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라고 해도 여름이었다. 그리고 가스를 두 개 사용하고 있었고, 좁은 주방에 세 명이 비좁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간간히 싸늘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돌아다녔다. 위기 감지능력에 따라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위기는 감지했는데 대처능력은 현저히 떨어져 두 누나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살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탁탁탁탁...
누나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얼마 전 연주누나가 내 방에서 잠을 잔 후부터 계속 이런 분위기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연주누나와 나 사이를 현주누나가 의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일은 충분히 해명을 했다.
“윽..”
“왜?”
“응...”
“어머! 조심하지..”
딴생각 하면서 된장찌개에 들어갈 호박을 둥글게 썰다가 왼쪽 가운데 손가락. 손톱을 절반 넘게 잘라버렸다. 누나 둘이 호들갑을 떨면서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잠깐 동안 냉기류는 없어졌다.
‘꼭...피를 봐야 관심을 보이냐?’
그런 누나들에게 불만이 생긴다. 아버지. 엄마도 없고 우리끼리라도 잘 살아야 하는데 만났다하면 으르렁 거리니 어리고 여린 내가 신경 쓰여 살 수가 없다.
“누나들 정말 왜 그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그만 화해해..”
“......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안 쓰냐? 가족인데..”
“..............”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되지 않는 것은 집에 어른이,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어색한 아침을 겨우 먹어 치우고는 체육관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과외를 하러 슬기누나의 집으로 갔다.
“어서와..어머! 손은 또 왜 그래?”
“별거 아니에요..아침 하다가 좀 베었어요..”
“....넌 유난히 손을 많이 다친다?”
“히히...그러게요..”
손톱 하나 없을 뿐인데 불편함은 컸다. 그래도 왼손이라 못하는 것은 없었다. 슬기누나에게는 수학 한 가지만 가르침을 받았지만 주5일이나 수업을 했다. 언제나 상미누나는 없어 단 둘 뿐이었다. 지금이 한창 키가 클 시기인지 그 사이 대망의 170센티를 돌파하고 175에 근접해 가서 슬기누나가 한참 작게 보였다.
“커피?”
“주면 고맙죠..”
지수 집에서 공부할 때는 지수 엄마가 간식이며 음료수를 준비해 줬었다. 지금은 슬기누나가 준다. 항상 냉장고에 챙겨 놓는지 신선한 과일을 준다. 누나와 과외비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 적이 없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적당한 시세라던가 어떻게 줘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고. 배우는 입장에서 직접 주기도 어려웠다.
“오늘부터 미분이네..”
“진도..너무 빠르지 않아요?”
“어려워?”
“그런 건 아닌데...”
“미안....네가 잘 따라오니까...그렇다고 놀 수는 없잖아..”
“그럼...시간을 줄일까요?”
“......”
“오늘은 수업하지 말고. 잠깐 이야기 좀 해요..”
“그래..”
수업 시간은 어렵지 않게 합의가 되었는데 보수 문제는 쉽지 않다. 무슨 생각인지 누나는 주겠다는 돈도 마다한다.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은 돈 말고 다른 것을 원한다는 의미지 아주 공짜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점점 어색해져서 좁은 공간에 둘만 있기 힘들어졌다. 밖으로 나가니 확실히 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시내에 가서 영화 볼까?”
“그래요..”
비좁은 지하철 안. 슬기누나와 마주서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이런 상황 일 년 전과 똑같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면 꿈에서 봤던 장면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누나에게 농담을 걸어 본다.
“손을 다쳐서 어떡하죠?”
“호호...그걸 못해서?”
“네...누나가 해줄래요?”
“..그럴까?”
“..............”
실제로 누나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누나가 손을 들어서 가슴에 대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누나의 손은 애무하듯 움직였다. 그리고 점점 밑을 향해 내려간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당혹감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똘똘이는 혼자만의 기대감에 아직 한참을 떨어져 있는 슬기누나의 손을 기다리며 혼자 발기한다.
