 아이는 평생에 걸쳐서 받으며 살아간다. 저리도 쉽게 아버지에게 포옹을 받을 수 있다니......
"난......"
카나코의 입술에서 애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저 아이가 매일마다 느끼는 행복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야 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행복감만을 느끼는 그런 하루를.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릴 때..아침에 눈을 뜨면...다른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하루 종일 받았고...나이가 들어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어디의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
"......"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나코는 그런 유리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유리가 너무 부러워. 그러니까...앞으로도 계속 계속 행복하게 살아줘. 언니를 대신 해서라도. 어디에 있든지...언니는 널 떠올리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거 같아......"
"왜...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마치 금방 죽을 사람 같은 말을 하는 카나코에게 유리가 두려움이 섞인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카나코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미소만을 지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이들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답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말을 했었다.
자신이 죽고나면 딸이 어떤 짓을 당할지 그가 걱정하게 만들기 위해 유리를 그런 짓궂은 말로 놀렸다. 그리고, 그랬기에 태현이 자신에게 총을 쏘았을 때 마음속으로 기뻐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어여쁜 소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이렇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딸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뿜는 총구들 앞으로 뛰어들고, 그런 아빠를 보곤 비명을 지르며 뒤쫓아 달려가는 소녀. 이들 부녀를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들의 사랑을 깨뜨릴 자격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누군가 오고 있어."
그때 카나코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태현 역시 들었다.
"아빠...?"
유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자신을 끌어당겨 문에서 떨어지는 아빠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창문을 깨고 나가세요."
"......"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를 한 번 바라보더니 옆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44구경 매그넘을 집어 탄창을 열고 호주머니 안에서 탄환을 꺼내어 채워 넣었다.
"총알...없었던 거야?"
유리의 말에 태현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선장실 정면의 창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태현과 몸을 일으켜 앉은 카나코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나코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현을 마주보았고, 태현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암흑으로 물들어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카나코는 아무런 대답 없이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태현의 권총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타앙-!! 타앙-!! 타앙-!!
세발의 매그넘탄이 선장실 정면의 창문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유리도 이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어지러운 군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태현은 유리를 감싸 들어 안고 구멍이 난 창문으로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유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현의 발을 멈추었다.
"자,잠깐만! 언니는! 언니는?!"
카나코는 자신을 다급한 얼굴로 바라보는 유리에게 살며시 미소지어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그녀의 권총이 들려있었다. 태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달려가 선장실 밖의 암흑으로 물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싫어어-!! 언니이......!!"
서서히 멀어지는 유리의 음성을 들으며 카나코는 마치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행복하게 살아야해 바보 아가씨. 내 몫까지......"
이제 군화들 소리가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카나코의 눈빛이 바뀌었다.
푸슝-!! 푸슝-!!
카나코의 한발 앞선 공격에 대책 없이 뛰어들어온 두명의 복면인이 정확히 이마 한 가운데에 구멍이 난 채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그러나 카나코가 쓰러뜨릴 수 있었던 복면인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선장실 밖에서 복면인들이 총만 안으로 들이민 채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타닥, 탁...
"흐윽......"
카나코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몇 발을 맞은 걸까. 그녀의 옷은 붉은빛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털썩......
바닥으로 힘없이 카나코가 떨어져 내렸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챙그랑-!! 채쟁, 핑, 타다다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소리들과 창문이 깨어지는 소리, 선장실 안의 기재들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져온다. 카나코의 아름다운 얼굴을 타고 가느란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애달픈 슬픔을 담고 있는 그녀의 가냘픈 음성이 시끄러운 총성을 타고 힘겹게 흘러나왔다.
"......오토상...혼또니...아타시노 코토...아이시테루......?(......아버지...정말루...나...사랑했어......?)"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그녀의 시선 앞으로 아버지 야마구치 타사부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두웠다. 밤이었을까. 발목에서 따뜻한 느낌이 느껴져 왔다. 낮에 훈련을 하다 발목을 약간 접질렸었다. 조금 내려가 있는 이불을 아버지가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곤 다시 물수건을 뜨거운 물에 담근 뒤 꼭 짜곤 부어있는 발목에 올리고 살며시 꾸욱 눌러주었다. 따뜻했다. ......발목보다 가슴이 더......
두 눈을 감은 카나코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큭큭큭. 재밌어. 또 스트레이트 플러쉬로군. 진심으로 네 수법이 궁금해지는데."
