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의 입술이 무척 부드럽다. 그 부드러운 느낌과, 지은의 숨결이 기분이 좋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지은에게서 떨어졌다.
지은을 바라보니, 볼이 붉게 물들어서는 멍하니 눈을 뜨고 서있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대도 반응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지은아.”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지은아.”
“으, 응?”
겨우 반응을 보이는 지은.
“괜찮아?”
“응.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그럼 이제 출발할까.”
“그, 그래.”
잠시 시간이 지연됐지만,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우리 집.
잠깐,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사이좋게 함께 집으로 가고 있었잖아. 처음엔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어느새 당연스럽게 같이 가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좀 전의 그 키, 뭐시기하는 것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보다.
“근데 지은아.”
“응.”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야?”
“글쎄. 뭘까?”
아가씨, 제가 물어봤는데요.
“그냥 보고 싶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래.”
“대답이 이상해.”
“그런가.”
지은이라는 여학생은, 숨김없이 자신을 이야기할 줄 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것은 어제 오늘 이틀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실 된 모습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거짓 없이 지은을 대할 수 있었다. 신기한 느낌이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경계심이 심한 편이다. 때문에 어느 사람과 대화를 하건 경계를 풀지 않고 나를 감춘다. 가식으로써 사람을 대한다. 내가 가식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누나를 포함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지은도 그 극히 일부의 사람에 포함되었다. 처음 대화를 했을 때부터 자신을 감추지 않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 본모습을 보여버렸다.
지은은 내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애다.
저돌적인 면은 조금 곤란하지만.
“아, 다 왔다.”
정신없이 걷고 있는 새에 벌써 집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칠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낡은 대문. 대문에 다가가서 번호판을 누르자, 짧은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뒤를 바라보니 지은이 뻣뻣하게 서있었다.
“지은아. 들어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내 말에 얼른 대문을 통과하는 지은.
작은 앞마당을 지나 현관문에 당도했다. 이번에도 번호판을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지은도 따라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집안 풍경을 보니, 안정감이 느껴진다.
“여기 앉아.”
“응.”
지은을 거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 전에 사둔 오렌지 주스가 보인다.
“뭔가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아무 거나 상관없어.”
“그럼 오렌지 주스로 줄게.”
“응.”
사실, 지은이 뭐가 마시고 싶건 간에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이라곤 물과 오렌지 주스밖에 없다. 만약 지은이 홍차나 보리차 같은 것을 원했어도 결국은 오렌지 주스를 먹었을 것이다. 손님이 집에 오는 일이 없으니 손님 접대용 차 같은 것이 없다. 그 흔한 커피조차 우리 집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오렌지 주스가 담긴 글라스 두 개를 올린 쟁반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지은이 보인다. 가까이 와서 보니 다소곳하다기보다는 그냥 굳어있는 것 같다. 표정도.
“그렇게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데.”
“으, 응.”
그러나 여전히 굳은 자세를 풀지 않은 지은. 긴장되나보다. 뭐가 긴장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 마셔.”
쟁반을 내밀자, 지은이 주스가 담긴 글라스를 하나 집었다. 나도 글라스를 집고 쟁반을 내려놓으며 지은의 정면에 앉았다. 지은이 소파에 앉아 있으니, 지은의 정면에 앉으려면 바닥에 앉아야한다. 그래서 바닥에 앉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미묘한 각도.
소파에 앉은 지은과 바닥에 앉은 내가 마주 앉으니, 보지 말아야할 것이 보일 듯한 각도가 만들어졌다. 물론, 지은이 다리를 오므리고 다소곳하게 앉아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앉아있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은의 옆에 앉았다. 아니, 어쩔 수 없이라니, 어쩐지 내가 무언가 보기를 원했다는 느낌이 들잖아.
다행히 지은은 내가 급하게 일어나서 소파에 앉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여전히 굳은 자세와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주스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다. 분위기가 무겁다.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해도 딱히 할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화를 나눈지 이틀밖에 안 된 사이다. 서로의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것이라든가, 관심거리라든가 하는 사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 그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할만한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로 시간을 계속 때워야 하는 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의외로 이 침묵을 깬 것은 지은 쪽이었다.