“............”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우리 둘 사이의 공간에는 긴장으로 팽창한 공기로 가득했다. 슬기누나의 빨간 얼굴. 떨리는 눈썹과 눈동자. 몰아서 나오는 숨소리. 그리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현미경 세상처럼 가깝게 보였다.
“음...”
얇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손이. 감촉이. 떨림이 충분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 감동을 누나의 입이 먼저 표현했다. 잡고만 있었다. 기교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듯. 탐색조차 없이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눈에 띄는 누나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품에 안았다.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런 행동이 어색하지 않다. 가슴으로 누나의 숨결이 닿았다. 100도의 주전자 물처럼 뜨거운 온도를 가득 안고 있는 습기였다.
“..........”
품 안에서 안정을 찾은 누나의 손은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누나가 똘똘이를 잡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슬기누나보다 어린 연주누나조차 이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것에도 개성이라는 것이 있는 듯 했다. 누나의 손은 처음만 힘들어했지 그 다음부터는 거침없이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지 안이 좁아 마음껏 움직이지 못한 것이 불만이라는 듯. 슬기누나는 지퍼를 내리고 똘똘이를 꺼냈다. 밖으로 나오자 완전한 해방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똘똘이다.
‘뭐하려고요?’
‘...부드러워...’
누나의 손가락은 똘똘이 가죽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 항상 가지고 있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누나는 그 느낌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친구들과 우수개 소리로 하는 이야기에 [어떤 비뇨기과 의사가 포경수술하고 버려지는 표피를 아깝게 생각하고 이어 붙여서 지갑을 만들었는데. 백화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떤 부인이 그 감촉이 너무 좋아 계속 만지작거리자 지갑이 가방으로 변했다]는 것이 있다. 슬기 누나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생각나 그녀의 귀에 대고 이야기 해 줬다.
“호호...”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내릴 역이 가까워지는데 누나 손은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 자극을 주고 있었다. 화가 난 똘똘이를 억지로 구겨 넣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누나는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이야기를 해 주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억지로 구겨 넣으려 한다. 역효과였다.
영화는 보지 못했다. 그 역을 지나쳐 6정거장을 더 가서야 슬기누나는 똘똘이를 바지 안에 넣는데 성공했다. 나는 누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황해서 쩔쩔매는 누나를 보는 것이 더 재밌었다.
“아....”
겨우 바지 지퍼를 올리고 누나 입에서 나오는 안도의 한숨과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은 평생 기억에 남을 영상을 심었다. 완전히 탈진한 누나를 부축해 반대쪽 차를 타 구석에 달라붙었다. 당연히 빈자리가 없었다. 누나는 다리까지 떨면서 벽에 기대고 섰다.
“그냥...집에 가자...”
“그래요..”
슬기누나 표정은 바로 쓰러져 자고 싶다는 그것이었다. 이제 다시 한 시간은 가야 하는데 누나는 똘똘이 근처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이제 내 차례에요..”
“뭐가?”
누나 다리 사이에 다리를 넣고 벌리자 의도를 모르는 누나의 허벅지가 힘없이 열렸다. 의도를 알았다고 해도 저지할 힘이 남아 있을 거 같지도 않다. 사람이 너무 많아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인 지하철 구석에서 누나의 몸을 완전히 가리고 서서 턱 선을 따라 쓰다듬었다. 입술을 내리자 누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여기서?’
눈이 그렇게 묻는다. 나는 입술로 대답했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눈을 감고 입술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누나보다는 내 입술이. 그리고 경험이 앞서고 있었다. 얼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붙잡혔다. 한번 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음...”
두 팔이 올라와 목을 감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누나를 나 역시 허리를 받치며 안았다. 혀가 깊숙이 섞이고 고개가 사선으로 돌면서 완벽한 일체를 이루었다. 입 안은 진공이 되며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쭙...”
