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5부 4장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다 내려왔고, 여자를 데려다 줘야 할 터미널은 온 만큼만 더 가면 되었다. 온 거리가 아니라 온 시간만큼. 시각은 열한 시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열한 시 차를 타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이 필요했지만 열한시 오십분 차를 타려면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가만히 서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럴 때 아마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비흡연자인 나에게도 바람은 차별 없이 상쾌했고, 시원한 바람을 쐬자 잡생각도 사라지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팔을 벌리고 숨을 크게 쉬며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덜컥~ 문 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여자가 내 등 뒤에서 말했다.
- 타세요.
- ......
- 어서요...
- 그럼, 다시 가 볼까?
- 저 기억하게 해 드릴게요.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여자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 집적거리며 도발할 때에는 눈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그때는 보이지 않았다.
- ......
- 타세요. 시간 없어요.
- 타야 되나? 여기선 안되고?
- 저는 과장님처럼 대담하지 못해서요...
대담하다...? 무슨 뜻일까? 진짜로 내가 생각하는 그걸 하려는 걸까? 여자가 문을 연 채 잡고 있는 게 왠지 뒷좌석에 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뒷좌석에 올라타자 수민이와 했던 카섹스가 생각났다. 수민이를 잊으려면 이 차도 처분해야 하는 걸까... 이 깨끗한 차를? 아버지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이걸 처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그 잠깐 사이에 스쳐 갔다. 수민이 생각에 또 진저리를 쳤다. 이도 악물었었나 보다. 여자는 이미 옆에 타고 있었다.
- 반응이 아까보다 더 세네요? 애인이랑 차에서도 했어요?
- 했지.
- 뒷좌석에서 했나 보죠?
- 너 앉은 자리에서, 아래만 벗기고.
- 입으로도 했나요?
- 당연하지. 내가 다 빨아먹었지.
- 흥~
내가 의도를 가지고 대답하자 여자의 눈이 잠깐 커졌지만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금새 원래 표정이 되었다. 또 대답이 없다. 여자가 창밖을 잠시 살피더니 눈을 찌푸렸다. 왜 바깥 눈치를 보는 거지? 진짜 그걸 하려는 건가...?
- ......
- 왜?
- 좀... 너무 밝아서...
- 밝은 줄 모르고 타라 그랬어?
- 그래도...
- 난 하는 걸 보는 게 좋아. 밝아야 보이지...
여자가 그걸 하려는 건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너무 앞서 나간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내 바지 앞섶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그거였나? 여자가 허벅지에 손을 얹고 쓰다듬기 시작해서 점점 사타구니 쪽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지퍼를 열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벨트부터 푸는데, 얘는 특이했다. 여자는 지퍼만 열고, 내 자지를 끄집어냈다. 내가 기억하는 한, 팬티 앞의 구멍으로 그걸 꺼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여자의 손길이 닿은 자지에는 슬슬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봤다.
기억? 아까부터 벌써 진작에 남았다. 그것도 강렬하게. 정아... 성이 뭐였는지 몰랐지만 그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자가 반만 꺼낸 자지를 잡고 반만 훑으며 말했다.
- 사람 오는지, 좀 보세요.
- 와도 상관 없어.
- 그래도...
- 말했잖아, 보는 게 좋다고. 그게 설마 사람 오는지 보는 거겠어?
- ......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허리를 숙여 자지를 핥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레, 여자에게 들릴까봐 아주 조심스레 숨을 내뱉었지만 소리가 크게 났다. 흐으음...
처음 만난 날,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내 자지를 빠는 여자... 이틀 연속으로 처음 만난 여자에게 빨리는 자지... 흥분할 만했다. 여자는 자지를 입에 넣고 한번 쭈욱 빨고는 잠시 입을 떼고 물었다.
- 어때요?
- 응...?
- 좋아요?
- 아니... 한 게 뭐 있다고...
- 남자한테 해준 적 별로 없어요. 쭙... 후움~
겨우 한번 빨고는 좋으냐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는 엉뚱한 대답을 하고 다시 자지를 물었다. 무슨 말일까? 특별히 해주는 거니까 고마워하라는 건가? 영광이군... 여자는 열심히 빨았지만 반만 꺼내고 귀두만 빨아서인지, 자극은 별로였다. 아니, 여자에게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환한 대낮에 넓은 길가라 신경이 쓰여서 느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유있게 느낄 수 있었던 전날 밤의 블로우잡이 훨씬 좋았다. 자지를 잡고 기둥도 핥고, 불알도 핥고 빨고... 지금 이 여자는 귀두만 쪽쪽... 그래도 그 순간, 여자의 블로우잡은 세계 최고였다. 현재 내가 받고 있는 블로우잡이었으니까. 여자도 최고였다.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쨌든 지금 현재 내 좆을 물고 빨고 있는 여자니까...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자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귀두만 쪽쪽 빨던 여자가 갑자기 혀놀림을 멈추더니 잠시 후 자지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부릅뜬 눈초리가 매서웠다. 왜지? 머리 쓰다듬는 게 불쾌했나? 그러나 다음 순간, 어제 빨린 다음 안 씻었다는 생각이 퍼뜩 났다.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차차... 웃을 때가 아닌데...
- 피식~...
- 어떻게... 그대로 나한테...
- ......
여자가 말을 맺지 못했다. 어젯밤 여자의 침 냄새나 맛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제 국어선생에게 빨린 다음 안 씻고 그냥 잤다. 아침에도 씻지 않았다. 하지만 땀도 났을 테고 땀에 절은 시큼한 사타구니 냄새가 더 날 텐데, 여자는 약한 냄새를 먼저 찾아냈다. 다른 여자의 냄새를.
경쟁해서 수컷을 차지하려는 암컷의 본능일까? 아니, 그건 수컷의 본능 아니었나? 뭐, 어쨌든... 여자가 분해서 못 참겠다는 듯 입을 꼭 물고 나를 노려봤다. 제 딴에는 나름 화낸 거지만 내 눈엔 귀엽기만 했다. 달려들어 껴안고 입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눈 흘기는 여자가 왜 이리 귀여울까? 절로 웃음이 났지만, 화낼 때 귀여운 여자는 더 귀엽게 만들어 줘야 하는 법이다.
- 픽~ 그래서야 내가 기억할 수 있겠어?
- 이건 무효예요. 다음에...
- 다음? 풋~ 다음 기회를 또 달라고?
- 이건 무효라니까요?
- 무효든 아니든, 내가 왜 기회를 또 줘야 되지?
- 게임은 공정해야 되니까.
- 게임?
- 게임이죠. 날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
- 아니지. 너를 기억하고 싶게 만드느냐 아니냐지.
-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앗차, 실수... 여자는 내가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똑똑한 여자는 예쁘고, 똑똑하면서도 내 의도대로 따라오는 여자는 더 예쁘다. 그날 그 여자가 그랬고, 그 순간 진짜 예뻤다.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별 대수롭지 않은 얘기 꺼내듯 시큰둥하게 말을 던졌다.
- 시험공부 열심히 해 본 적 있어?
- 시험...공부?
- 한번만 쓱 훑어봐도 머리에 남는 과목이 있는 반면에, 하루 종일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과목도 있지.
- 내가... 그렇다는 거예요?
- ......
-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돼요?
- 뭐, 책도 펼치기 싫은 과목보다는 그래도 나아.
- 허~ 어떻게 그런...
여자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나를 째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말 그대로 씩씩대면서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치켜뜬 눈은 무섭기는커녕 그저 예쁘기만 했다. 얘는 자기가 발끈할 때 예뻐 보인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그래도 너무 삐지게 만들면 안 된다. 좀 달래 줘 볼까...
- 네가 그런 과목이라는 건 아니야. 전에 그 과목이 워낙 특별했을 뿐이야.
- 그렇게 예뻤어요?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 비교? 걔랑 비교하려고 들면 넌 평생 못 이겨.
- 평~생? 하~!
- 깨어 있을 땐 항상 펼쳤던 책이야. 밥보다 좋아했던 과목이고, 침대에서도 보다가 잠든 챕터야...
- 그래 봐야, 지금은 못 보잖아요.
기대한 대답이었다. 아니, 내가 유도한 대답이었다. 사실 그 말이 나오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한 방 맞은 건 나였다. 내가 말하면서 이미 수민이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젠장... 자충수를 두었다.
- ......
- 쯧... 그런가...? 후우~...
그랬었다. 일어나면 수민이를 떠올렸고, 하루종일 수민이를 생각하며 지내다가 수민이와 통화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고, 잠들면 수민이 꿈을 꾸었었다. 그랬었는데... 수민이는 지금 내 곁에 없다.
