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현이도 나도 비슷한 성격이었다. 미진이는 여러모로 내게 의지했고,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내가 무엇이라도 된 것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는데, 승현이는 자기 일은 똑부러지게 해내는 타입이어서 그 점이 좋았다. 나보다 세살이 어렸지만, 뭔가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장환이와 여자 쪽은 우리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식사가 끝이 났고, 가게 안에 있던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뽑아서 마시고 있다가 여자가 무슨 소리를 살짝 했고, 장환이가 머뭇머뭇 하더니, 내게 물었다.
"형, 식사 하시고, 뒤의 스케줄이 있으세요?"
"아니. 별 건 없지. 아마 공부? 왜?"
"이렇게 보게 된 것도 인연이고, 같이 차나 했으면 해서요. 형이랑 승현이 이야기도 궁금하고. 이런저런 조언도 듣고 싶어서요."
"그럴까. 승현이 넌 괜찮냐?"
"나도, 뭐 오늘 계획했던 건, 앞으로 한시간 반 정도만 하면 되니까. 근처서 차 한잔 하는 건 괜찮아요."
"형, 그럼 이카루스 아시죠? 그리로 오실래요?"
"그래. 그러자."
장환이와 여학생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승현이는 내 귓볼을 꼬집었다.
"왜?"
"왜 그렇게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거에요. 저 여자 선배 보는 눈이 어떤 줄 아세요?"
"아아. 나 때문이 아니고, 장환이 때문이야. 저 여자랑 어떻게 잘해보고 싶은 것 같은데, 못 쓰겠더라."
"왜요?"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신경을 안 쓰고, 난 밥을 먹고 있었거든. 그런데, 가게가 좁아서 그런지 대화가 들리더라.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을 보니까, 만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대화의 주제자 뭔 질 아냐?"
"뭔데요?"
"구속적부심 이야기를 하더라고. 여자는 전혀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거든. 거기다가 설명도 미묘하게 틀려서, 계속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 왜 그렇잖아. 내용이 틀리면 이상하게 집중하게 되는 거."
"그래서요."
"그런데, 그 때 너한테 전화가 왔고, 내가 밥 먹고 있으면서, 너 기다리겠다고 하고, 아주머니께 포장 부탁하고 그러다가 아주머니가 미진이를 기억하고 있어서, 바람둥이로 오해를 받고 하니까. 여자쪽에서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리고 네가 나타났을 때, 승현이가 대놓고 너랑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니까 여자 쪽에서 기분이 나빴던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못난 놈 옆에 있으면 평범하기만 해도 훌륭해보이는 거. 그런 거겠지."
"하긴, 여자들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긴 하죠. 구속적부심이 뭐에요. 대체. 그러고 보면 선배는 참 대화를 잘해요. 무슨 비결이 있어요?"
"난 상대를 맞추니까. 승환이랑 있을 땐, 빵 이야기를 하고, 화영이랑 있을 땐 네 이야기를 하는 식이지."
"좋은 남자에요. 선배는."
"그런데, 우릴 왜 보자는 거지."
"내가 만만히 보였나 보죠. 뭐. 저 여자는 잘 거절 당할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자신감이 있는 게 보여요."
"그래? 안 그래 보이던데. 되게 착해보이던데."
"여자 눈에만 보이는 거거든요. 선배에게 엄청 관심을 쏟던데요. 왜요? 생각 있어요?"
"아니. 그보다 너한테 이야기할 것이 있어."
난 이진명과의 일을 이야기했고, 이진명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내가 진짜 바라는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 인생에 하나 쓸 데 없는 김진수와의 감정싸움에 질렸다는 말을 하며, 모든 일의 원인인 미진이와 완전히 결별할 것을 이야기했다.
"와, 진짜요?"
"널 좋아하게 돼서 그런가, 미진이에게 더는 미련도 없고, 미진이에게 풀지 못한 화를 다른 여자들에게 푸는 것도 미친 놈이 하는 짓 같고, 이제는 널 더 좋아해야 하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그런 짓을 하는 것도 너한테 미안한 일이잖아."
승현이는 크게 한 숨을 쉬었다.
"다행이에요. 선배에게 몰래카메라를 설치한다, 법석을 피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들이랑 섹스를 나누는 것을 보고 싶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다행이에요. 진짜. 선배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요."