이정도 상황이 되면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무시했고, 누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통은 다음으로 가슴이나 아랫입을 자극했을 상황이다.
“음...”
장소가 지하철이고, 그녀의 경험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슴을 만지는 순간 그녀는 새로운 자극에 더 몰입하기보다 정신을 차리고 도망갈 것이다. 인생에서 한 시간은 키스만으로 보내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 되리란 것도 안다. 연주누나의 경험이 있었다. 다만 누나 다리사이에 자리 잡은 내 다리로 그녀의 아랫입을 압박했고, 그녀는 그 위에 몸을 얹어 놓고 가끔씩 몸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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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 여기..”
“잘 지내셨죠?”
“응....”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우선 뭐 좀 시키지?”
“네...전 커피..형부는?”
“나도..”
형부 전화를 받고 나오기는 했지만 찝찝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번 관계를 가졌던 사이였다. 재석이 문제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형부라는 관계가 있어 안보고 살 수도 없었다.
“..............”
커피가 올 때까지 할 말이 없었다. 커피의 따듯한 기운과 향긋한 냄새를 손에 가득 쥐고 나서도 할 말은 없었다. 다시 불러낸 이유를 묻기도 이상해 먼저 말을 해 줄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처제는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난 처제 생각 많이 했는데...”
“...네......”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능하다면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안 되면 그 기억만이라도 도려내고 싶다. 그래서 어정정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들었으리라.
“..하하...처제는 내 생각 안했던 모양이네...”
“...........”
꼭 확인을 해서 스스로 난처한 상황을 만드는 남자가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남자를 ‘최악’이라고 분류하고 있는데. 형부 역시 그랬다. 이런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이 싫었기에 어쩔 수 없이 용건을 묻는다.
“응...언니 말이야..바람 난 거 같아..”
“언니가요?”
다른 부부는 몰라도 형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혼란스러웠다. 흔히 바람이 났다는 것은 다른 이성이 생겼다는 뜻 인데. 그들은 이성을 교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형부가 ‘바람’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그만큼 개방적인 삶을 산다면 자기들끼리 이야기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자신을 찾아와 할 말은 아니었다. 아니 상의는 할 수 있는 문제지만, 우선순위가 좀 멀다고 할까? 자기에게 말할 정도면 이모와 이모부에게도 이야기 하고. 사촌 동생들에게도 말한 걸까? 그렇다면 더욱 나쁘다.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결과가 된다.
다르게 생각하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니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이 맞지만. 형부는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언니가 아닌 형부가 나를 찾는 이유는 약했다.
“그런데..그런 이야기를 왜 저에게?”
“음...상대가...처제도 아는 사람인거 같아..”
“?”
“.........”
“재석이?”
“응...”
나와 언니. 형부가 모두 알고 있는 사람. 아주 많다. 그러나 형부가 나를 찾아와 말할만한 사람은 한사람뿐이다. 스와핑을 한 날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그 후 따로 만났다는 것이다.
“...........”
봄에 언니가 나를 만나러 왔다가 몇 시간 기다린 적이 있다. 우연히 집 앞에서 언니와 재석이를 만났다. 그 때 이상한 예감이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알 거 같았다. 둘 사이에 친밀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그 때부터...’
형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 재석이도 남자니 언니처럼 매력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안고 싶을 것이다. 내가 있던 자리에 있는 언니를 바라보는 기분이 묘했다. 질투도 생겼다. 형부가 나를 찾아 온 이유가 언니와 재석이 관계를 말해주고 같이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라면 잘못 찾아 온 것이다. 헤어지기 전에도 그런 권리는 없었다.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처제...우리라고 당할 수는 없잖아..”
“네?”
형부의 목소리가 은밀해지며 느끼했다. 순간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바람난 배우자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우리끼리 잘 해보자는 의도였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유치함’ 이었다. 솔직히 나랑 한번 하고 싶다고 하는 것만 못했다.
“처제...나 처제 사랑하는 거 같아..”
“...........”
