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삽입면허-32부-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왔지만, 소라와의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기찬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포만감마저 느끼고 있었으니, 그것은 어쩌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돈이라는 관계, 그 관계를 깨 버리는 파격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그나저나 이제 소라가 완전히 알아 버렸으니...... 노량진 집을 빨리 비워 둬야 하는데...... 그냥 세를 줬다고 둘러댈까? 아니면, 연경이가 살던 집으로 모두 이사를 시켜 버려?”
용산으로 피의자를 만나러 가는 중에도 기찬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네, 사, 사장님. 저, 저...... 김 비서입니다.”
“아! 그래, 무슨 일이에요?”
운전 중에 김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뭔지 모를 일이지만, 다급한 목소리가 불안감을 전해준다.
“네, 저...... 영진에서 클레임이 들어왔습니다. 이, 이걸 어쩌지요?”
“클레임이요? 이런...... 어느 현장이 그렇답니까?”
“수원 현장 중에 한 군데입니다. 다행히 거기는 규모가 작은 아파트라서 전량교체를 하더라도 물량수급은 문제없지만, 그렇게 되면 일정이 촉박해져서......”
“음...... 그래요?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까, 우리에게 하자가 있었다면 최선을 다 해서 막아가야죠. 나도 곧 출발하겠지만, 김 비서도 한 번 건너가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현장감독도 만나보고, 무엇보다 감리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잘 풀어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다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소공동 사무실에서는 매일 눈 먼 돈이 쏟아져 나오고는 있었지만, 결국 그 사무실은 머지않아 폐쇄를 해야 할 것이고, 이제 그 생명력을 마감할 날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방배동에 비밀요정을 추진 중에 있지만, 그것은 소공동 사무실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비밀스런 일이었고, 결국 사회적으로 오픈할 수 있는 주력사업은 가구공장이 될 것인데 가구공장이 흔들려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나마 규모가 작은 현장이라고 하니 서둘러서 수습을 해야 할 일이었다.
“아! 이제 오셨군요. 말씀하신 김 명희는 저 쪽 보호실에 따로 대기시켜 두고 있습니다.”
“네, 말씀 드린 대로 그 여자는 저희 군 수사에 정보제공을 하기로 돼 있으니까...... 게다가 그 사건에서 사실상 피해자이기도 하고...... 조서는 그렇게 적당히 꾸며서 김 명희는 훈방이나, 정 어려우면 간단한 벌금정도로 떨어질 수 있게 조치를 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하하, 네. 잘 알았습니다. 사건을 넘겨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렇게 해야지요.”
김명희. 유라를 통해서 알게 된 결혼 사기사건에 연루된 여자였다. 여자를 구명해 달라는 유라의 부탁도 부탁이었거니와 그 일로 인해서 소라를 구해 낼 수 있었고, 자신과의 인연으로 이어갈 수 있었으니 기찬은 그런 저런 이유로 여자를 빼내줄 모양이었다. 결혼 정보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여자는 그 일당들이 모두 잡혀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보호실에서 떨고 있었다.
하고 있는 일만큼이나 외관 또한 화려하게 보여야 할 테니 온통 명품으로 꾸며진 듯 다양한 액세서리와 가방 등이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이 시간, 이 장소에서만은 그것이 돋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서는 기찬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그냥 앉아요.”
“네, 네......”
“김 명희 씨?......”
“네, 네......”
“장유라 씨 알지요? 이번 사기에 투입시켰던 일당 중에......”
“네...... 잘못했습니다. 제발......”
“아, 아...... 알고 있어요. 유라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아이고, 유라에게 전후 사정도 모두 들었어요. 음...... 그래, 그 아이의 부탁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김 명희 씨를 이 사건에서 특별히 빼돌려 주겠지만, 다시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용서 없습니다. 다른 일당들은 이번에 모두 넘어가고 말 겁니다.”
“아유, 네...... 고맙습니다. 형사님......”
냉큼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명희를 보니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수원 현장의 일이 급하게 돌아가니 길게 끌 일도 아니어서 마무리를 지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김 명희 씨를 협박하던 녀석들도 이번에 모두 잡아들일 거니까 앞으로는 걱정할 것 없이 본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이번에 유라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니까 다시는 유라를 그런 일에 끌어들일 생각하지 말고......”
“네, 네...... 알았습니다.”
“한 번만 더 유라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다면 그 때는 김 명희 씨도 공갈협박으로 잡아넣을 겁니다. 알았어요?”
“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앞으로는 유라에게 연락하지 않겠어요. 믿어 주세요.”
“좋습니다. 자,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갑시다.”
유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도록 여자에게 거듭 당부를 해 두고 보호실을 나선다. 부동산 사장의 마누라였던, 애경을 처음 만날 무렵에 이런 상황을 접했더라면 그것을 빌미로 한 재산 뜯어내기 위해 암수를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이젠 나름의 사업도 굴리는 처지에 돈은 물론 여자도 그리 아쉽지 않았으니 실크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앞서가는 명희와는 그렇게 헤어질 뿐이었다.
아직도 소라와의 진전에 대한 감흥이 채 식지 않았으니 그도 그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유일하게 사업다운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가구공장에 클레임이 걸려있는 상태였으니, 바쁜 마음에 명희를 어찌 해 볼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응, 어쩐 일이야? 지금 어딘데......”
윤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네, 남편이 서류를 준비해서 가구점으로 가지고 왔어요.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거기에 두라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기찬 씨가 빨리 방을 뺄 수 있도록 하라고 저한테 채근을 하는데......”
“허헛 참, 더러운 놈...... 물에 빠진 놈 구해 주니까...... 알았어. 내일이라도 빼 줄 테니까, 그렇게 전해.”
“죄송해요.”
“유정이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하여튼 알았어. 나중에 보자고......”
“네......”
온종일 장거리를 운행해 왔다 갔다 했으니 수원에 도착할 즈음엔 피로가 몰려온다. 워낙 소라와 여관에서 나온 시각이 늦었으니 하루 일과의 시작도 늦을 수밖에 없었고, 이젠 벌써 출출한 시간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현장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후 여섯 시 이전에 가야 할 일이니 서둘러 건축현장으로 들어선다.
“이게 뭐야?......”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돌아 본 건축현장은 가구 제조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건축과정에서 발생한 하자로 보였으니 관리상의 문제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해코지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그 흠집의 원인을 두고 시비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것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흙을 먹여서 다시 칠을 할 수 있겠나?”
“편평한 곳은 그렇게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거......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무늬가 있는 곳도 한 군데씩 건드려 둔 탓에 전량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칠도 잘못하면 차이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구가 들어갈 자리마다 미장공사도 전부 새로 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거 혹시 미장하는 팀에서 공기 늘여가지고 돈 더 받으려고 장난치는 거 아냐?”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하여튼 이제 야간 경비를 강화시키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나, 이것 참...... 알았어요. 어쨌든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를 보다 신경 써야 되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례 으슥한 야간의 건축현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불량스런 아이들이나 노숙자들도 간혹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런저런 이유로 술 취한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여기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찾은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니, 모처럼 수원까지 내려와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갑을 뒤적여 찾아 낸 것은 일전에 소공동 사무실로부터 채권을 넘겨받은 미용실 여자에게 받아 둔 각서였다.