고개를 젓지 않았다. 입술도 깨물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알아챘다. 사실은 살짝 눈을 감았고, 악물지는 않았어도 입에 힘은 좀 들어갔었다. 한 방 먹은 건 나였는데, 내 표정으로 기분을 알아챈 여자가 오히려 기세가 죽었다. 고개를 내 얼굴 앞으로 좀 들이밀기까지 하며 내 눈치를 살핀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자극...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 괜찮아. 네 탓 아니야.
- 그럼... 앞으로 다른 책은 아예 안 펼쳐볼 건가요?...
- ......
여자는 발끈해서 뾰족해졌던 게 좀 무뎌졌지만,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물었다. 내가 한 비유를 잡고 늘어졌다.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둥근 눈이 여전히 예뻤다. 다른 책? 얘라면... 아침마다 생각나고, 하루종일 생각하다가, 생각하며 잠들고, 꿈꿀 수 있을까? 얘가 내 인연일까? 너무 앞서 나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내가 대답이 없자 여자는 한번 더 들이댔다.
- 네? 안 볼 거예요?
- 글쎄...? 언젠가는 봐야겠지?
- 그 언젠가가... 지금일 수도 있는 거죠?
- 지금?
- 네, 지금...
- 그럼... 봐야 할 책이 하나 생긴 거네?
- 후훗~ 네.
- 책 내용은 언제 보여주게?
- 뭐, 다음 기회에요...
호, 요거 봐라? 볼수록 더 맘에 드는데? 여자는 다음 기회를 굳이 다시 확인했다. 아직도 화난 척, 눈에는 힘을 주고 있었지만, 앙다문 입이 실룩거리고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버팅기는 척하지만 살짝만 당겨도 끌려오는, 귀여운 여자였다.
- 다음...? 다음이라...
- ......
- 그럼, 오늘은 이만 정리해야겠지?
힘을 잃고 늘어진 자지를 내려다 보았다. 여자가 손수 자지를 도로 제자리에 넣어 주었다. 넣을 때 잘 들어가지 않아서 아프기까지 했다.
그러게 팬티 구멍으로 그거 꺼내는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자꾸 만지면 더 꼴려서 더 안 들어가, 이 바보야... 얼굴은 예뻐 가지고 그거 하나 못 하고... 킥, 웃음이 났다. 여자가 눈치 보듯 쳐다보았다. 자기가 손을 대서 뭔가 불편하게 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손으로 팬티 안을 정리하고 지퍼를 올렸다. 고개를 드는 여자의 머리를 당겨 키스했다. 여자가 입에 힘을 주어 다문 채 키스를 받았다. 거부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 입술까지만이었다. 혀를 빨기는커녕 이를 꽉 물고 열어 주지도 않았다. 살짝 입만 맞추고 놓아 주었다. 힘주는 입술에 키스하는 건 맛이 없으니까.
그런 애들이 있다. 남자의 것을 다 빨아먹으면서도 그걸 먹은 입에 남자가 키스하려 하면 싫어하는. 한번도 왜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순간 물어볼 이유가 뭐가 있나? 빨고, 박고, 싸고... 쌌으면 그 기분에 취해야지, 공부할 일 있나?
......
창문을 열고 달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렸다. 천천히 가도 10분, 15분이면 가니까. 여자는 창 밖을 보며 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러다가 또 언제 불쑥 치고 들어올까?
- 어땠어요?
그럼 그렇지... 여자는 창턱에 팔꿈치를 짚고 기댄 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 뭐가?
- 애인이랑 차에서 했을 때...
- 몰라서 물어? 짜릿했지.
-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 내가 싫어졌대.
- 과장님은요?
- 나? 훗... 나 혼자 계속 좋아하면 뭐?
- 하긴...
- ......
- 난 어땠어요?
- 뭐가?
- 비교해 준다면서요.
- 비교가 안 돼.
- 어머? 내가 그렇게 못했어요?
여자가 발끈해서 물었다. 힐끗 본 여자의 얼굴에서는 생글거리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부릅뜬 눈... 그러나 눈을 흘길수록 귀여운... 얘는 타고 난 모양이다.
- 그게 아니라...
그때 여자의 전화가 울렸다. 서팀장의 전화라고 직감했다. 서팀장에게 말한 대로 마구 밟았으면 터미널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도 가고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여자가 잘 대답하기를 속으로 바랐다. 주고받은 대화로 미루어볼 때, 멍청한 여자는 아닌 듯 보였으니까.
- 어, 오빠...
- ......
- 터미널. 열한시 차 놓쳤어.
- ......
- 다음 차 타야지... 뭐? ... 야, 과장님 사고날 뻔했어어~, 막 밟다가아~... 그런데, 오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 ......
- 그래... 그렇다니까... 응? 저기 매점에서 물 마시고 있는데?.... 나? 표 사 갖구 앉아 있지.
- ......
- 응, 다음 주에는 오빠가 올라올 거지?
- ......
- 그래, 오빠도 잘 있어... 응~
여자는 태연한 얼굴로 인사하고 끊었다. 여자는 터미널에 도착한 것처럼 얘기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잘 대처한 여자가 더 예뻐 보였다. 여자가 전화기를 백에 넣으며 다시 물었다.
- 네? 어때요?
- 뭐가?
- 내가 그렇게 못했냐구요.
- 뭘 하기나 했어야 비교를 하지.
- 못한 건 아니란 얘기죠?
- 평가할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없잖아?
- 기억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 기억? 후후후...
뭐라고 평가할 만큼 하지도 않았으면서 이 여자는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나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걸까? 좀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 왜 웃죠?
- 겨우 그 정도로 내가 널 기억해야 한다면 말이야... 응?
- ......
- 어젯밤에 내 정액을 삼킨 여자는 내가 왜 이름도 얼굴도 기억을 못 할까?
- 어머? 먹기까지?
- 네 말대로라면, 어젯밤 여자는 내가 확실히 기억해야 되는 거 아니야?
- ......
- 응? 어때? 그럴 것 같아?
- 그건...
- 훗~
- ......
여자는 뭐라고 대꾸라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수민이의 기억에 진저리를 치는 건 수민이와 나누었던 섹스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한번쯤 벗기고 안은 여자, 블로우잡을 한 여자, 섹스한 여자... 그런 여자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나? 기억에 남은 여자들 시리즈 안 끝나게...
- 그럼...
- ......
- 이렇게 물을게요. 나 예뻐요?
- 응,
- 진짜?
- 응. 예뻐.
- 잉~, 이예뿌어~... 귀찮으니까 대충 대답하구, 치...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토라졌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마치 오래 만나 온 친한 사람에게 투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친해진 것이다. 나도, 얘도... 얘도? 과연 얘도 그런 걸까? 하긴, 잠깐이지만 자지를 빨고 빨린 사이니까... 여자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거였던 모양이다. 자기가 예쁜지...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예쁘다는 말에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척하는 여자는 정말 예뻤다. 당장 덮쳐서 벗기고 싶을 만큼. 입을 삐죽이는 것도 토라진 게 아니라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삐진 척하면서 곁눈질하는 눈이 잠깐 사이에 더 예뻐졌다.
- 안 믿어도, 뭐... 어쩔 수 없고... 훗~
- 어쩔 수 없고... 킥~
여자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웃는 것도 둘이 동시에 웃었다. 그러나 여자는 잠깐 웃고 또 물었다. 참 집요한 여자였다.
- 그 애인보다 예뻐요?
- 후후후... 이 아가씨, 차암~
- 왜요?
- 자꾸 그 여자를 걸고 넘어지는 건 너한테 도움이 안 돼.
- 왜요?
- 걔는 내 맞춤형이었으니까.
- 맞춤형?
-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알려줬어. 키스부터... 걔는 모든 게 내가 처음이었어.
- 키스부터... 어디까지?
- 어디까지? 뭐... 애무도 그렇고, 섹스도 그렇고...
- 오럴도?
- 당연하지. 그 좋은 걸 빼고 했겠어?
- 와우~
- 그런 맞춤옷이랑 한번 걸쳐본 옷이랑... 비교가 되겠니?
- 한번 걸쳐본 옷? 허~, 너무한 거 아니예요?
여자의 억양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얘, 너무 발끈하는 거 아냐? 어쨌든 이제 좀 달래줘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책이며 옷이며... 애인의 기억을 비유한 것 뿐이었는데 이제 애인은 없어지고 옷만 남았다. 비유를 오래 잡고 늘어지면 뭘 비유한 건지 잊게 된다. 그 전에 원래 말하던 것으로 돌아와야 했다.