형부와 언니가 스와핑을 하는 것은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자유다. 나 역시 마음에 맞으면 누구 랑도 잘 수 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원하는 마음. 호감 또는 애정으로 자는 것이지 복수심이나 다른 이유로 관계를 갖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저번 스와핑에서 배웠지 않은가?
“언니랑 잘 이야기 해 보세요...그리고 전 재석이가 다른 여자랑 무슨 일을 하던 상관하지 않으니까...다시는 저에게 그런 얘기 전하지 마세요..”
“..............”
“먼저 일어나 볼게요..”
한마디로 기분 더럽다. 언니나 재석이보다 그런 소식을 전해준 형부가 제일 싫다. 같은 상처를 당한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 있지만 그걸 바라고 처신하는 듯 한 행동은 아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스스로 상처를 광고하고 다니는 행동은 동정은 고사하고 추했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뭐 좋은 일 있어?”
“응? 아니...별로...”
“그러지 말고 말해봐..나 우울해..기분 전환 좀 하자..”
“으응...아무것도 아냐..”
슬기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언제나 보는 얼굴이고, 습관처럼 붙은 미소인데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가슴 안에서 터질 듯 충만한 기쁨이 조금씩 새는 것 같다고 할까. 형부 때문에 우울한 기분을 슬기의 기운으로 떨치고 싶은데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건 우리 사이의 벽처럼 생각되어 섭섭해지려고 했다.
“알았다. 혼자 마음껏 기뻐해라..난 잠이나 잘래..”
“........응...”
딸그락..딸그락..
점심을 먹고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두통수가 간지러웠다. 뒤에는 설거지를 하는 슬기뿐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돌아 봤다. 슬기가 설거지를 하면서 돌아보고 있었다.
“왜? 할 말 있어?”
“으응...오늘은 안 나가?”
“말하지 않았나? 어제부로 끝났어..”
“...그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지인을 통해 영화 촬영장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어제로 모든 촬영이 끝났다. 몇 달 동안 학교와 과외만 다니며 열심히 매달렸다. 아마 추석 무렵에 개봉할 것이다.
“할 말 있으면 해..”
“.....사실은....”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나...재석이...과외 다시 맡았어..”
“.............”
“미안해...”
“언제부터?”
“.........방학...부터...”
십 중 팔구는 거짓말이다. 슬기는 거짓말에 능숙한 애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나도 재석이를 가로챈 경력이 있고 슬기가 꼭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슴은 아팠다.
“그럼...자리 피해줘?”
“...아니..그런 건 아니고...”
“언제 오는데?”
“....곧...”
딩동~
“.............”
죽여주는 타이밍. 우연은 아니다. 슬기는 최후의 순간까지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어 입을 연 것이 분명하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슬기대신 문을 열어주자 역시나 놀라는 재석이가 있었다.
“상미누나...잘 있었어요?”
“응. 너도 건강해 보이네?”
“저야...뭐...참. 누나 영화 찍는다면서요? 잘 되 가요?”
“뭐? 호호. 난 그냥 아르바이트야..”
다시 보는 재석이는 그 사이 키가 나랑 비슷해 보일 정도로 커졌고 더욱 어른스럽게 보였다. 헤어진 연인이라기보다는 과거 친했던 누나 정도로 대하는 것이 은근히 섭섭했다. 나 역시 급격히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고 친동생처럼 대했다. 그런 나와 재석이 사이에서 슬기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해 하며 허둥거렸다.
“슬기누나...오늘은 커피 안줘요?”
“아...줄게...기다려..”
재석이가 슬기를 향해 미소 지어주자 그것만으로 슬기는 침착함을 찾아 갔다. 나를 향했던 미소가 슬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칼날이 되어 날아왔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커피를 마시면서 재석이는 가방에서 수북한 종이를 꺼내 슬기에게 건넸다. 숙제였다.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우리 중 슬기는 그 종이들 때문에 해방을 맞이하고 재석이는 여유 있게 커피를 마셨다. 나는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슬기가 내놓은 과일도 먹어 보지만 뭐를 해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영어는 잘할 거고..국어는 어때?”