현준에 이어 자신의 패를 테이블 위에 늘어 놓으며 진이 말했다. 그의 패는 풀하우스였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긴 현준이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까 전 들려온 수많은 총성들 때문에 너무나 불안했다. 그녀라면 절대로 이 따위 곳에서 목숨을 잃을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러나 자꾸만 불안해진다.
그때 허탈한 표정으로 현이 걸어와서 기관단총을 테이블 위로 툭 던져 놓으며 말했다.
{제길, 놓쳤어. 선장실이더군.}
{그래?}
{음. 쓸데없이 상관없는 여자나 한명 죽이고 왔어. 그냥 죽여버리기엔 좀 아까운 외모였는데 말야. 일단 아호를 수색 보내놨어.}
현은 의자에 앉아서 다시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라 애써 불안감을 숨기는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현준을 슬쩍 곁눈질로 한 번 본 진은 시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봐. 블루잭. 방금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글쎄."
현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를 보며 진이 말했다.
"정태현이라고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 친구가 그 남자를 잡으러 선장실로 갔거든. 그런데 정태현이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자 하나를 죽이는걸 봤다는군. 아쉽게 그는 놓쳐버렸지만 말이야."
"......!!"
현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흐윽...나...언니 미워한 거 아니야..."
뛰어내린 곳은 4층과 5층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는 특등실 앞의, 일종의 베란다 형식으로 난간이 쳐져있는 철판 지붕 위였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고 특등실의 안으로 들어온 태현은 일단 유리를 침대에 앉힌 채 달래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있을 때만...그럴 때만...질투심이 나서 그랬던 건데...흐으..윽...그랬는데......"
태현은 유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울어...아빠 가슴에 대고 엉엉 울어..."
카나코의 죽음은 태현으로서도 애석한 일이었다. 비록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이고 유리의 머리에 총구까지 겨누었지만 정작 가장 상처받은 것은 그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일을 할만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연약하다면 너무나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인. 그렇게 사그라들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흐..으윽...으흐흐흑......"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유리를 아무 말없이 끌어안고만 있는 태현. 유리가 이렇게 상처를 받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얼마간만 요양하면 다 나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총을 쐈던 것이었다. 태현은 한품에 쏘옥 들어오는 유리를 애타는 심정으로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아픔의 무게를 달 수만 있다면 지금 자신의 가슴의 아픔은 유리의 두배가 될 것이다. 유리가 아픔 가슴을 그대로 느껴서 한 번 아프고, 유리가 아파하는 모습에 두 번 아프니까.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태현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현준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다 타버린 담배 꽁초를 재떨이 비벼끄고는 자신 앞의 카드들을 한 곳에 모으며 말했다.
"다음 패 돌려."
현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현은 이들에게 신경을 끈 채 칵테일잔만 기울이고 있다. 시선을 내려깐 채 카드를 모아 앞으로 던져 놓으려 하는 현준.
쉬쉿-!! 쉬쉿-!!
그러나 진의 예상대로 현준이 모았던 카드는 앞으로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현준이 진과 현을 향해 날린 두 장의 카드. 진은 가까스로 피했고 현은 잡았다.
그러나 현준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깜짝 놀라며 자신에게 총구를 돌리는, 자신의 뒤쪽에 서있던 두 명의 검은 복면인에게 카드를 날렸다.
파박, 파박!!
"컥..커헉..."
두 복면인은 각각 목에 카드가 박힌 채 털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현준은 곧바로 몸을 날려 복면인이 떨어뜨린 총을 재빨리 잡아들어 뒤쪽을 향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당-!!
진과 현은 재빨리 몸을 숙여 피했지만 당황하며 그들 뒤에 서있던 한명의 복면인이 또 쓰러졌다. 현준은 온 힘을 다해 6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현이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테이블 위의 총을 잡아들어 현준을 향해 총을 쏘려했다. 하지만 진이 그런 현을 재빨리 말렸다.
{놔둬.}
인상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진은 홀에 남아있던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저 녀석을 도망치게 해줘라!}
{왜 그러는 거야?!}
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뭔가를 숨기고 있어. 어쩌면 우리 대신 사신을 잡아 줄지도 모르지.}
진의 말에 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짜증난 얼굴로 칵테일잔을 단숨에 비웠다.
"헉..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준이 선장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앞부분을 다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던 커다란 창문들은 모두 박살이 나서 선장실 안은 온통 깨어진 유리조각들로 가득했다.