- 그래도 뭐... 굳이 비교하면 네가 무조건 이겨.
- 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 무조건 네가 이긴다고. 모르겠어?
- 그 여잔 이미 없으니까?
- 딩동댕~
- 헤헷...
죽일 듯이 언성을 높이던 여자는 다음 순간 또 히죽거렸다.. 좀 더 대들어야 좀 더 약올릴 텐데... 그러나, 여자가 곱게 나오면 나도 곱게 받아줘야 했다.
- 얼굴도 네가 훨씬 예쁘고.
- 진짜?
- 너, 자신 없구나?
- 뭐가요?
- 네가 진짜 예쁜지...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예쁘냐고 자꾸 물어보니까.
- 그거야 뭐...
- 근데 말이야...
- 근데?
말하면서, 여자를 한번 물끄러미 쳐다보고 고개를 도로 돌렸다.
- ?~ 아니다. 됐다.
- 말해 봐요.
- ......
- 내가 훨씬 예쁜데, 뭐? 몸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을 걸요?
빠지지 않는다... 하긴 그랬다. 객관적으로 봐도 사실이었다. 여자의 얼굴과 몸매는 어디 내놔서 빠지기는커녕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 후후후~... 그런 얘기가 아니라...
- 아니면 뭐?
- 누가... 내 기억에 들어온다고 해서, 응? 있던 기억이 없어질까?
- ......
- 후후후...
- 그렇군요.
- 그런 보장만 있다면 억지로 외워서라도 집어넣을 텐데, 그지?
- 날 기억할 거라는 말로 들어도 되죠?
- ......
요것 봐라? 여자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깜찍했다. 옛날, 술자리에서 싯구를 주고 받았다던 선비들이 그런 기분이었을까? 여자가 새삼 더 예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터미널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고, 비유를 주고받는 것도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은근한 재미는 없어도 직설적으로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여자가 못 참고 또 먼저 들이댔으니까.
- 네? 나, 예쁘다는 거죠?
- 예쁘냐고 그만 좀 물어봐라.
- 왜요?
-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넌 거울도 안 보니?
-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니까...
- 누구한테?
- 뭐... 누구든.
-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남자라도 생긴 거야?
- ......
-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 예뻐. 진~짜 예뻐. 애인 없으면 차지하고 싶을 만큼. 됐니?
여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입술을 꼭 다물고 힘을 주었지만, 눈가가 실룩이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화내는 예쁜 여자는 없다. 못생긴 여자에게 예쁘다고 했다가는 화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거냐고 은근히 돌려서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예쁘고 깜찍한 여자는, 자기는 말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끝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하~ 고 년, 참...
- 애인 있으면요?
- 있으면? 음... 빼앗아서라도 갖고는 싶은데... ?~
- 호오... 뺏을 자신은 있구요?
- 자신? 글쎄...?
- 치, 자신도 없으면서...
- 후후후... 근데, 결혼할 거니?
- 당연히 해야죠.
- 할 건 알지. 누구랑?
- 깔깔깔... 하아~ 졌어요, 진짜... 근데 정말, 한 번도 안 져주실 거예요?
여자는 지금 있는 애인, 즉 서팀장이랑 결혼할 거냐는 질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을 하긴 할 거라는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런 말장난이라면 나도 꽤 좋아하지. 암~ 좋아하고 말고. 연수원에서 나올 때, 팔짱 끼고 가자며 강력한 한 방을 날렸던 게 생각났다. 그래, 그 빚도 갚을 겸...
-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다?
- 그렇다고 봐야죠.
- 좀 전에 통화한 남자는?
- 그 남자는 그 남자고.
- 그럼...
- 그럼?
잠시 시간을 둔 다음, 목소리를 낮췄다. 횡단보도 앞에 천천히 차를 세웠다. 보행신호가 들어왔고, 보행자는 없었지만 내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아까 얘기하며 볼 때 노란불로 바뀌고 있었고, 조금 전부터 이미 빨간 불이었다.
여자는 신호등을 못 봤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다시 날 쳐다볼 때,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 물었다. 여자에게는 그윽한 목소리로 들리길 바랐다. 최대한 그윽하게 들려라...
- 결혼... 할래?
- ......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자는 입을 헤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잔뜩 커진 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보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술 사이로 그 하얀 이가 빛나겠지? 돌아보고 싶은 걸 꾸욱 참았다. 유치한 게임이었지만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게임에 지는 것보다도, 여자의 빠알간 입술을 보면 키스하고 싶은 걸 참지 못할 것만 같았다.
- 진심... 이예요?
- ......
- 우린 아직 서로 잘...
여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묻던 그때, 딱 맞추어 신호가 바뀌었다. 가속페달로 발을 옮겨 천천히 출발했다. 눈에도 힘을 빼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고개를 살짝만 돌려 힐끗 한번 바라보며. 최대한 시큰둥하게 말했다.
- 아깐 당연히 한다며?
- 네...?
- 피식~...
- 허~... 허허... 하하깔깔깔...
여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잠시 입을 헤벌렸다가 이내 자지러졌다. 무릎 위의 백을 두드리고 발까지 구르며 웃다가, 사래가 들려 콜록대며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뜻밖이었나? 장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의외로 많이 당황했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그저 장난삼아 나를 한번 꼬셔 보려고 들이댄 건 아닌 듯했다. 내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확신이 있었다. 흠... 아직 서로 잘 모른다는 건 앞으로 더 알고 싶다는 얘기겠지?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아... 당했네...?
- 훗~
- 과장님, 정말 나빠요. 큭큭~
- 뭐가? 후후후...
- 내 말엔 안 걸려들고, 나는 골려먹고.
- 안 속은 게 뭐가 나빠? 속은 게 바보지.
- 어머? 치~
- 아까 진 빚 갚은 거야.
- 빚이요? 무슨 빚?
- 팔짱 낀 거.
- 아~ 그거, 킥~
말도 잘 통하는 여자였고, 그 얼굴에 그 몸매에 용모도 그 정도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치고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나한테 관심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자는 섹시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귄다’ 라는 생각은커녕 그 비슷한 것조차 머리 근처에도 오지 않았었다.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이 정도면 최상급인데... 수민이가 남긴 흔적이 커서일까? 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어 수민이 생각을 지웠다.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왠지 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여자는 잠시 후 힘을 빼고 등받이에 기댔다. 나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왜 날 째려봤을까? 난 또 왜 여자의 그 눈길에 긴장했을까...?
작은 시골 터미널까지는 금방이었다.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터미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힘주어 바라보던 눈매는 벌써 순해져 있었다. 째려보던 눈초리가 사랑스런 눈으로 바뀐 여자는 더 예뻤다.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자가 입을 열어 내 생각을 막았다.
- 고마워요.
- 응? 응, 그래.
-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아요?
- 태워다 줘서는 아니지?
- 끝까지 이럴 거예요?
- 네가 끝까지 그러니까.
- 바보 같아요.
- 훗~... 후후후...
- 나 말이예요.
- 알아. 아까까진 아니었잖아? 그래서 화난 거고. 그지?
- 허~... 혹시 독심술 해요?
- 그랬으면 시간낭비 안 했겠지.
-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 네가 다 말했으니까.
- 내가요? 내가 무슨 말...?
- 그만 하자. 나 이기고 싶니?
- 이런 기분 처음이예요.
- 얼마나 다행이야?
- 뭐가요?
- 평생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어.
- ......
- 피식~...
- 좀 져 주면 안 돼요? 여잔데...
- 여자? 푸후후훗~...
- 왜 웃어요?
- 나한텐 내 여자만 여자야.
- 헤에~
낯간지럽고 닭살 돋는 멘트였지만 사실이었다. 알아들어 주기를 바랐다. 알아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여자는 반응을 보였다. 소리내어 헛숨을 삼켰다. 긍정적인 반응일까, 부정적인 반응일까...
- 어떻게...? 여자로 대해 줘?
- ......
여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술만 깨물었다. 더 몰아붙여서 좋을 게 없었다. 여자가 치떴던 눈을 내리깔고 소리죽여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었나 보군... 다음 순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 정아야?
- 네 ?!
- 나도... 너랑 얘기하는 거 재밌었어.
- 진짜?
- 음.
- 후훗, 고마워요...
- 고맙긴... 내가 고맙지.
정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듯 입에 힘을 주었다. 너라고 부르다가 이름을 부르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너도 참... 무지 고생한다. 웃음이 나오면 그냥 웃으면 되지, 왜 그렇게 애써서 참니... 그냥 웃어 주면 어디 덧나냐?