“그냥 그래요..국어는 열심히 해도 금방 좋아지지 않지만 쉽게 점수가 떨어지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전처럼 지수. 지선이랑 같이 과외 하는 건 어때?”
“네? 생각해 볼게요..”
슬기 눈빛이 얼굴을 치고 갔다. 입에서 나오는 데로 떠들었던 까닭으로 또 슬기를 방해한 꼴이 됐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진심이 담겼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재석이와 슬기가 가까워지는 것이 아직은 싫었다. 아마도 그런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는 재석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잘했어..음..오늘부터는 미분이다.”
“네..”
공부를 시작하는 그들을 두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슬기가 설거지를 하면서 나를 돌아봤던 그대로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앞에 두고 그들을 돌아본다. 10분씩 쉴 때면 어김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5시간을 보내고 슬기는 저녁을 준비한다.
“과외비를 얼마나 받는 거야?”
“...............”
“왜?”
“그냥 봐주고 있어요..”
“.............”
오늘 수업을 보면 5시간이었다. 작은 노력은 아니다. 더욱이 재석이 주려고 과일을 준비했다. 요즘 과일이 얼마나 비싼지 술 먹다가 과일안주라도 나오면 다들 악착같이 먹어댄다. 그리고 저녁으로 준비한 것은 삼계탕이었다. 재석이는 닭다리 하나를 들고 아무 생각 없이 먹지만 그게 다 정성이고 돈이었다.
“..............”
당연히 닭은 작은 걸로 두 마리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찬밥덩어리 같은 신세였다. 심술보가 부풀어 오르면서 한 마리를 홀랑 먹어버렸다. 사랑이 듬뿍 담긴 닭고기가 솜사탕처럼 입에서 살살 녹는다.
“슬기누나도 좀 드세요..”
“으응..난 괜찮아..많이 먹어..”
슬기는 재석이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보이고는 나에게는 무시무시한 도끼눈 필살기를 날렸다. 순간적으로 심술보가 터지는 위기가 있었지만 나 가슴에는 심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투도 있었다.
“나가봐야겠다..”
“어디 가게?”
“응...사촌언니 좀 만나볼까 해서..”
“그래..”
그렇게 말하고는 재석이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슬기가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묵묵부답이었다. 재석이 눈이 훑듯 몸을 속옷차림의 몸 위를 지나간다. 그런 재석이를 자극시키고 싶어 제일 짧은 치마에 간단한 민소매 블라우스만 걸치고 몸매를 뽐냈다. 유난히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와야만 했다.
‘진짜 언니한테나 가봐야겠다..’
언니는 회사에 있었다. 퇴근시간인데도 할 일이 남았다며 1층 로비에서 보자고 한다.
“어쩐 일이야?”
“응..어제 형부 만났어..”
“왜?”
“..언니 바람피운다고 나랑 잘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뭐?”
“재석이 만나?”
“........그이가 그래?”
“응...”
“...........”
“형부 말...사실이야?”
“.....응.....”
“어떻게...만나는데 형부가 바람났다고 그래?”
“....그냥...좋아...”
예상대로였다. 사람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건 천사나 악마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수호악마는 슬기를 미워하고 있었다. 재석이와 언니의 관계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비정상적인 관계였고 정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슬기는 다르다. 친구의 마음으로 그들의 연애가 험난할 것을 걱정했었지만 100% 헤어지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행복을 축복하고 기원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심정이었고, 오히려 방해하고 싶었다.
“나...재석이..못 잊었어..”
“...........”
“언니가 도와줬으면 해...”
“뭘...어떻게?”
“그걸 뭐라고 해? 셋이서 관계를 갖는 걸?”
“3S?"
"그걸 뭐라고 하든...“
“미쳤어..재석이를 두고 사촌 자매가 같이 하자고?”