온전한 모습의 기재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선장실. 오로지 자동항법장치만이 작동되어 입력되어 있는 항구를 향해 배를 움직여가고 있었다. 현준의 떨리는 눈동자가 급박하게 선장실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현준의 눈동자에 바닥을 피로 흥건히 물들인 채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카나코가 들어오기까진 몇 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나코...!!"
철퍽-!
카나코의 옆으로 달려와 털썩 무릎을 꿇는 현준. 바닥의 피가 튀어 그의 얼굴에 묻었다. 현준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떨리며 카나코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길이 카나코의 얼굴에 닿았다. 천천히 카나코의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는 현준. 그러나 카나코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카나코...?"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부름. 현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흐으...으...으으윽..."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현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이를 사려무는 현준. 그러나 그의 입술사이를 타고 어쩔 수 없는 오열이 흘러나온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자신의 앞에 서있었던 그녀. 고달픈 훈련을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참아왔다. 동경이 사랑이 되고 사랑은 고통이 되었다.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 도대체 몇 년을 가슴앓이 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말해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현준은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꽈악 감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해줄게......"
서서히 현준의 두 눈이 떠졌다. 짙은 살기를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가슴속의 고통을 참아내려 더욱 강렬한 살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준은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카나코를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천천히 똑바로 뉘여주며 다시 말했다.
"복수...해줄게......너무 오래 혼자 있게 하지 않을 테니까..흐으..윽..."
또다시 북받쳐 오르려는 울음을 현준은 입술을 꽈악 깨물며 참았다. 하지만 다시 가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눈빛의 살기와는 전혀 반대로 한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줘...금세 따라갈게......"
현준은 카나코의 옆에 떨어져있는 그녀의 총을 주워들고 일어섰다.
"오백원?"
어이없다는 얼굴로 태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동전을 바라보는 카나코. 한편 그녀의 시선을 왼손으로 집중시켜 놓은 태현은 살며시 오른손을 뒤로 빼돌려 바지 뒷춤에 꼽아 놓았던 조그만 권총을 꺼내었다.
카나코가 무슨 엉뚱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태현의 얼굴을 바라 본 순간, 태현은 카나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타앙-!!
"꺄악!"
유리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하악..!!"
태현이 쏜 총알의 첫발은 방아쇠에 걸쳐져 있던 카나코의 손가락 겉부분을 스쳐 그녀의 머리카락을 뚫고 지나갔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총알은 유리의 목을 끌어잡고 있던 그녀의 팔과 유리가 서있는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서 보이는 카나코의 한쪽 다리에 각각 명중되었다.
총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리는 카나코를 시선에서 지우며 태현은 꼬옥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려는 유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야...!! 괜찮아...? 무서웠지...?"
사실 아까 유리가 건내준 탄환들을 도로 가방 안에 집어 넣을 때 두 사람 몰래 조그만 미니 권총 하나를 꺼내어 숨겨왔었다. 한 손으론 여전히 카나코에게 총을 겨눈 채 방금 전까지 차가운 총구가 맞닿아있던 유리의 관자놀이 부근을 어루만지는 태현. 그의 얼굴엔 지금 바로 전까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었다. 냉정한척했지만 인생에 있어서 이런 건 몇 번 없었다고 생각될 만큼 조금 전 태현은 정말로 무서웠었다. 혹시 실수일지라도 이 여자가 유리에게 총을 쏴버리는 건 아닐까하고.
"아빠..아......"
태현은 가슴에서 느껴져 오는 딸의 음성에 간신히 마음을 놓으며 유리를 끌어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흐윽..아빠아......"
자신의 가슴을 꼬옥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유리. 이 아이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여자는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다. 태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카나코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하군. 일곱판이나 연속으로 스트레이트 플러쉬 아니면 포커라니."
진의 말에 현준은 으쓱하며 새로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그때 검은 복면 사내 하나가 진에게 다가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케시가 당한 것같습니다.}
{Y조는?}
{일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나머지 대원들이 객실을 수색 중에 있습니다.}
현준은 중국어로 말하는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끈 채 담배만 뻐끔거리며 하릴없이 자신의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카드들을 담배곽으로 쳐서 한곳으로 모아 놓기 시작했다. 별 표정의 변화 없이 현준이 모은 카드를 탁탁 튕기는 것을 쳐다보며 진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신이냐?}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타앙-!! 타앙-!! 타앙-!!
6층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진은 시익 웃으며 옆에 앉아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현을 바라보았고 그는 벌써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아호.}
진의 부름에 뒤쪽에 서있던 체구가 좋은 복면인 하나가 다가왔다.