- 오늘... 진짜 이상해요.
- 알아들었으면 정아가 이긴 거야. 잘 가고...
- 전화... 할게요.
- 통화하기 불편할 텐데?
- 네? 아... 그럼, 하지 말까요?
- 그건 아니고...
- 피이~ 그러면서 뭐...
- 한참 기다려야 되겠네? 같이 있어 줄까?
- 음... 아니예요. 올라가세요.
- ......
같이 기다려 주겠다는 말에 정아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졌지만, 금새 정색을 하고 사양했다. 서팀장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똑똑한 아이였다. 그런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만큼 정아는 예뻤다. 그리고, 정아의 말투가 잠깐 새에 부드러워졌다. 마구 들이대고 치받을 땐 뾰족한 암코양이를 연상하게 하던 말투가, 언제부터인가 고분고분하고 다소곳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 나는 사실 좀 놀랐다. 처음 대화하는 사람과 그렇게 터놓고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쉽게 말을 놓은 사람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얘기가 잘 통했다. 게다가 정아는 예쁘고 섹시했다. 서팀장 애인라도 상관 없이 꼬시고 싶을 만큼. 주변 사람들이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당장 벗기고 싶을 만큼.
-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 ......
정아가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를 건네주자 자기 전화기에 한번 걸어 벨소리가 울리자 끊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내 번호를 자기 폰에 저장하고는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내가 인사하려고 내리자, 정아는 벌써 운전석 옆에 와서 서 있었다. 두 손을 모아 백을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손을 들어 정아의 뺨을 한번 쓰다듬었다. 정아는 피하거나 움츠리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어지기 아쉬웠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아의 눈에도 아쉬운 빛이 보였다. 뺨을 쓸던 손을 내려 정아의 턱을 당겼다. 정아는 힘주어 버티며 눈만 굴려 대합실 쪽을 둘러보았다. 누가 봐요... 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키스하고 싶었다.
- 숙제하려면... 잠깐이라도 훑어봐야 되지 않을까?
- ......
정아가 또 살짝 눈을 흘기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얘, 또 이러네? 좋으면 그냥 웃으면 되지, 뭘 그리 인상을 쓰고 안면 근육에 힘을 주나? 피곤하게... 그러나 정아는 잠시 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힘을 빼고 내가 당기는 대로 따라왔다.
턱만 당겨 키스하는데 정아가 한발짝 다가와 내 허리를 잡았다. 턱을 쓰다듬다가 턱선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려 정아의 목을 만졌다. 늘씬하고 긴 목의 피부가 매끈했고 손등 쪽으로 쓰다듬듯 쓸었다. 내 손톱이 스치고 지나가자 정아가 움찔거리며 떨었다.
정아의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내 혀를 밀어넣자 살살 빨기까지 했다. 넣었던 혀를 뺄 때, 정아의 혀가 따라 들어왔다. 입술만큼 부드러운 정아의 혀에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단 맛이 났다. 내 허리에 놓인 정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목을 쓰다듬던 손으로 정아의 볼을 감싸고 정아의 혀를 부드럽게 빨았다.
서팀장에게 미안했다. 미안하다... 어쩌면 더 미안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단 맛이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서팀장 같은 녀석이 이렇게 탐스러운 여자를... 정아의 입 안으로 내 짧은 혀를 최대한 집어 넣었다. 혀 밑 설소대가 아플 정도로 내밀었다. 정아는 내 혀를 지그시, 그러나 깊이 빨아들였다.
정아의 혀와 입술은 달고 맛있었다. 꿈틀거리던 아랫도리가 잔뜩 발기해 정아의 아랫배를 찌를 때쯤 입술을 떼었다. 정아는 내 아랫입술을 끝까지 빨았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정아와 눈을 마주쳤다. 발그레 상기된 정아의 얼굴이 더 섹시했다. 입술에 남은 감촉을 음미하고 있는데, 정아는 그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또 확인하려 들었다. 아, 나, 이 아가씨, 정말...
- 훑어보니까 어때요?
- 킥~... 크흐흐흐흐...
- 어떠냐니까요?
- 후후... 예뻐. 더 안 봐도 되겠어.
- 후훗~...
- 그럼... 조심해서 가.
- 네... 오빠두요.
- 응.
최대한 따뜻하게 인사를 해 주었다. 따뜻하게 들리길 바랐다. 그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내가 이름을 불러서인지는 몰라도, 정아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바뀌었다. 오빠라....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또 수민이 생각을 했다.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여자... 오빠라는 얼마만에 소리를 들어보는 거였는지... 또 수민이 생각이 났지만 다행히 진저리치지는 않았다. 호오~ 신기하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정아의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였다. 입술이 아까보다 더 예뻤다. 동그란 눈도, 오똑한 코도... 얘는 도대체 안 예쁜 데가 어디지? 어제까지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자였는데, 오늘 갑자기 정아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몇 주 동안 그냥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쳤던 여자가, 오늘은 진짜 예쁘고 섹시한, 미치도록 안고 싶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며 빤히 바라보는 예쁜 여자, 확 끌어안고 또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못 참고 거기서 벗기게 될까봐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며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 갈게.
- 네...
돌아보지 않고 그냥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돌리고 나서야 룸미러로 정아를 보았다. 룸미러에 비친 정아는 내가 차를 몰고 터미널을 나오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코너를 돌 때까지도 내 차를, 나를 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손을 모아 백을 쥐고 다소곳이 선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도 예뻤다. 다소곳한 여자, 예쁘지 않은가?
유혹하려고 들이댔으면서도 아닌 척 했던 여자, 예쁜 눈을 부릅뜨고 내 말에 꼬박꼬박 대들었던 여자, 대들면서도 끝까지 날 유혹하려 했던 여자, 그러나 결국은 꼬리를 내린 여자, 은근히 말해도 다 알아듣는 여자, 기억력도 좋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여자, 무엇보다도 말이 잘 통하는 여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확신이 들게 하는 여자... 책이며 옷이며 비유를 너무 많이 해서 얘기가 길어진 게 흠이었지만, 즐거운 대화였다.
연수원에 들어서자마자 서팀장이 주차장 쪽으로 달려왔다. 아까 정아와 키스할 때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던 서팀장은 이미 사라지고, 오늘따라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던 우직하고 성실한 서팀장만 눈에 들어왔다.
- 과장님, 괜찮으세요?
- 응? 뭐가?
- 사고 났다고...
- 사고? 아... 사고난 거 아니야. 날 뻔! 했지...
- 아, 다행이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 이런...? 그게 왜 서팀장 때문이야?
- 그래도요...
- 정아씨나 많이 달래 줘. 좀 놀랐을 텐데.
- 예? 아, 예....
사고는 무슨 사고, 정아가 지어낸 얘긴데... 서팀장이 더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해 놓고 바로 그 순간 후회했다. 서팀장이 정아를 생각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질투가 났다.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 참, 원장님은 무슨 말씀 하신 거야?
- 네? 아.., 교육관 애들 요즘 좀 어떠냐고요.
- 좋은 소식은 없고?
- 좋은 소식이라니요?
- 난 또... 원장님이 일부러 불렀다길래 좋은 얘기 하실 줄 알았지...
- 과장님이 제 얘기 잘 해주시는 거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헤헤...
- 고맙긴... 이따가 시원하게 맥주나 한 잔 하자.
- 네엡~
원장은 부장과 나에게는 승진 방침을 말했지만, 당사자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런 걸 미리 알려주면 발령이 날 때까지 직급이나 호칭이 서로 애매해지기는 한다. 몇 명 안 되는 조직이고 서팀장과 애매해질 직급의 직원은 없는 터라 딱히 애매해질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켜가는 건 좋은 거였다. 또 원칙을 떠나서, 원장이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는 건 경우가 아니었다.
서팀장은 과장으로 직급이 바뀌게 되었고, 조만간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두 가지 다 모르고 있었다.
그 전부터 차 안에 있던 반쯤 남은 생수병을 들고 내려 퉁퉁 치며 들어갔다. 서팀장이 그 소리에 흘끗 돌아보았다. 정아가 서팀장과 통화할 때 내가 생수 사서 마셨다는 얘기를 했으니, 증거를 보여줘야 했다. 서팀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쓰였다. 물론,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거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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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좀 많네요. 중간에 끊을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
아틀라스님 / 지난번과 똑같은 댓글이군요. 진짜 삐지신 듯... 진짜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데...