“음...... 그래, 박계영...... 중사 부인은 최규린이었지.”
서로간의 관계가 얽매여 자기가 사귀던 여자를 후배의 결혼 상대자로 소개한 듯, 그런 느낌을 받았던 희한한 커플들이었다.
“그래, 어차피 돈은 박계영이 준다고 했었으니까......”
마침 미용실이 있는 매탄동은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서울로 올라가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이었지만, 기찬은 그리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상가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 미용실, 박계영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손님도 없었는지 최규린만이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머리 자르시게요?”
최규린은 당연히 기찬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손님인 줄로만 알고 맞아들인다.
“네...... 뭐, 대충 다듬어주십시오.”
자신은 이미 상대를 파악하고 있으나, 그 상대가 자신을 모를 때에 오는 야릇한 흥분 같은 것도 머리칼을 만져오는 그 손길을 따라 전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고 있는 여자의 은밀한 속살을 보고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머리칼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두 손으로 헝클어가며 물기를 적시던 규린은 전화가 걸려오자 잠시 일손을 멈춘다.
“손님, 잠시만이요.”
“아! 네...... 뭐, 그러십시오.”
“음, 여보세요?”
규린의 전화 받는 목소리는 평소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듯, 다소 애교 섞인 콧소리로 들리기도 했고, 기찬은 처음 규린과 돈 문제로 통화했을 때, 악을 쓰며 대들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응, 계영이니? 어딘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박계영이었다. 멀리 외부에 나가 있었는지, 규린도 그 행선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으응, 오늘따라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 지금 한 분 계신데......”
또 다시 한참이나 계영의 말이 이어지는 듯 규린은 듣고만 있었다.
“아! 그러면 이 손님 가시는 대로 내가 문 닫고 얼른 갈 테니까, 너도 빨리 와야 돼. 알았지?”
둘은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기찬의 머리를 다듬는 손길이 빨라지고, 어차피 기찬도 계영을 만날 작정이었으니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가 볼까 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어스름 저녁 빛이 깔리기 시작하는 수원의 거리, 그리 빚을 지고 살면서도 규린은 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빚이 많은 것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생각도 잠깐, 규린이 계영을 만나기로 한 곳은 미용실과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였고, 연립주택으로 보이는 곳, 그 중 지하의 한 집에 열쇠를 꽂아 들어서고 있었다. 반 지하의 구조로 되어 있는 듯 규린이 들어서자 붉은 벽돌 구조의 건물 밑, 쑥 들어가 있는 작은 창들에는 연속으로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으흠, 저기가 부엌일 테고, 그 다음 불이 켜진 곳이 방이란 뜻이로군. 그나저나 밖에서 만나는 게 아니고...... 여기는 누구 집이지?”
오래 된 것처럼 보이는 낡은 연립주택, 이제 해가 거의 넘어간 듯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어, 푸르스름한 기운까지 거리를 덮고 있었다.
차 안에서 골목 끝을 바라보고 있던 기찬의 시야에 한 대의 차가 들어오더니, 이내 그 차에선 계영이 내려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호기심이 일은 기찬은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 담 밑으로 숨어든다. 비가 내릴 경우 낙숫물이 창으로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서 창틀을 띄운 만큼의 틈새로 몸을 감출 수가 있었다. 부엌의 창틀은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는지 실내가 일부 보이기도 했지만, 반대 쪽의 창틀은 닫혀 있었다.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저 창문을 열어야 할 터였으니,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귀를 기울여 본다.
“음...... 확실히 이 방이군......”
안에서는 두런두런 인기척이 느껴지고, 기찬은 살며시 힘을 주어 창문을 밀어본다.
“까짓 거...... 눈치 차리면 그냥 도망가고 말지......”
밝은 실내에서 바깥 어두운 공간에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는 없는 일이니, 그것을 믿고 조금씩 창문에 힘을 주자 어렵지 않게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역시 쪽창은 지하실의 환기를 위해 만들어 둔 것인지, 방의 가장 윗부분에 달려 있었고, 방안의 사람들이 일부러 시선을 주기 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었다.
“으응?...... 저, 저거...... 뭐야?”
놀랍게도 규린과 계영은 마주 끌어안고 입술을 빨아 대고 있었다. 서로의 손으로는 젖가슴을 주물러 대며 바쁘게 거추장스런 것들을 벗어 내리고 있었으니 더 이상 둘의 관계를 짚어 나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기찬은 다시 차로 돌아와 담배를 피워 문다.
“그럼 뭐지? 돈 문제로 연락했을 때, 분명히 규린은 모르는 것으로 해 달라고 했는데...... 그건 위장술이었나? 그럼 박 계영의 남편과 최 규린이 붙어먹고, 그 최 규린이 다시 박 계영과 저런 관계면...... 그 후배라는 중사만 환장할 노릇이었구먼...... 그래, 그래서 그 중사한테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남편이 시키는 대로 최 규린의 돈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한 거였어. 어쩌면 박 계영의 남편도 저 두 여자가 저런 사이라는 것은 모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순간, 여지없이 기찬의 잔꾀가 돌아가고 있었다.
“옳지!”
차 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수사용으로 쓰기 위해 마련했던 고화질의 카메라였지만, 그 일을 한 실장에게 맡기고 나서부터는 그저 교통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차에 싣고 다녔을 뿐이었으니, 오늘에야 비로소 제 몫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하악...... 아아......”
난잡하게 서로의 몸을 빨아대던 두 여자는 서서히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는 것인지,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하고, 이윽고 계영은 허리춤에 사내의 양물을 흉내 낸 가죽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허헛! 점점......”
갈수록 가관이었다. 어쩌면 방을 하나 빼야 빚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영의 말은 이 방을 뺀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뿐인 공간은 기찬의 짐작으로 계영과 규린만의 비밀공간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아악......”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 두 여자는 체력이 다 한 듯, 묘한 자세로 너부러져 있었고, 기찬도 카메라를 접어 넣고 있었다.
“딩동...... 딩동......”
현관은 닫혀 있었으나, 기찬은 과감히 벨을 누르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걸린 뒤,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다급하게 의복을 갖춘 뒤 밖을 확인했을 것이었고, 기찬을 보고는 매우 놀란 듯, 실내가 다시 부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려고 했던 것인지 다시 인기척은 잦아들고 있었고, 끝내 문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여보세요?”
기찬은 계영의 전화로 즉시 전화를 걸었고,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계영은 전화를 안 받을 이유가 없었으니, 전화기 너머의 계영에게 기찬의 말이 이어진다.
“저...... 기억하시죠? 소공동 문제로 찾아뵈었던 강 수사관입니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문 안 열어 주실 겁니까? 제가 누굽니까? 수사관 아닙니까?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다 알고 왔는데 이러실 겁니까?”
“아...... 왜, 왜 그러세요? 돈은 아직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아 있는데요......”
“오호라! 그럼 돈이 마련되셨다는 뜻으로 알고 그냥 가도 되겠군요? 이젠 제게 채무각서를 써 주셨으니 최규린 씨와의 문제가 아니라 박계영 씨와의 문제가 된 겁니다. 아직도 여기에 계신 것을 보면 이 집이 처분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그럼 기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돈이 기일까지 마련이 안 된다면 결국 군부대로도 조치를......”