“평소에 뭐하면서 지내?”
“그건 여가시간을 말하는 거지?”
“응,”
“글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책을 보곤하는 것 같아.”
-같아, 라는 말로 끝낸 이유는, 여가시간을 대개 멍한 상태로 보내기에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했다는 여운은 남아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딱히 불편함을 겪는 것은 아니라서 그냥 잘 지내고 있다.
“취미는 뭐야? 장래 희망은? 좋아하는 게임 있어?”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들. 그렇게 많이 질문하면 대답하기 곤란한데.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독서하는 거 좋아해? 운동하는 거 좋아해? 격투기 같은 거 좋아해?”
“저기.”
“격투기하는 여자애는? 좋아해?”
“…….”
지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절박한 마음을 가지는 게 가능한 걸까? 사람의 내면을 알아볼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과연 그 마음은 진실 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그 사람의 외모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건 어찌보면 성욕과 다름없는 감정이 아닌가.
아니. 역시 지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멋대로 판단하는 건 그만둬야겠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좀 더 나중에 할게.”
“응. 그렇게 해.”
지은이 힘없이 웃었다.
지은이 싫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도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하고 가끔 생각하곤 하는 평범한 남학생이다. 평범한 남학생의 입장에서 지은이라면 넙죽 절해도 좋을 만큼 괜찮은 여자애다. 하지만, 역시 조금 꺼림칙하다.
아무리 상대방의 외모가 출중하더라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은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냥 사귀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무언가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시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회전하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지은아.”
“응.”
“넌 왜 나를 좋아하는 거야?”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이고, 계속 묻지 못했던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을 꺼내는 게 무척 힘들었다. 별다른 매력 없는 평범한 나를 어째서 좋아해주는가. 분명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긴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냥 전부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지은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있었다.
“네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좋고, 머리카락도, 손도, 행동도, 표정도 모두 다 좋아.”
과연 일방적인 사랑이란 가능한 걸까. 돌아오는 것이 없는 사랑이 가능한 걸까. 보답을 받을 수 없는 힘든 일.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 다른 사람의 가치관은 죽어도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의 가치관으로는 지은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보답 받을 수 없는 일 따위 절대로 할 수 없다.
사랑이란 건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고, 홀로 섬으로써 비로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건 그때서야 알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20년이 넘도록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간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것이 태어나서 20년이 지난 후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 20년이 걸린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직 누군가의 보호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새파란 10대가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아직 법의 보호를 받는 어린아이가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너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냐.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은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아냐!”
지은이 크게 소리쳤다. 간절한 표정.
“왜 몰라주는 거야?”
눈물을 흘릴 듯한 슬픈 표정으로 말을 잇는 지은.
“착각으로 3년이나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 계속 다가가고 싶고. 계속 대화하고 싶고. 계속 너를 알고 싶어.”
정말로 낯간지러운 말이다.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너무나 낯간지러운 말이라 그런지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은은 내가 물러선 만큼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애다.
당연히 지은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은은 또 다시 다가왔다.
“오지 마.”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바보 같은 말을 해버렸다. 지은도 내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구나.”
지은은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미소와는 다른, 순간 오싹한 기분이 느껴지는 그런 미소.
“내가 무서운 거지.”
“아니.”
“거짓말 마.”
차갑게 웃는 지은의 모습. 요염한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가 아는 운하는 그래. 다른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무서운 거지.”
“아니야.”
“거짓말.”
지은은 정말로 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 가치관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행동, 사건, 사람, 사물 등 모든 것에 공포를 느낀다.
“잘 봐. 이렇게. 내가 무서우니까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거야. 내가 무서우니까 내가 다가가면 물러서는 거야.”
“아니야!”
급기야 나는 큰소리를 쳤다. 분노를 담은 목소리이자, 공포심을 날려버리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봐.”
