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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06 2,228회 0건




텔레비전을 켰다. 조용하고 어둡던 방에 금세 웅성웅성 활기가 돌아서, 그제야 석준은 이집이 정말 자신의 집같이 여겨졌다. 빨리 푹신한 소파에 머리를 묻고 나른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둘렀던 가방을 탁자 한 켠에 던져 놓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리모컨부터 찾기 시작했다. 이놈의 리모컨은 또 어디로 갔나. 언제나 이놈의 젠장할 리모컨이 문제였다. 이상하게 언제나 필요할 때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그것을 찾으려고 소파 틈의 구석구석을 후비는 동안 점차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석준은 포기하지 않고 있을 만한 곳을 차근차근 뒤져 나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리모컨 없이 텔레비전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석준에게 그것은 단순히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텔레비전을 지배할 것이냐, 아니면 텔레비전이 그를 지배할 것이냐의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리모컨 없이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이를테면 무기 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비굴하게 끌려 다니다가 결국 처분만 바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리 작지 않은 리모컨이 이상하게도 눈에 잘 띄지 않을 때마다, 석준은 신경증과도 같은 안달 속에서 집을 온통 휘적여 놓기가 일쑤였다.

다행히 오늘 그는 비교적 빨리 탁자 밑에 쌓인 신문지 사이에서 리모컨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왜 신문지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탁자위에 신문지를 펼쳐 놓고 읽으면서 텔레비전을 봤었던 것을 그는 기억해 냈다. 아마 출근하기 위해 서두를 때 리모컨이 신문지 사이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함께 둘둘 말아 탁자 밑에 던져 놓았던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결국 리모컨을 손 안에 쥐게 되어 한껏 만족스러워진 그는 텔레비전 앞에 놓인 소파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뒤척이며 최대한 편한 하게 자세를 잡았다. 모든 게 제대로 갖추어 졌다는 흡족함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러나 정작 텔레비전을 켜고 난 뒤에는, 석준은 마치 텔레비전 시청이 참을 수 없이 지루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 억지로 보고 있는 사람처럼 시큰둥하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분명 석준은 텔레비전 시청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쓰다가 잠들기 직전에서야 전원을 끄곤 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다만 한 번에 한 가지 프로를 지속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채널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면서 짤막짤막하게 끊어 보고 있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것을 ‘시청’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그도 가끔 영화나 드라마 같은 프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기도 했다. (반면 뉴스나 토크쇼는 끝까지 채널을 고정시키고 버티기가 퍽이나 힘이 들었다.)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돼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조차도 좀이 쑤시는 조급한 느낌과 뒤처진다는 불안감에 쫓겨야만 했기 때문에, 그는 어느새 이것이 빨리 끝나서 마음껏 채널을 바꾸게 되기를 고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보고 싶던 영화 시청조차 반갑기는 하지만 한편 번거롭기도 한 일이었으며, 결국 이리저리 끌리는 욕구와 번민은 그를 더 긴장시키고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석준은 오히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릴 때 나타나는 번쩍이면서 불규칙하게 뒤바뀌는 화면과 소리의 나열 자체에서 무척이나 안정감을 느꼈다. 끊임없이 바뀌는 화면은 제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수한 퍼즐 조각들과 같아서 보는 이에게 방관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거리에서 조각들의 가지각색의 무늬에 무심히, 게으르게 도취되면 그걸로 충분했다.

결국 그는 철저히 방관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방관’은 힘없는 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 있는 자의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힘에 도취된 자의 것이라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그에게 리모컨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석준은 리모컨이 실제로는 텔레비전보다도 더욱 위대하고 혁명적인 발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리모컨은 좀 더 근본적이고 은밀한 지배욕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이 - 지배당할 것이냐, 지배 할 것이냐. 만약 리모컨이 없었다면 석준은 직접 텔레비전 앞에 쪼그리고 다가가 채널을 바꾸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참고 끝까지 보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한 일이지만 - 단순한 육체적 수고와 일상의 불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그에게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작은 리모컨을 손에 쥐는 순간 모든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어 버린다. 석준은 더 이상 수모를 겪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힘의 절대성은 너무나 철저해서 그는 텔레비전을 온전히 독점한 채 한없이 방관할 수조차 있게 된다. 리모컨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서 그렇게 뻔뻔하고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때로 죄의식까지 느껴질 정도의 과도한 게으름이 그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결정되는 절대적 통제력의 흡족함 속에서 비로소 절정을 이루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한 개의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 밖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리모컨에 대한 도취감을 제외 하고나면, 텔레비전에 향한 그의 애착 자체는 그리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오히려 정당하고 평범한 축에 속할 만 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은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인양 가장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종종 그러한 행동을 지나치게 밀어 붙임으로서 일부러 사소한 우스꽝스러움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의 이름의 성을 잘못 말한다거나, 최근에 가장 유명한 시트콤의 제목을 모르는 척 한다거나, 한 유명한 가수가 어느 광고에 나왔었는지를 헷갈려 하는 따위의 것들이었다. 석준은 굳이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마치 모든 것에, 심지어 텔레비전에게 까지도 무심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는 그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한바탕 웃음을 끌어내는 데 그쳤을 뿐 미미한 인정도 받아내지 못했는데도 그는 그러한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그런 인상을 주려고 하는 지에 대해서 그는 스스로도 주목해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 괴짜처럼 굴므로서 주목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저 사소한 거짓말이 주는 쾌감과 승리감 때문이었을까.