“자, 잠깐만이요.”
기찬이 최규린의 남편이 있는 군부대를 들먹이며 정곡을 찔러오자 계영은 당황하고 있었고, 잠시 후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이부자리는 정리되어 있었고, 여자들만의 체향이 방안 가득히 기찬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기찬이 들어서자 한 곁에 물러나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규린은 기찬이 방금 미용실에 다녀 간 손님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아보고는 몹시 당황한다.
“어, 어머!...... 어머머!”
아무 말 없이 기찬은 카메라를 꺼내 뷰파인더를 열어서 내용을 보여주고, 두 여자는 경악하고 있었다.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기찬에게 넘어 온 셈, 뜸은 들였으니 밥이 익기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문을 열어 줄 때에는 이미 규린에게도 기찬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테니 두 여자가 기찬에게 대항할 방법은 전혀 없는 셈, 이제는 돈 문제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배우자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을 또 하나 기찬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휴우......”
계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상황이 곤궁하면 할수록 기찬은 유리한 지위를 갖게 되는 법, 이제 반격을 함에 있어 그 악마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었다.
“후후후...... 그랬단 말이야?”
의외로 이야기는 쉽게 풀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서로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기찬은 낮은 소리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계영과 규린, 두 사람은 진작 의논이 있었던 듯, 규린의 육탄공세로 기찬을 상대해 나가기로 합의를 이루었던 모양이었다. 짐작대로 계영의 남편은 두 여자를 모두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을 알게 된 계영은 규린을 만나 울고 불며 따지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여고 동창생이었던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이기도 했으니 서로 측은한 생각도 들었는지 그 과정이 두 사람 간에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고, 그 일 이후로는 서로의 남편들 모르게 이런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어. 나는 두 사람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고 싶어. 내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각자의 남편에게 알릴 것은 물론......”
“......”
“아! 물론 계영 씨의 남편이야 자기도 지은 죄가 있으니까 아무 말 못하고, 어쩌면 세 사람이 쓰리 섬을 즐기자고 제안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규린 씨의 남편은 당장이라도 실탄 채워서 세 사람을 전부 쏴 죽여 버리고 싶을 거야...... 나도 군대 밥 먹는 사람이어서 그런 심정은 비교적 소상히 아는 편이지.”
“자, 잘못했어요. 그래서 전부 사실 대로 말씀을 드리잖아요.”
“후후, 그래, 좋아...... 그럼 완전히 백기를 든 건가? 그렇다면 이제 내 의견을...... 아! 잠깐......”
마침 걸려오는 전화에 기찬은 대화를 멈춰야만 했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기찬이 쥐고 있는 셈이니 그저 눈빛만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세요?”
“네...... 저, 유정이에요.”
“유정...... 이?...... 유정이가 누구지?”
조 사장의 딸 조 유정이었다. 기찬에게 처음 항문섹스를 경험하게 해 줬던 계집애였고, 지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지영과 조 사장의 연분으로 인해 결국 알게 됐던 계집애였다. 기찬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모른 척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 참...... 왜 그래요? 오빠...... 저 유정이라니까요.”
“오빠? 하하하, 네가 웬일이냐? 나한테 오빠라고 다 부르고......”
“아이 씨...... 저것 봐. 다 알면서......”
“그래, 무슨 일인데......”
“저 좀 봐요. 저 지금 카이로 앞에 와 있어요.”
“뭐?...... 카이로?...... 네가 거기는 어떻게 알고......”
“아빠 때문에 여기에 왔다가 우연히 윤호를 만났어요. 여기서 일한다면서요? 오빠한테는 절대 자기를 만났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절대 윤호가 나를 부른 건 아니니까, 오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윤호가 오빠 되게 무서워하더라......”
“너희 아빠?......”
“네...... 하여튼 만나서 애기하면 안 돼요? 전화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야, 내가 지금 수원에 있는데 지금 올라간다고 해도 한참 걸릴 텐데, 너 어디서 기다리려고......”
“뭐, 어디 찜질방이라도 들어가 있을 테니까, 오빠가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 주면 되잖아요.”
“허...... 그것 참, 좋다. 알았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조 사장이 카이로에 와 있다면 아마 유정은 자기 아빠를 미행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기찬의 시야에 제 발로 뛰어드는 유정이 도대체 무슨 사연을 들고 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기찬도 조 사장을 설득해서 애경이 기거할 아파트를 구해 주기로 마음먹고 있던 터라 어쩌면 자연스레 기회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기찬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던 계영과 규린은 그 덕에 자신들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는 예감을 한 것인지 쑥스러운 듯 기찬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결 풀어진 분위기로 기찬이 말을 이어간다.
“좋아, 두 사람도 각자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을 테니까, 오늘은 더 붙잡아 놓지 않겠어.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나하고 함께 풀어나갈 사연이 많아. 내가 필요할 때 부를 테니까......”
“어머! 그럼 이 집은 그냥 둬도 되는 거죠?”
두 여자는 냉큼 기찬의 좌우로 달려들어 교태를 부리고, 당장이라도 옷을 벗을 기세였다.
“호호, 그래요. 우리 둘 다 자기 맘대로 하세요. 자기 여자 할 테니까......”
“이것들이...... 전화통화를 다 듣고선...... 자, 다음에 다시 올 테니까 그런 줄이나 알아. 마침 사업상 수원에 자주 오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 집에 내가 잠깐씩 기거하게 될지 모르니까 열쇠를 하나 넘겨주고......”
“그럼 분명히 말해 줘요. 돈 이제 안 받을 거죠? 자기도 여기 이용할 거면서 그 돈 오백만 원, 꼭 받아야 돼요?”
“하하하...... 알았다. 돈은 안 받을 테니까 그 대신 다음에 올 때는 서비스 잘 해야 한다.”
이젠 합의가 이루어졌고, 벼랑 끝에서 회복한 뒤에 몰려오는 감흥은 더욱 감미로웠을 테니 당장에 달려들어 기찬에게 키스세례를 날린다. 서로의 불륜이 곧 증인이고, 계약서인 셈이니 비정상적인 관계일수록 그 결속력은 강한 모양이었다. 집 밖으로 나서는 기찬을 배웅하는 모습들이 마치 십 년 속정을 나누고 살던 부부가 출장으로 헤어지는 것처럼 절절하기만 했으니 가히 웃기는 일이었다.
기찬이 카이로 앞에 도착한 시간은 이제 한창 영업을 할 시각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곧바로 유정에게 전화를 넣는다. 찜질방에 갈 일은 없었으니 여관으로 가야 한다면 마음 편한 삼각지로 갈 모양이었다.
“그래, 도대체 어쩐 일이냐?”
차로 올라타 조수석에 앉은 유정은 찜질방에 있다가 나와서인지 발그레한 뺨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우리 아빠...... 벌써 며칠째 여기를 출입했던 모양이에요.”
“그래? 왜 그랬을까? 여기 오시면 나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었는데......”
“어머! 그랬어요? 그런데 왜......”