세게 나오긴 했지만, 아무리 당차다해도 승현이도 여자였고, 제 정신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까스가 나왔고, 나도 승현이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19일에 승환이와 이진명과 함께 내려가는 시골에 같이 내려가지 않겠냐 물었고, 승현이는 무슨 생각을 잠시 하는 듯 하다가, 스터디가 있는데, 옮길 수 있는 지를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내 말에, 승현이는 기왕 가는 김에 화영이도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다 했다. 나 역시 그 점은 괜찮은 생각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가서 심리적 공황상태를 막을 수도 있고, 사는 모습과 집을 확인하고 나면, 가끔 이진명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태를 확인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해서였다.
"선배, 선배는 말이에요.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어요?"
"응?"
"화영이, 그 사람 말이에요. 어디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요? 물론, 내가 하는 말은 법의 경계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에 와서 법을 따질수도 없고요.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하잖아요."
"화영이는 범죄를 각오한 거니?"
"여자들은요. 잊지 못해요. 아마 영원히 고통 받을 거에요. 그 사람이 십년이나 이십년 감옥에 들어간다해도 맺혀있는 화영이의 원한을 풀지 못할 거에요. 그런 면에서 난 선배가 승환이에게 용서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승환이랑 그 이야기는 했어. 승환이가 나 때문에 엄마 얼굴을 보러 간다길래 말렸다. 대신에 우리 엄마를 보러가자고 했지. 승환이도 내 동생이니까."
"잘 하셨네요. 선배, 각오를 해 두는 게 좋아요. 화영이도 선배가 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알았다."
"고민없이 즉답을 해줘서 고마워요."
"나가자. 기다리겠다."
"그 기집애한테 넘어가지 말아요."
"애잔한 눈동자라면, 나만큼 질린 사람도 없을 거다."
까페에 도착했더니, 녀석과 여학생은 마주 앉아 있다가 얼른 녀석이 여학생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우리 자리를 확보해줬다. 승현이와 앉아서, 승현이에게 뭘 먹을 지 묻고는 곧바로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서 승현이에게 찬물인지 따뜻한 물인지를 물어 물을 떠다주자, 여자의 눈이 나를 따라 계속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내게 호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 진짜 승현이랑 사귀시는 건 아니시죠?"
"아니. 만나기로 했다."
"미진이 때문에 그러세요?"
"사람을 새로 만나는데, 전 여자친구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좋아야 만나는 거지.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냐?"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여기는 국문과에요. 12학번이고요."
"그러세요. 그럼 너랑 동갑이겠다. 09학번 이경민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정옥에요."
"남승현입니다. 장환이랑 동기에요."
"그런데, 본이 어떻게 되세요?"
"왜요? 선배."
"혹시 옥자 돌림인가 해서. 내 동생도 항렬이 옥자거든."
"연안 이씨에요."
"어, 저랑 같으시네요."
"저희 오빠도 경준이에요. 경자 항렬이에요."
"봐,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케케묵은 사람처럼 무슨 그런 걸 따져요?"
"몰랐냐. 내가 케케묵은 사람인 거. 원래 남자는 좀 묵어야 좋은 거야."
승현이와 나의 빠른 대화에 장환이와 정옥씨는 끼어들 틈을 보지 못했고, 진동벨이 울려서 커피를 받아와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속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삼십 분쯤 함께 차를 마셨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장환이네 차까지 계산을 하고 나오다가 승현이에게 욕을 잠깐 먹고, 자전거로 승현이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화가 와서 번호를 확인했더니, 김진수였다. 받지 않을까 하다가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전화를 받으시네요."
"미진이 일이라면, 더 이상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난 이제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미진이랑 결별을 하려고 하니까."
"왜요? 새로 사귄 그 남승현이라는 여자 때문인가요?"
"응. 그래. 그러니까 이제는 나한테 더 이상 전화를 하지 마. 알겠어?"
"어떻게 하죠. 세상 일이 당신 뜻대로 되면 참 좋을 텐데. 그 바보같은 여자가 당신을 잊지 못해서, 나를 버리고 당신께 달려갔거든요. 원래 헌 여자였고, 나한테 와서 잠깐 놀다 간 정도니까 당신이 다시 받으세요. 기분이야 좀 더럽겠지만, 설마 나보다 더 더럽겠어요."
"알았어. 미진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너랑 나랑은 관계가 없는 거다. 알겠지?"
"웃을 수 있어 좋겠어요. 난 지금 똥물을 뒤집어 쓴 심정인데, 내 여자를 이제 당신에게 빼앗긴 셈이니, 당신 여자를 내가 뺐어도 할 말은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게 공평하잖아요. 이경민씨."
"넌 왜 니가 비참해지는 방향으로 살려고 하는 거냐? 아버지 때문에 그러는거야?"
"아버지? 혹시, 이진명이도...하아.. 그랬군요. 이거 똥물 정도가 아니었어요. 이경민씨. 웃을 수 있을 때, 나를 그렇게 비웃어놓는 게 좋겠어요. 하하. 하하. 이거 대단하시네요."