소돼지막창님/ 졸라 재밌다는 댓글에 신나서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부감과 근친상간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궁금해서요. ^^;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다 내려왔고, 여자를 데려다 줘야 할 터미널은 온 만큼만 더 가면 되었다. 온 거리가 아니라 온 시간만큼. 시각은 열한 시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열한 시 차를 타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이 필요했지만 열한시 오십분 차를 타려면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가만히 서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럴 때 아마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비흡연자인 나에게도 바람은 차별 없이 상쾌했고, 시원한 바람을 쐬자 잡생각도 사라지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팔을 벌리고 숨을 크게 쉬며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덜컥~ 문 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여자가 내 등 뒤에서 말했다.
- 타세요.
- ......
- 어서요...
- 그럼, 다시 가 볼까?
- 저 기억하게 해 드릴게요.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여자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 집적거리며 도발할 때에는 눈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그때는 보이지 않았다.
- ......
- 타세요. 시간 없어요.
- 타야 되나? 여기선 안되고?
- 저는 과장님처럼 대담하지 못해서요...
대담하다...? 무슨 뜻일까? 진짜로 내가 생각하는 그걸 하려는 걸까? 여자가 문을 연 채 잡고 있는 게 왠지 뒷좌석에 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뒷좌석에 올라타자 수민이와 했던 카섹스가 생각났다. 수민이를 잊으려면 이 차도 처분해야 하는 걸까... 이 깨끗한 차를? 아버지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이걸 처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그 잠깐 사이에 스쳐 갔다. 수민이 생각에 또 진저리를 쳤다. 이도 악물었었나 보다. 여자는 이미 옆에 타고 있었다.
- 반응이 아까보다 더 세네요? 애인이랑 차에서도 했어요?
- 했지.
- 뒷좌석에서 했나 보죠?
- 너 앉은 자리에서, 아래만 벗기고.
- 입으로도 했나요?
- 당연하지. 내가 다 빨아먹었지.
- 흥~
내가 의도를 가지고 대답하자 여자의 눈이 잠깐 커졌지만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금새 원래 표정이 되었다. 또 대답이 없다. 여자가 창밖을 잠시 살피더니 눈을 찌푸렸다. 왜 바깥 눈치를 보는 거지? 진짜 그걸 하려는 건가...?
- ......
- 왜?
- 좀... 너무 밝아서...
- 밝은 줄 모르고 타라 그랬어?
- 그래도...
- 난 하는 걸 보는 게 좋아. 밝아야 보이지...
여자가 그걸 하려는 건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너무 앞서 나간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내 바지 앞섶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그거였나? 여자가 허벅지에 손을 얹고 쓰다듬기 시작해서 점점 사타구니 쪽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지퍼를 열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벨트부터 푸는데, 얘는 특이했다. 여자는 지퍼만 열고, 내 자지를 끄집어냈다. 내가 기억하는 한, 팬티 앞의 구멍으로 그걸 꺼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여자의 손길이 닿은 자지에는 슬슬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봤다.
기억? 아까부터 벌써 진작에 남았다. 그것도 강렬하게. 정아... 성이 뭐였는지 몰랐지만 그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자가 반만 꺼낸 자지를 잡고 반만 훑으며 말했다.
- 사람 오는지, 좀 보세요.
- 와도 상관 없어.
- 그래도...
- 말했잖아, 보는 게 좋다고. 그게 설마 사람 오는지 보는 거겠어?
- ......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허리를 숙여 자지를 핥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레, 여자에게 들릴까봐 아주 조심스레 숨을 내뱉었지만 소리가 크게 났다. 흐으음...
처음 만난 날,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내 자지를 빠는 여자... 이틀 연속으로 처음 만난 여자에게 빨리는 자지... 흥분할 만했다. 여자는 자지를 입에 넣고 한번 쭈욱 빨고는 잠시 입을 떼고 물었다.
- 어때요?
- 응...?
- 좋아요?
- 아니... 한 게 뭐 있다고...
- 남자한테 해준 적 별로 없어요. 쭙... 후움~
겨우 한번 빨고는 좋으냐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는 엉뚱한 대답을 하고 다시 자지를 물었다. 무슨 말일까? 특별히 해주는 거니까 고마워하라는 건가? 영광이군... 여자는 열심히 빨았지만 반만 꺼내고 귀두만 빨아서인지, 자극은 별로였다. 아니, 여자에게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환한 대낮에 넓은 길가라 신경이 쓰여서 느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유있게 느낄 수 있었던 전날 밤의 블로우잡이 훨씬 좋았다. 자지를 잡고 기둥도 핥고, 불알도 핥고 빨고... 지금 이 여자는 귀두만 쪽쪽... 그래도 그 순간, 여자의 블로우잡은 세계 최고였다. 현재 내가 받고 있는 블로우잡이었으니까. 여자도 최고였다.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쨌든 지금 현재 내 좆을 물고 빨고 있는 여자니까...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자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귀두만 쪽쪽 빨던 여자가 갑자기 혀놀림을 멈추더니 잠시 후 자지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부릅뜬 눈초리가 매서웠다. 왜지? 머리 쓰다듬는 게 불쾌했나? 그러나 다음 순간, 어제 빨린 다음 안 씻었다는 생각이 퍼뜩 났다.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차차... 웃을 때가 아닌데...
- 피식~...
- 어떻게... 그대로 나한테...
- ......
여자가 말을 맺지 못했다. 어젯밤 여자의 침 냄새나 맛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제 국어선생에게 빨린 다음 안 씻고 그냥 잤다. 아침에도 씻지 않았다. 하지만 땀도 났을 테고 땀에 절은 시큼한 사타구니 냄새가 더 날 텐데, 여자는 약한 냄새를 먼저 찾아냈다. 다른 여자의 냄새를.
경쟁해서 수컷을 차지하려는 암컷의 본능일까? 아니, 그건 수컷의 본능 아니었나? 뭐, 어쨌든... 여자가 분해서 못 참겠다는 듯 입을 꼭 물고 나를 노려봤다. 제 딴에는 나름 화낸 거지만 내 눈엔 귀엽기만 했다. 달려들어 껴안고 입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눈 흘기는 여자가 왜 이리 귀여울까? 절로 웃음이 났지만, 화낼 때 귀여운 여자는 더 귀엽게 만들어 줘야 하는 법이다.
- 픽~ 그래서야 내가 기억할 수 있겠어?
- 이건 무효예요. 다음에...
- 다음? 풋~ 다음 기회를 또 달라고?
- 이건 무효라니까요?
- 무효든 아니든, 내가 왜 기회를 또 줘야 되지?
- 게임은 공정해야 되니까.
- 게임?
- 게임이죠. 날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
- 아니지. 너를 기억하고 싶게 만드느냐 아니냐지.
-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앗차, 실수... 여자는 내가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똑똑한 여자는 예쁘고, 똑똑하면서도 내 의도대로 따라오는 여자는 더 예쁘다. 그날 그 여자가 그랬고, 그 순간 진짜 예뻤다.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별 대수롭지 않은 얘기 꺼내듯 시큰둥하게 말을 던졌다.
- 시험공부 열심히 해 본 적 있어?
- 시험...공부?
- 한번만 쓱 훑어봐도 머리에 남는 과목이 있는 반면에, 하루 종일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과목도 있지.
- 내가... 그렇다는 거예요?
- ......
-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돼요?
- 뭐, 책도 펼치기 싫은 과목보다는 그래도 나아.
- 허~ 어떻게 그런...
여자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나를 째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말 그대로 씩씩대면서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치켜뜬 눈은 무섭기는커녕 그저 예쁘기만 했다. 얘는 자기가 발끈할 때 예뻐 보인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그래도 너무 삐지게 만들면 안 된다. 좀 달래 줘 볼까...
- 네가 그런 과목이라는 건 아니야. 전에 그 과목이 워낙 특별했을 뿐이야.
- 그렇게 예뻤어요?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 비교? 걔랑 비교하려고 들면 넌 평생 못 이겨.
- 평~생? 하~!
- 깨어 있을 땐 항상 펼쳤던 책이야. 밥보다 좋아했던 과목이고, 침대에서도 보다가 잠든 챕터야...
- 그래 봐야, 지금은 못 보잖아요.
기대한 대답이었다. 아니, 내가 유도한 대답이었다. 사실 그 말이 나오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한 방 맞은 건 나였다. 내가 말하면서 이미 수민이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젠장... 자충수를 두었다.
- ......
- 쯧... 그런가...? 후우~...
그랬었다. 일어나면 수민이를 떠올렸고, 하루종일 수민이를 생각하며 지내다가 수민이와 통화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고, 잠들면 수민이 꿈을 꾸었었다. 그랬었는데... 수민이는 지금 내 곁에 없다.