“내 연락처를 잃어버렸나? 그랬으니 연락이 없었겠지......”
하긴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종사자들을 안다면서 공술이나 바라는 부류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면 보통의 경우, 관리자들을 찾는 손님들에게 아가씨들은 그저 모른다고 할 뿐이었다.
“음...... 그럼 들어가서 한 번 만나봐야 되겠는데......”
“오빠! 지금 가면 나는 어떻게 해?...... 함께 만날 수도 없고, 아빠도 술 드셨을 텐데, 나중에 만나지 않고......”
“하하...... 그것도 그렇군. 그래...... 그러니까 너는 요즘 아빠를 보고 걱정스러워서 따라나섰다는 거야?”
“네, 며칠 째 술만 드시는 것 같고...... 나는 그 이유도 모르니까......”
자기 아빠와 애경의 사연을 유정이 알 리 없는 일이었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을 터였다. 조 사장 입장을 떠올려본다면, 기찬을 만나러 왔지만, 볼 수는 없었으니 며칠 씩 술이라도 팔아줘서 비로소 단골손님 대접을 받게 되면 기찬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기찬이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일이었으니,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일이었다.
“후후, 사실은 너희 아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한 사람 있어...... 그런데 그 여자는 자식들이 반대를 한다니까 그것을 알고, 너희들한테 험한 꼴 당할까봐 요즘 너희 아빠를 안 만나주는 모양이야. 나도 잘 아는 사람인데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 아마 그 문제인 모양인데......”
“어머! 또......”
기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비스듬히 유정을 바라본다.
“너희들은 그게 글러먹었어. 효자 열이 있어도, 악처 한 사람만 못할 수도 있는 거야. 이제 연로한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진 않고, 자기들 체면이나 걱정하고, 유산이나 지키려고 들이대니, 내가 너희 아버지 입장이라면 너희들한테 십 원짜리 하나도 안 물려줄 거다.”
“......”
“너, 이 계집애...... 너라도 내 말을 들어야 나중에 후회 안 할 거야. 모르면 몰라도 너희 언니나 오빠들은 그 많은 유산 중에 단 돈 한 푼도 못 받을 테니까......그건 내가 장담하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유정은 어느새 기찬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아버지가 기찬의 그늘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아버지를 장악한 그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언니나 오빠들은 이미 물 건너갔고, 너라도 이제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여동생 노릇을 할 것 같으면 도와주고......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도와줄 거야. 하기에 따라서는 너희 아버지 유산이 모두 네게로 갈 수도 있는 일이야.”
“나, 오빠 말 잘 들을게요. 네...... 뭐든지 오빠가 하라는 대로......”
“너...... 내 졸병 할 거야?”
“어머! 푸훗! 네......”
“하하, 그래, 그럼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졸병이 하나 생겼으니까...... 음...... 오빠가 방을 하나 비워야 하는데 우선 유정이가 이삿짐부터 날라줘야 되겠는걸......”
“어머머! 그렇다고 여자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씨......”
기찬의 장난에 유정은 입술을 삐죽이고,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을 짓게 된다. 정말 기찬은 유정을 데리고 흑석동으로 갈 생각이었는지 그 방면으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흑석동의 차윤정은 이미 보라의 가구점에 일을 다니고 있었으니, 보라가 바로 자신의 집에서 기찬과 첫정을 나눈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카로 알고 있는 계집아이마저 데려와 동침을 한 적이 있었으니, 기찬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이미 손발을 들 정도로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남편조차 돌아보지 않는 자신의 친정에 대한 배려는 그런 것조차도 그의 인간미의 총화로 보일 정도로 매료되고 있었으니, 그 이상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어?...... 오빠, 여기는 우리 친구가 살던 집인데......”
“뭐야?”
“응, 내 친구...... 은서라고 있거든...... 지금은 유학 가 있는데...... 아마 듣기로는 걔네 집도 모두 이민을 갔다고 하는 것 같던데......”
“아! 그랬구나. 아깝다.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으응? 뭐를...... 그게 무슨 소리에요?”
새로운 사실을 윤정을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물 건너가 버린 일이었다. 진작 알 수 있었다면 윤정을 미국으로 접근시켜서 전세금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그 돈은 금주의 남편에게 건네기로 한 일이었으니 그저 그렇게 넘어갈 뿐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어머! 어서 오세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윤정이 문을 열어주고, 망설이던 유정도 현관으로 몸을 들여,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에 방안으로 몸을 감춘다.
“흥! 이번에는 누구예요?”
“후후, 내 여동생......”
“미쳤어. 정말...... 형수에, 조카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친동생이란 말이에요?”
“쿡쿡쿡......”
밤늦은 시간이었으니 윤정의 남편은 이미 잠이 들은 모양이었고, 목소리를 죽여 묻고 있는 윤정에게 기찬은 장난으로 대꾸를 해 버린다.
“커피나 한 잔 하고 싶은데...... 방에서 같이 한 잔 하지. 이제 내일이면 이사를 나갈 건데......”
이제 이사를 나간다는 말에 윤정은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한다.
“그, 그래요. 그런데 제가 들어가도 괜찮아요?”
아마 윤정이 물은 말은 커피를 타 가지고 들어갈 때까지, 민망하게 옷을 벗거나 하지는 말라는 당부였을 것이었다. 기찬은 곧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고 있었고, 오래지않아 윤정이 커피를 타서 들고 온다. 커피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앉은 세 사람은 묘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기찬은 조금 전 수원에서 느꼈던 기분을 여기서 풀어 볼 생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정아, 인사해라. 남편 모르게 오빠하고 은밀하게 가까이 사귀는 언니야. 윤정이도 인사 해. 내 동생이야.”
“아! 네...... 언니,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아유, 기찬 씨...... 이, 이렇게 인사를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하하, 뭐가 어때서 그래? 서로 다 알고 친하게 지내면 좋은 일이지.”
기찬은 자리에 앉은 채 상의를 벗고 있었으니, 윤정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 손을 뻗어 기찬을 만류한다.
“어, 어머! 기찬 씨......”
“괜찮아. 내 동생은 다 이해한다니까...... 유정아, 그렇지? 너는 오빠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따라주잖아.”
“네, 괜찮아요. 언니...... 그냥 두세요. 우리 오빠는 아무도 못 말려요.”
유정은 기찬이 마치 자신을 친 여동생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에 대항해 밉보일 이유가 없었으니, 유정도 그 장난을 그대로 따르려는 모양이었다.
“윤정 씨, 정 내키지 않으면 잠깐만 있다가 가든지......”
“방에 남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동정을 살펴보고, 깊이 잠들었으면 잠깐만 있다가 가란 말이야. 이제 오늘로 이 집도 마지막인데...... 내 동생은 다 이해한다니까......”
“네, 그러세요. 언니...... 얼른 가서 살펴보고 오세요.”
이제 유정은 자신의 유산상속에 관한 일 때문에라도 기찬을 홀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한 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듯이 기찬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아유 차암...... 그, 그럼 잠깐만...... 일단 보고 와서 조금만 앉아있다 갈게요.”