미친 놈의 주절을 들어주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 집으로 왔더니, 원룸의 계단 앞에 너무 울어서 마스카라가 엉망이 된 미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형, 식사 하시고, 뒤의 스케줄이 있으세요?"
"아니. 별 건 없지. 아마 공부? 왜?"
"이렇게 보게 된 것도 인연이고, 같이 차나 했으면 해서요. 형이랑 승현이 이야기도 궁금하고. 이런저런 조언도 듣고 싶어서요."
"그럴까. 승현이 넌 괜찮냐?"
"나도, 뭐 오늘 계획했던 건, 앞으로 한시간 반 정도만 하면 되니까. 근처서 차 한잔 하는 건 괜찮아요."
"형, 그럼 이카루스 아시죠? 그리로 오실래요?"
"그래. 그러자."
장환이와 여학생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승현이는 내 귓볼을 꼬집었다.
"왜?"
"왜 그렇게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거에요. 저 여자 선배 보는 눈이 어떤 줄 아세요?"
"아아. 나 때문이 아니고, 장환이 때문이야. 저 여자랑 어떻게 잘해보고 싶은 것 같은데, 못 쓰겠더라."
"왜요?"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신경을 안 쓰고, 난 밥을 먹고 있었거든. 그런데, 가게가 좁아서 그런지 대화가 들리더라.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을 보니까, 만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대화의 주제자 뭔 질 아냐?"
"뭔데요?"
"구속적부심 이야기를 하더라고. 여자는 전혀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거든. 거기다가 설명도 미묘하게 틀려서, 계속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 왜 그렇잖아. 내용이 틀리면 이상하게 집중하게 되는 거."
"그래서요."
"그런데, 그 때 너한테 전화가 왔고, 내가 밥 먹고 있으면서, 너 기다리겠다고 하고, 아주머니께 포장 부탁하고 그러다가 아주머니가 미진이를 기억하고 있어서, 바람둥이로 오해를 받고 하니까. 여자쪽에서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리고 네가 나타났을 때, 승현이가 대놓고 너랑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니까 여자 쪽에서 기분이 나빴던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못난 놈 옆에 있으면 평범하기만 해도 훌륭해보이는 거. 그런 거겠지."
"하긴, 여자들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긴 하죠. 구속적부심이 뭐에요. 대체. 그러고 보면 선배는 참 대화를 잘해요. 무슨 비결이 있어요?"
"난 상대를 맞추니까. 승환이랑 있을 땐, 빵 이야기를 하고, 화영이랑 있을 땐 네 이야기를 하는 식이지."
"좋은 남자에요. 선배는."
"그런데, 우릴 왜 보자는 거지."
"내가 만만히 보였나 보죠. 뭐. 저 여자는 잘 거절 당할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자신감이 있는 게 보여요."
"그래? 안 그래 보이던데. 되게 착해보이던데."
"여자 눈에만 보이는 거거든요. 선배에게 엄청 관심을 쏟던데요. 왜요? 생각 있어요?"
"아니. 그보다 너한테 이야기할 것이 있어."
난 이진명과의 일을 이야기했고, 이진명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내가 진짜 바라는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 인생에 하나 쓸 데 없는 김진수와의 감정싸움에 질렸다는 말을 하며, 모든 일의 원인인 미진이와 완전히 결별할 것을 이야기했다.
"와, 진짜요?"
"널 좋아하게 돼서 그런가, 미진이에게 더는 미련도 없고, 미진이에게 풀지 못한 화를 다른 여자들에게 푸는 것도 미친 놈이 하는 짓 같고, 이제는 널 더 좋아해야 하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그런 짓을 하는 것도 너한테 미안한 일이잖아."
승현이는 크게 한 숨을 쉬었다.
"다행이에요. 선배에게 몰래카메라를 설치한다, 법석을 피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들이랑 섹스를 나누는 것을 보고 싶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다행이에요. 진짜. 선배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요."
세게 나오긴 했지만, 아무리 당차다해도 승현이도 여자였고, 제 정신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까스가 나왔고, 나도 승현이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19일에 승환이와 이진명과 함께 내려가는 시골에 같이 내려가지 않겠냐 물었고, 승현이는 무슨 생각을 잠시 하는 듯 하다가, 스터디가 있는데, 옮길 수 있는 지를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내 말에, 승현이는 기왕 가는 김에 화영이도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다 했다. 나 역시 그 점은 괜찮은 생각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가서 심리적 공황상태를 막을 수도 있고, 사는 모습과 집을 확인하고 나면, 가끔 이진명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태를 확인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해서였다.