피곤한데다가 끊임없이 앞뒤로 단절되는 시간의 몽롱함에 점점 마취되면서 석준은 멍청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몸은 이미 잠들었는데 정신만은 깨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혹은 그의 시간은 이미 멈추고 텔레비전 안에서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그가 막 돌린 다큐멘터리 채널에서는 자살한 영화배우 장국영에 대한 특집물이 방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배우 중 한명이었던 그가 왜 건물에서 투신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아나운서는 필요 이상의 의혹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죽는 다는 것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딱히 죽음에 대한 거창한 철학적 감상에 젖어 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죽음은 그리 그의 관심을 끄는 주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이제껏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진심으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진지하게 절망해 본 적 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누구처럼 건물에서 뛰어내려야 할 결정적인 이유 같은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텔레비전이 던져준 소재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흐른 것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그의 나른함에 약간 진지한 향을 더해 주었기 때문에 실상 그리 불쾌한 주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죽는 다는 것은 생각만큼 거창한 일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는 엄지손톱 끝을 움직여 다큐멘터리에서 음악방송으로 채널을 바꾸며 생각했다.

[나른하게, 조용히]........[천천히 멀어지지만].........[아무 미련도 없고, 별 거부감 같은 것도 없게 당연하다는 듯이].......[피곤할 때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천천히 누울 때].........[물에 떨어진 휴지 조각이 뭉근히 풀어져 가는 것은]........[어쩌면 놀랍게도 거의 만족스러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그런데 구태여 뛰어내릴 필요가 있을까.].......[애써 죽으려 자잘한 계획을 준비하고, 고통을 참아내려면].........[그러나 번거롭게 결심하고 이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그저 늘어지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다행히 텔레비전이야 죽을 때까지 나올 테고.]

석준은 채널을 바꿀 때마다 토막토막 끊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요점이 뭔지,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본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별로 주목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느릿느릿, 한 문장씩 떠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일련의 사고는 그의 머리를 명쾌하게 해주기보다는 더욱 흐리멍텅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홈쇼핑 프로의 믹서기 광고를 보기 위해 멈추어야만 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화장품 광고인 줄 알고 채널을 멈추었다. 화면이 꽤나 오랫동안 여자 모델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화장품 광고에서는 맨 얼굴의 여자가 화장하고 나서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비교해서 보여주곤 했는데, 그는 그것을 퍽이나 재미있게 눈여겨보곤 했다. 그러나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짙게 화장을 한 지금의 화면 속의 여자는 반짝이는 하늘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옅은 분홍색 믹서를 이리저리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상당히 매력적인 여자였고, 또한 매력적인 믹서기였다. 특히 그 커다란 믹서기 속에 통째로 넣은 양파, 사과, 파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초록색의 걸쭉한 액체가 되는 것은 꽤나 볼만한 장면이었다. 그녀가 그 걸쭉한 액체를 투명한 유리컵에 가득히 쏟아낼 때, 그녀의 매끈한 손톱에 발라진 하늘색 매니큐어가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석준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는 컵 속의 축축한 초록색 액체가 그 예쁜 손가락으로 만져주기를 (가령 얼마나 잘 갈렸는지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든지)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초록색 컵을 버려둔 채 믹서기가 얼마나 간편히 씻기는지 보여주기 위해 싱크대 앞으로 걸어와 버렸다. 믹서기가 얼마나 간단하게 씻기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는 채널을 돌렸다.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기독교 채널로, 기독교 채널에서 요리 채널로, 그리고 만화 채널로......어느새 채널은 끝까지 한 바퀴를 다 돌아 1번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일종의 성취감과 허탈감을 느끼면서 석준은 마치 근육을 쭉 피려는 것처럼 어깨를 한번 기우뚱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다시 수많은 채널의 출발선상에 섰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금 편하게 자리를 잡기 위해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텔레비전에 대여섯 개의 채널만이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채널을 돌린다는 것이 - 가능하기는 해도 - 별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100개에 가까운 채널이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히 돌려 보는 데만 해도 20분은 족히 걸렸다. 잠시 몇 군대에서 기웃거리고 보기라도 하면 두세 시간쯤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죽을 때 까지 오로지 텔레비전 화면만 봐야 한다고 해도 별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겠다고 석준은 생각했다.