윤정은 벌써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현기증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주방 의자에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하고는 안방의 동정을 살핀다. 남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방안이 떠나가도록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왔지만, 소라와의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기찬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포만감마저 느끼고 있었으니, 그것은 어쩌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돈이라는 관계, 그 관계를 깨 버리는 파격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그나저나 이제 소라가 완전히 알아 버렸으니...... 노량진 집을 빨리 비워 둬야 하는데...... 그냥 세를 줬다고 둘러댈까? 아니면, 연경이가 살던 집으로 모두 이사를 시켜 버려?”
용산으로 피의자를 만나러 가는 중에도 기찬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네, 사, 사장님. 저, 저...... 김 비서입니다.”
“아! 그래, 무슨 일이에요?”
운전 중에 김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뭔지 모를 일이지만, 다급한 목소리가 불안감을 전해준다.
“네, 저...... 영진에서 클레임이 들어왔습니다. 이, 이걸 어쩌지요?”
“클레임이요? 이런...... 어느 현장이 그렇답니까?”
“수원 현장 중에 한 군데입니다. 다행히 거기는 규모가 작은 아파트라서 전량교체를 하더라도 물량수급은 문제없지만, 그렇게 되면 일정이 촉박해져서......”
“음...... 그래요?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까, 우리에게 하자가 있었다면 최선을 다 해서 막아가야죠. 나도 곧 출발하겠지만, 김 비서도 한 번 건너가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현장감독도 만나보고, 무엇보다 감리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잘 풀어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다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소공동 사무실에서는 매일 눈 먼 돈이 쏟아져 나오고는 있었지만, 결국 그 사무실은 머지않아 폐쇄를 해야 할 것이고, 이제 그 생명력을 마감할 날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방배동에 비밀요정을 추진 중에 있지만, 그것은 소공동 사무실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비밀스런 일이었고, 결국 사회적으로 오픈할 수 있는 주력사업은 가구공장이 될 것인데 가구공장이 흔들려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나마 규모가 작은 현장이라고 하니 서둘러서 수습을 해야 할 일이었다.
“아! 이제 오셨군요. 말씀하신 김 명희는 저 쪽 보호실에 따로 대기시켜 두고 있습니다.”
“네, 말씀 드린 대로 그 여자는 저희 군 수사에 정보제공을 하기로 돼 있으니까...... 게다가 그 사건에서 사실상 피해자이기도 하고...... 조서는 그렇게 적당히 꾸며서 김 명희는 훈방이나, 정 어려우면 간단한 벌금정도로 떨어질 수 있게 조치를 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하하, 네. 잘 알았습니다. 사건을 넘겨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렇게 해야지요.”
김명희. 유라를 통해서 알게 된 결혼 사기사건에 연루된 여자였다. 여자를 구명해 달라는 유라의 부탁도 부탁이었거니와 그 일로 인해서 소라를 구해 낼 수 있었고, 자신과의 인연으로 이어갈 수 있었으니 기찬은 그런 저런 이유로 여자를 빼내줄 모양이었다. 결혼 정보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여자는 그 일당들이 모두 잡혀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보호실에서 떨고 있었다.
하고 있는 일만큼이나 외관 또한 화려하게 보여야 할 테니 온통 명품으로 꾸며진 듯 다양한 액세서리와 가방 등이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이 시간, 이 장소에서만은 그것이 돋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서는 기찬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그냥 앉아요.”
“네, 네......”
“김 명희 씨?......”
“네, 네......”
“장유라 씨 알지요? 이번 사기에 투입시켰던 일당 중에......”
“네...... 잘못했습니다. 제발......”
“아, 아...... 알고 있어요. 유라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아이고, 유라에게 전후 사정도 모두 들었어요. 음...... 그래, 그 아이의 부탁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김 명희 씨를 이 사건에서 특별히 빼돌려 주겠지만, 다시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용서 없습니다. 다른 일당들은 이번에 모두 넘어가고 말 겁니다.”
“아유, 네...... 고맙습니다. 형사님......”
냉큼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명희를 보니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수원 현장의 일이 급하게 돌아가니 길게 끌 일도 아니어서 마무리를 지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김 명희 씨를 협박하던 녀석들도 이번에 모두 잡아들일 거니까 앞으로는 걱정할 것 없이 본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이번에 유라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니까 다시는 유라를 그런 일에 끌어들일 생각하지 말고......”
“네, 네...... 알았습니다.”
“한 번만 더 유라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다면 그 때는 김 명희 씨도 공갈협박으로 잡아넣을 겁니다. 알았어요?”
“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앞으로는 유라에게 연락하지 않겠어요. 믿어 주세요.”
“좋습니다. 자,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갑시다.”
유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도록 여자에게 거듭 당부를 해 두고 보호실을 나선다. 부동산 사장의 마누라였던, 애경을 처음 만날 무렵에 이런 상황을 접했더라면 그것을 빌미로 한 재산 뜯어내기 위해 암수를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이젠 나름의 사업도 굴리는 처지에 돈은 물론 여자도 그리 아쉽지 않았으니 실크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앞서가는 명희와는 그렇게 헤어질 뿐이었다.
아직도 소라와의 진전에 대한 감흥이 채 식지 않았으니 그도 그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유일하게 사업다운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가구공장에 클레임이 걸려있는 상태였으니, 바쁜 마음에 명희를 어찌 해 볼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응, 어쩐 일이야? 지금 어딘데......”
윤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네, 남편이 서류를 준비해서 가구점으로 가지고 왔어요.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거기에 두라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기찬 씨가 빨리 방을 뺄 수 있도록 하라고 저한테 채근을 하는데......”
“허헛 참, 더러운 놈...... 물에 빠진 놈 구해 주니까...... 알았어. 내일이라도 빼 줄 테니까, 그렇게 전해.”
“죄송해요.”
“유정이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하여튼 알았어. 나중에 보자고......”
“네......”
온종일 장거리를 운행해 왔다 갔다 했으니 수원에 도착할 즈음엔 피로가 몰려온다. 워낙 소라와 여관에서 나온 시각이 늦었으니 하루 일과의 시작도 늦을 수밖에 없었고, 이젠 벌써 출출한 시간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현장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후 여섯 시 이전에 가야 할 일이니 서둘러 건축현장으로 들어선다.
“이게 뭐야?......”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돌아 본 건축현장은 가구 제조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건축과정에서 발생한 하자로 보였으니 관리상의 문제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해코지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그 흠집의 원인을 두고 시비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것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흙을 먹여서 다시 칠을 할 수 있겠나?”
“편평한 곳은 그렇게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거......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무늬가 있는 곳도 한 군데씩 건드려 둔 탓에 전량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칠도 잘못하면 차이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구가 들어갈 자리마다 미장공사도 전부 새로 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거 혹시 미장하는 팀에서 공기 늘여가지고 돈 더 받으려고 장난치는 거 아냐?”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하여튼 이제 야간 경비를 강화시키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나, 이것 참...... 알았어요. 어쨌든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를 보다 신경 써야 되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례 으슥한 야간의 건축현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불량스런 아이들이나 노숙자들도 간혹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런저런 이유로 술 취한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여기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찾은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니, 모처럼 수원까지 내려와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갑을 뒤적여 찾아 낸 것은 일전에 소공동 사무실로부터 채권을 넘겨받은 미용실 여자에게 받아 둔 각서였다.