“스와핑까지 했는데..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
남자를 안다. 나나 언니가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재석이 마음에서 슬기를 막을 수 없다. 새로운 여자. 그것도 처녀였다. 그리고 슬기는 헌신적이었다.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자극. 쾌락뿐이었다.
“그보다 형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글새...”
“형부가 알 정도로 정신 못 차리고 빠져 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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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의 말이 어이없었다. 그리고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했다. 죄의식이나 불안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감정들은 처음에나 갖는 것이지 여러 번 반복되면 무뎌진다. 1년을 넘게 해온 부부교환은 이정도의 일로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뒷조사를 했을까?’
갑작스럽게 뒷조사를 했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 보다는 항상 감시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뒷조사를 한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석이를 만나고는 있었지만 그 전에도 다른 남자를 만났다. 차이가 있다면 남편이 알고 있느냐 모르냐는 것뿐이다. 감시는 믿지 않는다는 의미다.
뒷조사를 계속 용역업체에 의뢰했다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경제력을 공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내가 몰랐을 리 없었다. 남편 월급보다 내 월급이 더 많았다. 그의 비상금이라고 해 봐야 뻔한 금액이었다.
‘뭔가 있는데...’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그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남편은 건축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전기 설비 분야였다. 아이가 없어 방 3개 중 안방은 공용으로 쓰고 작은방은 남편이 서재로. 건넌방은 내가 쓰고 있었다. 비밀이 있다면 작은방 안에 있을 것이다.
‘음....’
전기 관련 전공서적과 각종 기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평소에 이 방만은 나도 치우지 못했다. 버릴 물건과 정리할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뭐를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
찾을 대상을 모르지만 이상한 것은 있었다. 소리였다. 많은 날벌레들이 만들어내는 것 같은 진동음. 컴퓨터가 돌아가면서 내는 기계음 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켜져 있는 컴퓨터는 이상한 일이다. 누구도 아무 이유 없이 출근하면서 컴퓨터를 켜놓고 가지 않는다. 바꿔서 생각하면 컴퓨터가 켜져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꺼져 있는 모니터에 전원을 넣자 나오는 것은 4개로 나눠져 보이는 집안의 모습이었다. 4개로 분할된 화면은 잠시 후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화면은 계속해서 변했다. 전부 12개였다. 안방과 거실이 4개씩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였고, 욕실에 1개. 주방에 1개. 건넌방에 1개. 이방에도 침대를 겨냥해서 1개가 있다.
그 후부터는 뭐를 찾아야 하는지 명확해 졌다. 그 컴퓨터와 연결된 또 다른 컴퓨터를 켜고 파일을 뒤졌다. 스와핑 때의 일들이 녹화되어 있었다. 기억과 맞춰봤을 때 전부는 아니다. 남편 취향에 따라 선택된 영상들이었다. 상미와 했던 영상도 남아 있다. 남편에게 안대를 씌우고 두 남자를 탐했던 때의 기록도 있었다. 이로서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피식~
사랑보다는 쾌락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었다. 나 역시 새로운 남자가 주는 신선한 자극을 탐닉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1년이 넘어가면서 싫증이 났다. 무엇보다 가슴이 피폐해졌다. 남편은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피할 때가 많아졌고, 다른 남자들은 처음에는 다정하고 열정적이지만 한번 관계를 갖고 나면 급격히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들에게 나는 창녀 대신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남편의 눈을 가리고 재석이와 둘이 그를 희롱했을 때. 가학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전율했다. 원초적 배덕감에 몸서리쳤다. 남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때 그랬다. 그러나 남편은 알고 있었다.
남편을 속였고, 또 들켰다. 미안해야 할 일이지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을 속이면서 미안한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이 아무런 표시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낼 정도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참았다? 아냐...그렇다면 상미를 찾아가지도 않았겠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구나...’
느끼고는 있었다.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렇게 현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데로....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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