마감뉴스가 끝났을 때 쯤 그는 어깨와 팔목에서 - 특히 리모컨을 들고 있는 오른 팔 쪽에서 - 묵직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몇 발자국 옆에 놓인 침대를 힐끗 쳐다보면서 알맞게 딱딱한 매트리스의 탄력 있는 감촉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선 그는 자신이 지금 정말 졸린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에는 그것조차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나가떨어질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충분히 피곤해질 때 까지 좀 더 텔레비전을 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컴컴한 침대 속에 멀뚱하니 누워 내일 있을 일들을 짚어보거나, 다시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석준은 마음껏 하품을 하면서 느릿느릿 주식에서 음식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인테리어 채널로 옮겨갔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그리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도 없었고 이제 슬슬 정말로 졸음이 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석준은 막상 텔레비전을 끌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이나 보고 있던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서는 나름 데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게다가 끝없이 돌고 도는 채널의 연속 속에서 멈출 곳을 찾는 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쯤 되면 텔레비전을 더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텔레비전을 끌 기회를 잡기 위해서 계속 채널을 돌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준이 인테리어에서 뉴스로, 그리도 다시 영화로 채널을 돌렸을 때, 거기에서는 한 쌍의 남녀가 막 서로의 옷을 벗기고 있는 참이었다. 짙은 암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와 밝은 금발의 남자는 큰 입 때문인지 묘하게 닮아 보였다. 갑자기 여자의 등 뒤에서 휘어 감아오는 남자의 길쭉하고 뻣뻣한 손이 여자의 가슴을 허겁지겁 문지르자 기대 이상으로 큰 여자의 유방이 브래지어 밖으로 덜렁이며 튀어 나왔다. 그 주렁거리는 가슴을 남자의 단단하고 마른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움켜잡는 것을 보면서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남자의 길면서도 투박한 손가락의 둔탁한 선과 움틀 거리는 손등의 핏줄들이 오히려 애써 정성껏 클로즈업한 두부 같은 여자의 가슴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석준은 자신의 두 허벅지 사이에 올라와 있던 자신의 왼손을 붉은 입을 한껏 벌린 여자의 젖혀진 얼굴에 겹쳐지도록 들어 보았다. 무언가를 그러쥐듯이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연결되는 가느다란 뼈와 그 뼈만큼이나 굵은 핏줄들이 섬세하면서도 팽팽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지금 막 화면에서 들어난, 자잘한 근육이 적당히 퍼져있는 꿈틀거리는 남자의 등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자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남자의 어깨 위에서 뒤엉키는가 싶더니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남자의 탄력 있는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가 잔뜩 굽은 그녀의 손가락에는 밝은 오렌지색 메뉴키어가 짙게 발라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연두색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바지 자크를 내리고 그 안으로 왼손을 넣었다. 남자의 황금색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에 젖어 그의 곧은 목 위에서 아름답게 흔들리고, 어깨의 탄탄한 근육들은 짙은 노란 빛을 내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석준은 나머지 오른손으로 리모컨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가로 5cm, 세로 16cm, 두께 4cm의 리모컨은 익숙한 느낌으로 그의 축축해진 손을 꽉 채우고 있었다. 딱딱하면서도 맨들맨들한 리모컨의 플라스틱 표면과 두둘두둘한 고무 버튼들을 쓰다듬으면서 그는 마치 목이 마른 사람처럼 여러 번 침을 빨아 삼키곤 했다. 이제 화면속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석준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날개 짓하는 듯 한 소리가 그의 방안 가득 어지럽게 날리고 있다고 느끼면서 석준은 소파 등받이에 땀이 밴 이마를 문질러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갈색머리 여자의 것인지, 금발 남자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모를 신음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남녀는 햇빛이 비치는 식탁에 나란히 마주 앉아 서로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면서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석준 으로서는 계속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 끝 하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녹초가 되었고, 바삭바삭하고 어두운 이불 속으로 빨리 기어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땀에 젖어 축축해진 리모컨을 옷에 한번 쓱 문지르고는 텔레비전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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