“음...... 그래, 박계영...... 중사 부인은 최규린이었지.”
서로간의 관계가 얽매여 자기가 사귀던 여자를 후배의 결혼 상대자로 소개한 듯, 그런 느낌을 받았던 희한한 커플들이었다.
“그래, 어차피 돈은 박계영이 준다고 했었으니까......”
마침 미용실이 있는 매탄동은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서울로 올라가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이었지만, 기찬은 그리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상가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 미용실, 박계영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손님도 없었는지 최규린만이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머리 자르시게요?”
최규린은 당연히 기찬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손님인 줄로만 알고 맞아들인다.
“네...... 뭐, 대충 다듬어주십시오.”
자신은 이미 상대를 파악하고 있으나, 그 상대가 자신을 모를 때에 오는 야릇한 흥분 같은 것도 머리칼을 만져오는 그 손길을 따라 전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고 있는 여자의 은밀한 속살을 보고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머리칼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두 손으로 헝클어가며 물기를 적시던 규린은 전화가 걸려오자 잠시 일손을 멈춘다.
“손님, 잠시만이요.”
“아! 네...... 뭐, 그러십시오.”
“음, 여보세요?”
규린의 전화 받는 목소리는 평소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듯, 다소 애교 섞인 콧소리로 들리기도 했고, 기찬은 처음 규린과 돈 문제로 통화했을 때, 악을 쓰며 대들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응, 계영이니? 어딘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박계영이었다. 멀리 외부에 나가 있었는지, 규린도 그 행선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으응, 오늘따라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 지금 한 분 계신데......”
또 다시 한참이나 계영의 말이 이어지는 듯 규린은 듣고만 있었다.
“아! 그러면 이 손님 가시는 대로 내가 문 닫고 얼른 갈 테니까, 너도 빨리 와야 돼. 알았지?”
둘은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기찬의 머리를 다듬는 손길이 빨라지고, 어차피 기찬도 계영을 만날 작정이었으니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가 볼까 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어스름 저녁 빛이 깔리기 시작하는 수원의 거리, 그리 빚을 지고 살면서도 규린은 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빚이 많은 것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생각도 잠깐, 규린이 계영을 만나기로 한 곳은 미용실과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였고, 연립주택으로 보이는 곳, 그 중 지하의 한 집에 열쇠를 꽂아 들어서고 있었다. 반 지하의 구조로 되어 있는 듯 규린이 들어서자 붉은 벽돌 구조의 건물 밑, 쑥 들어가 있는 작은 창들에는 연속으로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으흠, 저기가 부엌일 테고, 그 다음 불이 켜진 곳이 방이란 뜻이로군. 그나저나 밖에서 만나는 게 아니고...... 여기는 누구 집이지?”
오래 된 것처럼 보이는 낡은 연립주택, 이제 해가 거의 넘어간 듯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어, 푸르스름한 기운까지 거리를 덮고 있었다.
차 안에서 골목 끝을 바라보고 있던 기찬의 시야에 한 대의 차가 들어오더니, 이내 그 차에선 계영이 내려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호기심이 일은 기찬은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 담 밑으로 숨어든다. 비가 내릴 경우 낙숫물이 창으로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서 창틀을 띄운 만큼의 틈새로 몸을 감출 수가 있었다. 부엌의 창틀은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는지 실내가 일부 보이기도 했지만, 반대 쪽의 창틀은 닫혀 있었다.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저 창문을 열어야 할 터였으니,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귀를 기울여 본다.
“음...... 확실히 이 방이군......”
안에서는 두런두런 인기척이 느껴지고, 기찬은 살며시 힘을 주어 창문을 밀어본다.
“까짓 거...... 눈치 차리면 그냥 도망가고 말지......”
밝은 실내에서 바깥 어두운 공간에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는 없는 일이니, 그것을 믿고 조금씩 창문에 힘을 주자 어렵지 않게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역시 쪽창은 지하실의 환기를 위해 만들어 둔 것인지, 방의 가장 윗부분에 달려 있었고, 방안의 사람들이 일부러 시선을 주기 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었다.
“으응?...... 저, 저거...... 뭐야?”
놀랍게도 규린과 계영은 마주 끌어안고 입술을 빨아 대고 있었다. 서로의 손으로는 젖가슴을 주물러 대며 바쁘게 거추장스런 것들을 벗어 내리고 있었으니 더 이상 둘의 관계를 짚어 나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기찬은 다시 차로 돌아와 담배를 피워 문다.
“그럼 뭐지? 돈 문제로 연락했을 때, 분명히 규린은 모르는 것으로 해 달라고 했는데...... 그건 위장술이었나? 그럼 박 계영의 남편과 최 규린이 붙어먹고, 그 최 규린이 다시 박 계영과 저런 관계면...... 그 후배라는 중사만 환장할 노릇이었구먼...... 그래, 그래서 그 중사한테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남편이 시키는 대로 최 규린의 돈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한 거였어. 어쩌면 박 계영의 남편도 저 두 여자가 저런 사이라는 것은 모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순간, 여지없이 기찬의 잔꾀가 돌아가고 있었다.
“옳지!”
차 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수사용으로 쓰기 위해 마련했던 고화질의 카메라였지만, 그 일을 한 실장에게 맡기고 나서부터는 그저 교통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차에 싣고 다녔을 뿐이었으니, 오늘에야 비로소 제 몫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하악...... 아아......”
난잡하게 서로의 몸을 빨아대던 두 여자는 서서히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는 것인지,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하고, 이윽고 계영은 허리춤에 사내의 양물을 흉내 낸 가죽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허헛! 점점......”
갈수록 가관이었다. 어쩌면 방을 하나 빼야 빚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영의 말은 이 방을 뺀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뿐인 공간은 기찬의 짐작으로 계영과 규린만의 비밀공간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아악......”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 두 여자는 체력이 다 한 듯, 묘한 자세로 너부러져 있었고, 기찬도 카메라를 접어 넣고 있었다.
“딩동...... 딩동......”
현관은 닫혀 있었으나, 기찬은 과감히 벨을 누르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걸린 뒤,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다급하게 의복을 갖춘 뒤 밖을 확인했을 것이었고, 기찬을 보고는 매우 놀란 듯, 실내가 다시 부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려고 했던 것인지 다시 인기척은 잦아들고 있었고, 끝내 문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여보세요?”
기찬은 계영의 전화로 즉시 전화를 걸었고,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계영은 전화를 안 받을 이유가 없었으니, 전화기 너머의 계영에게 기찬의 말이 이어진다.
“저...... 기억하시죠? 소공동 문제로 찾아뵈었던 강 수사관입니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문 안 열어 주실 겁니까? 제가 누굽니까? 수사관 아닙니까?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다 알고 왔는데 이러실 겁니까?”
“아...... 왜, 왜 그러세요? 돈은 아직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아 있는데요......”
“오호라! 그럼 돈이 마련되셨다는 뜻으로 알고 그냥 가도 되겠군요? 이젠 제게 채무각서를 써 주셨으니 최규린 씨와의 문제가 아니라 박계영 씨와의 문제가 된 겁니다. 아직도 여기에 계신 것을 보면 이 집이 처분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그럼 기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돈이 기일까지 마련이 안 된다면 결국 군부대로도 조치를......”