지은의 말에 나는 미쳤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지은에게서 떨어졌다.
지은을 바라보니, 볼이 붉게 물들어서는 멍하니 눈을 뜨고 서있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대도 반응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지은아.”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지은아.”
“으, 응?”
겨우 반응을 보이는 지은.
“괜찮아?”
“응.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그럼 이제 출발할까.”
“그, 그래.”
잠시 시간이 지연됐지만,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우리 집.
잠깐,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사이좋게 함께 집으로 가고 있었잖아. 처음엔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어느새 당연스럽게 같이 가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좀 전의 그 키, 뭐시기하는 것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보다.
“근데 지은아.”
“응.”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야?”
“글쎄. 뭘까?”
아가씨, 제가 물어봤는데요.
“그냥 보고 싶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래.”
“대답이 이상해.”
“그런가.”
지은이라는 여학생은, 숨김없이 자신을 이야기할 줄 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것은 어제 오늘 이틀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실 된 모습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거짓 없이 지은을 대할 수 있었다. 신기한 느낌이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경계심이 심한 편이다. 때문에 어느 사람과 대화를 하건 경계를 풀지 않고 나를 감춘다. 가식으로써 사람을 대한다. 내가 가식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누나를 포함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지은도 그 극히 일부의 사람에 포함되었다. 처음 대화를 했을 때부터 자신을 감추지 않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 본모습을 보여버렸다.
지은은 내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애다.
저돌적인 면은 조금 곤란하지만.
“아, 다 왔다.”
정신없이 걷고 있는 새에 벌써 집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칠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낡은 대문. 대문에 다가가서 번호판을 누르자, 짧은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뒤를 바라보니 지은이 뻣뻣하게 서있었다.
“지은아. 들어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내 말에 얼른 대문을 통과하는 지은.
작은 앞마당을 지나 현관문에 당도했다. 이번에도 번호판을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지은도 따라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집안 풍경을 보니, 안정감이 느껴진다.
“여기 앉아.”
“응.”
지은을 거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 전에 사둔 오렌지 주스가 보인다.
“뭔가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아무 거나 상관없어.”
“그럼 오렌지 주스로 줄게.”
“응.”
사실, 지은이 뭐가 마시고 싶건 간에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이라곤 물과 오렌지 주스밖에 없다. 만약 지은이 홍차나 보리차 같은 것을 원했어도 결국은 오렌지 주스를 먹었을 것이다. 손님이 집에 오는 일이 없으니 손님 접대용 차 같은 것이 없다. 그 흔한 커피조차 우리 집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오렌지 주스가 담긴 글라스 두 개를 올린 쟁반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지은이 보인다. 가까이 와서 보니 다소곳하다기보다는 그냥 굳어있는 것 같다. 표정도.
“그렇게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데.”
“으, 응.”
그러나 여전히 굳은 자세를 풀지 않은 지은. 긴장되나보다. 뭐가 긴장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 마셔.”
쟁반을 내밀자, 지은이 주스가 담긴 글라스를 하나 집었다. 나도 글라스를 집고 쟁반을 내려놓으며 지은의 정면에 앉았다. 지은이 소파에 앉아 있으니, 지은의 정면에 앉으려면 바닥에 앉아야한다. 그래서 바닥에 앉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미묘한 각도.
소파에 앉은 지은과 바닥에 앉은 내가 마주 앉으니, 보지 말아야할 것이 보일 듯한 각도가 만들어졌다. 물론, 지은이 다리를 오므리고 다소곳하게 앉아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앉아있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은의 옆에 앉았다. 아니, 어쩔 수 없이라니, 어쩐지 내가 무언가 보기를 원했다는 느낌이 들잖아.
다행히 지은은 내가 급하게 일어나서 소파에 앉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여전히 굳은 자세와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주스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다. 분위기가 무겁다.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해도 딱히 할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화를 나눈지 이틀밖에 안 된 사이다. 서로의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것이라든가, 관심거리라든가 하는 사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 그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할만한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로 시간을 계속 때워야 하는 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의외로 이 침묵을 깬 것은 지은 쪽이었다.