고개를 젓지 않았다. 입술도 깨물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알아챘다. 사실은 살짝 눈을 감았고, 악물지는 않았어도 입에 힘은 좀 들어갔었다. 한 방 먹은 건 나였는데, 내 표정으로 기분을 알아챈 여자가 오히려 기세가 죽었다. 고개를 내 얼굴 앞으로 좀 들이밀기까지 하며 내 눈치를 살핀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자극...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 괜찮아. 네 탓 아니야.
- 그럼... 앞으로 다른 책은 아예 안 펼쳐볼 건가요?...
- ......
여자는 발끈해서 뾰족해졌던 게 좀 무뎌졌지만,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물었다. 내가 한 비유를 잡고 늘어졌다.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둥근 눈이 여전히 예뻤다. 다른 책? 얘라면... 아침마다 생각나고, 하루종일 생각하다가, 생각하며 잠들고, 꿈꿀 수 있을까? 얘가 내 인연일까? 너무 앞서 나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내가 대답이 없자 여자는 한번 더 들이댔다.
- 네? 안 볼 거예요?
- 글쎄...? 언젠가는 봐야겠지?
- 그 언젠가가... 지금일 수도 있는 거죠?
- 지금?
- 네, 지금...
- 그럼... 봐야 할 책이 하나 생긴 거네?
- 후훗~ 네.
- 책 내용은 언제 보여주게?
- 뭐, 다음 기회에요...
호, 요거 봐라? 볼수록 더 맘에 드는데? 여자는 다음 기회를 굳이 다시 확인했다. 아직도 화난 척, 눈에는 힘을 주고 있었지만, 앙다문 입이 실룩거리고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버팅기는 척하지만 살짝만 당겨도 끌려오는, 귀여운 여자였다.
- 다음...? 다음이라...
- ......
- 그럼, 오늘은 이만 정리해야겠지?
힘을 잃고 늘어진 자지를 내려다 보았다. 여자가 손수 자지를 도로 제자리에 넣어 주었다. 넣을 때 잘 들어가지 않아서 아프기까지 했다.
그러게 팬티 구멍으로 그거 꺼내는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자꾸 만지면 더 꼴려서 더 안 들어가, 이 바보야... 얼굴은 예뻐 가지고 그거 하나 못 하고... 킥, 웃음이 났다. 여자가 눈치 보듯 쳐다보았다. 자기가 손을 대서 뭔가 불편하게 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손으로 팬티 안을 정리하고 지퍼를 올렸다. 고개를 드는 여자의 머리를 당겨 키스했다. 여자가 입에 힘을 주어 다문 채 키스를 받았다. 거부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 입술까지만이었다. 혀를 빨기는커녕 이를 꽉 물고 열어 주지도 않았다. 살짝 입만 맞추고 놓아 주었다. 힘주는 입술에 키스하는 건 맛이 없으니까.
그런 애들이 있다. 남자의 것을 다 빨아먹으면서도 그걸 먹은 입에 남자가 키스하려 하면 싫어하는. 한번도 왜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순간 물어볼 이유가 뭐가 있나? 빨고, 박고, 싸고... 쌌으면 그 기분에 취해야지, 공부할 일 있나?
......
창문을 열고 달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렸다. 천천히 가도 10분, 15분이면 가니까. 여자는 창 밖을 보며 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러다가 또 언제 불쑥 치고 들어올까?
- 어땠어요?
그럼 그렇지... 여자는 창턱에 팔꿈치를 짚고 기댄 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 뭐가?
- 애인이랑 차에서 했을 때...
- 몰라서 물어? 짜릿했지.
-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 내가 싫어졌대.
- 과장님은요?
- 나? 훗... 나 혼자 계속 좋아하면 뭐?
- 하긴...
- ......
- 난 어땠어요?
- 뭐가?
- 비교해 준다면서요.
- 비교가 안 돼.
- 어머? 내가 그렇게 못했어요?
여자가 발끈해서 물었다. 힐끗 본 여자의 얼굴에서는 생글거리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부릅뜬 눈... 그러나 눈을 흘길수록 귀여운... 얘는 타고 난 모양이다.
- 그게 아니라...
그때 여자의 전화가 울렸다. 서팀장의 전화라고 직감했다. 서팀장에게 말한 대로 마구 밟았으면 터미널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도 가고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여자가 잘 대답하기를 속으로 바랐다. 주고받은 대화로 미루어볼 때, 멍청한 여자는 아닌 듯 보였으니까.
- 어, 오빠...
- ......
- 터미널. 열한시 차 놓쳤어.
- ......
- 다음 차 타야지... 뭐? ... 야, 과장님 사고날 뻔했어어~, 막 밟다가아~... 그런데, 오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 ......
- 그래... 그렇다니까... 응? 저기 매점에서 물 마시고 있는데?.... 나? 표 사 갖구 앉아 있지.
- ......
- 응, 다음 주에는 오빠가 올라올 거지?
- ......
- 그래, 오빠도 잘 있어... 응~
여자는 태연한 얼굴로 인사하고 끊었다. 여자는 터미널에 도착한 것처럼 얘기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잘 대처한 여자가 더 예뻐 보였다. 여자가 전화기를 백에 넣으며 다시 물었다.
- 네? 어때요?
- 뭐가?
- 내가 그렇게 못했냐구요.
- 뭘 하기나 했어야 비교를 하지.
- 못한 건 아니란 얘기죠?
- 평가할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없잖아?
- 기억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 기억? 후후후...
뭐라고 평가할 만큼 하지도 않았으면서 이 여자는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나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걸까? 좀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 왜 웃죠?
- 겨우 그 정도로 내가 널 기억해야 한다면 말이야... 응?
- ......
- 어젯밤에 내 정액을 삼킨 여자는 내가 왜 이름도 얼굴도 기억을 못 할까?
- 어머? 먹기까지?
- 네 말대로라면, 어젯밤 여자는 내가 확실히 기억해야 되는 거 아니야?
- ......
- 응? 어때? 그럴 것 같아?
- 그건...
- 훗~
- ......
여자는 뭐라고 대꾸라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수민이의 기억에 진저리를 치는 건 수민이와 나누었던 섹스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한번쯤 벗기고 안은 여자, 블로우잡을 한 여자, 섹스한 여자... 그런 여자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나? 기억에 남은 여자들 시리즈 안 끝나게...
- 그럼...
- ......
- 이렇게 물을게요. 나 예뻐요?
- 응,
- 진짜?
- 응. 예뻐.
- 잉~, 이예뿌어~... 귀찮으니까 대충 대답하구, 치...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토라졌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마치 오래 만나 온 친한 사람에게 투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친해진 것이다. 나도, 얘도... 얘도? 과연 얘도 그런 걸까? 하긴, 잠깐이지만 자지를 빨고 빨린 사이니까... 여자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거였던 모양이다. 자기가 예쁜지...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예쁘다는 말에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척하는 여자는 정말 예뻤다. 당장 덮쳐서 벗기고 싶을 만큼. 입을 삐죽이는 것도 토라진 게 아니라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삐진 척하면서 곁눈질하는 눈이 잠깐 사이에 더 예뻐졌다.
- 안 믿어도, 뭐... 어쩔 수 없고... 훗~
- 어쩔 수 없고... 킥~
여자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웃는 것도 둘이 동시에 웃었다. 그러나 여자는 잠깐 웃고 또 물었다. 참 집요한 여자였다.
- 그 애인보다 예뻐요?
- 후후후... 이 아가씨, 차암~
- 왜요?
- 자꾸 그 여자를 걸고 넘어지는 건 너한테 도움이 안 돼.
- 왜요?
- 걔는 내 맞춤형이었으니까.
- 맞춤형?
-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알려줬어. 키스부터... 걔는 모든 게 내가 처음이었어.
- 키스부터... 어디까지?
- 어디까지? 뭐... 애무도 그렇고, 섹스도 그렇고...
- 오럴도?
- 당연하지. 그 좋은 걸 빼고 했겠어?
- 와우~
- 그런 맞춤옷이랑 한번 걸쳐본 옷이랑... 비교가 되겠니?
- 한번 걸쳐본 옷? 허~, 너무한 거 아니예요?
여자의 억양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얘, 너무 발끈하는 거 아냐? 어쨌든 이제 좀 달래줘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책이며 옷이며... 애인의 기억을 비유한 것 뿐이었는데 이제 애인은 없어지고 옷만 남았다. 비유를 오래 잡고 늘어지면 뭘 비유한 건지 잊게 된다. 그 전에 원래 말하던 것으로 돌아와야 했다.