“자, 잠깐만이요.”
기찬이 최규린의 남편이 있는 군부대를 들먹이며 정곡을 찔러오자 계영은 당황하고 있었고, 잠시 후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이부자리는 정리되어 있었고, 여자들만의 체향이 방안 가득히 기찬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기찬이 들어서자 한 곁에 물러나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규린은 기찬이 방금 미용실에 다녀 간 손님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아보고는 몹시 당황한다.
“어, 어머!...... 어머머!”
아무 말 없이 기찬은 카메라를 꺼내 뷰파인더를 열어서 내용을 보여주고, 두 여자는 경악하고 있었다.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기찬에게 넘어 온 셈, 뜸은 들였으니 밥이 익기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문을 열어 줄 때에는 이미 규린에게도 기찬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테니 두 여자가 기찬에게 대항할 방법은 전혀 없는 셈, 이제는 돈 문제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배우자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을 또 하나 기찬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휴우......”
계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상황이 곤궁하면 할수록 기찬은 유리한 지위를 갖게 되는 법, 이제 반격을 함에 있어 그 악마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었다.
“후후후...... 그랬단 말이야?”
의외로 이야기는 쉽게 풀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서로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기찬은 낮은 소리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계영과 규린, 두 사람은 진작 의논이 있었던 듯, 규린의 육탄공세로 기찬을 상대해 나가기로 합의를 이루었던 모양이었다. 짐작대로 계영의 남편은 두 여자를 모두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을 알게 된 계영은 규린을 만나 울고 불며 따지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여고 동창생이었던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이기도 했으니 서로 측은한 생각도 들었는지 그 과정이 두 사람 간에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고, 그 일 이후로는 서로의 남편들 모르게 이런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어. 나는 두 사람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고 싶어. 내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각자의 남편에게 알릴 것은 물론......”
“......”
“아! 물론 계영 씨의 남편이야 자기도 지은 죄가 있으니까 아무 말 못하고, 어쩌면 세 사람이 쓰리 섬을 즐기자고 제안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규린 씨의 남편은 당장이라도 실탄 채워서 세 사람을 전부 쏴 죽여 버리고 싶을 거야...... 나도 군대 밥 먹는 사람이어서 그런 심정은 비교적 소상히 아는 편이지.”
“자, 잘못했어요. 그래서 전부 사실 대로 말씀을 드리잖아요.”
“후후, 그래, 좋아...... 그럼 완전히 백기를 든 건가? 그렇다면 이제 내 의견을...... 아! 잠깐......”
마침 걸려오는 전화에 기찬은 대화를 멈춰야만 했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기찬이 쥐고 있는 셈이니 그저 눈빛만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세요?”
“네...... 저, 유정이에요.”
“유정...... 이?...... 유정이가 누구지?”
조 사장의 딸 조 유정이었다. 기찬에게 처음 항문섹스를 경험하게 해 줬던 계집애였고, 지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지영과 조 사장의 연분으로 인해 결국 알게 됐던 계집애였다. 기찬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모른 척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 참...... 왜 그래요? 오빠...... 저 유정이라니까요.”
“오빠? 하하하, 네가 웬일이냐? 나한테 오빠라고 다 부르고......”
“아이 씨...... 저것 봐. 다 알면서......”
“그래, 무슨 일인데......”
“저 좀 봐요. 저 지금 카이로 앞에 와 있어요.”
“뭐?...... 카이로?...... 네가 거기는 어떻게 알고......”
“아빠 때문에 여기에 왔다가 우연히 윤호를 만났어요. 여기서 일한다면서요? 오빠한테는 절대 자기를 만났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절대 윤호가 나를 부른 건 아니니까, 오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윤호가 오빠 되게 무서워하더라......”
“너희 아빠?......”
“네...... 하여튼 만나서 애기하면 안 돼요? 전화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야, 내가 지금 수원에 있는데 지금 올라간다고 해도 한참 걸릴 텐데, 너 어디서 기다리려고......”
“뭐, 어디 찜질방이라도 들어가 있을 테니까, 오빠가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 주면 되잖아요.”
“허...... 그것 참, 좋다. 알았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조 사장이 카이로에 와 있다면 아마 유정은 자기 아빠를 미행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기찬의 시야에 제 발로 뛰어드는 유정이 도대체 무슨 사연을 들고 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기찬도 조 사장을 설득해서 애경이 기거할 아파트를 구해 주기로 마음먹고 있던 터라 어쩌면 자연스레 기회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기찬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던 계영과 규린은 그 덕에 자신들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는 예감을 한 것인지 쑥스러운 듯 기찬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결 풀어진 분위기로 기찬이 말을 이어간다.
“좋아, 두 사람도 각자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을 테니까, 오늘은 더 붙잡아 놓지 않겠어.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나하고 함께 풀어나갈 사연이 많아. 내가 필요할 때 부를 테니까......”
“어머! 그럼 이 집은 그냥 둬도 되는 거죠?”
두 여자는 냉큼 기찬의 좌우로 달려들어 교태를 부리고, 당장이라도 옷을 벗을 기세였다.
“호호, 그래요. 우리 둘 다 자기 맘대로 하세요. 자기 여자 할 테니까......”
“이것들이...... 전화통화를 다 듣고선...... 자, 다음에 다시 올 테니까 그런 줄이나 알아. 마침 사업상 수원에 자주 오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 집에 내가 잠깐씩 기거하게 될지 모르니까 열쇠를 하나 넘겨주고......”
“그럼 분명히 말해 줘요. 돈 이제 안 받을 거죠? 자기도 여기 이용할 거면서 그 돈 오백만 원, 꼭 받아야 돼요?”
“하하하...... 알았다. 돈은 안 받을 테니까 그 대신 다음에 올 때는 서비스 잘 해야 한다.”
이젠 합의가 이루어졌고, 벼랑 끝에서 회복한 뒤에 몰려오는 감흥은 더욱 감미로웠을 테니 당장에 달려들어 기찬에게 키스세례를 날린다. 서로의 불륜이 곧 증인이고, 계약서인 셈이니 비정상적인 관계일수록 그 결속력은 강한 모양이었다. 집 밖으로 나서는 기찬을 배웅하는 모습들이 마치 십 년 속정을 나누고 살던 부부가 출장으로 헤어지는 것처럼 절절하기만 했으니 가히 웃기는 일이었다.
기찬이 카이로 앞에 도착한 시간은 이제 한창 영업을 할 시각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곧바로 유정에게 전화를 넣는다. 찜질방에 갈 일은 없었으니 여관으로 가야 한다면 마음 편한 삼각지로 갈 모양이었다.
“그래, 도대체 어쩐 일이냐?”
차로 올라타 조수석에 앉은 유정은 찜질방에 있다가 나와서인지 발그레한 뺨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우리 아빠...... 벌써 며칠째 여기를 출입했던 모양이에요.”
“그래? 왜 그랬을까? 여기 오시면 나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었는데......”
“어머! 그랬어요? 그런데 왜......”