{현을 따라가라.}
{존명.}
보고하러 온 복면인에게서 기관단총을 뺏어든 현이 벌써 저만치 달려가버렸고, 진의 명령을 받은 아호라는 사내와 그의 대원 열두명이 현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가 날 이용했듯이 나도 널 이용했다. 혼자서 싸움과 유리를 지키는 것을 둘 다 하는 건 좀 힘들었으니까."
"언제..부터 눈치 챈 거지..."
카나코의 힘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카나코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 유리가 먼저 카나코를 볼려는 몸짓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아빠의 가슴을 온 힘껏 끌어안고 있을 뿐.
"난 치밀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아니, 세울 줄도 모르지. 하지만 직감만은 상당히 정확했다. 당신이 여자로서 보기 드문 운동 능력으로 4층 객실로 들어왔을 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런 능력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과 만났을 일은 없을 테니까."
"후후..크..으윽...후후...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이로군."
카나코는 살이 찢어지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태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남자의 척살 명령을 받았을 때, 괜히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들었지. 후후..크..윽...후후후...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더군. 당신이 간단하게 제압..해..버린 그 녀석들은 우리 야마구치구미의 일급..격투가들이었어."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에게 말했다.
"그들이 정말로 일급 격투가들이었다면, 너희 야쿠자들이 한국 건달계을 삼키는 건 아직 30년은 이르다."
"...벌써 눈치 챈 건가...후훗, ......하긴 어찌보면 너무..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었지..."
카나코의 말은 단지 일본이 한국에 원하는 것은 김형필의 협력뿐이라는 자신의 말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속일 수가 없는 남자다.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형필도 한국은 온전히 자신에게 주겠다는 너희의 약속을 곧이 곧대로 들은 것은 아닐 거다. 누가 봐도 중국을 삼킨 너희들이 한국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까."
"......"
태현은 입술을 씹어물며 시선을 피하는 카나코를 잠시 바라보곤 이어서 말했다.
"급소는 피해서 쏘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유리를 데리고 선장실에서 나가려했다.
"죽여줘."
그때, 뒤에서 카나코의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를 앞에 세우고 카나코를 등진 채 말했다.
"네가 불쌍해서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헛웃음이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의 딸과 알고 지낸 사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죽이지 않는 건가."
"......"
"이대로 야마구치구미에 돌아가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할복밖에 없게 된다."
"어째서요?!"
그때, 아무런 말 없이 아빠에게 꼭 붙어서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유리가 홱 돌아서서 카나코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어째서...어째서 언니 자신의 인생을 살려하지 않는 거냐구요!"
카나코는 가만히 유리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행복감에 폭 싸여 자라온 것을 저 어여쁜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삶. 주워져와서, 양녀로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부터 오로지 고달픈 훈련만을 거듭해왔던 인생. 자신은 단 한차례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저 아이는 평생에 걸쳐서 받으며 살아간다. 저리도 쉽게 아버지에게 포옹을 받을 수 있다니......
"난......"
카나코의 입술에서 애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저 아이가 매일마다 느끼는 행복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야 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행복감만을 느끼는 그런 하루를.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릴 때..아침에 눈을 뜨면...다른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하루 종일 받았고...나이가 들어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어디의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
"......"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나코는 그런 유리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유리가 너무 부러워. 그러니까...앞으로도 계속 계속 행복하게 살아줘. 언니를 대신 해서라도. 어디에 있든지...언니는 널 떠올리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거 같아......"
"왜...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마치 금방 죽을 사람 같은 말을 하는 카나코에게 유리가 두려움이 섞인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카나코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미소만을 지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이들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답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말을 했었다.
자신이 죽고나면 딸이 어떤 짓을 당할지 그가 걱정하게 만들기 위해 유리를 그런 짓궂은 말로 놀렸다. 그리고, 그랬기에 태현이 자신에게 총을 쏘았을 때 마음속으로 기뻐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어여쁜 소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이렇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딸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뿜는 총구들 앞으로 뛰어들고, 그런 아빠를 보곤 비명을 지르며 뒤쫓아 달려가는 소녀. 이들 부녀를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들의 사랑을 깨뜨릴 자격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누군가 오고 있어."
그때 카나코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태현 역시 들었다.
"아빠...?"
유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자신을 끌어당겨 문에서 떨어지는 아빠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창문을 깨고 나가세요."
"......"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를 한 번 바라보더니 옆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44구경 매그넘을 집어 탄창을 열고 호주머니 안에서 탄환을 꺼내어 채워 넣었다.
