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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1:13 1,284회 0건
여자의 일생 - 1부 -



경상도의 끝자락,

예로부터 싸리나무가 많다 하여 싸릿골이라고 지어진 이 마을은

언뜻보면 강원도의 절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할 만큼 아름답고 수려하다.

애간장을 끊을 듯이 산새소리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과 더불어

마을 어귀를 지나는 수정처럼 맑은 계곡의 물소리에 조화를 이루며 지지귄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다 보면

몇천, 아니 몇만년이 지나면서 돌이 깎이어 패인 자그마한 소가 하나 있는데

이 소는 예로부터 선녀들이 목욕을 하던 곳이라 하여 모두들 선녀탕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때는 1960년대 7월 즈음,

그 해 여름은 여느 해 보다 더 더운 것 같다.

한낮의 태양은 무성한 잡초마저 녹여버릴 듯이 이글거리고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들은 폭염으로 인해 꼼지락거리기 조차 귀찮아한다.

선녀탕 옆,둥글넓적한 바위에는 몇 해의 세월이 지났는지 짐작하지도 못할 정도의

낡은 소쿠리가 주인을 잃은 채 당그라니 올려져 있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금방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소쿠리 안에는

푸성귀같은 나물 한 웅큼이 내리쬐는 햇볕에 말라 비틀어져 가고

그 옆에는 아이들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계절과는 전혀 상관 없을 듯한 때 묻은 빨간 고리땡 바지며 땀에 절여 뉘리끼리한 난닝구를 비롯해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아이들의 꾀죄죄한 옷들이 이 마을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같다.

겨우 허리까지 오는 작은 소,

목이 찢어지라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물든 아이들의 벌거벗은 몸들은 지칠 줄을 모른다.



아침 나절,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뒹굴거리던 말순은

에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툴툴거리면서 소쿠리를 끼고 나오긴 했지만

나물 한 웅큼 겨우 뜯어 놓고 개울가에서 노닥거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어

작은 고사리 손은 이미 힘을 잃었고 너덜거리는 검정고무신은 계곡을 향한다.

언제 왔는지 벌써 선녀탕에는 순자와 점순이가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말순은 찌들어 뉘리끼리 해진 난닝구를 훌렁 벗어 어깨너머로 집어 던지더니

이어서 겨울 내내 입었던 빨간 고리땡 바지까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훌렁 까 내린다.

그리고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되어버리자 곧바로 차가운 계곡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이제 세명의 여자아이들은 한데 어울려 물속을 들락거린다.


"허푸으~추석날 서울 갔던 우리 언니 온다꼬 카드라~ 내 선물 마이 사가지고 올끼라..."

파리리 떨리는 파란 입술이 말해주듯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던 순자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자랑삼아 떠 벌리자

말순은 괜시리 심사가 뒤 틀리는지 입을 삐죽 거리는 것이 몹시 부러운 표정이다.

물속에 머리를 담궜다가 물밖에 나오니 바가지 모양이 되어버린 머리에서 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말순은 손바닥으로 짜증스럽게 얼굴을 쓱쓱 문질러 대며 밖으로 나와 버린다.

말순은 달구어진 바위가 뜨거운지 엉덩이를 요리조리 뒤틀며 쪼그려 앉았다가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번지자 몸을 부르르 하며 크게 떨었다.

"순애가 집 나갔을때 느그 아부지가 들어 오믄 쥑인다꼬 카던데?"

말순은 심술사납게 자기 보다가 네살이나 많은 순자의 이름을 그대로 불러 버린다.

"아이다~ 그 때는 그랬지만도 인제는 괘않타 카드라~ 우린 언니 돈 마이 벌었다꼬 편지 왔데이~"

자랑이 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운 순자는 남의 속도 모르고

기어코 말순의 뒤를 따라 나오며 자랑삼아 종알거린다.

아직 물 속에는 이들 보다 두 살 어린 점순이가 혼자 쪼그려 앉아있다.

무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수상쩍다 했더니

똥그래진 눈깔로 먼산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필경 오줌을 내 갈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무라는 이 없고 이상하다며 특별하게 쳐다보는 놈 없다.

"순자야~ 증말이가? 으메이~ 좋겠다이~ 그라믄 꽈자도 사 올끼네? 나도 쪼매 주그래이..."

오른 뺨 아래쪽에 왕버짐이 커다랗게 난 점순이는

몸이 식어져 추운지 불룩해진 배 위를 두 팔로 비벼대며 물 속에서 나오더니

언제가 될지 모르나 혹시라도 얻어 먹을까 하는 욕심으로

신이나서 떠들어 대는 순자 앞으로 가 배실 배실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이구~~망할년의 지지바~ 니가 그지라?? 나는 그런거 거저 줘도 안 먹는데이~"

약이 오른 말순은 애꿎은 점순이에게 대신 화풀이를 해 댄다.

“그래도 나는 먹을께다... 꽈자가 얼매나 맛있는데...우 히 히~”

점순은 말순을 힐끗 보며 약을 올리듯이 혀를 낼름거린다.