“평소에 뭐하면서 지내?”
“그건 여가시간을 말하는 거지?”
“응,”
“글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책을 보곤하는 것 같아.”
-같아, 라는 말로 끝낸 이유는, 여가시간을 대개 멍한 상태로 보내기에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했다는 여운은 남아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딱히 불편함을 겪는 것은 아니라서 그냥 잘 지내고 있다.
“취미는 뭐야? 장래 희망은? 좋아하는 게임 있어?”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들. 그렇게 많이 질문하면 대답하기 곤란한데.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독서하는 거 좋아해? 운동하는 거 좋아해? 격투기 같은 거 좋아해?”
“저기.”
“격투기하는 여자애는? 좋아해?”
“…….”
지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절박한 마음을 가지는 게 가능한 걸까? 사람의 내면을 알아볼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과연 그 마음은 진실 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그 사람의 외모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건 어찌보면 성욕과 다름없는 감정이 아닌가.
아니. 역시 지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멋대로 판단하는 건 그만둬야겠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좀 더 나중에 할게.”
“응. 그렇게 해.”
지은이 힘없이 웃었다.
지은이 싫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도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하고 가끔 생각하곤 하는 평범한 남학생이다. 평범한 남학생의 입장에서 지은이라면 넙죽 절해도 좋을 만큼 괜찮은 여자애다. 하지만, 역시 조금 꺼림칙하다.
아무리 상대방의 외모가 출중하더라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은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냥 사귀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무언가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시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회전하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지은아.”
“응.”
“넌 왜 나를 좋아하는 거야?”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이고, 계속 묻지 못했던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을 꺼내는 게 무척 힘들었다. 별다른 매력 없는 평범한 나를 어째서 좋아해주는가. 분명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긴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냥 전부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지은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있었다.
“네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좋고, 머리카락도, 손도, 행동도, 표정도 모두 다 좋아.”
과연 일방적인 사랑이란 가능한 걸까. 돌아오는 것이 없는 사랑이 가능한 걸까. 보답을 받을 수 없는 힘든 일.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 다른 사람의 가치관은 죽어도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의 가치관으로는 지은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보답 받을 수 없는 일 따위 절대로 할 수 없다.
사랑이란 건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고, 홀로 섬으로써 비로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건 그때서야 알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20년이 넘도록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간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것이 태어나서 20년이 지난 후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 20년이 걸린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직 누군가의 보호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새파란 10대가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아직 법의 보호를 받는 어린아이가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너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냐.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은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아냐!”
지은이 크게 소리쳤다. 간절한 표정.
“왜 몰라주는 거야?”
눈물을 흘릴 듯한 슬픈 표정으로 말을 잇는 지은.
“착각으로 3년이나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 계속 다가가고 싶고. 계속 대화하고 싶고. 계속 너를 알고 싶어.”
정말로 낯간지러운 말이다.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너무나 낯간지러운 말이라 그런지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은은 내가 물러선 만큼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애다.
당연히 지은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은은 또 다시 다가왔다.
“오지 마.”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바보 같은 말을 해버렸다. 지은도 내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구나.”
지은은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미소와는 다른, 순간 오싹한 기분이 느껴지는 그런 미소.
“내가 무서운 거지.”
“아니.”
“거짓말 마.”
차갑게 웃는 지은의 모습. 요염한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가 아는 운하는 그래. 다른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무서운 거지.”
“아니야.”
“거짓말.”
지은은 정말로 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 가치관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행동, 사건, 사람, 사물 등 모든 것에 공포를 느낀다.
“잘 봐. 이렇게. 내가 무서우니까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거야. 내가 무서우니까 내가 다가가면 물러서는 거야.”
“아니야!”
급기야 나는 큰소리를 쳤다. 분노를 담은 목소리이자, 공포심을 날려버리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봐.”
지은의 말에 나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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