"총알...없었던 거야?"
유리의 말에 태현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선장실 정면의 창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태현과 몸을 일으켜 앉은 카나코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나코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현을 마주보았고, 태현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암흑으로 물들어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카나코는 아무런 대답 없이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태현의 권총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타앙-!! 타앙-!! 타앙-!!
세발의 매그넘탄이 선장실 정면의 창문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유리도 이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어지러운 군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태현은 유리를 감싸 들어 안고 구멍이 난 창문으로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유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현의 발을 멈추었다.
"자,잠깐만! 언니는! 언니는?!"
카나코는 자신을 다급한 얼굴로 바라보는 유리에게 살며시 미소지어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그녀의 권총이 들려있었다. 태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달려가 선장실 밖의 암흑으로 물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싫어어-!! 언니이......!!"
서서히 멀어지는 유리의 음성을 들으며 카나코는 마치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행복하게 살아야해 바보 아가씨. 내 몫까지......"
이제 군화들 소리가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카나코의 눈빛이 바뀌었다.
푸슝-!! 푸슝-!!
카나코의 한발 앞선 공격에 대책 없이 뛰어들어온 두명의 복면인이 정확히 이마 한 가운데에 구멍이 난 채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그러나 카나코가 쓰러뜨릴 수 있었던 복면인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선장실 밖에서 복면인들이 총만 안으로 들이민 채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타닥, 탁...
"흐윽......"
카나코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몇 발을 맞은 걸까. 그녀의 옷은 붉은빛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털썩......
바닥으로 힘없이 카나코가 떨어져 내렸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챙그랑-!! 채쟁, 핑, 타다다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소리들과 창문이 깨어지는 소리, 선장실 안의 기재들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져온다. 카나코의 아름다운 얼굴을 타고 가느란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애달픈 슬픔을 담고 있는 그녀의 가냘픈 음성이 시끄러운 총성을 타고 힘겹게 흘러나왔다.
"......오토상...혼또니...아타시노 코토...아이시테루......?(......아버지...정말루...나...사랑했어......?)"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그녀의 시선 앞으로 아버지 야마구치 타사부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두웠다. 밤이었을까. 발목에서 따뜻한 느낌이 느껴져 왔다. 낮에 훈련을 하다 발목을 약간 접질렸었다. 조금 내려가 있는 이불을 아버지가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곤 다시 물수건을 뜨거운 물에 담근 뒤 꼭 짜곤 부어있는 발목에 올리고 살며시 꾸욱 눌러주었다. 따뜻했다. ......발목보다 가슴이 더......
두 눈을 감은 카나코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큭큭큭. 재밌어. 또 스트레이트 플러쉬로군. 진심으로 네 수법이 궁금해지는데."
현준에 이어 자신의 패를 테이블 위에 늘어 놓으며 진이 말했다. 그의 패는 풀하우스였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긴 현준이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까 전 들려온 수많은 총성들 때문에 너무나 불안했다. 그녀라면 절대로 이 따위 곳에서 목숨을 잃을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러나 자꾸만 불안해진다.
그때 허탈한 표정으로 현이 걸어와서 기관단총을 테이블 위로 툭 던져 놓으며 말했다.
{제길, 놓쳤어. 선장실이더군.}
{그래?}
{음. 쓸데없이 상관없는 여자나 한명 죽이고 왔어. 그냥 죽여버리기엔 좀 아까운 외모였는데 말야. 일단 아호를 수색 보내놨어.}
현은 의자에 앉아서 다시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라 애써 불안감을 숨기는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현준을 슬쩍 곁눈질로 한 번 본 진은 시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봐. 블루잭. 방금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글쎄."
현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를 보며 진이 말했다.
"정태현이라고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 친구가 그 남자를 잡으러 선장실로 갔거든. 그런데 정태현이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자 하나를 죽이는걸 봤다는군. 아쉽게 그는 놓쳐버렸지만 말이야."
"......!!"
현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흐윽...나...언니 미워한 거 아니야..."
뛰어내린 곳은 4층과 5층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는 특등실 앞의, 일종의 베란다 형식으로 난간이 쳐져있는 철판 지붕 위였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고 특등실의 안으로 들어온 태현은 일단 유리를 침대에 앉힌 채 달래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있을 때만...그럴 때만...질투심이 나서 그랬던 건데...흐으..윽...그랬는데......"
태현은 유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울어...아빠 가슴에 대고 엉엉 울어..."