“내 연락처를 잃어버렸나? 그랬으니 연락이 없었겠지......”
하긴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종사자들을 안다면서 공술이나 바라는 부류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면 보통의 경우, 관리자들을 찾는 손님들에게 아가씨들은 그저 모른다고 할 뿐이었다.
“음...... 그럼 들어가서 한 번 만나봐야 되겠는데......”
“오빠! 지금 가면 나는 어떻게 해?...... 함께 만날 수도 없고, 아빠도 술 드셨을 텐데, 나중에 만나지 않고......”
“하하...... 그것도 그렇군. 그래...... 그러니까 너는 요즘 아빠를 보고 걱정스러워서 따라나섰다는 거야?”
“네, 며칠 째 술만 드시는 것 같고...... 나는 그 이유도 모르니까......”
자기 아빠와 애경의 사연을 유정이 알 리 없는 일이었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을 터였다. 조 사장 입장을 떠올려본다면, 기찬을 만나러 왔지만, 볼 수는 없었으니 며칠 씩 술이라도 팔아줘서 비로소 단골손님 대접을 받게 되면 기찬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기찬이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일이었으니,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일이었다.
“후후, 사실은 너희 아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한 사람 있어...... 그런데 그 여자는 자식들이 반대를 한다니까 그것을 알고, 너희들한테 험한 꼴 당할까봐 요즘 너희 아빠를 안 만나주는 모양이야. 나도 잘 아는 사람인데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 아마 그 문제인 모양인데......”
“어머! 또......”
기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비스듬히 유정을 바라본다.
“너희들은 그게 글러먹었어. 효자 열이 있어도, 악처 한 사람만 못할 수도 있는 거야. 이제 연로한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진 않고, 자기들 체면이나 걱정하고, 유산이나 지키려고 들이대니, 내가 너희 아버지 입장이라면 너희들한테 십 원짜리 하나도 안 물려줄 거다.”
“......”
“너, 이 계집애...... 너라도 내 말을 들어야 나중에 후회 안 할 거야. 모르면 몰라도 너희 언니나 오빠들은 그 많은 유산 중에 단 돈 한 푼도 못 받을 테니까......그건 내가 장담하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유정은 어느새 기찬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아버지가 기찬의 그늘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아버지를 장악한 그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언니나 오빠들은 이미 물 건너갔고, 너라도 이제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여동생 노릇을 할 것 같으면 도와주고......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도와줄 거야. 하기에 따라서는 너희 아버지 유산이 모두 네게로 갈 수도 있는 일이야.”
“나, 오빠 말 잘 들을게요. 네...... 뭐든지 오빠가 하라는 대로......”
“너...... 내 졸병 할 거야?”
“어머! 푸훗! 네......”
“하하, 그래, 그럼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졸병이 하나 생겼으니까...... 음...... 오빠가 방을 하나 비워야 하는데 우선 유정이가 이삿짐부터 날라줘야 되겠는걸......”
“어머머! 그렇다고 여자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씨......”
기찬의 장난에 유정은 입술을 삐죽이고,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을 짓게 된다. 정말 기찬은 유정을 데리고 흑석동으로 갈 생각이었는지 그 방면으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흑석동의 차윤정은 이미 보라의 가구점에 일을 다니고 있었으니, 보라가 바로 자신의 집에서 기찬과 첫정을 나눈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카로 알고 있는 계집아이마저 데려와 동침을 한 적이 있었으니, 기찬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이미 손발을 들 정도로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남편조차 돌아보지 않는 자신의 친정에 대한 배려는 그런 것조차도 그의 인간미의 총화로 보일 정도로 매료되고 있었으니, 그 이상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어?...... 오빠, 여기는 우리 친구가 살던 집인데......”
“뭐야?”
“응, 내 친구...... 은서라고 있거든...... 지금은 유학 가 있는데...... 아마 듣기로는 걔네 집도 모두 이민을 갔다고 하는 것 같던데......”
“아! 그랬구나. 아깝다.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으응? 뭐를...... 그게 무슨 소리에요?”
새로운 사실을 윤정을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물 건너가 버린 일이었다. 진작 알 수 있었다면 윤정을 미국으로 접근시켜서 전세금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그 돈은 금주의 남편에게 건네기로 한 일이었으니 그저 그렇게 넘어갈 뿐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어머! 어서 오세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윤정이 문을 열어주고, 망설이던 유정도 현관으로 몸을 들여,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에 방안으로 몸을 감춘다.
“흥! 이번에는 누구예요?”
“후후, 내 여동생......”
“미쳤어. 정말...... 형수에, 조카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친동생이란 말이에요?”
“쿡쿡쿡......”
밤늦은 시간이었으니 윤정의 남편은 이미 잠이 들은 모양이었고, 목소리를 죽여 묻고 있는 윤정에게 기찬은 장난으로 대꾸를 해 버린다.
“커피나 한 잔 하고 싶은데...... 방에서 같이 한 잔 하지. 이제 내일이면 이사를 나갈 건데......”
이제 이사를 나간다는 말에 윤정은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한다.
“그, 그래요. 그런데 제가 들어가도 괜찮아요?”
아마 윤정이 물은 말은 커피를 타 가지고 들어갈 때까지, 민망하게 옷을 벗거나 하지는 말라는 당부였을 것이었다. 기찬은 곧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고 있었고, 오래지않아 윤정이 커피를 타서 들고 온다. 커피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앉은 세 사람은 묘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기찬은 조금 전 수원에서 느꼈던 기분을 여기서 풀어 볼 생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정아, 인사해라. 남편 모르게 오빠하고 은밀하게 가까이 사귀는 언니야. 윤정이도 인사 해. 내 동생이야.”
“아! 네...... 언니,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아유, 기찬 씨...... 이, 이렇게 인사를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하하, 뭐가 어때서 그래? 서로 다 알고 친하게 지내면 좋은 일이지.”
기찬은 자리에 앉은 채 상의를 벗고 있었으니, 윤정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 손을 뻗어 기찬을 만류한다.
“어, 어머! 기찬 씨......”
“괜찮아. 내 동생은 다 이해한다니까...... 유정아, 그렇지? 너는 오빠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따라주잖아.”
“네, 괜찮아요. 언니...... 그냥 두세요. 우리 오빠는 아무도 못 말려요.”
유정은 기찬이 마치 자신을 친 여동생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에 대항해 밉보일 이유가 없었으니, 유정도 그 장난을 그대로 따르려는 모양이었다.
“윤정 씨, 정 내키지 않으면 잠깐만 있다가 가든지......”
“방에 남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동정을 살펴보고, 깊이 잠들었으면 잠깐만 있다가 가란 말이야. 이제 오늘로 이 집도 마지막인데...... 내 동생은 다 이해한다니까......”
“네, 그러세요. 언니...... 얼른 가서 살펴보고 오세요.”
이제 유정은 자신의 유산상속에 관한 일 때문에라도 기찬을 홀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한 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듯이 기찬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아유 차암...... 그, 그럼 잠깐만...... 일단 보고 와서 조금만 앉아있다 갈게요.”
윤정은 벌써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현기증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주방 의자에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하고는 안방의 동정을 살핀다. 남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방안이 떠나가도록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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