- 그래도 뭐... 굳이 비교하면 네가 무조건 이겨.
- 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 무조건 네가 이긴다고. 모르겠어?
- 그 여잔 이미 없으니까?
- 딩동댕~
- 헤헷...
죽일 듯이 언성을 높이던 여자는 다음 순간 또 히죽거렸다.. 좀 더 대들어야 좀 더 약올릴 텐데... 그러나, 여자가 곱게 나오면 나도 곱게 받아줘야 했다.
- 얼굴도 네가 훨씬 예쁘고.
- 진짜?
- 너, 자신 없구나?
- 뭐가요?
- 네가 진짜 예쁜지...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예쁘냐고 자꾸 물어보니까.
- 그거야 뭐...
- 근데 말이야...
- 근데?
말하면서, 여자를 한번 물끄러미 쳐다보고 고개를 도로 돌렸다.
- ?~ 아니다. 됐다.
- 말해 봐요.
- ......
- 내가 훨씬 예쁜데, 뭐? 몸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을 걸요?
빠지지 않는다... 하긴 그랬다. 객관적으로 봐도 사실이었다. 여자의 얼굴과 몸매는 어디 내놔서 빠지기는커녕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 후후후~... 그런 얘기가 아니라...
- 아니면 뭐?
- 누가... 내 기억에 들어온다고 해서, 응? 있던 기억이 없어질까?
- ......
- 후후후...
- 그렇군요.
- 그런 보장만 있다면 억지로 외워서라도 집어넣을 텐데, 그지?
- 날 기억할 거라는 말로 들어도 되죠?
- ......
요것 봐라? 여자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깜찍했다. 옛날, 술자리에서 싯구를 주고 받았다던 선비들이 그런 기분이었을까? 여자가 새삼 더 예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터미널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고, 비유를 주고받는 것도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은근한 재미는 없어도 직설적으로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여자가 못 참고 또 먼저 들이댔으니까.
- 네? 나, 예쁘다는 거죠?
- 예쁘냐고 그만 좀 물어봐라.
- 왜요?
-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넌 거울도 안 보니?
-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니까...
- 누구한테?
- 뭐... 누구든.
-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남자라도 생긴 거야?
- ......
-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 예뻐. 진~짜 예뻐. 애인 없으면 차지하고 싶을 만큼. 됐니?
여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입술을 꼭 다물고 힘을 주었지만, 눈가가 실룩이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화내는 예쁜 여자는 없다. 못생긴 여자에게 예쁘다고 했다가는 화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거냐고 은근히 돌려서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예쁘고 깜찍한 여자는, 자기는 말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끝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하~ 고 년, 참...
- 애인 있으면요?
- 있으면? 음... 빼앗아서라도 갖고는 싶은데... ?~
- 호오... 뺏을 자신은 있구요?
- 자신? 글쎄...?
- 치, 자신도 없으면서...
- 후후후... 근데, 결혼할 거니?
- 당연히 해야죠.
- 할 건 알지. 누구랑?
- 깔깔깔... 하아~ 졌어요, 진짜... 근데 정말, 한 번도 안 져주실 거예요?
여자는 지금 있는 애인, 즉 서팀장이랑 결혼할 거냐는 질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을 하긴 할 거라는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런 말장난이라면 나도 꽤 좋아하지. 암~ 좋아하고 말고. 연수원에서 나올 때, 팔짱 끼고 가자며 강력한 한 방을 날렸던 게 생각났다. 그래, 그 빚도 갚을 겸...
-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다?
- 그렇다고 봐야죠.
- 좀 전에 통화한 남자는?
- 그 남자는 그 남자고.
- 그럼...
- 그럼?
잠시 시간을 둔 다음, 목소리를 낮췄다. 횡단보도 앞에 천천히 차를 세웠다. 보행신호가 들어왔고, 보행자는 없었지만 내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아까 얘기하며 볼 때 노란불로 바뀌고 있었고, 조금 전부터 이미 빨간 불이었다.
여자는 신호등을 못 봤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다시 날 쳐다볼 때,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 물었다. 여자에게는 그윽한 목소리로 들리길 바랐다. 최대한 그윽하게 들려라...
- 결혼... 할래?
- ......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자는 입을 헤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잔뜩 커진 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보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술 사이로 그 하얀 이가 빛나겠지? 돌아보고 싶은 걸 꾸욱 참았다. 유치한 게임이었지만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게임에 지는 것보다도, 여자의 빠알간 입술을 보면 키스하고 싶은 걸 참지 못할 것만 같았다.
- 진심... 이예요?
- ......
- 우린 아직 서로 잘...
여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묻던 그때, 딱 맞추어 신호가 바뀌었다. 가속페달로 발을 옮겨 천천히 출발했다. 눈에도 힘을 빼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고개를 살짝만 돌려 힐끗 한번 바라보며. 최대한 시큰둥하게 말했다.
- 아깐 당연히 한다며?
- 네...?
- 피식~...
- 허~... 허허... 하하깔깔깔...
여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잠시 입을 헤벌렸다가 이내 자지러졌다. 무릎 위의 백을 두드리고 발까지 구르며 웃다가, 사래가 들려 콜록대며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뜻밖이었나? 장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의외로 많이 당황했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그저 장난삼아 나를 한번 꼬셔 보려고 들이댄 건 아닌 듯했다. 내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확신이 있었다. 흠... 아직 서로 잘 모른다는 건 앞으로 더 알고 싶다는 얘기겠지?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아... 당했네...?
- 훗~
- 과장님, 정말 나빠요. 큭큭~
- 뭐가? 후후후...
- 내 말엔 안 걸려들고, 나는 골려먹고.
- 안 속은 게 뭐가 나빠? 속은 게 바보지.
- 어머? 치~
- 아까 진 빚 갚은 거야.
- 빚이요? 무슨 빚?
- 팔짱 낀 거.
- 아~ 그거, 킥~
말도 잘 통하는 여자였고, 그 얼굴에 그 몸매에 용모도 그 정도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치고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나한테 관심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자는 섹시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귄다’ 라는 생각은커녕 그 비슷한 것조차 머리 근처에도 오지 않았었다.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이 정도면 최상급인데... 수민이가 남긴 흔적이 커서일까? 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어 수민이 생각을 지웠다.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왠지 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여자는 잠시 후 힘을 빼고 등받이에 기댔다. 나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왜 날 째려봤을까? 난 또 왜 여자의 그 눈길에 긴장했을까...?
작은 시골 터미널까지는 금방이었다.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터미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힘주어 바라보던 눈매는 벌써 순해져 있었다. 째려보던 눈초리가 사랑스런 눈으로 바뀐 여자는 더 예뻤다.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자가 입을 열어 내 생각을 막았다.
- 고마워요.
- 응? 응, 그래.
-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아요?
- 태워다 줘서는 아니지?
- 끝까지 이럴 거예요?
- 네가 끝까지 그러니까.
- 바보 같아요.
- 훗~... 후후후...
- 나 말이예요.
- 알아. 아까까진 아니었잖아? 그래서 화난 거고. 그지?
- 허~... 혹시 독심술 해요?
- 그랬으면 시간낭비 안 했겠지.
-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 네가 다 말했으니까.
- 내가요? 내가 무슨 말...?
- 그만 하자. 나 이기고 싶니?
- 이런 기분 처음이예요.
- 얼마나 다행이야?
- 뭐가요?
- 평생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어.
- ......
- 피식~...
- 좀 져 주면 안 돼요? 여잔데...
- 여자? 푸후후훗~...
- 왜 웃어요?
- 나한텐 내 여자만 여자야.
- 헤에~
낯간지럽고 닭살 돋는 멘트였지만 사실이었다. 알아들어 주기를 바랐다. 알아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여자는 반응을 보였다. 소리내어 헛숨을 삼켰다. 긍정적인 반응일까, 부정적인 반응일까...
- 어떻게...? 여자로 대해 줘?
- ......
여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술만 깨물었다. 더 몰아붙여서 좋을 게 없었다. 여자가 치떴던 눈을 내리깔고 소리죽여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었나 보군... 다음 순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 정아야?
- 네 ?!
- 나도... 너랑 얘기하는 거 재밌었어.
- 진짜?
- 음.
- 후훗, 고마워요...
- 고맙긴... 내가 고맙지.
정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듯 입에 힘을 주었다. 너라고 부르다가 이름을 부르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너도 참... 무지 고생한다. 웃음이 나오면 그냥 웃으면 되지, 왜 그렇게 애써서 참니... 그냥 웃어 주면 어디 덧나냐?