카나코의 죽음은 태현으로서도 애석한 일이었다. 비록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이고 유리의 머리에 총구까지 겨누었지만 정작 가장 상처받은 것은 그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일을 할만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연약하다면 너무나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인. 그렇게 사그라들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흐..으윽...으흐흐흑......"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유리를 아무 말없이 끌어안고만 있는 태현. 유리가 이렇게 상처를 받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얼마간만 요양하면 다 나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총을 쐈던 것이었다. 태현은 한품에 쏘옥 들어오는 유리를 애타는 심정으로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아픔의 무게를 달 수만 있다면 지금 자신의 가슴의 아픔은 유리의 두배가 될 것이다. 유리가 아픔 가슴을 그대로 느껴서 한 번 아프고, 유리가 아파하는 모습에 두 번 아프니까.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태현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현준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다 타버린 담배 꽁초를 재떨이 비벼끄고는 자신 앞의 카드들을 한 곳에 모으며 말했다.
"다음 패 돌려."
현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현은 이들에게 신경을 끈 채 칵테일잔만 기울이고 있다. 시선을 내려깐 채 카드를 모아 앞으로 던져 놓으려 하는 현준.
쉬쉿-!! 쉬쉿-!!
그러나 진의 예상대로 현준이 모았던 카드는 앞으로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현준이 진과 현을 향해 날린 두 장의 카드. 진은 가까스로 피했고 현은 잡았다.
그러나 현준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깜짝 놀라며 자신에게 총구를 돌리는, 자신의 뒤쪽에 서있던 두 명의 검은 복면인에게 카드를 날렸다.
파박, 파박!!
"컥..커헉..."
두 복면인은 각각 목에 카드가 박힌 채 털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현준은 곧바로 몸을 날려 복면인이 떨어뜨린 총을 재빨리 잡아들어 뒤쪽을 향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당-!!
진과 현은 재빨리 몸을 숙여 피했지만 당황하며 그들 뒤에 서있던 한명의 복면인이 또 쓰러졌다. 현준은 온 힘을 다해 6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현이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테이블 위의 총을 잡아들어 현준을 향해 총을 쏘려했다. 하지만 진이 그런 현을 재빨리 말렸다.
{놔둬.}
인상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진은 홀에 남아있던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저 녀석을 도망치게 해줘라!}
{왜 그러는 거야?!}
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뭔가를 숨기고 있어. 어쩌면 우리 대신 사신을 잡아 줄지도 모르지.}
진의 말에 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짜증난 얼굴로 칵테일잔을 단숨에 비웠다.
"헉..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준이 선장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앞부분을 다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던 커다란 창문들은 모두 박살이 나서 선장실 안은 온통 깨어진 유리조각들로 가득했다.
온전한 모습의 기재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선장실. 오로지 자동항법장치만이 작동되어 입력되어 있는 항구를 향해 배를 움직여가고 있었다. 현준의 떨리는 눈동자가 급박하게 선장실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현준의 눈동자에 바닥을 피로 흥건히 물들인 채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카나코가 들어오기까진 몇 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나코...!!"
철퍽-!
카나코의 옆으로 달려와 털썩 무릎을 꿇는 현준. 바닥의 피가 튀어 그의 얼굴에 묻었다. 현준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떨리며 카나코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길이 카나코의 얼굴에 닿았다. 천천히 카나코의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는 현준. 그러나 카나코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카나코...?"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부름. 현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흐으...으...으으윽..."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현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이를 사려무는 현준. 그러나 그의 입술사이를 타고 어쩔 수 없는 오열이 흘러나온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자신의 앞에 서있었던 그녀. 고달픈 훈련을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참아왔다. 동경이 사랑이 되고 사랑은 고통이 되었다.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 도대체 몇 년을 가슴앓이 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말해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현준은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꽈악 감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해줄게......"
서서히 현준의 두 눈이 떠졌다. 짙은 살기를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가슴속의 고통을 참아내려 더욱 강렬한 살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준은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카나코를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천천히 똑바로 뉘여주며 다시 말했다.
"복수...해줄게......너무 오래 혼자 있게 하지 않을 테니까..흐으..윽..."
또다시 북받쳐 오르려는 울음을 현준은 입술을 꽈악 깨물며 참았다. 하지만 다시 가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눈빛의 살기와는 전혀 반대로 한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줘...금세 따라갈게......"
현준은 카나코의 옆에 떨어져있는 그녀의 총을 주워들고 일어섰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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