“이 씨팔년이..뒤질라꼬...이 싸가지 없는 년..근데 니는 왜 우리한테 언니라꼬 안카노?”

말순은 그런 점순이가 몹시 거슬렸던지 욕지꺼리를 해대며 쏘아붙이자

점순이는 밤톨만한 시커먼 점이 박힌 엉덩이만 벅벅 긁어대다가

애꿎은 자갈돌을 두어개 집어 물 속에 던져 넣는다.

감정도 없고 아무 의미없는 전쟁으로 이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알고있다.

아무리 미워도 다시 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오지중에 오지인 이 마을에는 집이라 해 봐야 겨우 여섯채가 전부며

같이 놀만한 계집애들이라고는 눈을닦고 봐도 네명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네명 중에서도 한 년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만약 혼자 삐치기라도 한다면 그 아이는 그 날로 부터 외톨이가 되기 때문이다.


순자와 동갑인 말순은 올해 열 두살로 1남 3녀중 장녀이며

위로는 작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오빠가 하나있고

그 아래로 여섯살과 네 살난 여동생들이 있다.

물론 웬만한 집 아이들 같았으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홉살 되던 해,

집에서 시오리나 떨어진 소재지의 국민학교에 입학까지 했으나

어린나이에 먼길 다니기도 힘든데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화전민 애비를 둔 탓에 2학년 올라가면서

그해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조차 어렵다는 핑계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려운 살림에 이들이 먹는 것이라고 해봐야 하루 두끼가 고작이지만

그것도 아침에만 쌀 한톨 보이지 않는 꽁당보리밥이 전부요

해 그름 할때 먹어 치우는 저녁이야 말로 보리쌀이 둥둥 떠 다니는 나물죽인지라

아이들의 몰골이란 얼굴에 개버짐이 안피면 그나마 다행이고

열두살이 다 되도록 가슴이 나오기는 커녕 갈비뼈가 다 들어 날 정도다.


놀다가 허기가 질라치면 계곡 가장자리 깨끗한 곳을 찾아 침을 뱉아

그 침이 흩어지면 먹는 물이라고 벌컥 벌컥 마시며 잠시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아이들,

모두가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굶주렸기 때문이 이들에게는 부끄러움도 사치일 뿐이다.

오줌이 마려우면 점순이처럼 그냥 물속에 앉은 채 싸 버리고

똥이라도 마려우면 훌렁 벗은 몸이기에 저만치 떨어져서 내 갈기면 그만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소 주변에는 말라가는 똥냄새가 풍겨왔고

그 쿵큼한 냄새는 장마가 와서 휩쓸어 간 후에야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어~ 조오기 저 사람은 누구로? 말수이 니 조 사람 아나?"

점순이가 화가 난 말순이의 마음을 누구러뜨리려고 손가락으로 저쪽 끝을 가리키자

바로 이들의 시선은 모두 점순이가 가리킨 한 곳으로 집중이 되어 버린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양복을 팔에 걸친 채 걸어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워낙 사람이 찾지 않는 마을이라서 낯선 사람, 새로운 얼굴만 봐도 이들은 무척 반갑다.

"나는 모르것는디~ 순자야~ 니는 아나?"

"아이다. 난도 몰르는 사람 같데이~ 쩌업~ 우리집에 오는 사람이믄 좋것다..."

"으응~ 지지바~ 니는 무신 욕심이 그래 많노? .............. 에이~ 난 목깐이나 할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말순은 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닌 것 같자

순자와 점순이를 물로 데려가기 위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들어간다.

"말순아이~ 난도 갈끼다~ 우 히 히~ "

점순이는 말순이의 화가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말순의 뒤를 따르자

혼자 남은 순자 역시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선다.

달구어진 바위에 앉았던 이들의 엉덩이는 빨갛게 된 채 오돌도돌한 바위 자욱이 선명하다.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점순이는 물에 들어가자 말자 또 쪼그려 앉는다.

"으이구~ 점수이~ 니 또 오줌 쌀라꼬 그래제? 이그 완저이~ 샘보지 아이라? 키 키 킥!!"

"아이다..내 샘보지 아니다..... 내는 밤에 잘때도 오줌을 한번도 안 눈데이~ "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이들은 삐치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이들은 마냥 즐겁다.

짜증을 냈던 일도 욕을했던 일도 벌써 이들에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닥치는데로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떠들어대며 난리 굿판을 벌이던 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은.

떠드는 사이 아까 멀리서 본 낯선 사람이 물가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른살이 되었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낯선 남자의 얼굴은 무척 인자하게 보이자

세명의 아이들은 하던 동작을 멈춘 채 그를 보고 같이 소리없이 웃어 주었다.

"늬들은 이동네 사니?"

서울 말이다.

서울 말은 몇년전 학교에서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투박한 사투리에 묻혀 살던 아이들은 낯선 남자의 서울 말씨에 흠뻑 빠져들었다.

"야~우리 셋이 다 요게 살아요~"

순자가 얼른 대답해 버리자 말순은 말 할 기회를 놓친 것이 무척 아쉽다.




- 다음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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