- 오늘... 진짜 이상해요.
- 알아들었으면 정아가 이긴 거야. 잘 가고...
- 전화... 할게요.
- 통화하기 불편할 텐데?
- 네? 아... 그럼, 하지 말까요?
- 그건 아니고...
- 피이~ 그러면서 뭐...
- 한참 기다려야 되겠네? 같이 있어 줄까?
- 음... 아니예요. 올라가세요.
- ......
같이 기다려 주겠다는 말에 정아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졌지만, 금새 정색을 하고 사양했다. 서팀장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똑똑한 아이였다. 그런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만큼 정아는 예뻤다. 그리고, 정아의 말투가 잠깐 새에 부드러워졌다. 마구 들이대고 치받을 땐 뾰족한 암코양이를 연상하게 하던 말투가, 언제부터인가 고분고분하고 다소곳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 나는 사실 좀 놀랐다. 처음 대화하는 사람과 그렇게 터놓고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쉽게 말을 놓은 사람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얘기가 잘 통했다. 게다가 정아는 예쁘고 섹시했다. 서팀장 애인라도 상관 없이 꼬시고 싶을 만큼. 주변 사람들이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당장 벗기고 싶을 만큼.
-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 ......
정아가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를 건네주자 자기 전화기에 한번 걸어 벨소리가 울리자 끊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내 번호를 자기 폰에 저장하고는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내가 인사하려고 내리자, 정아는 벌써 운전석 옆에 와서 서 있었다. 두 손을 모아 백을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손을 들어 정아의 뺨을 한번 쓰다듬었다. 정아는 피하거나 움츠리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어지기 아쉬웠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아의 눈에도 아쉬운 빛이 보였다. 뺨을 쓸던 손을 내려 정아의 턱을 당겼다. 정아는 힘주어 버티며 눈만 굴려 대합실 쪽을 둘러보았다. 누가 봐요... 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키스하고 싶었다.
- 숙제하려면... 잠깐이라도 훑어봐야 되지 않을까?
- ......
정아가 또 살짝 눈을 흘기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얘, 또 이러네? 좋으면 그냥 웃으면 되지, 뭘 그리 인상을 쓰고 안면 근육에 힘을 주나? 피곤하게... 그러나 정아는 잠시 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힘을 빼고 내가 당기는 대로 따라왔다.
턱만 당겨 키스하는데 정아가 한발짝 다가와 내 허리를 잡았다. 턱을 쓰다듬다가 턱선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려 정아의 목을 만졌다. 늘씬하고 긴 목의 피부가 매끈했고 손등 쪽으로 쓰다듬듯 쓸었다. 내 손톱이 스치고 지나가자 정아가 움찔거리며 떨었다.
정아의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내 혀를 밀어넣자 살살 빨기까지 했다. 넣었던 혀를 뺄 때, 정아의 혀가 따라 들어왔다. 입술만큼 부드러운 정아의 혀에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단 맛이 났다. 내 허리에 놓인 정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목을 쓰다듬던 손으로 정아의 볼을 감싸고 정아의 혀를 부드럽게 빨았다.
서팀장에게 미안했다. 미안하다... 어쩌면 더 미안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단 맛이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서팀장 같은 녀석이 이렇게 탐스러운 여자를... 정아의 입 안으로 내 짧은 혀를 최대한 집어 넣었다. 혀 밑 설소대가 아플 정도로 내밀었다. 정아는 내 혀를 지그시, 그러나 깊이 빨아들였다.
정아의 혀와 입술은 달고 맛있었다. 꿈틀거리던 아랫도리가 잔뜩 발기해 정아의 아랫배를 찌를 때쯤 입술을 떼었다. 정아는 내 아랫입술을 끝까지 빨았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정아와 눈을 마주쳤다. 발그레 상기된 정아의 얼굴이 더 섹시했다. 입술에 남은 감촉을 음미하고 있는데, 정아는 그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또 확인하려 들었다. 아, 나, 이 아가씨, 정말...
- 훑어보니까 어때요?
- 킥~... 크흐흐흐흐...
- 어떠냐니까요?
- 후후... 예뻐. 더 안 봐도 되겠어.
- 후훗~...
- 그럼... 조심해서 가.
- 네... 오빠두요.
- 응.
최대한 따뜻하게 인사를 해 주었다. 따뜻하게 들리길 바랐다. 그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내가 이름을 불러서인지는 몰라도, 정아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바뀌었다. 오빠라....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또 수민이 생각을 했다.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여자... 오빠라는 얼마만에 소리를 들어보는 거였는지... 또 수민이 생각이 났지만 다행히 진저리치지는 않았다. 호오~ 신기하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정아의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였다. 입술이 아까보다 더 예뻤다. 동그란 눈도, 오똑한 코도... 얘는 도대체 안 예쁜 데가 어디지? 어제까지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자였는데, 오늘 갑자기 정아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몇 주 동안 그냥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쳤던 여자가, 오늘은 진짜 예쁘고 섹시한, 미치도록 안고 싶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며 빤히 바라보는 예쁜 여자, 확 끌어안고 또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못 참고 거기서 벗기게 될까봐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며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 갈게.
- 네...
돌아보지 않고 그냥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돌리고 나서야 룸미러로 정아를 보았다. 룸미러에 비친 정아는 내가 차를 몰고 터미널을 나오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코너를 돌 때까지도 내 차를, 나를 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손을 모아 백을 쥐고 다소곳이 선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도 예뻤다. 다소곳한 여자, 예쁘지 않은가?
유혹하려고 들이댔으면서도 아닌 척 했던 여자, 예쁜 눈을 부릅뜨고 내 말에 꼬박꼬박 대들었던 여자, 대들면서도 끝까지 날 유혹하려 했던 여자, 그러나 결국은 꼬리를 내린 여자, 은근히 말해도 다 알아듣는 여자, 기억력도 좋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여자, 무엇보다도 말이 잘 통하는 여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확신이 들게 하는 여자... 책이며 옷이며 비유를 너무 많이 해서 얘기가 길어진 게 흠이었지만, 즐거운 대화였다.
연수원에 들어서자마자 서팀장이 주차장 쪽으로 달려왔다. 아까 정아와 키스할 때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던 서팀장은 이미 사라지고, 오늘따라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던 우직하고 성실한 서팀장만 눈에 들어왔다.
- 과장님, 괜찮으세요?
- 응? 뭐가?
- 사고 났다고...
- 사고? 아... 사고난 거 아니야. 날 뻔! 했지...
- 아, 다행이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 이런...? 그게 왜 서팀장 때문이야?
- 그래도요...
- 정아씨나 많이 달래 줘. 좀 놀랐을 텐데.
- 예? 아, 예....
사고는 무슨 사고, 정아가 지어낸 얘긴데... 서팀장이 더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해 놓고 바로 그 순간 후회했다. 서팀장이 정아를 생각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질투가 났다.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 참, 원장님은 무슨 말씀 하신 거야?
- 네? 아.., 교육관 애들 요즘 좀 어떠냐고요.
- 좋은 소식은 없고?
- 좋은 소식이라니요?
- 난 또... 원장님이 일부러 불렀다길래 좋은 얘기 하실 줄 알았지...
- 과장님이 제 얘기 잘 해주시는 거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헤헤...
- 고맙긴... 이따가 시원하게 맥주나 한 잔 하자.
- 네엡~
원장은 부장과 나에게는 승진 방침을 말했지만, 당사자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런 걸 미리 알려주면 발령이 날 때까지 직급이나 호칭이 서로 애매해지기는 한다. 몇 명 안 되는 조직이고 서팀장과 애매해질 직급의 직원은 없는 터라 딱히 애매해질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켜가는 건 좋은 거였다. 또 원칙을 떠나서, 원장이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는 건 경우가 아니었다.
서팀장은 과장으로 직급이 바뀌게 되었고, 조만간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두 가지 다 모르고 있었다.
그 전부터 차 안에 있던 반쯤 남은 생수병을 들고 내려 퉁퉁 치며 들어갔다. 서팀장이 그 소리에 흘끗 돌아보았다. 정아가 서팀장과 통화할 때 내가 생수 사서 마셨다는 얘기를 했으니, 증거를 보여줘야 했다. 서팀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쓰였다. 물론,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거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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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좀 많네요. 중간에 끊을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
아틀라스님 / 지난번과 똑같은 댓글이군요. 진짜 삐지신 듯... 진짜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데...
소돼지막창님/ 졸라 재밌다는 댓글에 신나서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부감과 근친상간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궁금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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