"선배, 선배는 말이에요.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어요?"
"응?"
"화영이, 그 사람 말이에요. 어디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요? 물론, 내가 하는 말은 법의 경계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에 와서 법을 따질수도 없고요.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하잖아요."
"화영이는 범죄를 각오한 거니?"
"여자들은요. 잊지 못해요. 아마 영원히 고통 받을 거에요. 그 사람이 십년이나 이십년 감옥에 들어간다해도 맺혀있는 화영이의 원한을 풀지 못할 거에요. 그런 면에서 난 선배가 승환이에게 용서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승환이랑 그 이야기는 했어. 승환이가 나 때문에 엄마 얼굴을 보러 간다길래 말렸다. 대신에 우리 엄마를 보러가자고 했지. 승환이도 내 동생이니까."
"잘 하셨네요. 선배, 각오를 해 두는 게 좋아요. 화영이도 선배가 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알았다."
"고민없이 즉답을 해줘서 고마워요."
"나가자. 기다리겠다."
"그 기집애한테 넘어가지 말아요."
"애잔한 눈동자라면, 나만큼 질린 사람도 없을 거다."
까페에 도착했더니, 녀석과 여학생은 마주 앉아 있다가 얼른 녀석이 여학생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우리 자리를 확보해줬다. 승현이와 앉아서, 승현이에게 뭘 먹을 지 묻고는 곧바로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서 승현이에게 찬물인지 따뜻한 물인지를 물어 물을 떠다주자, 여자의 눈이 나를 따라 계속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내게 호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 진짜 승현이랑 사귀시는 건 아니시죠?"
"아니. 만나기로 했다."
"미진이 때문에 그러세요?"
"사람을 새로 만나는데, 전 여자친구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좋아야 만나는 거지.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냐?"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여기는 국문과에요. 12학번이고요."
"그러세요. 그럼 너랑 동갑이겠다. 09학번 이경민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정옥에요."
"남승현입니다. 장환이랑 동기에요."
"그런데, 본이 어떻게 되세요?"
"왜요? 선배."
"혹시 옥자 돌림인가 해서. 내 동생도 항렬이 옥자거든."
"연안 이씨에요."
"어, 저랑 같으시네요."
"저희 오빠도 경준이에요. 경자 항렬이에요."
"봐,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케케묵은 사람처럼 무슨 그런 걸 따져요?"
"몰랐냐. 내가 케케묵은 사람인 거. 원래 남자는 좀 묵어야 좋은 거야."
승현이와 나의 빠른 대화에 장환이와 정옥씨는 끼어들 틈을 보지 못했고, 진동벨이 울려서 커피를 받아와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속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삼십 분쯤 함께 차를 마셨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장환이네 차까지 계산을 하고 나오다가 승현이에게 욕을 잠깐 먹고, 자전거로 승현이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화가 와서 번호를 확인했더니, 김진수였다. 받지 않을까 하다가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전화를 받으시네요."
"미진이 일이라면, 더 이상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난 이제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미진이랑 결별을 하려고 하니까."
"왜요? 새로 사귄 그 남승현이라는 여자 때문인가요?"
"응. 그래. 그러니까 이제는 나한테 더 이상 전화를 하지 마. 알겠어?"
"어떻게 하죠. 세상 일이 당신 뜻대로 되면 참 좋을 텐데. 그 바보같은 여자가 당신을 잊지 못해서, 나를 버리고 당신께 달려갔거든요. 원래 헌 여자였고, 나한테 와서 잠깐 놀다 간 정도니까 당신이 다시 받으세요. 기분이야 좀 더럽겠지만, 설마 나보다 더 더럽겠어요."
"알았어. 미진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너랑 나랑은 관계가 없는 거다. 알겠지?"
"웃을 수 있어 좋겠어요. 난 지금 똥물을 뒤집어 쓴 심정인데, 내 여자를 이제 당신에게 빼앗긴 셈이니, 당신 여자를 내가 뺐어도 할 말은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게 공평하잖아요. 이경민씨."
"넌 왜 니가 비참해지는 방향으로 살려고 하는 거냐? 아버지 때문에 그러는거야?"
"아버지? 혹시, 이진명이도...하아.. 그랬군요. 이거 똥물 정도가 아니었어요. 이경민씨. 웃을 수 있을 때, 나를 그렇게 비웃어놓는 게 좋겠어요. 하하. 하하. 이거 대단하시네요."
미친 놈의 주절을 들어주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 집으로 왔더니, 원룸의 계단 앞에 너무 울어서 마스카라가 엉망이 된 미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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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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